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정의

<일리아스>을 읽으면서 참고한 자료 중의 하나는 해럴드 블룸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인데, 서양문학 '작가사전'으로 아주 유익한 책이다. 블룸 자신의 기준에 따라 100명의 천재를 선정하고 그 천재성을 10가지 범주로 분류해놓았다. 비록 서양문학에 한정된 것이긴 하지만(무함마드와 <겐지이야기>의 저자 무라사키 시키부가 예외적으로 포함돼 있다) 이만한 규모의 작가론을 써낼 수 있는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해서 번역본이 나온 것만으로도 놀라우면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책의 구입을 계속 미루다가 지난달에야 원서와 함께 구입했다. 그건 번역본이 '완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점에 대해선 역자도 후기에 밝혀놓고 있으므로 완역본을 참칭한다거나 해서 독자를 속인 건 아니다. 이렇게 적어놓았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애초에 원문 814쪽에 이르는 방대한 양을 출판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출판사와의 협의에 따라 부득이 일부 내용을 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 등은 일부 생략했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896쪽) 

번역문이 893쪽에 이르지만 814쪽의 원문을 다 옮긴 건 아니라는 자백이다(짐작에는 5-10% 가량을 덜 옮겼다). 한데 사정상 방대한 분량을 다 옮기진 못했다고만 하고 양해를 구했다면 독자로선 아쉬움만 클 텐데, 일부 내용을 빠뜨린 이유를 저자 블룸에게 전가하고 있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 혹은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를 생략했다고 하나 내가 읽은 일부 대목들에서 생략은 그냥 임의적이었다. 역자나 출판사 사정으로 완역하지 못한 것을 애꿎게도 저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예의에 맞지 않다. 

호메로스 편을 예로 들자면, 호메로스의 아이러니는 "자신의 창작이며, 때로는 자신의 승리 그리고 이전의 가인들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을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블룸은 <일리아스> 2권에 나오는 트라키아 사람 타미리스를 예로 든다. 제우스의 딸인 무즈들과 경연을 해도 자신이 승리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뮤즈들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고 노래하는 재주도 빼앗긴 시인이다. 그런 전례가 있기에 "호메로스는 뮤즈들과 경쟁하지 않으려고 신중을 기한다." 그래서 <일리아스>와 <오디세우스>의 서두를 뮤즈(불멸의 여신)에 대한 간청으로 시작한다.   

<일리아스>를 예로 들면 "Anger be now your song, immortal one"이라고 부르는 식이다(블룸의 인용은 로버트 피츠제럴드의 번역이다. 교재로 좀더 많이 쓰이는 리치먼드 래티모어의 번역은 "Sing, goddess, the anger of Peleus' son Achilleus"로 시작한다). 번역본은 "불멸의 여신이여, 이제 노여움을 노래하소서"라고 옮겼지만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정도가 좋겠다('분노'란 말이 이 작품에서 갖는 중요성을 고려해서도, 원작에서도 첫 단어가 '분노(menin)'라는 점을 고려해서도 그렇다). 이를 통해서 "호메로스는 마치 이전의 시인들이 뮤즈들과 경쟁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살아남지 못했으므로, 자신만이 실질적인 최초의 시인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는 것처럼 보인다."(573쪽) 그리고 뮤즈(무사mousa)에 대한 간청을 서두로 삼는 것은 호메로스 이후 서사시의 전통이 된다.   

이 인용문에서 이어서 블룸은 "우리는 타미리스의 목소리를 빼앗은 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How should one read the unvoicing of Thamyris?)"라고 질문을 던지고 두 문단에 걸쳐 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번역본에는 생략됐다. "중복되는 설명이나 예문"이거나 "본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블룸의 개인적인 일화나 정치적인 견해"로 간주된 모양인데, 애초에 그냥 '편역'이라고 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호메로스 편은 물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서사시에 대한 평을 담고 있는데, <일리아스>에 한정하자면 생략된 부분은 한번 더 나온다. "호메로스의 천재성에는 매우 복잡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재주를 비롯해 여러 가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리아스>에 나타난 아킬레우스의 보편성은 그의 탁월함은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다."(574쪽)라고 지적한 다음 블룸은 아킬레우스와 오디세우스, 두 영웅의 평판이 서로 엇갈려온 역사를 간단히 기술한다. 200년 전만 해도 아킬레우스가 더 걸출한 인물로 간주됐지만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작가들에게는 오디세우스(율리시스)가 더 인기를 끌었는데, 그건 "오디세우스의 영웅적이고도 악한 같은 측면이 강한 호소력을 발휘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의 풍부한 지략과 술책이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인다. 이어서 허클베리 핀과 셰익스피어의 율리시스적 인물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5행 더 나오지만 이 역시 생략됐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플라톤은 <일리아스>의 신들이 장난삼아 인간을 죽였다는 점을 참을 수가 없었다.(574-5쪽) 

