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타이유를 검색하다가 한동안 잊어먹고 있던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 작년 가을에 개봉됐던 영화 <루시아>(2001)인데(원제는 'Sex & Lucia'), 스페인 영화이고 감독은 홀리오 메뎀, 주연 여배우가 파즈 베가이다. 비디오 대여점이라기보다는 만화대여점이라고 해야 할 동네 '영화마을'에 이런 류의 영화가 들어올 턱이 없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영화를 볼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DVD는 좀 부담스런 가격이다), 기억을 위해서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주간한국(2005. 09. 07)에 실렸던 '탐욕적 에로티시즘에 빠진 그들'이 기사의 제목이고, 필자는 영화평론가 장병원이다.

-영화계에는 ‘한국식 제목'이라는 말이 있다. 외화가 국내에 수입될 때 한국 실정에 맞도록 제목을 바꾸는 경우를 두고 쓰는 용어다. 통상 알기 힘든 영문이나 밋밋한 제목을 선정적으로 개작해 원래의 뜻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되는데, <블로우 업>을 <욕망>으로, <브라질>을 <여인의 음모>로, 'Lost in translation'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등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이다. <루시아>는 영화계의 제목 바꾸기 관행을 거꾸로 뒤집은 사례로 기억될만하다. <섹스 앤 루시아(Sex & Lucia)>라는 자극적인 원제가 관객의 호기심을 더 끌만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수입사는 <루시아>라는 밋밋한 제목을 내세웠다.



-오금이 저리는 섹스 장면 하나 없어도 ‘섹스'라는 말을 제목에 버젓이 집어 넣는 세태를 떠올린다면, 실로 시류에 ‘역행’하는 모험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수입사의 의도는 말초적인 쾌락에 호소하려는 싸구려 에로 영화가 아니라 품격 있는 예술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제목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이 영화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으로 파국에 이르는 인간을 보여주지만, 탐미적 에로티시즘 위에 가볍지 않은 인생에 대한 성찰을 덧씌운다.

-죽음과 에로티시즘 프랑스 작가 조르쥬 바타이유는 저서 <에로티시즘>(*국역본과 영역본 모두 <에로티즘>으로 표기하고 있으므로 그렇게 해주는 게 낫겠다)에서 죽음과 에로티시즘의 친족관계를 설파한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과 연결되고 죽음의 순간 인간은 극한의 쾌락을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섹슈얼한 욕망은 죽음에의 동경에 다름 아니며, 성적 쾌락은 죽음의 경험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루시아>는 이 같은 생의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레스토랑 웨이트리스 루시아(파즈 베가)는 6년 간 동거했던 소설가 로렌조(트리스탄 우요아)가 세상을 뜬 후 상실감에 시름시름 앓는다.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기 위해 지중해의 호젓한 섬으로 여행을 떠난 그는 천혜의 자연 환경과 그곳에서 만난 미스터리한 남자 카를로스, 민박집 주인 엘레나 등과 교류하며 평온을 찾는다. 하지만 로렌조를 축으로 맺어진 3사람의 과거 행적이 베일을 벗으면서 예상치 못한 비밀의 실체가 드러난다. 

-<루시아>는 한 인물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지를 치면서 전체 등장 인물로 퍼져가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동상이몽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물들의 실체는 모든 것이 겉보기와는 다르다. <루시아>는 양파 껍질 벗기듯 이들의 과거를 하나씩 풀어놓으며 내밀한 진실의 속살을 들춰낸다. 뒤엉킨 관계만큼이나 그걸 포장하는 재료들도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다. 소설가인 로렌조가 쓰는 소설과 그의 현실이 뒤섞이고, 실제와 꿈, 환상,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미궁 속을 헤매듯 이야기가 흘러간다. 관계가 하나 둘 씩 밝혀질 때마다 ‘그들 사이의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다. 이 난잡한 관계의 사슬을 맺어주는 끈이 있다면 섹슈얼한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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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의 성애 묘사 수준은 그간 한국의 영화 심의 기준을 뛰어넘을 만큼 파격적이다. 남녀 성기 노출은 예사요, 디테일한 성행위의 묘사도 수분간 이어진다. 호사가들의 궁금증을 자극한 이 강도 높은 에로티시즘 때문에 미국에서는 17세 미만 관객들은 영화를 볼 수 없는 'NC-17 등급'을 받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서슬 퍼런 심의의 가위질이 살아있는 한국에서 ‘무삭제'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영화 심의를 담당하는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까지 나서 “과거의 구태의연한 심의기준이 사라졌다는 결정적 증거"로 거론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섹스 장면은 표현의 강도가 세다.

-파격의 영상 미학 물론 파격의 섹스 묘사는 그저 말초적 쾌락을 위한 눈요기 용은 아니다. 대담한 섹스 장면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강화하는 장치로 동원되고, 다양한 성적 취향을 회피하지 않는 개방성도 욕망의 덧없음을 주장하는 결론을 위한 것이다.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지는 그들의 과거가 이 같은 점을 확인시켜준다. <루시아>에서 강렬한 에로티시즘 만큼 뇌리에 남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이다. 보름달이 비치는 바닷가에서 펼쳐지는 도입부의 수중 정사, 파도가 만들어낸 포말 위에 어리는 그림자, 눈이 멀어버릴 것 같은 코발트 빛 바다와 하늘 등 화려하고 추상적인 풍경의 이미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농담이 짙은 색감으로 덧칠된 유화나 총천연색 물감을 끼얹어 놓은 것 같은 영상은 잠시 동안 넋을 잃게 만든다. 잊을 수 없는 이미지들을 통해 감성을 자극하는데 공헌한 것은 영화평론가 출신 감독 훌리오 메뎀의 연출력이다. 홀리오 메뎀은 페드로 알모도바르(<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오픈 유어 아이즈> <디 아더스>)의 뒤를 이을 스페인 영화의 기대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내가 아는 스페인 영화감독이 몇 안되는데, 다행히도 알모도바르-아메나바르는 내가 아는 '라인'이다. 메뎀이 그 뒤를 잇고 있다니까 '알모도바르-아베나바르-메뎀'으로 기억해두면 되겠다.)

