귀가해서 씻고 한숨 돌린 후에 책상머리에 앉으면 보통 10시 전후이다. 이때부터 다시 원고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할일들을 해야 하는 게 로쟈의 '이중생활'이다. 반나절의 시간은 더 주어져야 뭐든 제대로 할 듯싶은데, 사정은 여의치가 않아서 시늉하는 것만으로도 곯어떨어지기 일쑤다(이런 걸 '저질 체력'이라고 부르더만). 서재일은 그런 와중에 부리는 거드름이요 체면 유지다. 식후에 꼭 챙겨마시는 믹스 커피처럼, 건강에 별로 좋지는 않지만 로쟈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물론 중독성도 있는 것이고). 오늘의 페이퍼 거리로 고른 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 '서평문화'에 실린 한 서평이다.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를 다루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해넣는다(책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22611 참조). 사실 이 서평을 고른 건 오늘 루디네스코의 <광포한 시대의 철학>(영역판, 2008; 불어판, 2005)을 손에 넣은지라 '루디네스코'란 이름이 나름대로 의미있게 다가온 때문이기도 하다. 서평에 병기된 외국어는 글자가 깨져 있기에 대부분 삭제했다.   

서평문화(2009년 겨울) 정상과 도착 사이의 오랜 공모와 변전의 역사   

『프랑스 정신분석의 역사』전 2권, 제1권: 1885-1939, 제 2권: 1925-1985, Seuil, 1986와 라캉의 전기, 『자크 라캉, 한 인생의 스케치, 한 사유체계의 역사』Seuil, 1993; 국역본:『자크 라캉』, 양영란(*양녕자) 역, 새물결, 2000로 성가를 얻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분석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라캉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중심에 위치하려고 하며, 더 나아가 세계 사상가들의 관계에 균형적인 관점을 취하려 애쓴다.  

 

그래서 그는 라캉의 18번째 세미나(1971), 『동류의 것이 아닐 담론에 대해 』(Seuil, 2006)에 대한 서평(『르 몽드』 2008년 1월 18일)을 쓰면서 라캉이 “여기에서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적시함으로써 일군의 라캉주의자들을 술렁이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2007년에 낸 저서는 독자적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알린 또 하나의 성과이다. 그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로 되어 있는데, 원제를 직역하면 『우리 자신의 어두컴컴한 부분』(Albin Michel)이다. 그리고 ‘도착자들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즉 이 책은 도착증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살핀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파악한 그 역사의 일반적 성격은 인류의 '어두컴컴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보기에 두 개의 역사가 있다. 밝은 역사와 어두운 역사. 어두운 역사인 도착자들의 역사는 그 어둠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이해될 수 없고, 밝은 역사인 인류사에 비추어져 그 의미가 해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인류사는 어두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줄기를 정상인들의 역사로 만든다. 정상인들이 도착자들을 분별케 한다면, 도착자들 때문에 인류의 ‘정상성'이 존재한다. 그 둘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도착은 문자 그대로 도착이고, 그 정상인들은 정말 정상적인가? 때로 도착은 발생했다기보다는 발명되었을지도 모르며, 도착을 통해 정상을 유달리 강조하는 문명은 정상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도착 그 자체가 아니라 도착과 정상의 관계라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표점이다. 그리고 이 구도에 의해 ‘도착'이 정신분석적 의미로부터 문명사적 의미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도착'은 변태적 성행위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인간 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그 관계의 일반적 성격을 ‘어두컴컴한 부분'이라고 제목은 말하고 있는데, 그 규정은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킨다. 즉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비정상성이 그것이다. 어두컴컴하다는 성질이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다.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도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한편으론 자본축적의 경제에 맞서 탕진의 일반 경제학을 세운 바타이유의 『저주받은 몫』(Editions du Minuit, 1949; 국역본: 『저주의 몫』, 조한경 역, 문학동네, 2001)을 연상케 하고(책의 제목은 분명 바타이유로부터 암시를 얻은 게 틀림없다.), 다른 한편 성스러움과 폭력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힌 지라르의 작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루디네스코의 작업은 바타이유의 그것이 대항-실천적인 성격을 가진 데 비해 상관성을 유비하는 객관적 관찰의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지라르의 그것처럼 종말론적이지 않다.  

이 책의 궁극적인 관심은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보편적 성격이 아니며,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도 아니고, 심지어 그것의 원인이나 결과도 아니라,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인데, 그 과정은 예측불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요한 심화의 방향으로 가는가 하면, 돌연한 자기배반적 선회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그 과정은 순환적인 형식으로 회오리를 그리면서 전자電子의 이탈과도 같은 돌연변이의 계기를 통해 응용의 층위를 이동해가는 과정이며 그런 점에서 진화론적이다. 바로 이것이 제목이 말하지 않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책의 두 번째 표점에 해당한다.

그 변화는 다섯 차례의 단계를 거쳐서 오늘에 이른다. 중세에 도착은 정상성의 극단적인 추구 속에서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성스러움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비천함도 함께 또렷해진다. 그리고 비천함은 성스러움의 영원성, 혹은 그것을 더욱 성스럽게 하기 위한 방법적 타락으로 기능한다. ‘욥'의 고난 이후, 신비주의자들의 자기 학대, 그리고 제 몸에 온갖 피부병을 기른 성녀 리드비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러한 방법적 타락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타락이 본연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순수한 인간적 행위로서의 질 드 레의 엽기적 범죄 행각이 그것이다. 질 드 레의 도착을 세계는 거부하여 그를 처형했다가 9년 후 다시 거두어 "자백과 회개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로 탈바꿈시킨다. 이럼으로써 한 순간 위기에 처한 성스러움과 타락의 협력관계는 인공적으로 봉합되어 나가는 듯하지만, 그러나 봉합이 이루어진 순간은 동시에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된다.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이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진화해 가는 18세기에 자연법칙은 신의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자연에 속한 자(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사드가 묘사하고 권장한 도착적 행위들은 신의 가르침에 의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된 행위 외의 모든 것으로서, 후자를 대체할 새로운 법칙의 항목들로 제시된다. 이제 정상과 도착의 질서에 전도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몸을 경유함으로써 신에게 대항하였지만 인간의 몸을 빠져나감으로써 의미의 총체적인 부재로서, 일종의 과잉된 현존, 구역질나는 잉여가 된다.  

따라서 이 도착적 행위의 법칙화 시도는 실천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실패의 결과는 인류의 무대에 의미심장한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도 도착증의 공론화. 즉, “미치광이도 범죄자도 아니며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도 않은" 존재가 현실 한 복판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인정. 그럼으로써 사드적인 것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자신의 정화를 위해 배척해버린 모든 추악함의 집결지로 지목될 수도, 혹은 정반대로 그 문명이 억압한 어떤 다른 생의 가장 극적인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사드적인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모독으로서 존재하겠지만, 전자의 경우,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신의 질서를 흉내내는 가운데 발명한 방법적 타락으로서 기능할 터이고, 후자의 경우엔 마조히즘에 대해 들뢰즈가 엿보았던 것처럼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할 강력한 준거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아마도 저자가 보기엔 전자의 길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세 단계, 즉 19세기 부르주아의 성장, 20세기의 파시즘, 그리고 오늘날의 생명주권주의 biocratie(이는 개념적으로 푸코의 생명관리공학 biopolitique과 유사한 듯이 보인다)를 위한 다양한 시도 및 제도화는 인류의 현재적 진행을 이상화하는 한편, 도착적인 것을 현재의 상황에 규범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기능적 현상 혹은 대상들로 바꾸어, 이상적 사회의 자원들로 활용 재활용하는 작업의 진화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인류는 저 중세의 신 중심사회가 자동적으로 가동해 온 자기성화장치를 신의 몫으로부터 인간의 몫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였고, 그 성공의 길은 무한히 뻗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눈길이 찬탄 혹은 경악에만 바쳐져 있는 건 아니다. 도착적인 것의 공론화는 또 다른 효과를 갖는다. 즉 방금 살펴 본 과정이 정상과 도착을 구별하고, 도착적인 것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정상성 내에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기제의 내적 구조를 성찰하는 기회가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 성찰은 “암울한 사색가들"의 존재에 의해 지탱되는데, 이들은 도착을 활용하는 정상적 사회 자체가 실은 '증오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동되는 무서운 도착적인 사회임을 끊임없이 적발하고 경계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되풀이하는 경고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투명함과 감시를 예찬하고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소멸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다."(228쪽) 

그러니 인류사에서 정상과 도착이 항상 공모하고만 있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인류는 또한 그러한 공모를 괴롭게 고민하고 정상의 폭이 열리는 데 도착이 여하히 기여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이 부분은 루디네스코의 저작에서는 이론적으로 검토되고 있지 않지만, 예시적인 방식으로 다양히 제시되어 있다. 즉 도착은 정상성의 도구가 아니라, 그것의 생생한 가능태인 것이다.) 종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저서가 독자에게 최종적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자. 한마디로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프랑스어 독해 수준의 범용함은 일단 논외로 하자(어쨌든 간신히나마 읽을 수는 있게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우선 정신분석과 철학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번역자의 정보가 너무 가난해서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의 저자를 엘리자베트 드 퐁트네로 만들고 푸코를 그 책 서문을 써 준 사람으로 돌리는가 하면, 데리다를 “동물행동학자, 인지주의자, 행태주의자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게다가 해독이 까다로운 부분들은 빈번히 번역에서 제외하고, 아무도 그 까닭을 짐작 못할 번역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각주의 상당 부분을 누락하거나, 때론 본문에 포함시키기도 한 것은, 번역의 윤리를 새삼 되묻게 한다.  

