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주 <필름2.0>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중저가' 영화잡지이지만, <씨네21>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즘의 <씨네21>이 과연 세 배만큼의 제값을 하는 '고가' 브랜드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개최된 '1996년의 한국영화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를 계기로 '1886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를 특집으로 내건 이번주 기획만큼은 단연 돋보인다(이번 주 <씨네21>의 기획특집은 '영국배우의 힘'이다).
이 특집과 관련해서, 10년전, 1996년의 이야기를 나도 풀어볼까 하다가 견적 대비의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냥 한 두 꼭지에 대해서만 참견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또 한편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를 발표한 송일곤 감독의 인터뷰 꼭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의 대담 꼭지이다.

폴란드의 국립영화학교 우츠출신으로 우리에겐 영화보다 (모 통신회사) CF로 처음 알려진 그의 영화들 중에서 단편영화 <간과 감자>와 장편 <꽃섬>(2001), <거미숲>(2003) 등이 내가 본 작품들이다(그러니까 단편 <소풍>과 장편 <깃> 등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로선 너무 도식적이라고 여겨진 <거미숲>이 실망스러워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될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이라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어떨까' 싶은 눈길을 끈다.
이 신작과 관련해서는 얼마전 오마이뉴스(06. 03. 19)에 소개된 기사내용을 약간 재구성해서 잠시 따라가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은 한편의 연극같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편집 없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으로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 ‘마법사밴드’는 멤버 자은(강은비)의 죽음으로 해체된 인디밴드다. 음악을 통해 청춘을 보낸 그들에게 자은의 죽음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자은과 연인 사이였던 재성(정웅인)은 그들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강원도 숲 속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수(장현성)는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편, 보컬이었던 하영(강경현)은 자은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더 이상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자은을 기념하기 위해 재성이 운영하는 카페에 모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명수는 하영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하영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자영은 여전히 노래하기를 망설인다. 그들은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극복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송일곤 감독의 연출력이다. 카페의 1층은 현재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세 명의 멤버가 다시 만나는 장소이며, 과거의 공간인 카페 2층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힘겨워하는 자은과 재영의 갈등을 보여준다.

-형식미 단편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장편 <거미숲>, <깃>을 통해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마법사들> 역시 그만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거미숲>에서도 ‘숲’을 통해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을 표현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숲’을 통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이 영화는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에도 불구하고 카페 1층과 2층, 숲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변화를 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96분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할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 모두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중간에서의 작은 실수는 곧 촬영 종료를 의미하고, 모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진부함과 급격한 심리의 변화는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30분짜리 단편을 96분의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 <마법사들>은 3월 30일 CGV 인디상영관에서 개봉된다).

한편, <필름2.0>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이 영화적 실험의 배경: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2학년 가정의 중요한 수업 중 하나가 '마스터 샷'이라고 해서 끊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샷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코프스키나 소쿠로프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소련을 중심으로 영화미학이 발전했던 60, 70년대에는 시간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가 많은 이들의 화두였다. 그러면 우리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실험이 헐리우드쪽보다는 러시아나 북/동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의 사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1951- )의 <러시아방주>(2002, 99분)이다(역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 제목에서 얼핏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러시아의 보물창고라 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대한 감독의 공시적/통시적 사색과 명상을 담고 있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이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영화보다 흥미로웠던 건 본편 방송 이후에 덧붙여진 '메이킹 필름'이었다. 영화는 단 한번에 테이크로 모든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한 계산하에 모든 배우 및 스탭들의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했다(리허설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필름속에 담기는 내용만큼(혹은 그보다 더) 그 찍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아래 사진은 소쿠로프와 그의 스탭들.

그런 사정은 <러시아 방주>와 같은 방식으로 찍은 <마법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법사들의 러시아 방주?). 박영준 촬영감독의 고백: "<마법사들>에서 최고의 관객은 현장에서 감독님의 '오케이'를 들었던 현장 스탭들이다. 연극을 보듯 그 순간을 우리 모두 '생짜'로 본 거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뭐랄까, 우리 스스로 치유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손으로 흙 발라서 집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옆에서 거드는 송감독: "마지막 촬영 끝나고 나서 스탭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했던 것 같다."
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법사들>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그 메이킹 필름이다(어떤 경우에 예술은 'picture'가 아니라 'picturing'에 깃든다). 그걸 찍을 비용이 '저예산'에 포함돼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06. 03. 26.
P.S. 보너스로 덧붙이자먼, 감독 자신이 꼽는 <마법사들>의 베스트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두 남녀가 숲에서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한국영화에서 그런 룩을 처음 본 것 같다. 흑백이 강렬하면서도 컬러가 살아있고 표정들도 너무 잘 나타나 있고, 미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신이다. 우리 영화니 자뻑이기는 하지만." 아마 자뻑인 거 맞을 것이다. 한데, 사과를 먹는 장면은 <거미숲>의 정사장면에서도 나온다. (감자가 아니라!) 사과가 송일곤 감독의 '대상a'쯤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