원문은 "The Homeric gods, though we think of them as definitive for the ancient Greeks, were very troublesome for many who came after Homer, and for Plato in particular, who could not tolerate the idea that the gods of the Iliad, in particular, killed for their sport."(505쪽)인데, 앞부분을 잘못 옮겼다. '고대 그리스인(the ancient Greeks)'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옮겼기 때문이다(고대 그리스에선 인간과 신이 동급이었다면 모를까). 그래서 "우리는 호메로스의 신들을 고대 그리스 신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들은 호메로스의 후세들에게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는 문장의 의미를 알 수 없게 만들었는데, 'definitive'가 '한정적인'이란 뜻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결정적인'란 의미로 풀어주는 게 좋을 듯싶다. 욕심을 내자면 '절대적인'으로 옮기고 싶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호메로스의 신들이 절대적인, 확고한 지위를 갖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들은 한마디로 '골치아픈 존재들'이었고, 특히나 플라톤 같은 경우는 역겹게 생각했다는 지적이다.  

이어지는 내용은 아킬레우스에 대한 평가다. "어느 면에서 호메로스의 신들은 어린아이이며, <일리아스>의 영웅 아킬레우스도 비록 비극적인 인물로서의 위엄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면에서는 어린아이"라는 게 블룸의 견해다. "아킬레우스는 성난 아이가 다친 고양이 새끼를 괴롭히는 것과 흡사하게 트로이인들을 도살한다." 아킬레우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블룸이 꼽는 것은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분노하여 다시 전장에 나서 포효하는 대목이다. "<일리아스> 제17권 '참호 위의 아킬레우스'에서"라고 출처를 밝히고 있는데, 문제의 장면은 제18권에 나오므로 아무래도 블룸의 착각 같다(원서의 편집자가 교정하지 못한 것은 의외다). 아테나 여신까지 가세한 포효 소리에 트로이군의 간담은 서늘해지는데 아예 쓰러져 죽기까지 한다.  

그와 아테나가 번갈아 함성을 내지르자 트로이인들은 공포심을 느낀 나머지 가장 용감한 전사 열두 명이 뒤로 주춤거리다가 동료의 창과 이륜전차에 목숨을 잃는다. <일리아스>의 포악한 위대함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다.(577쪽) 

블룸은 애덤 패리(Adam Parry)의 말을 빌려(번역본은 '애덤 페리(Adam Perry)'라고 오기했다), 아킬레우스를 "일상적인 언어를 수용하지 않으며 그것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호메로스적인 영웅"이라고 평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자신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데, 여기서 그의 타자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577쪽)

이 대목은 "And yet Homer shrewdly gives the alienated Achilles no language of his own, in which his otherness could be explicitly disclosed."(507쪽)을 옮긴 것인데, 번역문 부정확하게읽힐 수 있다. '아킬레우스에게 자신만의 언어를 주지 않는" 데서 그의 타자성이 드러나는 게 아니라, 그의 타자성을 명백하게 드러내줄 수 있는 언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혀야 한다.  

패리가 지적했듯이, 햄릿은 공공연하게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데 뛰어났고 또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비극을 표현할 줄 알았다. 그에 비해 영웅 아킬레우스는 상대적으로 이러한 비극을 거의 표현하지 않으며 또한 표현할 수도 없다. 호메로스는 이러한 무능력함을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아킬레우스가 처한 궁지를 애절하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리스 최고의 인물이지만 간절한 승리의 염원 때문에 파멸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리아스>를 쓴 시인 호메로스의 천재성은 아킬레우스에게서 찬란하게 빛난다."(577쪽)  

여기까지가 블룸의 <일리아스> 읽기다. 기회가 닿으면 블룸의 <오디세이아> 읽기도 마저 다루고 싶다. 그전에 <오디세우스>도 완독해야 하고, 이왕이면 <율리시스>까지 완독해야 할 테니, 먼훗날이 되겠지만... 

