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개봉한 만다 쿠니토시 감독의 영화 <언러브드>(2002)에 대한 기사 두 개를 옮겨놓는다. 엊저녁 퇴근길에 문화일보에서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리뷰를 읽은 게 계기가 됐다.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나로선 비디오로 출시되기나 기다려야 할 형편이다. 미리 스크랩해두는 걸로 아쉬움을 달랜다.

문화일보(06. 05. 30) 돈 많은 벤처사업가 가쓰노(나카무라 도오루)와의 사랑을 뿌리치 고 택배 일을 하는 가난한 청년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 )에게 마음을 연 가게야마(모리구치 요코)는 그와의 첫 잠자리에 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가 처음이어서가 아니다. 시모카와와의 섹스가 특별히 그녀의 몸을 더 뜨겁 게 만들어서도 아니다. 가게야마는 이제야 처음으로 자신과 ‘맞는’ 남자를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시모카와의 벗은 등을 힘껏 껴안으며 왜 우느냐고 묻는 그에게 “너무 좋아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모카와는 가게야 마가 ‘좋다’라고 한 진짜 이유를 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언뜻 보면 동네 구청에서 일하는 9급 공무원 여성과 잘나가는 사 업가, 그리고 나이도 어리고 장래도 불투명한 한 청년의 그렇고 그런 3류 삼각관계를 그린 신파 TV드라마 같지만 <언러브드>는 그보다 훨씬 깊은 얘기를 다루는 작품이다. 한마디로 현대사회,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사랑의 본질을얘기하는 것인데, 그 내용이 너무 정곡을 찌르는 것이어서 때 론 섬뜩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지나친 진실은 일상을 뒤흔든다.

-흔히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 모든 차이를 덮어 버릴 수 있다고 착각하며 산다. 그 ‘차이’ 란 때로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종교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차이의 요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것이지만 그 핵심은 하나, 결국 계급적이라는 것이다. 지난한 계급의 역사에서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이 해피엔딩이 된 경우가 과연 얼마나 됐을까. 그런 얘기는 정말 할리우드식 로맨틱 코미디나 공중파TV의 수많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언러브드>는 우리들의 그 같은 오래된 착각의 세상인식을 전복시킨다.

-남녀간의 차이는 차이로 존재할 뿐 그게 근본적으로 해소되지 않는다고 이 영화는 얘기한다. 여주인공 가게야마는 그 점을 너무 나 잘 아는 인물이다. 돈 많은 가쓰노는 그녀에게 수백만원짜리 의 드레시한 옷을 사 입히고 스노비시한 인간들이 넘쳐나는 최고 급 레스토랑에 데려가지만 가게야마는 가쓰노가 잠깐 일을 보러 간 사이 허름한 음식점에 가서 라면을 먹는다.

-가게야마는 가쓰노에게 옷을 돌려주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가쓰노는 레스토랑에 오랫동안 혼자 놔둬서 그녀가 화가 났다고 생각한 다. 그 ‘생각’의 차이는 끝내 좁혀지지 않는다. 가게야마는 가쓰노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최고급의 옷’일 뿐이다. 가게야마 는 가쓰노에게 얘기한다. “당신과 있으면 나는 내가 아니게 돼요. 나를 잃게 돼요”라고.

-가쓰노는 그런 그녀에게 화를 낸다. 가쓰노의 분노도 이해 못할 것이 아니다. 가쓰노는, 너 역시 나를 만나면서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지 않았느냐며 그녀를 힐난한다. 차이를 두려워하고 거부 하는 것 역시 자기만 상처를 받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냐고 캐묻는다. 가난한 택배 청년 시모카와도 그녀를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그녀식으로 자신들이 ‘차이없음’에 만족하고 사는 것은 결국 이 사회에 두껍게 벽을 쌓고 고립돼 살아가려는 왜소한 행위일 뿐 이라고 그는 안달한다.

-가쓰노는 가게야마를 자신의 세계에 끌어들이려고 하고 가게아먀 는 시모카와를 자신의 세계에 정착시키려 하지만 정작 시모카와는 가쓰노처럼 되고 싶어한다. 이 기묘한 부조화의 순환구조. 과연 누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계급을 뛰어 넘는 사랑은 가능한 것인가. <언러브드>는 그게 결코 녹록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멜로드라마를 보러 들어갔다 가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서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한겨레(06. 05. 25) 사는 게 그렇지만 연애도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취향이나 환경, 가치관은 한 사람을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또 그렇게 관계가 맺어진 뒤에도 선택의 순간은 끝나지 않는다. 여기에 타협과 포기가 끼어들고 이런 단어는 사랑이라는 우산 밑에서 헌신,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런데 현실 속의 선택에는 매뉴얼도 존재한다. 부와 능력, 배경, 외모 같은 조건들이 그렇다. 보통의 선택은 투명하게 스스로의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 욕망과 객관적 기준의 타협이기 십상이다.

-사랑 이야기이면서 ‘사랑받지 못하는’이라는 뜻의 제목을 가진 <언러브드>(24일 개봉)에는 남다른 선택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시청 하급 공무원인 미쓰코(모리구치 요코)는 능력을 칭찬하고 승진 준비를 하라는 상사의 격려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값싼 노동력에 만족하고 산다. 업무차 시청을 오가던 젊은 사업가 가쓰노(나카무라 도오루)는 참하고 조용한 미쓰코에게 반한다. 가쓰노가 연애를 걸어오자 미쓰코는 조용하게 그를 받아들이지만 가쓰노가 값비싼 드레스와 고급 레스토랑 등 자신이 속한 세계로 끌어당기자 싸늘하게 그를 거부한다. 대신 자신에게 무관심했던 아래층 택배청년 시모카와(마쓰오카 슌스케)에게 연애를 건다.

-미쓰코는 욕심없고 소박한 인물로 보인다. 그런데 가장 평범해 보이는 그의 세계는 이해받지 못한다. 욕심없고 소박하다는 게 어떻게 해 볼 수 없어서 자조하는 것이라고 해석되는 세상에서 그가 욕심없고 소박한 자신의 세계를 관철하는 건 초고속 승진을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된다. 당연히 미쓰코를 ‘구제’해줬다고 여기는 가쓰노가 미쓰코의 거부를 이해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처음엔 미쓰코의 살뜰한 사랑을 반기던 시모카와도 싫증을 낸다. 미쓰코는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라, 즉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어울리는 사람이라 시모카와를 좋아하지만 시모카와는 미쓰코에게서 별수 없는 패배자로서 자신의 거울을 보기 때문이다. 가쓰노는 버림받은 데 분노하지만 시모카와는 선택받은 걸 혐오한다. 결국 자신의 성을 완고하게 지키며 사랑을 하려는 여자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로 남는 것이다.

-<언러브드>는 순종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타협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사랑에 있어 선택의 문제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사랑이라는 주관적 단어를 마치 수학이나 화학의 복잡한 공식처럼 철저하게 분해하면서 그 안에서 선택이 작동되는 기제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틀을 빌려왔지만 싸늘하리만치 냉정하고 이지적이다. 특히 영화의 막바지에 자신을 떠나려는 시모카와에게 미쓰코가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에 대해서 집요하게 설득하는 장면은 격렬한 토론장처럼 불꽃이 튄다. 영화 역시 밀도 있는 구성과 대사를 통해 사랑도 선택도 달콤한 휴식의 거처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투쟁의 장이라는 걸 관객에게 설득해내는 데 성공한다.(*이 리뷰는 김은형 기자의 것인데, 남성 평론가 오동진과는 달리 '계급적 문제'보다는 '캐릭터의 문제'에 더 주목하고 있다. '존재론적인 투쟁'?)

06. 0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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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5-3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영화는 어디서 하는거래요. 못봤는데. 씨네코아도 없고 씨네큐브에도 없으면 어디에서...?

나어릴때 2006-05-31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필름포럼(예전 허리우드)에서 이번 주까지 하네요. (흡, 남의 서재에 답댓글을..;;)

Joule 2006-05-3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봤어요. 이벤트라고 까만 색의 예쁜 머그컵을 주었는데 소감을 말하자면 6천원짜리 머그컵 사니 덤으로 영화를 보여준거야,라고 위안하고 싶더라는. 연극적이에요. 영화보다는 영화평들이 더 훌륭한 걸 보면 차라리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울림이 크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와이 겐지가 음악을 맡았는데 애마부인 음악과 상당히 흡사한 분위기를 연출하더군요. 영화평에서 말하는 딱 그만큼만이에요. 그러나 다시 보라면 볼 것 같아요. 덤으로 주는 컵이 갖고 싶어서.

로쟈 2006-05-3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관 개봉하는 걸로 보아 흥행성이 없을 거라는 건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애마부인 음악'이라는 장르(?)도 있는 모양이군요.^^

마늘빵 2006-05-3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 보러갔다가 제가 도착한 시간이랑 상영시간이 너무 차이가 나서 모노폴리 보고 왔어요.

