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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천식 때문에 잠이 깨어 보니 2시 반이 넘은 시각이었고(알레르기성 천식이 나의 오랜 지병이다), 습관처럼 TV를 켰다. 보통 YTN의 뉴스를 소리없이 (자막만으로) 보거나 하는데, 일어난 김에 SBS에서 예고돼 있던 영화 <클린>의 마무리 장면을 보기 위해 채널을 돌렸다. 올리비에 아샤야스 감독의 영화 <클린>은 작년 칸느영화제에서 장만옥(장만위, 매기정, 메이첸)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던 작품(나는 수상식장에서 그녀가 호명되는 모습을 작년 모스크바에서 TV뉴스 시간에 볼 수 있었다).

 

 

원래 0시 50분부터인가 예정돼 있던 영화를 컨디션도 안 좋은지라 포기하고 일찍 잠자리에 누웠었는데, 마침 영화가 끝나는 시각인 3시 이전에 깨 잠을 설치는 김에 마지막 장면을 봐두기로 했다. 그건 문학평론도 겸하고 있는 영화평론가 강유정이 동아일보의 프로그램 소개란에서 강추해놓았기 때문. 장만옥의, 장만옥을 위한 영화라고. 그녀의 전남편 아샤야스에 의한.  

 

"잘나갔던 한때 이후, 곧 재기의 날이 오리라 허영 같은 자존심을 부리는 여자가 있다. 그녀가 바로 에밀리. 하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이다. 약물 과용으로 죽은 남편, 그리고 자신과 헤어져 살 수밖에 없게 된 아들. 약물 소지 혐의로 실형을 언도받고 아이마저 시부모에게 뺏겨 버린 에밀리에게 일상은 고통이다. 마약의 습관과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 고통,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고통, 그리고 아들을 볼 수 없는 고통. 이 외로운 마음의 감옥에서 에밀리는 아들을 데려올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프랑스 런던 샌프란시스코를 오가는 그녀의 유랑기는 장만위의 유창한 3개 국어 실력과 더불어 묘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멀리 방랑하는 만큼 그녀의 삶은 신산하고 애처롭다. 시아버지 역할을 맡은 닉 놀테의 우려하는 듯 고즈넉한 눈빛 연기 역시 일품이다. 아들을 위해 다 타버린 재와 같은 삶에서 희망을 찾는 여자 에밀리. 타인과 소통하기 힘든 삶의 상처를 지닌 자들에게 아마 <클린>은 속 깊은 상담자와 같은 위안을 줄 법한 영화이다."(★★★★★)

 

나는 영화의 끝에서 닉 놀테와 장만옥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리고 장만옥이 스튜디오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등을 보았다. 비록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긴 하나 내가 감정이입할 여지가 적은 영화여서 노래가 나오는 장면 빼고는 볼륨도 제로로 해놓고 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장만옥을 매개로 해서 몇 가지 추억을 떠올렸다. 작년 봄과 늦가을에 쓴 모스크바통신들도 새삼 들춰가면서. 먼저 작년 칸느영화제의 수상식장으로 잠시 돌아가본다.   

 

 

 

 

 

  

 

 

 

-지난 토요일에 제57회 칸느영화제가 폐막됐다. 나는 토요일밤 이곳의 심야뉴스를 통해서, 마이클 무어가 그랑프리를 받았다는 소식은 접했지만,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의 수상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TV뉴스를 들을 때는 일단 화면에 비치는 걸 토대로 들리는 단어들을 재구성해보는 것인데,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의 수상에 대한 장황한 소식을 전하면서도 두 번째 상(심사위원상)을 받은 감독과 영화에 대해서는 단 한 장면도 할애되지 않았고,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화면에 장만옥(메이 첸)의 모습이 잡히길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나 짐작해본 정도가 뉴스를 통해서 내가 받은 인상의 전부였다(수상소감을 말하는 장만옥이 아니라 객석에 앉아 있는 장만옥만 카메라에 잡았기 때문이다. 메이 첸이 장만옥의 이명(異名)이란 걸 다시 떠올리게 된 건 이번주 월요일자 신문을 보면서이다).

 

-일요일 저녁에 사업을 하는 친구와 몇 주만에 만나서 같이 산책을 하고 맥주를 마셨다. 산책은 러시아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과 중 하나인데, 그건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 가장 흔하게 쓰는 회화표현이 같이 차 마실래요?같이 산책할래요?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도심에 나무와 숲, 공원이 많기 때문에 산책을 즐길 만한 여건도 된다. 우리처럼 매연을 마시면서 산책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대로에서 몇 걸음만 옆길로 새면, 바로 숲속이고 새들이 지저귀는 자연의 품이다. 물론 비가 오는 날 산책하는 건(영화제목대로, 우중산책!) 권할 만하지 않지만.

 

-비가 흩뿌리지 않아도 잔뜩 흐린 날씨였다.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 출발하여 가까이에 있는 작은 호수(어느 정도 크기의 못이면 호수로 쳐주는지 모르겠지만)를 한 바퀴 돌아서 도로변을 걷다가 숲길로 빠졌다. 그가 자주 애용하는 산책 코스라고 하는데, 저녁에 혼자 돌아다닐 때는 골프채를 들고 간다고(혹 다섯 명이 시비를 걸어와도 문제없다고 한다!). 호수를 한 바퀴 돈 건 가끔 그곳에서 낚시를 즐기는 북한 외교관들을 볼 수 있다고 해서였다. 북한대사관 건물은 바로 호수 건너편에 있었는데, 이날은 흐린 날씨 탓인지(외교관들이 바쁠 일은 없을 것이기에) 북녘 사람들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다른 유학생의 말에 의하면, 크레믈린 광장에서도 가끔 북한 사람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한번은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걸었더니 황급히 자리를 피하더라고. 덧붙여, 이곳의 북한대사관 직원들이 근래에 차를 새 걸로 다 바꿨다고 한다.

 

-숲길을 20분쯤 더 걸어가니까 바로 엠게우(모스크바대학) 정문 앞 광장과 연결되었다. 알고보니, 이전에 한 유학생이 한번 가보라던 산책로를 거꾸로 걸어온 셈이었다. 바로 앞이 참새언덕. 사전을 보면, 참새언덕은 엠게우가 위치하고 있는 레닌언덕의 옛 지명(地名)이다. 그렇다면 그 지명이 레닌언덕으로 완전히 대체되지는 않은 셈인데, 마치 러시아 혁명미완의 기획으로 남은 것과 상관적인,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레닌은 끝내 이 언덕에서 참새들을 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리하여, 남은 건 일종의 타협인데, 대로(大路)레닌이 차지하고 전망은 참새가 차지하는 식. 우편물의 주소엔 레닌언덕이라고 쓰지만, 전철역 이름은 또 참새언덕이다. 해서, 혁명은 혁명이고, 참새는 참새이다(유구한 참새들의 일상이여!).

 

-이전에 소개한 바대로, 참새언덕은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지대이고, 그런 만큼 가장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맑은 날이면 사람들이 북적대지만, 이날은 흐린 날씨 탓인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는 않았다. 나는 친구가 안내하는 대로, 야외 레스토랑에서 러시아산 생맥주 두 잔과 러시아식 고치구이인 샤슬릭을 안주로 먹었다. 나중에 계산하는 걸 보니, 샤슬릭 한 접시에 250루블, 즉 만원이었다. 사업하는 친구도 굉장히 비싸다면서, 가격을 한번 더 확인했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전망도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칸느영화제 소식을 아느냐고 물으니까(친구는 낮에 사무실에 들렀다가 오던 길이었다), <올드보이>가 심사위원상을 받아서 한국은 난리란 얘기를 했다(왜 아니겠는가?). 타란티노가 좋은 일 한번 한 셈인데, 사실 (타란티노의 취향을 고려한) <올드보이>의 수상가능성은 (한국에서야 더 잘 알겠지만) 이미 외국 언론쪽에서도 점쳐온 것이었다. <이즈베스찌야>의 영화제 취재기자이자 영화담당 기자인 마리야 쿱쉬노바에 의하면, 영화제 중간에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밀고 있다는 소식을 이미 <버라이어티>지가 보도했고, 쿱시노바 역시 <올드보이>가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고 예견했었다.

 

-그밖에 영화계쪽은 잘 모르는 친구가 전해준 소식은 일본의 14세 배우가 최연소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게 전부였다(나중에 신문을 보고 안 이름은 이유라 야기라인데, 러시아식 표기라 우리와는 다를 수 있다). 홍콩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느냐고 물으니까, 그건 아니라고 했는데(아마 장만옥을 모르든가, 메이 첸을 모르든가), 그건 그럴 만했다. 알고 보니까 프랑스 영화에 출연한 걸로 수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장만옥은 이전에도 프랑스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다. <이마베프> 같은. 어쨌든 홍콩영화의 디바 한 명이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축하할 일이다(문득 든 생각이지만, 장만옥은 관금붕의 <완령옥>으로도 어디서 주연상을 받았는데, 그게 국내영화제였는지 국제영화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번이 최초 수상이라면, 좀 늦은 감도 없지 않지만...

