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10 그레이트 이펙트'란 시리즈가 출간돼 첫 세 권을 주문했다. 책은 어제 받았는데, 가장 먼저 펼쳐든 건 알베르트 망구엘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세종서적, 2012)다. 지난 학기에 원서를 구해놓았기 때문이다. 원서의 시리즈명은 '세계를 뒤흔든 책들(Books that shook the world)'이고, 각 책의 부제는 '전기(A Biography)'로 돼 있다. 책의 저자가 아닌 책의 전기가 이 시리즈의 컨셉이다(뭔가 임팩트 있는 제목을 고르다 보니 번역본 시리즈는 '이펙트'가 된 모양이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필두로 토머스 페인의 <인권>까지 세권이 1차분으로 나왔는데, 나머지 일곱 권의 책은 <성서>, <꾸란>, <전쟁론>, <자본론>, <국가론>, <국부론>, <군주론> 등이다. 모두 저명한 학자들이 저자로 나섰기에 꽤 읽어볼 만한 교양서가 될 듯싶다. 역자들 또한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맡았다. 완간을 고대하는 이유다.

 

 

그런 기대와는 별도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의 '들어가는 말'을 읽다가 '옥에 티'가 있기에 적어놓는다. 두 서사시의 저자 호메로스의 경우는 '호메로스 문제'라는 말이 있을 만큼 많은 논쟁의 대상인데, 망구엘이 그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그는 먼저 이렇게 전제한다.

하나의 책에 관한 전기는 그것을 쓴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그의 두 시들의 경우에는 예외이다. 작가와 작품은 손을 맞잡고 함께 간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아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로이아인들이 살던 도시의 멸망, 그리고 자신의 집을 향한 어느 그리스왕의 갈망에 관해 노래하는 눈먼 음유시인이 먼저인지, 아니면 전쟁을 향한 유혹과 평화를 향한 모색에 관한, 그리고 이런 일들이 실재했다고 입증해줄 하나의 작가를 요구하는 이야기들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16쪽)

보통은 작가가 먼저 존재하고 그가 쓴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이지만 호메로스의 경우에는 그가 정말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란 방대한 서사시를 직접 쓴 '저자'인지 불분명하기에(<일리아스>의 저자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를 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음유시인'이 먼저인지 '이야기들'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호메로스가 일례이지만 작가와 작품 혹은 그 주인공의 관계는 일률적이지 않다.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은 그것을 읽는 독자의 눈에 흥미진진한 관계를 형성한다. 책들 가운데는 작가가 영감을 불어넣은 언어를 통해 그 작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지 암시해주는 생생한 등장인물들을 마치 주문처럼 불러들이는 책도 있다. 돈키호테와 세르반테스, 햄릿과 셰익스피어가 적절한 예다. 작가들 중에는 - 오스카 와일드가 자기 자신에 관해 말했듯이 - 자신의 삶 자체가 자신의 천재성을 그릇처럼 담아낼 수 있는 작가도 있고, 책들이 곧 자신들의 재능의 생산품이 되는 작가도 있다.  

망구엘은 여기서 작가와 작품의 관계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작품이 작가를 압도하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작가가 작품을 압도하는 경우다. 돈키호테와 햄릿은 전자의 좋은 사례다. 굳이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를 따로 참조하지 않더라도 돈키호테와 햄릿이란 두 주인공은 불멸의 생명력을 자랑한다. "작가가 영감을 불어넣은 언어를 통해 그 작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지를 암새해주는 생생한 등장인물들"인 셈인데, 여기서 '암시해주는'이라고 옮긴 동사는 'overshadow'이다. '가리다' '빛을 읽게 하다'란 뜻으로 '작가를 무색하게 하는 주인공들'이라고 하는 게 더 낫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스카 와일드처럼 작가가 작품을 무색하게 만드는 경우다. "자신의 삶 자체가 자신의 천재성을 그릇처럼 담아낼 수 있는 작가도 있고, 책들이 곧 자신들의 재능의 생산품이 되는 작가도 있다"라고 (마치 두 작가가 있는 것처럼) 옮겼는데, 원문은 "There are writers whose lives are the recipients of their genius, and whose books are only the product of their talent."이다. "자신의 삶 자체가 천재성을 담는 그릇이고 작품은 단지 그 재능의 산물인 작가들이 있다." 정도로 옮길 수 있다. 호메로스는 어느 쪽인가.

