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프린터가 말썽을 부리는 탓에 30분 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종이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 프린터도 열 받은 것 같지만, 열은 나도 받았다. 프린터를 잠시 꺼두고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창고' 정리나 한다. '미용사 판타지에 대하여'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는데, 내가 좋아했던 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 <미용사의 남편>(1990)에 대해서 '커트'하는 기분으로 잠시 매만져본다. 국내에선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제목으로 개봉했었지만(기억에 영화는 92년 가을 씨네하우스에서 개봉일이었던 토요일 오후에 봤다. 아마 연거푸 보았던 듯하다), 나는 원제를 더 좋아한다.

일단 영화의 줄거리를 옮겨온다: 앙뜨완(쟝 로슈포르 분)은 12살의 소년이다. 그에게는 비밀스런 즐거움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쉐퍼 부인이 주인인 이발소에 가는 일이다. 그녀가 풍기는 향기와 부드러운 말투에 완전히 매혹당했기에 머리를 기를 새가 없다. 어느날 저녁 식사때 아버지가 장래에 대해 물었을때 서슴없이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다고 대답했고, 그날 이후 미용사의 남편이 될 꿈을 간직한 채 거의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가 마틸드(안나 갈리에나 분)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마틸드는 주인이 은퇴하면서 물려준 이발소의 주인이었고 조심스럽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처음에 그녀는 예약 손님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으나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는 청혼한다. 아버지의 말씀인 "강한 신념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기필코 마틸드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녀 주위를 3주일동안 맴돈 후 다시 찾아갔을때, 뜻밖에도 그녀가 "아직도 원하신다면 결혼할께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다.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는 인연을 끊었다.

세상의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고 아이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곧 삶이었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틸드가 일을 하고 있으면 그는 옆에서 도와주거나, 때쓰는 아이를 달래주기도 하고, 그녀와 단둘이 머물수 있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곤 했다. 10년동안 사소한 일로 단 한번을 다투었을 뿐인데도 그의 심장은 얼어붙을 정도고, 그녀를 향한 사랑은 강렬하고 깊었다. 심한 번개와 비가 내리던 날, 둘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마틸드는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만을 남긴 채. "사랑하는 이에게. 먼저 떠납니다. 사랑을 남기고가려구요. 아니 불행이 오기전에 갑니다. 우리의 숨결과 당신의 체취와 모습, 입맞춤까지 당신이 선물하신 내 생애 절정에서 떠납니다. 언제나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날 잊지 못하도록 지금 떠납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파트리스 주로 ‘아찔한 영화'들을 만드는데, ‘아찔한 여성들’ 때문에 신세 망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장르이다. <미용사의 남편>도 예외는 아닌데, 그의 영화들 중에서 <이본느의 향기>, <살인혐의>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살인혐의>의 원제는 <므슈 이르>).

나대로 <미용사의 남편>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한 소년이 동네 미용실의 (아주 풍만한!) 미용사 아줌마를 ‘사랑’한다. 아줌마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그런 이상형의 미용사를 평생 꿈꾸며 산다. 그리고 장년이 된 그는 정말로 젊고 ‘아찔한’ 미용사를 만나 (당연히)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 ‘아찔한’ 미용사는 가장 행복할 때 죽겠다면서 폭우가 쏟아지던 날 강물에 투신한다(오, 아찔한 것들이여!). 혼자 남은 ‘미용사의 남편’, 아내가 없는 텅 빈 미용실에서 혼자 배꼽춤을 춘다. 다시 혼자 쓸쓸하게 남겨진 한 남자를 두고 카메라는 뒤로 빠져나온다.

이 영화의 절정은 미용사 아내의 투신이 아니라 남편의 코믹하면서도 허전한 배꼽춤이다. 그것은 ‘아찔함’이 남긴 공백을 채우기 위한 ‘허전함’의 몸부림이어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눈물겹다. 그래도,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이 영화가, 혹은 이 영화에서의 사랑의 공식이 어떤 보편성을 갖는다면, 그건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용사 판타지’가 어느 정도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용사 판타지'는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서 갖는 여러 판타지의 일종이지만(물론 여성도 ‘미용사 판타지’를 갖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그 직접성, 구체성에 있어서 특권적이라 할 만하다. 무엇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가? ‘머리 만져주기’, 혹은 ‘머리 감겨주기’. 단적으로 말해서, 미용사는 ‘엄마’ 외에 우리의 ‘머리를 감겨주는’ 유일한 사람이다(물론 엄마의 대역으로서 이모와 할머니도 있지만 그건 어릴 때 잠시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용사가 엄마와의 2자적 관계에서 ‘제3자’로서의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전개되는 3자적/사회적 관계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즉 ‘미용사’는 상상계(엄마)와 상징계(아버지의 이름) 사이의 중간계에 대한 이름이다(마치 지옥과 천국 사이에 연옥이 있는 것처럼). 요컨대, <엄마-미용사-아버지의 이름>의 3단계.

[Amy]

 

라캉 이론에서 거울단계는 그 경계면을 지시하는데, 사실 미용실이야말로 거울로 꽉 찬 ‘거울단계적’ 공간 아닌가? 그 거울 앞에서 눈을 감으면, 우리는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 즉 촉각에만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는바, 이 촉각이야말로 2자적 관계에서의 기본 감각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우리는 상징계의 시선으로 사회적 자아(social self = me)가 잘 연출되고 있는지 ‘감시’한다. 이때의 시각은 3자적 관계에서의 가장 주된 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은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의 스위치(전환) 공간이다. 우리는 미용실에서 이젠 회복할 수 없는 상상계적 공간에 잠시 잠겼다가 다시 깨어나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 미용실의 핵심적인 공간은 머리를 깎는 곳이 아니라 머리를 감는 곳이다(아예 머리를 깎는 것은 머리를 감기 위한 전희(前戱), 곧 pre-play는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샴푸의자에 앉아서 우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이건 옛날 이발소에서처럼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감는 것과는 다르다. ‘숙여!’란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감는 건, 복종을 내면화하는 학습과 단련의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를 감기는 엄마는 ‘아버지-금지’의 목소리를 가진 ‘아버지의 대행자’로서의 엄마이다.

때문에, 미용사의 첫째 조건은 상냥함과 부드러운 손길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하거나 무뚝뚝한 미용사는 ‘아버지의 대행자’와 다를 바 없는데, 사실 머리를 가위질하는 그들의 손길은 정신분석학적으론 ‘거세 위협’, 더 나아가 ‘상징적 거세’를 무대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거울(관중) 앞에서.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집히는 일보다 훨씬 더 끔찍한 건 이런 ‘아버지-미용사’들에게 걸리는 일이다!

어쨌든 제대로일 경우, 우리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원래의 무능력(helplessness) 상태로 돌아가며(우리의 잘난 ‘머리’는 원래의 ‘머리통’이 된다!), 모든 것을 ‘엄마의 대행자’로서의 미용사의 손길에 맡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는 그 손길(촉각)과 함께 물에 적셔지고 물에 잠겨진다. 우리는 그렇게 ‘죽는다’. 사회적 자아의 익사. 그리고는 물론 되살아난다. 머리를 말리면서. 잠시 묻어두었던 온갖 고민거리들과 의무들을 다시 떠올리고 떠안으면서. 제대로 깎였는지를 정신차리고 확인하면서!



이러한 구도를 전제할 때, 미용사의 남편이 되고 싶어하는 꿈, 혹은 미용사 판타지는 상상계적 아이의 단계(엄마가 머리를 감겨주던 단계)에서 상징계적 어른의 단계(자기 혼자 머리를 감아야 하는 단계)로 이행해 가야 하는 과정이 두렵거나 귀찮은 ‘미숙한’ 남자들의 판타지이다(‘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주류적 판타지에 기대어 볼 때). 그들은 여전히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미용사(엄마의 대행자)의 손에 의해 머리를 감고자 하는 어른-아이인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론 그렇다(왜 미용사의 남편들은 생활력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걸까? 물론 이에 대한 데이터를 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나도 한때 미용사와의 사랑, 미용사와의 결혼을 꿈꾸었지만(왜 아니겠는가? 더 어릴 때는 버스 안내양 판타지에 빠진 경력도 있는데!), 퇴짜맞았다(물론 이런 퇴짜를 맞을 때도 아찔하다!). 이미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했다(지나고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또 한때는 아예 미용기술을 배워서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다(무슨 생각을 못하겠는가?). 그럼 미용사의 남편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미용사 남편’은 될 테니까.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고(러시아에서라면, 생각을 고쳐먹기가 훨씬 쉬울 듯하다!),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식의 글쓰기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대로의 ‘배꼽춤’인 셈이다. 

아내는 간혹 내가 미용사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사진은 '미용사 남편'이 등장하는 영화 <화이트>). 뒤집어 생각하면, 아내에겐 ‘미용사의 아내’ 판타지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이 보편성!). 결국, 우리는 서로가 갖고 있지 않은 걸로 서로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 삶이 언제나 ‘간 길’(=이었네!)과 ‘가지 않은 길’(=이었더라면!)이란 이원적 구조 속에서만 유지/지탱되는 거라면, 우리의 판타지는 곧 현실이기도 하다. 판타지가 없다면, 현실도 없을 것이기에(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판타지, 혹은 현실의 알리바이.