 

Irma Vep Demonlover (Unrated Director's Cut)  

<이마베프>(1996)는 <클린> 이전에 국내에 유일하게 비디오로 소개됐던 영화인데, 아샤야스가 찍은 영화라는 걸 나는 나중에 알았다. 영화는 장만옥이 주연을 맡았었는데, 감독과 주연배우로 만났던 두 사람은 이후 결혼에까지 골인하지만 3년 후에 다시 헤어진다고. 즉, <클린>(2004)는 헤어진 전남편이 아내를 위해서 (뒤늦게) 찍은 영화이다. 그 사이에 아샤야스가 내놓은 영화가 <데몬러버>(2002)인데, 나는 작년 겨울인가 모스크바에서 TV로 이 영화를 보았다. '산업스파이에 관한 사이버스릴러'인데, 씨네21에 실린 기사에 의하면 "<데몬러버>는 일본 성인 아니메의 세계배급권을 협상하는 프랑스 다국적 기업의 여성 간부가 거대 인터넷 기업의 사주를 받아 스파이활동을 하며 야심을 키우다가 온라인 SM클럽의 노예로 전락한다는 이야기"인데, "관객과 평론가들은 <데몬러버>의 형식적 '자폭'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영화가 포르노적 이미지를 비판하는 것인지 탐닉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고 꼬집었다."(김혜리 기자)

 

 

 

 

  

  

 

 

나 또한 내가 유일하게 본 아사야스의 영화를 불쾌하게(더불어 정신없게) 보았기에 그에 대한 인상이 그닥 좋지 않았다. 해서, 가스파르 노에나 프랑수아 오종, 아샤야스 등이 프랑스 영화의 '장래'라면 참 암담하다는 생각까지 했더랬다. 재치나 파격만으로 영화의 장래를 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여하튼 장만옥에 대한 생각은 그녀가 나온 영화들을 꼽아보는 순서로 이어졌는데, 내가 본 최초의 영화는 주윤발과 공연한 <로즈>(1984)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유금세월>(1988) 같은 게 조금이라도 기억에 남아있는 영화이다(모두 극장에서 봤다). 미인대회 출신으로 기억되는데, 글래머라는 것 말고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었다.

   

 

 

 

 

 

 

 

 

    

그러다 장만옥이란 이름을 기억하게 된 건 순전히 왕가위 <아비정전>(1990) 덕분이다. 아주 오래 전 대학가에서 하숙할 때, 가끔 비디오가게에서 아예 비디오와 함께 테이프 5개를 빌려다가 밤새 보곤 했는데(보다가 지쳐 떨어질 때까지), 어느 날 빌린 5개의 테이프 중 하나가 <아비정전>이었고, 나는 이 영화를 그 자리에서 연거푸 봤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봤고, 지금은 테이프를 아예 가지고 있다(그때 이후로 물론 왕가위의 모든 영화이다!). 왕가위의 데뷔작 <열혈남아>(1988)와 관금붕의 <완령옥>(1991)은 그 이후에 본 걸로 기억된다.

 

 

장만옥의 베스트로 많은 이들이 꼽을 만한 영화는 역시나 왕가위의 <화양연화>(2000)이겠지만, 개인적으론 홍콩영화의 또다른 디바 임청하와 공동으로 주연한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임청하에게 장만옥만큼 좋은 영화운이 따르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왕가위의 <동사서독>(1994)이 그것이다(그런 영화로 서극의 <신용문객잔>도 있다. 두 여우 주연의 연기 대결만으로도 볼 만한 영화). 이 영화에는 물론 장국영이 주연으로 나오며(<아비정전> 이후의 해후인가?) 다른 조연들도 모두 홍콩영화 최강의 배우들이다. 그렇게 1990년대 전반기가 (주로 왕가위의 영화들에서) 장만옥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내가 경탄하는 이미지와 연기의 장만옥은 그때 그 시절의 장만옥이다.

 

언젠가 나는 <동사서독>이 개봉하던 날 혼자 을지로 3가의 명보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그 길로 종로로 가 명보아트홀에서 연이어 같은 영화를 또 본 기억이 있다. 아마도 겨울이었던 것 같은 그날 저녁 을지로에서 종로까지 걸어가던 나의 모습이 떠오른다. 혼자였지만 적어도 그런 날만큼은 덜 행복하지 않았다. 이후에 이 영화를 나는 비디오로도 소장하게 됐다. 하지만, 집에서는 거의 본 적이 없다(이 영화는 집안에서 보는 영화로 적절하지 않다. '집밖'에서 봐야한다). 한번 사그러진 시간의 재(Ashes of Time)는 다시 쓸어담을 수 없다. 우리에게 남은 건 일상일 뿐. 마약의 습관과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는 고통, 사랑했던 남편을 잃은 고통, 그리고 아들을 볼 수 없는 고통. 이 외로운 마음의 감옥에서 아들을 데려올 수 있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에밀리처럼.

 

 

 

05. 11. 21.

 

P.S. <동사서독>에 나오는 장만옥의 가장 아름다운/처연한 대사: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 나는 혼자였어요..."

 

P.S.2. 장만옥 대사의 풀버전은 이렇다: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 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난 이겼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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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야놀러가자 2005-11-2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만옥과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
로쟈님, 천식 정말 조심하셔야 하는데.
집안에 약간의 내력이 있어서 잘 아는데, 별 것 아닌것 같지만
그게 사실은 사람 잡는 병이예요.
그런 주제에도 저는 잘도 담배를 피워대고 있습니다만.
아무튼 건강 조심하세요.

로쟈 2005-11-21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은 좋은 약들이 나와 있는데, 주말에 약이 떨어져서 하루 고생했던 것뿐입니다(그러니 염려 놓으시길). 그리고, 금연하세요!..

하이드 2005-11-2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린' 보며, 장만옥이 정말 부럽더군요. 불어와 중국어와 영어를 원어민처럼 자유롭게 하고, 노래하고, 연기하고, 예전에는 좀 식상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전 임청하팬이었습니다.^^) 클린에서의 모습을 보니, 아시아배우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멋지게 나이들어가는 배우가 아닌가 싶더군요. 클린, 마지막 장면이 정말 찡한 영화였어요.

로쟈 2005-11-2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유일하게'?!(비교대상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데뷔 20년쯤 되는 장만옥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우리 나이로 42살이니까. 마돈나보다 6살이 적은. 그리고 임청하보다는 10살이 적은!..

이리스 2005-11-21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홀로 캔맥주 마시며 이 글을 보는 지금, 아.. 간절히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ㅠ.ㅜ

로쟈 2005-11-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문턱에도 캔맥주를 즐기시나 보군요. 좀 춥지 않으세요?^^

이리스 2005-11-2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헷..집은 더운편이라서욤. ^^

하이드 2005-11-22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깐, 아시아계 배우중에서 사실, 40대에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아시아 배우 장만옥 말고는 떠오르지가 않네요. 임청하.. 가 52! 살이라구요. (그녀의 마지막 영화를 본게...)
 

 

 

 

 

 

  

 

 

한 지인의 블로그에 갔다가 어제 열렸던 한국과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축구 경기를 빌미로 발칸의 나라 (구)유고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글을 읽었다. 과거 걸출한 공산주의자였던 티토에 의해 스탈린식 사회주의와는 다른 '제3의 길'을 진작에 모색하기도 했던 유고 연방은 1989년부터 몰아친 동구권 사회주의의 연쇄적인 몰락과 함께 해체되어 현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으로 분할돼 있다. 그간에 축구강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나라는 크로아티아였지만, 알다시피 내년 독일 월드컵에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출전하며 어제 우리 국가대표팀과 평가전을 가진 것.

 

Do You Remember Dolly Bell?When Father Was Away on Business

 

지난 90년대 초반 민족간/종교간 갈등 문제로 불거진 보스니아 내전으로 언론에서 자주 접하기도 했던 나라이고 지역이지만, 유고란 이름을 내게 처음 각인시켜준 이는 영화감독 에미르 쿠스투리차(1954- )이다('에밀 쿠스트리차'로 처음 소개되었었다). 기억에 88년쯤에 종로의 피카디리 극장에서 <아빠는 출장중>을 보았고 단번에 쿠스투리차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것(영화의 끝장면에 유고 대표팀의 축구 경기가 TV로 중계되는 장면이 나온다).

 

Time of the GypsiesArizona DreamUnderground

 

그는 작년까지 25년 동안 7편의 장편영화를 찍었는데, 기억을 더듬어 차례로 나열하면, <돌리 벨을 아십니까?>, <아빠는 출장중>, <집시의 시간>, <아리조나 드림>, <언더그라운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삶은 기적이다> 등이다. 이 중 맨처음 영화와 마지막 영화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고, <아리조나 드림>은 수입됐지만 내내 창고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듯하다(이기팝의 주제가만이 드라마 등에서 자주 흘러나왔다).

 

Crna Macka, Beli Macor (Black Cat, White Cat) - PAL DVDZivot Je Cudo (Life Is a Miracle) - PAL DVD (Official Russian release)

 

알라딘에 이미지가 없어서 영화의 타이틀 이미지들은 아마존에서 따왔는데, 마지막의 <검은 고양이, 흰고양이>와 <삶은 기적이다> 두 이미지는 러시아판의 것이다.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를 나는 몇년 전에 동숭아트홀에서 봤었고, 국내에서 아직 개봉되지 않은 영화 <삶은 기적이다>는 작년 연말에 모스크바에서 비디오CD를 구해서 봤다(영화는 작년 칸느영화제 출품작이었고, 모스크바에도 일찍 소개됐다). 그때 쓴 모스크바 통신의 내용을 잠시 옮겨온다.

 

삶은 기적이다

 

-‘Life is a miracle은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최근작 <삶은 기적이다>(2004, 155)의 영어/공식 제목이다(러시아어 제목을 영어로 옮기면, Life as a miracle). 이 영화는 지난 봄에 칸느영화제에 출품됐었고(내 기억에, 쿠스투리차는 <아빠는 출장중> <언더그라운드>로 칸느에서 두 차례 작품상을 받았으며, <집시의 시간>으로 감독상을 받은 바 있다. 이 신작의 돈줄도 프랑스이다), 지난 6월에 모스크바 영화제에 초청되었고(이 영화제에서 그는 공로상을 받았다) 이어서 8월에 공식 개봉되었다. 나는 최근에 비디오CD로 출시된 걸 사서 봤다(영화관람료의 1/2로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출시되기를 기다렸었다).

 

 

-감독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보스니아 전쟁의 패러독스와 부조리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는 이 영화는 에미르 쿠스투리차 종합선물세트 같다(*발칸의 운명을 다룬 영화들로 <언더그라운드>와 함께 꼭 비교해서 보아야 할 영화들은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율리시즈의 시선>과 밀코 만체브스키의 <비포 더 레인>이다). 나는 그의 영화 <아빠는 출장중>을 오래 전 피카디리극장에서 처음 보고서 한 방 얻어맞았고(그날 밤의 종로 3가를 아직 기억한다. 나는 비틀거리며 하숙방에 돌아오자 마자 혼수상태에 빠졌었다), <집시의 시간>을 개봉되기도 전에 조야할 필름으로 여러 번 보면서 넉다운됐었다. 그는 영화는 기적이란 걸 내게 보여주었다.