 

 

 

 

-<그녀에게> <노보> 등에 출연했고 <스팽글리쉬>에서 억척스러운 스페인 이민자 여성을 연기한 매력적인 스페인 배우 파즈 베가(1976- )의 농염한 관능미도 빛을 발한다. <루시아>는 아름다운 배우, 아름다운 로맨스, 아름다운 자연을 통해 관객의 눈을 현혹시킨다.(*내가 이름을 아는 스페인 여배우는 모두 알모도바르의 작품에 출연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빅토리아 아브릴, 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파즈 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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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후의 순간, 감독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행위나 가치 뒤에는 추함도 함께 있다고 말한다. 선을 넘어버린 아름다움의 추구는 인간을 ‘도착'이나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걸 깨닫게 한다. 하지만 유혹에 약한 인간이 그걸 깨닫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06. 04. 11.

P.S. 참고로, 본문에서 참조하고 있는 <에로티즘의>의 서문을 잠시 인용한다: "에로티즘, 그것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밀한 말해서 정의는 아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른 어떤 표현보다 에로티즘의 의미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정확한 정의가 문제라면, 생식 차원의 성행위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에로티즘도 생식의 특수한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생식에 목적을 둔 성행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유성동물의 공통된 행위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성행위를 에로티즘으로 승화시켰다... 에로티즘은 아기나 생식 등 자연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의 심리적 추구이다."(<에로티즘>,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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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EBS 세계명화에서 짐 자무쉬(1953- )의 <천국보다 낯선>(1984)을 다시 봤다. 집안 청소를 하면서 봤기 때문에 제대로 봤다기보다는 그냥 틀어놨었다고 해야 맞겠다(중간에는 분리수거도 하러 내려갔다 오고). 사실 이 영화는 국내에 개봉되기 이전에 아주 오래전 한 대학의 영화제에서 거푸 두 번을 본 적이 있다. 이후에 개봉관에서도 한번 보고. 그러는 사이에 80년대 대학가의 '전설'이었던 이 영화는 이젠 '낯익은' 영화가 되었다. '포스트모던적'이었던 영화의 포스터는 거의 키치가 되었고.   

<천국보다 낯선>은 얼마전 최근작 <브로큰 플라워>(2005)가 국내 개봉된바 있는 미국 독립영화계의 '기린아' 짐 자무쉬의 두번째 장편영화이고, 일설에는 빔 벤더스가 <파리, 텍사스>(1984)를 찍고 남은 필름으로 찍은 영화이다(자무시는 벤더스의 조감독 출신이다). 영화 속 이야기나 화면은 쓸쓸하고 황량하지만, 처음 볼 때는 아주 낯설고 참신한 영화였다(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자면, 예술은 '낯설게 하기'이다). '진공청소기를 돌리다'는 '악어의 목을 조르다'라고 표현하는 게 '미국식'이라고, 헝가리에서 날아온 사촌동생 에바에게 '미국인' 윌리가 한 수 가르쳐주는 대사처럼. 나 또한 악어의 목을 한참 조르고 난 후에 이 페이퍼를 쓴다.

먼저, 의례적인 영화 줄거리를 이미지들과 함께 옮겨온다. 영화는 '신세계(The New World)', '1년 후(One year Later)', '천국(Paradise)'이란 소제목으로 나뉘어진다.

-뉴욕 빈민가의 낡은 아파트에 사는 윌리에게 어느 날 사촌 에바가 찾아온다. 갑자기 군식구를 떠맡게 된 윌리는 처음엔 그녀를 성가셔 하지만 10일이 지나 에바가 떠날 무렵이 되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낀다.  

-일년 후 윌리는 친구 에디와 함께 에바를 만나러 클리블랜드로 무작정 떠난다. 괴짜 로티 아주머니와 함께 사는 에바는 핫도그 가게 점원으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세 사람은 함께 플로리다로 떠나기로 한다. 이들의 여정은 개경주에서 윌리와 에디가 가진 돈을 거의 다 날리게 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남은 돈을 털어 경마에서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을 때 에바는 우연치 않게 큰 돈을 손에 넣는다.  

-윌리와 에디를 기다리던 에바는 결국 혼자 공항으로 떠나고, 세 사람은 뿔뿔이 흩어진다. 언제 도착했건 이방인이기는 마찬가지인 이민자들에게 미국이라는 나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보여주는 화려하고 꿈같은 파라다이스와는 거리가 멀다. 신세계의 꿈을 안고 도착한 에바에게 이 거대한 나라는 뉴욕이건, 클리블랜드건, 플로리다건 간에 쓸쓸하고 황량할 뿐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한겨레신문이 선정한 세계영화 100선에도 꼽혔던 작품이니만큼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기도 하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작품 해설은 이렇다. 