호메로스와 그의 작품들은 첫번째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그 작품들의 긴 역사 속에는 독자들이 그 작품들을 두번째 범주에 맡기기로 선택했던 때도 여러 차례 있었다.(16-7쪽)  

첫번째 범주라는 것은 작품이나 주인공이 작가보다 더 빛을 발하는 경우다.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는 저자와 무관하게 존재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때로는 두 서사시를 '위대한 호메로스'의 천재성이 낳은 결과로 이해하던 때도 있었다는 애기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오뒷세이아) 원전 번역은 현재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 유일하다. 서양고전학자로서 역자는 새로운 번역본을 준비중인 듯한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의 작품 인용은 역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라 눈길이 간다. 

 

 

아마도 다음 세대 번역으로는 이미 두 권의 해설서를 쓴 강대진 박사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번역과 함께 기대해봄직하다. 내년 1학기에는 두 서사시를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12.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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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관련 원서를 사들이고 있는 분야 중 하나는 뇌과학이다, 며칠전에는 라마찬드란의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알키, 2012)의 원서를 다른 뇌과학서 몇 권과 함께 배송받았다. 번역본은 지난봄에 나왔지만 독서는 미뤄둔 상태였다. 원서도 구한 김에 머리말을 읽어보았다. 저자는 저명한 뇌과학자로(리처드 도킨스는 그를 가리켜 '신경과학계의 마르코 폴로"라고 불렀다) 국내에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지만(그는 자신의 전공분야를 '인지신경과학'이라고 부른다), 이 분야의 특성상 가장 최근의 책을 읽는 것이 유리하다.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가 바로 그런 책으로 라마찬드란의 최신간이다.

 

 

저자는 먼저 뇌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경탄과 자부심을 늘어놓는다. 20세기 마지막 25년 이전까지 지각과 정서, 인지, 지능에 관한 엄격한 과학적 이론은 찾아볼 길이 없었다(번역엔 누락됐는데, 색채 인지(color vision) 분야만 유일한 예외였다).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인간행위를 셜명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내세웠던 것은 프로이트주의와 행동주의라는 이론체계였다. 둘 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극적으로 퇴색했다."(10쪽) 그리고 이 시기에 신경과학은 '청동기 시대'를 넘어섰다. 물론 결코 긴 시간이라곤 볼 수 없다.

 

이어서 "물리학, 신경과학 등은 여전히 초기단계다."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Compared with physics and chemistry, neuroscience is still a young upstart."를 무성의하게 옮긴 것이다. "물리학, 화학과 비교한다면 신경과학은 아직 신출내기 학문이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발전은 괄목상대할 만하다. "유전자에서 세포, 순환계, 인식까지, 오늘날의 신경과학의 심오함은 내가 그 분야에서 일을 하기 시작할 때보다 몇 광년을 넘어섰다. 지난 10년 동안 신경과학은 전통적으로 인문학이 주도해온 지식체게에 상상력을 불어넣을 만큼 발전을 이루었다."는 게 라마찬드란의 자평이다. 예상할 수 있는 그의 전망: "이러한 발전은 다가오는 10년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100년 전에 고전물리학을 뒤집은 개념혁명과 같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11쪽) '10년 동안'이라고 번역됐지만 정확하게는 '수십년 동안(decades)'이다.