 

 

-<집시의 시간> 이후의 그의 영화들은 더 이상 나를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기엔 낯선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친숙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나는 그의 데뷔작 <돌리 벨을 아십니까?>와 미국에서 찍은 <아리조나 드림>을 보지 못했다. 그 영화의 주제가가 이기 팝의 노래이다. 나중에 국내의 드라마 주제가로도 쓰인). 모스크바에 곧잘 들르는 그가 지난 17일에는 자신이 조직한 밴드 를 이끌고 와서 연주공연을 했는데(영화감독들 중 열렬한 밴드부원들이 몇 있는데, 쿠스투리차와 함께 우디 알렌, 짐 자무시, 아키 카우리스마키 등이 내가 아는 사례들이다), 이를 계기로 언론에 게재된 인터뷰를 보고서 나는 이 친숙한 세계에 대해서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세계, 혹은 집시의 시간을 그는 중세적 세계라고 불렀다(물론 자신에 영화에 등장하는 집시들은 언제나 은유라고 그는 <아피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리고 인터뷰어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세르비아에 다녀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쿠스투리차가 낭만주의자가 아니라 리얼리스트라고 말한단다. 쿠스투리차의 영화세계가 (지나치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르비아에 한번 가볼 일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포스트모던을 새로운 중세라고 불렀지만, 쿠스투리차에게 있어서 이 둘은 서로 대조/대립된다. 하지만, 에코와 쿠스투리차의 중세가 동일한 외연을 갖는 건 아니므로 이러한 의견차이는 수긍할 만하다. ,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중세가 중심부 중세라고 한다면, 세르비아(구 유고) 사람 쿠스투리차의 중세는 주변부 중세이기 때문이다(역사상 집시들이 중심부에 있었던 적은 없지 않은가). 하여간에 쿠스투리차에게 2004년은 아주 뜻 깊은 한 해였는데, 그건 그의 신작 영화 때문이 아니라 그의 도시 때문이다. 도시라고는 부르지만 우리식 명칭으론 마을이라고 해야 할 텐데(우리로 치면 민속촌 같은 집시촌이다. 한번에 50여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는 실제로 영화 <삶은 기적이다>의 배경으로 나오는 이 마을을 직접 건설하여 자신의 소유로 갖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 마을의 시장이자 촌장이다(그가 꿈꾸는 마을은 초기 기독교 수도원이나 히피공동체이다).

 

-쿠스투리차의 그 중세적 마을은 베오그라드로부터 200킬로쯤 떨어져 있으며, 여관/호텔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구경꾼들) 사절이다. 쿠스투리차는 자신의 말마따나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지만, 자선(自選) 시장으로서 자신의 시민들을 직접 뽑아서 살게 할 계획인데, 주로 영화나 미술, 문학 등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2달 정도씩 (집시적으로 혹은 히피적으로) 함께 살면서, 전통 제련술부터 개념주의(예술사조로서의 개념주의를 말한다)까지 배우면서, 한마디로 Culture and agriculture하면서, 연구와 세미나, 잔치(축제) 같은 걸 벌이게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도시/마을의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쿠스투리차란 이름은 한 거장의 이름이면서 이젠 한 지명(地名)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쿠스투리차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지요?(*구글 어스에서 찾을 수 있을까?)

 

Unza Unza Time

 

 -쿠스투리차가 베이스 기타를 맡고 있는 집시 테크노 밴드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의 지난번 모스크바 방문은 유럽 투어의 일환이었는데, 이들의 새 앨범이 바로 <삶은 기적이다>의 사운드트랙이었고, 이 앨범 출시를 계기로 이루어진 투어의 타이틀은 삶은 그냥 여행(투어)이 아니라 기적이다였다. 그런 걸 말하기 위한 투어였으니까 이들의 투어는 수행적 혹은 화용론적 모순의 일례라 할 만하다. 인생은 여행길이고 나그네길이고 소풍길이란 얘기들을 하지만, 나는 그러한 태도의 이면이 기적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피가 아닌가 싶다. 누가 여행을 하는가? 자신의 삶을 기적으로 만들기/연출하기가 두려운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의 기적과 남들의 기적을 구경하러 다닌다. 그리고 그런 기적들 옆에서 사진을 찍는다. 남들의 기적이 자신에게 옮기를 바라는 듯이.

 

 

 

 

 

 

 

 

  

 

-세르비아인으로서 쿠스투리차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보 안드리치이다. <드리나강의 다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유고 작가(안드리치의 허름한 작품집을 헌책방에서 봤지만 사지는 않았다). <도서평론>이란 저널에서 한 해를 결산하는 설문들을 명사(名士)들에게 돌렸는데, 그가 거기에 답한 내용이다. 연말이고, 이미 이달 초부터 발행년도가 2005년이라고 찍힌 책들이 나오고 있다. 내게 2005년이 갖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다. 2005년의 책들이 나온다는 것. 이미 나온 2005년의 책들 가운데는 타르코프스키에 관한 책도 있고, 라캉 노트 포켓북 시리즈로 지젝과 류블랴나 학파의 책들도 있다. 지젝의 것은 <상호수동성>이란 제목으로, 돌라르와 보조비치, 주판치치 글을 묶은 책은 <사랑이야기>란 제목으로 나왔다(*주판치치의 글은 얼마전에 번역서가 나온 <정오의 그림자>에 부록 '희극으로서의 사랑에 대하여'이다)...

 

 

 

 

 

  

  

 

 

그랬던 게 작년말이니까 어느새 일년이 지나고 있다(곧 2006년의 책들이 나온다!).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는 (무거운) 러시아어본을 구해왔었고, 지금은 친구에게 빌린 국역본과 함께 내 서가에 누워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들처럼(로쟈 왕자는 내내 일없이 출장중이다). 안드리치에 이어서 내가 떠올리는 이름이 슬라보예 지젝인데, 그는 과거 유고연방을 구성했던 슬로베니아가 낳은 최고의 스타 지식인이다. 슬로베니아 사람 지젝이 세르비아 사람 쿠스투리차에 대해 비판의 메스를 가하고 있는 대목이 <환상의 돌림병>(인간사랑, 2002)의 한 절 '인공청소의 시'이다(123-130쪽; 'The Plague of Fantasies', 60-64쪽). 이에 대한 정리는 물론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 가능하다...

 

05. 11. 17.

 

P.S. 쿠스트리차와 자주 같이 작업을 하고 있는 고란 브레고비치의 집시밴드도 내한 공연을 했던 듯한데, <노 스모킹 오케스트라>의 음반이 국내엔 나와 있지 않은 것인가? 음악을 같이 올려놓지 못해 약간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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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5-11-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평소에 월드뮤직...이랄 것까지는 없고, 중남미를 중심으로 세계 여러 곳의 음악을 듣는 걸 즐기는데, 로쟈님 글 보고 찾아보니 MP3가 몇 개 있더군요.
찾아서 구해놓기만 하고 듣지 않은 음악 파일이 몇 십 GB 단위까지 올라가는 마당에, 이렇게 기억을 되돌이켜 주시니 감사하네요.
"Bulgarian Dance"란 곡인데, 방문객 여러분도 한 번 들어보시죠? ^^

로쟈 2005-11-1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까지 서비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취향이 좀 촌스러워서) 어코디언이 많이 들어간 쪽입니다. 피아노 소리보다 어코디언 소리를 더 맘에 들어하는 걸 보면 전생에 집시였는지도...

불한당들의 모험 2005-11-18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아노 소리도 좋지만,아코디언도 좋아요,집시까진아니지만멜로트론같은구닥음도 좋답니다.간만에 들으니 아싸!흥~이.삶은기적ost는 1년이 지났는데도못구해서Unza Unza Time으로 위로를 삼고 있죠.작년인생은기적을봤었는데,이글보면서또즐거운되새김질하고있습니다.쿠스트리차마을얘긴신기하면서재밌는소식이었요.

2005-11-18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11-18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험님/ '신기하면서재밌는 소식'이셨다니 저도 신납니다. 밥먹으러 가야겠습니다.^^

jiwok 2005-12-28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십니까? 로쟈님.
저는 2차대전 러시아 사회에 대해 관심이 있는 회사원 입니다. 실례되는 것은 알지만 마땅한 자료를 구하지 못해서요. 궁금한 것은 한국에 번역된 서적 중 1940년대 독-소 전쟁 시기에 대한 경험담/개인적인 회고록/소설/ 역사서 등이 있는지요? "여기 들어오는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은 읽었습니다만 자주 인용되는 서적 중에 Vasilli grossman의 "Life & Fate"가 있던데 매우 궁금했습니다만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vandal 2006-01-26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밀 쿠스트리차의 아빠는 출장중 볼수없나요?? DVD도 품절이고 갖고 계신분 있으면 공유해서보면 안될까요??? 이작품아니고도 다른작품도 괜찮습니다. 구하기가 힘드네요.....
부탁합니다.^^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는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가 던진 질문이면서, 자크 오몽 등이 지은 영화학 입문서 <영화미학>의 4장(영화와 언어) 2절 제목이기도 하다. 1983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프랑스에서 나온 대표적인 입문서로 보이는데, 이미 지난 94년에 강한섭 교수에 의해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열린책들)란 제목으로 국역본이 나오기도 했다(현재는 절판됐다). 그때 후배들과 영화학 세미나를 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우리말로 읽기에 난감했던 기억은 없다. 'code'를 '기호'라고 옮긴 것이 다소 낯설었을 뿐. 이 책의 새로운 국역본이 <영화미학>(동문선, 2003)이며 역자 후기에 따르면, 1994년에 나온 개정증보판을 옮긴 것이다(들뢰즈에 관한 내용이 추가된 걸로 돼 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들뢰즈의 <시네마1,2>는 <영화미학>의 초판 이후에 출간됐다).