11.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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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1-07-17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보다 덜어낸 분량이 많군요. 5~10%라니... 정말 원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요. 번역본을 듬성듬성 읽기는 했지만 블룸은 치밀한 논리 전개보다는 통찰력있는 언어들을 뱉어내는 비평가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의성'과 '계발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 읽어야 될 것 같더군요. 언젠가 오역을 지적하신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하실 계획은 없으신지요?^^ 벌써 상당한 분량일 것 같은데요. 국내 번역서들을 읽는데 좋은 참고가 될 것 같습니다.

로쟈 2011-07-17 12:24   좋아요 0 | URL
나중에 덜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스킵하면서 번역한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게 못마땅해서 사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나머지 90%에 대해선 참고/인용할 수 있으니 없는 것보단 낫긴 합니다.^^;

파고세운닥나무 2011-07-18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현대문학을 잘 모르지만 블룸은 남성,백인,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문학만을 가치있다 여기는 비평가죠.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는 [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에서 블룸을 이리 평가합니다. "정전적 인문주의라 불리는 오만한 유미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대중연사인 해럴드 블룸은 정신의 활기 넘치는 현존을 보여주기 보다는 그 부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블룸은 언제나 공개강연에서 받은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고, 다른 주장들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며, 그저 단언하고 확언하고 읊조릴 따름입니다. 이것은 자기상찬이지 인문주의가 아니며, 물론 진일보한 비평도 아닙니다."
블룸의 비평관을 저 개인적으로는 수상쩍다 여기고 있습니다.

로쟈 2011-07-18 20:04   좋아요 0 | URL
'정전적 인문주의'란 말을 맞습니다(대개의 '고전'주의자들처럼 블룸 또한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죠). 셰익스피어주의라는 게 있다면 셰익스피어주의자이기도 하고요. 활기가 없는 것도 맞습니다. 인터뷰 같은 걸 보면. 동시에 '자아'주의자이기도 하고. 그래도 저는 그의 작가론과 작품론을 참고합니다. 배우는 게 있어서요...

2011-11-14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5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명한 지식인/예술가들의 서재 구경이나 잠시 해보려고 <지식인의 서재>(행성:B잎새, 2011)를 손에 들었다가 뜻밖의 '문장수업'을 받았다. 자연과학자 최재천 교수가 미국 유학시절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대목에서인데, 과학논문을 쓰기 위해 '테크니컬 라이팅' 코스를 수강한 그는 '일생일대의 스승 로버트 위버 교수'를 만나게 된다고. 시인 흉내를 내는 게 눈에 띄어 개인 교습을 받게 됐는데, 위버 교수는 방에 놓인 긴 의자에 누워서 그가 들고 온 글을 읽게 했다. 그리고 맘에 안 드는 대목이 있으면 이유를 설명하게 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고치도록 시켰다.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교수와 제자는 글을 고쳐나갔다. 이 과정이 어떤 때는 밤이 어둑해질 때까지 끝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학기 중간쯤 되어서는 고치는 문장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최재천에게는 글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이 생겼다. 혀에서 구르지 않으면 수십 번이고 고쳐 썼다. 그러다 한숨에 문장이 쭉 굴러가면 그제서야 완성이다. 로버트 위버와의 수업은 최재천에게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수업이었다.(54쪽)

요즘 유행하는 멘토-멘티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국어교과서에도 실리게 된 최 교수의 글쓰기 실력은 그렇게 해서 갖춰진 것.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위버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으러 갔다고 한다. 이번엔 거꾸로 위버 교수가 최재천을 긴 의자에 눕게 하고 자신이 학생용 의자에 앉아서 추천서를 읽기 시작했다. '가르치고 배우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최재천 교수의 사례는 <글쓰기의 최소원칙>(룩스문디, 2008)에 실린 강연에서도 언급된 듯싶다.)  

"마음에 드세요?"
"사실은 말이야, 난 이렇게 쓰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쓰시죠." 

