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지식인/예술가들의 서재 구경이나 잠시 해보려고 <지식인의 서재>(행성:B잎새, 2011)를 손에 들었다가 뜻밖의 '문장수업'을 받았다. 자연과학자 최재천 교수가 미국 유학시절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대목에서인데, 과학논문을 쓰기 위해 '테크니컬 라이팅' 코스를 수강한 그는 '일생일대의 스승 로버트 위버 교수'를 만나게 된다고. 시인 흉내를 내는 게 눈에 띄어 개인 교습을 받게 됐는데, 위버 교수는 방에 놓인 긴 의자에 누워서 그가 들고 온 글을 읽게 했다. 그리고 맘에 안 드는 대목이 있으면 이유를 설명하게 하고,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고치도록 시켰다.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교수와 제자는 글을 고쳐나갔다. 이 과정이 어떤 때는 밤이 어둑해질 때까지 끝나지 않은 적도 많았다. 학기 중간쯤 되어서는 고치는 문장이 점점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최재천에게는 글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는 습관이 생겼다. 혀에서 구르지 않으면 수십 번이고 고쳐 썼다. 그러다 한숨에 문장이 쭉 굴러가면 그제서야 완성이다. 로버트 위버와의 수업은 최재천에게는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수업이었다.(54쪽)
요즘 유행하는 멘토-멘티의 가장 모범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국어교과서에도 실리게 된 최 교수의 글쓰기 실력은 그렇게 해서 갖춰진 것. 석사과정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위버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으러 갔다고 한다. 이번엔 거꾸로 위버 교수가 최재천을 긴 의자에 눕게 하고 자신이 학생용 의자에 앉아서 추천서를 읽기 시작했다. '가르치고 배우기'가 어떻게 완성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최재천 교수의 사례는 <글쓰기의 최소원칙>(룩스문디, 2008)에 실린 강연에서도 언급된 듯싶다.)
"마음에 드세요?"
"사실은 말이야, 난 이렇게 쓰고 싶었어."
"그럼 그렇게 쓰시죠."
그렇게 해서 위버 교수가 최종적으로 완성한 추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He writes with precision, economy, and grace(그는 정확하고 경제적이며 우아하게 글을 쓴다)."
이 '기막한 추천서'에 가슴이 벅차오른 최재천은 이렇게 말했다.
"교수님, 이렇게 써주셔도 되는 겁니까?"
"왜 부끄럽니? 앞으로 이렇게 쓰면 되지?"
그 순간부터 최재천은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이라는 세 단어를 가슴에 새겼다.(55쪽)
'테크니컬 라이팅' 코스도 없었고, 문장수업을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로선 좀 부러운 사례이다. 아무려나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은 직업작가만 아니라면(그런 경우엔 여러 가지 문체가 선택지로 놓인다) 권장할 만한 글쓰기 덕목이다. 특히나 젊은 대학(원)생들에게는.



<지식인의 서재>에는 각 서재 주인들의 추천도서 목록도 장 말미에 실려 있는데, 최재천 교수의 경우는 김병종 교수의 <화첩기행>(효형출판)을 첫번째 순위로 꼽았다.
"저는 이 분의 책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림도 최고이고 글도 최고입니다. 제가 김병종 선생님을 너무 좋아해서 이 분의 책이 나온 출판사에 제 원고를 직접 들고 찾아갔어요. "김병종 선생님이 책을 낸 출판사에서 저도 책 한번 내게 해주십시오."
문장가도 경탄을 아끼지 않은 문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화첩기행>을 나는 안 갖고 있기에. 하지만, 그 출판사에 낸 최재천 교수의 책은 읽어봤다. 알고보니 첫번째 책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효형출판, 2001)가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었다...
11. 05. 21.



P.S. 이번주에 책상 가까이 두고 있는 책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 유종호의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현대문학, 2011), 그리고 존 그레이의 <추악한 동맹>(이후, 2011)이다. 두 한국 문학평론가의 유려한 문체는 이미 소문난 것이고,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이후, 2010)에 이어서 읽는 존 그레이의 책 역시 '정확성, 경제성, 우아함'의 원칙을 만족시킨다. 번역이 좋지만 이번에도 원서를 구할까 생각중이다. 순전히 문장 때문에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