 

 

 

 

자크 오몽의 책으로는 자신을 포함하여 영화학자 4인의 공저로 돼 있는 이 '교과서' 말고도 또다른 공저 <영화분석의 패러다임>(현대미학사, 1999)과 단독저서인 <영화감독들의 영화이론>(동문선, 2004)이 번역/소개돼 있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오몽은 한국 여성과 결혼했으며 여럿의 한국인 제자들을 가르쳤고, 그런 인연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프랑스에서 대표적인 한국영화의 옹호자이다(특히 홍상수를 지지한다고). 이른바 '한국통'인 것이다. 해서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되어 나쁠 건 없어 보인다(개인적으론 그의 '교과서적인' 책들에 큰 감흥을 느끼진 않지만, 영화학도들이 적극 추천하는 <몽타주 에이젠슈테인>의 영역본까지 구해두었다) .

이런 '좋은 얘기'들로 화기애애하게 책 이야기를 이어나갔으면 좋겠지만, 굳이 이런 자리를 빌어 오몽 얘기를 꺼내는 것은 <영화미학>의 번역에 다소 실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정색을 하기로 하자. 오래전 책이라 책꽂이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영화미학>보다는 <영화학,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는 게 더 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판단의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란 절이며 여기서는 213-4쪽 두 페이지를 따라가본다. 내가 읽은 것은 국역본 외에 2004년(5판)에 나온 영역본 (텍사스대학출판부)이다. 이 영역본은 2002년에 처음 나왔지만, 1983년의 초판본을 옮긴 것이고(해서 본문에서는 들뢰즈에 대한 언급이 딱 한번 등장한다), 참고문헌만이 업데이트 돼 있다. 덧붙여 말해두자면, '영화와 언어'를 다룬 4장은 공저자 중 미셸 마리가 집필했다.

영화학사에 관련한 책을 한번이라도 들춰본 독자라면 '영화와 언어'라는 문제가 중요한 쟁점이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그것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다섯 가지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여러 영화학자들이 '영화언어'에 대해 언급하고 자기주장을 펼쳤지만, 이 문제에 관한한 권위자는 단연 메츠이다. 일단 그 자신이 언어학자였던 메츠는 영화학에서 다소 무분별하게, 혹은 언어학적 엄밀성을 결여한 채 사용되고 있던 영화-언어의 문제에 메스를 가하면서 이 문제를 새롭게 정식화한다. "영화, 랑그인가 언어인가?"라는 물음은 그러한 메츠의 문제의식을 집약해주는 물음이다.

문제는 불어에서의 '랑그'와 '언어(랑가주)'의 구별을 영어나 한국어는 안 갖고 있다는 것. 해서, 불어권에서 유의미하게 제기되고 정리된 문제가 영어나 한국어에서는 다소 현학적인 논쟁으로 비쳐질 수 있다. 불어의 '랑그'나 '랑가주'나 일반적으론 '언어'라고 통칭되기 때문이다(마치 '개'나 '소'나, 처럼). 둘 사이의 구별을 영어에서는 '언어체계(language system)'와 '언어(language)'라는 말로 표시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한국어 대응어가 다소 어색한 조합이지만 '랑그'와 '언어'이다.

그런 사전지식을 배경으로 다음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연구 방법의 출발점은 이런 명제에서 시작한다. 영화는 어법으로 가정되지만 곧 문법적으로는 언어로서 연구된다." 무슨 뜻인가? 문제는 제목에서 던진 '랑그'와 '언어'의 대립이 이 두 페이지에서는 실종되고 대신에 '언어'와 '어법'으로 대치된 데 있다(이건 좀 이상한 일인데, 214쪽부터는 '랑그'란 말이 다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마 이 두 페이지만 어떤 미숙한 조력자가 번역을 따로 했던 것일까?)

어려운 내용이 아니므로 불어본과 별 차이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영어본에서 이 대목을 옮겨오면 이렇다: "By contrast, the point of departure for Christian Metz's work is based on a very different assumption: the cinema is postulated as a language, yet it is immediately studied as a verbal language system."(142쪽) 우리말로 옮기면, "크리스티앙 메츠의 작업은 이와는 좀 다른 가정에서 출발한다. 영화가 언어(=랑가주)로 간주되면서도 실제로는 랑그로서 연구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언어학에 좀 '약한' 이들이 언어와 랑그의 차이를 무시한 채 '영화언어' 얘기를 늘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짐작에 국역본은 (랑그도 아닌) '랑가주'를 '어법'으로 옮기고, '랑그'를 '언어'로 옮겼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교통정리가 되는 건지?

이어지는 문장이 더더욱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겠다: "메츠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언어와 말의 총체로서의 어법)에서 착상하여 영화 언어를 언어를 규정하는 특징들에 대립시키면서 영화언어의 규범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이 되는 삼분법이 '언어의 총체로서의 어법'이라는 내용을 어떤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지, 혹은 인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3분법이니까 우선 세 항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인바, 번역문에서 그 세 항은 '언어' '말' '어법'이다. 짐작에 그 세 항은 원문에서 '랑그'와 '파롤', 그리고 '랑가주'이며, 이것은 영어로는 'verbal language system'(=랑그), 'speech-act'(=파롤), 'language'(=언어)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법'이란 것이 그보다 더 큰 '언어'와 '말'의 합, 그러니까 <어법=언어+말>이 될 수 있는가?

그런 의문을 따져보는 건 한가한 시간에 하고, 일단 진도를 나가자면 소쉬르가 제시한 3분법이란 <언어=랑그+파롤>을 말한다(이건 나의 '잡학'과는 정말로 무관한 지극히 기본적인 내용이다. 모든 언어학 개론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해서, 인용문장을 다시 옮기면, "언어를 랑그와 파롤의 총합으로 이해하는 소쉬르 언어학의 기본적인 3분법에 의거하여, 메츠는 영화언어를 랑그의 특징들과 대조시킴으로써 영화언어의 지위를 자세히 해명하고 있다."

언어체계로서의 랑그란 말이 생소한 분이 있다면, '이중분절체계로서의 언어'라는 걸 떠올리시면 된다. '이중분절'이란 건 우리가 쓰는 자연어(한국어, 불어, 영어 등)에서 각 단어가 형태소로 분절되고, 또 그 형태소는 더 작은 단위의 음운으로 분절되는 식의 현상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절의 가능조건은 '형태소'나 '음운' 같은 단위들의 존재이다(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작업은 그러한 단위들을 분리/추출하는 것이다). 영화의 쇼트나 프레임이 그러한 단위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이 '영화언어'의 지위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질문이다. 그리고 메츠의 입장은 영화언어가 그런 이중분절체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 즉 랑그가 아니라는 것이다(에코는 보다 강경하게 랑그로서의 영화언어를 주장한다).

뒤따르는 부연설명: "이런 대조적인 측면은 본질적으로 1964년 <코뮈니카시옹> 제4호에 처음으로 실렸고 <영화의미론> 제1권에 수록된 "영화, 언어인가 어법인가?"라는 논문에서 알 수 있다. 이 잡지에는 또한 그후 10년간 기호학 연구의 프로그램에 뛰어든 롤랑 바르트의 "기호학의 여러 가지 요소"라는 논문도 실려 있다." 즉, <코뮤니카시옹>이란 잡지의 제4호에 매우 중요한 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 것. 메츠의 책 <영화의미론>의 원제는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시론> 정도가 되며, 두 권짜리이다. 그 중 1권이 <영화언어(Film Language)>로 영역돼 있다. 바르트의 책은 흔히 <기호학 요강>으로 알려진 책이고, <영도의 에크리뛰르/ 기호학의 원리>(동인, 1994)란 책에 포함돼 있다(역시나 번역은 추천할 만하지 않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도 어렵지만). 그리고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에 뛰어든" 게 아니라 "기호학 연구 프로그램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프랑스에서 기호학이 본격화되는 것은 바로 이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기호학은 다른 어법들의 언어학적 착상의 분석방법의 일반화로 규정될 수 있다." 젠장, 오역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어가 왜 이 모양인가? 영어로는 "Semiology may be summarized as the application of the process of analysis originating in linguistics to other languages."이다. 이런 대목은 기호학의 기본 상식이기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기호학은 언어학의 분석절차를 다른 언어들에 적용하기로 정리될 수 있다." 이때 다른 '언어들'이란 '영화' '회화' '음악' '사진' 등등을 말한다. 그리고 물론 '언어학'은 우리가 쓰는 자연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지식을 뜻한다. 이게 모델이 되는 것이고, 그걸 다른 분야(언어)들에 적용해본다는 것.

그리고 이 시기(1964-1970) 연구의 주종은 내러티브 연구, 즉 서사학이었다. 브레몽, 주네트, 토도로프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브레몽의 단행본 저작은 번역된바 없으며, 토도로프의 경우엔 <구조시학>(문학과지성사, 1987)이나 <산문의 시학>(문예출판사, 1992; 예림기획, 2003) 이 대표적인 초기 연구서이다. 서사학 관련서들은 차고 넘치지만, 영화와 관련하여 네 권만 언급하자면, 앙드레 고드로 외 <영화서술학>(동문선, 2001),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생각의나무, 2003), 그리고 채트먼의 책 두 권 <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민음사, 1999), <영화와 소설의 수사학>(동국대출판부, 2001)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처음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서정남의 <영화서사학>이 안전할 듯하며, 서사학 전반에 대한 개관으로는 박진의 <서사학과 텍스트이론>(중앙M&B)을 참조하는 게 간편하겠다(신간인 이 책은 나도 아직 실물을 구경하지 못했다). 사실 나로선 현단계 서사학에 별 흥미를 못 느끼지만, 유리 로트만의 플롯이론이나 폴 리쾨르의 철학이 접맥되고 정신분석적 서사론이 더 보강된다면(피터 브룩스가 대표적이다) 서사학도 업그레이드 될 가능성은 있다.