그렇게 해서 위버 교수가 최종적으로 완성한 추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He writes with precision, economy, and grace(그는 정확하고 경제적이며 우아하게 글을 쓴다)." 

이 '기막한 추천서'에 가슴이 벅차오른 최재천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이렇게 써주셔도 되는 겁니까?" 
"왜 부끄럽니? 앞으로 이렇게 쓰면 되지?"
그 순간부터 최재천은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이라는 세 단어를 가슴에 새겼다.(55쪽) 

'테크니컬 라이팅' 코스도 없었고, 문장수업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선 좀 부러운 사례이다. 아무려나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은 직업작가만 아니라면(그런 경우엔 여러 가지 문체가 선택지로 놓인다) 권장할 만한 글쓰기 덕목이다. 특히나 젊은 대학(원)생들에게는.    

<지식인의 서재>에는 각 서재 주인들의 추천도서 목록도 장 말미에 실려 있는데, 최재천 교수의 경우는 김병종 교수의 <화첩기행>(효형출판)을 첫번째 순위로 꼽았다.  

"저는 이 분의 책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림도 최고이고 글도 최고입니다. 제가 김병종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이 분의 책이 나온 출판사에 제 원고를 직접 들고 찾아갔어요. "김병종 선생님이 책을 낸 출판사에서 저도 책 한번 내게 해주십시오."

문장가도 경탄을 아끼지 않은 문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화첩기행>을 나는 안 갖고 있기에. 하지만, 그 출판사에 낸 최재천 교수의 책은 읽어봤다. 알고보니 첫번째 책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었다... 

11. 05. 21.  

P.S. 이번주에 책상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 유종호의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그리고 존 그레이의 <추악한 동맹>(이후, 2011)이다. 두 한국 문학평론가의 유려한 문체는 이미 소문난 것이고,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에 이어서 읽는 존 그레이의 책 역시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의 원칙을 만족시킨다. 번역이 좋지만 이번에도 원서를 구할까 생각중이다. 순전히 문장 때문에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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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린의 생각
    from ptec's me2day 2011-05-24 15:57 
    직업적 글쓰기 의 원칙은 정확성,경제성,우아함 이다. 최재천교수님 처럼 최고의 멘토를 만날 수 있는것도 커다란 행운이다.
  2. 그린의 생각
    from ptec's me2day 2011-05-24 16:03 
    글쓰기의 원칙은 정확성,경제성,우아함이다. 로버트위버교수와 최재천교수님의 일화가 너무나 부럽다. 누군가가 저런 멘토가 되어 준다면…
 
 
비로그인 2011-05-2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데요. 얼른 작문 숙제를 끝내고 낚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두 꼬맹이 아들에게 자신들의 글을 되풀이해서 고치게 만들던 아버지... 그런 식의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어 부럽기도 했고요....
말이 나온 김에, 개인적으로 늘 궁금했던 건데, 저런 은사를 두신 것도 아니면서 로쟈님은 어떻게 그토록 정확하고 경제적이며 우아한 글을 쓸 수 있게 된 건가요? 비법이 있다면 한두 가지만 알려주시면 안 되나요?^^

로쟈 2011-05-21 15:35   좋아요 0 | URL
네, 인상적인 장면이었죠. 정확하고 경제적이고 우아한 글은 써보려고 저도 애쓰고는 있습니다.^^;
 

엊저녁에 뒤적거린 책은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이다. 도서관에서 <교양인의 책읽기>(해바라기, 2004)를 대출해서 비교해가며 몇 장을 읽었는데, 번역이 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진 않아서(블룸의 문장을 만족스럽게 옮기는 것이 가능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원서를 주문했다. 완역본이 아니어서 제쳐놓았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도 할인판매를 하길래 주문하고(예전에 도서관에서 잠깐 빌려서 보긴 했는데, 그 또한 원서를 구해야 할지는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오늘 잠시 들여다본 책은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어크로스, 2011)다. 제목대로라면 관심이 덜했을 텐데, 원제가 '부조리의 시대'이고, '행복의 부조리'에 대한 성찰이 주제다. '부조리'라면 또 관심사에 든다. 당장은 아니지만 대린 맥마흔의 <행복의 역사>(살림, 2008)와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김영사, 2006)와 같이 묶어서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존의 미리보기를 참고하여 앞부분만 읽어보니 '당신이 찾는 행복은 없다'는 1장의 원제는 '행복의 부조리'이다. 번역본에서는 구분이 사라졌지만 전체 4부 구성에서 1부가 문제의 제기(The Problems)이고 1장이 1부에 해당한다. 무엇이 '행복의 부조리'인가? 행복 추구의 모순을 잘 정리해준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 자신의 행복 이외에 다른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들... 만이 행복하다... 그렇게 다른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 도중에 그들은 행복을 발견한다... 행복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기회다."(14쪽) 