 

 

 

 

-헝가리 아가씨 에바가 뉴욕에 사는 건달 친척 윌리의 집에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되는 <천국보다 낯선>은 착상이 도전적이다. 이 영화에 담긴 미국 사회의 풍경은 아메리칸 드림, 모든 것이 넘쳐나는 풍요의 천국과는 거리가 멀다. 이 흑백 장편영화는 삭막하고 스산하기조차 한 미국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 영화로 청년 감독 짐 자무쉬는 84년의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과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 표범상을 받았다. 그는 단숨에 뉴욕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천국보다 낯선>은 미국영화지만 사실 미국영화라기보다는 미국을 배경으로 한 유럽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한 화면이 한 장면을 이루는 길게 찍기, 시선의 비상한 집중을 요구하는 고정된 카메라 스타일, 서로 진정한 의사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관계, 여기저기 떠돌지만 정신적으로 건조한 삶의 조건, 긴 페이드 아웃의 화면전환이 주는 형식의 단절감 등은 무엇보다 대리만족을 주는 이야기체 영화를 중시했던 미국영화의 전통과는 별로 상관없다. 자무쉬는 빔 벤더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로베르 브레송 등의 유럽 영화감독과 일본 영화의 대가 오즈 야스지로 등의 영화로부터 영감을 빌려와 황폐한 미국 생활의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영화 표현의 뿌리를 여러 혈통에서 빌려온 셈이다. 그래서 곧잘 '포스트모던'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자무쉬 영화의 새로움은 유럽영화에서는 이미 상투화한 진술을 미국의 상황으로 옮겨놓은 낯설음에서 온다. 예를 들면 에바와 에바의 사촌 오빠 윌리가 식탁에서 TV 디너에 관해 대화하는 장면같은 것이다. "티브이 디너 안먹을래?" "안먹어, 배 고프지 않아." "왜 티브이 디너라고 부르지?" "그냥... 티브이를 보면서 먹으니까... 텔레비전말이야." "텔레비전이 뭔지는 나도 알아."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뭐?" "그 고기는 어디서 난거야?" "쇠고기지 뭐." "쇠고기야? 고기같이 보이지 않는데." "휴... 상관하지마. 어쨌든 여기선 이런 걸 먹는다구. 고기, 야채, 디저트, 그리고 설거지할 필요도 없어." 이런 식의 반복된 대화의 연속과 단조로운 양식은 황폐한 미국생활을 암시하는 놀라운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자무쉬는 원래 이 영화의 1부인 <신세계>를 단편영화로 발표했었다. 영화가 평판이 좋자 자무쉬는 두 단락을 더 붙여서 장편영화로 공개했다. 그러나 1부 '신세계'에 이어 추가된 '일년 후'와 '천국'은 1부의 부연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뉴욕에서 클리블랜드와 플로리다로 옮겨 다닌다. 이 여정은 야만의 땅에 문명을 심으며 서부영화의 주인공들이 걷던 신화적인 여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장소이동 모티브에는 더 이상 상징적인 의미가 없다. 클리블랜드로 가는 차 안에서 주인공들은 어딜 가나 다 똑같다고 중얼거린다.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저 천국보다 낯선 곳일 뿐이다.

-자무쉬는 그러나 <천국보다 낯선> 이후에 만든 영화들에서 <천국보다 낯선>의 신선함에 맞먹는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형식이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는 종래의 미국적인 이미지를 뒤집는데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재미있는 것은 이 관심이 모방과 짜집기와 재구성이라는 80년대 이후의 양식적 경향 속에서 추구된다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주 미국적인 감독이다.

한데, 영화를 여러 차례 보다 보면, 메시지는 모두 증발해버리고, 형식미나 디테일 정도만이 인상에 남는다. <천국보다 낯선>에서 그러한 디테일은 여주인공 에바가 듣는 음악들인데, 그 중에서도 'Screamin' Jay Hawkins'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는 잴러시 호킨스(Jalacy Hawkins; 1929-2000)의 '절규하는' 로큰롤 'I put a spell on you'(1956)가 가장 인상적이다(http://www.youtube.com/watch?v=bvWf9djVg9c).  

I put a spell on you
Because you're mine.
I can't stand the things that you do.
No, no, no, I ain't lyin'.
No.
I don't care if you don't want me
'Cause I'm yours, yours, yours anyhow.
Yeah, I'm yours, yours, yours.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Yeah! Yeah! Yeah! Yeah....
I put a spell on you.
Lord! Lord! Lord! ...
.'Cause you're mine, yeah.
I can't stand the things that you do
When you're foolin' around.
I don't care if you don't want me.
'Cause I'm yours, yours, yours anyhow.

Yeah, yours, yours, yours!
I can't stand your foolin' around.
If I can't have you,
No one will!

I love you, you,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I love you, you, you!
I don't care if you don't want me.
'Cause I'm yours, yours, yours anyhow.

witchesattea.jpg

가사에서 'I put a spell on you'는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걸어요'라고 옮긴 경우도 있던데) '나는 당신에게 주문을 걸어요'란 뜻이겠다. 왜냐면, "당신은 내 거니까." 마지막 가사도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을 나를 원하지 않더라도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어쨌거나 당신 거니까."란 식이니까, 거의 '당신'의 목을 조르는 내용이다.

해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은 '천국보다 낯선' 아메리카가 우리에게 거는 '주문'인지도 모르겠다.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황량한 텍사스 사막에 '파리'라는 지명이 붙은 것처럼,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황량한 들판이 (천국보다 낯선) '천국'에 비유된다. 우리가 에바처럼 서 있는 이 자리, 끊임없이 주문/마법이 필요한 이 자리...

 

06. 04. 09. 