거꾸로, 판타지가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다. 때문에 다행이건, 불행이건 현실은 언제나 ‘아찔한 것들’을 놓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판타지는 그 유구함을 유지한다. 이것이 현실과 판타지의 변증법인바, 이 변증법은 욕망의 구조를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욕망 때문에 우리는 자주/간혹 자기파멸로의 유혹에 시달리지만, 욕망이 없다면, 한 시인의 말대로, 삶은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할 것인가! 이곳 (모스크바) 전철역 주변에서 언제나 늘어지게 자고 있는, 집 없는 개들처럼...(아래 사진은 그런 개들을 자주 보던 모스크바의 '대학역' 역사 주변의 야경이다. 모스크바 대학은이 전철역에서 15-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이다. 얼마나 자주 드나들던 출입문이었던가!)

06. 02. 03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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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이발소, 미용실은 늘 관능의 기운을 아찔하게 휘감고 있는 곳이죠.
머리 감기, 가 전희 행위라는 데 끄덕.
이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위험하다고 느껴왔는데...

로드무비 2006-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행복의 절정에서 그렇게 휙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다니!
소년의 엄마가 떠준 털실 빤쓰도 인상적이었어요.
방울이 달렸었나?
이 페이퍼 퍼갈게요, 로쟈님.^^

딸기야놀러가자 2006-02-0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갈께요.

바람돌이 2006-02-0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둘이 미용실안에서 춤추던 장면이 어찌나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되던지... 지금은 다른건 다 잊었어도 그 장면만은 생생하게 떠올라요. 뭐라고 하든 그냥 그들의 사랑이 부러웠어요. 진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예요. ^^

로쟈 2006-02-0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들을 좀 수정했습니다. 많이들 좋아하시는 영화는 분명하군요.^^

로드무비 2006-02-0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한 그림들도 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방학이지만 '월요일'이란 이유로 학교에 나왔다(대신에 점심 먹을 때쯤 나왔다). 오는 길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대략 점심먹을 때까지 들춰보았다. 그리고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2005)와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을 보아야 하는 영화로 일단 꼽아두었다. 전자는 나이 어린 부모(=아이)에게 생긴 한 '아이'에 관한 영화이며, 후자는 두 남자간의 (우정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게이 영화'이다. 

내 분류대로 하자면, 전자는 '로망스'이고 후자는 '포르노'이다. 아마도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두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마디 코멘트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아마도 내가 접할 수 있는 '2005년의 영화' 두 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설특집이라고 실린 '문화계 32인의 강추, 나만의 컬처블로그'를 훑어보는데, 가장 눈길이 간 '블로그'는 역시나 마광수 교수의 '이런 게 예술이지'. 아침 나절에도 요즘 읽고 있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들춰본 탓인지 '예술'이란 단어에 내 시지각이 민활하게 반응했다. 커피 한잔 마시는 김에 아르바이트로 '예술' 좀 따라가본다. 

 

 

 

 

마광수 교수는 작년 한 해 동안 대략 8-9권의 책을 출간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모양이다. 앤드류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아마 그의 책들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그의 책들을 초기의 문학이론서나 윤동주 론을 제외하면 별반 읽은 게 없다(한두 권 읽어보면 나머지는 지루하다는 게 그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게 예술이지'를 읽으며 그에게 더 맞는 건 '야설'이 아닌 '야동'의 세계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명과 일기, 잡담들만 잔뜩 늘어놓는 그의 '권태'는 동적인 영상들로부터의 소외가 낳은 결과는 아닐는지(그런 의미에서, '국민감독' 임권택만 도와주지 말고, '국민권태' 마광수도 좀 도와주자! 진짜 '예술' 좀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또 먹고 살 만하면, 볼 게 포르노밖에 더 있는가?)  

마광수 교수(1951- )가 소개하고/자랑하고 있는 예술은 앤드류 블레이크(Andrew Blake, 1947- )의 세계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지 모르겠지만(나는 처음 들어봤다), '앤드류 블레이크의 세계'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앤드류 블레이크의 에로틱 세계'이다. 관련사이트에서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포르노 관련으로는 작가, 편집, 촬영, 감독, 제작 안 하는 게 없고, 직접 찍은 것만도 거의 60편에 이른다. 마교수는 앤드류 블레이크의 베스트 타이틀 5편을 거명하면서 이렇게 소개한다.

"요즘 학생들한테 물어보니 예쁘기만 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무슨 말씀, 탐미주의자인 내가 보기엔 이거야말로 유미주의의 결정판이지. 포르노가 아니라 예술이다. 미장센이 정말이지 너무 좋다.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어떤 작품을 봐도 앤드류 블레이크의 예술적인 포르노만한 걸 못봤다. 그의 작품을 10년전에 비디오로 봤지만 최근 이 다섯 편을 구해 보면서 다시금 즐거웠다. 예술이란 이런 거다."  

마광수 교수의 57편에 이르는 블레이크의 영화들을 다 구해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베스트 5'로 꼽은 영화들의 목록은 'Body Language'(2005), 'Hard Edge'(2003), 'Girlfriends'(2002), 'Paris Chic'(1997), 'Captured Beauty'(1995) 등이다.

'요즘 학생들'은 재미없어 한다지만, 블레이크는 (예술의 종말과 무관하게) 요즘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이다. 그리고 그 현역 예술가의 세계는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앙드레 김 어법으로 '판타스틱'한 장면들을 나로선 그저 '상상해' 보는 정도이지만, 이런 '패티시'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예술가 마광수도 충분한 영감을 받고 써주었으면 좋겠다('사라'만 즐거운 작품 말고). 마광수-예술론에서 지루하다는 건 죄악이니까(그에게 불충분한 건 도덕이 아니라 예술이다).

06.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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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광수 대단합니다. 이제 저런 그림들도 5분이상 들여다 보면 지루해 지는데 말이죠-.-+...어쨌거나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볼만합니다. 이제는 좀 새로운 길을 가야 하지않나 하면서도 그 호흡에 한 번 빨려들면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저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고요.

파란여우 2006-01-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먹고 살만하면 볼게 포르노 밖에 없다면....
앞으로 기를 쓰고 먹고 살만한 수준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쳐야 하는건가,
아니면, 먹고 살만한 수준이 안되기 위하여 안빈낙도해야 하는건가.
갸우뚱... (아, 나두 몰러...)
여하튼, 마광수가 소외감에 찌든 사람으로는 보입디다.

로쟈 2006-01-2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과 살 만한 수준'이 대개 10-20억 정도의 재산은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만만한 수준은 아니겠지요. 기를 써서는 안되고 로또를 쓰셔야 합니다. 본문에는 쓰지 않았지만, 포르노는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동물행동학자의 일리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사실 포르노적 세상이 아니었을지...
 

재작년 모스크바통신에 띄운 글 '로망스와 포르노를 구별하는 법'을 '베이스캠프'용으로 다시 정리한다(주로 프랑스 감독 카트린 브레야의 영화들에 대한 것이다). 관련 참고문헌들도 몇 권 소개하면서(내가 무슨 전문가인가?).

최근 미국의 포르노 영화 '목구멍 깊숙이'(1972)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다룬 다큐영화 '인사이드 딥 스로트'(2005)가 어제 개봉된 걸로 아는데, 이 참에 포르노그라피의 미학과 사회학/정치학을 두루 공부해본다면 좋겠지만 이목은 있고 시간은 없는 관계로 '복습' 정도 하는 걸로 참아두기로 한다. 다만, <목구멍 깊숙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다루어보기로 한다. '애프터 딥스로트' 정도의 제목이 될 것이다.  


 

 

 

 

영화 얘기가 나온 김에, 프랑스의 여성감독 카트린 브레야에 대해 한 마디(*'한마디' 치곤 너무 길어지지만). 모스크바에 처음 왔을 때, 한동안은 매주말마다 채널 ‘엔떼베’에서 프랑수아 오종의 영화들을 방영했다(한국에서는 그의 영화제도 개최된바 있다). 나는 그의 영화라면 <스위밍> 밖에 본 게 없었는데, 그걸 포함해 서너 편의 영화를 더 보면서, 이 감독 역시 ‘아버지’가 없는 세계, 혹은 여자들만 많았던 가정 출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됐다(그의 최근작은 <8명의 여인들>이다!). 그의 장기는 중년여성의 심리묘사로 보이는데, 그런 걸로 포섭되지 않는 ‘튀는’ (코미디)영화들도 없지 않았다. 이때 ‘튄다’는 것은 ‘아버지의 결여’가 낳는 징후이다. 하지만, 오종에 대해서는 아직 그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8명의 여인들>을 나는 아직 보지 않았다. 그건 귀국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겐 <로망스>로 잘 알려진 카트린 브레야(Catherine Breillat; 1948- )는 올해(2004년) 신작 <지옥의 해부(Anatomie de l’enfer)>(2004, 74분)를 내놓았는데, 러시아에서는 <포르노크라시>로 개봉되었고, 이미 비디오CD로도 나와 있다(*국내용 제목은 <지옥의 체험>인 듯하다). 영화는 브레야의 소설 <포르노크라시(Pornocratie)>를 원작으로 하고 있으므로, ‘포르노크라시’란 제목이 억지는 아니며, 여기서도 그 제목을 쓰도록 하겠다.