즉 행복을 목표로 삼아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행복의 부조리'이다. 그것은 오직 부산물로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행위'였다. 그리고 '행복'이라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오히려 '번영(flourishing)'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행복학'이란 조어에 가장 강력한 후보는 '에우다이모닉스Eudaimonics'이다. 번역본에서 '에우다이모닉'이라고만 음역한 것은 좀 인색하다).   

히말라야에 있는 부탄왕국에서 전국행복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는데, 저자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그 위원회의 첫번째 임무는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역시나 만만찮은 일이어서 위원회의 대변인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세기에는 젊은이들에게 영웅이 누구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왕을 꼽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랩 음악가를 꼽는 사람이 50%에 달한다."(12쪽) 

 

호응관계가 맞지 않는 듯싶어 확인해보니 '랩 음악가를 꼽는 사람이 50%'란 말은 'rap artist 50 Cent'를 잘못 옮긴 것이다. 50 Cent는 1975년생의 래퍼다. 요즘 젊은이들의 꿈은 왕이 아니라 래퍼라는 것.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만큼 행복을 정의하기란 요령부득이다. 플로베르의 한마디가 그래서 핵심을 짚은 듯이 보인다.  

"어리석음, 이기심, 건강은 세 가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15쪽)  

그대, 행복을 원하는가? 일단은 어리석고 볼 일이다... 

11. 05.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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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2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5-02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5-02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엥? 그럼 전 행복해질 가능성이 농후하군요. 어리석은 건 어디 가서 빠지지 않으니까요 ㅋㅋ 죄송합니다. 그냥 한번 웃자고 해본 소립니다. 그래도 잠깐 행복했네요^^

로쟈 2011-05-02 09:30   좋아요 0 | URL
이기심과 건강을 잊으신 건 아닌지요?^^

비로그인 2011-05-02 15: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아무튼 행복한 5월을 보내시길...^^

델러웨이부인 2011-05-02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cent가 50%로? 재밌네요~ ^^;;;

로쟈 2011-05-03 20:31   좋아요 0 | URL
^^;

두비 2011-05-0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구.... 로쟈님 비롯해 독자여러분께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재판 찍을 때 꼭 고치겠습니다. (이런 실수는 출판사가 할 말이 없습니다. ㅠㅠ 재판 찍을 기회가 오면 좋겠네요.)

로쟈 2011-05-03 20:31   좋아요 0 | URL
재밌는 책인데, 옥에티가 있더라구요...
 

지난주에 나온 가장 예기찮은 책은 박홍규 교수의 '루이스 멈퍼드 읽기'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와 번역서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이다. <예술과 기술>(민음사, 1999)의 저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이 문명비평가의 전모를 소개하고 20대에 출간한 그의 처녀작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것인데, 멈퍼드(멈포드)가 자칭한 '제너럴리스트'란 말은 박홍규 교수에게도 더 없이 잘 적용될 듯싶다. 

  

멈퍼드는 '스페셜리스트(전문가)'와 대비하여 '제너럴리스트'를 "개별적인 부분을 상세히 연구하기보다 그러한 파편들을 하나의 질서 있고 의미 있는 패턴 속에 통합하는 것에 더욱 흥미를 느끼는 사람"(<유토피아 이야기>, 17쪽)이라고 정의한다. 박 교수는 이를 '전인(全人)'이란 말로 옮겼는데, 그 자신이 진정한 전인이자 우리시대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해야겠다(대표적인 다작 저술가인 저자는 최근 들어 매년 5권 이상의 저/역서를 출간하고 있는데, 오직 강준만 교수만이 이에 비교될 수 있다).  

