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해서 씻고 한숨 돌린 후에 책상머리에 앉으면 보통 10시 전후이다. 이때부터 다시 원고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할일들을 해야 하는 게 로쟈의 '이중생활'이다. 반나절의 시간은 더 주어져야 뭐든 제대로 할 듯싶은데, 사정은 여의치가 않아서 시늉하는 것만으로도 곯어떨어지기 일쑤다(이런 걸 '저질 체력'이라고 부르더만). 서재일은 그런 와중에 부리는 거드름이요 체면 유지다. 식후에 꼭 챙겨마시는 믹스 커피처럼, 건강에 별로 좋지는 않지만 로쟈의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물론 중독성도 있는 것이고). 오늘의 페이퍼 거리로 고른 건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의 웹진 '서평문화'에 실린 한 서평이다. 루디네스코의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를 다루고 있는데, 번역에 대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어서 '번역과 번역가' 카테고리에 분류해넣는다(책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22611 참조). 사실 이 서평을 고른 건 오늘 루디네스코의 <광포한 시대의 철학>(영역판, 2008; 불어판, 2005)을 손에 넣은지라 '루디네스코'란 이름이 나름대로 의미있게 다가온 때문이기도 하다. 서평에 병기된 외국어는 글자가 깨져 있기에 대부분 삭제했다.   

서평문화(2009년 겨울) 정상과 도착 사이의 오랜 공모와 변전의 역사   

『프랑스 정신분석의 역사』전 2권, 제1권: 1885-1939, 제 2권: 1925-1985, Seuil, 1986와 라캉의 전기, 『자크 라캉, 한 인생의 스케치, 한 사유체계의 역사』Seuil, 1993; 국역본:『자크 라캉』, 양영란(*양녕자) 역, 새물결, 2000로 성가를 얻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분석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라캉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중심에 위치하려고 하며, 더 나아가 세계 사상가들의 관계에 균형적인 관점을 취하려 애쓴다.  

 

그래서 그는 라캉의 18번째 세미나(1971), 『동류의 것이 아닐 담론에 대해 』(Seuil, 2006)에 대한 서평(『르 몽드』 2008년 1월 18일)을 쓰면서 라캉이 “여기에서 데리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적시함으로써 일군의 라캉주의자들을 술렁이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2007년에 낸 저서는 독자적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알린 또 하나의 성과이다. 그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악의 쾌락 - 변태에 대하여』로 되어 있는데, 원제를 직역하면 『우리 자신의 어두컴컴한 부분』(Albin Michel)이다. 그리고 ‘도착자들의 역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즉 이 책은 도착증에 들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살핀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파악한 그 역사의 일반적 성격은 인류의 '어두컴컴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보기에 두 개의 역사가 있다. 밝은 역사와 어두운 역사. 어두운 역사인 도착자들의 역사는 그 어둠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이해될 수 없고, 밝은 역사인 인류사에 비추어져 그 의미가 해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역도 성립한다. 인류사는 어두운 역사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줄기를 정상인들의 역사로 만든다. 정상인들이 도착자들을 분별케 한다면, 도착자들 때문에 인류의 ‘정상성'이 존재한다. 그 둘은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도착은 문자 그대로 도착이고, 그 정상인들은 정말 정상적인가? 때로 도착은 발생했다기보다는 발명되었을지도 모르며, 도착을 통해 정상을 유달리 강조하는 문명은 정상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저자의 궁극적인 관심은 도착 그 자체가 아니라 도착과 정상의 관계라는 점이 이 책의 첫 번째 표점이다. 그리고 이 구도에 의해 ‘도착'이 정신분석적 의미로부터 문명사적 의미로 확대되어 쓰이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도착'은 변태적 성행위라기보다는 비정상적인 인간 행위 일체를 가리킨다. 그 관계의 일반적 성격을 ‘어두컴컴한 부분'이라고 제목은 말하고 있는데, 그 규정은 한 가지 사실만을 가리킨다. 즉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비정상성이 그것이다. 어두컴컴하다는 성질이 가리키는 것이 그것이다.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도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한편으론 자본축적의 경제에 맞서 탕진의 일반 경제학을 세운 바타이유의 『저주받은 몫』(Editions du Minuit, 1949; 국역본: 『저주의 몫』, 조한경 역, 문학동네, 2001)을 연상케 하고(책의 제목은 분명 바타이유로부터 암시를 얻은 게 틀림없다.), 다른 한편 성스러움과 폭력이 긴밀한 상관관계를 구성하고 있음을 밝힌 지라르의 작업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루디네스코의 작업은 바타이유의 그것이 대항-실천적인 성격을 가진 데 비해 상관성을 유비하는 객관적 관찰의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또한 지라르의 그것처럼 종말론적이지 않다.  