Anatomy of Hell

원제의 ‘지옥’은 영화로 미루어보건대, 여성 성기의 은유이면서, 동시에 남녀관계의 은유이다. 이 영화는 지난주에 이곳의 한 TV채널에서 브레야의 <로망스>를 다시 보고 브레야란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음반/비디오가게에서 비디오CD가 눈에 띄길래 산 것이다. <로망스>(한국에서의 <로망스>는 노출장면이 다 지워진 말 그대로 <로망스X>였지만)보다도 더 ‘엽기적인’ 노출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 영화가 소개될 가능성은 전무해 보이지만(모스크바에서도 이번 6월에 한 극장에서 밤 10시 이후에만 한 차례씩 이틀 상영하고 말았다). 혹 조만간 성인영화관에서의 상영이 허용되더라도 흥행할 영화는 전혀 아니다. 보기에 아주 불편하므로.

‘노출’에 덧붙여. 얼마 전, 한국의 인터넷 뉴스에는 요즘 드라마에서의 ‘노출’이 지나치게 선정적이라는 식의 ‘선정적인’ 뉴스가 떠서 클릭해보았다(당신이 이 글을 클릭하는 것처럼). 김미숙, 장나라가 드라마에 수영복을 입고 등장했다고 (혼자서) ‘흥분하고’, 한고은이 드라마에서 한쪽 가슴에 문신을 새겼다고 (혼자서) ‘분개한’ 기사였다(물론 이런 기사들의 노림수는 순전히 ‘클릭’에 있지만). 한국은 인터넷에서 음란(포르노) 사이트의 비율 가장 높은 나라의 하나일 텐데(그게 인터넷 강국의 지표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러한 ‘가장(假裝)’ 혹은 ‘연기’가 통용된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우스꽝스럽다.

언제나 그렇지만, 선정적인 건, ‘대상’이 아니라 그걸 바라다보는 ‘시선’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TV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덜 선정적’이지만, 즉 ‘건전’하지만(혹 아랍권이 우리보다 더 ‘건전’할는지?), 그걸 바라보는 국민적 ‘시선'과 '응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선정적’이고 ‘퇴폐적’이다(누드 프로젝트가 ‘돈’이 된다고 뛰어드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게 대상과 시선이 서로 보충하는 식으로 어느 나라건 ‘선정성의 총량’은 보존되는 것인지?

다시 브레야. 이곳의 공연전문잡지 <아피샤>(‘공연 프로그램’이란 뜻)의 소개에 따르면, <포르노크라시>는 <섹스는 코미디다>(러시아에는 <친밀한 장면들>이란 제목으로 출시, 국내에도 출시돼 있다.맨왼쪽 이미지, 두번째 이미지가 러시아판), <로망스>에 이은 완결편이다. 이걸 3부작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장르상으론 (섹스에 대한) 코미디, 로망스, 포르노가 된다. 나는 그녀의 ‘코미디’는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나중에 러시아 TV에서 봤다. 일종의 메이킹 필름 형식의 영화이다), ‘로망스’와 ‘포르노’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다.

 

 

 

 

일단, ‘로망스’와 ‘포르노’의 차이는 무엇인가? 하나는 안 벗고 나오고, 하나는 벗고 나온다는 것인가? 일반적인 분류에 따르면(알베로니를 따른 것인데), ‘포르노그라피’가 남성의 장르이고, 여중생들이 좋아하는 ‘하이틴 로맨스’가 여성의 장르이다(혹은 <도쿄 데카당스> 남성의 장르라면 <도쿄 타워>가 여성의 장르이다). ‘하이틴 로맨스’를 거의 읽어본 게 없어서 여기선 장르의 시학을 구성할 수 없지만, 내 의견으로 <로망스>는 셋이 나오고, <포르노>는 둘이 나온다는 데 그 차이가 있다.

영화 <로망스>에 나오는 셋은 누구인가? 여주인공과 그의 남자친구, 그리고 중년의 교감선생?(정확하게 ‘교감선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상으론 그렇게 기억된다.) 아니다. 사실, 영화의 원제는 ‘로맨스는 없다!’ 내지는 ‘로맨스, 엿먹어라!’란 뜻의 <로망스X>이다(그러니 이 또한 교육용 영화인 셈이다). 그럼에도 영화 <로망스>는 ‘로맨스’인데, 그것은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아이’가 ‘로망스’와 ‘포르노’를 가르는 기준이다. 거꾸로 말해서, 포르노의 필수조건은 ‘아이’의 부재이다(물론 형식적인 필수조건은 남녀의 섹스가 나온다는 거지만).

해서, 아무리 영화에서 남녀의 섹스가 적나라하게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그 영화는 ‘포르노’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아이가 등장하게 되면, ‘로망스’가 아니될 수가 없다(패밀리 로망스! 참고로, 그 경계에 있는 영화가 스페인 영화 <패션 투르카>(1994)이다). 따라서, 로맨스적 상상력이란 로맨틱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 3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이다(이 3자적 관계의 드라마 버전이 3각 관계인바, 3각 관계가 아니라면 드라마가 진행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거꾸로 2자적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언제나 포르노적 상상력을 함축한다. 거기엔 ‘경건한 포르노’와 ‘적나라한 포르노’가 있을 따름이다(포르노중독자들은 ‘소프트코어’와 ‘하드코어’로 구분하겠지만). ‘경건한 포르노’? 그건 보여지지 않는 포르노를 말한다. 즉 마이너스 포르노, 상상 속의 포르노이다. 예수 가라사대, 마음에 음심(淫心)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姦淫)한 것과 다름 없다고 했으니, 상상 속의 ‘경건한 포르노’도 포르노이다.

그런데, 언제 이 포르노로부터, 포르노에 대한 상상으로부터 깨어나게 되는가? ‘아이’에 대한 상상이 덧붙여질 때이다. 그 ‘아이’가 ‘행복한 로망스’를 낳는지, ‘끔찍한 로망스’를 낳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문제이지만, 하여간에 포르노 배우에게서 ‘질외 사정’이 절대 수칙인 것은, 2자적인 포르노적 상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로 이 제3자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질내 사정’은 포르노적 판타지를 잠식하는 (실재적) ‘악몽’이기에...

브레야의 영화 때문에, ‘포르노’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됐지만, 내가 포르노 영화에 ‘입문’하게 된 건 ‘남들’ 보다 늦은 대학 1학년 때이다(포르노 사진(=빨간 책)이나 만화는, 요즘은 더 빨라졌겠지만, 그때도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접하게 됐다). 남들보다 늦었다고 한 건, 내가 다닌 고등학교에선 동료 고3 학생들이 단체로 포르노를 보다가 적발되어(나는 주로 공부만 했다), 입시공부에 바쁜 와중에 대거 반성문을 쓰는 사태가 일어났었기 때문이다. 같이 본 학생들의 이름을 적어내라는 지도과 교사들의 닦달에 리스트가 108명에 이르렀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들렸는데, 이후에 이 사건은 (포르노란 이름을 넣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108인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사건의 핵심 33명이 견책을 받는 걸로 일단락되었는데, 하도 오래된 일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하여간에 때는 전두환 정권 말기였는데, 당시에는 대학주변이 여관마다, 그리고 일부 심야다방마다 포르노 ‘영업’을 했다. 포르노 비디오를 예사로 틀어주었던 것이다(낮에는 최루탄, 밤에는 포르노!). 그래서, 동문회 같은 모임을 갖게 되면, 먼저 중국집에서 짬뽕 국물에 소주를 마시며 몇 시간 운동권 노래를 ‘학습’하며 시국에 대해서 자못 비장한 각오들을 다지다가, 한두 차례 ‘오바이트’를 하고는 우리가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핑계로 여관에 단체 숙박을 했다. 그리고는, 여럿이 함께 자못 충혈된 눈으로 취기와 피곤을 무릅쓰고, 포르노 영화를 새벽까지 보다가(가끔은 아침에 한편 더 틀어달라고 전화를 걸었다가, 여관집 청년이나 주인 아줌마한테 핀잔을 듣기도 하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당시의 ‘일상’이었다(당시 포르노는 룸살롱의 대학생 버전인데, 포르노와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얘기하겠다, 고 했지만, 나는 그냥 '전문가들'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세상 밖으로>로 데뷔한 여균동 같은 80년대 ‘운동권’ 출신 감독이 <포르노맨> 같은 ‘한심한’ 영화를 만든 데에는 (개인적인 트라우마 외에도) 그런 대학가의 ‘일상’이 한몫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포르노’는 검열당해서 <맨?>(1995)이란 제목으로 개봉됐었다. 문제는 그가 포르노를 ‘리얼리즘’이 아닌 ‘판타지’로 접근하려 한 데 있다. 그러니까 <포르노맨>의 문제는 정작 거기에 ‘현실’에 대한, ‘일상’에 대한 아무런 ‘포르노’도, 혹은 ‘폭로’도 담겨 있지 않다는 데 있다. 80년대 중반 대학가 여관이나 심야다방의 포르노 ‘영업’만 영화로 재현해도 ‘포르노’와 ‘정치적 리얼리즘’, 모두 성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때문에 그도 저도 아닌 <포르노맨>은 결국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커녕 <파리애마>(1988)나 <서울에서의 마지막 탱고>(1985)보다도 못한 영화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관념적인’ 감독이 이후에 <죽이는 영화>로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다시 <미인> 같은 ‘더 한심한’ 영화를 찍은 걸 보면(플레이보이의 ‘판타지’ 시리즈가 차라리 더 정직하다), ‘가방끈’이 긴 것과 영화를 잘 만든다는 것은 정말로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여감독은 <리얼리즘의 역사와 이론> 같은 이론서들의 역자이기도 했다). 차라리 그는 ‘배우’로서 더 뛰어나다.