원저에 없는 그림들을 삽입한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에 의해 용인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문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변태'라는 역어를 책 제목에 사용한 것이며, 장 제목을 제멋대로 의역하고, 원저에 없는 절들을 분할해 그럴 듯한 제목들을 달아 놓은 까닭은 또한 무엇인지? 원서가 가진 매력이 아니었더라면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원서와 문장 하나하나를 대조해가는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정과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09. 02. 04. 

P.S.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책은 구입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다. 번역본의 경우 보통 원서와 같이 읽는데(특히 철학서이나 이론서일 경우) <악의 쾌락>은 아직 영역본이 나오지 않았다(그럴 경우 대개는 독서를 미뤄둔다). 서평을 읽다 보니 나도 왜 제목에 '변태'란 말이 들어갔는지 의문이다. '도착'이란 말이 일반 독자들에게 생경하다고 판단했을까? 하지만 서평자가 지적하고 있는 자의적인 누락 따위야말로 '변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페이퍼의 제목은 그런 생각에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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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5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보니 정말 번역서의 실태가 - 특히 인문서의 경우 - 그다지 안 좋은가 보군요. 혹시 국내에 전문 번역비평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까?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그런 사이튼 저도 모르겠는데요.^^ 대신 관련학회가 두 곳이 있고 학회지도 나옵니다...

2009-02-06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9-02-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안봤는데 원본과 대조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참고로 이희원 박사의 <무감각은 범죄다>는 대단한 이론적 기획이고 용기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대상성 개념을 기반으로 라이히와 바타이유를 통해 인간의 성을 미학적 테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제 관심분야라 며칠이 걸려 정독했거든요. ^^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갖고는 있는 책인데, 아직 읽을 짬을 못내고 있어요.^^;

2009-02-05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9-02-0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중 다행"으로 이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네요..--v
그런데 서평을 읽어보니 내용이 참 흥미로운데 이런 좋은 책이 안좋은 번역이라니 안타까운일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광기와 도착 혹은 비이성과 이성의 구도속에서 펼쳐지는 현대프랑스사상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내용물을 가진 책인것 같은데 말이지요.

로쟈 2009-02-06 23:40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는 사실 고질적인 문제인데,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네요...
 

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9)를 다루고 있다. 역사서라고는 하나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과 맞물려서 '르포'처럼 읽히는 책이었다. 더불어, 우리 가까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파괴기계'를 눈여겨보도록 하는. 용산 참사는 그 징후가 아닐까. 섬뜩하고 섬뜩하다...  

  

한겨레21(09. 02. 09) 나치와 가자, 피해자는 가해자?

휴전 선언이 무색하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하늘만 뚫린 감옥’이라 불리는 가자지구에 이미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고, 폐허가 된 도시는 수천 명의 무고한 사상자를 내며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학살의 피해 당사자였던 유대인 국가가 똑같은 ‘학살’의 가해자로 나선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미 영국의 한 유대계 의원은 이스라엘의 가자침공을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과 이스라엘이 학살의 가해자로 등식화되는 것이다. 이 등식이 말해주는 것은 홀로코스트가 전적으로 히틀러만의, 혹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홀로코스트는 인류사에서 허다하게 자행된 대량학살(제노사이드)의 한 가지 사례다. 그렇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성찰이 도달해야 하는 지점은 그 역사적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어떤 보편성이어야 한다. 그것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수많은 연구서들의 지향점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보편성을 획득한 저작이 이미 오래전에 쓰였다는 사실. 최근에 출간된 라울 힐베르크(1926-2007)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펴냄)는 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다는 기념비적인 책이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홀로코스트 연구서”란 평판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잠시 유대계의 젊은 정치학도 힐베르크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1940년대 말 미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저명한 정치학자 프란츠 노이만을 만나 ‘독일정부론’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나치즘의 지배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 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하게 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 이론은 나중에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론에도 그대로 수용된다.  

‘나치의 유대인 파괴에서 독일 공무원의 역할’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힐베르크는 자신의 관심범위를 더 확장하여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한다. 정부(공무원)뿐만 아니라 나치당과 군대, 그리고 기업의 역할까지도 포괄해서 규명해보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그가 워싱턴에서 얻게 된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서들 가운데 소련 문제와 관련된 자료를 선별하는 게 그의 일이었는데, 그가 맡은 자료가 책꽂이로 무려 8km에 이르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를 최초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힐베르크가 이 분야의 ‘학장’이란 칭호까지 얻게 된 배경은 바로 이런 기록보관소 작업이었다. 그보다 더 많은 자료를 섭렵한 연구자가 없는 것이다. 그는 나치즘의 각종 행정기구들이 만들어낸 방대한 문서들을 1940-50년대에 내내 수기로 베끼고 원고를 쓰고 타이핑을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2단 교정지 800장 분량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 초판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독일 안팎의 ‘파괴의 장(場)’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그는 자부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의 분량뿐만 아니라 그가 내보인 통찰에서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 통찰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의 구조를 밝혀낸 점. 힐베르크가 보기에 그것은 일회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이 정의되었고, 이어서 유대인의 재산이 약탈되었으며, 유대인이 게토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을 힐베르크는 ‘파괴과정’이라고 부르며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기계’라고 명명했다. 그가 보기에 특정기관이 특정과제의 실행을 주도한 적은 있어도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이로부터 그가 얻어낸 두 번째 통찰은 홀로코스트가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 그에 따르면, “1933년에는 어느 관리도 1938년에 취해질 조치를 예견할 수 없었고, 1938년에는 그 누구도 1942년 사태의 윤곽을 그려볼 수 없었다. 파괴과정은 한단계 한단계 실행된 작전이었고 행정은 한 단계 앞 이상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러한 연속적 과정에서 독일의 근대적 관료제와 군대, 경제계와 나치당은 각각 어떤 일을 했던가? 행정관리들은 파괴과정의 초기단계에서 나치의 반유대적인 법령을 생산했다. 유대인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유대인 게토화를 개시했다. 그리고 독일군은 학살작전의 전개와 학살수용소로의 유대인 이송을 담당했다. 경제 및 금융계는 유대인 재산의 강탈과 강제노동, 가스학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치당은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복잡한 관계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 관여했다. 요컨대, 유대인 파괴는 이러한 포괄적인 행정기계의 산물이었으며, 대규모 인간 집단을 단기간 내에 죽이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독일 관리들은 기괴할 정도로 놀라운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하면서 목표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냈다.   

나치즘의 파괴기계에는 사실상 독일의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힐베르크는 유대인 자치기구와 학살센터의 유대인 노동대, 그리고 체념한 상태로 순순히 가스실로 향한 유대인들까지도 학살의 효율적인 진행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파괴기계에 포함시켰다. 그 많던 유대인의 이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힐베르크에 따르면 대부분은 중립을 지키며 일상에 몰두했다. 그렇게 악은 일상화되었고 500만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일상화된 공습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또 다른 ‘유대인’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떼잡이’로 새롭게 정의된 용산 철거민 농성자들이 경찰의 강압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화재로 숨졌다. 이런 것이 홀로코스트의 보편성일까? 

09. 02. 02.  