 

 

 

이어서 저자는 책에 대한 개관을 제시하는데, 몇 가지 주제가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인간은 단지 영장류와 다른 종이 아니라 유일하고 특별하다는 것이다."(11쪽) "인간도 단지 원숭이일 뿐"이라고 믿는 다수의 동료들과 견해가 다르다는 걸 그는 인정한다. 저자가 보기엔 영장류에서 인간으로의 진화과정에서 질적인 도약이 이루어졌다. 그 도약은 물론 '뇌'의 발달과 기능의 전용 때문에 가능했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가닥은 진화에 대한 전망이다. 뇌가 어떻게 진화할지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12쪽) 이 대목은 엉터리로 번역됐는데, 원문은 "Another common thread is a pervasive evolutionary perspective. It is impossible to understand how the brain works without also understading how it evolved."이다. '진화에 대한 전망'이 아니라 '진화론적 관점'이 이 책을 관통하고 있다는 애기다. 그리고 "뇌가 어떻게 진화할지"가 아니라 "뇌가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작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이어서 저자는 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Theodosius Dobzhansky)의 말을 인용하는데, "위대한 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옮겼다. '위대한 생물학자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라고 하거나 그냥 '위대한 생물학자 도브잔스키'라고 해야 했다(도브잔스키는 진화생물학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 생물 체계에서는 구조외 기능, 기원 간에 하나의 큰 공통점이 있기에 어느 하나를 이해하려면 나머지 두 개를 잘 알아야 한다. 진화적 관점이 그래서 중요한데, 이 진화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기능의 전용이다.  

우리들의 고유한 정신적인 특징 중 많은 것이 원래는 다른 원인으로 진화한 뇌 구조의 새로운 배치를 통해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새의 깃털은 비늘에서 진화했는데 원래 역할은 나는 것보다는 단열에 있었다. 박쥐와 익룡의 날개는 원래는 걷기 위해 디자인된 앞다리였다. 인간의 폐는 부양 조절을 위해 진화한 물고기의 부레에서 진화한 것이다. 진화의 기회주의적이고 우발적인 속성은 많은 작가들이 사용하던 용어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유명한 에세이 <자연의 역사>가 대표적이다.(12쪽)  

여기서 저자가 직접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진화의 기회주의적이고 우발적인 속성"을 스티븐 제이 굴드는 '굴절적응(exaptation)'이라고 불렀다. 한편 번역본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유명한 에세이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라고 하여 마치 <자연의 역사>가 책 이름인 양 옮겼는데(있지도 않은 대문자로까지 표기했다!) 그냥 "자연사 혹은 자연학(natural history)에 관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유명한 에세이들"을 가리킨다. 아래와 같은 책들이다.  

 

 

라마찬드란의 기본 관점은 우리의 뇌 역시 굴절적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진화는 원숭이 뇌의 많은 기능을 급격하게 바꿔 전적으로 새로운 기능을 창조했다. 그 중 몇몇은 - 예를 들면 언어 - 너무나 강렬했다. 생명이 화학과 물리학의 일반적인 변화를 초월할 정도로 원숭이 종의 한계를 뛰어넘은 어떤 종을 만든 것이다."(12쪽) 즉 생명현상이 물리/화학적 현상과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원숭이와 구분되며, 그 사이엔 질적인 도약이 있다는 것. 저자의 기본 생각은 그렇게 간추릴 수 있다. 몇 페이지 안 읽었지만 다소 번거롭게도 번역은 주의해서 읽어야 할 듯싶다. 좀 무성의한 번역이라고 덮어두기엔 물론 너무 흥미로운 책이다... 

 

1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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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손에서 못 놓고 있는 책은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문학동네, 2012)이다(이하 <사람의 목소리>). '중국을 말하다'란 리스트를 만들 때만 해도 한두 장을 읽었을 뿐이지만, 책을 거의 읽은 지금은, 아니 반도 안 읽었을 때부터 내게는 '올해의 책' 가운데 하나로 각인됐다. 연말에 다섯 권의 책을 꼽는다면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과 함께 이 두 권이 '확정'이다. 소위 '중국 당대사'에 대해서 이만한 실감을 전해준 책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 중국에 관한 독서량이 많지 않다 치더라도 말이다.