 

 

 

 

80년대 대학가의 ‘포르노적 일상’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지만, 가장 정치적이었던 년대가 가장 포르노적이기도 했다는 건 역설이 아니다. 포르노야말로 가장 정치적이며, 동시에 정치적 독재야말로 또 가장 포르노적이기 때문이다. 불임(不妊)의 정치가 포르노가 아니면 무어란 말인가? 또 포르노를 ‘대학생들’보다도 더 좋아하는 건 ‘군인들’(속칭 ‘군바리들’) 아닌가? 그런데, 우리 주변의 이 포르노적 일상이 언제 사라졌는가? 소위 ‘민주화’ 이후이다(민주화는 포르노의 적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포르노는 파시즘적이다, 내지는 파시즘과 공모적이다! 가령, 파졸리니의 몇몇 영화들). 그리하여 대략 1990년대를 경계로 하여, ‘(비공식적)포르노’와 ‘(공식적)애마부인’은 성인비디오(AV)로 통합된다. 이쯤에서 동시대 시인 권혁웅의 시 '애마부인 약사(略史)'를 참조해보는 것도 유익할 듯. 참고로, ‘애마부인’에서의 ‘애마’의 ‘공식적인’ 표기는 ‘愛馬’가 아니라, ‘愛麻’(?)이다. ‘愛馬’가 너무 음란하다고 해서 검열에서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음란한 정치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도덕성’을 연기(演技)한다.

1대 
고개를 좌우로 꼬며 말을 달리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인 안소영(1982)에 관해선 이미 말한 바 있다 침대에 누운 그녀가 말 탄 꿈을 꾸는 것인지, 말을 모는 그녀가 침실 꿈을 꾸는 것인지를 중3이 다 말할 수야 없었지만, 동시상영관은 돌아온 외팔이와 안소영 때문에 후끈 달아올랐다

2대 
오수비(1983)는 바다로 갔다 그녀는 젖은 몸으로, 몰려오는 파도를 다리 사이로 받으며, 파도보다 큰 소리를 지르곤 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靑馬)의 시구를 그때 배웠다 고1때 일이다

3대 
김부선이 말죽거리 떡볶이 집에서 권상우를 유혹할 때(2004) 나는 기절할 뻔했다 나도 권씨지만 그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씨름선수 장승화의 들배지기에 자지러지는 그녀(1985)를 본 고3때부터 지금까지, 내내 그렇다

4대 
이후의 애마부인(1990∼ )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는 더 이상 연소자가 아니었으니까, 도처에서 여자들이 말 타고 출몰했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다만 김호진(1990)처럼 ROTC 애마보이가 되고 싶기는 했다 그 후로는 나도 애마도 주마간산이었다

9대 
진주희(1993)의 운명처럼 말이다 아, 어찌하여 애마의 도(道)는 일본으로 흘러갔는가? 애견부인(1990)은 또 뭐란 말인가? 드라큘라 애마(1994), 애마와 백수건달(1995), 애마와 변강쇠(1995)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끝없는 연애담과 지리멸렬 속으로 빠져들었다

외전(外傳) 
애마는 파리에도 가고(1988) 집시도 되었지만(1990) 정작 애마부인을 가르친 정인엽은 지금 삼겹살집 주인이다 애마 아래 남편, 애마 위에 애마보이, 그 위에 나…… 우리는 그렇게 불판 위에서, 납작하게, 지글거렸다 어마 뜨거라, 소리 지르며 한 시절을 지나왔다

'90년대의 성인비디오는 <애마부인>류의 극장용 에로영화가 ‘하드’해진 것이면서, 포르노가 몇 배 ‘소프트’해진 것이다. ‘하드’해졌다는 건 가슴 노출이 전면화되었다는 걸 뜻하고, ‘소프트’해졌다는 건 그럼에도, 남녀의 성기 노출은 금지되었다는 의미이다(브레이야의 영화들에서 성기 노출은 소프트코어를 넘어선다). 이 ‘하반신’ 노출 금지에 대한 보상욕구가 극대화된 것이 90년대 성인비디오 최대 히트작이라는 <젖소부인> 시리즈이다.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에로영화적 관점에서) 80년대는 ‘애마부인’의 시대였고, 90년대는 ‘젖소부인’의 시대였다(그럼 2000년 이후는? <미소녀 자유학원> 시리즈에서 보듯이, 팬티-페티쉬와 원조교제의 시대이다. ‘부인’들에서 ‘미소녀’로의 이행이 갖는 의미에 대한 분석은 각자 해보시길). 두 ‘시리즈’ 사이에 어떤 시대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수사학적 관점에서 ‘애마(愛馬)’는 ‘부인’의 환유(인접관계)이고, ‘젖소’는 ‘부인’의 은유(유사관계)이지만, 의미론적으론 ‘애마부인’이 시대의 은유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환유이다. 어째서 그런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 모두 주연은 여성이지만(안소영과 진도희라는 두 페르소나. 물론 주연배우들로 치자면, 한 명의 ‘젖소부인’과는 달리 열 명이 넘는 ‘애마부인들’이 있지만. 이후에도 이름이 좀 남은 배우로는 김부선(<말죽거리잔혹사>에 나온), 유혜리, 진주희 등이 있다), ‘애마부인’이 욕망의 주체인 반면에, ‘젖소부인’은 욕망의 대상이다. ‘애마’는 물론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지만(‘젖소부인’의 이름은 ‘젖소’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는 말(馬)에 대한 욕망(愛)이란 뜻 그대로 ‘애마부인’의 욕망의 대상을 가리킨다. 반면에 ‘젖소’라는 것 자체가 남근적 명명이며, 남성적 욕망의 투사이다. 이 욕망의 주체가 항상 결핍의 주체라면, 욕망의 대상, 즉 사물은 항상 충만해 있으며, 그 차이가 <애마부인>과 <젖소부인>에 대응한다.

<애마부인>에서 계속 반복되는 모티브는 자신의 ‘합법적인’ 남편에게서 충족하지 못하는 여성적 욕망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남자’이며, 따라서 그녀의 욕망은 ‘법적으론’ 금지된 욕망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애마부인>의 전형적인 씬은 그 금지된 욕망의 상상적 충족, 즉 판타지이다. 이 판타지의 정치적 버전은 무엇인가? 그 판타지의 주체는 ‘합법적’ 군부독재에 대한 욕구불만과 한편으론 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투쟁) 사이에서 갈등하는 대중이 아니겠는가? 그 대중의 ‘응시’가 아니겠는가? 때문에,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 정치적 동일시 또한 새겨져 있다. 그러니 그들이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을 한 켠에 느끼며 극장문을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자신을 ‘애마부인’과 동일시하건(=결핍의 주체), 동일시하지 않건(=여성적 욕망에 대한 공포) 결과는 언제나 ‘결핍감’이다.

물론 그 ‘결핍감’이 체제전복적인 의지로까지 승화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대중의 ‘응시’가 결과적으론 체제유지에 봉사하는 것이 되겠지만, 언제나 체제(system)에는 오작동(malfunction)이란 게 있는 법이고, 혹 그 오작동과 무관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87년 4월의 정권의 ‘호헌선언’이 초래한 6월의 시민항쟁은, 체제의 관점에서는 그러한 ‘예기치 않은’ 오작동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을 특징짓는 건 ‘포만감’이다. 그 포만감을 이 시리즈는 노골적이고 조야한 수준으로까지 전시한다(이 정도 사이즈에도 만족 못하겠느냐!). 때문에, 거기에선 은유의 성찰적 거리 혹은 (등장인물의 수준에서) 금지/위반의 긴장이 들어서는 대신에 환유적 욕망의 맹목성이 질주한다. 환유적 욕망? 라캉에 의하면 욕망 자체가 환유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이 환유적 욕망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 만나는 모든 사람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다시 지젝을 인용하면 “(성불능의) 부성적 인물(=남편)에 의해 트라우마를 입은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애마부인>은 모더니즘적이다. 반면에, <젖소부인>의 주체는 ‘소비사회’를 특징짓는, ‘병적인 나르시시스트’(<히치콕>, 18쪽)들의 응시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애마부인>의 관객들이 대개 극장에서 ‘공동으로’ 영화를 보았다면(=욕망과 죄의식의 공동체), <젖소부인>의 관객들은 상당수가 밀폐된 비디오방에서 혼자인 경우가 많았을 것인바(=나르시시스트들), 여기서, 영화관/비디오방의 공간적 대립 또한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대립에 상응한다. 참고로, <젖소부인>의 제작자는 이 영화의 극장용 판까지 기획했었는데, 아마도 상황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리라(35밀리 ‘젖소부인’이라니!).

Romance

무슨 얘기가 이리로 흘러갔나? 브레야의 <로망스>가 왜 ‘로맨스’인가란 얘기를 하다가 ‘젖소부인’까지 들먹이게 됐군. <로망스>에는 하여간에 결말에서 ‘아이’라는 제3자가 등장하며, 따라서 이 영화는 일부 성기노출 장면에도 불구하고 ‘포르노’가 아니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남자친구(요즘은 보통 아버지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두려워한다) 무관심 속에 자신의 육체의 ‘용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문한다. ‘여성’은 여성 자신에게도 타자이기에(여성끼리의 동성애가 더 많은 것은 그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녀가 종국적으로 도달하게 되는 것은 한 아이의 엄마로서의 정체성이다. 여기서도 그녀가 아이를 낳는 과정, 즉 엄마로서 ‘태어나는’ 과정과 ‘남자친구(=아버지)’의 ‘상징적’ 죽음은 겹쳐진다. 내가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타란티노의 <킬빌>을 떠올린 건 그런 연관성 때문이다.

