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방위 소집훈련이 있는 날인지라 7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지난번에 빠졌기 때문에 '보충1차'였다). 민방위도 벌써 8년차인데, 언제 소집 해제되는 것인지?(물론 편한 소리이긴 하다. 예비군때만 해도 총자루를 어깨에 매고 어슬렁 거리며 '터널 경비'도 하곤 했으니.) 여하튼 다른 날보다 좀 일찍 시작한 하루였고, 그래서인지 버스-전철-버스 출근길에서 마지막 버스는 자리에 앉아서 타고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출근길에 집어든 '한국일보'를 대중문화면 정도는 다 읽어볼 수 있었다. '세 편의 영화'는 아침에 읽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각기 다른 소개 기사이다.  

먼저. 박선영 기자가 쓴 영화 <스위트룸> 소개는 '그날 밤, 추악한 욕망의 공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스위트룸은 공간의 폐쇄성과 화려함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인간 욕망의 극단을 실험하기에 썩 괜찮은 장소다. 1950년대 미국 연예계를 배경으로 화려한 쇼비즈니스 세계의 허구와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까발리는 영화 <스위트룸>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손아귀에 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조명하는 ‘인간 욕망의 보고서’다. 미국 연예계 최고의 스타 콤비인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의 화려한 이면에는 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밀스런 사생활이 숨겨져 있다. 제멋대로인 악동 래니와 젠틀한 매너의 빈스가 약물과 성에 탐닉하며 방탕하게 생활하는 동안 매니저 루벤(데이빗 헤이먼)은 이들의 모든 뒤처리를 전담한다.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소아마비 기금 생방송’ 전날, 그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웨이트리스 모린(레이첼 블랜챗)을 불러 환각의 섹스파티를 벌이지만, 다음날 방송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들을 기다리는 건 모린의 전라 시체. 래니와 빈스의 알리바이가 뚜렷해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결별을 하고, 20년 뒤 이들의 열혈 팬이었던 작가 카렌(알리슨 로만)이 그 사건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접근하면서 감춰졌던 진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 영화 <일급살인>, <‘미스틱 리버> 등을 통해 미국적인 자유분방함을 선보여온 케빈 베이컨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에서 영국 신사의 전형을 보여준 콜린 퍼스가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약물중독과 동성애, 양성애 등의 파격을 연기하는 모습이 다소 낯설다. 원제는 ‘Where the truth lies’(2005)로 <엑조티카>를 만든 캐나다 출신 아톰 에고이안(아래 사진)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 '스위트룸'의 제목이나 줄거리는 그다지 눈길은 끄는 게 아닌데, 감독 '아톰 에고이안'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의 <엑조티카> 등도 보았지만, 아마도 동시대 캐나다 감독들 중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감독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칸느영화제 등의 단골이기도 하다). 그의 '헐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하니까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는 평을 보면, 기대는 우려에 가까운 듯하지만.  

두번째 기사는 라제기 기자가 쓴 '씨네 다이어리'로 '외설 무서워 영화 못보나'란 타이틀이고 최근 개봉된 차이밍량의 영화 <흔들리는 구름>에 관한 것이다.

-10여년 전 한 동시상영관에서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을 친구와 함께 관람했다. 친구는 극장 문을 나설 때 “욕망은 무슨…”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동시상영관이라는 야릇한 장소와 꿈보다 해몽이 좋은 제목이 만들어낸, ‘뼈와 살이 타는’ 화끈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욕망의 낮과 밤>의 원제는 'Tie Me Up, Tie Me Down'이었다. '나를 묶어주세요, 나를 풀어주세요' 정도의 뜻인지.)

 

-한때 동시상영관이 욕정 해소의 동의어 역할을 한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에로 비디오 사업이 ‘배설구’ 역할을 대신하면서 동시상영관은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활황을 누리던 에로 비디오도 짧은 전성기 끝에 ‘포르노의 바다’ 인터넷에 밀려 사양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예술공헌 은곰상 등 3개 상을 수상한 대만 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의 <흔들리는 구름>이 약 2분 가량 삭제된 채 지난달 31일 개봉됐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수입사 유레카픽처스가 낸 18세 관람가 등급 신청에 대해 2차례나 제한상영(성인영화 전용 상영관에서만 상영 가능)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인 전용관이 전무해 제한상영 판정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수입사는 자진 삭제를 선택해야만 했다.(*<몽상가들>의 선례도 있는데, 굳이 '제한상영' 판정을 내려야 했을까 의문이 든다. 덕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려던 생각이 싹 가셨다.) 

