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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 여기저기서 정산하고 결산하느라 분주하다. 오늘자 한겨레(28면)엔 여성관객들이 뽑은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 순위가 소개돼 있는데, 예상할 수 있듯이 최악의 영화 1위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이다.

 

 

 


이번주 씨네21에 각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영화 목록을 보면, <나쁜 남자>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은 이들도 적지는 않다(25%정도). 김기덕에 대한 평단의 시각은 엇갈리지만,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 쪽이어서(<나쁜 남자>엔 적의만 있지 리얼리티가 없다) <나쁜 남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리고 2위는 <가문의 영광> 3위는 <취화선> 4위는 <중독>이다. <최화선>은 언제 시간나면 볼 예정이지만, 나머지 영화들에는 아직 관심이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임권택의 영화로는 <노는 계집 창>도 그해의 최악의 영화에 뽑혔던 듯하다(그리고 물론 그럴 만하다). 임권택식 휴머니즘은 대개 남성중심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5,6위 영화들이다. 대다수 평론가들에 의해 올해의 영화로 지목된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과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각각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묘사", "장애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라는 이유로 최악의 영화 리스트에 오른 것. 물론 이 목록은 일반 여성관객들(+여성문화예술인)의 평가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 '대중주의'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영화들이 여성관객들을 불편하게 한 최악의 영화들인지는 의심스럽다. 즉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하게 됐지만,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들 가운데, 두 편은 가장 재미있는 영화들이었고, 가장 동의할 만한 영화들이었다.

나의 동의의 근거는 리얼리즘에 있다(나는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을 지지한다. 순수한 환타지를 나는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물론 시야를 넓히면, 마술적, 환상적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꼽을 수도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그런 계열의 걸작이 나올 가능성은 아직은 희박하다. 때문에 한국영화에는 제대론 된 영화('리얼리즘 영화'와 '쟝르 영화'가 주종이다)와 덜 떨어진 영화(여기에도 두 부류가 있다. '돈번 영화'와 '돈날린 영화')가 있을 뿐이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지극히 모던적이며,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내가 그의 영화에서 즐기는 것은 디테일(리얼리티)이다. <생활의 발견>과 <오아시스>는 리얼리티에 근거한 유머와 환타지로 올해의 '발견'에 값하는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에서의 여성 이미지는 내가 보기에 '현실'의, 아주 '현실적인' 이미지들이다. 그런 이유로 그 영화들이 최악이라면, 공권력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된 시위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폭력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고, 여성들의 성적착취 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차별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다.

 

 

 

 

한편 최고의 영화로 꼽힌 두 작품은 변영주의 <밀애>와 유하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다. <밀애>는 보지못해서(보려고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없고, <미친짓>의 경우는 사회적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한 얄팍한 상업영화이다. 물론 감독도, 관객도 그 영화가 상업영화란 걸 알며 6000원 어치의 감동을 팔고사는 거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여성의 욕구를 솔직히 표현"했다는 이유로 이 영화가 여성영화라니?

<나쁜 남자>의 경우가 전형적인 남성 환타지이며, 그래서 최악의 영화라면, <미친짓>은 여성 환타지이기 때문에 여성영화란 말일까? 그 영화에서 여성의 솔직한 욕구란 건, (열정적인) 사랑과 (안정적인) 결혼을 한꺼번에 얻고 싶다는 욕구이다. 즉, 의사남편과 결혼하고 잘생긴 대학강사를 정부로 두며 '영리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것이 현실에서는 대개 대립하기 때문에, 영화속 현실은 관객의 환타지가 되며, 대리만족을 준다. 결혼 제도에 대한 비아냥이 대화의 양념으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영화 속 엄정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의 관객들도 결혼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성적이고, 여성영화란 말일까? 여성들의 솔직한 욕구가 판단의 기준이라면, <죽어도 좋아>는 왜 빠졌을까?

