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북리뷰 기사에서 눈에 띈 것 중 하나는 미국 '뉴요커'의 필진이자 영화평론가라는 데이비드 덴비의 <위대한 책들과의 만남> 완역본에 대한 평이었다(책도 저자도 꽤 유명하다고). 나는 표지가 그닥 맘에 들지 않아서(조잡하다) 서점에서 자세히 들춰보지 않았는데, 예전에 나온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 1998)와 같은 책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표지만 기억이 나는데,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탔던 책이고 출판평론가 최성일씨는 '올해의 책'으로 꼽기도 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10년만에 2판의 완역본이 나왔다. 리뷰기사와 함께 10년전 리뷰도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08. 07. 12)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이유

십년은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다. 짧지 않음을 새삼 실감한다. 9년 전, 어느 매체에다 이 책의 첫 번역인 ‘미디어시대의 고전읽기’ <호메로스와 테레비>(1998)를 거론하며 이런 말을 했다. “이 책은 500쪽이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앗! ‘초역’에는 이것의 근거였을 ‘옮긴이의 말’ 같은 게 따로 없다. 본문에 있나, 아니면 나의 착각인가.

‘초역’을 통해 이미 이뤄졌을 수도 있지만, 이런 책도 ‘잘리지’ 않고 우리말로 옮겨졌으면 한 내 바람이 실현되었다. 이와 별개로 ‘초역’에 짐을 지우는 ‘완역’의 성립 근거는 온당치 못하다. “(이 번역의 질과 수준이 신뢰할 만한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판단에서 새로운 번역이 시도되었다고 하겠다).”(역자 서문) 뚜렷한 물증 없이 이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완역’에 의미를 부여했다.

‘완역’ 첫쨋권 초반에서 보이는 “데이비드/데이빗”과 “유대/유태”의 뒤섞인 표기는 꽤 큰 흠이다. 또한 원문을 그대로 싣는 ‘참고문헌 목록’은 전문적인 비평서 중심이라 수록하지 않았고, 학구파는 원서를 참고하라는 ‘일러두기’는 지나친 배려다. 월권으로 볼 수도 있다. ‘완역’에도 없는 게 있는 셈이다. 번역자와 편집자가 번역서의 ‘문지기’라면, 그들의 재량권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는지 한번 생각해볼 문제다.


‘완역’ 읽기는 달뜨지 않았다. (달뜬 느낌을 눅인 ‘초역’ 독후감은 <인물과 사상> 1999년 3월호 ‘최성일의 출판동네 이야기’ 참조) 나는 데이비드 덴비가 지칭하는 “우리”와 “누구나”에 들지 않아서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서양”이다. ‘초역’에선 “서방”이라고 옮겼다. 우리가 동구권에 대응하는 서방세계의 잠정적인 일원이긴 했다. 그러나 우린 서양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금방 분명히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게 플라톤의 <국가>는 여전히 흐릿하기만 하다. 나는 번역서를 주로 읽지만 번역시집은 거의 안 읽는다. 시구가 퍼뜩 와 닿지 않는 탓이다. 테일러 교수가 인용한 “모든 진실을 말하되 비스듬히 말하라”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에서 “비스듬히 말하라”의 뜻을 도통 모르겠다. 감을 못 잡겠다.

사실 나는 고전에 약간의 가중치만 부여한다. 미국 컬럼비아대 교양필수 강좌의 독서목록이 지닌 권위와 상징성에도 회의적이다. “옛 작품을 현재 상황을 그려내는 데 미흡했다는 식으로 평가한다면 고전은 살 수 없다”는 시각이 옳다면, 우리가 아무리 미국식 삶의 방식을 추종한다 해도 우리 나름으로 살아온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그것은 일천하기에, 우리는 서양 고전 없이 살 수 있다는 관점 역시 맞다.

내가 ‘완역’을 부루퉁하게 여기는 결정적 이유는 ‘완역’에 추가된 ‘제2판 머리말’(2005)에 있다. 데이비드 덴비는 9·11 이후 미국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당혹해하면서도 건전한 애국심을 견지하려 든다. 미국이 세계 평화를 크게 해치는 ‘악의 제국’이라는 세계인의 여론을 곱씹기는커녕 이에 억울한 감정이 있는 듯싶다. 그에겐 ‘신이여, 미국을 굽어 살피소서’가 더 다급해 보인다.(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물과사상(1999년 3월호)'올해의 책'과 에머슨의 세 가지 독서 법칙

내가 뽑은 올해의 책    
<출판저널>에서 '올해의 책' 추천을 내게 청했다면, 나는 국내 저자의 책과 외국 필자의 책을 하나씩 꼽았을 것이다. 조병준씨의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와 데이비드 덴비의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말이다. 이 책들은 앞서 살펴본 7개의 지면에서 각기 1번씩 소개된 바 있다. 조씨의 책은 언론노련의 30권 안에 들었고, 덴비의 책은 <출판저널>의 68권에   속했다. '그린비'와 '박가서장' 두 곳의 출판사를 통해 나온 조씨의 책은 '분산 출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깊지만, 책의 성격이 이 글의 주제와 딱 맞아떨어지는 <호메로스와 테레비>를 자세히 좀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호메로스와 테레비>(한국경제신문사)는 아직 책의 품질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언론의 이렇다 할 조명을 받지 못했다. 신문사 출판부에서 펴낸 책이기 때문이다. 국내 출판 저널리즘에는 묘한 관행이 하나 있는데 다른 언론사 기자가 쓴 책을 홀대하는 것이다. 홀대하는 방식은 아예 다루지 않거나 '두 줄'로 처리하는 것이다. 신문사 출판부가 만든 책에 대한 대접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판저널> '올해의책'에 포함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중한 출판평론가는 추천의 변을 이렇게 밝혔다. "마흔 여덟의 언론인이 하버드대학에 다시 복학해 들은 교양교육을 듣고 소감을 적었다.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인문학의 역사와 문명론을 살핀다."