이 책의 궁극적인 관심은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의 보편적 성격이 아니며,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도 아니고, 심지어 그것의 원인이나 결과도 아니라, 정상과 도착 사이의 관계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인데, 그 과정은 예측불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집요한 심화의 방향으로 가는가 하면, 돌연한 자기배반적 선회를 감행하기 때문이다. 넓게 보면, 그 과정은 순환적인 형식으로 회오리를 그리면서 전자電子의 이탈과도 같은 돌연변이의 계기를 통해 응용의 층위를 이동해가는 과정이며 그런 점에서 진화론적이다. 바로 이것이 제목이 말하지 않고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 책의 두 번째 표점에 해당한다.

그 변화는 다섯 차례의 단계를 거쳐서 오늘에 이른다. 중세에 도착은 정상성의 극단적인 추구 속에서 스며나오기 시작한다. 성스러움이 강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비천함도 함께 또렷해진다. 그리고 비천함은 성스러움의 영원성, 혹은 그것을 더욱 성스럽게 하기 위한 방법적 타락으로 기능한다. ‘욥'의 고난 이후, 신비주의자들의 자기 학대, 그리고 제 몸에 온갖 피부병을 기른 성녀 리드비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러한 방법적 타락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타락이 본연의 권리를 요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순수한 인간적 행위로서의 질 드 레의 엽기적 범죄 행각이 그것이다. 질 드 레의 도착을 세계는 거부하여 그를 처형했다가 9년 후 다시 거두어 "자백과 회개의 은총을 통해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물"로 탈바꿈시킨다. 이럼으로써 한 순간 위기에 처한 성스러움과 타락의 협력관계는 인공적으로 봉합되어 나가는 듯하지만, 그러나 봉합이 이루어진 순간은 동시에 신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으로 바뀌는 순간이 된다.  

우주의 자연법칙에 대한 호기심이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진화해 가는 18세기에 자연법칙은 신의 율법주의에 대항하여, 자연에 속한 자(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이해되기 시작한다. 때문에 사드가 묘사하고 권장한 도착적 행위들은 신의 가르침에 의해 정상적인 것으로 인정된 행위 외의 모든 것으로서, 후자를 대체할 새로운 법칙의 항목들로 제시된다. 이제 정상과 도착의 질서에 전도가 일어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내발적 권능으로 간주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인간의 힘으로는 통제하지 못하는 끊임없이 운동하는 자연"의 법칙이다. 새로운 법칙은 인간의 몸을 경유함으로써 신에게 대항하였지만 인간의 몸을 빠져나감으로써 의미의 총체적인 부재로서, 일종의 과잉된 현존, 구역질나는 잉여가 된다.  

따라서 이 도착적 행위의 법칙화 시도는 실천적으로는 실패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 실패의 결과는 인류의 무대에 의미심장한 결과를 낳는다. 무엇보다도 도착증의 공론화. 즉, “미치광이도 범죄자도 아니며 사회에 받아들여질 수 있지도 않은" 존재가 현실 한 복판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의 인정. 그럼으로써 사드적인 것은 인류가 이룩한 문명이 자신의 정화를 위해 배척해버린 모든 추악함의 집결지로 지목될 수도, 혹은 정반대로 그 문명이 억압한 어떤 다른 생의 가장 극적인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게 된다. 두 경우 모두 사드적인 것은 인류 문명에 대한 모독으로서 존재하겠지만, 전자의 경우, 그것은 인류의 문명이 신의 질서를 흉내내는 가운데 발명한 방법적 타락으로서 기능할 터이고, 후자의 경우엔 마조히즘에 대해 들뢰즈가 엿보았던 것처럼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복할 강력한 준거점으로 기능할 것이다. 

아마도 저자가 보기엔 전자의 길이 19세기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이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세 단계, 즉 19세기 부르주아의 성장, 20세기의 파시즘, 그리고 오늘날의 생명주권주의 biocratie(이는 개념적으로 푸코의 생명관리공학 biopolitique과 유사한 듯이 보인다)를 위한 다양한 시도 및 제도화는 인류의 현재적 진행을 이상화하는 한편, 도착적인 것을 현재의 상황에 규범적으로 통합될 수 있는 기능적 현상 혹은 대상들로 바꾸어, 이상적 사회의 자원들로 활용 재활용하는 작업의 진화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인류는 저 중세의 신 중심사회가 자동적으로 가동해 온 자기성화장치를 신의 몫으로부터 인간의 몫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였고, 그 성공의 길은 무한히 뻗칠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저자의 눈길이 찬탄 혹은 경악에만 바쳐져 있는 건 아니다. 도착적인 것의 공론화는 또 다른 효과를 갖는다. 즉 방금 살펴 본 과정이 정상과 도착을 구별하고, 도착적인 것을 배척하는 방식으로 정상성 내에 통합하는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바로 그러한 기제의 내적 구조를 성찰하는 기회가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 성찰은 “암울한 사색가들"의 존재에 의해 지탱되는데, 이들은 도착을 활용하는 정상적 사회 자체가 실은 '증오에 대한 사랑'에 의해 가동되는 무서운 도착적인 사회임을 끊임없이 적발하고 경계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들이 한결같이 되풀이하는 경고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투명함과 감시를 예찬하고 자신의 저주받은 부분을 소멸시키는 일에 혈안이 된 사회야말로 도착적인 사회다."(228쪽) 