로쟈 2006-05-31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 같으면 저는 <모노폴리>를 먼저 보고, <언러브드>를 봤을 텐데요.^^
 

미국의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과의 대화'를 읽어보기 위해 '씨네21'(06. 05. 10)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전영객잔' 코너에서 김소영 교수의 흥미로운 칼럼을 발견하게 되어 옮겨온다. 원제는 '계급 상승 욕구와 취향 맞추기'이며, '<매치포인트>와 <달콤, 살벌한 연인>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이 부제이다. 부제에서 드러나지만 최근 개봉작 두 편에 대한 리뷰 성격의 글인데, 물론 나의 관심은 '도스토예프스키를 인용하는 방식'에 더 가 있다.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은) 두 편의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한 탓에 내가 덧붙일 말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1 때 학교 백일장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뭐, 그렇겠거니 했다. 그런데 담당 선생님이 불러서 하시는 말씀이 곧잘 썼는데 조숙한 내용인데다 (도스토예프스키) 표절 의혹이 느껴져 일단 대상에서 제외했다는 것이다(이후로도 대상이라고는 받은 적이 없다). 말하자면 조숙해서 장려해야 할 대상이던 나는 그 뒤에도 소설 습작에 몰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깊이 감명받아 누구에게나 해가 되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썼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 첫 번째 소설의 독자가 바로 어머니가 (몰래) 되는 통에 내 윤리적 성향을 의심받아 대단히 고생했다. 나의 도스토예프스키 모작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유난히 강력하게 상기시켜주는 두편의 영화가 있으니 <달콤, 살벌한 연인>과 <매치포인트>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교양의 척도이자 살인 지침서로 등장한다. 굳이 제목에서 생각하자면, 어떤 살벌함을 가리키는 인덱스다.

-<매치포인트>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교양의 척도이자, 소포클레스와 더불어 인생의 살벌한 비극을 가리키고 있다. 두 영화에 모두 도스토예프스키가 등장한다고 지적하고 그래서 두편을 함께 쓴다고 하는 것은 반쯤 진담이지만, 둘 다 계급 상승이나 신분, 취향이라는 문제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사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두 영화에는- <매치포인트>엔 도스토예프스키만이 아니라 스트린드베리, 베르디 등이 그리고 <달콤, 살벌한 연인>엔 몬드리안, 고흐 등이 등장한다― 대단히 통속화된 고급예술과 아직은 약간 접근 불가능한 예술 작품을 계급성의 중요한 참조물로 활용한다.

욕망과 행운으로 대치된 <매치포인트>의 도덕적 판단

-<매치포인트>라는 제목의 의미는 승패를 좌우하는 마지막 1점이다. 자신에게 적합한 매치포인트를 필요로 하는 것은 주인공인 크리스(조너선 리스 마이어스)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의 전직 프로 테니스 선수였으나,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와 테니스 교습을 시작한다. 미래가 불투명한 어려운 처지다. 그러나 그는 영국 상류층의 한량인 톰(매튜 구드)을 만나 오페라를 좋아하는 자신의 고상한 교양을 말한 덕에 톰의 가족이 사용하는 로열오페라하우스의 관람석에 앉게 된다. 그러다가 톰의 여동생인 클로에(에밀리 모티머)의 눈에 든다.

-한편 톰의 연인이자 크리스가 한눈에 매혹되는 노라(스칼렛 요한슨) 역시 사실 매치포인트가 필요하다. 미국 콜로라도 볼더 출신으로 여배우가 되려 하지만 불행히도 오디션에는 실패하고 남자의 눈길을 끄는 데는 성공한다. 그녀에겐 몇년 대학을 다닌 고전적 아름다움을 가진 언니가 있지만 마약에 빠져 있고, 아버지는 가족을 두고 떠났으며, 직업을 전전하던 어머니가 있다.

-크리스와 노라가 만난 계기는 영국 상류층 올드 머니의 ‘미덕’을 가진 휴잇 집안의 혼기가 닥친 톰과 클로에의 각각의 파트너로서다. 크리스와 노라는 둘 다 인생의 게임에서 1점이라도 더 필요한 사람들이라 서로를 금방 알아보지만, 크리스의 기회주의적 섹스 이후 둘은 헤어진다. 톰은 노라를 떠나 자신의 집안이 승인할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한다. 반면 휴잇 집안은 크리스에게 그에 걸맞은 직책을 구해준 뒤 딸과 결혼시킨다. 여기까지 스코어를 보자면 크리스는 계급 무한 상승 이동 가능한 점수를 얻었고, 노라는 잃었다. 그러나 문제는 크리스가 템스 강가의 호화 아파트의 삶 외의 무엇인가 다른 것, 말하자면 애욕이라고 알려진 것을 노라에게 투사하면서 일어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문제는 크리스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노라에게 일어난다.

-노라는 그녀의 말처럼 남자들이 그녀와 잠을 자면 뭔가 특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유혹하기 때문에 상대가 톰이건 크리스건 사실 별 관계가 없다. 톰이 잘생기고 그녀에게 선물 공세를 하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크리스에게 말했지만, 초반의 호기심 말고는 사실 노라가 왜 크리스와 관계를 하는지는 그녀의 말대로 모호하다. 처음 만났을 때 노라는 크리스가 대단히 공격적인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격한 장면은 둘이 호텔에서 나와 다시 노라의 아파트로 가 정사를 벌이는 부분이다. 노라는 크리스의 넥타이를 풀어 그의 눈을 가리는데, 크리스는 여기서 처음으로 흥분한 모습을 보인다. 이제까지 그는 냉정하고 계산된 발언을 했었다. 상류층의 별장이나 런던의 팝, 음식점 그리고 테이트 모던 등을 우아하게 보여주던 카메라가 이 부분을 정면에서 잡기 때문에 관객은 거의 날것처럼 이 장면을 불현듯 응시하게 된다. 여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적 에너지는 상당히 높다. 또 노라가 뒤에 있기 때문에 관객은 흥분하고 만족해가는 남자의 몸을 직접 마주한다.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 욕구의 실현이라는 것 말고도 크리스의 육체적 흥분과 쾌락의 충족을 보여준다. 관객이 그의 성적 흥분을 날것처럼 느끼게 구조화되어 있는 셈이다. 이 장면은 영화의 종결부 크리스가 노라에게 가하는 모종의 끔찍한 무엇과 기묘한 대구를 이룬다(스포일러를 피하고 있음). 이 영화에서 질리는 부분은 노라의 일기장의 진술마저도 크리스의 그저 행운으로 충만한 사회적 건재를 훼손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유령의 저주도 크리스의 비윤리적 행운을 앗아가진 못한다. 굳이 그 의미를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상층 계급, 건재의 비밀이 자본가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상당 부분 운에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영화는 도덕적 망설임없이 그 부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또 도스토예프스키와 소포클레스의 사유를 씌운다. 하지만 사실 영화는 크리스의 살갗 벗겨진 욕망과 상류층의 옷으로 덧씌운 욕구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또 그것은 노라의 삶의 포인트를 제거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 영화가 유사한 이야기를 다룬 시어도어 드라이저의 소설 <아메리카의 비극>이나 영화 버전인 <젊은이의 양지>(1951)와 다른 점은 남자주인공이 사형과 같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위 작품들에선 먼저 가난한 여자와의 관계 중에 부자인 여자를 만나는 설정이지만 <매치포인트>는 계급 상승을 가능하게 해줄 대상과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을 거의 동시에 등장시킨다. 바로 그러한 동시성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성적 충동에 대한 욕망은 서로 경합하면서 영화에 응축된 긴장과 에너지를 더한다.

-우디 앨런은 예술·상류 계층의 문화와 날것 그대로의 욕망을 정교하게 혼합해 살인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는 텍스트의 내재적 논리를 만들어내고, 영국사회의 세습적 부의 완고함과 자비로움을 우아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에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아메리카의 비극>의 1920년대 미국이나 <젊은이의 양지>의 1950년대와는 달리 어느 정도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매치포인트>가 위의 작품들과 결정적으로 갈리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텍스트가 관객에게 주입하려는 이런 충동, 유혹과 달리 이 영화의 여성과 일하는 계층, 그리고 노인에 대한 혐오는 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아이러니의 흔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제스처이지 텍스트를 가볍게 태울 정도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통속적 인용 <달콤, 살벌한 연인>

-이 영화의 두 장면에서 나는 사실 포복절도했다. 그 하나가 영화의 마지막 즈음, 헤어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다른 사람들은 연인이 좋아하던 음악을 들으며 느낀다거나 하는데, 황대우(박용우)는 암매장된 시체가 발견되면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 나는 사실 토요일 저녁, 달콤한 무드를 가장하고 있는 연인들 틈에 끼어 멀티플렉스 복도 끝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다(처음에 들어섰을 때 둘씩 앉은 연인들이 매우 동정어린 눈길을 던졌다. 시사회에서 볼걸…). 그래서 원한 것만큼의 박장대소를 연출하지는 못했으나 모처럼만에 보는 엉뚱하고 웃기는 코미디다.

-이 영화는 거의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것에 버금가는 몬드리안 그림을 놓고도 누군지 모르고 도스토예프스키도 생판 초면인 한 여자 미나(최강희)가 대학 영문과 강사인 남자를 만나 취향 갖추기를 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 영화는 취향을 통한 계층간, 성별간 구별짓기의 풍속도이면서 또한 그러한 고급 취향의 통속화 과정이다. 대학 영문과 강사와 혈액형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유치’한 여자간의 취향의 조정 과정 말이다. 동시에 순애보적 사랑이나 그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청순명랑 타입의 여성에 대한 가벼운 해체적 시각이 있다. 이웃집 청순 명랑 처녀가 블랙 위도로 밝혀지는 과정이 흥미롭다.

-두 번째로 웃긴 장면은 미나/미자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과 해석이다. 예의 그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을 죽인다는 구절 말이다. <매치포인트>의 도스토예프스키 인용보다 통속적이고 웃기는 코드로 사용되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참조가 덜 느끼하다. 이렇게 가볍게 날이 선 영화, 또 농담이 상당히 마이너한 감성인 영화를 저예산으로 만들어 주류영화의 배급망 속으로 올려놓은 것은 앞으로도 흥미로운 벤치마킹의 사례가 될 것 같다.