나는 일반적으로 좋은 영화와 여성관객에게 좋은 영화가 구별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여성에게 혐오스러운 영화는 남성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어야 맞다. 물론 그 차이나 간극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을 테지만, 서로가 판단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좋은 영화는 그런 부분을 포착하고 확장시켜 가는 데 기여한다. 내가 보기에 <생활의 발견>이나 <오아시스>는 그런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친짓>(<밀애>는 보지 못했으므로)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알게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편견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아시스>에 대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비판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을 모아 읽고, 재비판하고 싶었지만, 일상적인 일들에 치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밀린 빨래를 한꺼번에 할 때처럼 몰아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정성일은 내가 비교적 신뢰하는 평론가이지만(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보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영화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한.) 간혹 그의 취향은 튀어 보인다. 그의 <오아시스> 비판은 공정하지가 못했는데(그래서 나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그 비판의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장애 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다(이런 이유로 한 장애 여성도 <오아시스>를 비판한 적이 있다).

간단히 핵심만 말하면, 영화에서 종두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관심을 표출할 수 없는 인간이다. 종두가 '철이 들어서' <프리티 우먼>의 리처드 기어식으로 구애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여성적인 설정일까? 공주에게서 문제가 된 건, '폭력'이 아니라 '관심'이다. 그리고 둘이 가까워지는 건 '폭력'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관심'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설정에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에서 종구가 나무에 올라가 공주를 위해서, 공주의 환타지(오아시스)를 방해하는 나뭇가지들을 베어내고, 공주가 한껏 라디오 음악의 볼륨을 높이는 대목은 압권이다(이미 알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 <오아시스>에서 인물의 대립축은 공주:종두가 아니라, 그들:우리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더 폭력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두가 아니라 공주와 종두의 주변 사람들, 즉 우리들이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사랑이라는 구도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보기엔 이 영화의 가해자들이다.

올해의 영화 5편에 정성일은 <취화선>을 1위로 꼽고(그의 임권택 숭배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아시스> 대신에 <나쁜 남자>를 집어넣었는데, 취향은 저마다 자유인 것이지만, 나는 그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나쁜 선택이다...


200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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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저 모습이 로쟈님인가요?/많은 항목중에 영화를 깊이있게 보지는 못하지만 좋아해서 여기에 처음으로 꼬릿글을 달게 되었습니다/전행영화와 깡패영화가 제작된 영화의 절반을 넘을거라는 저의 통계입니다/모성본능이라면 생산된 자식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것이며 무서운 폭력과 여성을 무시하는 그런영화들이 널려 있는데.....글쓴지 7년이 지났으니 올 년말쯤에는 조금나쁜 영화보다 많이 나쁜 영화를 골랐다는 기사를 접하길 기대합니다.
 

..

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 한 장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

97. 12.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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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3-2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서재질은 수혜자로서의 것입니다. 비를 가둔채 흐린 하늘 아래서 갈증을 느끼면서 나를 완전히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오래 전 '오아시스'에 대한 의견은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네요. 종두는 쉽게 이해 받기 힘든 극소수자의 입장입니다. 이 페이퍼는 내가 빠진 무력감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boinda 2009-08-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지만 인내하면서 정독했습니다/이 글을 건너 진도를 나가고 싶은데.../여기 오는날 마다 한 단락씩 읽어 보렵니다
 

지난 설연휴 끝에 쓴 글을 여기에 옮겨둔다... 연휴가 끝나고 연 사흘째 이삿짐을 싸고 있다. 모레부터 3주 동안 지난 1년간 몸담았던 연구소의 천정과 바닥 공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연구소 비품도 챙겨야 하고 그동안 쌓아두었던 책들을 몽땅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저것 해서 30박스쯤 정리하는 일이니까 일이야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짐을 챙기는 손은 더디고 마음은 심란하다. 2월에 해야 할 일들이 빽빽한 터에, 벌써(!) '이삿짐'이나 챙기고 있다니!..

 

 

 

 


