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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때문에 바타이유를 읽다가(생각보다 안 읽히는 대목이 많다) 기분전환 삼아 자료 검색을 했다. 그러다 발견한 글꼭지는 얼마전(2006. 03. 24) '한겨레'의 기획연재 '스크린 속 나의 연인'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영화 <분홍신>의 프로듀서 신창길씨가 필자이고, 그는 거기서 <비포 선라이즈>(1995)의 '셀린느'(줄리 델피를) 자신의' 연인'으로 호출하고 있었다. 한데, 그게 나에겐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의 '희귀한' 접속점을 알게 해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단은 필자의 그 연애담을 조금 따라가본다.  

 -그녀는 내가 결혼을 생각하게 만든 첫번째 여자였다. 가장 가슴 벅찬 열망과 가장 고통스런 비애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 그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그녀는 실패한 연애의 상처로 인해 심한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난 달콤한 탈출구였다. 영화 하겠다고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을 다니고 있었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대학로와 인사동을 오가며 영화와 공연장을 순례하고 둘만의 여행으로 고단하고 무기력한 일상을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

-연애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했던 그녀와의 관계는 매순간 희열과 좌절의 극단을 넘나들게 했다. 내가 그녀와 결혼하고 싶었던 것은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희와 열정을 붙잡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그녀의 일상이 편안해지고 문화탐험을 위주로 한 교양연애도 시들해지자, 결국 그녀는 좀 더 안정되고 부가가치 높은 삶을 향해 나를 떠나고 말았다. 결혼이라는 선택을 통해 보다 확실하게 자신의 삶을 위치지우고 싶어한 그녀는, 결혼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내비친 나를 정말 순진하고 치기 어리게 바라보았다.

-내가 가진 현실적인 불확실함까지 감내할 자신이 없었던 그녀의 선택에 난 크게 반발하지 않았지만, 희열과 열정이 사라진 공백과 허탈의 상처는 생각보다 컸다. 그때, 코아아트홀 일요일 조조상영에서 만난 그녀 ‘셀린느’(<비포 선라이즈>의 줄리 델피)는, 그때까지 내가 알던 연애와 사랑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은, 말 그대로 ‘발견’이었다(*나도 코아아트홀에서 봤었는데). 그동안 내가 붙들려 있었던 연애가 얼마나 과도한 욕망과 집착으로 버무려진 열병덩어리였는지, 정말 내가 사랑을 느끼는 대상은 누구이며 사랑을 이뤄가는 내용과 방식은 어떠해야하는지에 대해 뒤통수를 치는 듯한 깨우침을 ‘셀린느’는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단 하룻밤의 시간뿐. 비엔나 거리를 거닐면서 제시와 셀린느는 참 많은 얘기를 나눈다. 고즈녁히 책을 보며 대화를 하는 그녀. 서글서글한 눈매에 담백한 인상의 그녀는 지적이고 사려 깊기까지 하다. 매력적인 눈웃음에 천진한 미소, 나긋한 목소리에 맑고 풍부한 감수성까지…. 내가 제시가 되어 비엔나의 밤거리를 함께 거니는 듯 나른한 흥분에 빠져들었다. 제시가 그녀에게 처음 말을 건네게 만든, 기차 안에서 그녀가 읽고 있었던 바타이유의 <죽은 자>도 서점을 뒤져가며 열심히 찾아보기까지 했는데, 불행히도 번역본을 구할 수 없었다.

(*)나는 셀린느가 무슨 책을 읽고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데, 바타이유의 <죽은 자>라고 하니까, 아마도 그의 소설 'The Dead Man'을 가리키는 것 같고, 보통의 영역본에는 'My Mother', 'Madame Edwarda'와 함께 묶여 있다(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 바타이유 소설선에는 포함돼 있지 않다). 여하튼 그래서 '줄리 델피와 바타이유'가 한데 묶이게 되는 것.  

-그때 이후, 별 내세울 것도 없는 내 사랑과 연애는 이른바 ‘셀린느 찾기’의 흥미롭고도 지난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신념어린 의지(!) 끝에 마침내, 나는 나의 셀린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제시와 셀린느가 <비포 선셋>에서 다시 만난 바로 그때, 나는 나의 셀린느와 함께 옛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크린 속 10년 만에 만난 그들은, 지난 시간의 엇갈림과 회한 속에 아쉬운 두 번째 이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객석의 나는 흐뭇한 행복감을 만끽하며 나의 셀린느의 손을 꼭 쥔 채, 그들을 애틋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 다시 보는 셀린느. 늘어난 잔주름과 시간이 남기고 간 흔적들은 오랜만의 그녀에게서 발견한 안타까움이었지만, 나에게 그녀는, 사려깊고 당당하며 진지하고 순수한 10년 전 비엔나 밤거리의 셀린느, 그대로였다.

(*)나는 <비포 선셋>(2004)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작년에 비디오로 봤는데(그러니까 해가 뜨고 지기까지 내겐 10년이 걸렸다), 어느덧 '선라이즈'보다 '선셋'에 더 공감하는 나이가 됐음을 확인하고 좀 씁슬했다. 내친 김에 <비포 선셋>에 등장하는 제시와 셀린느의 '10년후'도 따라가보기로 한다. 사이즈가 좀 큰게 흠이군...

 

우리는 저마다 가슴에 '비엔나'를 품고 있지만(이 스틸 사진들 속에 각자의 연인들을 채워넣는 일은 부득불하며 불가피하다. 그것이 어떤 풍경이든지간에), 비엔나에도 해는 진다. 사랑하기에도 짧은 시간에, 젠장, 책까지 읽어야 하다니!..

Before Sunset

06. 04. 09.

P.S. 때아닌 감상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해서, 얼마전에 나온 유기환 교수의 <조르주 바타이유>(살림, 2006)에 대한 동아일보의 리뷰(2006. 02. 25)를 옮겨온다. 책은 나도 단번에 읽었었는데, 리뷰를 쓰는 건 다른 일들에 밀려 늦추어졌었다.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것이다.   