P.S. 생각해보면,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가능한 것 아닐까?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에서 군대 대신에 아마도 수구언론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 무서운 것은 굳이 어떤 의도나 계획 없이 일상적인 파괴기계(행정기계)의 작동만으로도 파국은 일어난다는 점이다. 일상화된 악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하며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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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03 13:38 
    "나치와 가자, 피해자는 가해자?" - 한겨레21
 
 
노이에자이트 2009-02-0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헤못behemoth이라는 표기가 좀 이상하네요.우리말 표기가 그런가요? 노이만의 제자인 피터 게이 책은 꽤 번역이 되었는데 정작 노이만의 책은 번역이 안 되어 있어서 아쉽습니다.

로쟈 2009-02-03 22:07   좋아요 0 | URL
성서의 표기가 '베헤못'입니다. 게이도 노이만의 제자였군요. <베헤못>은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동네 도서관에 잠시 다녀오면서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프리모 레비가 생각났다.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들을 뒤적이다가 며칠 전 그의 자서전 <주기율표>(돌베개, 2007)를 비로소 펴본 탓도 있을 것이다. "우리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란 문장으로 첫장 '아르곤'은 시작한다. 나는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이 비범한 전기를 아껴 읽고 싶은 마음과 차마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교차해서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며칠 전에 산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철수와영희, 2009).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강연록인데, 마지막 4부는 ''솔직한 비관주의자' 서경식과 나눈 대화'로 전에 경향신문에 실린 인터뷰 기사의 전문이다. 이 기사는 작년 2월말에 '한국판 시라케 시대'(http://blog.aladin.co.kr/mramor/1938368)라고 옮겨놓은 적이 있다. 이번주 언론리뷰에 빠진 것이 좀 아쉬운데, 배본이 늦었던 듯하다. 소개기사가 없어서 작년말 '자서전 읽기'의 마지막 꼭지로 실렸던 연재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에 대한 것이다(서경식과 프리모 레비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949436 참조).  

경향신문(08. 12. 27)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

프리모 레비는 니스와 인연이 깊다. 자서전 <주기율표>(돌베개)에서 그 인연이 무엇이었는고 톺아보기에 앞서, 레비가 니스를 어떻게 정의하는지부터 알아보자. 사전적 의미에서 니스는 불안정한 물질이란다. 이 물질은 사용하는 어느 순간 액체에서 고체가 되어야 한다. 고체로 변화하는 순간이나 장소가 적절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만약 창고에 있는 동안 고체가 되면 폐기처분해야 한다. 너무 일찍 반응이 나타나면 안되는 것이다. 거꾸로 쓰고 났는데 굳지 않은 경우가 있다면, 이는 웃음거리가 된다. 너무 늦어도 안된다. 니스가 하는 일이란 무엇인고 하면, 결국은 치밀하고 단단한 망을 만드는 것이다. 

니스에 대한 설명을 듣다보면, 마치 화학으로 말하는 인생론 같다. 살아가는 것은 연금술과 비슷하다. 둘 다 비루한 것을 빛나는 그 무엇으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변화라는 열쇳말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정적 변화가 적시적소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다. 삶을 되돌아보며 회한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런 안타까운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파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칼바람을 맞으며 버티려면 우리를 감싸주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갑옷은 관두고라도 삼베옷이라도 누군가 입혀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원망과 한이 쌓이는 것은 헐벗은 채로 살아왔다 여기기 때문이리라. 곱씹어 볼수록 니스의 특징과 우리네 삶은 닮아 보인다. 



잠시 옆길로 샜다. 본론으로 돌아오자.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유대인 화학자다. 대학 재학 중 파시스트들이 만든 인종법으로 고난의 삶이 예고된다. 유대인이라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음에도 주변의 배려로 잘 버텨나갔다. 하지만 파시즘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저항의 길을 택했고, 그 결과 아우슈비츠로 갔다. 믿기지 않는 운과 복이 따랐다. 그 무간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으니 말이다. 어찌 평상을 회복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인간이라는 것에 죄의식을 느꼈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가까웠다. 시를 썼다. 그야말로 “피가 묻어나는 시”였으리라. 그것이 쌓여 한 권 분량이 되어가자 평온을 느꼈다.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곳이 니스 공장이었다.

온 나라가 전쟁 후유증을 앓는데 공장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남는 시간에 글을 쓰면서 버텼다. 그러다 일이 떨어졌다. 버려진 니스 덩어리가 잔뜩 있는데, 원래로 돌리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반은 화학자로, 반은 수사관으로” 일에 매달렸다. 젊은날, 그에게 화학은 구름이었다. 앞날을 가리는 걸림돌의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성경의 상징을 통해 무궁한 가능성을 뜻한다. “마치 시나이 산을 어둡게 둘러싼 구름” 같은 것이니, “그 구름 속에서 내 율법이, 내 내부와 내 주변, 세계의 질서가 나타나주길 기다렸다.”(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그는 과학에서 궁극적인 것을 얻으리라 기대했다. 거기에 “최고의 진리에 도달하는 새로운 열쇠”가 있으리라 믿었다. 처음에는 열쇠를 찾으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는 열쇠를 만들기로 했다. 아니,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억지로라도 문을 열 거야”라고 마음먹었다. 아, 과학에 미친 어린 시절에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모든 것이 “저마다 그 신비를 밝혀달라고 졸라”대고 있었으니.

그는 이 시기에 비로소 절대 사라지지 않을 듯했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게를 달고 나누고 측정하고 어떤 실험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온 힘을 다하는” 화학자의 길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마침내 기쁨과 활력을 안고 삶 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글쓰기가 그의 해방감을 더해주었다. 가혹했던 기억의 짐이 이제 희망과 기쁨의 씨앗이 되었다.

레비의 삶이 문제적인 것은 그가 훗날 자살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돌아온 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끊었다. 경악과 충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는 그 죽음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왜 죽었을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데 실마리가 될 만한 이야기도 니스와 관련 있다.

생환한 지 22년이 되는 해였다. 역시 니스 관련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니스에 쓰는 수지 원료를 수입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니스를 공급한 업체는 독일의 대기업이었다. 정중하게 항의 편지를 썼지만 상대방은 뻔한 답변만 해왔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독일 쪽 책임자가 L 뮐러 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으나, 속단할 수는 없었다. 뮐러라는 이름은 남산에서 돌팔매질 하면 김씨나 이씨 집 마당에 떨어지는 격이다. 독일에서는 흔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철자를 달리 쓰는 습관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우슈비츠의 실험실에서 만났던.

레비는 그와 세 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작업에 대한 질문만 했고, 두 번째에는 수염이 왜 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면도기도 없고 손수건도 없는 데다, 월요일마다 떼거리로 수염을 깎는다고 대답했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쪽지를 건네주었다. 목요일에도 면도할 수 있도록 해주고, 가죽 신발도 한 켤레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왜 그렇게 불안해하느냐?” 기가 막힌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도저히 인류사회에서 벌어질 수 없는 방법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살육당하고 있는 현장에서, 언제든지 그 희생양이 될 수 있는 사람에게 던져서는 안될 질문이었다.

물품을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면서 레비는 뮐러에게 자신의 저서를 보내주고 옛일을 기억하는지 묻는 편지를 띄웠다. 드디어 답신이 왔다. 자신이 그때 만났던 사람이 맞다며 레비가 살아남아 기쁘다고 했다. 이제 답장을 써야 한다. 예상할 수 있듯 레비는 당혹스러워한다. 특히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고 회고한다. 당장 “아우슈비츠는 왜? 판비츠(레비를 실험실에서 일하게 한 독일인)는 왜? 어린아이들은 왜 가스실로 가야 했는지”라고 묻고 싶었다. 편지가 오고가며 그의 고뇌는 더 깊어진다. 뮐러는 아우슈비츠의 사건들을 전 인류의 탓이라 했다. 실험실에서 일할 수 있도록 레비를 뽑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공장이 유대인을 보호할 목적으로 운영되었고, 포로들에게 동정심을 품지 말라는 명령은 위장이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자신은 아우슈비츠에 머무는 동안 “유대인 학살을 목적으로 하는 그 어떤 활동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레비에게서 “유대정신을 극복하여 자신의 적을 사랑하는 기독교 신자의 계율을 잘 지키고 있으며 인간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를 발견”했노라고 했다.

편지 어느 곳에도 진실한 반성과 참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개인이 막아낼 수 없는 체제의 폭력이었다고 발뺌할 따름이다. 가해 집단의 일원으로 돌팔매를 맞을 각오보다는 피해자의 용서를 서둘러 요구하는 꼴이다. 역사의 범죄 앞에서 어느 사람도 손을 씻으며 죄 없다 할 수 없는 법이다. 이미 레비의 절망은 여기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그는 편지의 초고내용을 다음처럼 썼다. 그러나 이 편지는 끝내 부쳐지지 않았다. 이탈리아로 찾아오겠다는 뮐러 박사가 급사해서였다.