 

 

 

 

 P.S. 한편, 아메리카의 반대편 러시아에서 '악어'하면 떠오르는 두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풍자소설 <악어>와 러시아 어린이들의 친구이자 마스코트 <체브라시카>에 등장하는 악어 친구 '게나'이다. <악어>는 당대 19세기 유럽이란 (천국보다 낯선) '천국'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신랄한 풍자와 조소를 담고 있는 작품이며, <체브라시카>는 원송이도 아니고 곰도 아닌 주인공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모험담이다. 동물원에 출퇴근하다가 체브라시카의 모험을 따라나선 악어 게나는 그런 체브라시카를 도와주는 친구. 만약 아이가 미키마우스 대신에 이런 만화/동화를 좋아한다면,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닌) 러시안 스타일로 키우셔도 되겠다...   

P.S. 짐 자무시(자무쉬)의 인터뷰집이 출간됐다. <짐 자무시>(마음산책, 2007). "1981년부터 2000년까지, 20여 년에 걸쳐 다양한 국적의 인터뷰어들이 기록한 열다섯 편의 글을 묶"은 것이라고 한다. 소개에 따르면, "인터뷰는 '영원한 휴가'부터 '커피와 담배'에 이르기까지, 짐 자무시 자신이 영화에 담고자 했던 것들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들려준다. 영화 제작 과정에 대한 에피소드 외에, 그의 삶과 개인적 이야기를 담은 글들도 많다. 그의 세계관, 정치적인 입장 등이 드러나기도 하며, 로베르토 베니니, 카우리스마키 형제, 빔 벤더스 등과 같은 동료들과의 만남이 소개되기도 한다."

아직 빔 벤더스에 관한 책도 변변한 게 나오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의외이긴 한데, 여하튼 반갑다. 짐 자무시보다 더 고대하는 건 아키 카우리스마키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언젠가 소개한 바 있지만 나는 러시아어에서 나온 연구서 하나를 갖고 있다). "원서인 (University Press of Mississippi)에 수록된 17편의 인터뷰 가운데, 15편을 골라 편집했다."고 하는데, 굳이 2편을 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07.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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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바타이유를 읽다가(생각보다 안 읽히는 대목이 많다) 기분전환 삼아 자료 검색을 했다. 그러다 발견한 글꼭지는 얼마전(2006. 03. 24) '한겨레'의 기획연재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영화 <분홍신>의 프로듀서 신창길씨가 필자이고, 그는 거기서 <비포 선라이즈>(1995)의 '셀린느'(줄리 델피를) 자신의' 연인'으로 호출하고 있었다. 한데, 그게 나에겐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의 '희귀한' 접속점을 알게 해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단은 필자의 그 연애담을 조금 따라가본다.  

 -그녀는 내가 결혼을 생각하게 만든 첫번째 여자였다. 가장 가슴 벅찬 열망과 가장 고통스런 비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 그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그녀는 실패한 연애의 상처로 인해 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난 달콤한 탈출구였다. 영화 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영화와 공연장을 순례하고 둘만의 여행으로 고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연애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던 그녀와의 관계는 매순간 희열과 좌절의 극단을 넘나들게 했다. 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희와 열정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그녀의 일상이 편안해지고 문화탐험을 위주로 한 교양연애도 시들해지자, 결국 그녀는 좀 더 안정되고 부가가치 높은 삶을 향해 나를 떠나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삶을 위치지우고 싶어한 그녀는,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내비친 나를 정말 순진하고 치기 어리게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현실적인 불확실함까지 감내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난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희열과 열정이 사라진 공백과 허탈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그때, 코아아트홀 일요일 조조상영에서 만난 그녀 ‘셀린느’(<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은, 말 그대로 ‘발견’이었다(*나도 코아아트홀에서 봤었는데). 그동안 내가 붙들려 있었던 연애가 얼마나 과도한 욕망과 집착으로 버무려진 열병덩어리였는지, 정말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누구이며 사랑을 이뤄가는 내용과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우침을 ‘셀린느’는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하룻밤의 시간뿐. 비엔나 거리를 거닐면서 제시와 셀린느는 참 많은 얘기를 나눈다. 고즈녁히 책을 보며 대화를 하는 그녀. 서글서글한 눈매에 담백한 인상의 그녀는 지적이고 사려 깊기까지 하다. 매력적인 눈웃음에 천진한 미소, 나긋한 목소리에 맑고 풍부한 감수성까지…. 내가 제시가 되어 비엔나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듯 나른한 흥분에 빠져들었다. 제시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건네게 만든, 기차 안에서 그녀가 읽고 있었던 바타이유의 <죽은 자>도 서점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불행히도 번역본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셀린느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바타이유의 <죽은 자>라고 하니까, 아마도 그의 소설 'The Dead Man'을 가리키는 것 같고, 보통의 영역본에는 'My Mother', 'Madame Edwarda'와 함께 묶여 있다(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바타이유 소설선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가 한데 묶이게 되는 것.  

-그때 이후, 별 내세울 것도 없는 내 사랑과 연애는 이른바 ‘셀린느 찾기’의 흥미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신념어린 의지(!) 끝에 마침내, 나는 나의 셀린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시와 셀린느가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난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셀린느와 함께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 속 10년 만에 만난 그들은, 지난 시간의 엇갈림과 회한 속에 아쉬운 두 번째 이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객석의 나는 흐뭇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나의 셀린느의 손을 꼭 쥔 채, 그들을 애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셀린느. 늘어난 잔주름과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오랜만의 그녀에게서 발견한 안타까움이었지만, 나에게 그녀는, 사려깊고 당당하며 진지하고 순수한 10년 전 비엔나 밤거리의 셀린느, 그대로였다.