 

 

 

하여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도 여럿 되지만, '위화의 모든 책'을 새삼스레 구하게 됐다. 사실 산문집은 <영혼의 식사>(휴머니스트, 2008)를 좀 읽었더랬지만, 이 정도의 임팩트는 아니었다. 아마도 일상의 좀 자잘한 소재들에 관한 산문들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뒷부분까지는 읽지 않았으므로 분위기가 달라지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한다는,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 않은 컨셉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슬픔과 부조리와 감동을 전할 수 있는지를 실증한다. 뒷표지에 실린 평 가운데 공감하게 되는 것을 옮기자면, "한편으르는 배꼽 빠지게 재미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깊은 감동을 주면서도 충격적인 소설을 찾기란 힘들다. 논픽션에서 그런 작품을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위화의 이 책은 바로 그런 놀라운 책이다."(로스앤젤레스 리뷰 오브 북스)

 

그런 논픽션이 또 없을까 싶어 책장을 훑어보다가 빼온 책이 장리자의 <중국 만세!>(현암사, 2011)다. 대륙간탄도미사일 공장의 여성 노동자였다가 현재는 영어권 저널에 기고하는 저널리스트가 된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다. 위화가 60년생이고 장리자가 64년생이니까 여동생뻘이고, 얼추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니 중복되는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겹쳐 읽으면 중국에 대한 좀더 입체적인 이해를 갖게 해주지 않을까 싶다.(사실은 루쉰 전집과 펄벅의 <대지> 3부작에도 손을 대고 있다.)  

 

 

 

'위화의 모든 책'을 읽는 것과는 별도로 문화대혁명 시기와 그 이후의 중국에 대해서, 곧 당대 중국에 대해서 더 읽어보기 위해 몇 권의 책을 더 구했다.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이산, 2004)와 필립 판의 <마오의 제국>(말글빛냄, 2010) 같은 책들이다. 참고로 마오의 중국과 덩샤오핑의 중국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형태의 각도에서 볼 때, 문화대혁명 시기는 아주 단순한 시대였던 데 반해 오늘날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복잡한 시대이다. 마오쩌둥이 말한 "우리는 적이 반대하는 것을 옹호해야 하고, 적이 옹호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라는 한마디로 문화대혁명 시대의 기본적인 특징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 시기는 이처럼 흑백이 분명한 시대였다.(...) 마오쩌둥 이후에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훌륭한 고양이다"라고 한 덩샤오핑의 말이 오늘날 변화한 시대의 기본적 특징을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덩샤오핑의 이 한마디는 마오쩌둥의 사회 가치관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이리하여 중국은 정치가 모든 것을 주도하는 마오쩌둥의 흑백 시대에서 덩샤오핑의 경제지상주의 컬러 시대로 접어들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우리는 항상 "사회주의의 풀을 뜯어 먹을지언정 자본주의의 싹은 먹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오늘날의 중국에서 우리는 이미 어떤 것이 사회주의이고 어떤 것이 자본주의인지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의 중국에서는 풀과 싹 둘 다 똑같은 식물일 뿐이다.(202-3쪽) 

하지만 이러한 차이의 식별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이의 연속성이다. 지젝도 문화대혁명의 실패가 자본주의의 폭발로 이어졌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위화는 내부자의 입장에서 역시나 같은 통찰을 내놓는다. 하긴 위화만의 생각도 아니다.

혁명은 처음에는 한 차례 또 한 차례 이어지는 정치운동으로 표현되다가 대약진 시기와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 정점에 이르렀다. 그 뒤로 중국은 개혁개방을 알리며 세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혁명은 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지난 30여 년 동안 이루어진 경제기적에서도 혁명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환골탈태하여 다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중국의 경제기적 안에는 대약진 혁명운동도 있고 문화대혁명식 혁명폭력도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221-2쪽)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는 위화의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하튼 '올해의 책'을 또 한권 발견한 감동을(읽다가 눈물이 난 대목도 있다) 억누르기 어려워 시간의 곤궁 속에서도 몇자 적었다...

 

12. 09. 16.