06. 0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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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ule 2006-05-2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연말에 봤던 연극 <육분의 륙>에서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구절이 주인공(유지태)의 대사로 인용되더군요. 생각해 보면 니체적인 발언이기도 했지만.

승주나무 2006-05-26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치포인트는 곳곳에서 죄와벌을 원용합니다.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로쟈 2006-05-26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디 애런의 초기 영화에서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코믹하게 패러디한 적이 있습니다. <우디가 말하는 앨런>을 한번 들춰봐야겠네요...
 

재작년 11월말 모스크바 통신에 올렸던 글을 이미지 버전으로 다시 정리해서 옮겨놓는다.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러시아 TV에서 보고 적은 감상이 주된 내용이다. 해서, 지난번 정리해서 다시 올린 <사마리아> 읽기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어젯밤(21일)에 김기덕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보았다. 지난주 <사마리아>에 이은 것으로, 같은 채널(REN TV)에서는 다음주에 <해안선>을 방영한다. 이 김기덕 시리즈가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나는 한국에서도 안 보거나 못 본 영화들을 모스크바에서 보고 있다(*<봄여름가을겨울>은 2004년 러시아의 한 영화제에서 최우수 외국영화상을 수상했다. 3편의 후보작에는 그의 <빈집>도 포함돼 있었다!). 

지난해 대종상 작품상 수상작이기도 한(그러니까 김기덕은 더 이상 한국 영화계의 비주류가 아니다, 는 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최신작 <시간>을 국내 극장에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하니까 그는 '비주류'가 맞다, 아직은) <봄여름가을겨을 그리고 봄>은, 내가 보기에, 이 ‘잘나가는 김기덕’의 자기 점검용 영화, 혹은 ‘숨 고르기’용 영화이다. 하도 정신 없이 영화들을 찍어댔기 때문에, 감독 본인도 자신이 도대체 무얼 찍고 있는 건지 잘 모를 때가 있을 법하다(더불어, 내가 영화를 왜 찍는 거지?).

해서, 그가 내린 결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를 찍는 것인데, 그게 가장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가 된 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일단, 사계(四季)를 담아야 했던 이 영화는 제작기간이 무려 1년이나 된다! 그러니 이 영화는 평소 3개월이면 하나씩 해치우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잔혹한 장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그는 살인장면을 삽입할 수도 있었다). ‘잔혹하지 않은 김기덕 영화’라는 게 모순형용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기덕 영화답지 않다. 게다가 김기덕의 불교영화?(더 리얼하게는 ‘절간[절깐]영화’?) 설마?!

지난 봄에 이 영화에 대한 평을 쓴 러시아의 영화비평가 세르게이 아나슈킨에 따르면, “그런 영화를 김기덕에게서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건 ‘상식적’인 판단인데, 거기에 진실이 있다. 즉, 이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A Film by Kim Ki Duk)’가 아니라, ‘김기덕에 대한 영화(A Film on Kim Ki Duk)’이다! 오죽하면, 이 영화가 자신의 영화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김기덕 자신이 직접 출연했을까!(물론 속사정은 안성기를 캐스팅하려던 일이 불발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지만.)

그러니, 아무리 상을 받고, 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하더라도 이 영화는 김기덕의 필모그라피에서 ‘예외적’이며, (극단적으로 말해서) 제외되어도 무방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이 영화를 빼더라도 김기덕의 영화세계를 ‘구성’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봄여름가을겨울>은 김기덕의 영화세계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그의 생각, 태도, 자세, 결의 등을 아무리 나열해 봐야, 그건 컨텍스트로서, 영화 ‘이전’이며 영화 ‘바깥’일 따름이다(그러니 일급의 비평가라면, 혹은 눈치 있는 비평가라면 이 영화에 대해서 아무런 할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일부 조심스런/성급한 비평가들의 진단처럼 김기덕의 ‘변화’를 예고하는 영화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그는 <사마리아>와 <빈집> 등을 통해서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기덕 자신도 이 영화가 자신의 필모그라피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고 고집하지는 않을 것인바, <나쁜 남자>나 <해안선>에서 <봄여름가을겨울>도 ‘이행’하는 건 (영화)논리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그런 게 가능한 경우는 돈 받고 영화를 찍어주는 ‘직업’ 감독들이다). 사실, <해안선>인가는 <봄여름가을겨울>과 같은 기간에 겹쳐 찍었을 법한데, 그것이 암시해주는 바는 <봄여름가을겨울>이 역시나 그의 영화 ‘바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거듭 말해서 (김기덕이 나오는) 이 영화를 (김기덕이 나오지 않는) 다른 영화들과 연관지어서 ‘진지하게’ 이해/해석해보려는 모든 시도는 기대에 걸맞는 성과를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그럼, 김기덕은 이 영화에서 무얼 찍은 것일까? 사계의 순환을 인생의 사계에 비유하는 것은 물론 전혀 새로울 게 없는 일이다. 불교에서의 ‘업보’를 순환적인 삶의 근거논리로서 제시하는 것 또한 흔한 일이다. 그러니, 등에 돌멩이를 맨 물고기나 개구리/뱀과 허리에 맷돌을 둘러매고 ‘업보’를 씻기 위해 고행에 나선 김기덕을 교차적으로 보여준다고 해서 관객이 감동을 받는 것도,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 영화에서 모든 건 (정신분석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후적/소급적으로만 의미를 갖는다. 봄여름가을 장면이란 겨울 장면을 찍기 위한 도구이고 핑계였을 따름이다(우리는 뒤늦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젊은 날의 방황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럼, 겨울장면은 무엇이었나? 여름날에 병을 고치기 위해 물위의 절간을 찾아온 한 여자에 빠져 욕정이 이끄는 대로 스승의 곁을 떠났던 20대의 ‘기덕’(네 명의 배우가 연기한 주인공을 그냥 ‘기덕’이라고 하자. 이름이 있었던가?)은 10년이 지난 가을날 바람난 아내를 살해한 살인자가 돼 다시 물위의 절간을 찾는다(스승은 “속세가 그런 줄 몰랐더냐?”라고 반문한다). 스승은 그의 뒤를 쫓아온 형사들에게 말미를 얻어서 그가 참회의 문구들을 절간의 나무 바닥에 다 새기도록 하고, 그 일이 끝나자 그는 잡혀간다. 그리고, 겨울. 아마도 10여 년의 형기를 살고 난 40대의 기덕은 다시 절간을 찾고 스스로 소신(燒身) 봉양한 스승의 사리를 수습한다. 그리고는 교본을 발견해서는 무술을 연마한다(한국의 전통적인 ‘절간영화’에는 없는 내용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러던 차에 얼굴을 천으로 가린 한 아낙이 어린아이를 절간에 맡기러 왔다가 되돌아가던 길에 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서 죽는다. 자신의 ‘업보’를 확인한 기덕은 맷돌을 단 줄을 허리춤에 매고 불상을 손에 들고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고행을 감행한다(이 장면과 겹쳐지는 건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에서 장신구를 끌고서 폭포를 오르는 로버트 드니로인데, 한국 영화에 이와 유사한 장면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배경음악으로는 (엔리오 모리코네 대신에) 김영임의 '정선아리랑'이 깔리고.

화면과는 전혀 안 어울리는 민요이지만, '정선아리랑'은 사실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가령 <서편제>에 쓰인 '진도아리랑'과 비교해 보아도 '정선아리랑'의 정서는 사뭇 다르다. 한데, 왜 안 어울리는가? '정선아리랑'은 (자식 못 낳는) 우리 여인네들의 한(限)을 절절하게 노래하고 있는 민요인데 반해서 화면은 여인네를 죽게 한 사내/스님의 업보 씻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차라리 거기에 더 어울리는 건 '남자는 강해야 한다' 같은 <황비홍>의 주제가이다. 어차피 안 맞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면 말이다.

사실 이 영화는 감독 김기덕이 몸으로 때우는 영화이다. 맷돌을 끌고 산을 오르는 그의 ‘용맹정진’에 논리적인 해명/설명을 다는 건 부질없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가 영화를 찍어온 방식이고 앞으로 찍어갈 방식이다. 해서,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정신은 ‘불교 정신’이나 (변형된) ‘기독교 정신’ 따위가 아니라 ‘무대뽀 정신’이다. 그게 전부이다. 죽이든 밥이든 난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찍을 것입니다, 라는 결의가 거기에는 담겨 있다(그에게 영화는 ‘업보’, 혹은 ‘업보 씻기’인가?).

그건 ‘말’로 될 일이 아니어서 그는 ‘몸’으로 때운다(사실, 겨울 장면에 등장한 김기덕은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절간을 배경으로 가지고 온 이유의 하나는 대사가 필요하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지 않는가. 이 테마를 ‘현대적인’ 상황에 맞게 고안/각색해본다고 생각해보라. 적절한 대사를 쓰기도 힘들 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그게 ‘자기 자신에 대한 영화’로서 이 영화가 김기덕에게 갖는 의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우화’, 즉 알레고리이며, 이 알레고리가 김기덕이 챙긴 몫이다. 그럼 관객은? 관객은 무슨 이유로, 혹은 무슨 업보로 김기덕의 자기점검용 체력단련과 정신수양에 동참해야 하는가? 의외로 ‘소심한’ 김기덕이 이런 걸 고려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해서 (폭력 장면 대신에) 등장하는 것이 판타지적인 배경이다. (지난번에 <사마리아>를 말하면서 지적한바 있지만) 판타지와 마찬가지로 알레고리가 불가불 배제/희생할 수밖에 없는 디테일을 보상하기 위해서 그는 ‘물위의 절’이라는 가상의 회화적인 공간을 가져온다(알려진 바이지만 한국에 그런 절은 있어본 적이 없으며, ‘주상지’란 연못에 세워진 이 절은 자연보호 차원에서 현재는 철거되었거나 철거될 예정인 걸로 안다, 그리고 벌써 철거되었다). 아마도 외국관객들에게 가장 먼저 어필하는 것도 이 배경공간이 갖는 수려한 이미지일 것이다(거기에 뭔가 심오한 듯한 불교철학과 뜻은 모르지만 애절한 듯한 주제가가 덧붙여지고, 등등).