-“흔히 바타이유의 사상은 난해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은 난해하기보다는 난삽하고, 복잡하기보다는 산만하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난삽하고 산만하다는 걸 <저주의 몫>을 읽으며 새삼 깨닫게 됐다.) 흔히 ‘저주받은 작가’로 불리는 조르주 바타이유(1897∼1962)의 사상 체계를 조리 있게 정리한 이 책에서 불문학자인 유기환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렇게 바타이유에 대해 독자들이 품고 있는 ‘죄책감’을 말끔히 씻어 준다.

 

 

 

 

 

-바타이유는 초현실주의의 제왕 브르통과 실존주의의 지존 사르트르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비판을 했던 작가였다(*서로 사이가 다 안 좋았다). 이는 그의 글이 니체의 강한 영향 아래 애초부터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함에 따라 늘 모순과 역설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타이유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꼽은 <저주의 몫>(1949년)과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으로 꼽히는 <에로티시즘>(1957년)을 통해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해 준다(*<에로티시즘>이 아니라 <에로티즘>이다. 영역본도 그렇게 표기한다). 특히 그의 정치경제학 저서라고 할 <저주의 몫>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바타이유는 마르크스처럼 ‘과잉(잉여)’의 문제에 천착했다. 마르크스는 이를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지만 바타이유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봤다. 태양이 지구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보내는 것처럼. 문제는 이 과잉 자체가 아니라 이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양차 대전의 발발은 바로 과잉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해 발생한 부작용의 극치였다. 바타이유는 이 과잉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비생산적 소비’를 제시한다. 그것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재산을 대가 없이 증여하거나 심지어 불태우는 ‘포틀래치’처럼 수요공급의 법칙에 어긋나는 소비다. 바타이유가 발견한 이 ‘소비의 경제학’은 오늘날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서는가.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행위를 뜻하는 에로티시즘은 그러한 비생산적 소비의 또 다른 대표 사례다. 인간이 에로티시즘에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비록 순간일지라도 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금기의 위반을 통해 증대하는 쾌락의 경제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전히 바타이유에 대한 저주의 봉인을 풀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금기와 위반의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돌이 될 것’이라는 위협에도 신이 돌아보지 말라고 했던 곳을 응시함으로써 예언력을 획득한 그의 신탁을 듣기 위함은 아닐까.

바타이유의 관점에서 볼 때, 제시와 셀린느의 사랑은 '사랑의 이전의 사랑' 혹은 '에로티즘 없는 사랑'이다('비포 러브'라고 해야 할까?). 왜냐하면, 거기엔 어떠한 과잉도 어떠한 비생산적 소비도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감정의 너울거림에 잠시 삶을 의탁하지만, 그 경계에서 다시 회수해간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에는 언제나 테이블 하나 정도의 거리가 끼여드는 것. 그 거리는 (불가피하다고 믿어지기에) 아쉽고, 안타깝고, 서운하고, 애틋하다. 그러한 여운 속에 그들이 남겨놓은 질문은 한 가지이다. '그들은 정말 사랑한 걸까?' 예의상, 이 질문을 우리 자신들에게는 던지지 말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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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4-09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진지하게 삶을 꾸려가는 것이 진정 의미있는 인생일 거라고,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이게 과연 10년 전에 완료된 필자의 생각일까요?
괜히 이렇게 썼겠죠.
인생에 심통이 나서.
흥미진진한 페이퍼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손에 들고 있던 책(혹은 읽고 있던)
을 따라가 보는 것도 재밌겠는데요?^^

로쟈 2006-04-09 0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진하고 치기어린 얘기들'이야 뭐 수시로 하게 되는 거 아닐까요? 10전이건 후이건...

릴케 현상 2006-04-09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영화볼 때 바타이유 책을 발견했어요. ㅋㅋ 전 머리 빈 양키남과 한 지성하는 불녀를 대비시키는 설정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더랬죠

로쟈 2006-04-0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썰미가 있으시네요. 저는 하도 오래전이라. 하긴 불남/양키녀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도 있겠죠...
 

민방위 소집훈련이 있는 날인지라 7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했다(지난번에 빠졌기 때문에 '보충1차'였다). 민방위도 벌써 8년차인데, 언제 소집 해제되는 것인지?(물론 편한 소리이긴 하다. 예비군때만 해도 총자루를 어깨에 매고 어슬렁 거리며 '터널 경비'도 하곤 했으니.) 여하튼 다른 날보다 좀 일찍 시작한 하루였고, 그래서인지 버스-전철-버스 출근길에서 마지막 버스는 자리에 앉아서 타고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에 출근길에 집어든 '한국일보'를 대중문화면 정도는 다 읽어볼 수 있었다. '세 편의 영화'는 아침에 읽은, 세 편의 영화에 대한 각기 다른 소개 기사이다.  

먼저. 박선영 기자가 쓴 영화 <스위트룸> 소개는 '그날 밤, 추악한 욕망의 공간'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다. 

-스위트룸은 공간의 폐쇄성과 화려함이라는 두 가지 특징으로 인해 인간 욕망의 극단을 실험하기에 썩 괜찮은 장소다. 1950년대 미국 연예계를 배경으로 화려한 쇼비즈니스 세계의 허구와 그 속에 감춰진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까발리는 영화 <스위트룸>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화려한 것을 손아귀에 쥔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조명하는 ‘인간 욕망의 보고서’다. 미국 연예계 최고의 스타 콤비인 래니(케빈 베이컨)와 빈스(콜린 퍼스)의 화려한 이면에는 팬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밀스런 사생활이 숨겨져 있다. 제멋대로인 악동 래니와 젠틀한 매너의 빈스가 약물과 성에 탐닉하며 방탕하게 생활하는 동안 매니저 루벤(데이빗 헤이먼)은 이들의 모든 뒤처리를 전담한다.