자유와 자치, 자연이 아나키즘의 핵심적인 가치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해온 박홍규 교수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멈퍼드 또한 '소박주의자'에 '아나키스트'였다고 평한다. 멈퍼드는 어떤 인물이었나?  

루이스 멈퍼드(1895-1990)의 94년 긴 생애는 20세기와 거의 겹친다. 기술적 전문가들에 의한 거대한 물질 만능주의 시대인 20세기에 그들이 섬긴 거대한 권력, 도시, 기계를 비판하고 소박한 자유, 자치, 자연을 존중하는 르네상스적 전인으로서 살다 간 20세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비평가이며 지성인이자 지식인이고 휴머니스트였던 사람이 멈퍼드였다.(<메트로폴리탄 게릴라>, 27쪽) 

"그런 멈퍼드의 삶과 사상을 검토하여 우리의 지적 스승으로 삼고자 이 글을 쓴다"고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멈퍼드는 60년에 걸쳐서 28권의 저작을 남기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연대별 주제별로 재구성하여 멈퍼드의 사상을 조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대학도 졸업하지 않고 고정적 직업도 갖지 않았지만 삶과 앎을 일치시키고자 했던 지적 거인이자 '가운을 걸치지 않은 철학자'에 대한 경애감이 없었다면 쓰여지지 않았을 책이다. 덕분에 독자로서는 너무도 편하게 멈퍼드의 '게릴라전'을 관람할 수 있게 됐다(독자의 몫은 이제 그 게릴라전에 '동참'하는 것일까?).     

'르네상스적 제너럴리스트'답게 전방위적 저술을 남기고 있지만 멈퍼드의 저작 목록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내겐 <허먼 멜빌>(1929)이다. <모비딕>(1851)의 작가, 그 멜빌 말이다.  

멈퍼드 시대까지도 멜빌은 해양소설을 쓴 비주류 작가로 낮게 평가되었으나 멈퍼드는 멜빌의 개성과 그 발전에 대해 흥미를 기울여 그를 단테와 같은 도덕적 철학자로 평가했다. 멈퍼드는 특히 <모비딕>을 <햄릿>이나 <신곡>과 같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147쪽) 

 

멈퍼드가 쓴 <허먼 멜빌>은 300쪽이 넘는 본량의 본격적인 작가론인데, <모비딕> 읽기를 오래 전부터 벼르고 있던 터라 관심을 갖게 된다. 김석희본도 출간된 김에 내년에는 <모비딕>에 대한 강의도 기획하려고 한다(<모비딕>과 멜빌의 책 몇 권을 바로 주문했다). 오래 전부터 도스토예프스키와 멜빌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내년에는 '꿈'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1977년에 멜빌 협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됐을 정도로 멈퍼드의 멜빌 연구는 높이 평가됐다고 하며, 멜빌과 함께 그가 찬양한 작가가 <악령>의 도스토예프스키였다고(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모비딕> 얘기가 나오니까 떠올리게 되는 작가는 알베르 카뮈다. 그건 지난주에 <페스트>에 대한 강의를 한 때문인데, 이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카뮈는 멜빌의 <모디딕>을 사숙한 걸로 돼 있다. "멜빌은 카뮈의 창조를 상징과 신화의 차원으로 승격시키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었다는 게 김화영 교수의 설명이다. <모비딕>을 정독하고 노트했다는 내용은 <작가수첩1>에 들어 있으며, 카뮈의 '허먼 멜빌'이란 짧은 작가론은 <스웨덴연설/문학비평>에 포함돼 있다. 개인적으론 이번에 다시 읽으며 <페스트>가 '카뮈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생각이 들었다(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카뮈는 이반 역을 맡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자세한 건 방학때 쓰고자 하는 <페스트>론에 적어두려고 한다. 아무려나 허먼 멜빌을 매개로 루이스 멈퍼드와 알베르 카뮈가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오늘의 발견이다... 

10. 0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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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루이스 멈포드와 유토피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7-19 00:40 
    루이스 멈퍼드의 <유토피아 이야기>(텍스트, 2010)와 박홍규 교수의 <메트로폴리탄 게릴라>(텍스트, 2010) 출간 기념으로 박홍규 교수의 대담 자리를 갖게 됐다. 도서출판 텍스트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일시는 8월 24일(화) 저녁 7시 30분이고, 장소는 청어람아카데미 지하소강당이다. 알라딘 이벤트는 http://blog.aladdin.co.kr/culture/3896091 참조.
 