해서, <봄여름가을겨울>은 감독 자신에 대한 우화적 알맹이(=속사정)가 ‘관광상품’으로 포장된 영화이며(실제로 세트장은 한동안 관광명소 역할을 했다고), 현학적으로 말하면, 알레고리적 이그조티시즘(Allegorical Exoticism)의 영화이다(이 영화는 ‘불교’와 무관하며 ‘한국’과 무관하다). 김기덕이 알레고리를 챙겼다면, 관객이 챙기는 건 이그조티시즘이다. 그것이 이 영화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지는 ‘거래’의 내용이다. 그렇다면, 이제 더 볼 것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 한가지만 빼놓고.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끈 장면이 있는바, 그건 겨울에 한 아이를 데리고 엄마인 듯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등장한 장면이다. 이 장면의 처리에 대해서 러시아의 비평가도 궁금해 하던데, (한국인이지만) 사실 내가 그보다 더 아는 것도 없다. 아니, 관음보살의 이미지와 연결시키고 있는 아나슈킨과 비교해 본다면, 내가 더 무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식한 대로 영화를 본다. 나는 영화를 볼 때 이 여자가 나병환자여서 당연히 얼굴을 가린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아이를 절간에 맡기려 한다고).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긴 하지만, 내가 붙일 수 있는 논리적인 설명은 그것뿐이다. (아랍국가가 아닌) 한국에서 얼굴을 가리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며 예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아이를 맡기러 온 자신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렸다는 건 따라서 부족한 설명이다. 또 ‘기덕’과 무슨 관련이 있는 여인이어서 얼굴을 가렸을 거라는 한 관객의 설명도 근거가 없다. 여인은 아이를 놓고 불상 앞에서 한참을 울다가 떠나는데, 그 울음은 한스러움의 울음이다. 내 짐작에 그 한스러움은 자신이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에 갖는 한스러움이다(그는 ‘스님’에게 잘 부탁 드린다는 말조차도 하지 않는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그리고, 한국인의 억척스런 모정을 고려해본다면 그녀가 아이를 떼놓으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일 것이다. 해서, 그녀의 업젝션(abjection)은 자신을 비천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일 것인바, 그건 그녀가 몹쓸 병에 걸린 경우를 고려할 때 이해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무슨 업보 때문인지 아이를 두고 바쁜 걸음을 옮기다가 스님(기덕)이 파놓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 이어지는 마지막 봄 장면에서 그녀의 아이는 동자승 시절의 기덕을 연기했던 배우가 다시 연기하는바(인연의 사슬?), 거꾸로 되짚으면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것이 된다. 여기서 은근히 암시되는 것은 (부친살해가 아닌) ‘모친 살해’의 모티브이다(보지 않아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수취인 불명>에서도 비천한 모성, 혹은 모친 살해의 모티브가 다루어졌을 법하다).

조금 넘겨짚어서 말하자면, 김기덕 영화의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이 ‘모친 살해’(=비천한 모성)이며, 여성에 대한 그의 공격성은 그것과 연관되는 것이지 않나 싶다(이건 감독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과 견주어볼 만하지만,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에 대해서만 내가 흥미를 느낀 이유이다(이 장면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에 대해서 몇 마디 늘어놓을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여인 장면은 이 영화에 대한 ‘읽기’를 자극하는 ‘대상 a’이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절간의 세계는 여성/모성 부재의 세계가 되었는바, 그것은 스승-제자의 세계이면서 남성들만의 단성(單性)적인 세계이다. 그들의 세계에서 아이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고아’로 버려지며, 그를 거두어 키우는 건 스승(=아버지)이고, 그는 스승의 대를 이어서 또 다른 고아를 제자(=아들)로 키워낸다. 그게 그들의 업(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작년에 나온 가장 남성중심적(혹은 남근주의적) 영화를 꼽으라면 <봄여름가을겨울>을 꼽아야 할 것이다(이 영화와 <안토니아스 라인> 같은 ‘여성중심적’ 영화를 비교해 보라). 이와 비교한다면, ‘최악의 남성영화’로 잔뜩 욕을 먹은 <나쁜 남자>는 차라리 ‘심약한’ 남성주의 영화라고 해야 옳다. 그 영화에서 한기(조재현)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대생을 윤락가에 넘기면서 ‘나쁜 남자’를 자임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 욕망의 대상(‘대상 a’로서의 여성)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분열적/히스테리적 주체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가 형편이 돼서 이 여성을 숭배하며 모든 걸 갖다 바치는(백만 송이의 장미?) 행위를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이 동일한 태도의 이면에서 ‘여성주의’를 발견한다면, 그건 넌센스이다. 한 여자를 숭배하거나 학대하는 남자는 ‘동일한 남자’이다. 그래서 같은 여자와 결혼도 하고 이혼도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그의 ‘패악’은 그러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속임수이고 가면일 뿐이다. 결국 <나쁜 남자>에서 패배하는 건 여대생이 아니라 한기 자신이며, 그런 의미에서 그 영화는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이기도 하다.

여자는남자의미래다

사실 올해 나온 또 다른 ‘가련한’ 남성주의 영화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이다. 이 영화 또한 최악의 反여성주의적 영화로 꼽히는 모양인데, 왜 맨날 (담대한 남성들은 놔두고) ‘가련한 남성’들만 얻어맞는 것인지 나로선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여성 관객 일반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아니면 ‘엘리트’ 여성주의 비평가들을 이해할 수 없는 건가? 그런데, 배용준의 근육질 몸매에 환호하고, 디카프리오의 미소에 숨 넘어간다는 관객들도 (일부 비평가를 포함한) 여성 관객 일반 아닌가? 아마도 내가 여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만큼, 여자들도 남자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올해의 남성영화니 여성영화니 하는 걸 선정하는 건 그저 그들의 알리바이 정도라고 해두자(참고로, <낮은 목소리>의 여성감독 변영주가 만든 <밀애>는 전혀 ‘여성주의적’이지 않았다).

하여간에, 전혀 잔혹하지 않으면서 ‘담대한’ 남성주의 영화 <봄여름가을겨울>에서는 두 여자가 소리 없이 죽어나간다. 하나는 30대의 기덕이 죽인 아내(여름 장면에 등장했던 그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역시 그가 ‘간접적으로’ 죽이게 되는 한 여인이다. 아내의 죽음/살인은 스승이 보는 신문쪼가리의 기사를 통해서 전해질 뿐 영화 속에서는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얼굴 없는 죽음’이다). 스승은 자신이 아내를 죽일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하는 제자에게 “그런 줄 몰랐더냐?”(이건 그 자신도 젊은 날에 겪어보았다는 얘기다)라고 다그치고 죄업을 씻는 방도를 일러준다. 아내를 죽인 칼로 글자를 새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겨울 장면에서 얼굴을 가린 여인 또한 정말로 찍소리 못하고 구덩이에 빠져 죽는다(이 또한 ‘얼굴 없는 죽음’이다). 그 죄업을 씻기 위해서 기덕은 맷돌을 끌고 산을 탄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것은, 그러니까 자세하게 묘사되는 것은 이 두 남자(결국 같은 남자)의 글자 새기기와 산 타기이다. 거기에 비하면, 두 여자의 죽음은 일도 아니다! 이 어찌 담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두 번의 죄업을 씻은 기덕은 마지막 봄 장면에서 평정한 마음으로 동승(童僧)의 초상화를 그려준다. 이 장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바, 스님 기덕은 화가, 즉 예술가이고 (알레고리적으로) 영화감독이다. 모든 죄업은 그가 그러한 평정과 예술가로서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련)과정이었을 뿐이다. 여인네의 유혹/죽음은 그 한 코스에 불과했던 셈. 그리고, 이러한 자기 알레고리의 배경에 놓여 있는 것은 단성생식(單性生殖)에의 판타지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그의 업보는 스승-제자, 곧 남성-남성의 관계를 반복하기 위한 핑계거리였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스승-제자 관계가 이 영화적 세계의 본질이고 ‘진리’이다. 그것만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고정불변하는 진상(眞相)이며, (여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것은 속세의 환상(幻相)일 따름이다. 만약에 당신이 이러한 결말에서 ‘평온함’을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섬뜩한(uncanny)’ 일이다. 적어도 당신이 이러한 절간의 세계보다는 나처럼 속세를 더 사랑한다면 말이다…



P.S. 지난 11월 12일자 <이즈베스찌야>지에 실린 김기덕 인터뷰를 여기에 정리해서 옮긴다. 인터뷰한 통신원(기자)는 키릴 알료힌이다. 사전 설명에 의하면, 한국의 독학-영화감독 김기덕은 분기마다 영화를 찍어서 개인적으로 국제시장에 영화를 공급하는데, 이번 가을에 두 차례 모스크바에 올 예정이었다(한국영화제 개막식과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수상작인 <빈집> 시사회 때). 하지만, 그의 빡빡한 작업 스케줄 때문에 그의 방문은 취소되었다.(*표시를 한 건 나의 군말이다.)