-국민적인 관심을 받고 있는 ‘소아마비 기금 생방송’ 전날, 그들은 긴장을 풀기 위해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에서 웨이트리스 모린(레이첼 블랜챗)을 불러 환각의 섹스파티를 벌이지만, 다음날 방송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이들을 기다리는 건 모린의 전라 시체. 래니와 빈스의 알리바이가 뚜렷해 사건은 자살로 종결되지만,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결별을 하고, 20년 뒤 이들의 열혈 팬이었던 작가 카렌(알리슨 로만)이 그 사건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접근하면서 감춰졌던 진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 영화 <일급살인>, <‘미스틱 리버> 등을 통해 미국적인 자유분방함을 선보여온 케빈 베이컨과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에서 영국 신사의 전형을 보여준 콜린 퍼스가 전형적인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약물중독과 동성애, 양성애 등의 파격을 연기하는 모습이 다소 낯설다. 원제는 ‘Where the truth lies’(2005)로 <엑조티카>를 만든 캐나다 출신 아톰 에고이안(아래 사진)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 '스위트룸'의 제목이나 줄거리는 그다지 눈길은 끄는 게 아닌데, 감독 '아톰 에고이안'은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의 <엑조티카> 등도 보았지만, 아마도 동시대 캐나다 감독들 중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감독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칸느영화제 등의 단골이기도 하다). 그의 '헐리우드 진출작'이라고 하니까  기대 반 우려 반이다. "영화는 래니와 빈스, 루벤 세 사람의 상반된 증언과 각자가 서로를 관찰하는 시선의 교차를 통해 ‘라쇼몽’ 같은 다중의 진실을 구축하려 하지만, 산만한 구성 끝에 드러나는 진실의 실체는 다소 싱겁다."는 평을 보면, 기대는 우려에 가까운 듯하지만.  

두번째 기사는 라제기 기자가 쓴 '씨네 다이어리'로 '외설 무서워 영화 못보나'란 타이틀이고 최근 개봉된 차이밍량의 영화 <흔들리는 구름>에 관한 것이다.

-10여년 전 한 동시상영관에서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욕망의 낮과 밤>을 친구와 함께 관람했다. 친구는 극장 문을 나설 때 “욕망은 무슨…”이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동시상영관이라는 야릇한 장소와 꿈보다 해몽이 좋은 제목이 만들어낸, ‘뼈와 살이 타는’ 화끈한 영화일 것이라는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욕망의 낮과 밤>의 원제는 'Tie Me Up, Tie Me Down'이었다. '나를 묶어주세요, 나를 풀어주세요' 정도의 뜻인지.)

 

-한때 동시상영관이 욕정 해소의 동의어 역할을 한적이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에로 비디오 사업이 ‘배설구’ 역할을 대신하면서 동시상영관은 급속도로 사라져갔다. 활황을 누리던 에로 비디오도 짧은 전성기 끝에 ‘포르노의 바다’ 인터넷에 밀려 사양 길로 접어들었다.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예술공헌 은곰상 등 3개 상을 수상한 대만 차이밍량(蔡明亮) 감독의 <흔들리는 구름>이 약 2분 가량 삭제된 채 지난달 31일 개봉됐다.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수입사 유레카픽처스가 낸 18세 관람가 등급 신청에 대해 2차례나 제한상영(성인영화 전용 상영관에서만 상영 가능) 판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성인 전용관이 전무해 제한상영 판정이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수입사는 자진 삭제를 선택해야만 했다.(*<몽상가들>의 선례도 있는데, 굳이 '제한상영' 판정을 내려야 했을까 의문이 든다. 덕분에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려던 생각이 싹 가셨다.) 

-<흔들리는 구름>은 무척 야해 보이는 영화다. 남녀의 하얀 나신이 무시로 등장하며 다양한 성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웬만한 포르노는 저리 가라 할만한 결말은 정말 극장에 걸릴 수 있는 영화인가 의문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다. 그러나 영화는 숨막힐듯한 관능을 내뿜거나 관객의 몸을 뜨겁게 달구지 않는다. 가뭄으로 표현되는 삭막한 인간관계 속에서 애정에 목 말라 하는 주인공들의 애처로운 모습이 가슴을 짓누를 뿐이다. <흔들리는 구름>은 우리와 정서가 비슷한 대만에서 무삭제로 개봉돼 예술영화로는 드물게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올렸다.

-인터넷이 ‘에로 시장’을 장악하면서 극장에서 숨은 욕정을 털어내려던 시대도 완전히 저물었다. <흔들리는 구름>이 무삭제 개봉됐어도 ‘예설’ 대신 ‘외설’을 탐닉하려는 관객, 특히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우리 청소년들이 '포르노의 바다'를 놔두고 왜 엉뚱한 데서 헤엄을 치겠는가?) 18세와 20세 사이의 청소년을 보호하겠다는 현행 등급분류 체계의 제한상영 규정이 애먼 예술영화의 정상적인 상영만 가로 막는 게 아닌지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고민은 고민이고 짜증은 짜증이다. 아침부터 좀 짜증이 났다. 우리에게 포르노를 보여달라!)

세번째는 다시 박선영 기자의 <연리지> 리뷰이다. 인터넷판 타이틀은 '한국멜로의 불치병 <연리지>'인데, 지면에는 '"바보야, 나 죽어" 또 그 소리네'로 돼 있다.

-멜로영화 만들기가 갈수록 힘들다. 연인들을 애절하게 떼어놓는 게 멜로영화의 관건일진대, 신분이나 계급 차별은 줄어들고, 어지간한 병은 치료만 잘 받으면 죽음에까지 이르진 않는다. 작가와 감독들은 기를 쓰고 희귀병과 사회적 금기를 찾아 보지만, 선택의 폭은 좁아진다.(*영화건 드라마건 한국멜로의 두 가지 공식은 희귀병이거나 (알고보니) 남매이거나, 이다.) 

-한류스타 최지우의 스크린 복귀작 <연리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의 설득기제를 찾으려다 막다른 골목과 마주친 한국영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야말로 한국 멜로영화의 ‘불치병’인 불치병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나름의 변주와 반전을 통해 새로운 내러티브를 창출해보려 한 감독의 고민과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관객에게는 되레 두 배의 황당함과 실소를 선사하며 ‘불치병 코드’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반증한다.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멜로영화의 관습들을 고스란히 집대성한 <연리지>는 천하의 바람둥이 민수(조한선)가 원발성폐고혈압이라는 희귀병에 걸린 혜원(최지우)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깨닫는 과정을 기시감(旣視感)으로 충만한 장면들에 빼곡히 나눠 담았다. 두 연인은 비오는 날 난폭운전으로 흰 옷에 빗물을 튀기면서 우연히 만나고, 차에 탄 여자는 약속한 듯 휴대폰을 두고 내린다.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천진발랄한 그녀는 남자와 첫 키스를 하다 수줍게 도망치고, 장대비를 맞고 대문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바보야, 나 죽어”를 울며 외친다. 가히 클리셰의 총출동이라 할 만한 상투적 서사 전개로 인해 반전의 효과는 코웃음 속에 묻혀버리고, 두 주인공의 감정에 동참하지 못하는 관객은 지루하다 못해 외로울 정도다.

