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프린터가 말썽을 부리는 탓에 30분 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종이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 프린터도 열 받은 것 같지만, 열은 나도 받았다. 프린터를 잠시 꺼두고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창고' 정리나 한다. '미용사 판타지에 대하여'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는데, 내가 좋아했던 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 <미용사의 남편>(1990)에 대해서 '커트'하는 기분으로 잠시 매만져본다. 국내에선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제목으로 개봉했었지만(기억에 영화는 92년 가을 씨네하우스에서 개봉일이었던 토요일 오후에 봤다. 아마 연거푸 보았던 듯하다), 나는 원제를 더 좋아한다.

일단 영화의 줄거리를 옮겨온다: 앙뜨완(쟝 로슈포르 분)은 12살의 소년이다. 그에게는 비밀스런 즐거움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쉐퍼 부인이 주인인 이발소에 가는 일이다. 그녀가 풍기는 향기와 부드러운 말투에 완전히 매혹당했기에 머리를 기를 새가 없다. 어느날 저녁 식사때 아버지가 장래에 대해 물었을때 서슴없이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다고 대답했고, 그날 이후 미용사의 남편이 될 꿈을 간직한 채 거의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가 마틸드(안나 갈리에나 분)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마틸드는 주인이 은퇴하면서 물려준 이발소의 주인이었고 조심스럽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처음에 그녀는 예약 손님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으나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는 청혼한다. 아버지의 말씀인 "강한 신념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기필코 마틸드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녀 주위를 3주일동안 맴돈 후 다시 찾아갔을때, 뜻밖에도 그녀가 "아직도 원하신다면 결혼할께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다.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는 인연을 끊었다.

세상의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고 아이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곧 삶이었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틸드가 일을 하고 있으면 그는 옆에서 도와주거나, 때쓰는 아이를 달래주기도 하고, 그녀와 단둘이 머물수 있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곤 했다. 10년동안 사소한 일로 단 한번을 다투었을 뿐인데도 그의 심장은 얼어붙을 정도고, 그녀를 향한 사랑은 강렬하고 깊었다. 심한 번개와 비가 내리던 날, 둘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마틸드는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만을 남긴 채. "사랑하는 이에게. 먼저 떠납니다. 사랑을 남기고가려구요. 아니 불행이 오기전에 갑니다. 우리의 숨결과 당신의 체취와 모습, 입맞춤까지 당신이 선물하신 내 생애 절정에서 떠납니다. 언제나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날 잊지 못하도록 지금 떠납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파트리스 주로 ‘아찔한 영화'들을 만드는데, ‘아찔한 여성들’ 때문에 신세 망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장르이다. <미용사의 남편>도 예외는 아닌데, 그의 영화들 중에서 <이본느의 향기>, <살인혐의>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살인혐의>의 원제는 <므슈 이르>).

나대로 <미용사의 남편>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한 소년이 동네 미용실의 (아주 풍만한!) 미용사 아줌마를 ‘사랑’한다. 아줌마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그런 이상형의 미용사를 평생 꿈꾸며 산다. 그리고 장년이 된 그는 정말로 젊고 ‘아찔한’ 미용사를 만나 (당연히)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 ‘아찔한’ 미용사는 가장 행복할 때 죽겠다면서 폭우가 쏟아지던 날 강물에 투신한다(오, 아찔한 것들이여!). 혼자 남은 ‘미용사의 남편’, 아내가 없는 텅 빈 미용실에서 혼자 배꼽춤을 춘다. 다시 혼자 쓸쓸하게 남겨진 한 남자를 두고 카메라는 뒤로 빠져나온다.

이 영화의 절정은 미용사 아내의 투신이 아니라 남편의 코믹하면서도 허전한 배꼽춤이다. 그것은 ‘아찔함’이 남긴 공백을 채우기 위한 ‘허전함’의 몸부림이어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눈물겹다. 그래도,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이 영화가, 혹은 이 영화에서의 사랑의 공식이 어떤 보편성을 갖는다면, 그건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용사 판타지’가 어느 정도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용사 판타지'는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서 갖는 여러 판타지의 일종이지만(물론 여성도 ‘미용사 판타지’를 갖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그 직접성, 구체성에 있어서 특권적이라 할 만하다. 무엇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가? ‘머리 만져주기’, 혹은 ‘머리 감겨주기’. 단적으로 말해서, 미용사는 ‘엄마’ 외에 우리의 ‘머리를 감겨주는’ 유일한 사람이다(물론 엄마의 대역으로서 이모와 할머니도 있지만 그건 어릴 때 잠시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용사가 엄마와의 2자적 관계에서 ‘제3자’로서의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전개되는 3자적/사회적 관계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즉 ‘미용사’는 상상계(엄마)와 상징계(아버지의 이름) 사이의 중간계에 대한 이름이다(마치 지옥과 천국 사이에 연옥이 있는 것처럼). 요컨대, <엄마-미용사-아버지의 이름>의 3단계.

[Amy]

 

라캉 이론에서 거울단계는 그 경계면을 지시하는데, 사실 미용실이야말로 거울로 꽉 찬 ‘거울단계적’ 공간 아닌가? 그 거울 앞에서 눈을 감으면, 우리는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 즉 촉각에만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는바, 이 촉각이야말로 2자적 관계에서의 기본 감각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우리는 상징계의 시선으로 사회적 자아(social self = me)가 잘 연출되고 있는지 ‘감시’한다. 이때의 시각은 3자적 관계에서의 가장 주된 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은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의 스위치(전환) 공간이다. 우리는 미용실에서 이젠 회복할 수 없는 상상계적 공간에 잠시 잠겼다가 다시 깨어나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 미용실의 핵심적인 공간은 머리를 깎는 곳이 아니라 머리를 감는 곳이다(아예 머리를 깎는 것은 머리를 감기 위한 전희(前戱), 곧 pre-play는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샴푸의자에 앉아서 우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이건 옛날 이발소에서처럼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감는 것과는 다르다. ‘숙여!’란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감는 건, 복종을 내면화하는 학습과 단련의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를 감기는 엄마는 ‘아버지-금지’의 목소리를 가진 ‘아버지의 대행자’로서의 엄마이다.