빈집

이즈베스찌야: <빈집>은 2004년에 러시아에서 개봉된 당신의 네 번째 영화이다(*짐작에,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집>과 <해안선> 혹은 <나쁜 남자>인 듯하다). 당신은 영화를 무척 많이 찍는다. 어째서 그렇게 서두르는가?

김기덕: 특별한 비밀은 없다. 나는 단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작업할 따름이다. 한 영화를 끝내면 나는 곧장 다음 영화로 들어간다. 이건 샐러리맨들이 매일같이 출근해서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식으로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구상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프로젝트에 달려든다. 그게 ‘영화감독이 된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즈베스찌야: <빈집>의 주인공은 파리의 아가씨 아멜리를 닮았다. 그녀도 다른 사람들의 삶에 끼어들어서 그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고 애쓴다.

김기덕: 아직 <아멜리>를 보지 못했다. 나는 다른 영화들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오진 않는다. 영화의 거리[꺼리]들은 생활에서 얻은 것들이다. 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빈집>을 관객이 문자 그대로 이해하게 될까(*따라하게 될까) 두렵지는 않는가? 영화는 타인의 일상을 한번 맛보기 위해서 여러 집들에 잠입하는 걸로 시작한다(*나는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만 아는바, 거기에 준해서 옮겼다).

김기덕: 나는 아직 나의 주인공들을 닮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한 미국 여자가 빈집에 들어가서는 편안하게 살더라는 얘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그녀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녀가 <빈집>을 보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은 2년간 파리에 체류한 적이 있다. 유럽 영화, 혹은 프랑스 영화가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끼치진 않았는가?

김기덕: 카메라를 잡기 전에 내가 본 프랑스 영화는 다해서 세 편이다. 때문에, 내가 유럽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내가 가진 생각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즈베스찌야: 비평가들은 해마다 당신이 최고작을 찍었다고 말하곤 한다. 처음엔 <나쁜 남자>에 대해서 그런 평을 쓰더니, 그 다음엔 <봄여름…>에 대해서, 지금은 <빈집>에 대해서 그렇다고들 한다. 당신 생각에는 어느 작품이 최고작인가?

영화-악어 (1996)의 장면들

김기덕: 나의 영화들은 아주 다양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서로 닮았다. 그들은 전부 내적으로는 서로 통한다. 나에게 특별한 선호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악어>를 지목하겠다(김기덕의 데뷔작으로 익사자들의 시신을 찾아주고서 유족들에게 돈을 받아 챙기는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 이즈베스찌야).(*이런 주석으로 봐서 <악어>는 아직 러시아에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특이하게도.)

이즈베스찌야: 당신의 성공에 대한 한국에서의 반응은 어떤가?

김기덕: 나는 물론 해외에서는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내 영화를 보지 않는다. 설사 본다고들 하더라도 너무도 이해들을 못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김기덕의 영화들은 한국사회의 추한 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아래는 러시아언론과의 인터뷰 사진.



이즈베스찌야: 러시아에는 많은 한국영화들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당신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블록버스터들이다(*얼마 전에 <쉬리>가 또 TV에서 방영됐다. 1년에 최소한 네댓 번은 나오는 모양이다). 한국 영화가 헐리우드를 모방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몇몇 감독들이 실제로 서양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한국 관객은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하다. 그래서 흥행작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몇몇 감독들은) 미국 영화를 모방한다(*사실 강우석이나 강제규 감독의 영화보다는 김기덕의 영화가 흥미롭다).

이즈베스찌야: 예전에 당신은 세계화 반대론자였다. 지금 당신은 세계시민이 되어 각종 영화제들을 날아다니면서 자신의 영화를 판다. (세계화 반대론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은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김기덕: 그렇다. 나는 예전부터 세계화에 반대해왔다. 모든 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세계문화는 발전할 수 있고 다양해질 수 있다(*참고로, <복수는 나의 힘>에서 보듯이 당신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냐는 다른 인터뷰에서의 질문에 박찬욱은 어떤 면들에 대해서 그렇다고 답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에 대한 두 감독의 견해는 ‘상식적’이다).



이즈베스찌야: 당신이 러시아에서 뭔가를 찍을 거라고들 말한다. 소문일 뿐인가?

김기덕: 나는 자주 유럽에서의 작업에 대해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장애물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저예산으로 작업한다. 만약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러시아에서도 한번 찍어보고 싶다. 하지만, 당장의 구체적인 계획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현재의 지명도라면 그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는 영화 <활>(2005)의 러시아판 포스터.



P.S.2. 거기까지이다. 기사로는 3단짜리 인터뷰이지만, 사진이 실려 있기 때문에 분량은 소략하다. 오늘 산 책의 하나는 <‘자신들’ 속의 ‘타자들’: 세계화와 현대 영화에서의 문화간 융합>이란 제목의 신간 영화비평서인데(허름한 모양새에 비해서는 비싼 책이다. 116쪽에 6,000원쯤이니까), 6편의 평론 중에서 제일 첫머리에 실린 것은 세르게이 아나슈킨의 김기덕론이다. 제목은 '김기덕: 추방자들의 복수'.

‘추방자’(=추방된 자)란 뜻의 러시아어 ‘이즈고이’는 ‘추방자’ 혹은 ‘천민’을 뜻하는 영어 ‘파리아(pariah)’의 번역어로도 사용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이즈고이’란 말은 ‘호모 사체르’(아감벤)에 대응하는 말이면서 ‘서얼’(고종석)이라 옮겨질 수도 있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낙오자란 의미에서) ‘떨거지’라고 옮겨질 수도 있다. 그러한 ‘계급적인’ 배경을 암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견지할 때, 김기덕의 영화는 <악어>나 <수취인 불명>에서 볼 수 있듯이 ‘문제작’이 된다(<나쁜 남자>도 부분적으론 그런 함의를 갖는다).

하지만,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완전히 제거/거세돼 있는 것은 그러한 사회적/계급적 배경이다(해서, 남근주의적인 이 영화에서의 ‘남근’은 말 그대로 ‘결여의 기표’이자 순수한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허울뿐인 ‘문간’처럼). 그런 의미에서도 이 영화는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이며, ‘문제작’이 되기엔 많이 모자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주류적 코드를 상징하는 ‘대종상’이 주어진 것은 역설적이지만 순전히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대종상은 김기덕의 ‘뛰어난’ 영화나 ‘문제적인’ 영화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더불어, 대종상은 ‘관광/홍보 영화’를 편애한다).

하지만, 그런 ‘추방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최신작인 <빈집>은 그가 자신의 ‘본령’으로 되돌아온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사가 좀 부자연스럽다는 평(김기덕 영화를 좋아하며 모두 본 룸메이트의 평이다)에도 불구하고 반갑다(*이 영화를 나중에 본 감상은 따로 올려놓은 바 있다) . 그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나는 그가 미학이 아닌 사회학/정치학의 자리에 좀더 오래 머물러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죄다 반면교사(反面敎師)거리들이지만, 한국 영화계에는 미학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추락한 감독들이 여럿 된다. 화엄경을 들먹이다가 고꾸라진 감독을 비롯해서. 거꾸로 ‘거장’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것이나 돈 되는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걸 오래 붙들고 늘어져야 한다. 홍상수처럼 속물적인 걸 내내 붙들고 있거나. 한편으로, 똑같이 판타지를 다루지만, 김기덕을 한참 뛰어넘는 재능을 가진 감독으로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이 있지만(그는 김기덕과 달리 디테일에 강하다), 그는 김기덕만큼 다작(多作)이 아니기에 그의 영화를 기다리다가는 목이 빠지겠다. 그러니 김기덕식의 다작에도 장점은 있는 것이다.

06. 0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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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1월 중순에 '사마리아에 대하여'란 제목으로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다. 물론 러시아 TV에서 방영된 <사마리아>를 보고 느낀 소감을 주로 적은 것이었다. 당시엔 잡담들까지 잔뜩 늘어놓았었는데, 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만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기로 한다.    

 

 

 

 

러시아에서 뤽 베송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감독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럽 영화의 ‘거장’으로 확실하게 대우 받고 있는 사람은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이다. <도그빌>의 제작노트가 올해 처음 나온 영화비평총서의 하나로 <독일의 가을>을 찍은 독일 감독 클루게의 책과 함께 지난 여름에 나오기도 했고, STS 채널에서는 지난주까지 ‘봉까르바이’에 이어서 이번주부터는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들을 방영한다. 거꾸로 봉까르바이(왕가위)는 현재 홍콩영화, 혹은 중국어권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 기타노 다케시이고,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은 김기덕이다.

나는 김기덕의 최신작인 <빈집>은 아직 보지 못했고, 그 외에도 몇 편을 보지 않았지만(내가 본 건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나쁜 남자> 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직 보지 않은 건 <수취인 불명>,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등이다, 는 건 그때 얘기이고, 나는 거명된 영화들을 모두 보았다) 일요일 밤에 본 <사마리아>는 일종의 ‘누빔점’으로서, 그의 영화들을 소급적으로 해석하도록 자극하는 영화였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판타지’가 아닌 ‘현실’로 마무리되는 것과 연관이 있을 듯하다. 국내외의 과대/과소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사람의 ‘영화작가’인 것만은 분명하며, 따라서 나의 주된/한정된 관심은 그의 영화 ‘텍스트들’을 구성하고 있는 근원적인 판타지, 혹은 트라우마(외상)란 무엇일까에 쏠린다.