 

 

P.S. <사람의 목소리>에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부친 서문에 보면 이 책의 "중국어판은 2011년 1월 타이완에서 출판되었고 중국 대륙에서는 아직 출판이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적었다. 타이완 기자가 <형제>와 이 책이 모두 상당한 비판정신을 담고 있는데, 어째서 후자만 중국에서 출판이 불가능한가라고 묻자 위화는 그것이 허구와 비허구의 차이라고 답했다. <허삼관 매혈기>나 <형제> 등 그의 장편소설 독자라면 이 책은 안 읽어도 되는 책이 아니라 더더구나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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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주제로 한 강의도 종종 하다 보니 독서법에 관한 책도 읽게 된다. 공부를 위해 읽는 것이 아니라 강의를 위해 읽는 셈인데, 오늘 배송받은 책은 이토 우지다카의 <천천히 깊게 읽는 즐거움>(21세기북스, 2012)이다. '속도에서 깊이로 이끄는 슬로 리딩의 힘'이 부제. 지금은 100세를 넘긴 하시모도 다케시라는 한 국어선생님의 '전대미문의 수업'을 소개하는 게 책의 골자다.

 

 

 

1950년대부터 이분이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 수업은 "교과서는 들춰 보지도 않은 채 얇은 소설책 한 권으로 3년 동안 공부"하는 '기적'의 수업이었다. 이걸 미독(味讀)이라고 부르는데, 음미하면서 읽는다는 뜻이겠다.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시모토의 제자들은 전후 빠르게 전개된 성장사회, 속도사회에 역행하기라도 하듯 느리게 그러나 착실하게 '배우는 힘'과 '살아가는 힘'을 익혔다. 그 결과 <은수저> 수업 3기에 해당하는 1968년 졸업생은 사립학교 사상 최초 도쿄 대학 최다 합격이라는 위헙을 달성한다. (5-6쪽)

성공작이었다는 얘기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은 2009년 일본의 최고재판소 제23대 사무총장에 취임한 야마사키 도시미쓰인데,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 수업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우연히 재판관이라는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궁극의 만능선수랄까요, 사회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事象)을 다룹니다. 판결을 내리는 마지막 순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법률지식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교양이랄까, 그것의 바탕이 되는 사고방식,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균형 있게 바라본다는 사고입니다. 그런 모든 사고의 뿌리를 하시모토 선생님께 배웠다고 생각합니다."(31쪽)

찾아보니 제자들에겐 '에티 선생님'이라고 불린 하시모토 다케시의 책도 번역돼 나왔다. <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슬로 리딩>(지식트리, 2012)이 그것이다. 책소개는 이렇다.

슬로 리딩의 창시자이자 하시모토 다케시는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놀이’를 통해 ‘배움’에 대한 흥미와 즐거움을 주고자 ‘은수저 슬로 리딩법’을 고안해 냈다. “배우는 것이 싫다.”고 말하는 아이에게 단순히 “‘논다’라는 기분으로 배우면 되지 않겠니?”라고 대답하기보다는 교사 스스로 아이들의 눈높이와 요구에 맞게 교재를 개발하고 교안을 마련하고자 한 데서 슬로 리딩법은 시작됐다. 이후 하시모토 선생의 ‘슬로 리딩’ 학습법은 그의 제자들인 소설가 엔도 슈사쿠, 도쿄대학 총장 하마다 준이치, 최고재판소 사무총장 야마사키 도시미쓰, 가나가와 현지사 구로이와 유지 등이 집필한 <기적의 교실>, <은사의 조건> 등에 소개되었고, 이를 NHK에서 자세히 취재, 방송함으로써 일본 열도에 슬로 리딩과 고전 읽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그 후 100세를 맞이한 하시모토 선생은 나다 중학교로 복귀, 토요 특강을 통해 원조 ‘슬로 리딩’을 강의하고 있다.

100세 이후에도 강의를 한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여하튼 그의 슬로 리딩이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일으킨 듯싶다.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에서 제안하는 '슬로 리딩', 곧 지독(遲讀)도 이런 분위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모든 책을 다 '지독'하거나 '미독'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 권 정도는 그렇게 읽는 경험을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육적 효과면에서도 그렇다.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 2009)의 저자인 사이토 다카시는 하시모토의 '슬로 리딩'에 대해 평해달라는 주문에 '걸어서 가는 소풍'을 비유로 든다.

