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제국과 사고전서

서지학에 과문한지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는데, 중국 서지학의 고전도 출간됐다. 섭덕휘의 <서림청화>(푸른역사, 2011). '중국을 이끈 책의 문화사'란 부제가 좀더 다가가기 편하다('중국책'이라곤 하지만 당연히 조선의 지식인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켄트 가이의 <사고전서>(생각의나무, 2009)에 대한 욕심이 다시 생긴다. 뤄슈바오의 <중국 책의 역사>(다른생각, 2008)도 배경이 돼줄 수 있겠다. 수년 전 중국여행 시 소주에서 한 장서가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책을 사모으느라 가산을 탕진한 집이었다) 이런 책들을 미리 읽었다면 느낌이 조금 달랐을 듯싶다. 뭐든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세계일보(11. 06. 18) 100년 전 중국의 서재를 엿보다

‘서림청화’는 청나라 말기 판본학·목록학의 대가 섭덕휘(葉德輝·1864~1927)의 저술로, 책 자체를 다룬 저작으로는 전무후무하다는 평을 듣는 중국 서지학의 고전이다. 고서의 판본에 사용되는 각종 용어와 명칭을 정리하고 그 근원을 추적했으며, 또한 역대 출판기관과 그곳에서 출판한 서적들을 시대별로 개괄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판본학, 목록학 분야의 고전이 된 ‘서림청화’는 이후 등장한 수많은 저술에서 중요하게 인용되고 있다. 중국 고서의 판본과 고대 중국의 출판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보다 더 적당한 저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옮긴이의 생각이다.

저자 섭덕휘의 가문은 대대로 유학을 했고 장서에 취미가 있었다. 섭덕휘가 수집한 고서 중에는 송·원대의 판본도 있었지만, 명·청 이래의 정각본(精刻本)·정교본(精校本)·초인본(初印本) 및 초교본 등이 핵심이었다. 특히 청대 장서가들의 장서가 포함된 별집(別集)은 당대에 독보적이었는데, 이는 섭덕휘 장서만의 특색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 시대 고문헌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옮긴이 박철상씨가 ‘서림청화’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중국의 출판문화와 중국 고서에 대한 이해야말로 조선시대 우리 출판문화 이해의 첩경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중국 고서는 조선시대 출판물의 저본(底本)이었다. 조선시대 출판 방식의 하나는 중국에서 간행된 서적을 수입하여 활자나 목판으로 재간행하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의 출판은 정보의 수입과 유통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했기 때문에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이래 꾸준히 추진되었고, 간행된 서적도 상당수에 이른다. 중국 고서가 조선의 출판과 장서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다.

조선과 중국 출판문화의 가장 큰 차이는 상업출판의 성행 여부에 있었다. 안정적인 수요층을 전제로 하는 상업출판은 광범위한 서적의 유통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책이 다양해진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러나 조선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빈약한 경제력과 주자학 위주의 사상적 흐름, 일부 계층에 한정된 서적 수요는 관판(官版) 중심의 출판 시스템을 유지하게 했고, 본격적인 상업출판의 출현을 지연시켰다. 이때 중국본의 수입은 조선 출판문화의 취약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출판되지 않은 서적들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또한 중국 고서는 조선시대 출판의 공백을 보충해 주었다. 특히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출판 시스템이 붕괴되었던 시기에는 그 역할이 더욱 컸다.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문화적 파괴가 자행된 시기였다. 조선 전기에 간행된 중요한 전적(典籍)의 상당수가 멸실되었고, 출판의 핵심이었던 동활자와 고려조부터 전해오던 왕실도서들이 약탈당하거나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출판을 하려고 해도 그 저본마저 구하기 어려운 출판 공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부는 멸실된 전적들을 정비하기 위해 국내에 흩어져 있던 서적들을 수집하는 한편, 사행을 통해 명나라로부터 수입을 추진했다. 중국본의 수입은 빠른 시일 안에 부족한 서적을 보충하는 성과를 거두었을 뿐 아니라, 조선 지식인들의 장서구조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문학과 사상에까지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다양한 중국본을 대량으로 수장한 새로운 형태의 장서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이후 정조가 등극하면서 출판과 장서문화에 또 한 번의 변화가 일어난다. 정조가 청나라 문물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을 대량으로 수입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중국본을 직접 수입해 지적 갈증을 채워나갔고, 청나라 문사들과 교유를 넓히면서 청나라에서 간행된 서적들이 조선 지식인들의 서재에 넘쳐나게 되었다.(조정진기자) 

11. 0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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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덕끄덕 2011-06-27 03:05   좋아요 0 | URL
葉을 '섭'이라고 읽는 오류를 박철상씨도 범하고 있군요. 분명히 '葉'의 중국어 발음은 '엽'(ye, 중국음으로는 '예')과 '섭'(She, 중국음으로는 '셔') 두 가지입니다. '셔'(She)의 중국어 표기법이 대문자인 이유는 저 발음이 고유명사에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지명인 경우와, 고대인의 성씨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한문만 공부한 사람들은 저 음을 무조건 '섭'이라고 읽습니다. 물론 이는 잘못이고요. 이런 오류는 중국 고대문헌에 '葉'자가 고유명사로 나온 경우, '섭'으로 발음한다는 주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도 저 글자가 성씨나 지명으로 읽을 때 '엽'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달린 주석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 특히 명청시대에 들어와서는 성씨의 경우도 저 음을 '예'(ye)라고 발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명청대부터도 '葉'을 '섭'(She, 중국음으로는 '셔')이라고 발음하는 경우는 점차 사라졌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어떤 중국사람도 葉을 섭이라고 발음하는 사람은 없고요. 따라서 우리는 엽덕휘도 근대인이니, 당연히 섭덕휘가 아닌 엽덕휘라고 발음해야 합니다. 중국사람들이 중국어로 저 인물을 언급할 때 '셔더후이'(She Dehui)가 아니라 '예더후이'(Ye Dehui)라고 발음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덕택에 유명해진 중국의 권법가 '엽문'(葉問)이라든가, 대만출신의 유명한 영화배우 엽천문(葉蒨文)을 영화계에서는 모두 '엽'씨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 경우가 타당해 보입니다.
사소한 문제이겠지만, 국내 한학계 상당수의 학자들이 습관적으로 葉氏를 무조건 섭씨라고 읽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서 지적해봤습니다.^^

로쟈 2011-06-27 10: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중국어는 너무 어려운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