 

 

 

 

하여간에 당시의 그런 분위기 때문에 메츠도 영화에서의 서술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렇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미론>은 우선 영화 서술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1971년에 출간된 <언어와 영화>에서는 루이 옐름슬레우의 <언어이론의 전제 원리>(1943)의 개념들을 직접 사용하여 언어학적 착상의 방법론적 급진화가 강조되고 있다." 거명된 옐름슬레우의 책은 <랑가쥬 이론 서설>(2000)이란 제목으로 다름아닌 동문선에서 출간된 책이다. <영화미학>의 역자는 들춰보지도 않았다는 얘기(물론 그 번역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지만). 옐름슬레우 계보의 적통을 잇고 있는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쥘리앙 그레마스이다. 메츠의 <영화언어>가 아직 번역되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못지 않게 기이한 것은 그레마스의 <구조의미론>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는 것. 말도 안되는 번역서가 나오는 것보다는 그 편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은 들지만 인문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좀 허전한 일이다(참고로, <구조의미론>의 러시아어본은 작년에 나왔으며, 메츠의 경우 논문들은 번역돼 있지만 단행본은 출간되지 않았다).  

어쨌든 <언어와 영화>에서 메츠의 영화기호학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다는 얘기였다. 그 다음은? "언어학적 유산이 <상상적 기호표기>(1977)에서 더욱더 결정적인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완성된 것은 속임수와 관객에 대한 연구로부터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충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번역은 '속임수'이다. 영역은 "It was only by Metz's gradual progression from working on film devices to working on the spectator that linguistic heritage was further complemented by the psychoanalytic illumination that gained more and more acceptance after his Imaginary Signifier(1974)." 다시 옮기면, "언어학적 유산이 정신분석적 조명(통찰)에 의해 더욱 보완되는 것은 메츠의 관심이 영화적 장치들에서 관객으로 점차 옮겨감으로써이다. 그러한 (영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조명은 그의 <상상적 기표>(1974) 이후에 더욱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이제 마지막 문단이다: "사실 기호학은 연구 분야마다 적용될 수 있기 때문에 통일된 도표를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학 분야에서는 어떤 동질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그 반면에 루이 마랭의 회화기호학과 장 자크 나티에즈의 음악기호학은 이후에 폭넓게 다시 연구된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만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기호학과 공통성이 있다." 뜻은 이렇다. 뒤에 '기호학'이란 이름만 갖다 붙이면, '회화기호학'이니 '음악기호학'이니 '영화기호학'이니 하는 게 되지만, 이들간의 공통성, 동질성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 그저 "최초의 기준이 되는 것"(?), 즉 이러한 연구들이 처음 참조하는 문헌들(가령 소쉬르의 <일반기호학 강의>나 바르트의 <기호학 요강> 같은)이나 공통될 따름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기호학 패밀리'에는 속할 테지만, 얼굴이 제각각이고 성격도 제각각이며 하는 짓도 제각각이라는 얘기다. 

영화언어와 랑그에 관한 이야기는 이어서 계속된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이 존중되는 것이다. 요즘처럼 인터넷 클릭만 몇 번 해도 대략 필요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시대에 '비상식적인 번역문'들이 계속 양산된다는 건 미스테리한 일이다(이젠 입아픈 일이다). 얼마만큼의 계몽이 우리에겐 더 필요한 것일까?..

05. 07. 30.

P.S. 기호학 참고문헌들을 좀 나열하다가 지워버렸다. 사실 '너무 많은' 기호학 서적들을 나열하는 것 자체는 별의미가 없을 듯하다(그냥 '기호학'을 검색어로 집어넣으면 된다). 다만, 우리에게 좀 드물게 소개된 것이 음악기호학인데, 이에 대해서는 서우석 교수 등이 쓴 <음악의 연구>(문학과지성사, 2000)에 실린 논문들을 참조할 수 있다(또 건축기호학과 관련하여 <현대건축과 기호학의 대화>(시공문화사, 2000)란 책도 있는데, 기호학에 문외한인 건축학 교수들이 옮긴 관계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언어학/기호학에 대한 무지가 '부실한 번역'을 낳을지언정 '부실한 건축'을 낳는 건 아니라는 게 그나마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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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8-0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로자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로쟈 2005-08-0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니다 2005-08-0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이 마랭의 회화기호학은 "시각예술과 기호학"이라는 책에 실린 논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도 오래전이라 내용은 잘 기억 나지 않지만, 기호학에 대한 기초지식이 없던터라 이해를 잘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번역도 영 시원찮았던 것 같고...원서와 대조하면서 다시 한번 읽어볼 생각입니다. 올 여름에는 후배들과 함께 기호학/언어학 책들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대학원/박사과정 애들이 왜 그렇게 바쁜지 사람을 못 찾았습니다. 핑계김에 아직 시작도 못했고, 여름은 거의 끝을 보이고 있군요....ㅎㅎㅎ, 이왕 말 나온김에 초보자를 위한 입문 필독서 몇권만 추천해주시죠^^

로쟈 2005-08-01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저도 그 책은 갖고 있는데, 읽은 기억이 없네요.^^ 문화기호학에 대한 강의를 이전에 몇 학기 한 적이 있습니다(아마 내년에 다시 하게 될지도 모르구요). 그래서 눈에 익힌 책들입니다. 저는 존 피스크의 <커뮤니케이션학이란 무엇인가>(커뮤니케이션북스)란 책을 주로 추천합니다(리뷰를 올린 적이 있습니다). '성문영어' 같은 식으로 핵심만 정리해 놓아서 보기에 편하고, 다른 기호학 책들과는 달리 '이데올로기'에 관한 장이 붙어 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미첼의 <아이코놀로지>도 참조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중매체의 기호학>(나남)이 읽기 쉬웠다고도 하더군요. 국내 필자들에 의한 책들도 그간에 많이 나왔기 때문에 참조할 수도 있습니다. 근데, 기호학 책들은 좀 읽다보면 지루합니다. 형식논리적이어서 그런 듯한데(영화기호학의 경우도 그렇고), 한 마디로 하면 될 걸 공연히 길게 늘어놓는 듯해서요. 거쳐갈 필요는 있지만 오래 머물 자리는 아니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주니다 2005-08-01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호학과 시각예술"이었네요.원제는 "Calligram"이구요. 문화기호학에 대한 강의를 다시 하신다면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안타깝군요.

로쟈 2005-08-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강좌가 개설되었고, 마침 저에게 할당되었을 뿐이지 제가 특별히 할 얘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에코와 로트만, 바르트를 좀 읽었다는 것밖에 내세울 게 없었는데, 정작 강의시간에 그런 얘기들을 하면 대개 졸더군요. 해서, 이론 약간만 하고 대개는 실습을...
 

 

 

 

 

"영화의 짧은 역사"는 로도윅의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 2005) 1장 제목이다. 들뢰즈의 영화론을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겨서 다른 책들과 함께 로도윅의 책을 들춰보게 되었고(이 얼마나 '유익한' 번역인지!), 나는 며칠 전에 이 1장을 읽었다(2장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 대한 사전독해를 요구하기에 잠시 미뤄두었다. 그냥 읽는 게 아니라면 들뢰즈의 <시네마> 읽기는 상당한 견적을 자랑한다). '짧은 역사'인 만큼 이야기도 짧은 편이지만, 그걸 요령있게 정리하는 건 또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중요한 대목에 밑줄긋고, 오역이나 착오는 교정하면서 잠시 자리를 데우도록 하겠다.

먼저 들뢰즈의 두 책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영화사 연구가 아니며 따라서 연대기적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거기에는 (1)뵐플린이 <예술사의 원리>에서 피력하고 있는 역사관이 스며 있다(미학 형식의 역사는 그러한 형식이 역사적으로 통용될 수 있었던 시대/문화와 짝지어질 수 있다는 얘기). 그리고 (2)일리야 프리고진과 이사벨 스텐저스의 과학철학/과학사 연구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특히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와 관련해서인데, 자연을 모델로 하는 개념화 전략은 들뢰즈에게 많은 통찰을 제공한 것으로 돼 있다. 참고로, 러시아의 경우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철학자들과의 연관 속에서 이해되고 있다). 요컨대, <예술사의 원리>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먼저 읽으라는 것(나는 후자만을 읽었다). 뵐플린의 책은 <미술사의 기초개념>(시공사)으로 번역돼 있고(그러니까 '예술사'라기보다는 '미술사'라고 해야 맞겠다), <혼돈으로부터의 질서>(정음사/고려원)도 국역본이 있는 책이다.

"들뢰즈는 베르그송을 전유해서 사유가 본질적으로 시간적이며 운동과 변화의 소산임을 주장한다. 또한 그는 퍼스의 재독해를 통해 이미지가 통일되거나 닫힌 전체가 아니라 연속적 변형 상태에 놓인 논리적 관계들의 집합이라고 논증한다."(36쪽) 사실 이런 대목은 사례를 직접 '봐야' 이해가 용이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다. 아무튼 들뢰즈는 "소쉬르에 연원하는 영화기호론에 반대해 퍼스의 기호학을 선호"한다. 여기서 소쉬르 계보의 대표적인 영화기호학자를 든다면, 단연 크리스티앙 메츠를 꼽아야 할 것이다(사실 메츠는 영화광 언어학자였다. 들뢰즈가 영화광 철학자였던 것과 비기는 셈. 메츠가 소쉬르 등의 언어학을 영화에 가져온다면, 들뢰즈는 퍼스의 논리학과 베르그송의 철학을 영화에서 발견한다). 

메츠와 들뢰즈의 차이? "메츠의 경우, 영화적 언표에 대한 개념, 거대 통합체에서 파생된 내러티브 이론을 제시하여 이미지의 가장 가시적 속성인 운동을 제거하면서 이미지의 의미를 언어적인 것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들뢰즈의 경우, 영화의 이미지 구성성분이 움직이는 '기호적 질료'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변조 가능한 특징들, 즉 감각적인 것, 운동적인 것, 강도를 띠는 것, 정서적인 것, 리듬적인 것, 음조적인 것, 심지어 언어적인 것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대비 또한 예비적인 지식을 요구하지만, 메츠의 경우 영화가 비록 '랑그'(이중분절이 가능한 언어체계)는 아니더라도 '언어'로 규정될 수 있다고, 즉 '언어'로 환원될 수 있다고 본 반면에 들뢰즈는 그러한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정리해둔다.