때문에, 미용사의 첫째 조건은 상냥함과 부드러운 손길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하거나 무뚝뚝한 미용사는 ‘아버지의 대행자’와 다를 바 없는데, 사실 머리를 가위질하는 그들의 손길은 정신분석학적으론 ‘거세 위협’, 더 나아가 ‘상징적 거세’를 무대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거울(관중) 앞에서.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집히는 일보다 훨씬 더 끔찍한 건 이런 ‘아버지-미용사’들에게 걸리는 일이다!

어쨌든 제대로일 경우, 우리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원래의 무능력(helplessness) 상태로 돌아가며(우리의 잘난 ‘머리’는 원래의 ‘머리통’이 된다!), 모든 것을 ‘엄마의 대행자’로서의 미용사의 손길에 맡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는 그 손길(촉각)과 함께 물에 적셔지고 물에 잠겨진다. 우리는 그렇게 ‘죽는다’. 사회적 자아의 익사. 그리고는 물론 되살아난다. 머리를 말리면서. 잠시 묻어두었던 온갖 고민거리들과 의무들을 다시 떠올리고 떠안으면서. 제대로 깎였는지를 정신차리고 확인하면서!



이러한 구도를 전제할 때, 미용사의 남편이 되고 싶어하는 꿈, 혹은 미용사 판타지는 상상계적 아이의 단계(엄마가 머리를 감겨주던 단계)에서 상징계적 어른의 단계(자기 혼자 머리를 감아야 하는 단계)로 이행해 가야 하는 과정이 두렵거나 귀찮은 ‘미숙한’ 남자들의 판타지이다(‘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주류적 판타지에 기대어 볼 때). 그들은 여전히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미용사(엄마의 대행자)의 손에 의해 머리를 감고자 하는 어른-아이인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론 그렇다(왜 미용사의 남편들은 생활력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걸까? 물론 이에 대한 데이터를 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나도 한때 미용사와의 사랑, 미용사와의 결혼을 꿈꾸었지만(왜 아니겠는가? 더 어릴 때는 버스 안내양 판타지에 빠진 경력도 있는데!), 퇴짜맞았다(물론 이런 퇴짜를 맞을 때도 아찔하다!). 이미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했다(지나고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또 한때는 아예 미용기술을 배워서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다(무슨 생각을 못하겠는가?). 그럼 미용사의 남편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미용사 남편’은 될 테니까.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고(러시아에서라면, 생각을 고쳐먹기가 훨씬 쉬울 듯하다!),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식의 글쓰기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대로의 ‘배꼽춤’인 셈이다. 

아내는 간혹 내가 미용사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사진은 '미용사 남편'이 등장하는 영화 <화이트>). 뒤집어 생각하면, 아내에겐 ‘미용사의 아내’ 판타지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이 보편성!). 결국, 우리는 서로가 갖고 있지 않은 걸로 서로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 삶이 언제나 ‘간 길’(=이었네!)과 ‘가지 않은 길’(=이었더라면!)이란 이원적 구조 속에서만 유지/지탱되는 거라면, 우리의 판타지는 곧 현실이기도 하다. 판타지가 없다면, 현실도 없을 것이기에(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판타지, 혹은 현실의 알리바이.

거꾸로, 판타지가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다. 때문에 다행이건, 불행이건 현실은 언제나 ‘아찔한 것들’을 놓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판타지는 그 유구함을 유지한다. 이것이 현실과 판타지의 변증법인바, 이 변증법은 욕망의 구조를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욕망 때문에 우리는 자주/간혹 자기파멸로의 유혹에 시달리지만, 욕망이 없다면, 한 시인의 말대로, 삶은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할 것인가! 이곳 (모스크바) 전철역 주변에서 언제나 늘어지게 자고 있는, 집 없는 개들처럼...(아래 사진은 그런 개들을 자주 보던 모스크바의 '대학역' 역사 주변의 야경이다. 모스크바 대학은이 전철역에서 15-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이다. 얼마나 자주 드나들던 출입문이었던가!)

06. 02. 03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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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이발소, 미용실은 늘 관능의 기운을 아찔하게 휘감고 있는 곳이죠.
머리 감기, 가 전희 행위라는 데 끄덕.
이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위험하다고 느껴왔는데...

로드무비 2006-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행복의 절정에서 그렇게 휙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다니!
소년의 엄마가 떠준 털실 빤쓰도 인상적이었어요.
방울이 달렸었나?
이 페이퍼 퍼갈게요, 로쟈님.^^

딸기 2006-02-0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갈께요.

바람돌이 2006-02-0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둘이 미용실안에서 춤추던 장면이 어찌나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되던지... 지금은 다른건 다 잊었어도 그 장면만은 생생하게 떠올라요. 뭐라고 하든 그냥 그들의 사랑이 부러웠어요. 진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예요. ^^

로쟈 2006-02-0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들을 좀 수정했습니다. 많이들 좋아하시는 영화는 분명하군요.^^

로드무비 2006-02-0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한 그림들도 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