자신의 판타지를 영화적 재료로 삼는다는 점에서 그는 우리시대의 또 다른 ‘영화작가’ 홍상수와 구별된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홍상수의 영화는 철저하게 판타지를 부정/거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영화는 김기덕의 영화와는 대척관계에 놓여 있다. 그건 영화적 디테일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에서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홍상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현실의 디테일(혹은 그가 ‘표면’이라고 부르는 것)이지만, 김기덕만큼 디테일을 과소평가하는 감독도 드물다(그 점이 나로 하여금 그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영화들을 저예산으로, 속성으로 찍을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많은 예산과 많은 시간이 필요없는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니까 김기덕은 블록버스터나 ‘세밀한’ 영화를 찍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기본적으로 판타지란 디테일과 상호배제적이다. 우리가 꿈(=판타지)을 꿀 때 사소한 디테일들에 주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기서는 다만, 몇 가지 상징만이 중요하게 사용될 따름이며, 그것들의 의미작용만이 관심거리가 된다. 그러니까 플롯과 몇 가지 상징, 그것이 김기덕의 판타지를 구성하는 재료의 전부이다. 11일회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사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조교제를 다룬 영화라고는 하지만, 이 영화에는 ‘원조교제’의 디테일이 다 생략돼 있다. ‘더럽다’는 대사는 자주 나오지만, 정작 더러운 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왜인가? 그런 디테일은 감독의 판타지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기덕은 언제나 그렇지만, 판타지를 구하기 위해 디테일을 희생한다. 대신에 몇 가지 자극적인 상징(이 상징의 가시적 등가물은 ‘피’이다)을 늘어놓음으로써 그러한 ‘희생’을 보상/은폐하고자 한다. 즉, 그의 영화에서 소위 과격한 장면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한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이다(여자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카바하기 위해 화려한 액세서리들로 치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희생된 디테일과 대체된 상징들 중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나는 주로 전자의 편에 서 있지만(나는 디테일을 편애한다, 해서 영화에서의 판타지나 알레고리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후자의 자리에서 <사마리아>를 읽어보도록 하겠다. 러시아어로 더빙된 걸 봤기 때문에, 디테일한 대사들은 놓쳤지만, 사실 그런 디테일 정도는 김기덕 자신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쪽으로는 대범한 사람이니까(그는 해병대 출신이 아닌가?!).



먼저, 줄거리. 여진과 재영이라는 두 여고생이 있다. 여진은 망을 보고 재영은 몸을 판다(걔네들 말로 ‘발랑 까진 것들’이다). 소위 원조교제인데, 명분은 유럽여행을 가기 위한 것이란다. 그러다가 재영은 단속 나온 경찰들을 피하려고 여관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고(1부), 여진은 그런 재영을 ‘위로’하기 위해 유업(遺業)을 이어서 다시 몸을 판다. 아니, 이번엔 아저씨들을 ‘산다.’ 돈을 지불/환불해주는 건 여진이니까. 그런데, 그런 행각을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가 뒤쫓게 되고, 그는 딸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에게 복수를 하는바 끝내는 살인까지 하게 된다(2부). 아버지는 여진을 데리고 죽은 아내/엄마의 산소에 갔다가 오는 길에 여진에게 운전을 가르친다. 그리고 아직 소나타를 서툴게 모는 여진을 홀로 남겨놓은 채 그는 동료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호송된다(3부). 이 1, 2, 3부의 타이틀은 각각 ‘바수밀다’ ‘사마리아’ ‘소나타’이다.



그럼, <사마리아>는 “딸의 원조교제를 목격한 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를 다룬 영화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인가? 표면적인 플롯만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영화는 너무 싱겁다.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답지도 않다(그런 복수라면, 오히려 박찬욱에게 더 어울리는 테마 아닌가?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 말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표면적인 줄거리를 좀더 세심하게/삐딱하게 읽는 것이다. 즉, (1)여진과 재영의 ‘원조교제’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2)‘딸(여진)과 아버지’는 어떤 관계인가? (3)‘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하는 것들이 다시 해명되어야 할 물음들이다.

영화는 재영의 바수밀다 얘기로 시작된다. 인도의 창녀인데, 같이 잔 남자들은 모두 독실한 불교신자가 됐다나 어쨌다나. 그러니까 바수밀다는 기독교의 ‘성녀’인 셈이다. 창녀이면서 성녀(혹은 보살, 아님 부처? 불교에서는 정확하게 뭐라고 이르는지 모르겠다). 사실, 김기덕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들은 다 창녀이거나 성녀이며, 그건 그의 기본적인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의 판타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판타지이기도 하다. 남성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텅 빈)‘실재’를 가질 수 없는데, 그는 언제나 못 미치거나 넘어서기 때문이다.

라캉은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비유로 든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는 있지만, 정확히 거북이에 이르지는 못한다. 즉, 남성은 언제나 여성을 과소평가하거나(창녀) 과대평가한다(성녀). 그러니까, 남성의 판타지 속에서 창녀와 성녀는 서로의 이면일 뿐이며, 대립적이지 않다. 그래서, “바수밀다냐 사마리아냐”가 아니라, “바수밀다나 사마리아나”이다. <사마리아>의 1, 2부는 그래서 잉여적이면서 불가피한 반복이며, 판타지의 경제 안에 있다. 재영은 아저씨들한테 돈을 받고 섹스를 했지만, 여진은 돈을 (되갚아)주면서 섹스를 한다. 둘을 합산하면 등가교환일 거 같지만, 그렇지 않다. 등가교환으로서의 “성관계란 없다.”(킨제이 버전으로 말하자면, “동시 오르가즘이란 없다.”) 언제나 한쪽이 더 주거나 덜 주는 관계이다.



해서 원조교제라는 한국사회의 이슈 혹은 치부는 <사마리아>의 소재일 뿐이고, 이 영화를 끌고 가는 것은 바수밀다/사마리아라는 보편적 (여성)신화, 혹은 판타지이다. 가장 단순한 거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여진의 ‘아빠’이다(당연한 일이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는 여성이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재영이가 창문에서 뛰어내려 죽고, 여진이 친구를 대신에서 원조교제에 나선다는 설정은 이 문제적인 아빠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한, 무대화/장면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트라우마란 무엇인가? 그건 근친상간에의 판타지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딸 여진은 딸이면서도 동시에 딸 이상의 존재였는바, 아빠의 연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아빠’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쓴 건데, 두 부녀가 사는 집안에 부재하는 것은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이다. 이때 아버지는 ‘부권적 기능’의 대행자로서의 ‘아버지의-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들 부녀는 부재하는 엄마/아내의 역할을 번갈아 가면서 한다. 여진에게 아빠는 아빠이면서 엄마이고, 아빠에게 여진은 딸이면서 아내이다. 먼저, 아빠이면서 엄마. 부녀가 나오는 첫 장면에서 아빠는 ‘앞치마’를 입고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는다. 처음에 이 장면을 보고서 ‘어수룩한 김기덕이 또 한 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는데(40대 중반의 강력반 형사인 아빠가 앞치마를 입고 밥을 차리고 또 그걸 벗지도 않고 밥을 먹는다는 건 비현실적인 설정 아닌가?), 영화를 다 보고 뒤집어서 생각하니까 ‘의도적인’ 설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빠가 두른 ‘앞치마’는 그가 집안에서 ‘엄마’를 대신하고 있다는 기호인 셈.

그리고 딸이면서 아내. 역시 같은 첫 장면에서 아침을 차린 아빠는 여진을 깨우기 위해서 헤드폰을 머리에 끼워주고 달콤한 음악을 들려준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장면을 본다면, 이건 남편이 연인으로서의 아내에게 하는 애정표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여진은 아빠에게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가정에 부재하는 것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당연하게도, 제자리에 있지 않았던 아버지와 딸이 각각 아버지와 딸로서의 제자리를 찾으면서 끝난다. 그러한 자리 찾기에 대응하는 것이 '판타지에서 현실로'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렇다면 이 영화의 핵심인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누구를 향한 것인가? 이 영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대목은 여진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빠’가 딸을 바로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미행하면서, 같이 잔 ‘아저씨들’한테만 분노를 표출한다는 점이다. 그는 왜 딸을 제지하지 않는가? 딸이 충격을 받을까봐서? 그런데, 여진의 원조교제는 죽은 친구를 위로한다는 명목의 ‘자발적인’ 행위이며, ‘애꿎은’ 아저씨들 또한 여진의 연락을 받고서 그녀의 바수밀다 판타지(=재영 판타지) 혹은 바수밀다행, 즉 ‘보살행’에 동원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제정신이 좀 아닌) 여진이 아버지에게 발각된다고 해서 ‘충격’을 받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런 사정을 아빠가 몰랐다고 해도, 딸이 수첩에 적힌 아저씨들 모두와 잠자리를 같이 할 때까지 뒤를 쫓아다니는 게 딸을 아끼는 아빠의 ‘상식적인’ 행동인가?(어디까지 가나 보자?!)

아마도 보다 적절한 설명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그에게서 딸이자 연인으로서의 여진에 대한 욕망이 금지된 욕망이자 판타지의 대상이었다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펼쳐진 것은 그 금지된 욕망이 너무도 쉽게 구현된 현실이었다. 그가 당혹과 매혹을 동시에 느낄 법한 것은 판타지와 현실의 그러한 일치, 혹은 근접조우이다. 그는 여진과 원조교제를 한 아저씨들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판타지를 대리적으로 충족시킴과 동시에 그러한 아저씨들(혹은 자기 자신)을 징벌함으로써 자신에게 새겨진 ‘법’(상징적 질서)의 대행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게 아빠의 두 얼굴이다. 자상하면서도 아주 잔혹한.