(*)나는 <비포 선셋>(2004)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작년에 비디오로 봤는데(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기까지 내겐 10년이 걸렸다), 어느덧 '선라이즈'보다 '선셋'에 더 공감하는 나이가 됐음을 확인하고 좀 씁슬했다. 내친 김에 <비포 선셋>에 등장하는 제시와 셀린느의 '10년후'도 따라가보기로 한다. 사이즈가 좀 큰게 흠이군...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비엔나'를 품고 있지만(이 스틸 사진들 속에 각자의 연인들을 채워넣는 일은 부득불하며 불가피하다. 그것이 어떤 풍경이든지간에), 비엔나에도 해는 진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젠장, 책까지 읽어야 하다니!..

Before Sunset

06. 04. 09.

P.S. 때아닌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얼마전에 나온 유기환 교수의 <조르주 바타이유>(살림, 2006)에 대한 동아일보의 리뷰(2006. 02. 25)를 옮겨온다. 책은 나도 단번에 읽었었는데, 리뷰를 쓰는 건 다른 일들에 밀려 늦추어졌었다.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흔히 바타이유의 사상은 난해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은 난해하기보다는 난삽하고, 복잡하기보다는 산만하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난삽하고 산만하다는 걸 <저주의 몫>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됐다.) 흔히 ‘저주받은 작가’로 불리는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의 사상 체계를 조리 있게 정리한 이 책에서 불문학자인 유기환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렇게 바타이유에 대해 독자들이 품고 있는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 준다.

 

 

 

 

 

-바타이유는 초현실주의의 제왕 브르통과 실존주의의 지존 사르트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비판을 했던 작가였다(*서로 사이가 다 안 좋았다). 이는 그의 글이 니체의 강한 영향 아래 애초부터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함에 따라 늘 모순과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타이유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저주의 몫>(1949년)과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는 <에로티시즘>(1957년)을 통해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준다(*<에로티시즘>이 아니라 <에로티즘>이다. 영역본도 그렇게 표기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 저서라고 할 <저주의 몫>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바타이유는 마르크스처럼 ‘과잉(잉여)’의 문제에 천착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지만 바타이유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다. 태양이 지구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보내는 것처럼. 문제는 이 과잉 자체가 아니라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양차 대전의 발발은 바로 과잉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발생한 부작용의 극치였다. 바타이유는 이 과잉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비생산적 소비’를 제시한다. 그것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대가 없이 증여하거나 심지어 불태우는 ‘포틀래치’처럼 수요공급의 법칙에 어긋나는 소비다. 바타이유가 발견한 이 ‘소비의 경제학’은 오늘날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서는가.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행위를 뜻하는 에로티시즘은 그러한 비생산적 소비의 또 다른 대표 사례다. 인간이 에로티시즘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순간일지라도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금기의 위반을 통해 증대하는 쾌락의 경제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바타이유에 대한 저주의 봉인을 풀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돌이 될 것’이라는 위협에도 신이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곳을 응시함으로써 예언력을 획득한 그의 신탁을 듣기 위함은 아닐까.

바타이유의 관점에서 볼 때,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사랑의 이전의 사랑' 혹은 '에로티즘 없는 사랑'이다('비포 러브'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거기엔 어떠한 과잉도 어떠한 비생산적 소비도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너울거림에 잠시 삶을 의탁하지만, 그 경계에서 다시 회수해간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에는 언제나 테이블 하나 정도의 거리가 끼여드는 것. 그 거리는 (불가피하다고 믿어지기에)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하고, 애틋하다. 그러한 여운 속에 그들이 남겨놓은 질문은 한 가지이다. '그들은 정말 사랑한 걸까?' 예의상,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는 던지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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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4-09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이게 과연 10년 전에 완료된 필자의 생각일까요?
괜히 이렇게 썼겠죠.
인생에 심통이 나서.
흥미진진한 페이퍼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손에 들고 있던 책(혹은 읽고 있던)
을 따라가 보는 것도 재밌겠는데요?^^

로쟈 2006-04-09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이야 뭐 수시로 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10전이건 후이건...

릴케 현상 2006-04-09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볼 때 바타이유 책을 발견했어요. ㅋㅋ 전 머리 빈 양키남과 한 지성하는 불녀를 대비시키는 설정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더랬죠

로쟈 2006-04-0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저는 하도 오래전이라. 하긴 불남/양키녀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죠...
 

민방위 소집훈련이 있는 날인지라 7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지난번에 빠졌기 때문에 '보충1차'였다). 민방위도 벌써 8년차인데, 언제 소집 해제되는 것인지?(물론 편한 소리이긴 하다. 예비군때만 해도 총자루를 어깨에 매고 어슬렁 거리며 '터널 경비'도 하곤 했으니.) 여하튼 다른 날보다 좀 일찍 시작한 하루였고, 그래서인지 버스-전철-버스 출근길에서 마지막 버스는 자리에 앉아서 타고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출근길에 집어든 '한국일보'를 대중문화면 정도는 다 읽어볼 수 있었다. '세 편의 영화'는 아침에 읽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각기 다른 소개 기사이다.  