-영화는 신파의 혐의를 벗기 위해 최성국, 서영희 커플의 코믹한 사랑 이야기를 곁들이며 로맨틱 코미디의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코믹과 신파는 물과 기름처럼 시종 겉돈다. 30대 여배우들이 나이에 맞는 다양한 배역으로 한국영화의 중흥을 이끌고 있는 요즘, 서른 한 살의 최지우가 극중 배역과 유리된 채 ‘지우히메’의 청순하고 귀여운 이미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모습은 이 아름다운 한류스타의 미래를 심히 염려하게 만든다.

 

 

 

 

-그러나 불치병이 어디 <연리지>만의 잘못이겠는가. 사랑의 슬픔은 불치병 같은 외부의 방해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그 내적 기제에 의해 자체 소멸하고 침식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왜 한국영화만 간과하고 있는지(*'성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정식이 말하고 있는 것도 이것이다)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최근 한 해 동안만도 <내 머리 속의 지우개> <파랑주의보> <백만장자의 첫사랑> 등이 불치병 릴레이를 펼치며 동어반복을 계속했다. <연리지>는 두 나무가 자라면서 가지가 붙어 하나의 나무로 합쳐지는 현상으로, 불치병으로 인해 하나가 되는 두 주인공의 사랑을 은유하는 제목이다.(*아래는 송혜교, 차태현 주연의 <파랑주의보>.)

해서, 세 편의 영화는 각기 '진실'과 '외설'과 '불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뭘 봐야 하나?). 아침부터 그런 걸 생각, 해보게...

06. 04.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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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4-0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톰 에고이얀의 영화는 좀 아쉽더군요. 그의 장기가 고스란히 들어있고 연기 좋고 기술적인 부분도 좋고 다 좋은데 2%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그래도 그의 영화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드니 함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조만간 볼 생각이구요.

로쟈 2006-04-06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짐작에 그럴 거 같았습니다. 저는 비디오로나 봐야 할 거 같은데, 차이밍량 영화 같은 건 비디오가게에도 잘 들어오지 않아서(--;)...
 

 

 

 

 

이번주 <필름2.0>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중저가' 영화잡지이지만, <씨네21>에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요즘의 <씨네21>이 과연 세 배만큼의 제값을 하는 '고가' 브랜드인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개최된 '1996년의 한국영화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를 계기로 '1886년 대한민국에 무슨 일이?'를 특집으로 내건 이번주 기획만큼은 단연 돋보인다(이번 주 <씨네21>의 기획특집은 '영국배우의 힘'이다). 

이 특집과 관련해서, 10년전, 1996년의 이야기를 나도 풀어볼까 하다가 견적 대비의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냥 한 두 꼭지에 대해서만 참견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는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또 한편의 저예산 디지털 영화를 발표한 송일곤 감독의 인터뷰 꼭지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송감독과 박영준 촬영감독의 대담 꼭지이다. 

폴란드의 국립영화학교 우츠출신으로 우리에겐 영화보다 (모 통신회사) CF로 처음 알려진 그의 영화들 중에서 단편영화 <간과 감자>와 장편 <꽃섬>(2001), <거미숲>(2003) 등이 내가 본 작품들이다(그러니까 단편 <소풍>과 장편 <깃> 등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로선 너무 도식적이라고 여겨진 <거미숲>이 실망스러워서 그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었는데, 이번에 개봉될  <마법사들>은 '원 테이크 원 컷'이라는 형식적 특징 때문에 '어떨까' 싶은 눈길을 끈다.

이 신작과 관련해서는 얼마전 오마이뉴스(06. 03. 19)에 소개된 기사내용을 약간 재구성해서 잠시 따라가본다: "송일곤 감독의 영화 <마법사들>은 한편의 연극같은 영화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3인3색’ 프로젝트로 진행된 이 영화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편집 없이 하나의 컷으로 이루어진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으로 관심을 끈다. 이 영화는 자아 정체성을 재발견하고 상처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줄거리 ‘마법사밴드’는 멤버 자은(강은비)의 죽음으로 해체된 인디밴드다. 음악을 통해 청춘을 보낸 그들에게 자은의 죽음은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자은과 연인 사이였던 재성(정웅인)은 그들만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강원도 숲 속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명수(장현성)는 아르헨티나로의 이민을 결심했다. 한편, 보컬이었던 하영(강경현)은 자은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에 더 이상 노래조차 부르지 못한다. 그들은 죽은 자은을 기념하기 위해 재성이 운영하는 카페에 모인다. 이곳에서 그들은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특히 명수는 하영의 노래를 듣고 싶다며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을 하영에게 선물한다. 그러나 자영은 여전히 노래하기를 망설인다. 그들은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열정과 사랑을 재정립하고 극복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공간의 변화를 통해 시공을 넘나드는 송일곤 감독의 연출력이다. 카페의 1층은 현재의 공간으로 살아있는 세 명의 멤버가 다시 만나는 장소이며, 과거의 공간인 카페 2층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해져 힘겨워하는 자은과 재영의 갈등을 보여준다.

-형식미 단편 <소풍>으로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장편 <거미숲>, <깃>을 통해 철학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마법사들> 역시 그만의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 <거미숲>에서도 ‘숲’을 통해 혼란스러운 인간의 기억을 표현한 바 있는 송일곤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숲’을 통해 각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이 영화는 ‘원 테이크 원 컷’ 촬영에도 불구하고 카페 1층과 2층, 숲에 이르기까지 장소의 변화를 주는 과감한 시도를 했다. 96분간 쉬지 않고 연기해야 할 연기자들뿐만 아니라 촬영 스태프 모두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작업이다. 중간에서의 작은 실수는 곧 촬영 종료를 의미하고, 모든 작업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배우와 스태프들 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스토리 자체가 가지는 진부함과 급격한 심리의 변화는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30분짜리 단편을 96분의 장편으로 재구성한 영화 <마법사들>은 3월 30일 CGV 인디상영관에서 개봉된다).

