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가 아니어도 폭염을 핑계로 휴가도서에 손을 댄다. 배상열의 <조선 건국 잔혹사>다. 조선의 건국 과정을 되짚어보고 있는데, 저자의 발상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미심쩍다는 것. 사실 그럴 만한 게 태조실록만 하더라도 실시간 기록이 아니라 개국 이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하에 쓰였기에 여러 가지 변조와 미화의 여지가 있다. ‘실록‘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는 공민왕과 신돈에 관한 기술이 그러하다.

그렇다고 저자가 뚜렷한 대안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정황상의 추론에 많이 의존하고 있어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역시나 확실한 견해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진실은 그러한 기록과 의혹 사이 어딘가에 묻혀 있을지도.

<조선왕조실록>은 한번도 눈여겨 본 적이 없다. <노회찬과 함께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구입한 것도 한 계기인데, 이제는 읽어보려 한다.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과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같은 베스트셀러 외에 최근에는 역사저술가 이덕일도 <조선왕조실록>을 펴내기 시작했다.

<조선 건국 흑역사>가 다루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고 나로선 태조실록부터 태종실록까지가 일단은 관심의 대상이다. 막상 실록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되면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다른 한편으로는 승자가 아닌 패자, 가령 이성계나 이방원이 아닌, 정몽주나 정도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조선 건국 잔혹사> 덕분에 조선사를 조금 삐딱한 눈으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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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2018-07-3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덕일 역사책 논란이 많던데 어떤가요 읽어볼만 하나요? 왜곡이 심하다는 지적도 있고 창조적인 역사 해석이라는 평가도 있던데?? 인문학자가 보시기에?

로쟈 2018-07-31 19:49   좋아요 0 | URL
논란이 된 책들(정조나 노론 관련)은 제가 읽어보지 않아서요. 조선왕조실록은 창조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 같지 않고,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듯합니다...
 

아직 폭염 속에 있고 여름도 한달 여 더 남겨놓고 있지만 강의 일정은 반년을 앞서 가기에 겨울학기까지 커리큘럼을 짜두었다. 이번 가을겨울에는 주로 20세기 전반기 미국문학과 19-20세기 프랑스문학, 그리고 하루키 이후의 일본문학 등을 강의할 계획이다. 처음 강의하는 작가와 작품들도 꽤 되는데 그렇듯 레퍼토리를 확장해나가는 것이 강의의 한 목표이면서 보람이다. 앞으로 10년 안으로 세계문학에 대한 강의책을 10권 정도 더 펴내고 나대로의 문학론과 문학사까지 쓰는 게 괴제다(거창하게 말하면 생의 과업이 되겠다).

8월 강의의 주력은 독일문학으로 헤세의 <유리알 유희>와 제발트의 소설들이다. 그리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 대해서도 다시 강의하게 되는데 겸사겸사 역사학 관련서들을 읽고 있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돌베개)와 김기봉의 <내일을 위한 역사학 강의>(문학과지성사)는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사이에 두고 비교해서 읽어도 흥미롭다(그렇게 하는 중이다).

그리고 조 굴디와 데이비드 아미티지의 <역사학 선언>(한울)은 아직 초반이라 정확히 가늠이 되지 않지만 역사학에서 장기와 단기의 문제, 그리고 빅데이터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구입한 책이다. 학기중에는 읽을 여유가 없었는데, 소위 ‘방학‘이어서(강의를 30퍼센트 줄인 수준이지만) 손에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달에는 ‘문학으로 읽는 세계역사‘도 강의할 참이다. 선택인 줄 알았더니 필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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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를 읽다가 막간에 눈이 맞아 손에 든 책은 <유학과 동아시아>(도서출판b)다. 헤겔 전공자인 나종석 교수가 동아시아의 유교 전통과 다른 근대(성) 논의를 주도하고 있는데(<대동민주 유학과 21세기 실학> 같은 대작도 펴냈다), 책에 실린 논문들 가운데서는 유학 전통과 한국의 근대성 문제를 다룬 ‘전통과 근대‘가 요점 파악에 요긴하다. 주로 장은주 교수의 유교적 근대성 이론을 소개하고(<유교적 근대성의 미래>에 수록) 이에 대한 비판의 형태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성과 구별되는 동아시아적 근대성, 더 구체적으로 한국의 유교적 근대성을 식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공통적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평가의 문제에서는 견해가 갈린다. 내가 더 공감하는 건 서구의 민주주의 가치이념과 유교적 근대성이 서로 충돌한다고 보는 장은주 교수의 입장이다. 그는 한국의 근대성에서 구현된 민주주의를 ‘주리스토크라시‘(사법지배체제)로 규정한다. 유교적인 정치적 근대성이 한국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이다.