잠시 기분풀이로 올해에 나올 책들과 영화들을 꼽아본다. 영화잡지들을 그다지 챙겨보지 않기 때문에, 현재 제작중인 영화들이 어떤 것들인지 잘 알지 못하지만, 올해 어떤 영화들이 개봉된다 하더라도 내가 보고싶은 영화로 첫손가락에 꼽을 건 이미 정해져 있다. 그건 홍상수의 다섯번째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지난주 <씨네21>에 실린 촬영장 취재기를 보면, 벌써 지난 10일에 모든 촬영이 마무리되고, 편집 등의 후반부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5월초 개봉예정). 그의 모든 영화를 개봉관이나 시사회장에서 보았었는데(<강원도의 힘>은 시사회장에서 허진호 감독 바로 앞자리에서 보았다), 아쉽게도 이번만은 그러지 못할 거 같다. 예정대로 개봉될 때쯤이면 나는 다른 나라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이 생각을 하니까 외국에 나가는 일이 싫어진다!).(*그로부터 1년도 더 지났다. 나는 얼마전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비디오를 '떨이'매장에서 2,000원 주고 샀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빌면, 나는 매번 홍상수의 영화가 '뒈지게' 기다려진다. 사실 데뷔작이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부터가 문제적이었는데, 나는 그 영화가 개봉되기 일주일 전에 (잘못알고) 개봉관에 가서 왜 영화를 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홍상수는 '한국영화의 발견'이다(나는 개봉관에서 연거푸 그의 데뷔작을 보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아직은 임권택을 꼽지만, 그건 노장에 대한 예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대학에 들어와서 나중에야 그의 전환점이 된 <만다라>나 <길소뜸>을 봤지만(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맘에 든다), 아무런 유보없이 '임권택 만세!'를 부르기엔 나는 너무 젊었다.

 

 

 

 

아마도 내가 극장에서 최초로 본 임권택 영화는 <씨받이>였던 거 같다. 그 전에 그해 아카데미작품상 수상작인 <아웃 오브 아프리카>란 영화를 볼 때 <씨받이>의 예고편이 나왔고 관객들이 다 웃음을 터뜨린 기억이 있다. 비록 강수연이 베니스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선 그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다소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이 한국영화에 대한 당시 관객들의 일반적인 시선이었다. 8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는 주윤발의 홍콩 느와르보다도 못한 평가를 받았고, 한국영화를 (공개적으로) 보러 가는 대학생은 아주 드물었다.

가히 한국영화의 몰락이라고 할 만한데, 그러한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감독이 이장호이다. 그의 80년대 필모그라피는 <바람불어 좋은 날>(그의 가장 좋은 영화)에서 <바보선언>(그나마 객기가 문제의식처럼 보인 영화)을 거쳐서 <어우동>으로 빠진다(혹은 <무릎과 무릎 사이>에서 익사한다). 그나마 퇴행적으로라도 80년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가 이장호의 조감독 출신인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시리즈이다(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답답한 청춘들!) 하지만, 이 배창호도 흥행몰이에 우쭐하여 장미희에 대한 오마주로 <황진이>를 만들면서 하향안정세로 접어든다.


 

 

 


 

그리고, 80년대 후반 조금 숨통이 트이는 것이 당시 히트 연극을 영화화한 박광수의 <칠수와 만수>(1988)부터이다. 장선우의 <성공시대>나 이명세의 <개그맨> 등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면서 이른바 한국영화의 새로운 젊은 감독 3인방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박광수는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좀 일찍 정점을 보여주더니(그 이상을 기대했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게 정점이었다) <베를린 리포트>부터 곧바로 삼천포로 빠지기 시작해서 아직 돌아온다는 소식이 없고(복고풍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로 잠시 재기하는 듯했지만 <이재수의 난>으로 완전히 찍혀 버렸다), 장선우는 세속세계(그가 잘 만드는 쪽이다)와 화엄 세계(그가 죽을 쑤는 쪽이다)를 왔다리갔다리하면서 들쭉날쭉 영화를 만들다가(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우묵배미의 사랑>이다)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이후에 잠적중이고(이번에 재기한다는 소문도 있다. 시집 한권 내고서), 그나마 엘리트의식 없이 이장호-배창호 사단의 적자로서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감독이 이명세인데(<인정사정 볼것없다>로 드디어 대중적인 인정을 받았다), 현재는 도미중이다.


 

 

 

 


한국영화에서 이들 3총사를 잇는 차세대의 대표적인 감독이 1996년에 데뷔한 홍상수이다. 시작은 아주 미미했지만, 요즘들어 서서히 대가급으로 인정받는 박찬욱 감독과 나이는 박광수, 장선우 세대이지만 (박광수 조감독 출신의) 한국영화감독이 맞나 싶게, 영화를 잘 만드는 이창동 감독(겸 장관)이 같은 세대이고(새로운 3인방이라고나 할까?),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이 한국영화의 미래이다(물론 확실한 자기 스타일을 먼저 보여준 건 장준환이고, 봉준호는 감독 자신의 고백대로 아직은 암중모색단계이다).