 
노이에자이트 2010-06-2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선상반란,특히 노예반란에 관심이 많아 멜빌의 중편'베니토 세레뇨'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추리소설로도 최고입니다.그런데 요즘 번역본이 안 나오더군요.

로쟈 2010-06-20 22:46   좋아요 0 | URL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모비딕>과 <바틀비>, <빌리버드> 정도인 듯해요...

2010-06-20 2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0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10-06-21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석희의 새 번역본 <모비딕>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었다가 너무 비싼 가격에 그냥 두고왔던 기억이 나는군요.^^ 화려한 일러스트가 포함되긴 했지만 저작권 문제가 없는 소설책 한권에 그토록 비싼 가격을 책정하는 건 좀 문제가 있지 않나 싶더군요. <모비딕> 영어 원본을 읽으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참으로 읽기 어려운 영어문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영미 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를 보면 <모비딕>은 제대로 된 번역본도 없었다는데 김석희 번역본은 어떨런지 모르겠네요...

로쟈 2010-06-21 08:22   좋아요 0 | URL
네, 목돈 들어가는 책입니다. 청소년판으로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가장 기대가 되는 번역본이죠...

2010-06-21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21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등교육은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궁리, 2008)에 실린 글의 제목이다. 도날도 마세도와의 대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하워드 진이 직접 쓴 글들도 몇 편 재수록돼 있다. 책의 원제는 '하워드 진의 민주주의 교육론' 정도다. '고등교욱은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하워드 진 선집(The Zinn Reader)>에 처음 수록됐다고 한다.   

 

교육은 언제나 기존의 부와 권력 분배 체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127쪽)

아마도 6.2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펼치게 될 교육 또한 어떤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그런 기대를 가져본다). 하지만 하워드 진은 교육 현실에 대해 결코 과장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고등교육도 "여전히 교묘하고 정교한 통제 체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참고로, 진은 엘렌 슈렉커의 <상아탑은 없다: 대학 내부의 매카시즘>을 참고하라고 추천하는데, 찾아보니 슈렉커는 냉전과 매카시즘에 대한 연구서들도 갖고 있다.       

 

어떤 방식의 통제인가?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달성하는 데 꼭 필요한 사상적 다원주의가 고등교육 과정에서 실현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진은 지적하는데, 이유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의 기업적 특성을 드러내며 대학 경영자들을 정부 감독관들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매카시즘도 그저 표현의 자유를 공격하는 가장 그악스러운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교묘하면서도 더 확실한 방법으로는 교직원 임면 및 계약 기간 갱신을 통제하거나 정치적 고려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종신 교수직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동의 절차와 대학 경영진의 승인 절차가 있다. 특히 이들 경영자들은 대학과 행정부, 실업계, 군부라는 미국 사회의 지배 세력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는 자이다.(132쪽) 

우리식으로 말하면 교수 임용이나 재임용 절차를 통해서 '지배 세력'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다. 사업을 하거나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대학에서 훨씬 많은 자유를 누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이런 '계약'이 바탕이 돼 있다는 것. 대학교수로서 "직업을 통한 경제적 안정과 어느 정도 자유로운 지적 유희를 수년간 누리는 대신 졸업 후 학생들이 나라에서 허용된 제한된 다원주의에 기꺼이 동참하고 순종하는 시민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제한된 다원주의? 그건 "공화당원이 되어도 좋고 민주당원이 되어도 좋지만 제발, 그 외에는 곤란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제도권 바깥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워드 진과 같은 진보주의자도 종식 교수직을 받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진은 MIT의 촘스키나 예일대학의 몽고메리 등도 언급한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장악하기는커녕 "치밀한 감시를 받고 있는 소수파"일 뿐이다. 진이 속해 있던 보스턴대학도 마찬가지인데, 천 명이 넘는 교수진 가운데, 진보 성향의 교수는 한 줌도 안되었지만 '체제의 수호자들'은 언제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학교에 침투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교육과정을 장악했다", "여성 인권운동가들과 흑인 활동가들이 전통 교육을 말살한다" 등이 그들이 내세우는 히스테리컬한 주장들이다(한국식 버전이 MB정부가 주도하는 교육계와 문화계의 '좌파척결'이겠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레이건, 부시, 헬름스 가문을 추종하는 정치권 근본주의자들은 부와 권력의 분배 그리고 시민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싶어한다. 법조계의 근본주의자들이 ㄴ보르크와 렌퀴스트 추종자들은 사회개혁의 법적 가능성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해석하고자 한다. 교육계의 근본주의자들은 고등교육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고유한 토론의 자유에 내재된 힘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공동의 문화', '편향되지 않은 학문', '서구 문명'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자유를 공격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유를 제한하고 공격하는 일이 그래서 벌어진다. 인용한 대목에서 '헬름스'란 이름이 낯설어 찾아보니 네거티브 선거전술로 유명한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최근 기사에서도 이렇게 언급됐다.