잡지에 실린 그대로 옮겼는데 여기에는 큰 오자(?)가 있다. 처음에는 사소한 실수로 여겼지만 책을 확인해 보니 그렇지가 않다. 덴비의 모교는 하버드가 아니라 뉴욕에 있는 콜럼비아대학이다. 배경의 측면으로는 콜롬비아나 하버드나 그게 그거다. 하지만 이 책의 주제가 되는 교양강좌는 콜럼비아대학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시작돼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가 지금은 콜럼비아와 시카고대학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서다.

<호메로스와 테레비>는 대학 강좌 수강기이다. 덴비는 졸업 30년만에 두 개의 교양강좌를 재수강한다. 유럽의 표준적인 문학선집을 강의하는 '인문학'이 그 하나고, 철학 및 사회 이론 분야의 걸작선집을 다루는 '문명론'이 다른 하나다. 이 둘은 나뉘어 있지만 '서양문명개론'에 해당하는 하나의 강좌로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책에는 두 강좌가 뒤섞여 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다. 강좌의 중심에는 서양의 고전이 자리한다. 이 책에 언급된 고전들만 읽으면 에머슨의 두 번째 독서 법칙은 쉽사리 지켜진다. "유명한 책만 읽는다."
    
백인·남성 중심의 서양사상사
호메로스와 플라톤에서 조셉 콘라드에 이르는 고전 목록은 백인·남성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흑인 여학생의 비판에 직면한 대학 당국자의 해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우리 교수들은 서방의 고전들을 가르치기에도 벅찹니다. 그 분들에게 동양 문헌에까지 정통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쳐요." 강좌의 교수진은 관련 학과에서 차출된 여러 명으로 구성된다.

이 중 한 명을 국내 TV뉴스를 통해 볼 기회가 있었다. 제임스 샤피로 교수는 지난해 9월 23일 문화방송의 <9시 뉴스>에 등장했다. 이우호 특파원의 방문을 받고, 클린턴의 지퍼게이트를 보는 미국민의 상반된 견해에 대해 코멘트하는 샤피로 교수는 책에 묘사된 그대로였다. "금발의 젊은 영어 교수인 그는 큰 키에 스포츠팀 코치 같은 모습이었다."

나 역시 흑인 여학생의 기세등등한 목소리에 잠시 흔들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콘라드에 대한 덴비의 평가를 읽고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에 대한 균형된 시각을 갖게 되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에는 제인 오스틴과 콘라드를 제국주의자로 몰아붙이는 대목이 있다. 덴비는 그것을 가혹한 처사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치누아) 아체베와 사이드의 고뇌에 찬 거부는 콘라드의 확고한 위치, 서방 문학의 핵심 커리큘럼에 대한 가능한 결론으로서 그의 위치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라는 진술을 통해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런 류의 책에서 항시 느끼는 것이지만, 서양 사상사에서 마르크스가 차지하는 지위는 대단하다. 그리고 이 책은 마르크스에 앞서 다양한 사상을 탐구하라던 1980년대 '웃어른들'의 가르침이 갖는 일면적 진실을 깨우쳐 준다. "마르크스만 읽으면 된다"는 이야기는 에른스트 블로흐 같은 대가에게나 해당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중생이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사상사에 대한 기초지식의 습득이 필수적이다.

이 책은 5백 쪽이 훨씬 넘는다. 그나마 번역자가 일부 편집을 한 게 그렇다. 이런 책도 '커트' 없이 우리말로 옮겨지고, 많은 사람에게 읽히는 세월이 왔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램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다시 한 번 아주 천천히 이 책을 음미해 가며 읽고 싶다. 그것은 한편으로 에머슨의 세 번째 독서 법칙을 준수하는 일이다. "좋아하는 책만 읽는다."

08. 07. 14.

P.S. 최성일씨의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8)도 사실 지난주에 선을 보인 책이다. 같은 타이틀의 첫권이 2002년에 나온 이후 네번째 책이다. 분량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주로 국내에 소개된 '사상가들'의 저작과 사상을 간명하게 정리해주는 장점이 있다. 출판칼럼니스트답게 서지사항을 꼼꼼하게 챙겨주고 있어서 관심있는 독자들에겐 유익하다. 참고문헌에 대한 평도 포함됐다면 더 좋았을 듯하다(나는 1, 2권만 오래전에 훑어본 기억이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루쉰P 2008-07-15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좋은 책들을 알려 주시네요^^ 전 백수로 또 돌아왔습니다. 비평고원은 이제 잘 안 오시나봐요. 저도 알라딘에 와서 로쟈님의 추천 책들을 보고 갑니다.



로쟈 2008-07-15 11:12   좋아요 0 | URL
비평고원도 가끔 들르는데 예전만큼의 활력은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7-15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룬 책들이 지나치게 고대 전근대 쪽에 치우쳐 있더군요.저 같으면 19세기 이후 것을 더 많이 취급했을 거예요.

로쟈 2008-07-15 23:33   좋아요 0 | URL
강의 자체가 '고전 읽기'여서 그런 듯합니다. 말 그대로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