한편, <필름2.0>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는 이 영화적 실험의 배경: "폴란드에서 공부할 때 2학년 가정의 중요한 수업 중 하나가 '마스터 샷'이라고 해서 끊지 않고 이어지는 하나의 연속적인 샷 안에서 배우들이 움직일 때 카메라가 어떻게 움직일까를 공부하는 과정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르코프스키나 소쿠로프뿐 아니라 북유럽이나 소련을 중심으로 영화미학이 발전했던 60, 70년대에는 시간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가 많은 이들의 화두였다. 그러면 우리도 해보자, 그렇게 시작한 거다."

Александр Сокуров

다시 말하면, 그러한 실험이 헐리우드쪽보다는 러시아나 북/동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최근의 사례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칸느영화제 출품작이기도 했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1951- )의 <러시아방주>(2002, 99분)이다(역시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영화). 제목에서 얼핏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화는 러시아의 보물창고라 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대한 감독의 공시적/통시적 사색과 명상을 담고 있다.

재작년 모스크바 체류 기간에 이 영화를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실제 영화보다 흥미로웠던 건 본편 방송 이후에 덧붙여진 '메이킹 필름'이었다. 영화는 단 한번에 테이크로 모든 걸 찍어야 하기 때문에 치밀한 계산하에 모든 배우 및 스탭들의 동선까지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야 했다(리허설이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서, 이런 방식의 영화는 필름속에 담기는 내용만큼(혹은 그보다 더) 그 찍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었다. 아래 사진은 소쿠로프와 그의 스탭들.

그런 사정은 <러시아 방주>와 같은 방식으로 찍은 <마법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마법사들의 러시아 방주?). 박영준 촬영감독의 고백: "<마법사들>에서 최고의 관객은 현장에서 감독님의 '오케이'를 들었던 현장 스탭들이다. 연극을 보듯 그 순간을 우리 모두 '생짜'로 본 거다. 그 감격을 잊을 수가 없다. 뭐랄까, 우리 스스로 치유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내 손으로 흙 발라서 집을 만든 것 같은 느낌이다." 옆에서 거드는 송감독: "마지막 촬영 끝나고 나서 스탭들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 했던 것 같다." 

해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내가 <마법사들>보다 더 보고 싶은 건 그 메이킹 필름이다(어떤 경우에 예술은 'picture'가 아니라 'picturing'에 깃든다). 그걸 찍을 비용이 '저예산'에 포함돼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06. 03. 26.

P.S. 보너스로 덧붙이자먼, 감독 자신이 꼽는 <마법사들>의 베스트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건 두 남녀가 숲에서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한국영화에서 그런 룩을 처음 본 것 같다. 흑백이 강렬하면서도 컬러가 살아있고 표정들도 너무 잘 나타나 있고, 미학적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신이다. 우리 영화니 자뻑이기는 하지만." 아마 자뻑인 거 맞을 것이다. 한데, 사과를 먹는 장면은 <거미숲>의 정사장면에서도 나온다. (감자가 아니라!) 사과가 송일곤 감독의 '대상a'쯤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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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3-2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와 [필름]모두 좋아하지만 [씨네]의 경우 그 "값"을 한다고 봅니다. "3천원시장"을 [필름]이 포기했지만 [씨네]는 영화잡지에 바랄 수있는 "뽀대"가-표지사진하나만 보더라도-훌륭합니다. 내용은 [필름]의 경우 "이연걸 특집"에서 보듯 하나의 기사로 도배하는 경우가 왕왕있습니다.그리고 [필름]에는 토크2.1이 있지만 비평면이나 "김혜리가 만난사람들"같은 경우는 [씨네]가 독보적이구요.

로쟈 2006-03-2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씨네21>을 더 자주 봤었지만, 최근에는 주로 실망감을 안겨주더군요. 아마도 작년말에 '2005년 나의 베스트 초이스' 같은 기사 꼭지가 결정타였던 것 같은데, 기자들의 베스트 초이스의 대상이 (영화가 아니라!)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런 '수다'는 개인 블로그에나 올릴 만한 거라는 '편견'을 가진 저에겐 잡지가 좀 뻔뻔해 보이더군요. 이후엔 간혹 살 때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happyant 2006-03-2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입니다. 로쟈님. 한때 씨네21의 열혈 애독자였습니다만, 근래의 씨네21은 예전의 그 톡쏘는 '취향'의 맛이 느껴지지 않더군요. 스스로의 '수준높음'에 도취된 듯 보입니다. 이번호 필름2.0은 정말 재밌더군요.^^

로쟈 2006-03-27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취이면서 매너리즘 같기도 합니다. 자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리뷰들이 아주 드물게 눈에 띄는 것이 제 시력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twoshot 2006-03-27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지는 아니고 또 제가 [씨네]의 내부자도 아니지만 '리뷰'에만 초점을 맞춰 말해보면:김소영,허문영,정성일등의 [전영객잔]은 필자들의 명성에 값할만큼 수준이 고릅니다. 다른 비평은 보통 신진들로 채워집니다. 또 김혜리, 정한석등의 일급 내부필진이 그 뒤를 받치고 있고요. 홍성남의 성실한 글들도 그냥 넘어갈 수 없읍니다. "뭐 이정도면"하는 도취가 없을 수는 없겠으나 이것이 '최선의 의도'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대안은 무엇일까...그게 쉽지는 않겠다는 거죠...문예지들에 그득한 '도취와매너리즘'이 그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말이죠...

로쟈 2006-03-27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주 <필름2.0>에도 두어 편의 읽을 만한 리뷰들은 실립니다. 해서 저의 불만은 정확히 <씨네21>이 <필름2.0> 3권 값을 하느냐입니다. 외부 필자들과 정한석 기자의 글들이 눈에 띄지만, '내부'는 예전 같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결정타는 '2005년 베스트 초이스' 같은 어처구니 없는 수작이었습니다(막바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더군요). <씨네21>은 그 이후에 제게 아직 신뢰감을 회복시켜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twoshot 2006-03-28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처구니 없는 수작'에 대해서...다른 물건은 차치하고라도 아무개기자가 추천한 '디빅 플레이어'를 보며 이건 또 무슨 농담인가...어리둥절했었습니다. 씁쓸했구요. 헌데 '생선회칼'과 '만년필'이 들어간 그 '페이퍼'가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물건들에 대한 페티쉬가 저의 취향에는 먹혔던 거죠. '하이비'같은 잡지에서 볼 수있는 억대 오디오는 아예 쳐다 보기도 싫지만...짐작컨대 그것은 씨네의 '엘리티즘'에 대한 내부의 가벼운 반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잡지의 잡스러움은 그래봐야 거기서 거기라는 게 아쉬움을 넘어 좀 안타까웠지만...