“적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아마 그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그들이 후회의 표시를 보이는 경우에만, 그러니까 그들이 적으로 남아 있기를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했다. 반대의 경우,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고, 남에게 고통을 가하려는 고집스러운 의지를 고수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되었다.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만(나누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를 심판하는 것이지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주기율표>는 최고의 자서전이라 평할 만큼 빼어난 책이다. 담고 있는 주제의식도 대단한데다 문장도 뛰어나다. 더욱이 삶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고 주기율표를 원용해 글을 써나간 방식도 독특하다. 주기율표 순서대로 원소를 나열하고, 이것이 환기하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네그리 자서전 <귀환>은 알파벳 순으로 되어 있는데, 이 책의 구성도 상당히 특이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가치를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책을 읽으며 내내 들었던 두 가지 의문이 바로 이 책의 또 다른 의미를 돋을새김해준다고 보는 것이다. 

그 하나는 우리가 과연 <주기율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교양도서로서는 잘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책에 담긴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대한 절실한 이해에 과연 우리가 이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정주의 삶은 유목의 애환을 속 깊이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점에서 국내에 레비를 알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서경식을 주목한다. 재일조선인으로 살아가는 삶만이, 형제가 독재의 희생양이 되었던 경험이 있는 자만이 레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는 바로 이 두 층위로 레비를 읽고 있다.

또 하나는 자꾸 레비와 리차드 파인만을 비교하게 된다는 점이다. 둘 다 유대인이었는데, 유대적 전통에서 자유로웠다. 어릴 적부터 관찰과 실험을 즐겼는데, 여기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둘 다 많다. 나중에 친구하고 작은 회사를 꾸린 점도 비슷하다. 도전정신이 충만한 데다 자유로운 영혼들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도 그 둘이 맞이했던 운명은 달랐다. 유럽에서 살았던 한 사람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기 직전 살아 돌아왔다. 이후 과학자보다 문필가로 명성을 떨쳤다. 미국에서 살았던 사람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며 과학계의 상징이 된다. 다시, 니스를 떠올린다. 한쪽의 반응은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쪽은 제때 제대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렇다고 우리가 운명의 뒤웅박 팔자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게 역사는 가혹하기도 하고 축복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고삐 풀린 망아지일까? 개인의 삶이 역사적 가치를 띠게끔 살았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아니된다고 말하는 듯싶다. 결코 역사가 개인의 삶을 짓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자기의 삶을 걸고 주장하고 있다. 아마 자서전을 읽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싶다. 운명이라는 가혹한 발톱에 상처를 입고도 마침내 일가를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이니까. 그리고 그들의 성취가 개인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이웃과 공동체로 확대되는 이야기이니까. 삶은 모방이다. 그들의 삶을 뒤쫓고자 열망할 적에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법이다. 이제, 훗날 자서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갈망해본다.(이권우 도서평론가)    

무참한 유대인 학살의 와중에 그는 운 좋게도 살아남았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업무상 서신왕래를 하게 된 아우슈비츠의 학살자는 뉘우치고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거대한 역사와 전 인류의 탓으로 넘겼다. 진실한 반성과 참회 따위는 없었다. 적이길 포기하지 않는 적을 용서하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그는 과학보다 더 어려운 문제 앞에 절망했다. 삶이 던지는 수많은 모순과 불합리의 첨단에 서 있던 그가 끝없이 이루어내고, 성취하다 마침내는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궤적에서 우리는 그 고민의 일말이라도 읽어내고 우리 삶을 위한 지표를 깨달아야 한다. 

09. 02. 01.  

P.S. 페이퍼의 제목은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의 6장 제목에서 가져왔다. 루쉰의 산문<희망>(1925)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거기서 루쉰은 헝가리 독립운동 투사이자 시인이었던 페퇴피 산도르(1823-1849)의 시 '희망가'를 인용한다. "희망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매춘부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아양을 떨면서 모든 것을 바친다./ 그대의 귀중한 보배,/ 그대의 청춘을 다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저버리노라" 그리고 루쉰이 덧붙인 코멘트. "절망이란 희망처럼 허망한 것이어라!"  

  

루쉰의 사례에서 서경식은 '희망'이란 번역어에 대한 루쉰식의 주체적 '해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안 그러면 다수자가 그러듯이 "그래도 희망이 있는데..."라는 식으로 "해석을 당하며" 넘어가버린다는 것. "'안 그렇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는 허망이다.' 하고 저항하고 충돌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수자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문제 제기할 수 있고, 어떤 새로운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전적으로 공감한다. 특히나 요즘, 어두운 경제 전망을 놓고 수시로 떠벌여대는 "위기가 기회다" "내년에는 국민에게 희망의 싹 보여줘야"라는 식의 수사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다('일단 경제만 살려달라'는 여론은 또 뭔가?). 그런 '허무 개그'에 대항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당신들의) 기회가 우리에겐 더 큰 위기이다." "당신의 희망은 우리에겐 더 큰 허망이요, 절망이다."라고. 우리에게 희망이란 매춘부는 필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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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09-02-01 20:46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 로쟈님 덕분에 처음 알게 됐군요.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인용하신 기사를 읽으니 문득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떠오르는 군요. 사실 이건 우리 현대사에서도 뼈저리게 느껴지는 문제이기도 한 것 같군요...

로쟈 2009-02-01 21:46   좋아요 0 | URL
레비의 책들은 재작년 겨울에 소개됐습니다. 생각만큼 널리 알려지진 않았나 보네요...

푸른바다 2009-02-01 22:11   좋아요 0 | URL
빅토르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는 아주 옛날부터 소개됐는데, 레비의 책들은 소개가 많이 늦었군요. 이탈리아어라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얼핏드는군요. <이것이 인간이다>는 책의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들리네요. 레비가 스스로 '존재하기를 멈춘 것'은 인간에 대한 절망 때문일까요..? 인성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포기하지 않았던 프랭클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로쟈 2009-02-01 22:53   좋아요 0 | URL
저로선 레비의 자살이 보다 '인간적'으로 여겨집니다. 긍정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듯해요...

virtuepeak 2009-02-01 20:41   좋아요 0 | URL
레비가 뮐러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읽으면서 루쉰의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가 떠올랐습니다.

"성실한 사람들이 부르짖는 공평한 도리 역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좋은 사람을 구조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나쁜 사람을 보호해주기까지 한다. 나쁜 사람이 득세하여 좋은 사람을 학대할 때에는, 설사 공평한 도리를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 해도 나쁜 사람은 결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부르짖음은 단지 부르짖음으로 그치고 좋은 사람은 여전히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어쩌다가 좋은 사람이 조금씩 일어서게 되면, 나쁜 사람은 본래 물에 빠져야 마땅한 것인데도, 성실한 공리론자들은 '보족하지 말라'느니, '너그럽게 용서하라'느니, '악으로써 악에 대항하지 말라'느니 하며 떠들어댄다. 이번에는 실효가 나타나서 헛부르짖음으로 그치지 않게 된다. 착한 사람은 그 말을 옳다 여기고, 그리하여 나쁜 사람은 구제 받는다. 그러나 구제 받은 뒤에 그는, 틀림없이 이득이 보았다고 생각하지, 회개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이 다른 곳에 있지 않고 희망이 사라진 곳이 곧 지옥이라 했다는데, 매춘부가 없는 곳은 지옥인가 하는 말장난 같은 생각을 잠깐 해봤습니다. ^^; 서경식의 루쉰 해석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에 수록되어 있는 것인지요?

로쟈 2009-02-01 21:44   좋아요 0 | URL
아뇨, 바로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6장입니다. '매춘부가 없는 곳이 곧 지옥'이라는 건, 희망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데요.^^

비연 2009-02-01 22:36   좋아요 0 | URL
'주기율표'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이것이 인간이다' 등을 읽으면서 쁘리모 레비 뿐 아니라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인생에 대해서 한동안 찾아보곤 했었죠.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무심하게 자살한 그의 최후가 내내 마음에 걸렸구요..

로쟈 2009-02-01 22:52   좋아요 0 | URL
또 다른 증언자였던 장 아메리의 <자살론>도 올해 번역돼 나옵니다. 아시겠지만 서경석 선생의 책에 두 사람 얘기가 나오죠. 아메리 또한 자살했구요...