먼저. 박선영 기자가 쓴 영화 <스위트룸> 소개는 '그날 밤, 추악한 욕망의 공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스위트룸은 공간의 폐쇄성과 화려함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인간 욕망의 극단을 실험하기에 썩 괜찮은 장소다. 1950년대 미국 연예계를 배경으로 화려한 쇼비즈니스 세계의 허구와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까발리는 영화 <스위트룸>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손아귀에 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조명하는 ‘인간 욕망의 보고서’다. 미국 연예계 최고의 스타 콤비인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의 화려한 이면에는 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밀스런 사생활이 숨겨져 있다. 제멋대로인 악동 래니와 젠틀한 매너의 빈스가 약물과 성에 탐닉하며 방탕하게 생활하는 동안 매니저 루벤(데이빗 헤이먼)은 이들의 모든 뒤처리를 전담한다.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소아마비 기금 생방송’ 전날, 그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웨이트리스 모린(레이첼 블랜챗)을 불러 환각의 섹스파티를 벌이지만, 다음날 방송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들을 기다리는 건 모린의 전라 시체. 래니와 빈스의 알리바이가 뚜렷해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결별을 하고, 20년 뒤 이들의 열혈 팬이었던 작가 카렌(알리슨 로만)이 그 사건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접근하면서 감춰졌던 진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 영화 <일급살인>, <‘미스틱 리버> 등을 통해 미국적인 자유분방함을 선보여온 케빈 베이컨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에서 영국 신사의 전형을 보여준 콜린 퍼스가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약물중독과 동성애, 양성애 등의 파격을 연기하는 모습이 다소 낯설다. 원제는 ‘Where the truth lies’(2005)로 <엑조티카>를 만든 캐나다 출신 아톰 에고이안(아래 사진)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 '스위트룸'의 제목이나 줄거리는 그다지 눈길은 끄는 게 아닌데, 감독 '아톰 에고이안'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의 <엑조티카> 등도 보았지만, 아마도 동시대 캐나다 감독들 중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감독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칸느영화제 등의 단골이기도 하다). 그의 '헐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하니까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는 평을 보면, 기대는 우려에 가까운 듯하지만.  

두번째 기사는 라제기 기자가 쓴 '씨네 다이어리'로 '외설 무서워 영화 못보나'란 타이틀이고 최근 개봉된 차이밍량의 영화 <흔들리는 구름>에 관한 것이다.

-10여년 전 한 동시상영관에서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을 친구와 함께 관람했다. 친구는 극장 문을 나설 때 “욕망은 무슨…”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동시상영관이라는 야릇한 장소와 꿈보다 해몽이 좋은 제목이 만들어낸, ‘뼈와 살이 타는’ 화끈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욕망의 낮과 밤>의 원제는 'Tie Me Up, Tie Me Down'이었다. '나를 묶어주세요, 나를 풀어주세요' 정도의 뜻인지.)

 

-한때 동시상영관이 욕정 해소의 동의어 역할을 한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에로 비디오 사업이 ‘배설구’ 역할을 대신하면서 동시상영관은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활황을 누리던 에로 비디오도 짧은 전성기 끝에 ‘포르노의 바다’ 인터넷에 밀려 사양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예술공헌 은곰상 등 3개 상을 수상한 대만 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의 <흔들리는 구름>이 약 2분 가량 삭제된 채 지난달 31일 개봉됐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수입사 유레카픽처스가 낸 18세 관람가 등급 신청에 대해 2차례나 제한상영(성인영화 전용 상영관에서만 상영 가능)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인 전용관이 전무해 제한상영 판정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수입사는 자진 삭제를 선택해야만 했다.(*<몽상가들>의 선례도 있는데, 굳이 '제한상영' 판정을 내려야 했을까 의문이 든다. 덕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려던 생각이 싹 가셨다.) 

-<흔들리는 구름>은 무척 야해 보이는 영화다. 남녀의 하얀 나신이 무시로 등장하며 다양한 성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웬만한 포르노는 저리 가라 할만한 결말은 정말 극장에 걸릴 수 있는 영화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숨막힐듯한 관능을 내뿜거나 관객의 몸을 뜨겁게 달구지 않는다. 가뭄으로 표현되는 삭막한 인간관계 속에서 애정에 목 말라 하는 주인공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가슴을 짓누를 뿐이다. <흔들리는 구름>은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대만에서 무삭제로 개봉돼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올렸다.

-인터넷이 ‘에로 시장’을 장악하면서 극장에서 숨은 욕정을 털어내려던 시대도 완전히 저물었다. <흔들리는 구름>이 무삭제 개봉됐어도 ‘예설’ 대신 ‘외설’을 탐닉하려는 관객, 특히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우리 청소년들이 '포르노의 바다'를 놔두고 왜 엉뚱한 데서 헤엄을 치겠는가?) 18세와 20세 사이의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현행 등급분류 체계의 제한상영 규정이 애먼 예술영화의 정상적인 상영만 가로 막는 게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고민은 고민이고 짜증은 짜증이다. 아침부터 좀 짜증이 났다. 우리에게 포르노를 보여달라!)

세번째는 다시 박선영 기자의 <연리지> 리뷰이다. 인터넷판 타이틀은 '한국멜로의 불치병 <연리지>'인데, 지면에는 '"바보야, 나 죽어" 또 그 소리네'로 돼 있다.

-멜로영화 만들기가 갈수록 힘들다. 연인들을 애절하게 떼어놓는 게 멜로영화의 관건일진대, 신분이나 계급 차별은 줄어들고, 어지간한 병은 치료만 잘 받으면 죽음에까지 이르진 않는다. 작가와 감독들은 기를 쓰고 희귀병과 사회적 금기를 찾아 보지만,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영화건 드라마건 한국멜로의 두 가지 공식은 희귀병이거나 (알고보니) 남매이거나, 이다.) 

