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라울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2009)를 다루고 있다. 역사서라고는 하나 이스라엘의 가자 공습과 맞물려서 '르포'처럼 읽히는 책이었다. 더불어, 우리 가까이에서 작동하고 있는 '파괴기계'를 눈여겨보도록 하는. 용산 참사는 그 징후가 아닐까. 섬뜩하고 섬뜩하다...  

  

한겨레21(09. 02. 09) 나치와 가자, 피해자는 가해자?

휴전 선언이 무색하게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이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군은 ‘하늘만 뚫린 감옥’이라 불리는 가자지구에 이미 수백톤의 폭탄을 쏟아 부었고, 폐허가 된 도시는 수천 명의 무고한 사상자를 내며 생지옥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소식이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학살의 피해 당사자였던 유대인 국가가 똑같은 ‘학살’의 가해자로 나선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미 영국의 한 유대계 의원은 이스라엘의 가자침공을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비유하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나치 독일과 이스라엘이 학살의 가해자로 등식화되는 것이다. 이 등식이 말해주는 것은 홀로코스트가 전적으로 히틀러만의, 혹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홀로코스트는 인류사에서 허다하게 자행된 대량학살(제노사이드)의 한 가지 사례다. 그렇지만 홀로코스트에 대한 성찰이 도달해야 하는 지점은 그 역사적 특수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선 어떤 보편성이어야 한다. 그것이 홀로코스트에 관한 수많은 연구서들의 지향점일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러한 보편성을 획득한 저작이 이미 오래전에 쓰였다는 사실. 최근에 출간된 라울 힐베르크(1926-2007)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개마고원 펴냄)는 1961년 초판이 간행되어 ‘홀로코스트학’이라는 분야를 만들어낸 고전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를 넘어서는 저작이 없다는 기념비적인 책이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홀로코스트 연구서”란 평판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잠시 유대계의 젊은 정치학도 힐베르크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1940년대 말 미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저명한 정치학자 프란츠 노이만을 만나 ‘독일정부론’ 강의를 듣는다. 그리고 나치즘의 지배구조를 다룬 노이만의 대작 <베헤못: 나치즘의 구조와 실행, 1933-1944>를 탐독하게 된다. 노이만은 나치즘이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이라는 4개의 독자적인 권력 블록으로 구성돼 있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 이론은 나중에 힐베르크의 홀로코스트론에도 그대로 수용된다.  

‘나치의 유대인 파괴에서 독일 공무원의 역할’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힐베르크는 자신의 관심범위를 더 확장하여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한다. 정부(공무원)뿐만 아니라 나치당과 군대, 그리고 기업의 역할까지도 포괄해서 규명해보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을 실현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그가 워싱턴에서 얻게 된 아르바이트 자리였다. 미군이 접수한 나치 문서들 가운데 소련 문제와 관련된 자료를 선별하는 게 그의 일이었는데, 그가 맡은 자료가 책꽂이로 무려 8km에 이르렀다고 한다.   

홀로코스트를 최초로 연구한 학자는 아니었지만 힐베르크가 이 분야의 ‘학장’이란 칭호까지 얻게 된 배경은 바로 이런 기록보관소 작업이었다. 그보다 더 많은 자료를 섭렵한 연구자가 없는 것이다. 그는 나치즘의 각종 행정기구들이 만들어낸 방대한 문서들을 1940-50년대에 내내 수기로 베끼고 원고를 쓰고 타이핑을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2단 교정지 800장 분량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 초판이었다.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독일 안팎의 ‘파괴의 장(場)’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사건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고 그는 자부했다.  

하지만 그는 이 책의 분량뿐만 아니라 그가 내보인 통찰에서도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 통찰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의 구조를 밝혀낸 점. 힐베르크가 보기에 그것은 일회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 ‘과정’이었다. 유대인의 개념이 정의되었고, 이어서 유대인의 재산이 약탈되었으며, 유대인이 게토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유대인을 절멸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것을 힐베르크는 ‘파괴과정’이라고 부르며 여기에 참여한 집합적 총체를 ‘파괴기계’라고 명명했다. 그가 보기에 특정기관이 특정과제의 실행을 주도한 적은 있어도 전체 과정을 지휘하고 조종한 기관은 없었다. 이로부터 그가 얻어낸 두 번째 통찰은 홀로코스트가 어떤 의도나 계획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 그에 따르면, “1933년에는 어느 관리도 1938년에 취해질 조치를 예견할 수 없었고, 1938년에는 그 누구도 1942년 사태의 윤곽을 그려볼 수 없었다. 파괴과정은 한단계 한단계 실행된 작전이었고 행정은 한 단계 앞 이상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러한 연속적 과정에서 독일의 근대적 관료제와 군대, 경제계와 나치당은 각각 어떤 일을 했던가? 행정관리들은 파괴과정의 초기단계에서 나치의 반유대적인 법령을 생산했다. 유대인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유대인 게토화를 개시했다. 그리고 독일군은 학살작전의 전개와 학살수용소로의 유대인 이송을 담당했다. 경제 및 금융계는 유대인 재산의 강탈과 강제노동, 가스학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나치당은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복잡한 관계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 관여했다. 요컨대, 유대인 파괴는 이러한 포괄적인 행정기계의 산물이었으며, 대규모 인간 집단을 단기간 내에 죽이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독일 관리들은 기괴할 정도로 놀라운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하면서 목표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아냈다.   

나치즘의 파괴기계에는 사실상 독일의 주요 기관들이 모두 망라돼 있기 때문에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 기계의 부속물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힐베르크는 유대인 자치기구와 학살센터의 유대인 노동대, 그리고 체념한 상태로 순순히 가스실로 향한 유대인들까지도 학살의 효율적인 진행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파괴기계에 포함시켰다. 그 많던 유대인의 이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힐베르크에 따르면 대부분은 중립을 지키며 일상에 몰두했다. 그렇게 악은 일상화되었고 500만의 유대인이 가스실의 재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금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일상화된 공습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또 다른 ‘유대인’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떼잡이’로 새롭게 정의된 용산 철거민 농성자들이 경찰의 강압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화재로 숨졌다. 이런 것이 홀로코스트의 보편성일까? 

09. 02. 02.  

P.S. 생각해보면, 노이만/힐베르크가 말하는 나치즘의 네 가지 권력블록은 우리에게도 적용가능한 것 아닐까? 관료제와 군대, 대기업, 나치당에서 군대 대신에 아마도 수구언론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 무서운 것은 굳이 어떤 의도나 계획 없이 일상적인 파괴기계(행정기계)의 작동만으로도 파국은 일어난다는 점이다. 일상화된 악은 그렇게 영혼을 잠식하며 우리를 죽음으로 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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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울비의 알림
    from seoulrain's me2DAY 2009-02-03 13:38 
    "나치와 가자, 피해자는 가해자?" - 한겨레21
 
 
노이에자이트 2009-02-0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헤못behemoth이라는 표기가 좀 이상하네요.우리말 표기가 그런가요? 노이만의 제자인 피터 게이 책은 꽤 번역이 되었는데 정작 노이만의 책은 번역이 안 되어 있어서 아쉽습니다.

로쟈 2009-02-03 22:07   좋아요 0 | URL
성서의 표기가 '베헤못'입니다. 게이도 노이만의 제자였군요. <베헤못>은 번역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