일반적인 독서는 버스를 타고 휙 가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 발짝 두 발짝 걷다가 길가의 꽃에 이끌려 발을 멈추고 이내 걸음을 옮기는, 그런 산책 같은 소풍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시모토식 '슬로 리딩'입니다.(41족)

우리 교육현장에서도 이러한 '슬로 리딩'의 효과를 체감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속독으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하시모토 선생이 교재로 사용한 나카 칸스케(간스케)의 <은수저>(세시, 1997)는 번역된 적이 있지만 지금은 절판됐다. 메이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은수저>만이 미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건 물론 아니다. 사이토 다카시는 "<은수저>처럼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읽으면 실력이 붙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주문에 이렇게 답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초등학생은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 중고생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대학생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인이라면 <논어> 정도가 좋습니다. 장르는 서로 다르지만 각각의 세계가 있고,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가치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41쪽) 

모두가 '구면'인 작품이라 반가운데, <논어>를 제외하면 개인적으로는 모두 강의해본 작품들이다. 특히 <죄와 벌>은 6주간 읽은 적도 있다. 3년짜리 '슬로 리딩'에는 많이 못 미치지만, 한 1년간 읽는 건 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요즘 이곳저곳에서 하고 있는 지젝 강의도 마찬가지인데, 얇은 책이더라도 몇달 간 같이 읽는다면, 그만큼 '실력'이 붙지 않을까. 그런 게 슬로 리딩의 힘이다...

 

12. 09.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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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 2010)를 읽다가 주문한 책은 칼(카를) 비테 부자가 각각 쓴 <칼 비테의 자녀교육법>(베이직북스, 2008)과 <칼 비테의 공부의 즐거움>(베이직북스, 2008)이다. 이 부자가 유명해진 건 목사였던 아버지 칼 비테(1748-1831)의 유난스런 교육 때문인데, 조기교육과 영재교육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던 그는 평범한 아들, 심지어 지능이 좀 떨어진다는 아들 칼 비테 주니어(1800-1883)에게 일반적인 학교 교육과는 '다른 교육'을 실시하여 '천재'로 만들었다.

 

 

 

이지성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문고전 독서' 교육이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인데, "그는 태어난 지 15일 된 아들에게 위대한 시인들의 시를 읽어주었다. 두 살 때부터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같은 고전을 읽어주었고, 여덟 살 때부터는 혼자 그리스 로마 고전을 원전으로 읽게 했다."(62쪽) 결과는?

카를 비테 주니어의 두뇌는 위대한 천재들이 집필한 인문고전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기적처럼 변했다. 그는 고작 아홉 살에 라이프치히 대학 입학자격을 취득했고 열세 살에 기센 대학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열여섯 살에 하이델베르크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베를린대학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여든세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로 칭송받았다.(62쪽)

영재교육, 천재교육에 열광하는 부모에겐 단연 돋보이는 커리어이다. 오늘 구입한 책들도 2008년에 초판이 나와서 작년 12월과 8월에 각각 12쇄와 7쇄를 찍고 있다. 가정교육, 자녀교육의 '바이블'이란 문구도 표지에는 박혀 있다.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도 인문고전 교육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거론되고 있고. 그런데 수수께끼가 나온다.

카를 비테는 지능이 떨어지는 아들을 천재로 키운 비결을 책으로 썼다. 세상 모든 부모들이 자녀를 천재로 키우기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책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듯했던 비테의 저서는 20세기에 하버드대학교 도서관 서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 책을 접한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다.(62-3쪽)

 

 

갑자기 사라져버리다니?! 무슨 음모론도 아니고 무슨 얘긴가? <자녀교육법>에는 그런 언급이 없으므로 기무라 큐이치의 <칼 비테 영재교육법>(푸른육아, 2006) 같은 책에나 나오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아들 비테가 1814년에 기센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기네스북에 오른 기록이라 한다. 최연소 박사학위자라는 건데,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고. 그런 아들을 키워낸 기록이 그의 <자녀교육법>으로 책갈피 소개로는 1818년에 저술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를 참고하니 1819년에 출간했다. 영어본이 나온 것은 1914년. 하버드대 도서관에서 발견됐다는 게 그 즈음인 모양이다. 그런데, 책갈피의 저자 소개는 이렇게 돼 있다.