-한류스타 최지우의 스크린 복귀작 <연리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설득기제를 찾으려다 막다른 골목과 마주친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야말로 한국 멜로영화의 ‘불치병’인 불치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나름의 변주와 반전을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출해보려 한 감독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되레 두 배의 황당함과 실소를 선사하며 ‘불치병 코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한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멜로영화의 관습들을 고스란히 집대성한 <연리지>는 천하의 바람둥이 민수(조한선)가 원발성폐고혈압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혜원(최지우)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기시감(旣視感)으로 충만한 장면들에 빼곡히 나눠 담았다. 두 연인은 비오는 날 난폭운전으로 흰 옷에 빗물을 튀기면서 우연히 만나고, 차에 탄 여자는 약속한 듯 휴대폰을 두고 내린다.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천진발랄한 그녀는 남자와 첫 키스를 하다 수줍게 도망치고, 장대비를 맞고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바보야, 나 죽어”를 울며 외친다. 가히 클리셰의 총출동이라 할 만한 상투적 서사 전개로 인해 반전의 효과는 코웃음 속에 묻혀버리고, 두 주인공의 감정에 동참하지 못하는 관객은 지루하다 못해 외로울 정도다.

-영화는 신파의 혐의를 벗기 위해 최성국, 서영희 커플의 코믹한 사랑 이야기를 곁들이며 로맨틱 코미디의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코믹과 신파는 물과 기름처럼 시종 겉돈다. 30대 여배우들이 나이에 맞는 다양한 배역으로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요즘, 서른 한 살의 최지우가 극중 배역과 유리된 채 ‘지우히메’의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이 아름다운 한류스타의 미래를 심히 염려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치병이 어디 <연리지>만의 잘못이겠는가. 사랑의 슬픔은 불치병 같은 외부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 내적 기제에 의해 자체 소멸하고 침식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왜 한국영화만 간과하고 있는지(*'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정식이 말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최근 한 해 동안만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파랑주의보> <백만장자의 첫사랑> 등이 불치병 릴레이를 펼치며 동어반복을 계속했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붙어 하나의 나무로 합쳐지는 현상으로, 불치병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은유하는 제목이다.(*아래는 송혜교, 차태현 주연의 <파랑주의보>.)

해서, 세 편의 영화는 각기 '진실'과 '외설'과 '불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뭘 봐야 하나?). 아침부터 그런 걸 생각, 해보게...

06.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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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0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톰 에고이얀의 영화는 좀 아쉽더군요. 그의 장기가 고스란히 들어있고 연기 좋고 기술적인 부분도 좋고 다 좋은데 2%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드니 함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조만간 볼 생각이구요.

로쟈 2006-04-0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에 그럴 거 같았습니다. 저는 비디오로나 봐야 할 거 같은데, 차이밍량 영화 같은 건 비디오가게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이번주 <필름2.0>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중저가' 영화잡지이지만, <씨네21>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즘의 <씨네21>이 과연 세 배만큼의 제값을 하는 '고가' 브랜드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개최된 '1996년의 한국영화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를 계기로 '1886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를 특집으로 내건 이번주 기획만큼은 단연 돋보인다(이번 주 <씨네21>의 기획특집은 '영국배우의 힘'이다). 

이 특집과 관련해서, 10년전, 1996년의 이야기를 나도 풀어볼까 하다가 견적 대비의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냥 한 두 꼭지에 대해서만 참견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또 한편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를 발표한 송일곤 감독의 인터뷰 꼭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의 대담 꼭지이다. 

폴란드의 국립영화학교 우츠출신으로 우리에겐 영화보다 (모 통신회사) CF로 처음 알려진 그의 영화들 중에서 단편영화 <간과 감자>와 장편 <꽃섬>(2001), <거미숲>(2003) 등이 내가 본 작품들이다(그러니까 단편 <소풍>과 장편 <깃> 등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로선 너무 도식적이라고 여겨진 <거미숲>이 실망스러워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될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이라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어떨까' 싶은 눈길을 끈다.

이 신작과 관련해서는 얼마전 오마이뉴스(06. 03. 19)에 소개된 기사내용을 약간 재구성해서 잠시 따라가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은 한편의 연극같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편집 없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으로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 ‘마법사밴드’는 멤버 자은(강은비)의 죽음으로 해체된 인디밴드다. 음악을 통해 청춘을 보낸 그들에게 자은의 죽음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자은과 연인 사이였던 재성(정웅인)은 그들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강원도 숲 속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수(장현성)는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편, 보컬이었던 하영(강경현)은 자은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더 이상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자은을 기념하기 위해 재성이 운영하는 카페에 모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명수는 하영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하영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자영은 여전히 노래하기를 망설인다. 그들은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극복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송일곤 감독의 연출력이다. 카페의 1층은 현재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세 명의 멤버가 다시 만나는 장소이며, 과거의 공간인 카페 2층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힘겨워하는 자은과 재영의 갈등을 보여준다.

-형식미 단편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장편 <거미숲>, <깃>을 통해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마법사들> 역시 그만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거미숲>에서도 ‘숲’을 통해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을 표현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숲’을 통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이 영화는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에도 불구하고 카페 1층과 2층, 숲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변화를 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96분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할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 모두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중간에서의 작은 실수는 곧 촬영 종료를 의미하고, 모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진부함과 급격한 심리의 변화는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30분짜리 단편을 96분의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 <마법사들>은 3월 30일 CGV 인디상영관에서 개봉된다).

한편, <필름2.0>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이 영화적 실험의 배경: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2학년 가정의 중요한 수업 중 하나가 '마스터 샷'이라고 해서 끊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샷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코프스키나 소쿠로프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소련을 중심으로 영화미학이 발전했던 60, 70년대에는 시간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가 많은 이들의 화두였다. 그러면 우리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다."

