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은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궁리, 2008)에 실린 글의 제목이다. 도날도 마세도와의 대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하워드 진이 직접 쓴 글들도 몇 편 재수록돼 있다. 책의 원제는 '하워드 진의 민주주의 교육론' 정도다. '고등교욱은 얼마나 자유로운가'는 <하워드 진 선집(The Zinn Reader)>에 처음 수록됐다고 한다.   

 

교육은 언제나 기존의 부와 권력 분배 체계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127쪽)

아마도 6.2 지방선거에서 선출된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펼치게 될 교육 또한 어떤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그런 기대를 가져본다). 하지만 하워드 진은 교육 현실에 대해 결코 과장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고등교육도 "여전히 교묘하고 정교한 통제 체제"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참고로, 진은 엘렌 슈렉커의 <상아탑은 없다: 대학 내부의 매카시즘>을 참고하라고 추천하는데, 찾아보니 슈렉커는 냉전과 매카시즘에 대한 연구서들도 갖고 있다.       

 

어떤 방식의 통제인가? "진정한 표현의 자유를 달성하는 데 꼭 필요한 사상적 다원주의가 고등교육 과정에서 실현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진은 지적하는데, 이유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고등교육기관의 기업적 특성을 드러내며 대학 경영자들을 정부 감독관들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매카시즘도 그저 표현의 자유를 공격하는 가장 그악스러운 것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교묘하면서도 더 확실한 방법으로는 교직원 임면 및 계약 기간 갱신을 통제하거나 정치적 고려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종신 교수직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동의 절차와 대학 경영진의 승인 절차가 있다. 특히 이들 경영자들은 대학과 행정부, 실업계, 군부라는 미국 사회의 지배 세력을 연결해주는 고리 역할을 하는 자이다.(132쪽) 

우리식으로 말하면 교수 임용이나 재임용 절차를 통해서 '지배 세력'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다. 사업을 하거나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것보다 대학에서 훨씬 많은 자유를 누린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지만 거기에는 이런 '계약'이 바탕이 돼 있다는 것. 대학교수로서 "직업을 통한 경제적 안정과 어느 정도 자유로운 지적 유희를 수년간 누리는 대신 졸업 후 학생들이 나라에서 허용된 제한된 다원주의에 기꺼이 동참하고 순종하는 시민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제한된 다원주의? 그건 "공화당원이 되어도 좋고 민주당원이 되어도 좋지만 제발, 그 외에는 곤란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제도권 바깥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하워드 진과 같은 진보주의자도 종식 교수직을 받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진은 MIT의 촘스키나 예일대학의 몽고메리 등도 언급한다), 이들은 고등교육을 장악하기는커녕 "치밀한 감시를 받고 있는 소수파"일 뿐이다. 진이 속해 있던 보스턴대학도 마찬가지인데, 천 명이 넘는 교수진 가운데, 진보 성향의 교수는 한 줌도 안되었지만 '체제의 수호자들'은 언제나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학교에 침투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교육과정을 장악했다", "여성 인권운동가들과 흑인 활동가들이 전통 교육을 말살한다" 등이 그들이 내세우는 히스테리컬한 주장들이다(한국식 버전이 MB정부가 주도하는 교육계와 문화계의 '좌파척결'이겠다). 그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레이건, 부시, 헬름스 가문을 추종하는 정치권 근본주의자들은 부와 권력의 분배 그리고 시민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싶어한다. 법조계의 근본주의자들이 ㄴ보르크와 렌퀴스트 추종자들은 사회개혁의 법적 가능성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해석하고자 한다. 교육계의 근본주의자들은 고등교육 과정에서 볼 수 있는 고유한 토론의 자유에 내재된 힘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공동의 문화', '편향되지 않은 학문', '서구 문명'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자유를 공격한다.  

우리도 그렇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자유를 제한하고 공격하는 일이 그래서 벌어진다. 인용한 대목에서 '헬름스'란 이름이 낯설어 찾아보니 네거티브 선거전술로 유명한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최근 기사에서도 이렇게 언급됐다.

30년 동안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을 지냈던 제시 헬름스는 1984년 민주당 짐 헌트와 노스캐롤라이나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맞붙는다. 헬름스는 주지사를 연임하던 헌트가 위협적인 도전자로 떠오르자 네거티브전을 시작했다. “헌트가 뉴욕 등 ‘좌파 근거지’에서 모금운동을 한다”는 내용의 TV 광고로 포문을 열었다. 이어 킹 목사 기념 연방공휴일 제정안을 놓고 “공휴일이 되면 연간 50억∼120억 달러의 비용이 추가될 것”이란 광고로 인종주의 논란을 부추겼다. 비열하다는 비난이 거셌지만, 노스캐롤라이나 백인들은 그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다. 그는 막판까지 헌트를 동성애자, 노동조합의 대장, 사기꾼으로 몰아붙여 초반 두자릿수 격차를 뒤집고 52 대 48로 이겼다.(국민일보)

지난주 선거에서 야당을 친북좌파로 몰고가려고 했던 여당의 선거전략도 헬름스의 교훈을 실천한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이 그런 전략이 언제까지나 먹히는 건 아니다. 여러 차례 포스팅을 통해서 나도 '시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지만, 하워드 진의 결론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강단이 학생들에게 더 넓은 정치적 선택권을 제공하면 그들이 훗날 투표소나 직장에서 이 사회에 대한 모반을 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우리 중 일부가 바라 마지않는 바로 그 힘을 그들은 두려워한다. 어쩌면 그 학생들이 진보적 성향을 띠거나 성 평등 운동이나 반전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나아가 제임스 매디슨이 보수 성향의 헌법을 옹호하며 두려워했던 한층 더 위험스러운 일, 즉 '부의 평등한 분배'를 위해 나설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 그런 희망을 품도록 하자.(138쪽)  

'헬름스'란 인명이 궁금해서 원문을 찾았다가 마저 읽게 된 부분인데, 번역문의 첫 문장은 약간 오역됐다('성 평등 운동'은 '인종 평등 혹은 성 평등 운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원문은 "They fear exactly what some of us hope for, that if students are given wider political choices in the classroom than they get in the polling booth or the workplace, they may become social rebels."  

물론 투표소에서나 직장에서도 얼마든지 '반란'은 일어날 수 있지만 그 반란은 제한적이며(투표소에서의 반란은 입후보자들 가운데의 선택으로 제한된다) 진의 요점은 다른데 있다. 다시 옮기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정확히 우리가 희망하는 바이기도 한데, 그것은 학생들이 대학강의실에서 투표소나 직장에서보다 훨씬 더 넓은 정치적 선택의 가능성을 배우게 된다면, 학생들이 사회적 반항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고등교육이 이루어지는 대학 강의실에서 더 넓은 정치적 선택(wider political choices)을 토론하고 학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그런 희망을 품도록 하자... 

10. 06.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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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 2010-06-07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대보다는 제3의 영역을 제시하는 프레임으로 가는 게 여유로운 멋도 있고 품격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과연 동물이나 기계와 동일시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어릴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토론하고 사유하는 공공교육 프로그램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택광선생 블로그에 홍상수를 둘러싼 한마당이 벌어졌더군요. 흥미롭게 읽은 홍상수 관련 최신 비평 주소입니다. 로쟈님께서 홍상수 팬이시라고 하여서...어쩌면 벌써 독료이신지도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95431&PAGE_CD=21=21

로쟈 2010-06-07 10:43   좋아요 0 | URL
저보다 부지런하신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