이어지는 대목: "에이젠슈테인은 처음에 이를 이데올로기소에, 다음에는 좀더 심오하게도 전-언어 또는 원시 언어체계에 해당하는 내적 독백에 비유한다."(37쪽) <시간-이미지>에 인용하고 있는 부분인데, 이 대목은 오역을 포함하고 있기에 국역본 <시간-이미지>를 참조하는 게 좋겠다. '이데올로기소(ideologram)'라고 옮긴 것은 '표의문자(ideogram)'를 잘못 본 것이다('ideologram'이란 '신조어'는 어디에서 왔는지?). 들뢰즈가 퍼스 기호학을 참조하는 것은 그것이 "언어학이 아니라 논리학이며, 따라서 기호작용을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기호론이 언어적 모델을 영화 바깥에서 부과함으로써 영화적 기호를 정의하려 하는 반면, 들뢰즈는 영화 자체가 역사적으로 생산해온 질료에서 기호이론을 연역하기 위해 퍼스의 논리학을 적용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들뢰즈의 유명한 '영화기호학 비판'이 제기되는 것.

 

 

 

 

참고로, 찰스 샌더스 퍼스의 기호학(퍼스는 'Semiotic'이라고 불렀다)에 관한 번역은 아직 없으며 최근에 퍼스의 사상 전반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을 따름이다. 정해창 교수의 <퍼스의 미완성 체계>(청계, 2005). 현재까지는 움베르토 에코 등이 지은 <논리와 추리의 기호학>(인간사랑, 1994)이 퍼스 기호학에 대한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이다(물론 에코의 기호학 이론서들을 덧붙일 수 있지만, 재미에 있어서는 '추리'가 '이론'보다 한 수 위이이기에).  

이어서, "들뢰즈는 이미지 실천(image practices)이 사회적/테크놀로지적 자동기계라고 주장한다. 이 자동기계에서 각 시대가 특정한 사유의 이미지를 생산함으로써 스스로를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한 시대의 사유 이미지는 곧 사유의 본질, 사유의 쓰임 및 사유하고 있는 주체의 위치를 스스로 사유하는 이미지다."(38-9쪽) 이 대목은 <철학이란 무엇인가>로부터의 인용인데, 거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영화를 일종의 인공지능, 데카르트의 잠수인형, 개념의 직조를 위한 기계로 간주한다." 여기서 상응관계에 놓이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와 각 시대의 사유 전략이다.

이러한 전제하에 로도윅이 설명하는 것은 시간을 공간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의 차이로서 규정되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의 구분이다. 운동-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간접적 이미지를 제공하고, 시간-이미지는 직접적 이미지를 제공하다. "들뢰즈는 간격, 즉 포토그램, 쇼트, 시퀀스 사이의 공간이나 경계를 재고찰하는 한편, 영화가 시간을 공간적으로 표상하기 위해 이 간격들을 어떻게 조직하는지를 살피면서 이 비범한 발상을 이끌어낸다."(40쪽) 여기서 간격 개념은 러시아 영화감독 지가 베르토프에게서 차용하여 확장한 것인바, 베르토프는 <운동-이미지>에서 에이젠슈테인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감독이다(당연한 얘기지만, 시간-이미지를 대표할 수 있는 러시아 영화감독은 타르코프스키이다).

그리고 물론 베르그송을 읽은 독자라면, 들뢰즈의 '비범한' 발상 자체가 얼마만큼 베르그송에게 빚지고 있는지 헤아려볼 수 있을 것이다(특히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 이참에 겸사겸사 읽어야 할 '베르그송' 목록을 나열해 보자.

 

 

 

 

이미지상으로는 세 권이 뜨는데,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아카넷, 2001 ), <창조적 진화>(아카넷, 2005) 외에 절판된 책이지만 <물질과 기억>(교보문고, 1991)이 필독서이다(<시론>의 영역본 제목은 <시간과 자유의지>인데, 이 제목이 내용파악에 더 적합하다. 판매량에도 더 긍정적이었을 테고. 기억에 베르그송이 동의했던 제목이다). 거기에 들뢰즈 자신의 <베르그송주의>(문학과지성사, 1996)를 덧붙여야 할 것이고. 들뢰즈에게서 베르그송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가 친절하다(이런 식으로라면 '독서'라기보다는 '프로젝트'이지만).

<운동-이미지>에서 들뢰즈는 에이젠슈테인과 고전 헐리우드 영화를 별개로 다루지 않는다(이건 이상한 일이 아닌 게, 에이젠슈테인 자신이 고전 헐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그리피스). 그들은 운동을 '열린 총체성'으로 설명하고자 했는데, 다르게 말하면 연속적인 운동을 단면으로 분할해서 미분하고 적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소비에트 학파와 할리우드 영화의 실천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들뢰즈는 "소비에트 학파와 할리우드 영화가 본성상 서로 다르지 않은 운동-이미지의 두 가지 변별적 표명이라고 본다."(44쪽)

이들의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은 간격들로 환원되며, 이 간격은 운동 및 (몽타주를 통한) 운동의 연결로 정의된다. 그런 점에서 운동-이미지는 시간의 간접적 이미지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192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는 시간보다는 공간 및 운동에 대한 매혹을 천명한다. 시간의 조직화는 몽타주를 통한 운동의 재현에 귀속된다. 내러티브 영화와 아방가르드 영화 모두 운동의 문제에 강박적으로 집착했고, 바로 그 지점에서 기억과 지각에 대한 나름의 이론을 도출했다."(46쪽)

이것은 "운동-이미지의 산물인 정신기호도 마찬가지"인데, "한편으로는 연합(=연상)을 통한 연결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분화를 통해 표현되는 팽창하는 전체가 있다."('통합-분화'는 '미분과 적분'(differentiation and integration)'이란 뜻도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하다.) 여기서 "간격들과 전체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행동주의적이다. 이 관계를 분절하는 것은 갈등, 대립, 해결로 조직되는 '작용->반작용' 도식이다."(46쪽) '행동주의'는 심리학에서의 행동주의를 말하는 것이겠다. 즉, 반복과 강화 등에 의해서 조건화(conditioning)된다는 얘기이다.

"작용과 반작용의 운동은 미국적인 의지의 이데올로기, 즉 환경에 대한 지배와 이를 방해하는 장애물의 연결이 필연적이며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은 중요해서가 아니라 오역이 포함돼 있어서 인용한다. 원문은 "This movement of action and reaction derives from an American ideology of will, a belief that the mastery of environments and opponents is inevitable and infinitely extendable."(12쪽)이다. 미국식 '의지의 이데올로기'란 "환경과 적대자들에 대한 지배는 불가피하며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는 신념"을 말한다.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힌트를 얻고 있는바, 에이젠슈테인의 사유 도식에는 '운동중인 열린 총체성'(the changing whole of the open totality)이 무한한 확장과정을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함축돼 있으며, "부분들에서 집합들로의 통합, 그리고 집합들에서 전체들로의 통합은, 이미지와 세계와 관객이 진리를 재현하는 거대한 이미지 속에서 하나가 될 때 절정에 달한다."(47쪽) 그리고 그런 점에서 에이젠슈테인은 "시네마토그래프의 헤겔인 양 이 개념의 거대한 종합을 표현했다(=제시했다)."

그리고는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다. "들뢰즈가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고전 시기'(=고전주의 영화)에, 그리고 시간-이미지를 '모던 시기'(=모더니즘 영화)에 대응시킬 때, 이는 전자가 자연적으로 진전해서 후자가 도출됐다는 말도 아니고, 모던 형식이 고전 시기 영화에 대한 비판으로서 반드시 그에 대항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전이(=이행)는 사유의 가능성 및 믿음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형을 뚜렷이 재현한다." 즉, "운동-이미지가 유지하는 유기적 체제는 유리수적인 나눔들을 열결함으로써 진행되며, 궁극적으로 총체성과의 연관 속에서 진리의 모델을 투사한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유럽 영화계에 몰아치면서 이에 대한 변화가 생겨났고, 그 결과로 이전과는 다른 '상상적 관찰' 형식이 나타났다... 그 결과 운동-이미지의 작용-반작용의 도식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지각과 정서의 본성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다... 혹자는 즉각 안토니오니의 영화 <정사>(1960)와 같은 영화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결국 지속으로서의 시간이 경과하는 것만을 목격하는 인물들이 남는다." 시간-이미지가 탄생하는 장면쯤 될까?