Anatomy of Hell

반면에, 신작 <포르노크라시>는 말 그대로 ‘포르노’인데, 그건 이 영화가 ‘고립된 섬’ 혹은 ‘기계들(automaton)’로서의 남성과 여성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여자가 ‘여자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하려는 걸 한 남자가 목격하고 구해주게 된다. 그 대가로 여자는 남자에게 나흘 밤 동안 자신의 나체를 온전하게 전시하기로 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나체, 혹은 음부(‘숨겨진 보물’로서의 ‘아갈마’)를 내주는 것인데, 그 이후에도 남성은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 여자의 물음이면서 감독 카트린 브레이야의 물음으로 보인다. 쉽게 말하면, 남자가 어떤 여자와 하룻밤을 같이 자고도 여전히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라는 것. 물론, 이런 물음 자체는 그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 혹은 절망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영화의 결말은 그것을 입증한다. 남자에게 애증의 대상이 되는 여자의 육체는 매혹이면서 동시에 지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포르노에 대한 지젝의 정의와 맞물린다. 지젝은 포르노를 아킬레스와 거북과의 경주에 견주는데, 아킬레스는 언제나 거북보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간다. 결코 나란히 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는 여자보다 더 빨리 가거나 더 늦게 간다(때문에 성관계는 없다! 둘이 만나질 않으니까). 여성의 육체 앞에서 남성은 거북을 따라잡으려는 아킬레스처럼 조바심 친다. 하지만, 그가 막상 그 육체를 소유했다고 생각했을 때 이미 그 육체는 욕망의 대상에서 멀어져 있다. 그래서 언제나 매혹이고, 지옥인 것이지 그 중간은 없는 셈이다. 바로 포르노의 세계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것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아갈마에의 매혹!), 곧 지겨워지며 자신이 진창에 처박힌 것 같은 오욕감을 맛보게 한다(바타이유의 포르노그라피들은 그 ‘한계체험’을 다룬다). 왜냐하면, ‘매혹’이 어느새 ‘지옥’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디바’ 여배우들의 결혼이 자주 실패하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2자적 세계, 혹은 포르노적 세계이다.

참고로, 그런 의미에서 장정일은 대표적인 포르노 작가이다. <거짓말>의 원작인 <내가 거짓말을 해봐>뿐만 아니라(얼만전에 나온 그의 <전집>에는 빠져 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포르노적 상상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삼국지> 빼고). 물론 그의 작품들이 ‘포르노’라고 해서, 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거나 하는 건 전혀 아니다(나는 판금된 그의 책을 여러 권 제본해서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그건, 아이(제3자)를 갖지 않는 부부들을 전부 ‘위법’으로 구속하겠다는 발상과 마찬가지로 ‘오버’이고 정신 나간 짓이다. 아이를 갖건 말건, 그건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다(물론 국가는 필요 때문에, 출산을 장려하거나 제한하기도 한다. 그건 또 국가의 일이다).

작가 장정일은 너무나도 폭력적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에서라도 스스로는 아버지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들에서 ‘아이들’이 부재한 것은 그러한 ‘결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그가 ‘가족소설’이라는 근대소설의 ‘적통’에서 벗어나 ‘일탈적’인 소설들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2자적 관계를 근간으로 한 글쓰기, 그건 곧 포르노적 상상력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만약, 한국에 정치적 포르노 영화가 존재한다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건 장정일의 원작을 장선우가 영화화한 <너에게 나를 보낸다>나 <거짓말> 같은 영화들에서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이 내가 보기엔 장선우가 제일 잘 찍을 수 있는 영화들이다(그의 영화들은 ‘화엄경’이란 판타지를 들먹일 때마다 죽을 쑨다). 그러니까 ‘퇴폐적인’ 영화들이 그의 적성에는 맞아 보인다. ‘나쁜 영화’의 길로 끝까지 가지 않고, 자꾸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세상을 구제하려는 그의 선(善)에의 의지 때문에, 관객들이 매번 낭패를 보는 건 물론이고, 한국영화는 얼마나 큰 손실을 보고 있는 것인지!

다시, 브레이야. <포르노크라시>는 다른 ‘포르노’들과 마찬가지로, 내러티브가 빈약한데(<거짓말>의 내러티브도 얼마나 단순한가!), 그건 제3자가 이야기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로맨스’와의 결정적인 차이이면서, 당연한 결과이다. 왜냐하면, 포르노와 내러티브(이걸 ‘로맨스’나 ‘멜로드라마’로 바꿔불러도 된다)는 상호배제적이기 때문이다. 포르노에서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라기보다는 섹스를 위한 ‘구실’에 불과하며, 내러티브가 진행되기 위해서는 포르노가 들어가선 안된다.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의 한 장에서('포르노그라피, 노스텔지어, 몽타주')에서 ‘노스텔지어적인 멜로드라마’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예를 드는데, 초반에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감미로운 키스를 나눈 후에 그들이 벌이는 정사(情事)가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포르노로 보여진다면, 이 영화에서 더 이상의 ‘멜로드라마’는 없으며, 더 이상의 ‘내러티브’도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 물론 선택할 수 있다면, 남성들은 ‘포르노’를 여성들은 ‘멜로드라마’를 더 선호할 것이다(나는 ‘남자’, ‘여자’란 말 대신에 일부러 ‘남성들’, ‘여성들’이라고 썼는데, 그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이다. 남자도 멜로드라마를 좋아할 수 있고, 여자도 포르노를 즐길 수 있다).



<포르노크라시>의 내러티브 또한, 두 사람의 만남을 위한 초반 설정 외에는 나흘 밤의 나열로만 이루어져 있으면, 이 장면들에선 아무런 제3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즉, 이 영화는 말 그대로 ‘포르노’이며 브레야의 상상력은 포르노가 ‘지배’(=포르노크라시)한다. 영화에는 좀 유치한 장면도 들어가 있는데, 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를 보여준 다음에 이어서 여주인공의 생리 피를 보여주는 식의 장면이 그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불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생리’의 숭고함과 성스러움을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일 텐데, 두 남녀가 생리대에 묻은 피를 물에 타서 성수(聖水)처럼 같이 마시는 장면만큼이나 억지스럽다. 브레이야는 그런 ‘숭고한 희생’의 상징은 가져오면서 왜 그리스도의 ‘사랑’은 빼놓았을까? 왜 그녀는 남녀관계에서 ‘지옥’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것일까? ‘타인은 지옥’이란 건 사르트르의 맥심이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아닌데 말이다. 56세의 카트린 브레야는 아직 너무 젊은 것 같다.

결론적으로 <포르노크라시>는 <로망스>와 병렬적인 자리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면, ‘퇴행적인’ 작품이다. 브레이야는 아마도 이 주제로는 더 찍을 영화도 없을 것이다(‘지옥’까지 갔으면 끝 아닌가?). 혹 <포르노크라시>가 ‘반면교사’적인 의도에서 찍은 영화라면 몰라도…

06. 01. 13.

 

 

 

 

P.S. 현재 출간된 포르노 관련서들 가운데 다섯 권 정도를 꼽아두도록 한다. 기본서는 단연 <프랑스 혁명과 가족로맨스>(새물결, 1999)의 저자이기도 한 역사학자 린 헌트의 <포르노그라피의 발명>(책세상, 1996)이다. 최근 문화연구가 붐을 타고 있으므로 조만간 국내에서도 그럴 듯한 연구서가 나올 듯하다. 기다려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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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1-13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죄송합니다. 앞으로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저도 그러고는 싶습니다!)...

로쟈 2006-01-13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일이 많을 때 딴짓도 많이 하지요.^^

헤르베르트 2006-01-14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애프터 목구멍 깊숙히'가 기대되네여. 딥쓰롯은 OST 또한 매우 좋은 명반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OST에 대해 끄적여보고 싶네여. 그나저나 볼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들뢰즈는 영화배우 같이 생겼어여ㅎㅎ

palefire 2006-01-17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렇듯 잘 보고 갑니다. 생각하신 대로 브레이야는 <로망스> 이후 발전이 없는 감독입니다. <지옥의 해부>(국내에는 여성영화제에서 공개)는 그녀의 시선과 연출이 동어반복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듯해요. 결론은 로자님께서 파악하신 바로 그것인데 그걸 보여주고자 1시간도 더 되는 필름을 지루한 감정적 갈등과 육체적 관찰/마찰에 쏟아붓죠. 결론 하나를 증명하기 위해 이미지를 허비하는 건 참기 쉽지 않죠. 이게 지옥같고 권태롭다는 걸 그녀와 비슷한 방식으로 보여주다면 세드릭 칸의 <권태>가 차라리 낫고, 그러한 결론에 이르는 갈등과 선택의 모럴을 이미지와 서사의 전개와 짜임새 있게 연결시킨다면 에릭 로메르가 훨씬 나은 듯. <인사이드 딥 스로트>는 작년 베를린에서 미드나잇 상영으로 봤는데, 너무나 교과서적이고 연대기적이어서 생각보다는 밋밋했던 다큐였습니다. 건질 거라곤 <목구멍 깊숙히>의 클립들(생각보다 많지는 않음), 그리고 지금 쓰신 주제에서 랜드마크급 연구서인 [Hard Core]의 저자 Linda Williams가 출연해서 반가웠다는 것 정도네요.