로쟈 2006-03-28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도 잡지에 대한 기대나 취향의 차이일 듯합니다. 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기 위해서 영화 잡지를 사 읽는 편이라.^^
 

갑자기 프린터가 말썽을 부리는 탓에 30분 넘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종이도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 프린터도 열 받은 것 같지만, 열은 나도 받았다. 프린터를 잠시 꺼두고 기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창고' 정리나 한다. '미용사 판타지에 대하여'란 제목의 모스크바 통신문을 띄운 적이 있는데, 내가 좋아했던 파트리스 르콩트의 영화 <미용사의 남편>(1990)에 대해서 '커트'하는 기분으로 잠시 매만져본다. 국내에선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란 제목으로 개봉했었지만(기억에 영화는 92년 가을 씨네하우스에서 개봉일이었던 토요일 오후에 봤다. 아마 연거푸 보았던 듯하다), 나는 원제를 더 좋아한다.

일단 영화의 줄거리를 옮겨온다: 앙뜨완(쟝 로슈포르 분)은 12살의 소년이다. 그에게는 비밀스런 즐거움이 있었는데, 아름다운 쉐퍼 부인이 주인인 이발소에 가는 일이다. 그녀가 풍기는 향기와 부드러운 말투에 완전히 매혹당했기에 머리를 기를 새가 없다. 어느날 저녁 식사때 아버지가 장래에 대해 물었을때 서슴없이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다고 대답했고, 그날 이후 미용사의 남편이 될 꿈을 간직한 채 거의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가 마틸드(안나 갈리에나 분)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마틸드는 주인이 은퇴하면서 물려준 이발소의 주인이었고 조심스럽고 매력적인 여자였다. 처음에 그녀는 예약 손님이 있다는 이유로 그를 거절했으나 다시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는 청혼한다. 아버지의 말씀인 "강한 신념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고 기필코 마틸드와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녀 주위를 3주일동안 맴돈 후 다시 찾아갔을때, 뜻밖에도 그녀가 "아직도 원하신다면 결혼할께요."라고 말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꿈이 현실화된 것이다. 미용사의 남편이 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는 인연을 끊었다.

세상의 다른 것은 필요치 않았고 아이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가 곧 삶이었고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틸드가 일을 하고 있으면 그는 옆에서 도와주거나, 때쓰는 아이를 달래주기도 하고, 그녀와 단둘이 머물수 있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리곤 했다. 10년동안 사소한 일로 단 한번을 다투었을 뿐인데도 그의 심장은 얼어붙을 정도고, 그녀를 향한 사랑은 강렬하고 깊었다. 심한 번개와 비가 내리던 날, 둘은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마틸드는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에게 보낸 한통의 편지만을 남긴 채. "사랑하는 이에게. 먼저 떠납니다. 사랑을 남기고가려구요. 아니 불행이 오기전에 갑니다. 우리의 숨결과 당신의 체취와 모습, 입맞춤까지 당신이 선물하신 내 생애 절정에서 떠납니다. 언제나 당신만을 사랑했어요. 날 잊지 못하도록 지금 떠납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파트리스 주로 ‘아찔한 영화'들을 만드는데, ‘아찔한 여성들’ 때문에 신세 망치는 남자들이 등장하는 장르이다. <미용사의 남편>도 예외는 아닌데, 그의 영화들 중에서 <이본느의 향기>, <살인혐의>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다(<살인혐의>의 원제는 <므슈 이르>).

나대로 <미용사의 남편>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한 소년이 동네 미용실의 (아주 풍만한!) 미용사 아줌마를 ‘사랑’한다. 아줌마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그런 이상형의 미용사를 평생 꿈꾸며 산다. 그리고 장년이 된 그는 정말로 젊고 ‘아찔한’ 미용사를 만나 (당연히)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녀와 결혼한다. 그런데, 이 ‘아찔한’ 미용사는 가장 행복할 때 죽겠다면서 폭우가 쏟아지던 날 강물에 투신한다(오, 아찔한 것들이여!). 혼자 남은 ‘미용사의 남편’, 아내가 없는 텅 빈 미용실에서 혼자 배꼽춤을 춘다. 다시 혼자 쓸쓸하게 남겨진 한 남자를 두고 카메라는 뒤로 빠져나온다.

이 영화의 절정은 미용사 아내의 투신이 아니라 남편의 코믹하면서도 허전한 배꼽춤이다. 그것은 ‘아찔함’이 남긴 공백을 채우기 위한 ‘허전함’의 몸부림이어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눈물겹다. 그래도,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이 영화가, 혹은 이 영화에서의 사랑의 공식이 어떤 보편성을 갖는다면, 그건 이 영화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미용사 판타지’가 어느 정도 보편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용사 판타지'는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서 갖는 여러 판타지의 일종이지만(물론 여성도 ‘미용사 판타지’를 갖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그 직접성, 구체성에 있어서 특권적이라 할 만하다. 무엇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가? ‘머리 만져주기’, 혹은 ‘머리 감겨주기’. 단적으로 말해서, 미용사는 ‘엄마’ 외에 우리의 ‘머리를 감겨주는’ 유일한 사람이다(물론 엄마의 대역으로서 이모와 할머니도 있지만 그건 어릴 때 잠시이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미용사가 엄마와의 2자적 관계에서 ‘제3자’로서의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전개되는 3자적/사회적 관계 ‘사이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즉 ‘미용사’는 상상계(엄마)와 상징계(아버지의 이름) 사이의 중간계에 대한 이름이다(마치 지옥과 천국 사이에 연옥이 있는 것처럼). 요컨대, <엄마-미용사-아버지의 이름>의 3단계.