30년 동안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냈던 제시 헬름스는 1984년 민주당 짐 헌트와 노스캐롤라이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맞붙는다. 헬름스는 주지사를 연임하던 헌트가 위협적인 도전자로 떠오르자 네거티브전을 시작했다. “헌트가 뉴욕 등 ‘좌파 근거지’에서 모금운동을 한다”는 내용의 TV 광고로 포문을 열었다. 이어 킹 목사 기념 연방공휴일 제정안을 놓고 “공휴일이 되면 연간 50억∼120억 달러의 비용이 추가될 것”이란 광고로 인종주의 논란을 부추겼다. 비열하다는 비난이 거셌지만, 노스캐롤라이나 백인들은 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는 막판까지 헌트를 동성애자, 노동조합의 대장, 사기꾼으로 몰아붙여 초반 두자릿수 격차를 뒤집고 52 대 48로 이겼다.(국민일보)

지난주 선거에서 야당을 친북좌파로 몰고가려고 했던 여당의 선거전략도 헬름스의 교훈을 실천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그런 전략이 언제까지나 먹히는 건 아니다. 여러 차례 포스팅을 통해서 나도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하워드 진의 결론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강단이 학생들에게 더 넓은 정치적 선택권을 제공하면 그들이 훗날 투표소나 직장에서 이 사회에 대한 모반을 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 일부가 바라 마지않는 바로 그 힘을 그들은 두려워한다. 어쩌면 그 학생들이 진보적 성향을 띠거나 성 평등 운동이나 반전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나아가 제임스 매디슨이 보수 성향의 헌법을 옹호하며 두려워했던 한층 더 위험스러운 일, 즉 '부의 평등한 분배'를 위해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그런 희망을 품도록 하자.(138쪽)  

'헬름스'란 인명이 궁금해서 원문을 찾았다가 마저 읽게 된 부분인데, 번역문의 첫 문장은 약간 오역됐다('성 평등 운동'은 '인종 평등 혹은 성 평등 운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원문은 "They fear exactly what some of us hope for, that if students are given wider political choices in the classroom than they get in the polling booth or the workplace, they may become social rebels."  

물론 투표소에서나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반란'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 반란은 제한적이며(투표소에서의 반란은 입후보자들 가운데의 선택으로 제한된다) 진의 요점은 다른데 있다. 다시 옮기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우리가 희망하는 바이기도 한데, 그것은 학생들이 대학강의실에서 투표소나 직장에서보다 훨씬 더 넓은 정치적 선택의 가능성을 배우게 된다면, 학생들이 사회적 반항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고등교육이 이루어지는 대학 강의실에서 더 넓은 정치적 선택(wider political choices)을 토론하고 학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그런 희망을 품도록 하자... 

10.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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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6-0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대보다는 제3의 영역을 제시하는 프레임으로 가는 게 여유로운 멋도 있고 품격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과연 동물이나 기계와 동일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토론하고 사유하는 공공교육 프로그램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택광선생 블로그에 홍상수를 둘러싼 한마당이 벌어졌더군요. 흥미롭게 읽은 홍상수 관련 최신 비평 주소입니다. 로쟈님께서 홍상수 팬이시라고 하여서...어쩌면 벌써 독료이신지도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95431&PAGE_CD=21=21

로쟈 2010-06-07 10:43   좋아요 0 | URL
저보다 부지런하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