비로그인 2009-02-02 00:50   좋아요 0 | URL
"우중충한 날씨 때문인지 프리모 레비가 생각"나셨다니 藏書家이자 학자다운 감수성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

레비가 자살한 원인과 시점... 프랭클과 대비해서 생각해볼 가치가 있겠군요...

로쟈 2009-02-02 22:13   좋아요 0 | URL
장 아메리와도 비교해보아야 하구요...

모래한알 2009-02-02 07:54   좋아요 0 | URL
'이것이 인간인가'를 작년에 감명깊게 읽었는데, 기억해보니 로쟈님의 소개로 읽었던 것 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값싼 희망과는 무관하게....

로쟈 2009-02-02 22:13   좋아요 0 | URL
네, 절망을 즐기며 살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2 15:27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직접적인 원인은 독일에서 요아힘 페스트와 에른스트 놀테가 개시한 나치 상대화 작업인 것 같습니다.시기가 겹치거든요.독일 우익의 대대적인 기억선점 공작이니까요.그때문에 인간에 대해 절망한 게 아니었을까요?

로쟈 2009-02-02 22:15   좋아요 0 | URL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망의 한 원인은 되었겠죠...
 

월말이면 매번 써야 되는 원고가 있고, 굳이 쓰는 페이퍼도 있다.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이 그 페이퍼다. 생각해보니 이 페이퍼의 용도는 당장에 읽을 책들을 나열하는 데 있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미래에 회고적으로 돌이켜보기 위함인 듯싶다. 작년에 쓴 걸 보면서 든 생각이다. '먼훗날' 다시 '지금'을 회고하기 위해서라... 그런 생각이 들자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다시 손을 댄다. 안부도 전할 겸...  

1. 문학 

작가 신경숙씨가 고른 문학분야의 책은 서하진의 소설집 <착한가족>(문학과지성사, 2009)이다. "<착한가족>안엔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목을 보면 선량한 가족들의 이야기인줄 알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회의 최소 단위라고 볼 수 있는 가족구성원들에게 치밀한 렌즈를 갖다 댄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착하다기 보다는 마지막 보루처럼 착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어떻게든 타인과 소통을 이루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매 상황들이 매우 드라마적이다."라고 소개된다.  

불황기에는 대개 '가족'이 화두가 되곤 했던가? 현재 장기 베스트셀러가 될 채비를 갖추고 있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가 어필하는 것도 그런 사회적 여건과 무관하진 않겠다. 가족이 문제라면, 미국 중산층 가족의 일상과 상처를 다룬 조이스 캐롤 오츠의 <멀베이니 가족>(창비, 2008)도 꼽아보도록 한다. 880쪽에 이르는 책이라 아마 읽다 보면 개나리가 피고 지고 하겠다...  

2. 역사  

역사저술가 이덕일씨가 추천한 책은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푸른숲, 2009)인데, 버나드 칼슨 등이 쓴 책 <세계사 속의 기술>의 우리말 번역서다. "원제는 'TECHNOLOGY IN WORLD HISTORY'로서 '과학기술로 보는 세계사'라는 뜻이다.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란 제목으로 둔갑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한번 잡으면 손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빠져든다는 암시일 것이다.(...) 인류를 발전시킨 과학기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덧 세계사에 대한 지식까지 풍부해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책이지만 어른이 읽어도 손색이 없다."라는 게 추천의 변이다.  

   

말랑하고 쫀득한 이야기가 입맛에 맞지 않다면 보다 정통적인 역사에 도전해볼 수도 있겠다. 중국사를 주제로 하는 건 어떨까? 존 킹 페어뱅크 등이 편집한 <캠브리지 중국사>(새물결)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현재 읽을 수 있는 통사는 페어뱅크와 멀 골드만의 <신중국사>(까치,2005) 정도(보다 전문적인 건 국내 학자들이 쓴 <강좌 중국사>(지식산업사) 시리즈를 참조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던 페어뱅크는 영어권 중국사학계의 좌장이다(동료나 제자들에게 JFK라 불린다고). 때문에 그의 책은 '한 역사학자의 시각'이 아니라 '중국사를 보는 서구의 시각'을 대표하며 그런 의미에서도 필독해볼 만한 책이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시공사, 2001)은 '사진과 그림' 때문에 봐둘 만하겠고, <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 2002)의 저자 레이 황은 그 호방한 필력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역사학자다.    

3. 철학 

역사에서 철학으로 넘어보니 난이도가 수직상승한다. 김상환 교수의 추천도서가 <자크 라캉 세미나 11권-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새물결, 2008)이기 때문이다. 추천의 변은 격찬으로 가득 차 있다.  

"라캉의 언어 속에서 재탄생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그 극적인 재탄생 과정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는 책이 이번에 번역된 <자크 라캉 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이다. 국제정신분석학회(IPA)에서 파문을 당한 1963년 라캉은 이론적 홀로서기의 길로 나아갔고 구조주의자로 평가되던 자신의 과거와도 과감하게 결별했다. 이 책의 부제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런 새 출발은 정신분석의 원천과 토대에 대한 재검토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드디어 이런 위대한 변신과 도약의 드라마를 잘 다듬어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라캉 정신분석의 보물 상자를 누구라도 쉽게 열 수 있는 가슴 벅찬 순간이 왔다. 난해한 라캉의 문장을 자연스럽고 명료한 우리말로 옮겨놓은 번역자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라캉은 이 세미나를 전쟁터의 기지를 구축하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다. 이번의 책과 번역자들의 후속작업은 국내 정신분석 연구와 대중화에 수없는 승리와 진전을 가져올 항구적 기지의 초석이 될 것이다." 

몇 페이지 읽어보지 않아서 '가슴 벅찬 순간'에까지는 합류하지 못하지만 '자연스럽고 명료한 우리말'로 옮겨졌다는 평에는 안도감을 느낀다. 올해 출간되는 <에크리>에도 기대를 걸어봄 직하다. 혹 그럼에도 라캉과 직접 대면하는 것이 부담스런 독자라면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나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을 합석시킬 수도 있겠다. 원래는 루디네스코의 평전 <자크 라캉>(새물결, 2000)을 꼽아두려고 했는데 어느새 절판됐다(나는 얼마전에 원서와 함께 정독할 준비를 해놓았다).  

4. 정치  

손호철 교수가 추천한 정치분야의 책은 앨 고어의 <이성의 위기>(중앙북스, 200)이다. 원제는 '이성의 암살'쪽에 더 가까운데, '이성'이라고는 했지만 문제가 되는 건 '미국 민주주의'다. 추천사에 따르면, "그는 미국역사상 처음으로 시민들이 영장도 없이 가택수색과 체포를 당하는 등 지난 8년간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 책의 매력은 이를 단순히 부시의 잘못으로 치부하지 않고 보다 근본적인 위기로 진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란 이성의 힘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이같은 전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이라면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나오미 울프의 <미국의 종말>(프레시안북, 2008)과 뜻을 같이하는 게 아닌가 싶다. 거기에 촘스키까지 보태자면 인터뷰집 <촘스키, 변화의 길목에서 미국을 말하다>(시대의창, 2009)까지 포함할 수 있겠다. 한데, 모두 지난번 대선 이전 곧, '변화의 길목'에 출간된 책들이라 '오바마 시대'의 향방까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 내년 이맘때쯤 오바마가 어떤 성적표를 받을지 궁금하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관련서는 조준현의 <19금 경제학>(인물과사상사, 2009)이다. 제목에 왜 '19금'이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래와 같은 최근 뉴스기사를 접하면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니다.  

주가 조작, 은행의 비리 등 금융권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잇따라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아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1일 주가 조작을 노리는 작전 세력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작전'(감독 이호재 영화사사 비단길 제작)이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데 이어 은행의 음모와 비리를 다룬 외화 '인터내셔널'도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영등위는 '작전'에 '18금' 등급을 매긴 주요 이유로 "증권과 관련된 용어와 주가 조작에 대한 세세한 묘사 등 주제 이해도 측면에서 청소년들의 이해도 고려, 청소년에게 유해한 장면, 모방의 위험"을 들었다.(마이데일리, 09. 01. 29)  

조폭 영화는 청소년들이 봐도 좋지만, 금융비리를 다룬 영화는 '모방의 위험' 때문에 안된다? 하여간에 어처구니 없는 정권이 한번 들어서면 국가기관의 이성이 모두 '실종'(혹은 암살!)되는 모양이다. '경제는 알려고도 하지마!', 그런 게 이 정부의 모토라면, '19금 경제학'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제목 아닌가?!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는 점이다. 경제학에 대해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과도한 기대를 거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이 책 한 권을 읽고 경제학의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만 생각할 거리를 얻게 된다는 점에 만족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같이 읽을 만한 책에는 뭐가 있을까? 지승호와의 대담집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시대의창, 2009)와 새사연(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신자유주의 이후의 한국경제>(시대의창, 2009)는 어떤지? 부제대로 아무래도 올해의 화두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MB노믹스를 넘어'일 듯하므로. 더 나아가 '자본주의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할 거리'를 마련해두어야겠다.  