로쟈 2006-01-17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주제에 관해서라면 palefire님의 글(혹은 책)을 기다리는 게 더 낫겠군요.^^
 

 

 베르토프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비록 모든 텍스트가 생산적 노동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모든 텍스트가 이러한 작업의 흔적을 동등하게 드러내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환영적인 구경거리에서는 예술의 질료들끼리의 이음매가 매끈하기 때문에 작업 흔적이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실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캔버스 위의 붓 자국을 제거하여 작업 흔적을 없애 버리듯, 환영적 영화 감독들은 제작 과정의 흔적을 은폐시킨다.  많은 할리우드 영화들과 달리, 베르토프의 영화는 스스로 생산 과정을 표면에 드러낸다.  그것은, 발터 벤야민이 다른 맥락에서 말했듯이, 도공의 손자국이 도자기에 들어 붙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로버트 스탬의 <자기 반영의 영화와 문학>(한나래, 1998) 중에서 혁명기 러시아의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Dziga Vertov; 1895-1954)에 관한 내용(128-131쪽) 발췌이다. 아마도 이전에 강의준비용으로 정리해두었던 듯한데, 파일들을 정리하는 김에 '창고'에 모아놓기로 한다.

 

베르토프는 동시대 라이벌이었던 에이젠슈테인과 함께 영화사의 두 가지 방향성을 대표했었는데, 여기서는 자세히 늘어놓을 수 없다. <영화운동의 역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영화사들에서 베르토프에 관한 기본사항들은 참조할 수 있다. 들뢰즈는 <시네마: 운동-이미지>에서 베르토프에 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들뢰즈와 베르토프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에 번역된 논문들의 해설이 전문적이면서 수준이 높다. 러시아에서 나온 주목할 만한 연구서는 보지 못했으며, 영어권 서적으로는 블라다 페트릭(Vlada Petric)의 <영화에서의 구성주의(Constructivism in film : The man with the movie camera)>(캠브리지대 출판부, 1987)가 가장 훌륭한 개론서이다. 이론가로서의 베르토프는 현실에 대한 기록과 증언으로서의 영화의 기능을 강조한 '영화-눈(kino-glaz; film-eye)'론으로 유명한데, 감독으로서 베르토프의 대표작은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이다. 이하는 발췌정리. 

 

 

 

 

<카메라를 든 사나이>의 복합적인 주제-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삶, 도시 생활 중의 하루, 영화의 완성과 상영- 는 사실이 영화의 중심 주제에 종속된다. 즉, 생산력의 연결망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영화의 메커니즘을 해부해 보이는 일이 이 영화의 중심 과제이다. 문학은 생산의 한 형태이고 문학 생산자들은 공장의 노동자와 다름없이 자신의 재료를 다루어야 한다는 러시아 형식주의 사회학자들의 주장을 영화에 적용시키면서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영화를 산업 생산의 한 분야로서 제시한다. 아네트 마이클슨은 이 영화가 영화제작 활동의 거의 모든 측면을 통상적인 노동의 종류와 조목조목 비교한다고 지적한다.

 

 

편집은 재봉과 비교되고, 필름 청소는 길거리 청소에 비교된다. 영화산업은 섬유 산업에 비유되는데, 마르크스는 후자가 자본주의 발전에 있어서 모범적인 역할을 한다고 간주했다. 방적기가 자본주의 사회를 변형시켰듯이, 궁극적으로 영화도 사회주의 사회를 변모시킬 것이라는 암시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다.  작업 리듬과 움직임의 유사성은 이 두 가지 형태의 생산이 지닌 연대성을 보여준다. 회전하는 실패와 영사기 위에서 돌아가는 필름 릴은 편집에 의해 병치되어 보인다. 섬유 산업을 위해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수력 발전소가 카메라맨이 타는 차량의 동력 역시 제공함이 드러난다. 모든 면에 있어서, 영화는 사회적 생산이라는 집단적 삶의 일부로서 제시된다. 

 

베르토프에게 있어서 카메라 눈의 의무는 영화 속 혹은 실제 삶에서 발견되는 신비화를 해독하는 일이다.  베르토프는 ‘예술적 드라마’의 신비화를 특히 싫어했다.  이 영화 형식의 목적은 관객을 도취시키고, 무의식 속에 특정한 반동적 견해를 심어 놓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베르토프는 그러한 영화가 인민의 새로운 아편이라고 비난하였으며, “스크린 속의 불멸의 왕과 여왕”을 타도하고 “평소의 일하는 모습을 찍은 보통 사람들”을 복권시키자고 주장했다.  그의 비난은 세 가지 종류의 비유, 즉 마술(“마법에 홀리게 하는 영화”), 마약(“영화 아편,” “영화관의 전기 아편”), 종교(“영화의 대제사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은 반환영주의 영화론자들의 논의에서도 자주 원용된다.  하지만 이 비유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현실에 구체적으로 기초한 것이다.  소외된 영화에 대항한 베르토프의 투쟁은 스탈린 이전 시기의 소비에트 혁명의 투쟁과 보조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활력이 넘쳤던 이 시기 타도 목표로 삼았던 세 가지 소외 형태는 농민 사이의 마법적 미신, 룸펜 사이의 마약 및 알코올 중독, 그리고 러시아 정교의 광범위한 영향력이다.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영화 언어에 관한 영화인데, “대개의 영화에서는 숨기려 하는 영화적 수단들을 공개하고” “영화 기법의 문법을 지식처럼 전파하겠다고” 스스로 공언한다. 이 영화는 자기 재현 행위를 통해 스스로의 창작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영화를 생산하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베르토프의 야심을 충족시킨다. 이 영화는 현실을 거울처럼 비추겠다고 나서지 않는다. 대신 영화 예술이 복잡한 의미 구축 행위임을 보여준다. 

 

 

많은 분석가들, 특히 아네트 마이클슨, 스티븐 그로프츠, 올리비아 로즈 등에 의해 정리된 베르토프의 자기 반영적 전략들은 다음과 같다.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 등의 도구를 끊임없이 표면에 드러낸다. 돌아다니는 촬영기사의 모습이 직접 영화 속에서 보인다. 렌즈/눈 그리고 셔터/눈꺼풀 간의 유사성을 시각적으로 계속 대비시킨다.  영화 촬영의 속임수를 노출시킨다.  영화적 움직임의 인공성을 강조한다. 평범하게 찍은 시퀀스 속에 애니메이션과 슬로 모션 기법으로 찍은 장면을 삽입시킨다. 이미지의 분할,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왜곡을 통해 환영을 깨뜨린다. 그리고 계속해서 관객의 지성에 호소한다. 요컨대 환영주의에 대한 공격이 <카메라를 든 사나이>에서처럼 창의적이고 비타협적으로 실행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06. 01. 11.

 

 

 

 

 

 

 

P.S. '영화의 혁명가 지가 베르토프'란 부제를 단 (이매진, 2006)가 드디어 우리말로도 출간됐다. "계속 공부하고 창조하는 영화 노동자"가 되고 싶다는 역자의 번역-노동의 산물이므로 믿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젠 베르토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게 더이상 쑥쓰럽지 않겠다... 

 

06. 0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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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김기덕의 영화 <빈집>을 보고 쓴 소감을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환대의 윤리학과 유령의 존재론'이란 모스크바 통신에는 일기와 감상이 뒤섞여 있었는데, 창고 정리 차원에서 '감상'만을 따로 빼내오고자 하는 것이다. 약간의 첨삭을 가했는데, 나중에 오프라인용 글을 다시 쓰기 위한 '베이스캠프' 정도 되겠다...

 

 

 

 

 

 

 

 

 

낮에 <씨네21>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김기덕과 <빈집>에 관한 모든 것이란 제목하에 정성일의 영화평과 김기덕과의 대담을 읽었는데(정성일은 아마도 임권택 이후에 김기덕과 가장 많은 시간의 대담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김기덕이 이 영화의 영어제목으로 고른 것이 <3번 아이언(3-iron)>이었다고. 그건 아마도 빈집을 이해하지 못할 미국 관객들에겐 적합한 제목인 듯싶다(그들은 이라고 옮길까?). 하지만, 당연히 이 영화에 더 적합한 제목은 빈집이며 러시아어 제목도 푸스또이 돔(=빈집)이다. 더불어 알게 된 건 두 주인공의 이름인데, 선화(이승연)과 태석(재희?). 여주인공의 이름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와 동일한데, 김기덕의 설명에 따르면 이름이 없던 주인공을 스태프들이 그냥 그렇게 부르길래 선화로 했다고(감독은 善火란 뜻도 된다고 덧붙였다). 태석은 한 연출부원의 이름이고.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올해의 중요한 한국영화들, 그리고 내가 러시아에서 본 한국영화 3,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올드보이>, <빈집>은 모두 2+1,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각기 다른 시각에서. 그 차이를 집약하고 있는 건 각 영화의 결말이다(결말이란 건 운동/혼돈이 제거된 가장 안정된 상태를 지시한다). <여자>에서는 세 사람이 각각 다 혼자가 된다(우리는 저마다 다 혼자이다). <올드보이>에서는 복수자인 유지태가 제거되고 오대수 부녀(연인)가 남는다(가정을 이루는 건 두 사람이다). <빈집>에서는 선화와 남편, 그리고 태석, 셋이 한집에 동거하면서 남는다(가정을 이루는 건 세 사람이다).