거기에, 아직은 홍상수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허준호나 박찬옥 감독까지 곁들이면, 강우석-김상진 계보나 강제규 감독 등과 대비되는, 한국영화에서의 작가주의 진영이 대략 갖춰진다(여기서, 작가주의라는 건, 관객의 코드보다는 감독 자신이나 영화에 대한 고려가 우선적인 영화만들기를 통칭한다). 참, 가장 과대평가된 '속죄양' 혹은 영화판의 '장정일' 김기덕이 빠졌다. 지젝이 잘 쓰는 표현에 따르면, 김기덕은 홍상수식 작가주의 영화의 외설적인 이면처럼 보인다.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닌데, 뜬금없이 한국영화사 얘기가 돼 버렸다. 어쨌든 한국영화라는 장 속에서 홍상수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간단히 짚어보고 싶었을 뿐이고, 가까운 장래에(한 10년쯤 후에)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임권택 대신에) 우리는 그의 이름을 꼽을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는 국외에서나 평단에선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은 대중적인 인지도가 그에 못미칠 따름이다. 잠시 이번 신작의 촬영장을 훔쳐본 기자에 의하면, 이번 영화는 이전보다 더 많은 유머들로 넘쳐난다고 하고, 또 성현아가 주연을 맡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들 중 역대 관객동원 기록을 갱신할 가능성이 높다. 그 관객에 내가 빠지더라도.

하니, 바라건대, "우물에 빠진 돼지가 강원도에서 수정을 만나서 발견한 것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우스개도 있는 만큼 가급적이면 그의 영화들을 두루 섭렵하신 다음에 올봄에 개봉박두인 영화를 기대해 보심이 어떠실지? 이 정도면 나도 홍상수에 대한 애정을 충분히 표시한 셈인가? 나는 받은 만큼 갚는다(이게 비평의 기본 자세이다). 그렇다면, 제목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무슨 뜻인가? 제목 풀이는 <씨네21>의 기사를 참조하시길(그래야 감독의 육성을 직접 읽을 수 있다)...

참, 올해에 나올 책 얘기를 빠뜨릴 뻔했다. 올해 나올 책으로 내가 가장 기대하는 건 데리다의 <법의 힘>이다. 역자는 진태원씨이고(그는 <마르크스의 유령들>도 다시 번역중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데리다 전문 번역자가 탄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교정중이라고 하니까, 올봄엔 책이 나올 거 같다. 비로소 데리다가 한국어로 번역되는 '사건'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어쩌면 올해 그의 부고를 들을지도 모르고). 유감스럽게도, 이 책 역시 내가 뜨끈한 책을 읽어보긴 힘들 거 같군. 그리고 아마도 지젝의 주저 두 권이 올해 안에 나올 것이다. 두 권 모두 기대반 우려반이다. 데리다보다도 수준이 떨어지는 지젝 번역서라면?

라캉의 <에크리>는 판권을 갖고 있는 새물결이 연말에 나온 사진집으로 떼돈을 벌었다고 해도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번역의 질이기 때문이다. 올해 안에 나온다면, 2% 정도 기대해 봄직하다(98%는 아마도 우리말이 아닐 확률이다). 나는 그의 문장들이 어떻게 우리말로 변환될 수 있는지, 그 번역의 연금술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연금술은 '연금술'에 그칠 거라는 것이 이성적인 판단이다. 해서, 라캉과의 조우라는 사건은 아직은 미래형이다. 적임자가 곧 도래하기를 바란다.

또, 무슨 책들이 나올 것인가? 간혹 나이 먹는 일이 덜 유감스러운 것은 순전히 이러한 기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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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워낙 소심해서 읽으면서 조마조마 했습니다/ㅎ/참 삼천포라는 단어도 포함해서/요즘 명예도 없는 사람들이 그것을 훼손했다고 야단법석이라서...../하지만 여기에 거론되지 않은 가독은 서운해 할지 모르겠습니다/한 시대를 순간 읽어내리면서 동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한국사람은 세계 1등 좋아하는데/세월이 지난 지금도 김기덕과 홍상수는 알아주지 않습니다/세계에서 알아주는데 말입니다/저는 외국에서 유명하다고 그래서 더 좋아할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음.......데리다/이 번에도 데리다가 발목을 잡네요/지금쯤 다른 항목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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