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도 다시 잠을 자고 저녁이 다 돼서야 연휴 일정을 가늠해보았다. 연휴라고는 하지만 다음주 목요일부터는 정상적인 강의일정이 잡혀 있으므로 생각만큼 길지는 않다. 연휴 독서계획도 늘 그렇듯 계획에서 끝나기 십상이겠다. 그런 무망한 계획 가운데 하나는 전쟁 관련서들을 읽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강의로 한해를 시작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전쟁과 평화‘가 올해의 화두가 되었다.

관심을 갖는 주제는 그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선택이 되는가이다. 전쟁의 가능성은 거꾸로 평화의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마찬가지고 한국전쟁도 그렇다. 역사에서 필연이 있다면 왜 그런가. 만약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 전쟁이 선택되었는가. 평화를 희구하고 영구평화의 시대를 갈망한다면 그것이 가능한 조건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은 당연한 과제다.

그런 관심에서 전쟁과 전쟁사 관련서들을 모으고 있는데 최근에도 여러 권이 출간되었다. 그 중 하나가 일본 도쿄대 교수 가토 요코의 <왜 전쟁까지>(사계절)다. 일본 근현대사가 전공분야인 저자의 책은 몇권 소개되었는데 모두 전쟁은 주제로 한 책들이다. 제목에도 드러나지만 저자는 주로 일본이 왜 전쟁을 선택했는가를 묻는다. 그것이 선택이었던 상황에서 어째서 전쟁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는가를 복기해보는 것이다.

전쟁이 우연이라면 우리는 전쟁사에서 배울 게 없다. 필연이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기에. 그렇지만 우연과 필연 사이에 놓여 있다면,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선택의 문제라면, 더 나은 선택을 위해서 공부가 필요하다. 더 나은 선택의 조건은 무엇이고 어떻게 마련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전쟁학은 평화학의 조건으로서만 의미를 갖는다. 이 문제에 대한 더 진전된 생각을 갖기까지 당분간 전쟁과 평화는 독서의 화두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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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종교 문화와 무종교인을 주로 연구하는 미국 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책이 새로 나왔다. <종교 없는 삶>(판미동). 제목만으로도 전작 <신 없는 사회>(현암사)의 짝이 되는 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부제는 ‘불안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인데 그 불안은 신이 없는 사회와 종교 없는 삶에 대한 불안이겠다.

이 불안은 거슬러 올라가면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불안이기도 했다. 알려진 대로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깔려 있다. 세속화의 시대, 무신론 사회와 문화를 어느 정도 경험한 지금 이러한 불안 혹은 질문에 대한 새로운 답변이 나옴직한데 <종교 없는 삶>이 그에 해당한다.

˝저자는 오늘날 가장 빠르게 늘어나는 종교적 태도인 무종교가 단순히 신앙 없음의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종교 없는 사람들의 삶과 가치, 경험을 조명해서 이들이 어떻게 합리적이고 독립적인 사고를 중시하면서 살아가는지, 삶의 고난에 직면했을 때 자기신뢰를 어떻게 적용하는지, 죽음을 어떤 식으로 다루고 받아들이는지, 자율적인 성향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지, 이 세상과 이 시대의 한가운데서 삶에 경외감을 느낀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돕는다.˝

관건은 종교가 없더라도 사회적 협력과 공동체적 삶이 가능할 것이냐다(도스토예프스키 버전으로는 도덕이 가능하냐는 것). 저자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이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걸로 보인다. 종교학자 오강남 교수는 추천사에서 ‘종교 아닌 종교‘로서 경외주의를 제시한다.

“숨 막힐 정도인 종교의 도그마에서 벗어나면 삶과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지금껏 당연히 여기던 것을 새롭게 보게 된다. 이렇게 종교를 넘어서 모든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며 사는 삶의 태도를 저자는 ‘경외주의(aweism)’라고, 그리고 이런 태도로 사는 사람을 ‘경외주의자(aweist)’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절실한 ‘종교 아닌 종교’인 셈이다.”

종교 대신에 우리는 ‘종교 아닌 종교‘를 갖는 셈. 강의에서 나는 가라타니 고진의 어투를 빌려서, 고대 애니미즘의 고차원적 회복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수직적인 샤머니즘적 신앙 대신에 수평적 상호존중과 이웃사랑을 회복하는 것이다. 신의 이름으로 이웃을 죽이는 종교 대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 죽음을 통한 이웃사랑(그리스도의 핵심 가르침이다)의 회복이다(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도 그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백치>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는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의 위대한 여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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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다음주에 나오는 걸로 돼 있던 유발 하라리의 신작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김영사)이 일정을 당겨서 출간되었다. 주문한 한국어판과 영어판을 오늘 같이 받았고(동시출간되었다) 바로 서문을 읽었다. 역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명료하다. 하라리의 강점은 생각의 폭이 넓으면서도 얕지 않고 진지하면서도 굼뜨지 않다는 데 있다. 그는 빠르고 정확하다.

