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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들 얘기를 꺼내놓기 전에 최근에 개봉한 영화 두 편에 대한 얘기부터 늘어놓기로 한다. 그 두 편이란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과 이상일의 <69 식스티나인>이다. 전자는 68년에 관한 영화이고, 후자는 69년에 관한 영화이다. 이미 한국 생활에 적응하고 있는 나로선 영화관에 들락거릴 여유가 전혀 없다는 게 아주 당연하기에, 개봉 영화들을 본 건 물론 아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러시아에서 산 비디오시디를 노트북에 복사해놓고 있기 때문에 가끔 볼 때가 있다(러시아어 시나리오도 갖고 있다). 그리고 <69>에 대해서는 몇 개의 영화평을 통해서 대략 어림짐작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룬 영화이어서인지 근래의 영화평들 가운데는 두 영화를 동시에 언급하고 있는 것도 드물지 않다. 오늘 아침에 전철에서 읽은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몽상가들>, 혁명은 노는 것"(<필름2.0>)이란 평도 그런 경우인데, 베르톨루치의 영화를 비교적 호의적으로 평하면서 이렇게 언급한다: "물론 <몽상가들>의 결말은 시시하다. 어쩌면 베르톨루치는 그 당시 거리에서 벌어졌던 혁명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럴 바에야 지지 않는 법은 웃어주는 것이다. 이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에 나오는 전언이기도 하지만 베르톨루치는 그걸 다른 방식으로 얘기할 뿐이다." 소설 <69>는 물론 영화 <69>의 원작이다. 요컨대, 베르톨루치와 무라카미 류/이상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은 내용은 얘기하고 있다는 것. 그 같은 내용이란 글의 제목을 빌자면, '혁명은 노는 것'이라는 전언이다.

<몽상가들>에서 김영진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이런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테오와 이자벨 부모가 휴가를 마치고 잠시 집에 들렀을 때 그들은 자식들과 그들의 친구가 저질러놓은 완벽한 집안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에 질겁하면서도 그걸 존중해준다.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 이 장면은 충격이다. 다음 세대의 도덕을 현재형으로 강요하지 않는 자그마한 혁명의 도래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가 오늘날의 수준만큼이나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여하튼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68년 5월 혁명 덕분이다."

갓 스물에 이른 세 청춘남녀가 서로 벗고 뒹굴고 하는 '관능의 막다른 골목에서 혁명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걸 읽어내는 건 평론가의 권리이고 관객의 권리이다. 하지만, 자유로운/방종한 아이들의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부모들이 존중해주는 장면에 대해 '충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좀 오버이다. 부모가 그렇게 방임하는 것은 그들이 성인이어서라기보다는 아직 (순진무구한) 어린애들이기 때문은 아닌가? "그들은 내색하지 않고 용돈을 던져놓고는 다시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혁명을 자기들끼리의 '노는 것'으로 전유할 수 있는 물적 토대는 부르주아인 부모의 돈이다. 그 돈으로 히히덕거리면서 "자신들의 출신 성분의 토대를 공격"한다는 게 얼마만큼의 진정성을 가질까? 강남의 여피족들이 자녀가 대마초를 피우고 혼음하는 걸 방임하는 일이 과연 얼마나 '혁명적'일까? "뼛속 깊이까지 가부장적 도덕으로 무장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러한 방임에 의해서 과연 머지 않은 미래에 프랑스 수준만큼 진보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가부장적이기는커녕 피부와 머리카락까지 노린내를 풍기면서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의 영어로 떠들어대며 흥청대는 일부 유학생들의 비가부장적인 행태에서 과연 어떤 '진보'를 식별해낼 수 있을까?