김기덕은 한 인터뷰에서 이 ‘아빠’ 또한 다른 딸들에 대해서는 아저씨들이 여진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시선을 던졌을 거리고 얘기했는데(내 기억이 맞다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분노와 복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즉, 금지된 욕망, 금지된 향락에 대한 자기징벌인 셈. 그가 딸에 대한 이중적인 욕망의 주체로부터 탈피하게 되는 것은 이 욕망/향락의 주체를 제거함으로써이다. 화장실에서 그가 죽인 아저씨는 자신의 분신, 곧 자기 자신이었던 셈. 더불어 그를 대신해서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한 또 다른 아버지/아저씨를 상기해보자. 요컨대, 그가 ‘아버지’로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것은, 즉 ‘아빠’에서 ‘아버지’로 이행하게 되는 것은 이 두 죽음을 대가로 지불함으로써이다. 모든 판타지의 끝은 죽음인 것(혹은 판타지에 의해서 유예되는 것이 죽음인지도 모른다). 거기까지가 2부이다.

3부 소나타는 ‘현실’의 장면이다. 부녀가 먼저 찾는 것은 아내/엄마의 무덤이다. 그들이 서로 대행해왔던 엄마/아내는 죽었다는 걸 다시 확인하는 것. 그리고는 아빠는 싫다는 딸에게 운전을 가르치려고 한다(이게 중요하다!). 이제껏 그는 딸에게 무얼 강요하거나 금지해본 적이 없을 듯한데(즉, 그는 ‘부권적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해서 여진이 역할모델로 찾은 것이 친구인 재영이다), 이번만큼은 고집대로 밀어붙인다. 이러한 강요에 뒤이어서야 강가에 세워둔 차에서 잠깐 잠이 든 여진은 아버지가 자신을 목 졸라 죽이고 매장하는 꿈을 꾼다(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 설정이다). 즉, 그녀에겐 더 이상 다정다감한 ‘아빠’가 아닌 (억압적인) ‘아버지’가 들어서게 되는 것이고, 더불어 그녀에겐 ‘죄의식’이란 게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여진은 아빠의 연인(=판타지)이 아닌 딸(=현실)의 자리로 되돌아간다. 아빠가 헤드폰을 끼워주던 ‘연인’으로서의 여진은 죽은 것이다.



한편으로 이 여진의 꿈은 2부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죽게 하거나 죽임으로써 판타지로서 벗어나게 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도 읽힌다. 즉, 이 꿈의 주체는 아버지여도 무방하다. 그는 ‘연인’으로서의 딸을 죽임으로써 ‘딸’로서의 딸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 딸은 어떤 딸인가? 바수밀다나 사마리아 같은 신화적 판타지에 둘러싸인 여성이 아니라, ‘초급 운전자’로서 자기 앞가림도 아직 제대로 잘 못하는 10대 소녀이고, 적당히 어수룩하면서 폼잡으며 멋부리는 고딩이다. 한마디로 (약간 귀여운) 멍텅구리(nothing)이다.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법’이 개입돼 있다. 한 가지는 사회의 실정법으로서 살인자인 아버지를 잡아가는 법이고, 다른 한가지는 ‘운전하는 법’으로 가시화된 ‘아버지의-이름’이란 법이다(두 법은 같은 방향의 길을 간다). 이러한 법의 이름으로 아버지와 딸은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두 사람을 잠식하고 있던 판타지(상상계)로부터 벗어남으로써이다.



나는 영화 <사마리아>를 얘기하면서, ‘바수밀다’나 ‘사마리아’에 대해 늘어놓는 것은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감독 자신이 그런 걸 믿는다면, 설마 싶지만, 그건 자신의 속임수에 그 자신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건, 재영이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며 돈을 모은다는 말을 ‘진담’으로 믿는 수준의 속임수이며 핑계이다. ‘유럽’에 무엇이 있는가?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건 유럽이라는 판타지이다. 그리고 그런 판타지를 차폐막 삼아서 가리고자 했던 건 아마도 죽음충동일 것이다. 아마도 재영은 언제라도 죽을 준비가 돼 있었을 것이다(그것이 이 소녀가 ‘더러운’ 아저씨들과의 관계에서 밝은 면만 보는 이유이리라). 그러니까 단속에 쫓겼다는 말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여진의 원조교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영의 죽음은 이 소녀에게 자신도 금지된 쾌락, 보살행에 나설 핑계가 되어 주었다. 사실, 그러한 비행(非行)이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제지해 줄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이다(수렁에서 건진 내 딸!). 그러니까 여진이 기대하는 대타자의 시선은 죽은 재영의 시선이 아니라 (엄마가 아닌)‘아버지’의 시선이다. 이 영화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아버지의 시선’에서부터 시작되며, 이 영화는 그 시선의 욕망과 윤리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부녀의 자기 자리 찾기에 대한 것이다...

06. 0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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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ndhikr 2006-05-24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죽이네요. 최곱니다!

로쟈 2006-05-24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실제로 영화에서 사람 죽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죠.^^

외로운 발바닥 2006-05-24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이블 방송을 통해 중간중간 보아서 거의 다 보긴 했는데, 그냥 원조교제에 관한 이상한 영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심오한 뜻이 있었다니 놀랍네요. 역시 무엇이든 아는만큼 보고 즐길 수 있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

로쟈 2006-05-2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오한 뜻'까지는 아니고, 그냥 '의미가 없지 않은' 정도입니다. 뭔가를 말하거나 쓰도록 자극한다는 의미에서 '문제적인' 영화일 수도 있구요...

kleinsusun 2006-08-2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신문에서 김기덕 기사를 보고, 김기덕에 대한 다른 기사들을 찾아 보다 로쟈님의 글을 보게 되었어요. <사마리아>를 보고 뭔가 위악적이다.....라고 느끼면서도 그게 뭔지를 알지 못했는데, 로쟈님의 글을 읽으니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의 정체를 알 것 같아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p.s) 연합뉴스 기자에게 보냈다는 김기덕의 e-mail은 아무리 봐도.... ㅠㅠ

로쟈 2006-08-22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기덕 감독은 그 자신이 본래 자학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듭니다. 그게 창작의 에너지이기도 하구요. 그의 영화들이 모두 쓰레기이면 쓰레기만도 못한 영화들이 너무 많은 것이지요...
 

 

 

 

 

리안 감독의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을 비디오로 빌려다 보고 오늘 반납했다. 지난주에 빌렸으니까 며칠 연체했다. 그건 내가 풀타임으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띄엄띄엄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만났던 것처럼 나는 영화를 띄엄띄엄 며칠에 걸쳐서 보았다. 그건, 영화속 에니스의 대사처럼, 내가 마음놓고 영화를 볼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해서, 나는 카우보이처럼 건성건성으로 영화를 보았다. 영화의 디테일들을 꼼꼼하게 챙기는 건 다음 기회로 넘기면서).

역시나 영화는 대형 스크린으로 보았어야 했다는 뒤늦은 감상과 함께 내게 남겨진 건 (아마도) 로키 산맥의 아름다운 풍광과 20년간 서로를 그리워한 두 남자의 과묵하고 절제된 감정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건 그러한 절제에 부합하지 않는 듯하여 나는 영화를 본 후에 찾아본 몇 가지 리뷰들 가운데 한 편 정도를 옮겨오는 데 만족하기로 한다.  

미국의 영화평론가 짐 호버만은 "몽롱하게 펼쳐지는 오프닝 장면에서 궁극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리안은 이야기를 범우주적인 로맨스로 만들어낸다. 하긴 <타이타닉> 이후 할리우드영화 가운데 <브로크백 마운틴>이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라고 쓰는데, '가장 정통적인 사랑 이야기'라는 평이 정곡을 찌른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편으론 바로 그런 점이 내겐 좀 불만스럽게 느껴졌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고작 사랑 이야기'인가, 라는 푸념을 모두 떨쳐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성애이든 동성애이든 마찬가지이다(나는 <타이타닉>을 아직도 보지 않았다).

몇 개 읽어보지 않은 영화평들 가운데, 여기에 옮겨놓는 것은 씨네21(06. 03. 15)에 게재됐던 김소영 교수의 '가족을 지키려는 카우보이의 다짐, <브로크백 마운틴>'이다(이 칼럼을 고른 건 '고작 사랑 이야기' 범주를 약간은 벗어난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하고 있어서이다).

-1963년 여름 그들은 양치기로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간다.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길렌홀)이다. 8월에도 산은 춥기만 하고, 먹을 것은 콩 통조림뿐이지만, 돌보아야 할 양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양치기인 이들은 피 끓는 젊은 시절을 보내는 중인지라 양치는 일보다 다른 데 관심이 많다. 과묵하다기보다는 말을 요령있게 못하는 에니스와 촉촉하고 정감어린 시선을 가진 잭은 양을 잡아먹어볼까 하는 궁리도 나누고 그러다 사냥을 해(여전히 큰 동물이 총을 맞고 비틀거리는 것을 보는 것은 괴로운 영화 관람이나) 상당한 양의 육포를 말리기도 한다. 와중에 에니스는 성장기 자신의 가족사의 고통을 잭에게 털어놓는다.