그러니 인류사에서 정상과 도착이 항상 공모하고만 있었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인류는 또한 그러한 공모를 괴롭게 고민하고 정상의 폭이 열리는 데 도착이 여하히 기여할 수 있는가를 모색하는(이 부분은 루디네스코의 저작에서는 이론적으로 검토되고 있지 않지만, 예시적인 방식으로 다양히 제시되어 있다. 즉 도착은 정상성의 도구가 아니라, 그것의 생생한 가능태인 것이다.) 종족이기도 한 것이다. 이 저서가 독자에게 최종적으로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 한다. 



마지막으로 번역에 대해 말하자. 한마디로 간신히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프랑스어 독해 수준의 범용함은 일단 논외로 하자(어쨌든 간신히나마 읽을 수는 있게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우선 정신분석과 철학의 전반적 상황에 대한 번역자의 정보가 너무 가난해서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의 저자를 엘리자베트 드 퐁트네로 만들고 푸코를 그 책 서문을 써 준 사람으로 돌리는가 하면, 데리다를 “동물행동학자, 인지주의자, 행태주의자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게다가 해독이 까다로운 부분들은 빈번히 번역에서 제외하고, 아무도 그 까닭을 짐작 못할 번역자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각주의 상당 부분을 누락하거나, 때론 본문에 포함시키기도 한 것은, 번역의 윤리를 새삼 되묻게 한다.  

원저에 없는 그림들을 삽입한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는 명분에 의해 용인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본문에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변태'라는 역어를 책 제목에 사용한 것이며, 장 제목을 제멋대로 의역하고, 원저에 없는 절들을 분할해 그럴 듯한 제목들을 달아 놓은 까닭은 또한 무엇인지? 원서가 가진 매력이 아니었더라면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원서와 문장 하나하나를 대조해가는 고역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다.(정과리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09. 02. 04. 

P.S.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책은 구입했지만 아직 읽지는 않았다. 번역본의 경우 보통 원서와 같이 읽는데(특히 철학서이나 이론서일 경우) <악의 쾌락>은 아직 영역본이 나오지 않았다(그럴 경우 대개는 독서를 미뤄둔다). 서평을 읽다 보니 나도 왜 제목에 '변태'란 말이 들어갔는지 의문이다. '도착'이란 말이 일반 독자들에게 생경하다고 판단했을까? 하지만 서평자가 지적하고 있는 자의적인 누락 따위야말로 '변태'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페이퍼의 제목은 그런 생각에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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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05 0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트를 보니 정말 번역서의 실태가 - 특히 인문서의 경우 - 그다지 안 좋은가 보군요. 혹시 국내에 전문 번역비평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까?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그런 사이튼 저도 모르겠는데요.^^ 대신 관련학회가 두 곳이 있고 학회지도 나옵니다...

2009-02-06 2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23: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0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7 2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akim 2009-02-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안봤는데 원본과 대조하여 읽지는 못하지만 빨리 읽어봐야겠습니다. 참고로 이희원 박사의 <무감각은 범죄다>는 대단한 이론적 기획이고 용기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크스의 대상성 개념을 기반으로 라이히와 바타이유를 통해 인간의 성을 미학적 테제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제 관심분야라 며칠이 걸려 정독했거든요. ^^

로쟈 2009-02-06 00:3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갖고는 있는 책인데, 아직 읽을 짬을 못내고 있어요.^^;

2009-02-05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9-02-06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행중 다행"으로 이 책은 아직 구입하지 않았네요..--v
그런데 서평을 읽어보니 내용이 참 흥미로운데 이런 좋은 책이 안좋은 번역이라니 안타까운일이라 아니할 수 없군요. 광기와 도착 혹은 비이성과 이성의 구도속에서 펼쳐지는 현대프랑스사상의 흐름을 조망할 수 있는 좋은 내용물을 가진 책인것 같은데 말이지요.

로쟈 2009-02-06 23:40   좋아요 0 | URL
번역 문제는 사실 고질적인 문제인데,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