[Amy]

 

라캉 이론에서 거울단계는 그 경계면을 지시하는데, 사실 미용실이야말로 거울로 꽉 찬 ‘거울단계적’ 공간 아닌가? 그 거울 앞에서 눈을 감으면, 우리는 머리를 만져주는 ‘손길’, 즉 촉각에만 모든 것을 내맡기게 되는바, 이 촉각이야말로 2자적 관계에서의 기본 감각이다. 그리고 눈을 뜨면, 우리는 상징계의 시선으로 사회적 자아(social self = me)가 잘 연출되고 있는지 ‘감시’한다. 이때의 시각은 3자적 관계에서의 가장 주된 감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은 상상계와 상징계 사이의 스위치(전환) 공간이다. 우리는 미용실에서 이젠 회복할 수 없는 상상계적 공간에 잠시 잠겼다가 다시 깨어나는 셈이다.

 

 

 

 

그런데, 사실 미용실의 핵심적인 공간은 머리를 깎는 곳이 아니라 머리를 감는 곳이다(아예 머리를 깎는 것은 머리를 감기 위한 전희(前戱), 곧 pre-play는 아닌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샴푸의자에 앉아서 우리는 눈을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힌다. 이건 옛날 이발소에서처럼 고개를 앞으로 숙여서 감는 것과는 다르다. ‘숙여!’란 소리를 들으면서 머리를 감는 건, 복종을 내면화하는 학습과 단련의 성격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를 감기는 엄마는 ‘아버지-금지’의 목소리를 가진 ‘아버지의 대행자’로서의 엄마이다.

때문에, 미용사의 첫째 조건은 상냥함과 부드러운 손길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하거나 무뚝뚝한 미용사는 ‘아버지의 대행자’와 다를 바 없는데, 사실 머리를 가위질하는 그들의 손길은 정신분석학적으론 ‘거세 위협’, 더 나아가 ‘상징적 거세’를 무대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거울(관중) 앞에서. 그런 의미에서, 미용실에서 머리를 집히는 일보다 훨씬 더 끔찍한 건 이런 ‘아버지-미용사’들에게 걸리는 일이다!

어쨌든 제대로일 경우, 우리는 고개를 젖히고 다시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원래의 무능력(helplessness) 상태로 돌아가며(우리의 잘난 ‘머리’는 원래의 ‘머리통’이 된다!), 모든 것을 ‘엄마의 대행자’로서의 미용사의 손길에 맡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는 그 손길(촉각)과 함께 물에 적셔지고 물에 잠겨진다. 우리는 그렇게 ‘죽는다’. 사회적 자아의 익사. 그리고는 물론 되살아난다. 머리를 말리면서. 잠시 묻어두었던 온갖 고민거리들과 의무들을 다시 떠올리고 떠안으면서. 제대로 깎였는지를 정신차리고 확인하면서!



이러한 구도를 전제할 때, 미용사의 남편이 되고 싶어하는 꿈, 혹은 미용사 판타지는 상상계적 아이의 단계(엄마가 머리를 감겨주던 단계)에서 상징계적 어른의 단계(자기 혼자 머리를 감아야 하는 단계)로 이행해 가야 하는 과정이 두렵거나 귀찮은 ‘미숙한’ 남자들의 판타지이다(‘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주류적 판타지에 기대어 볼 때). 그들은 여전히 자기 스스로가 아니라, 미용사(엄마의 대행자)의 손에 의해 머리를 감고자 하는 어른-아이인 것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론 그렇다(왜 미용사의 남편들은 생활력이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걸까? 물론 이에 대한 데이터를 나는 갖고 있지 않지만).

나도 한때 미용사와의 사랑, 미용사와의 결혼을 꿈꾸었지만(왜 아니겠는가? 더 어릴 때는 버스 안내양 판타지에 빠진 경력도 있는데!), 퇴짜맞았다(물론 이런 퇴짜를 맞을 때도 아찔하다!). 이미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했다(지나고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또 한때는 아예 미용기술을 배워서 이민을 갈까도 생각했다(무슨 생각을 못하겠는가?). 그럼 미용사의 남편은 못되더라도, 최소한 ‘미용사 남편’은 될 테니까. 하지만, 생각을 고쳐먹었고(러시아에서라면, 생각을 고쳐먹기가 훨씬 쉬울 듯하다!), 결국은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식의 글쓰기란 아무것도 되지 못한 나대로의 ‘배꼽춤’인 셈이다. 

아내는 간혹 내가 미용사였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사진은 '미용사 남편'이 등장하는 영화 <화이트>). 뒤집어 생각하면, 아내에겐 ‘미용사의 아내’ 판타지가 있는 게 아닌가 싶다(이 보편성!). 결국, 우리는 서로가 갖고 있지 않은 걸로 서로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인지? 다른 한편, 삶이 언제나 ‘간 길’(=이었네!)과 ‘가지 않은 길’(=이었더라면!)이란 이원적 구조 속에서만 유지/지탱되는 거라면, 우리의 판타지는 곧 현실이기도 하다. 판타지가 없다면, 현실도 없을 것이기에(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판타지, 혹은 현실의 알리바이.

거꾸로, 판타지가 현실이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판타지가 아니다. 때문에 다행이건, 불행이건 현실은 언제나 ‘아찔한 것들’을 놓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판타지는 그 유구함을 유지한다. 이것이 현실과 판타지의 변증법인바, 이 변증법은 욕망의 구조를 다르게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욕망 때문에 우리는 자주/간혹 자기파멸로의 유혹에 시달리지만, 욕망이 없다면, 한 시인의 말대로, 삶은 얼마나 무료하고 지루할 것인가! 이곳 (모스크바) 전철역 주변에서 언제나 늘어지게 자고 있는, 집 없는 개들처럼...(아래 사진은 그런 개들을 자주 보던 모스크바의 '대학역' 역사 주변의 야경이다. 모스크바 대학은이 전철역에서 15-20분 정도 걸어가야 하는 거리이다. 얼마나 자주 드나들던 출입문이었던가!)

06. 02. 03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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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이발소, 미용실은 늘 관능의 기운을 아찔하게 휘감고 있는 곳이죠.
머리 감기, 가 전희 행위라는 데 끄덕.
이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들은 위험하다고 느껴왔는데...

로드무비 2006-02-03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행복의 절정에서 그렇게 휙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다니!
소년의 엄마가 떠준 털실 빤쓰도 인상적이었어요.
방울이 달렸었나?
이 페이퍼 퍼갈게요, 로쟈님.^^

딸기 2006-02-0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글을 제 홈페이지에 좀 퍼갈께요.