거듭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밝히자면,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의 비유기적 체제 또는 결정체적 체제라고 일컫는 것은 전후 재건이라는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출현한다. 그러나 모던 영화(=모더니즘 영화?)가 시간의 직접적 현시라고 할 때, 시간-이미지의 출현이 반드시 운동-이미지의 진화에 따른 결과인 것은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 영화사는 더 완전한 시간의 재현을 향한 진보의 과정이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미지의 출현이 시사하는 것은, 사람들이 시간과 사유의 관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새로운 기호로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시간에 대한 각기 다른 사유방식과 연관되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통시적임과 동시에 공시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새로운 기호는 확률물리학의 도입에 따라 시간 이미지에 발생한 변화와 생명과학의 발전을 통해 사유의 이미지에 발생한 변화의 결과다." 에이젠슈테인이 유기적 운동-이미지를 대표했다면, 알랭 레네는 결정체적 시간-이미지를 대표한다. 러시아 영화사에서라면, 에이젠슈테인과 타르코프스키가 각각을 대표하겠다. 상식적인 대립쌍을 가져오자면, 두 사람의 대립은 '과학과 시'의 대립인데, 이걸 이미지 유형학에 적용하여 운동-이미지는 과학적이고 시간-이미지는 시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어지는 설명은 시간-이미지의 대표적인 감독인 레네의 작품들과 또다른 탁월한 사례로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인디아 송>(1975)에 대한 분석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탈속적 목소리'가 들어가 있다고 하는데, 'intemporal voices'를 국역본 <시간-이미지>에서는 '비시간적 목소리'로 옮기며, 나로서도 그게 더 적절하다고 본다. 상대적으로 규정되어 있고(=규정적이고) 예측가능한 관계를 형성하는 유기적 운동-이미지와는 달리, 이(런) 영화(들)의 시간-이미지는 개연적이다. "시간-이미지가 산출하는 간격의 자율성은 모든 쇼트를 자율적인 것으로 그려낸다... (이때) 모든 간격은 확률물리학이 말하는 분기점, 즉 어디로 선회할지 예측할 수 없는 지점이 된다. 운동-이미지의 연대기적 시간은 불확실한 생성의 이미지로 파편화된다."(52쪽)

물론 이러한 시간-이미지가 '불확실성의 시대'와 관련돼 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해볼 수 있다: "모던 영화에서 만들어진 시간의 이미지가 무질서와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문화적 감각에서 피어났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이미지는 다양한 것, 여러 가지의 것, 비동일자를 수용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충전시킨다." 더불어 현대물리학과의 관련성: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에서의 간격을 무리수적인 나눔이자 공약 불가능한 관계로 정의했을 때, 그는 프리고진의 '분기점'과 맞먹는 주사위를 이미지와 사유의 관계에 던진 셈이다."(53쪽) '분기점'이란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한 지점이다. 시간-이미지는 그러한 '비결정성'에서 비롯한다.

정리해보자. "들뢰즈에게 있어 시간의 영화는 두 가지를 생산한다. 하나는 총체화할 수 없는 과정인 사유의 이미지이며, 다른 하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인 역사에 대한 감각이다... 운동 이미지가 사유와 이미지의 관계를 동일성과 총체성의 형태로 파악하는 지점에서 시간-이미지는 이 관계를 비동일성의 형태로 상상한다. 시간-이미지에서 사유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생성이다."(55쪽) 마지막에 두 단어가 누락됐는데, "사유는 탈영토화된 유목적 생성이며 창조적인 행위이다."로 정정하면 된다. 들뢰즈는 이를 '희소식'이라고 부른다(이 '희소식(good news)'은 '복음'으로 옮겨지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하여간에 이상이 "영화의 짧은 역사"에 대한 짧지 않은(!) 브리핑이었다.

05. 07. 27-8.

P.S. 들뢰즈는 한국의 영화비평가나 영화학도들에게 가장 애용되는(더러는 남용되는) 이름이다(요즘은 거기에 지젝이 도전장을 내민 형국이다). <문학판>(05년, 봄호)에 실린 "한국영화평론, 어디로 갈 것인가"란 정승훈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들뢰즈와 지젝으로 가야 한다?). 거기서 적용되고 있는 들뢰즈의 이미지론을 잠시 따라가 본다. 

"유기적인 전체 구조 속에 현실을 지속적으로 재현하는 '운동-이미지'는 모든 영화의 연대기와 서사를 이끄는 현행적 이미지다. 그것은 재인 가능한 하나의 시간 덩어리로 통합되는데, (임권택의) <하류인생>이 단숨에 주파하는 한국사회를 재현하는 균질적이고 비가역적인 시간이 그러하다. 그 안에서 오이디푸스화된 개인과 사회는 결핍된 욕망을 좇아 허덕이며, 그 바깥에서 아버지 임권택을 내셔널 시네마의 한 전범을 반복한다."

"반면 현실이나 진리를 재현하지 않는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밑바닥에 순서 없이 뒤섞이고 분열하는 시간, 곧 현실의 잠재태를 보여준다.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순수한 첫사랑은 이미 더럽혀진 백지고 계속 덧씌워지는 흔적이며 결코 도래하지 않는 미래다... 그 안에서 오이디푸스는 끝내 집에 돌아가지 않으며, 그 바깥에서 아들 홍상수는 내셔널 시네마의 한 전범을 해체한다."

그러므로 "이처럼 당대를 상징하는 임권택/홍상수가 근대/탈근대의 맥락과 더불어 오이디푸스/탈오이디푸스, 운동-이미지/시간-이미지를 대략 암시할 수 있다면, 한국영화 전체의 내재적인 평면을 그러한 단절적인 계기를 통해 새롭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도식화에 따르는 유보: "물론 한국영화를 억지로 두 이미지 유형을 따라 서구식 고전영화/현대영화로 쪼갤 순 없고, 엄밀하게 시간-이미지를 보여주는 영화도 없다. 이런 접근이 또 한 판의 서구이론 빌려쓰기에 그칠 우려도 크다. 하지만 지젝과 들뢰즈가 학술적 권위로만 포장된 채 저널 비평에선 무시되거나 미미한 지적 액세서리로 전락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어지는 두 문장은 내가 따라가기 어려운 문장들이다: "그간 한국영화는 로컬리티의 산물이었고 세계화 추세도 지시적 맥락에서 논의됐지만, '한국'영화기 이전에 '영화'로서 그것은 비사유/비감각의 영역을 사유하고 감각케 하는 이미지의 힘을 품고 있다. 점점 확산되는 초국가성(transnational)은 지시성 층위뿐 아니라, 정신분석과 이미지 존재론을 가로지르는 '실재' 차원에서도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사유/감각으로는 쫓아갈 수 없으므로 건너뛰기로 한다.

"꼭 지젝이나 들뢰즈가 대안적 방법론이라는 게 아니라, 임권택과 홍상수 간의 간격 등을 통해 한국영화라는 동일성에 잠복한 영화 이미지 일반의 이질성을 고고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영화와 한국영화 평론이 함께 진화하는 길도 여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앞으론 '저널 비평'을 읽는 데도 상당한 지력('지적 액세서리')이 동원되어야 할 듯하다. 지젝이나 들뢰즈는 기본으로 읽어줘야 하는 것이다. 그게 '기본'이라면, 비평가들은 곧 다른 걸 빌려올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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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7-28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가서 훗날 공부해 볼려고 합니다.
이미 퍼갔어요.
항상 제게 공부할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쟈 2005-07-2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만에요.^^

palefire 2005-07-29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기계]의 1장 '영화의 짧은 역사'에 대한 알찬 브리핑의 꼬리말로 [문학-판]에 실린 정승훈의 시론적 글을 몽타주한 건 흥미롭군요. 하나는 [시간기계]의 로도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동아시아 내셔널 시네마를 시간-이미지의 새로운 국지적(그리고 동시에 전지구/초국가적) 발원지로 보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사소한 우연의 일치지만) [시간기계]의 역자후기에 나오듯 역자와 정승훈씨가 절친한 친구라는 점이죠. 들뢰즈는 한국의 영화학도나 영화비평가들에게 '충분히 말해지고 사유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시네마]를 어느 정도 다룬 국내 논문들은 몇 있지만 영화학과 계열에서 나온 건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적어도 들뢰즈의 영화적 사유에 대한 논의는, 한국의 영화학이라는 지형에서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 그러나 서서히 생성될 가능성이 있는 - ' 논의라고 봅니다. 지젝의 경우는 비단 영화학만의 유행은 아니겠죠(최근의 문학평론들, 특히 [문학동네] 최근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젊은 평론가들의 글은 후기라캉-지젝적 독해를 적용시키기 위해 분투하더군요). 암튼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저널비평에는 아무리 들뢰즈와 지젝이 외삽되더라도 '남용되고 오용될 수 있는' 점은 인정하지만(그런 글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특히 정신분석학은 정말 그렇죠), [문학 판]의 정승훈씨의 글은 저널비평의 틀에서 단순히 비평적 분석의 메스로서 지젝과 들뢰즈가 유효하다는 식의 단순한 메타비평을 넘어선다는 점입니다. 거칠고 산발적이고 때로는 '오버'하는 흔적이 있지만, 그 글은 Korean New Wave 이후의 한국영화의 무의식과 이미지 모두를 지도그릴 수 있는 이론적 틀 - 저널비평의 굴레에 안주하지도 않고, 그 안에서는 충분히 소화될 수도 없는 - 을 모색하려는 글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로쟈 2005-07-29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선 <시네마>가 '영화'에 대한 독창적인 사유, 혹은 영화'의' 독창적인 사유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일반화될 수 있는 것인가, (영화학 전문지가 아닌) '저널 비평'에서 다루어질 만큼 '대중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입니다(평론가 김영진씨도 그런 류의 의견을 피력하더군요. 라캉-지젝의 용어들이 '저널'지에 마구 들어오는 경향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예컨대, 상상계니 상징계니 하는 용어들을 <씨네21> 같은 잡지에서 남용해도 되는가 하는). 그건 <시네마> 같은 책을 영화를 관람하는 대중이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아시다시피, 전공자들조차도 오역/오해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게 들뢰즈의 책들입니다).