˝이 체제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외피 속에서 법을 수단으로 삼아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이 자신의 권력을 재생산하는 억압적 지배체제다.˝ 그리고 이런 ‘타락한‘ 형식의 민주주의를 탄생시키는 문화적 배경이 ˝능력주의 사회의 원리를 최상의 가치로 삼은 유교적인 관료지배체제 전통˝이다. 이는 최근에 확인되고 있는 전 정권하 법원행정처와 대법원의 사법농단과 이에 대한 사법부의 오만한 대응행태에서 여실히 확인되고 있지 않은가. <유교적 근대성의 미래>도 주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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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유령과 파수꾼들>(미디어버스)을 읽다가 줄리안 반즈의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가져온 인용을 재인용한다. 평범한 독자와 비평가의 차이에 대한 반즈의 지적이다.

˝평범한 독자가 전문비평가보다 책을 더욱 즐겁게 읽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보다 한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음을 나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잊을 수 있다. 스타키 박사외 같은 이들은 기억력의 저주를 받고 있다.˝

이에 따르면 평범한 독자와 전문비평가를 가르는 기준은 ‘기억력의 저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은가이다. 그리고 그게 기준이라면 나는 평범한 독자와 전문비평가(내지 전문강사) 사이를 오고가는 듯싶다. 매주 많은 작품을 강의하면서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간혹 듣지만 막상 강의했던 작품도 핵심을 떠올리지 못해 애를 먹는 일이 적지 않다. 거꾸로 그렇게 유사백지 상태에서 작품을 읽다가 새로운 해석에 닿기도 하므로 망각의 저주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강의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기억력의 저주가 훨씬 더 나은 선택지다. 여하튼 기억과 망각의 문제는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을 편들 수 없다. 복잡하고 복합적이어서다.

한편 미디어버스라는 출판사는 희소한 책들도 출간과 근간 목록으로 갖고 있는데, 알렉산드로 루도비코의 <포스트디지털 프린트: 1894년 이후 출판의 변화>는 <유령과 파수꾼들> 덕분에 발견하게 된 책이다. 매일같이 검색한다고는 해도 놓치는 책이 적지 않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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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오후에야 기력을 회복해서 강의자료도 챙기고 밀린 독서도 해보려 하나 엄두가 나지 않는다. 유럽 근현대사에 대한 독서를 업데이트하기 위해 찰스 틸리의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그린비)를 손에 들었더니 페리 앤더슨의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현실문화)에 대한 응답으로 쓰인 책이라 한다. 어떤 도전이었는지 확인하려면 앤더슨의 책부터 봐야 하는데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하다(2014년 6월에 구입했다고 뜬다).

거기에 더하여 앨버트 린드먼의 <현대유럽의 역사>(삼천리)도 같이 책상에 올려놓았지만, 이 또한 분량이 만만찮다.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나 <현대유럽의 역사>나 표준이 될 듯싶어서 원서를 구입하려고 했더니 예상보다 비싸다. 교양서라기보다는 학술서 범주에 들어가는 모양이다. 문제는 이런 고심 거리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는 것.

병렬적 독서야 불가피하다지만 요즘은 분열증적 독서 같다. <모비딕>과 <마의 산>에 대해 읽다가 페미니즘과 행동경제학을 들추고 지난주에 나온 시집들을 읽는다. 이번주 원고 거리도 생각해야 하고 밀린 번역에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 모두가 자원해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부리는 손과 일하는 손이 다른 듯하다. 페이퍼 거리도 잔뜩 밀려 있지만 날도 더운 만큼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그나저나 독일사에 괸한 책들은 어디에 있는지. 강의할 헤세의 책들도 눈에 띄지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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