바람돌이 2006-02-04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둘이 미용실안에서 춤추던 장면이 어찌나 행복한 장면으로 기억되던지... 지금은 다른건 다 잊었어도 그 장면만은 생생하게 떠올라요. 뭐라고 하든 그냥 그들의 사랑이 부러웠어요. 진짜 사랑한다면 이들처럼이예요. ^^

로쟈 2006-02-04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들을 좀 수정했습니다. 많이들 좋아하시는 영화는 분명하군요.^^

로드무비 2006-02-06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정한 그림들도 좋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방학이지만 '월요일'이란 이유로 학교에 나왔다(대신에 점심 먹을 때쯤 나왔다). 오는 길에 이번주 <필름2.0>을 사서 대략 점심먹을 때까지 들춰보았다. 그리고는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2005)와 이안 감독의 <브로크백 마운틴>(2005)을 보아야 하는 영화로 일단 꼽아두었다. 전자는 나이 어린 부모(=아이)에게 생긴 한 '아이'에 관한 영화이며, 후자는 두 남자간의 (우정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게이 영화'이다. 

내 분류대로 하자면, 전자는 '로망스'이고 후자는 '포르노'이다. 아마도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두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몇 마디 코멘트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아마도 내가 접할 수 있는 '2005년의 영화' 두 편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곤 설특집이라고 실린 '문화계 32인의 강추, 나만의 컬처블로그'를 훑어보는데, 가장 눈길이 간 '블로그'는 역시나 마광수 교수의 '이런 게 예술이지'. 아침 나절에도 요즘 읽고 있는 <예술의 종말 이후>를 들춰본 탓인지 '예술'이란 단어에 내 시지각이 민활하게 반응했다. 커피 한잔 마시는 김에 아르바이트로 '예술' 좀 따라가본다. 

 

 

 

 

마광수 교수는 작년 한 해 동안 대략 8-9권의 책을 출간했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는 모양이다. 앤드류 블레이크에 대해서도 아마 그의 책들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상찬되고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그의 책들을 초기의 문학이론서나 윤동주 론을 제외하면 별반 읽은 게 없다(한두 권 읽어보면 나머지는 지루하다는 게 그 가장 큰 이유이다).

 

 

 

 

'이런 게 예술이지'를 읽으며 그에게 더 맞는 건 '야설'이 아닌 '야동'의 세계가 아닐까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변명과 일기, 잡담들만 잔뜩 늘어놓는 그의 '권태'는 동적인 영상들로부터의 소외가 낳은 결과는 아닐는지(그런 의미에서, '국민감독' 임권택만 도와주지 말고, '국민권태' 마광수도 좀 도와주자! 진짜 '예술' 좀 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또 먹고 살 만하면, 볼 게 포르노밖에 더 있는가?)  

마광수 교수(1951- )가 소개하고/자랑하고 있는 예술은 앤드류 블레이크(Andrew Blake, 1947- )의 세계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지 모르겠지만(나는 처음 들어봤다), '앤드류 블레이크의 세계'의 보다 정확한 이름은 '앤드류 블레이크의 에로틱 세계'이다. 관련사이트에서 그의 필모그라피를 보니 포르노 관련으로는 작가, 편집, 촬영, 감독, 제작 안 하는 게 없고, 직접 찍은 것만도 거의 60편에 이른다. 마교수는 앤드류 블레이크의 베스트 타이틀 5편을 거명하면서 이렇게 소개한다.

"요즘 학생들한테 물어보니 예쁘기만 하고 재미없다고 하지만 무슨 말씀, 탐미주의자인 내가 보기엔 이거야말로 유미주의의 결정판이지. 포르노가 아니라 예술이다. 미장센이 정말이지 너무 좋다.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어떤 작품을 봐도 앤드류 블레이크의 예술적인 포르노만한 걸 못봤다. 그의 작품을 10년전에 비디오로 봤지만 최근 이 다섯 편을 구해 보면서 다시금 즐거웠다. 예술이란 이런 거다."  

마광수 교수의 57편에 이르는 블레이크의 영화들을 다 구해서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베스트 5'로 꼽은 영화들의 목록은 'Body Language'(2005), 'Hard Edge'(2003), 'Girlfriends'(2002), 'Paris Chic'(1997), 'Captured Beauty'(1995) 등이다.

'요즘 학생들'은 재미없어 한다지만, 블레이크는 (예술의 종말과 무관하게) 요즘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이다. 그리고 그 현역 예술가의 세계는 "불쾌하기는커녕 굉장히 아름답고 내가 좋아하는 페티시즘도 상당히 다양하게 반영돼 있다. 환상적이라고나 할까." 앙드레 김 어법으로 '판타스틱'한 장면들을 나로선 그저 '상상해' 보는 정도이지만, 이런 '패티시'에 걸맞는 '예술작품'을 예술가 마광수도 충분한 영감을 받고 써주었으면 좋겠다('사라'만 즐거운 작품 말고). 마광수-예술론에서 지루하다는 건 죄악이니까(그에게 불충분한 건 도덕이 아니라 예술이다).

06.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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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shot 2006-01-23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광수 대단합니다. 이제 저런 그림들도 5분이상 들여다 보면 지루해 지는데 말이죠-.-+...어쨌거나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볼만합니다. 이제는 좀 새로운 길을 가야 하지않나 하면서도 그 호흡에 한 번 빨려들면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저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고요.

파란여우 2006-01-23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먹고 살만하면 볼게 포르노 밖에 없다면....
앞으로 기를 쓰고 먹고 살만한 수준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쳐야 하는건가,
아니면, 먹고 살만한 수준이 안되기 위하여 안빈낙도해야 하는건가.
갸우뚱... (아, 나두 몰러...)
여하튼, 마광수가 소외감에 찌든 사람으로는 보입디다.

로쟈 2006-01-2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과 살 만한 수준'이 대개 10-20억 정도의 재산은 있어야 한다고 하니까 만만한 수준은 아니겠지요. 기를 써서는 안되고 로또를 쓰셔야 합니다. 본문에는 쓰지 않았지만, 포르노는 세계평화에 기여한다는 동물행동학자의 일리있는 주장도 있습니다. 에덴동산이 사실 포르노적 세상이 아니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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