Александр Сокуров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실험이 헐리우드쪽보다는 러시아나 북/동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의 사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1951- )의 <러시아방주>(2002, 99분)이다(역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 제목에서 얼핏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러시아의 보물창고라 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대한 감독의 공시적/통시적 사색과 명상을 담고 있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이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영화보다 흥미로웠던 건 본편 방송 이후에 덧붙여진 '메이킹 필름'이었다. 영화는 단 한번에 테이크로 모든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한 계산하에 모든 배우 및 스탭들의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했다(리허설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필름속에 담기는 내용만큼(혹은 그보다 더) 그 찍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아래 사진은 소쿠로프와 그의 스탭들.

그런 사정은 <러시아 방주>와 같은 방식으로 찍은 <마법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법사들의 러시아 방주?). 박영준 촬영감독의 고백: "<마법사들>에서 최고의 관객은 현장에서 감독님의 '오케이'를 들었던 현장 스탭들이다. 연극을 보듯 그 순간을 우리 모두 '생짜'로 본 거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뭐랄까, 우리 스스로 치유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손으로 흙 발라서 집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옆에서 거드는 송감독: "마지막 촬영 끝나고 나서 스탭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했던 것 같다." 

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법사들>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그 메이킹 필름이다(어떤 경우에 예술은 'picture'가 아니라 'picturing'에 깃든다). 그걸 찍을 비용이 '저예산'에 포함돼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06. 03. 26.

P.S. 보너스로 덧붙이자먼, 감독 자신이 꼽는 <마법사들>의 베스트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두 남녀가 숲에서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한국영화에서 그런 룩을 처음 본 것 같다. 흑백이 강렬하면서도 컬러가 살아있고 표정들도 너무 잘 나타나 있고, 미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신이다. 우리 영화니 자뻑이기는 하지만." 아마 자뻑인 거 맞을 것이다. 한데, 사과를 먹는 장면은 <거미숲>의 정사장면에서도 나온다. (감자가 아니라!) 사과가 송일곤 감독의 '대상a'쯤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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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와 [필름]모두 좋아하지만 [씨네]의 경우 그 "값"을 한다고 봅니다. "3천원시장"을 [필름]이 포기했지만 [씨네]는 영화잡지에 바랄 수있는 "뽀대"가-표지사진하나만 보더라도-훌륭합니다. 내용은 [필름]의 경우 "이연걸 특집"에서 보듯 하나의 기사로 도배하는 경우가 왕왕있습니다.그리고 [필름]에는 토크2.1이 있지만 비평면이나 "김혜리가 만난사람들"같은 경우는 [씨네]가 독보적이구요.

로쟈 2006-03-2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씨네21>을 더 자주 봤었지만, 최근에는 주로 실망감을 안겨주더군요. 아마도 작년말에 '2005년 나의 베스트 초이스' 같은 기사 꼭지가 결정타였던 것 같은데, 기자들의 베스트 초이스의 대상이 (영화가 아니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 '수다'는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거라는 '편견'을 가진 저에겐 잡지가 좀 뻔뻔해 보이더군요. 이후엔 간혹 살 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happyant 2006-03-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로쟈님. 한때 씨네21의 열혈 애독자였습니다만, 근래의 씨네21은 예전의 그 톡쏘는 '취향'의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스스로의 '수준높음'에 도취된 듯 보입니다. 이번호 필름2.0은 정말 재밌더군요.^^

로쟈 2006-03-2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취이면서 매너리즘 같기도 합니다. 자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리뷰들이 아주 드물게 눈에 띄는 것이 제 시력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twoshot 2006-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는 아니고 또 제가 [씨네]의 내부자도 아니지만 '리뷰'에만 초점을 맞춰 말해보면:김소영,허문영,정성일등의 [전영객잔]은 필자들의 명성에 값할만큼 수준이 고릅니다. 다른 비평은 보통 신진들로 채워집니다. 또 김혜리, 정한석등의 일급 내부필진이 그 뒤를 받치고 있고요. 홍성남의 성실한 글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읍니다. "뭐 이정도면"하는 도취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최선의 의도'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그게 쉽지는 않겠다는 거죠...문예지들에 그득한 '도취와매너리즘'이 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로쟈 2006-03-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필름2.0>에도 두어 편의 읽을 만한 리뷰들은 실립니다. 해서 저의 불만은 정확히 <씨네21>이 <필름2.0> 3권 값을 하느냐입니다. 외부 필자들과 정한석 기자의 글들이 눈에 띄지만, '내부'는 예전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결정타는 '2005년 베스트 초이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수작이었습니다(막바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더군요). <씨네21>은 그 이후에 제게 아직 신뢰감을 회복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twoshot 2006-03-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처구니 없는 수작'에 대해서...다른 물건은 차치하고라도 아무개기자가 추천한 '디빅 플레이어'를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어리둥절했었습니다. 씁쓸했구요. 헌데 '생선회칼'과 '만년필'이 들어간 그 '페이퍼'가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물건들에 대한 페티쉬가 저의 취향에는 먹혔던 거죠. '하이비'같은 잡지에서 볼 수있는 억대 오디오는 아예 쳐다 보기도 싫지만...짐작컨대 그것은 씨네의 '엘리티즘'에 대한 내부의 가벼운 반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잡지의 잡스러움은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게 아쉬움을 넘어 좀 안타까웠지만...

로쟈 2006-03-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잡지에 대한 기대나 취향의 차이일 듯합니다. 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기 위해서 영화 잡지를 사 읽는 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