 

이러한 결말만을 놓고 보자면, 가장 상식적이면서 영화적인 <올드보이>이다. 한 가정의 (질서를) 위협했던 은 제거되고(물론 한 치의 혀를 대가로 지불한다), 가정은 보존된다(해피엔딩이 아니더라도). 인간 관계에 가장 회의적인 홍상수의 영화답게 <여자>는 모든 관계를 미래의 것으로 남겨놓는다. 현재에 각자가 챙기는 몫은 자기 자신뿐이다. 따라서 <올드보이>가 관습적이라면(복수야말로 가장 유구하면서도 관습적인 테마이다) <여자>는 모더니즘적이다. 거기에 비하면 가장 전복적인 건 <빈집>이다. 거기서 안정된 가정세 사람의 동거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빈집>의 줄거리를 자세히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석이란 이름이 붙어 있지만, 그냥 한 유령 같은 청년의 남의 빈집살이가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동인이다. 그는 나름의 노하우를 발휘해서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숙식을 해결한다. 하지만 무얼 훔치는 대신에 망가진 물건들을 고쳐주거나 빨래를 해준다. 즉 선의의 참견을 한다(김기덕의 고백에 따르면, 그가 도둑이 아니란 걸 보여주기 위해 빈집에서 시켜볼 수 있는 게 빨래밖에는 없었다고). 그러다가 부유한 저택이지만 동시에 빈집 같은 곳에서 남편에게 폭행당하며 죽어지내는 선화를 만난다. 여기서도 태석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이 집안일에 참견하는바, 그는 선화의 남편에게 골프공 세례를 퍼붓고는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선화를 데리고 2인조 빈집살이를 시작한다. 이후에 두 사람이 순례하는 빈집들은 현 한국사회의 축도이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 집이란 건 가족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배타적인 공간이다(우리집/너네집). 그런 자기만의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국사람들은 삶의 대부분을 희생하며 간혹 목숨까지도 건다(한국인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집이고 집값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련한 집을 행복한 집(스위트홈)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는 일이란 주로 외부자/침입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비하는 것과 인테리어(interior)하는 것이다(집을 아예 으로 만들기도 하고 궁전으로 만들기도 한다. 타워 팰리스). 거기서 외부성의 배제는 행복의 조건으로 전제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폐쇄된 공간의 주인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아마도 그들의 행복은 집 없는 남의 불행과의 대비 속에서만 얻어질 듯하다). 가령, 선화의 남편은 자신의 부()를 통해서 (아마도 모델이나 배우였을) 아내 선화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려고 하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건 영화 속에서 태석과 선화, 2인조 빈집살이 팀이 전전하는 집 대부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그 빈집들은 행복이 비어있다는 의미에서도 빈집들이다. 유일한 예외는 한 한옥인데, 거기에서 비로소 (감독의 말을 빌면) 발 섹스를 하면서 태석과 선화는 일체감을 느끼고 하나가 된다. 그 집은 다른 집들과 달리 폐쇄가옥이 아니라 개방가옥이었다.

 


 

 

 

 

 

 

  

이 점은 나중에 태석이 감옥에 있는 동안에 선화가 안식을 위해서 다시 찾아갔을 때 이 낯선 이방인을 대하는 집주인 부부의 태도에서 확인된다. 그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이유도 묻지 않고,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다. 다만 쉬었다 가게 할 뿐이다. , 그들은 외부인을 침입자로서 박대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으로 환대한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레비나스-데리다의 윤리적 요청이기도 한데, <빈집>은 그러한 환대의 윤리학, 혹은 윤리적 요청이 일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실천될 수 있는지 차분하고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거기까지가 이 영화의 절반이다.

 

하지만, 그 정도였다면 영화는 잠언적인 차원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비록 태석이 천사로만 묘사되는 것은 아니며 3번 아이언의 모티브가 김기덕 영화다운 면모를 어느 정도 보여준다고는 해도 말이다. 한 빈민 아파트에 들렀다가 태석과 선화는 (나중에 밝혀진바) 폐암으로 숨진 독거 노인을 발견하고는 염을 해서 매장해준다. 하지만, 뒤늦게 들이닥친 아들 가족에 의해 빈집살이가 발각된 두 사람은 경찰에 넘겨진다. 태석에게 납치된 걸로 간주된 선화는 남편에게 보내지고 태석은 무단침입 등의 죄목으로 수감된다. 거기부터가 영화의 후반부인데, 이 후반부에서 주제화되는 것은 유령의 존재론이며, 이에 의해서 전반부의 환대의 윤리학은 보충되고, 이 영화의 힘은 배가된다.       


 

이미 남의 빈집살이를 통해서 유령 같은 생활을 해왔지만, 태석은 감금된 독방에서 더욱 완벽한 유령-되기를 연마한다. 이 연마/수행은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겨울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와 비교해 보더라도 <봄여름가을겨울>이 얼마나 관념적인가, 반대로 <빈집>이 얼마나 현실적이며 뛰어난가를 알 수 있다<봄여름가을겨울>의 수행이 비변증법적인 공부인 반면에, <빈집>의 수행은 변증법적인 학습인 것('공부'와 '학습'의 차이는 다른 통신문에서 다루었다). 태석의 수행이 변증법적인 것은 간수한테 걸릴 때마다 매번 맞아가면서 학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태석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며(시험해보면서/맞아가면서) 유령-되기를 터득해간다.

 

그 장면들에서 간수는 태석에게 그가 숨거나/없어지거나 하면 죽여버리겠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니까 사회로부터 격리돼 감금된 태석은 사회로부터 보여서는 안 되는, 즉 사회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감옥 안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간수에게 반드시) 보여야 하는 존재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중적인 사회적 규정 자체가 이미 태석의 유령성을 강요하는 바이기도 하다. , 그는 사회에서 안 보이면서 보이는 존재여야 하며,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유령이기 이전에 사회적인 차원에서 이미 유령인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둘은 등가이다. , 사회적인 유령은 존재론적인 유령이기도 하다. 나는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영화 <빈집>은 그러한 메시지를 드라마화한 것이다(하지만, 이 영화를 그러한 드라마, 혹은 홍보문구에서처럼 멜로드라마로서만 제한/규정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를 부당하게 축소하는 것이다).

 


 

 

 

이 장면과 대조되는 것이 <올드보이>에서 세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는 (아마도) 유일한 장면인바, 거기서 오대수는 (나중에 딸로 밝혀지는) 미도와 관계를 갖고 나서 알몸으로 잠이 들고 유지태는 가스를 살포한 방에 방독면을 쓴 채로 등장해 두 사람 옆에 눕는다. 거기서 유령적인 존재의 역할을 하는 것은 복수자인 유지태인데, <올드보이>유령 <빈집>유령과 갖는 차이점은 유지태의 경우 태석과는 달리 사회학적 차원이 전적으로 결여돼 있다는 점이다(그는 심리적 트라우마만을 가진 인물이다).

 

그걸 더 확장시켜 말하면, <올드보이>의 내러티브 공간은 어떠한 외부성도 갖고 있지 않다(그것은 폐쇄공간이다). 때문에, 관객은 영화 속의 어떤 인물과도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 그것은 <빈집>의 인물들이 우리 주변, 혹은 우리 자신과 동일시되는 것과 대조된다. <올드보이>가 윤리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반면에(<올드보이>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하는 겸손한 영화이다), <빈집>이 윤리-철학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러한 바탕에서이다(<빈집>당신의 집도 혹 빈집은 아닌가?라고 질문하는 불손한 영화이다).     

 

남편이 출근한 뒤에 선화는 보이지 않는 유령 태수와 함께 하게 되고 둘이 같이 올라선 저울의 눈금이 0을 가리키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눈금에서 0은 시작점/영점이면서 동시에 완성을 의미한다, 가령 100).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는 마지막 자막과 함께.

 

 

 

 

 

 

 

 

  

이 영화를 같이 본 러시아 관객들은 40여명쯤 됐는데, 영화가 끝나자 박수를 쳐주었다. 나 또한 <빈집>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베니스에서 감독상을 받았지만, 나는 지난번 <사마리아> 수준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기대를 뛰어넘는 영화였다. 해서 말하건대, 이 영화는 김기덕의 최고작이다(<수취인 불명>을 나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본 평론가 정성일도 감독님의 가장 좋은 영화라는 평을 내린 걸 보면, 나의 단언은 허풍이나 과장이 아니다. *귀국 후에 <수취인 불명>을 비디오로 보았다. 나의 판단을 수정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이전까지 김기덕을 가장 과대평가된 감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빈집> 이후는 과대평가되어도 좋은 감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집>김기덕 영화의 0이다. 