한편으로 이번 세계경제 위기의 원인이 '금융'이 아니라 '실물'에 있다는, 미국 경제학자 로버트 브레너 교스의 진단도 흥미롭게 읽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5868.html). 그에 따르면, "오늘날 위기의 근본 원인은 지난 1973년 이후, 특히 2000년 이후 선진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 데서부터 찾아야 한다.(...) 이번 위기는 2차 대전 후 가장 심각한 불황이었던 79~82년 불황 때보다 더 심각한 상태고, 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갈 정도로 악화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제예측가들은 현재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에 대해 과소평가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들은 실물경제가 그래도 견실하다고 과대평가하고 있다. 이들은 실물경제가 그동안 자산시장 거품에 의존한 채무 누적으로 지탱돼왔다는 사실에 눈감고 있다." 

   

그래서 관심을 갖게 된 책이 브레너의 <혼돈의 기원>(이후, 2001), <붐 앤 버블>(아침이슬, 2002) 등이다. 그는 자본주의 미래에 대해서 상당히 어두운 전망을 내놓고 있는 편인데, 이번에 최소한 <붐 앤 버블>은 필독해볼 생각이다.  


 

6. 사회 

김문조 교수가 추천한 사회분야의 책은 국내 사회학자들의 의기투합하여 펴낸 <대한민국은 도덕적인가: 한국사회 도덕 살리기 프로젝트>(동아시아, 2009)이다. 제목상으로는 상당히 '관변적'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하는데, 취지는 좀 다른 모양이다. 추천사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사회의 도덕성에 관한 사회학자들의 글 모음이다.(...) 아홉 명의 저자들은 다양한 방식과 예증을 통해 현대 한국사회의 도덕적 위기를 진단한다. 어떤 이들은 공정 경쟁을 보장하는 사회규범의 오작동이나 사회적 신뢰의 상실에서, 다른 이들은 모순적 규범들 간의 탈구나 시민의식의 부재에서, 또 다른 이들은 부도덕을 강요하는 시장 제일주의나 왜곡된 과학주의에서 그 원천을 탐색한다. 이렇듯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소 다르기는 하나, 한국사회의 도덕성을 논한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어느 학문보다 현실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사회적 당면 과제들에 관해 고민하며 개선을 도모하려는 사회학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도 좀 감이 안 오는데, 소개를 보니 이런 문제들을 다룬다고 한다.  

·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한국유학생들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 타이레놀을 만든 존슨 앤 존슨이 신뢰경영의 벤치마킹 대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 현대사회에서 패륜적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우리나라에 만연한 성형 열풍, 왕따현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일상적 매너와 윤리, 사회적 규범을 사회학적으로 이해한다.
· 일상생활에서도 우리의 문화가 재생산된다. 놀이공원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성찰하는 한국사회의 도덕성.
· 한국은 왜 8월 15일에 추석을 쇠고, 중국은 10월 10일에 쌍십절을 쇠는 이유는 뭘까
· 도덕에도 남성적 도덕과 여성적 도덕이 있다. 남성중심주의적 도덕을 파헤친다.
· 2008년의 촛불집회가 보여준 새로운 시민문화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 태안 기름유출 사건에 그토록 많은 국민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한 원인은 무엇일까
· 황우석 사태와 광우병 논쟁을 통해 거대 과학 시대의 윤리에 대해 성찰한다.
  

한데, 지역문제와 교육문제는 빠진 듯해서 강준만 교수의 책 두 권을 더 얹어놓는다. 작년에 나온 <지방은 식민지다>(개마고원, 2008)와 이번에 나온 <입시전쟁 잔혹사>(개마고원, 2009)가 그 두 권이다.   

7. 과학  

장경애 편집장이 고른 과학책은 남극 얘기다. 고경남의 <서른셋, 지구의 끝으로 가다>(북센스, 2009). 여름에 더 어울릴 만한 책인데, "저자는 서울에서 17,240km나 떨어진 남극세종기지에서 1년을 보낸 의사다. 지겨운 일상의 탈출구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남극은 이름만으로도 매력적이다. 하지만 누구나 갈 수 없는 곳이 남극이다. 독자들은 남극세종기지 월동대를 “남극마을 개구쟁이 스머프”로 표현한 저자의 눈을 통해 세종기지의 일상을 엿볼 수 있고 사람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버리는 강력한 눈폭풍인 블리자드가 남극에선 얼마나 큰 공포임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남극에 관한 책으로 뭔가 두툼한 것이 있었던 듯싶은데, 검색해보니 어린이용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 해서 초등학교 때 세계위인전집에서 읽은 두 명의 탐험가 아문센과 스콧을 오랜만에 떠올려본다. 스콧의 <남극일기>(세상을여는창, 2005)는 현재 품절상태지만, <남극의 대결, 아문센과 스콧>(생각의나무, 2004)는 아직 구할 수 있다. 뭔가 더 멋진 책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아쉽다...  

8. 예술  

흠, 드라마의 파워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김춘미 교수가 추천한 예술분야의 책은 서희태의 <베토벤 바이러스>(MBC프로덕션, 2008)이다. 추천의 변은 이렇다. "한국 최초의 클래식드라마 라는 <베토벤 바이러스> 열풍이 지나갔다. 그러나 그 덕에 클래식 음악과 음악계가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어 적지 않게 즐거워하고 있다. 여러 차원의 음악 강좌가 활성화되고, 재미있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도 지속적으로 청중을 끌어들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 미치는 드라마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 속 인물, 강마애(김명민 분)에게 뒤에서 직접 지휘를 가르친 예술 감독 서희태가 클래식음악 입문서를 내놓았다. 어느 전문가의 책보다도 <베토벤 바이러스>의 영향력이 컸던 만큼 이 책을 보면 아마 이미 드라마를 통해 학습된 여러 가지 지식이 좀더 심화되고 흥미로워질 것이라 생각한다."  

강마애가 나오는 몇 장면은 봤지만 나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별다른 감흥이나 '위력'은 느끼지 못한다. 주중에 읽은 공진성의 <폭력>(책세상, 2009)에도 상징폭력을 다루면서 이 드라마 얘기를 잔뜩 늘어놓았기에 좀 어리둥절했었다(기대와는 동떨어진 책이었다). 그럼에도 베토벤이 대세라면, 고규홍의 <베토벤의 가게부>(마음산책, 2008)는 어떤가. 부제가 '클래식과 경제'이고, 음악가들의 ‘생계’를 화두로 삼은 클래식 음악사다. 저자는 음악가들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 

1. 그들은 왜 가난했나.
2.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수단을 강구했나.
3. 생활인으로서 그들의 자의식은 어떠했나.
  

흠, 곤란한, 아니 짓궂은 질문들이군. 나는 음악가가 아니니 피해가도록 하겠다. 덧붙여 베토벤 마니아를 자임하는 서울대 의대 조수철 교수의 <베토벤, 그 거룩한 울림에 대하여>(서울대학교출판부, 2007)도 클래식 애호가라면 필수 소장도서다.   

 

9. 교양 

이한우 기자가 고른 교양서는 모로하시 데쓰지의 <십이지 이야기>(바오, 2008). 모로하시 선생은 백수(白壽)에 <공자 노자 석가>(동아시아, 2001/2008)를 펴내 화제가 됐던 일본의 석학인데, 얼마전에 나온 이 책은 말 그대로 자축인묘- 하는 십이지에 대한 것이다. "참으로 박식한 모로하시 선생은 십간(十干) 십이지(十二支)와 음양오행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풀어내고 이어 각 띠별로 동양의 각종 고전에 담긴 전설과 우화까지 동원해 그 장단점을 구수하게 풀어낸다." 지난 설연휴에 읽을 만한 책이지 않았을까.  

10. 재출간본

이제 내 맘대로 고르는 책이다. 과학분야의 재출간본을 세 권 골랐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사이언스북스, 2009)는 예전 범양사판도 갖고 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2511755) 이번에 아주 근사한 장정의 책이 나와서 지갑을 또 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또 치하할 만한 책은 바뀐 출판사에서 가격을 낮춰 보급판으로 낸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동녘사이언스, 2008)과 제프리 밀러의 <연애>(동녘사이언스, 2009). 후자는 예전에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로 출간됐었는데, 32000원의 고가였다. 이번에 19800원으로 떨어졌으니까 2/3로 저렴해진 셈. 이 세 권의 책을 이번 대학 신입생들에게 강추하고 싶다...  