인류의 과거를 다룬 <사피엔스>, 미래의 역사를 다룬 <호모 데우스>에 이어서 그가 ‘3부작‘(이라고 내세우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읽힌다)의 셋째권에서 다루는 건, 현재 곧 오늘이다.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부제. 전작들에 대한 경험에서 자연스레 예측하자면 이 책 역시 ‘올해의 책‘이 될 것이다.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에 대해서 여러 차례 강의한 나로서는 아마도 추워지기 전에 이 <21가지 제언>에 대해서도 어디선가 강의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필독할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전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이, 그나마 많은 부정적 세계정세 속에서도 위안을 얻게 한다. ‘우리시대의 역사학자‘로 불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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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2018-09-0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란스런 세계에서 명료하고 통찰력 넘치는 그의 글이 지적 위로와 해방감을 줍니다.

로쟈 2018-09-02 09:53   좋아요 0 | URL
네 동감입니다. 하라리는 역사공부의 목적이 과거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했지요.

히드라 2018-09-03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유발 하라리 신작 <~21가지 제언> 을 읽다가 덮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다른 이에게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네요. <사피엔스>는 3번, <호모 데우스>는 2번 읽었습니다만.

로쟈 2018-09-03 18:44   좋아요 0 | URL
저는 서론까지 읽은 터라, 나중에 독후감을 적겠습니다.
 

오전에 또 책나르기를 ‘한따까리‘ 하고 점심을 먹은 뒤 동네카페에서 한숨 돌리고 있다. 이번주 도배공사를 대비해서 아이방에 있는 책을 거실과 베란다로 옮겨놓는 일에 한 시간이 소요됐고 땀이 났다. 저녁에도 추가작업을 해야 한다. 방 공사가 끝나고 거실이 재정비될 때까지는 계속 어수선할 것 같다. 나머지 책이사도 내내 숙제가 될 테고.

머릿속이 복잡해서 가방에는 단출하게 책 몇권만 넣고 카페로 탈출해온 것인데, 그 중 하나는 크리스토퍼 헤이즈의 <똑똑함의 숭배>(갈라파고스)다. 미국의 능력주의(엘리트주의)를 해부하고 비판한 책이다. 책이 나왔을 때 첫장 정도 읽어두었는데 토마스 프랭크의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열린책들)에서의 언급을 보고 마저 읽고 리뷰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부록 서평이자 AS서평.

프랭크의 책 때문에 다시 구입한 건 제프 슈미트의 <이데올로기 청부업자들>(레디앙)이다. 주문한 원서의 배송이 계속 미뤄져서 독서도 지연되고 있는 책. 학자계급(전문가계급)의 배신을 다루고 있어서 번역서의 제목도 ‘전문가의 배신‘ 정도였으면 더 주목 받았겠다. ‘이데올로기‘란 말을 표지에 박는 것은 보통의 독자들에겐 읽어보지 말라는 주의와 다를 바 없다. ‘데인저‘ 같은. 여하튼 <똑똑함의 숭배>와 <이데올로기 청부업자들>까지 리뷰를 쓰는 게 스스로에게 부여한 과제인데, 책의 유효성이나 난이도를 확인하고 최종결정을 내리려 한다.

역할을 서평가에 한정하면, 서평가의 휴일은 이런 궁리와 독서로 채워진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데 다른 할일도 무척 많다는 게 서평가의 애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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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에서 점심을 먹고 잠시 쉬면서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난다)을 읽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몇 개 장을 읽고 이제 다시 손에 든 것인데, 그 사이에 선생은 유명을 달리했다. 선생을 수년 전에 어느 학회 자리에선가 마지막으로 뵌 나조차도 이 산문집이 선생의 마지막 책이라는 걸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선생이 우리말로 옮긴 <어린왕자>에 대한 강의도 그래서 일정에 포함했었다.

선생의 육성을 들어본 독자라면 이 산문집이 음성지원이 된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경우라서 조리 있으면서 말의 기품이 살아있는 글들을 선생의 육성을 직접 듣는 듯한 기분으로 읽었다. 육신과 이렇듯 분리돼 있으면서도 실재하는 이 음성의 주인은 누구인가? 손택이 인용한 롤랑 바르트의 말이 떠오른다. ˝말하는 사람은 쓰는 사람과 다르고, 쓰는 사람은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다.˝ 바르트의 원의와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다름을 ‘같지만 다름‘으로 이해한다.

황현산 산문집에서 우리가 듣는 목소리의 주인은 황현산 선생이면서 또한 그렇지 않다. 만약 같다면 그건 우리가 환청이라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쓰는 사람의 목소리, 곧 저자의 목소리이고 이는 ˝그 사람의 존재˝와 다르며 다른 운명의 삶을 산다. 우리 곁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라고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바로 그 존재다. 선생은 떠났지만 또한 그대로 남아있다.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익숙한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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