-그러다 게이 카우보이 무비로 알려진 것처럼 둘은 섹스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날 이들의 허심탄회한 섹스 후일담은 모두 난 원래 퀴어가 아니거든! 이다. 그렇게 육체의 고백과는 다른 언어적 고백을 털어놓고 나서도 이들은 남자친구로서의 가까움만이 아니라 게이로서의 성적 친밀성을 나눈다. 그 뒤로도 20년간이나. 와중에 하늘 아래 낮고 융성하게 깔린 와이오밍(실제로는 캐나다 로키)의 흰 구름과 푸른 산, 녹색 풀 그리고 은회색의 양떼들은 미니멀한 그러나 존재적 무게감을 가지고 프레임을 채울 듯이 비운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프레임 안의 프레임을 만들곤 하는 촬영감독 로드리고 프리에토는 사랑 때문에 어떤 비극성에 갇혀버리게 되는 인물을 숏의 프레임 안에서 다시 건축물로 구성된 프레임으로 가두고는 그 뒤쪽으로 구름이 흐르게 한다.

-에니스는 같은 성, 동성간의 사랑 때문에 사회적 터부가 만들어놓은 운명에 갇히나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생의 다른 흐름을 느끼고 타게 되는 인물이다. 에니스가 산에서 내려와 잭과 헤어진 뒤 길을 걸어가다 배를 움켜쥐고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양쪽으로 기둥이 막아서 있고, 프레임은 다시 협소하게 재프레이밍한다. 이때 한 남자가 다가와 시선을 보내자, 에니스가 뭘 보냐며 소리를 지른다. 프레이밍에 갇힌 사회화된 운명의 잔혹성이 의미화되는 이미지다. 동시에 주저앉은 에니스의 머리 위로 낮게 깔려 있는 저 들판의 구름 그리고 바람에 심하게 흔들리는 기울어진 나무는, 그럼에도 어떤 움직이는 아름다움을 내포한 관계를 선명하게 예시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산에서 막 내려온 에니스가 두려워하는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프레임 안에 각인된다. 징후적이고 예시적이며 여러 감각을 건드리는 완벽에 가까운 장면이다.

-이 장면과 대위점을 이루는 것이 마지막 숏이다. 자신의 딸(아내의 이름을 따라 알마 주니어다)이 결혼을 알리고 다녀간 뒤 에니스는 알마 주니어가 블루진 재킷을 두고 갔음을 발견한다. 건네주려고 하나 딸은 빌려 타고온 남자친구의 차를 타고 떠나가버린 뒤다. 에니스는 옷장을 열어 딸의 옷을 넣으면서 자신과 잭의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담은 블루진과 셔츠 그리고 브로크백의 이미지가 담긴 엽서를 본다. 그리고 청재킷의 단추를 잠그고, 예의 그 말을 뱉는다기보다는 삼켜버리는 어투로 “내가 맹세한 것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그가 옷장을 급히 닫기 때문에 마치 갑자기 브로크백 마운틴 엽서쪽으로 줌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문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착시 효과다. 옷장 문이 닫히고 난 뒤 창문의 프레임 밖으로 밭이 보인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 풀들이 흔들리고 있다. 전반, 흘러가는 구름에 대한 제한된 응답이다.

-영화는 대부분 워낙 미세하게 의미를 만들고, 그것을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에 굳이 구구하게 설명을 붙이자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에니스의 옷장 속에 보관되는 세벌의 옷, 잭, 딸 주니어 그리고 자신의 옷이 이 영화에서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의미의 친족관계를 이루는 연쇄들이다. 그리고 이 연쇄가 때로는 족쇄가 되고 혹은 자유와 사랑, 웃음이 되어 이들의 생애에 굴곡과 흠집을 만들어낸다. 에니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잭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딸들에 대한 책임감이다.

-바로 이 분열된 사랑과 책임감이 잭과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상처내긴 하지만 영화의 초반 에니스에 의해 그의 성장기가 이야기됨으로써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잭이 알마 주니어와 이야기하는 순간만은 그의 언어가 그나마 부분적이나마 소통적 언어로 기능한다. 에니스는 아내 알마에게만 아니라 이혼 뒤 잠시 상냥한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팻시에게도 말이전혀 안 통하는 고집불통처럼 군다. 특히 이미 딸 둘을 둔 뒤라 아내 알마가 조심하자고 잠자리에서 말하는데도, 내 아이를 갖기 싫으면 떠나버리라고 말하는 장면은 말이 아니라 폭언이다. 또 참고 참던 알마가 이혼한 뒤 에니스에게 낚시하러 며칠씩 외출하고서도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송어 한 마리 들고 온 적이 없다며 ‘퀴어 케이스’를 추궁하자, 자신과 잭의 관계를 모르면서 떠들지 말라고 주먹질 일보직전이다.

-착하기 그지없는 웨이트리스 팻시가 울면서 “에니스 델 마, 난 정말 당신을 이해 못해!”라고 털어놓자 “괜찮아. 뭐”라고 말을 흘리는 장면은 팻시의 반응 숏이 암시하는 것처럼 ‘차라리 목석도 너보다는 나을 거야’(실제 대사는 다르다)다. 영화에서는 잭이 좀더 분명한 동성애 커플 관계를 요구하는 것 같으나, 결혼뿐만 아니라 여자와의 이성애 관계가 불가능한 사람은 에니스다. 그러한 에니스를 사로잡고 있는 아버지의 교훈은 절대 동성애 커플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9살인 에니스의 손을 잡고 가 황망하게 버려져 있는 게이의 주검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그 장면은 플래시백으로 급격하게 처리된다. 또 잭이 어떻게 죽었는가 하는 경과를 잭의 아내 로린에게 들으면서 에니스는 로린의 교통사고라는 설명과는 달리 잭이 남자들에게 맞아 죽는 끔찍한 린치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미묘한 톤에 견주어서 생각해보면 이 플래시백이나 자의적 구성으로 보이는 판타즘 장면은 과격하고 충격적이다. 이와 비견되는 것이 영화의 편집 방식이다. 역시 두번의 파격적 몽타주가 나온다. 첫 번째는 에니스가 알마에게 애널 섹스를 시도하고 알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 뒤 잭이 소를 타고 로데오를 하다가 떨어지는 장면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 연결은 자명하긴 하지만 너무 자명하기 때문에 영화의 전반부에 흐르는 수려한 과묵함이라는 스타일과 세팅 속에서 강한 성적 충격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에니스의 이혼 소식을 듣고 이후 함께 살 것이라는 기대로 열몇 시간을 차를 몰아 달려온 잭을 에니스가 딸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돌려보내고 나서 일어난다. 잭은 멕시코로 가 성매매 거리에서 게이를 발견하고, 함께 골목으로 사라진다. 바로 거기에 연이어 나오는 장면이 잭 가족이 함께 먹을 홀리데이용 칠면조가 서빙되는 것이다. 앞서 부부간의 애널 섹스와 퀴어 로데오의 연쇄 그리고 게이간의 성매매와 가족 파티용 칠면조의 연결, 잭이 당한 교통사고를 게이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 범죄, 린치로 치환시키는 판타즘 장면들은 스타일적으로는 과묵한 이 영화의 깊은 성적 불안과 한 인간과 그 주변을 비극에 이르게 하는 소란한 오인과 오판을 드러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위의 부분들을 영화에서 다소 예외적인 장면으로 장치화해 그 충격들을 일정하게 거둬들이고 있다. 개방적인 게이 커플 관계, 반려의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잭보다 그 선택을 끝까지 거부하는 에니스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자신의 동성 파트너가 있으나, 딸들의 양육비를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 적어도 큰딸이 결혼할 때까지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아버지 에니스의 모습은 (게이지만) 그나마 책임감있는 미국 서부 카우보이의 모습으로 비쳐질 수 있다.

-이 영화는 커플로, 반려로 살 수 없어 불행했던 게이 연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이 더이상 부서지지 않도록 애쓰는 영화이기도 하다.(*사랑 이야기'에만 주목한 평자들이 주의하지 않는 대목이다. 그래서 이 칼럼을 옮겨온 것이기도 하고.) 딸 알마 주니어가 아빠와 함께 살겠다고 하자, 에니스는 엄마와의 가족관계를 지키라며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 영화는 물론 관계의 비지속성에 관한 비극적 이야기지만, 또 망가진 것을 다듬어 어떻게 생존시킬 것인가에 대한 (일부 해체되었으나 여전한) 가족드라마이기도 하다. 가족과 관련해선 리안의 전작 <결혼 피로연>과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크리스 베리가 한국영화 <내일로 흐르는 강>과 미국 게이영화들의 비교를 통해 지적했듯이, 동성애를 다루는 미국영화들이 너무 일찍 가족이 야기시키는 문제를 버렸다면, 리안은 버리고 떠나간 부분을 다시 정성스레 들여다본다. 그러나 그 시야가 향하는 곳이 이성애 부부와 아이들로 이루어진 가족을 이상적 모델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고루하지는 않다.

-끝으로 나는 이 영화가 이런저런 문제들에 사려깊고 책임감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으나 정감이나 열정 그리고 연륜은 좀 떨어지는 약간의 어중간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절제된 형식미의 이면이 이런 어중간함이 아닌가 싶다.)  배우로서의 에니스는 앞서 말했던 웨이트리스 팻시와 춤을 추면서 두손을 호주머니에 어중간하게 넣고 몸동작을 굼뜨고 어색하게 할 때 가능성이 많은 배우처럼 보인다. 그러나 카우보이와 상처받은 게이 역할을 잘 오가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문제는 영화 내내 수염을 기르건 약간의 주름을 그려넣건 간에 나이가 전혀 들어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10대 후반에서 39살까지의 나이 먹음의 낌새가 별로 느껴지지 않으면서 세월과 함께 올 법한 체념과 지혜도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은 나이 먹지 않고 계속 청춘 게이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이 브로크백 마운틴이 준 선물일까? 아니면 게이 하위문화로의 호소일까?

06. 0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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