09. 01. 31. 

 

P.S. '이 달의 고전'은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을유문화사, 2009)도 출간된 김에 '고전 읽기'에 관한 책으로 고른다('메타고전 읽기'인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민음사, 2008)와 도쿄대 교양강좌의 교재 <문학, 어떻게 읽을까>(민음사, 2008) 등이 책상 가까이에 있는 책들이다.   

거기에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씨앗을뿌리는사람, 2008)을 덧붙이고 싶은데, 책은 중견의 영화평론가가 두 학기 동안 들은 교양강좌에서 읽은 책과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어서 '실전적'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2184381).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을 소개하는 <인문학 스터디>(라티오, 2009)가 '가이드북'이라면 이 두 권의 책은 '현장 실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인문학 스터디> 같은 경우는 '교양교육의 정신'이 으레 그렇지만 보수 엘리트주의적 경향이 짙은 책인데, 편역자들은 어떤 계산을 했던 것일까?). 개학을 맞기 전에 휘리릭 읽고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고전에 대해서, 읽기에 대해서, 강의에 대해서, 그리고 대학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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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01-31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월이라서 이렇게 분량이 짧은가요^^
진행중이신가..

로쟈 2009-01-31 20:54   좋아요 0 | URL
네, 시간이 좀 걸립니다.^^;

푸른바다 2009-02-01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상환 교수님이 이토록 흥분하시는 걸 보니, 라캉이 이제 한국어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모양이군요. 전 15여년 전에 권택영 교수가 엮은 <욕망이론>을 읽다가 난해해서 포기한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사실 라캉이란 이름은 고등학교 때 신동아 별책 부록인 <오늘의 사상 100인 100권>을 통해 알게 됐는데, 라캉의 <선집>이 마음 속에 각인된 몇 권의 책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때는 라깡으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제겐 '라깡'이 더 친숙한 표기법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교보에서 겁없이 불어판 <에크리>를 사기도 했는데, 이게 지금은 행방불명이군요^^ 그후 다시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다음 <욕망이론>의 번역본을 발견하고 반갑게 집어들었는데 그만 좌절을 겪은 셈이지요^^ 그 후 마단 사럽의 <알기쉬운 자크 라캉>을 읽고 어렴풋이 이해된다는 느낌(주관적이지만^^)을 가졌었는데,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을 읽다가 다시 좌절에 빠졌지요^^ 아무튼 관심의 역사는 길지만 이해의 심도는 별로 깊어지지 않았는데, 이제야 몇 계단 더 깊이 내려가 볼 수 있는 전등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새로운 좌절을 맛보게 될런지도 모르지만^^

로쟈 2009-01-31 22:00   좋아요 0 | URL
<욕망이론>은 제대로 된 번역이라고 하기 어려운 책이지요. 그나마 지금은 상황이 많이 호전된 듯해서 다행입니다...

푸른바다 2009-01-31 22:15   좋아요 0 | URL
오래간만에 1986년 신동아 1월호 별책부록 <오늘의 사상 100인 100권>을 펼쳐 보니 <선집(에크리)> 소개 마지막 문단이 이렇게 되어 있군요^^ "라깡에게는 <선집>이외에 스무권이나 되는 <세미나>가 있다. 고등사범학교의 후원으로 일반대중에게 한 강의를 모은 것인데, 그 중에서도 제 11권은 10년 동안 계속해서 베스트 셀러로 꼽히는 책이다." 그 <세미나 11>이 23년 만에 제 눈 앞에 나타났군요^^

로쟈 2009-01-31 22:17   좋아요 0 | URL
그 별책부록은 저도 아주 옛-날에 봤던 건데, 아직도 보관하고 계시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1-3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버트 브레너가 저렇게 생겼군요.경제사 공부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할 학자지요.그런데 브레너의 위의 책들이 공황을 다룬 건데 어휴...공황론을 요즘 공부하는데 정말 어렵더군요.공황론 공부하다가 공황상태가 되었습니다.

로쟈 2009-02-01 00:38   좋아요 0 | URL
공황의 원인은 어렵지 않아 보이는데, 메카니즘이 어려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황 이론 가지고 난다 긴다는 이론가들이 맞붙었는데 지금도 논란이 많아요.그냥 공황이 일어난 당시 상황을 르포형식으로 써놓은 책이라면 그럭저럭 괜찮은데 공황원인론에 대한 글을 보면 머리가...빙글빙글...

로쟈 2009-02-01 10:49   좋아요 0 | URL
그래도 월가의 금융공학만큼 복잡하진 않을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15:07   좋아요 0 | URL
마르크스 자본론 제 2권의 재생산 표식을 가지고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내는데...계량 경제학은 마르크스 경제학엔 없을 줄 아는 이들은 뒤로 자빠져 버릴 것 같아요.폴 스위지<자본주의 발전이론> 뒤편에 나오는데,대단하더군요.

로쟈 2009-02-01 21:41   좋아요 0 | URL
오늘 도서관에서 <붐 앤 버블>을 대출해왔는데, 이 책엔 수식 대신에 도표만 많이 들어가 있네요. 사실 아무리 그래도 초끈이론에 나오는 수학 공식들보다야...^^;

2009-02-01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1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r 2009-02-01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이 페이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늘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9-02-01 21:42   좋아요 0 | URL
아, 한 분이 기다리셨군요!^^

릴케 현상 2009-02-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강유원 선생강연에서(?) 경제학자가 일진인가 아닌가 확인하는 방법으로 공황을 전공했는가를 체크해볼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로쟈 2009-02-02 14:11   좋아요 0 | URL
주류 경제학자들은 잘 안 다룬다고도 하더군요. 설명할 수 없어서...

노이에자이트 2009-02-02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리고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에 나오는 저자의 조셉 콘라드 해석을 주목해 보십시오.제가 콘라드를 좋아해서인지 그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콘라드를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제국주의자라는 해석은 그다지 찬성하지 않습니다.물론 사이드와는 반대되는 해석이지요.

로쟈 2009-02-02 21: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어디 리뷰에서 언급한 걸 읽은 것 같습니다. 주의해서 보겠습니다...

2009-02-06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국 출판계에서는2007년부터 명나라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지만(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335130.html) 아직은 우리와 무관한 듯싶다. 대신에 이번주에 나온 중국사 관련서 두 권은 모두 청나라를 다루고 있다. 일본학자 이시바시 다카오의 <대청제국 1616-1799>(휴머니스트, 2009)와 미국학자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가 그 두 권의 책이다('사고전서'란 말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본다). 중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놓치기 어려운 책들이겠다...  

 
왼쪽부터 청조 1대 황제 누르하치, 2대 홍타이지, 3대 순치제, 4대 강희제, 5대 옹정제, 6대 건륭제의 초상.

국제신문(09. 01. 31) 淸 … 다민족국가 중국의 원형    

'만주족이 세운 일개 소국이 만족할 줄 모르는 혁신력에 의지하여 차츰 거대한 중화 세계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힘은 장성 안쪽 세계의 테두리를 아득히 넘어 몽골 세계와 티베트 세계를 통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중앙아시아로까지 진출하여 이슬람의 위구르 세계도 수중에 넣었다. 청조의 그 만족할 줄 모르는 혁신력이란 도대체 어떠한 역사의 변화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한국어판 서문 중) 



대청제국의 저자 이시바시 다카오(일본 고쿠시칸대 교수)의 서문은 명쾌하다. 역사학자로서 저자의 과녘은 두 가지. 중국을 정복할 당시 인구 100만에도 미치지 못한 만주족이 1억 명에 가까운 한족을 280년 동안 통치한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대청제국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은 판도를 구축하면서 팽창하고 발전했다. 그 원동력을 혁신력을 중심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 하나다. 