해서, 정승훈씨의 주장을 저는 좀 오버하고 있는 것으로 읽었습니다(그가 '저널 비평'을 예로 들었기 때문에). 원론적인 것이긴 하지만, 영화비평과 영화학, 영화연구가 동일시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죠. '저널'이란 게 얼마만큼의 고급한(대중이 보기엔 난해한) 담론들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인지, 그런 담론들을 다루면서도 여전히 '저널'(잡지)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인지 등등. 더구나 영화저널 같은 경우는 문학잡지만큼 충분한(?) 지면을 이론적 담론에 할애하지도, 할애할 수도 없는 형편인데 말입니다. 해서, 제가 기대하는 건 들뢰즈식의 비평이나 철학을 담지한 단행본입니다(비평의 장소로 저널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죠. 더구나 저널 비평에서 다 '소화될 수도 없는' 문제의식이므로).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 같은 수준이 아닌, 보다 본격적인, 보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갖은 궁상들을 돌파할 수 있는...

palefire 2005-07-2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널비평과 이론은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고 후자의 진지전이 더욱 중요한 것이죠. (정승훈씨의 주장은 저널리즘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도 다양한 쿼털리가 필요한 것이고, 영화학뿐 아니라 교차학제적([Journal of Visual Culture], [October], [Boundary 2] 등)인 쿼털리들이 많이 나와야 하는 것이죠. 이 점에 대해 저는 향후 몇 년간은 회의적이라고 봅니다. 그렇더라도 긴 시간과 긴 호흡을 요하는 작업들이 결국은 나중에 말을 하게 되죠. 영화학에도 그런 때가 분명히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5-08-09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사상을 보면 느끼는 인상이 지나치게 계열과 질서로부터 도피하려는 인상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나 헤겔철학의 전통에 대한 반기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기는 하나..그 반대편 극으로 향함으로써 또다른 편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 말이죠..소위 그의 유목적 사유라던가..영화론에서 이야기하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 사이의 도식적 구분들도 마찬가지 편향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어떤 대상을 보는 서로다른 시각의 차이일 뿐이고..양자가 서로 상보적인 관계인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거나..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는 표현자체가 운동이 가지는 공간적 특성의 의미들을 축소하고 시간은 그자체를 직접적으로 현시함으로써만 올바르게 인식 가능한 것처럼 간주하는 편향이 느껴지기 때문이지요..다시말하면 공간-이미지를 단지 데카르트적 인식방법으로서의 국소적 사유방식(유리수적 연결혹은 분할들)로..시간-이미지를 비국소적 사유(무리수적 나눔)로 본다는 것은 또하나의 편향이라는 것이죠..
베르그송의 지속의 개념에서 나온 운동과 이미지 그리고 물질과의 동일성의 장점들을 시간-이미지로 변형시킴으로써 시간을 공간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사유...
물리학에 비유하자면..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이 가지는 공간적 국소성을 양자역학이 가지는 공간적 비국소성으로 대체하려는 경향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양자역학적 비국소성과 시간의 가역성들이 보다 통합적 차원으로 설명되는 끈이론과 같은 현대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상보성..그리고 극소와 극대를 밀접한 연관으로 설명하는 방식들을 생각해볼 때..들뢰즈는 베르그송의 지속에서 파생된 운동-이미지의 혁명적 측면을 데카르트혹은 헤겔이 가진 낡은 시각으로 또다시 바라보는 오류를 공간-이미지 와 시간-이미지를 도식화하는 과정속에서 발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군요...

로쟈 2005-08-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들뢰즈에 대한 책들을 남못지 않게 갖고는 있지만, 제가 두루 꿰고 있는 편이 아니어서 yoonta님의 평을 다 따라가지는 못하겠습니다. 다만, '한물간' 베르그송주의가 들뢰즈 덕분에 얼마나 때깔있는 모습으로 되살아나는지 간혹 경탄하게는 됩니다(들뢰즈가 아니라 베르그송이 한턱 내야 하지 않을까도 싶고). 들뢰즈 철학을 저는 니체 철학과 마찬가지로 아티스트 철학 정도로 분류하고 싶습니다. 그럴 경우 '진위'보다는 얼마나 멀리 가느냐가 더 문제일 거 같고, 그런 점을 평가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게 맞는 소리야?"라고 따지는 건 분석철학쪽에서 능수능란하게 하겠지만(그래서 들뢰즈 정도는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가령 탁석산씨나 강유원씨의 평가), 그런 두 갈래 길이라면, 저는 들뢰즈의 길을 선택할 거 같아요. 소위 '꼰대'들보다는 '아티스트'를 선호하는 취향이라서...

니브리티 2005-08-1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yoonta님이 말씀하신 것(로쟈님의 글에서 따온 것이지만, 맥락상)처럼 <운동-이미지가 시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거나..시간-이미지는 시간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운동-이미지(구체적으로는 행동-이미지)의 위기를 통해 새로운 시지각적, 음향적 기호가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를 제공하는 한편 '직접적인 시간-이미지'가 나타난다...는 말을 독해할 때 전자의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와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의 구분은 전자가 감각-운동 도식을 통해 시간을 운동에 종속시키는 반면 후자는 그에 대한 반작용이거나 운동과 대립하는 시간이 아니라(이 경우는 여전히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일 뿐이고 감각-운동 도식에 의한 해석일 뿐이겠죠) 시간 그 자체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결코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가 대립되거나, 발전된 형태의 이미지거나 보다 나은 이미지, 혹은 시간-이미지로만 이뤄진 영화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사실 모든 영화는 이 두 이미지가 서로 혼재되어 있는 건데(고전영화에서도) 어떤 관점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죠. 하여튼 들뢰즈의 분류법이 종종 둘 아니면 셋의 도식화로 내비칠 염려가 있긴 한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대립/상보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말했지만, 들뢰즈에게서 분류는 '개념의 창안'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들뢰즈의 사상이 계열과 질서로부터 도피하는 인상을 받으셨다면, 정반대라고 말해야 할 듯 싶습니다. 오히려 들뢰즈는 계열이란 말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특히 <의미의 논리>는 전체가 계열에 대한 얘기라고 해도 무방하죠. <시간-이미지>에서도 세 가지 시간-이미지에 대해 얘기하면서 마지막 세번째의 이미지를 "시간의 계열로서의 시간-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시네마> 전체에서 하고 싶은 말도 결국은 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라기보다는, 그것들이 "사유를 사유하게 만드는 (폭력적인)기호"로서, 즉 사유의 이미지인 "뇌"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하는 거겠죠.

yoonta 2005-08-10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계열이란 단어는..제가 무심코 댓글쓰다보니 오타비슷하게 나온 단어라..
수정할까 하다가 걍 냅둔건데요..nivritti님 때문에 수정해야 겠네요.
계열은 위계의 오타라고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nivritti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들뢰즈는 계열을 위계나 (위계적)질서가 아닌 차원에서 중요하게 여기죠..시간-이미지에서도 님말씀대로 계열이란 말이 나오죠...니체적 순환 혹은 원환이라는 방식으로 자주 언급되다는 점도 알고 있고요..그리고 운동-이미지의 간접적 성격과 시간-이미지의 직접적 성격에 대한 저의 표현은 님이 지적하신 맥락과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시간-이미지가 운동-이미지에 대해서 "반작용이거나 운동과 대립하는 시간"이라고 말한 것은 아닙니다. 단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들뢰즈가 했던 것처럼 "개념의 창안 혹은 개념의 역사"의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네요...들뢰즈 철학의 개념적 특이성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문제이긴 하지만요...

제가 위에서 간략히 이야기했던 것은 운동-이미지라고 하는 베르그송적 개념 내부에 이미 시간-이미지적 요소들을(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차원에서)내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지속"이라는 개념으로 물체와 운동 그리고 이미지의 동일성을 주장한 베르그송적 '개념의 창안"속에 이미 시간-이미지의 요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죠..따라서 들뢰즈가 시간-이미지속에서 발견하고자 했던..소위 크리스탈적 묘사의 "특이성" 혹은 무리수적 무한성에 근거한 "잠재성"의 사유들은 베르그송적 사유혹은 개념들로부터 자신의 시간-이미지개념의 "특이성"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편향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겁니다..

이부분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저도 아직 공부중이라 유보중입니다만..그 하나의 방법으로 제가 위에 제시한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적 통합이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않을까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보았던 것이고요...그러한 관점들이 들뢰즈의 사유의 비판적 독법의 하나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니브리티 2005-08-10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에서 이행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기호와 이미지는 구분은 있지만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죠. 즉 우리의 관점이 바뀌는 것--우리를 사유하게 하는 것은 이 이미지의 폭력적인 기호의 성격 때문인 겁니다. 그리고 들뢰즈는 베르그손에 대한 네 개의 주석을 통해 논의를 전개해내고, 덧붙여서 라이프니츠를 참고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손에 대한 사유를 조금 더 밀고 나갔다고 해야지, 범박하게 베르그손과 다르게 보이려는 편향적 사고를 가졌다고 말하는 건 편견이겠죠. 그리고 앞에서 <간접적인 시간-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간접적인 이미지>라고 한 점을 주목해주세요. 후자는 <시간의 직접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적인 시간-이미지>입니다.... 초끈이론에 대한 언급은 어떤 철학하시는 분 사이트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요.....그것이 들뢰즈에 대한 비판적 독법으로 가능하기 위해선 들뢰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접근이 필요할 듯 합니다...

yoonta 2005-08-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베르그송의 사유를 더 밀고 나간것이죠..^^ 그것이 편향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저의 개인적 판단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의 경우에는 각자가 들뢰즈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따라 달라지는 문제겠죠..
그리고 "시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이미지"라고 들뢰즈가 강조한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초끈이론이야기야 뭐 제가 자세히 이야기한것도 아니니 스킵하셔도 무관합니다.
들뢰즈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접근 물론 필요하죠..그러나 정확한 이해를 위한 비판적 접근이란 방법도 존재한다는 점도 이야기하고싶네요..

palefire 2005-08-10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새 이토록 풍요로운 이야기들이 오갔군요. 요즘은 하고싶은 공부와 동떨어진(정확히 말하면 하고싶은 공부를 더 하기 위해 하지 않을 수 없는) 공부하느라고 정신이 없기에 이런 곳에 종종 들리면서 브레인스토밍을 하는 정도인데 심화시켜 생각해 볼 가닥들이 여러 개 있는 듯합니다. yoonta님의 현대과학과 들뢰즈의 사유와의 새로운 대면에 대한 시도도 그렇고, (초면은 아닌) nirvitti님의 다이제스트한 답글도 유익해 보입니다.

yoonta 2005-08-10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와 관련해서..특히 알랭바디우의 비판은 상당히 풍요로운 논점들을 제공하는 것 같은데요..국내에서는 바디우의 들뢰즈비판에 대해 너무 소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개인적으로는 바디우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리스 2005-08-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긴 댓글들이 어우러진것은 정말 오랜만에 봅니다. ㅠ.ㅜ 어흑..
 

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 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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