 

영화가 끝나자 동행한 후배 역시 만족감을 표시했지만, 역시나 마지막 자막에 대해서는 좀 유치하다는 평을 했고, 나도 동감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라는 마지막 멘트는 이 깔끔한 영화에 남아있는 김기덕다운 군더더기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유령으로서의 태석은 꿈(환상)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다. 그러니까 현실이라는 이항적 규정을 넘어서는 제3항이다. 이 제3항을 사회학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견인해냈다는 데 이 영화의 의의가 있다(환대의 윤리와 유령의 존재론을 주제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빈집>은 데리다 철학의 탁월한 영화적 번안이기도 하다. 김기덕 자신은 결코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걸 다시 이항적 논리로 환원시키는 것은 감독 자신이 무얼 찍은 것인지 잘 모른다는 얘기밖에 안된다(그건 물론 김기덕만의 불찰은 아니다. 창조자들은 종종 자신이 무얼 창조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종종 자신이 어떤 괴물을 낳아놓은 것인지 알지 못하며, 창조주는 대체 자신이 어떤 세상을 창조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전하지만, 그는 한쪽 눈을 감고 보았음에 틀림없다).

 

해서 마지막 멘트는 무시해도 좋을 것이다. 김기덕은 이승연이 처음 시나리오를 받아 읽고서 태석이 선화의 환상이 아니냐고 말해서(즉 제대로 이해해서!) 바로 캐스팅했다고 하지만, 그게 말해주는 바는 이 감독과 여배우가 죽이 맞았다는 것이지, 그들이 이 영화와 태석이란 배역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얘기와는 무관하다. 한편으로 선화의 남편과 태석이란 두 남자가 <나쁜 남자>에서의 한기의 두 모습, 즉 두 분신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듯한데, 나는 그러한 해석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일단 나쁜 남편과 착한 태석이란 이분법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태석에겐 나쁜 면모도 있다. 그런 그의 이중성은 감독이 의도한 것이다), 계급적 간극이 이 둘 사이를 빗장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 태석은 웬만한 차보다 비쌀 법한 외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아마도 그건 태석이 빈곤 때문에 어딜 털려고 빈집살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설정인 듯하다. 하지만, 거기에 거꾸로 전제돼 있는 건 가난한 자들은 태석과 같은 온순한 침입자가 되지 못할 거라는 주류적 고정관념이다. 김기덕은 그런 식으로 간혹 중산층 의식을 드러낼 때가 있다. 맨 처음 빈집으로 등장하는 아파트가 감독 자신의 집이라고 하는데, 그는 어느새 그만한 평수의 의식을 공유하게 된 것인지?

 

 

 

 

 

  

 

 

몇 차례 지적한 바이지만, 김기덕 영화의 힘은 사회적 추방자들의 야생적 삶에 대한 묘사에서 나온다. 이건 현재로선 그만이, 혹은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임권택 감독이 찍는(다 찍었을 듯한데) <하류인생>도 같은 소재를 다룰 법하지만, 나쁜 놈들도 알고 보면, 다 본성은 착한 놈이라는 식의 그의 회고적 휴머니즘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봉합한다(그의 <노는 계집 창>이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보다 몇 십 년 뒤에 나왔으면서도 오히려 몇 십 년은 더 뒤떨어져 보이는 이유이다. 나는 임권택의 대표작은 <만나라> <서편제>가 아니라 <길소뜸>이나 (결말은 실망스럽지만) <티켓>이라고 생각하며, 그가 후자의 길을 가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그래서, 그는 국민감독인 것이지만, 거꾸로 (예상컨대) <하류인생>에는 야생적 삶이 담기지 않는 것이다(*귀국 후에 <하류인생>을 비디오로 봤는데, 나에겐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영화였다).



들뢰즈에 따르면, (위대한 작가들이) 하는 것은 자신들의 표현수단이 다수언어에 대한 소수적 사용을 창출해내는 것이다.(<비평과 진단>, 195, 나는 가끔씩 이 책을 들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국역본을 다 읽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하다. 다 읽을 수가 없는 책이기 때문에. 해서 허다한 문학적 들뢰즈주의자들이 어디에서 자양분을 얻는지 궁금하다.) , 그들은 단조(短調)가 영원히 불균형상태에 있는 역동적 결합들을 지칭하는 음악에서처럼 다수언어를 소수화한다. 그들은 이렇게 소수화한 덕분에 위대한 것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시 옮기면, 그들은 이 (다수의) 언어를 음악에서의 마이너(=단조)처럼 소수화한다. 음악에서 마이너는 끊임없는 불협화음 속에 존재하는 역동적인 결합을 가리킨다.

 

 

 

 

 

 

 

 

  

<빈집>에서 태석은 마이너이며(남편에게 얻어맞은 선화 또한 마이너이다), 그의 침묵 혹은 묵언은 그 마이너의 언어, 소수화된 언어이다(듣기에, 은희경의 소설 <마이너리티>는 이 마이너의 세계를 다수의 언어로 말했다). 김기덕이 훗날 (국민감독이 아니라) 위대한 감독으로 기억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귀 기울임과 동시에 창출해내야 하는 것은 그러한 소수화된 언어이다(같은 묵언이지만, <봄여름가을겨울>에서의 묵언은 소수의 언어가 아니라 다수의 언어이다. 그건 절간의 보편어이기에. 해서 서로 놓여 있는 컨텍스트가 다른 두 영화의 침묵/묵언은 동일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즉 그 둘은 상동적(相同的)이 아니라 상사적(相似的)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봄여름가을겨울>은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나는 그 영화를 지지하지 않는다).


 

 

 

 

 

 

 

 

  

정성일과의 인터뷰에서 김기덕은 자신의 차기작이 <나는 살인을 위해 태어났다>라고 밝혔는데, 주인공은 총이고, 여러 주인의 손을 전전하게 되는 이 자기의식적인 총은 (러시아제인지) 러시아어로(!) 말을 한다고 한다. 이전에 박중훈이 주연한 <총잡이>이란 영화는 있었지만, 총이 주연한 영화는 한국영화상 최초일 듯하다(세계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므로). 그 총에 대한 얘기가 다수의 언어로 풀어질지, 소수의 언어로 풀어질지는 얼마간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그런 착상이 어떻게 영화가 될지는 의문스럽지만, 김기덕은 매번 그런 걸 멀쩡하게 영화로 만들어왔으니까, 좀 기다려보면 결과를 알 수 있게 될 터. 그건 김기덕의 열두 번째 영화가 될 것이다(*물론 이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열두번째 영화는 '총'이 아니라 '활'이었으니까)...

 

06. 01. 10.

 

P.S. 내가 <빈집>을 본 건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 있는 '예술극장'에서였다. 눈짐작에는 아래 왼쪽 사진에서 왼편에 살짝 걸쳐 있는 건물이었던 듯(사진에선 집시 아이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아르바트 거리의 모습이다.

 

gypsie children (thumb).jpg (12181 bytes)sabrina and beggarwoman (thumb).jpg (12024 bytes)

김기덕이 벌써부터 그런 국민감독의 길을 갈 채비를 하는 건 아니겠지만(*<활>의 흥행성적으로 봐서 '국민감독'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물론 임권택 감독조차도 <천년학>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까 '국민감독'은 허울만 그럴 듯한 말인가 보다), 그의 악어적 근성이 퇴색/양보하게 될까봐 약간은 걱정된다(<봄여름가을겨울> 같은 영화가 이러한 근심을 낳는다). 나는 그가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소수자(=마이너리티)의 감독으로 남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역설적이지만, 그게 한국영화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한 추방자/소수자들의 존재론적 지위가 <빈집>에서 규정되는바, 바로 유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빈집>은 한국판 <디 아더스>이며, 하지만 그 철학적 함축에 있어서 <디 아더스>를 한참 뛰어넘는 영화이다(<디 아더스>는 궁극적으론 타자의 발견이 아닌 자기발견의 영화이니까). <빈집>유령 태석 또한 그러한 추방자/소수자의 일원인바(그렇지 않다면,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재미로 빈집살이를 하는 것이 된다), 굳이 그러한 신원을 모호하게 할 필요가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러한 점들이 내가 <빈집>에 대해서 갖는 약간의 불만이다.

어쨌든 간수의 충고대로 그림자마저 숨기는 법을 연마해서 완벽하게 유령적인 존재가 된 태석은 출감하자 이전에 들렀던 집 몇 곳을 돌아서(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의 유령-되기를 연습한 것이라고) 선화의 집을 찾아간다. 그의 출감 소식을 형사로부터 전해들은 선화의 남편은 잔뜩 벼르고 있지만, 유령이 된 태석을 볼 수 있는 건 선화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영화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되는바, 그것은 선화가 남편과 포옹한 채로 태석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키스하는 장면이다(<빈집>의 포스터는 이 장면의 또 다른 변형이다). 선화가 남편과의 관계를 버틸 수 있는 건 태석이라는 유령을 매개로 해서이다. 그것이 함축하는바, 유령을 집안에 들여놓을 때, 유령적 존재로서의 외부자/침입자를 환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그나마 견딜 만한 것이 되고 행복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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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과 Ghost house
    from 해방촌 게스츠하우스 빈집 팀블로그 2009-09-14 20:46 
    빈집님의 [빈마을 공동체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2006-01-10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1-1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많이 비판받는 바대로 김기덕 영화에서 여성은 '남성 판타지의 도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성주의 감독이 아닌 김기덕에게 '정치적 올바름'을 주문하는 것도 제 생각엔 생산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잘 찍을 수 있는 걸 찍는 게 낫다고 생각하니까요. '올바름'을 가장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한편으론 <도쿄 타워> 같은 소설이나 영화들이 여성들에게 환영받는 듯한데, 그런 류가 김기덕의 대안일 리도 없으므로 더 기다려봐야겠죠. 여성영화는 남성영화의 미래이다?^^

2006-01-12 0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