또 한가지는 대청제국이 태생할 때부터 본질적으로 '복합 다민족 국가'였음을 밝혀내면서 이러한 체제의 형성·운영원리가 현대의 중국에까지 이어져오고 있음에 주목한다는 것이다. 현대 중국을 알려면 청나라라는 뿌리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대 중국은 1980년대 공포한 헌법에서 복합적인 다민족 국가임을 명기했고, 이런 다민족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고민에서 동북공정 등의 대처법이 나온 것인데 이러한 행위와 인식의 뿌리가 대청제국 시절에 형성됐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련의 혁신과정. 이것이 청나라 발전과 팽창의 원동력이다. 1616년 아이신국(후금 또는 만주국)을 세우면서 청 태조가 된 누르하치는 25세에 거병할 때만 해도 일족에서조차 후원받지 못하는 고립무원 상태였다. 그는 자신이 속한 여진족에게 숙명처럼 따라붙던 가난에 맞서려고 한족의 농경사회를 경제적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선대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몽골과 한족을 끌어들이고 내부적으로는 군사제도인 팔기제도를 창시하면서 여진족의 전통적 부족제를 혁신한다. 

누르하치에게 권력이 집중되던 상황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보수파는 그가 죽자 힘없는 권력승계순위 최하위 홍타이지를 2대 황제로 선택해 재기를 노린다. '보수의 반격이었던 것이다.'(121쪽) 홍타이지는 '굴욕감을 참고 분권통치 체제에 안주하는 편안한 길'보다 위험을 무릅쓰고 집권화에 모든 것을 건다. 홍타이지는 '한족의 정치·경제·군사력과 몽골족 기마병의 기동력'을 새 기반으로 삼고 혁신을 단행해 결국 대청국 건국을 선포한다.

뒤를 이은 순치제는 유목민 전통을 깨고 중화적 방식인 환관제도까지 도입했고 이후 강희·옹정제는 관료적 중앙집권제를 강행하는 두뇌와 강단으로 지배구조를 반석에 올린다. 청나라 전성기의 절정을 장식한 건륭제는 60년 치세 동안 오늘날의 중국보다 훨씬 넓었던 강역을 개척했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혁신-보수의 대립 과정에서 시행된 일련의 혁신 과정을 통해 중국은 '만리장성 이남 한족의 나라'에서 몽골 위구르 티베트 등을 포괄하는 복합적 다민족국가가 되었고 이에 걸맞은 이데올로기와 인식을 형성했다는 점. 이렇게 놓고 보면 청나라를 단순히 한족 왕조를 대체한 정복왕조로 보는 기존 시각은 '천만의 말씀'이다. 대청제국은 이전 '중화제국' 시스템을 해체하고 새로운 복합적 다민족국가로서 중국의 뿌리를 놓았으며 오늘에 이른 것이 된다. 이 점이 이 책의 새로운 점이다. 청나라 팽창기 판도는 성과 자치구로 이뤄진 현대 중국의 시스템과 대비시키면 거의 일치한다.

후반부에 가면 잘 나가던 대청제국이 건륭제 이후 쇠퇴기로 접어든 원인도 고찰한다. 그 중 한가지는 '혁신은 가고 보수만 남았다'는 것. 새가 좌우 날개로 날듯 혁신·보수가 짝을 이뤄야 국가도 활력을 잃지 않는다는 교훈을 여기서 도출하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에서 실용을 배우는 경영서적이나 CEO론이 아닐까 싶을 수 있겠지만 '대청제국'은 역사연구서로서 정통 인문학 책이다. 그럼에도 '혁신력' 또는 '혁신과 보수'라는, 친숙하고도 현명하게 대처해내기 힘든 함수를 푸는 데 영감을 준다.(조봉권 기자) 



문화일보(09. 01.31) 18세기말 中의 세계최대 출판 프로젝트

1772년 2월 중국 청나라 건륭제(乾隆帝)는 총독·순무·학정 등 각 성(省)과 현(縣)의 관리들에게 그들이 관장하는 모든 서고(書庫)에 보관된 희귀본과 귀중본들을 조사하는 한편, 이들을 필사해 그 성과물을 베이징(北京)으로 보낼 것을 명령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사업이 시작된 것이다. 건륭제는 개인 장서가들에게도 그들이 소장한 귀중본을 자발적으로 베이징에 보낼 것을 촉구했다.

1773년 3월에는 각지에서 보내온 책들을 수납하고 내용을 평가하기 위한 행정기구가 베이징에 창설됐고 사업을 위한 실무진도 구성됐다. 당시 조정이나 학술계의 명사로서 이 기구에 참여한 찬수관·분교관·등록관만도 300명이 넘었다. 22년에 걸쳐 완성되고 수정된 최종 결과물은 청 제국에 남아 있던 1만680종의 책을 경전·역사서·철학서·문학서의 사부(四部), 즉 사고(四庫)로 나눠 그에 대한 해제를 작성한 목록과 그중 3593종을 3만6000여 책으로 다시 필사한 방대한 총서였다.  

Cover: The Emperor's Four Treasures 

미 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61)가 자신의 하버드대 박사 논문을 기초로 완성한 책은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을 통해 건륭제 시대의 학자와 국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사고전서:건륭 연간의 학자와 국가’가 원제인 책에서 저자는 ‘사고전서’가 건륭제가 벌인 검열과 탄압의 결과물일 뿐이라는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고전서’의 편찬이 당시의 학자와 국가, 건륭황제의 이해가 모두 반영된 복합적 행위의 성과물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사고전서’가 편찬될 당시인 1770년대부터 1790년대까지의 청대 사상가들과 그들을 후원한 고위 정치가들의 삶을 다루는 한편, ‘사고전서’의 편찬 과정에서 벌어지는 한학파(漢學派·고증학자)와송학파(宋學派·성리학자)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과 갈등, 대립과 반목을 섬세하게 복원해냈다.

사실 ‘사고전서’ 편찬 사업은 1770년대 후반과 1780년대 초반 조정에서 진행된 검열운동 때문에 20세기 내내 비판을 받아왔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 검열운동을 통해 2400여종 이상의 책들이 파괴됐고 400∼500여종의 책은 공식적 명령에 의해 개정됐다. 이는 ‘사고전서’ 편찬이 서지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과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책을 수집하고, 수정하고, 검열하는 과정이 더 중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청대 고증학이 만주족 통치자들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발전하게 된 수동적 학문이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사고전서’ 편찬의 주요 목적은 검열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사고전서’ 검열이 체계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고 검열의 진행 과정도 학자와 국가의 상호반응에 의해 이뤄진 복합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전대미문 또는 세계 최대의 출판 프로젝트로 평가되는 ‘사고전서’ 편찬사업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절대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최영창기자) 

09. 01. 31.  

 

P.S. 청나라의 치세를 다룬 책으로 조너선 스펜스의 <강희제>(이산, 2001), <반역의 책: 옹정제와 사상통제>(이산, 2004), 그리고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이산, 2001)가 떠오른다. 이번에 나온 책들과 같이 묶어서 통독하면 대청제국에 대한 그림이 조금더 자세하게 그려질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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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6-25 09:58 
    서지학에 과문한지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중국 서지학의 고전도 출간됐다. 섭덕휘의<서림청화>(푸른역사, 201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란 부제가좀더 다가가기 편하다('중국책'이라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의 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다. 뤄슈바오의 <중국 책의 역사>(다른생각, 2008)도 배경이돼줄 수 있겠다. 수년 전 중국여행 시 소주
 
 
노이에자이트 2009-01-31 22:29   좋아요 0 | URL
만주 문자로 된 수많은 서적들이 잠자고 있다고 합니다.만주어 해독자가 이제 없어졌다는 말도 있구요.엄청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이젠 만주족도 없어진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네요.한때 만주문자를 공부해서 청나라 역사서 연구하러 중국에 가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은 없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다 헛된 꿈이 되었습니다.

로쟈 2009-02-01 00:37   좋아요 0 | URL
중국에서마저 연구자가 없다는 건 의외인데요. 한데, 한국에선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있으셨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01:33   좋아요 0 | URL
70년대에 만주문자 해독할 줄 아는 사람이 중국에 몇 명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하더라구요.만주족도 만주어를 모르니까요.예전 서울대 외교학과 이용희 씨가 만주어를 해독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 분도 고인이 된지 10년이 넘었구요.
제가 먹고 사는 일에 관해선...비밀주의를 내세우기로 했습니다.

로쟈 2009-02-01 10:47   좋아요 0 | URL
동양사 전공자들 가운데에서도 없다면 좀 의외이면서 나름 심각한 문제겠는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01 15:09   좋아요 0 | URL
소수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면서 닥치는 문제점 중의 하나가 그런 것 같아요.한때 대제국을 건설한 만주족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몰락할 수 있는지 참 서글퍼요.

로쟈 2009-02-01 21:39   좋아요 0 | URL
몰락이야 자연사에 속할 수 있지만 그걸 기억/보존하는 건 다른 문제일 텐데 좀 유감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