-<흔들리는 구름>은 무척 야해 보이는 영화다. 남녀의 하얀 나신이 무시로 등장하며 다양한 성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웬만한 포르노는 저리 가라 할만한 결말은 정말 극장에 걸릴 수 있는 영화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숨막힐듯한 관능을 내뿜거나 관객의 몸을 뜨겁게 달구지 않는다. 가뭄으로 표현되는 삭막한 인간관계 속에서 애정에 목 말라 하는 주인공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가슴을 짓누를 뿐이다. <흔들리는 구름>은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대만에서 무삭제로 개봉돼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올렸다.

-인터넷이 ‘에로 시장’을 장악하면서 극장에서 숨은 욕정을 털어내려던 시대도 완전히 저물었다. <흔들리는 구름>이 무삭제 개봉됐어도 ‘예설’ 대신 ‘외설’을 탐닉하려는 관객, 특히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우리 청소년들이 '포르노의 바다'를 놔두고 왜 엉뚱한 데서 헤엄을 치겠는가?) 18세와 20세 사이의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현행 등급분류 체계의 제한상영 규정이 애먼 예술영화의 정상적인 상영만 가로 막는 게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고민은 고민이고 짜증은 짜증이다. 아침부터 좀 짜증이 났다. 우리에게 포르노를 보여달라!)

세번째는 다시 박선영 기자의 <연리지> 리뷰이다. 인터넷판 타이틀은 '한국멜로의 불치병 <연리지>'인데, 지면에는 '"바보야, 나 죽어" 또 그 소리네'로 돼 있다.

-멜로영화 만들기가 갈수록 힘들다. 연인들을 애절하게 떼어놓는 게 멜로영화의 관건일진대, 신분이나 계급 차별은 줄어들고, 어지간한 병은 치료만 잘 받으면 죽음에까지 이르진 않는다. 작가와 감독들은 기를 쓰고 희귀병과 사회적 금기를 찾아 보지만,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영화건 드라마건 한국멜로의 두 가지 공식은 희귀병이거나 (알고보니) 남매이거나, 이다.) 

-한류스타 최지우의 스크린 복귀작 <연리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설득기제를 찾으려다 막다른 골목과 마주친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야말로 한국 멜로영화의 ‘불치병’인 불치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나름의 변주와 반전을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출해보려 한 감독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되레 두 배의 황당함과 실소를 선사하며 ‘불치병 코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한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멜로영화의 관습들을 고스란히 집대성한 <연리지>는 천하의 바람둥이 민수(조한선)가 원발성폐고혈압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혜원(최지우)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기시감(旣視感)으로 충만한 장면들에 빼곡히 나눠 담았다. 두 연인은 비오는 날 난폭운전으로 흰 옷에 빗물을 튀기면서 우연히 만나고, 차에 탄 여자는 약속한 듯 휴대폰을 두고 내린다.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천진발랄한 그녀는 남자와 첫 키스를 하다 수줍게 도망치고, 장대비를 맞고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바보야, 나 죽어”를 울며 외친다. 가히 클리셰의 총출동이라 할 만한 상투적 서사 전개로 인해 반전의 효과는 코웃음 속에 묻혀버리고, 두 주인공의 감정에 동참하지 못하는 관객은 지루하다 못해 외로울 정도다.

-영화는 신파의 혐의를 벗기 위해 최성국, 서영희 커플의 코믹한 사랑 이야기를 곁들이며 로맨틱 코미디의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코믹과 신파는 물과 기름처럼 시종 겉돈다. 30대 여배우들이 나이에 맞는 다양한 배역으로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요즘, 서른 한 살의 최지우가 극중 배역과 유리된 채 ‘지우히메’의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이 아름다운 한류스타의 미래를 심히 염려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치병이 어디 <연리지>만의 잘못이겠는가. 사랑의 슬픔은 불치병 같은 외부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 내적 기제에 의해 자체 소멸하고 침식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왜 한국영화만 간과하고 있는지(*'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정식이 말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최근 한 해 동안만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파랑주의보> <백만장자의 첫사랑> 등이 불치병 릴레이를 펼치며 동어반복을 계속했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붙어 하나의 나무로 합쳐지는 현상으로, 불치병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은유하는 제목이다.(*아래는 송혜교, 차태현 주연의 <파랑주의보>.)

해서, 세 편의 영화는 각기 '진실'과 '외설'과 '불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뭘 봐야 하나?). 아침부터 그런 걸 생각, 해보게...

06.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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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0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톰 에고이얀의 영화는 좀 아쉽더군요. 그의 장기가 고스란히 들어있고 연기 좋고 기술적인 부분도 좋고 다 좋은데 2%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드니 함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조만간 볼 생각이구요.

로쟈 2006-04-0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에 그럴 거 같았습니다. 저는 비디오로나 봐야 할 거 같은데, 차이밍량 영화 같은 건 비디오가게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