그는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을 독특한 교육이념과 방법으로 훌륭하게 길러낸 경험을 바탕으로 1818년에 저술한 <칼 비테의 교육>이란 책은 조기교육 이론서로써 지난 200년 동안 영재교육의 '경전'으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고 있다.

일단 문장이 비문이기에 교정하자면 그는 -> 그가, 이론서로써 ->이론서로서.(<공부의 즐거움>에서도 '조기교육 이론서로'라고 돼 있다. 출판사가 '베이직'이 안돼 있다) 그리고 "지난 200년 동안 영재교육의 '경전'"으로 불려왔다는 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사실과 호응하지 않는다. 영어 위키백과를 보면(의외로 굉장히 짧다!) 독일에서 책이 나왔을 때 비난이 쏟아졌고 곧 잊혀졌다고 돼 있다. 그럼에도 '영재교육의 경전'이라면 '잊혀진 경전'이라거나 '오명을 뒤집어쓴 경전'이라고 해야겠다.  

 

 

 

사실 책은 영어판으로도 1914년 이후에는 조용하다가 2008년부터 다시 출간되는 듯싶고, 알라딘에는 뜨지도 않는다. 별로 인지도가 없는 책. 오히려 칼 비테의 가장 유명한 책은 단테 연구서이다. 그러니 '자녀교육의 바이블'이라거나 '가정교육의 바이블'이란 건 다 과장된 문구로 보인다. 이런 게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과장법과는 잘 호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흥미로운 건 역자다. <자녀교육법>의 역자는 약력이 "충북대 중문과를 졸업하였고, 북경 공업대학과 상해 재경대학에서 수학하였다"고 돼 있다. 그리고 <공부의 즐거움>의 역자는 "대구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중국 강소성 소주대학교에서 수학했다."고 돼 있고. 무슨 뜻인가? 책이 독어판을 옮긴 게 아니라 중국어판에서 중역했다는 뜻이다. 영어 위키백과를 보고서야 의문이 풀렸는데, 독일에서는 잊혀졌다는 말에 뒤이어 21세기초 중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말이 나온다(한국어본의 원전도 그래서 오리무중이다. 중국어본의 대본이 무엇인지 불분명하므로). 법적으로 아이를 하나씩만 키우는 중국의 부모들이 '천재교육'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예일대 교수인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도 떠올리게 된다. 우리에겐 전혜성 교수의 교육법이 이에 대응할 만할까.)

 

 

 

그러고 보면 <천재로 키워라>(종이나라, 2007)의 저자가 바로 중국인이고, 이 책의 번역자가 <공부의 즐거움> 번역자이기도 하다. 짐작엔 중국에서 갑자기 뜬 책이 우리에게도 '가정교육이론의 고전'으로 소개된 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리딩으로 리드하라>에 열광한 독자들이 다시 또 이 책을 찾는 게 아닌가 싶고. 이런 '풍문'과 실제 교육학계에서의 '평가'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비테의 교육법이 소개되려면 자초지종에 대한 정확한 재구성과 함께여야 한다. 그의 교육법의 핵심이 인문고전 읽히기로 돼 있지만 어쩌면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르기에. 그는 항상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카를, 넌 최고란다. 아빠는 네가 할 수 있다고 믿는단다. 그러니 힘을 내렴."  

 

모처럼 '자녀교육법'에 대한 책을 구입했더니 정체가 불분명한 책이어서 몇자 적었다. 안 사던 책을 사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그래도 책엔 재미있는 내용도 들어 있다. 목사였던 아버지 비테의 결혼관을 아들은 이렇게 요약한다. "아버지는 결혼의 목적이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하는 자녀를 기르기 위한 것인지, 세속적인 다른 그 무언가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무. "아버지로서의 첫 번째 임무는 자녀를 위해 좋은 엄마를 선택하는 일이다. 그런 뒤에는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쳐야 한다." 그 준비 안에는 '다량의 교육서'를 읽는 일도 포함된다. 나처럼 아이가 클 만큼 큰 뒤에 읽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미리미리...

 

12. 0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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