해서 영화 <몽상가들>에 베르톨루치 자신과 자신의 세대에 대한 얼마만큼의 애정이 담겨있는지 나로선 가늠할 수 없지만(내가 이 영화에서 읽는 건 주로 영화광 어린애들의 치기에 대한 비아냥이기에), 이 영화가 '청춘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의 걸작으로 꼽히는 <순응자>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본 베르톨루치의 걸작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이며, 거기에는 '몽상'이 아닌 '현실'이 그려져 있다(그러니 '마지막 탱고'는 '마지막 몽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러한 현실과의 조우(혹은 상징적 거세)를 장면화하고 있지 않은 영화 <몽상가들>은 역설적이지만, '미성년판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불과하다.

"남녀성기의 노출과 혼음을 전면 허용한 것은 처음"(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등급분류소위원회)이라는 데, 사실이라면 이 영화는 내가 본 러시아판과 마찬가지로 세 남녀가 말 그대로 발가벗고 나온다(이 영화는 영화사적 의미가 아닌 '개봉사적 의미'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장면 정도로 '성인'영화의 등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발가벗고 나오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은 이 영화가 철없는 미성년들의 영화이며, 미성년들을 위한, 애들을 위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마음껏 상상하라, 그리고 마음껏 벗어제껴라, 돈은 줄 테니까."라는 식이니까. '혁명은 노는 것'을 조금 비틀어서 말하자면, '혁명은 돈이 좀 필요한 것'이 될 것이다.



지난주 <필름2.0>은 <몽상가들>에 대해서 김영진과는 전혀 반대되는 평을 실었는데, "발가벗은 육체가 놓친 것"이란 제하의 평에서 평론가 정지연은 이렇게 쓴다: "베르톨루치가 <몽상가들>에서 부활시킨 68년 5월은 혁명조차도 유희로 쾌락했던 시네필들의 몽환적 시기에 다름아니다. 혁명이 계급이 아니라 세대에 의해 수행된다는 벤야민의 직감이 맞는 것이라면, 이들이 혁명을 수행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테오와 이자벨은 랑글루아 시위에 동참하고, 급진적 사회변화를 거부하는 아버지에 맞서지만, 그 모든 것들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하다. 이들의 방에 붙어 있는 <중국여인>의 포스터, 마오 형상의 스탠드, 들라크루아의 그림은 단지 실내장식물일 뿐이다. 이들은 거리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 그들을 지금 사로잡은 것은 부르주아의 요새와도 같은 아버지의 저택에서 고급 와인과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의 쾌락일 뿐이다."

다른 대목들에서 비친 '엄숙주의자'적 시선에 내가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대목에 대해서는 십분 동의한다. 다만, 나로선 <몽상가들>을 비판하는 정지연의 시각이 '몽상가들'을 비아냥거리는 베르톨루치의 시각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입각점은 다르더라도). 듣기에 한때 공산주의자였던 베르톨루치는 1970년작 <순응자>를 통해 변절하며 자신의 '아버지-형상'인 고다르를 매우 증오했다고 한다. 내가 <몽상가들>을 처음 보면서 느낀 것은 (프랑스 시네마테크의 설립자인) 랑글루아의 아들들, 고다르와 트뤼포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비아냥이다. 그는 그들을 비판하는 대신에 다만 그들이 순진했다고 말한다. 이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도 그는 68혁명의 '한계'와 '좌절'을 거리를 두고 우회적으로 그려낸바 있다. 그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를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듯이 <몽상가들>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매튜를 (이탈리아에서 건너갔던)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할 수 없다.

나는 그런 방향에서 이 영화에 대한 평이 나오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는데, <필름2.0>의 두 평론가는 좀 다른 방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러시아어 대사들을 듣는 통에 내가 잘못 이해한 대목들이 있었는지도). 나중에 다른 지면의 영화평들을 들춰봐야겠다(주로 <씨네21>을 보던 내가 <필름2.0>를 들추게 된 건 '돈' 때문이다. 1/3 값이니까. 돈 때문에 고민하는 건 성인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필름2.0>에서 제일 재미있는 코너는 <토크2.1>이다).

영화 <69> 또한 사정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 영화에는 "데모나 바리케이드 같은 것, 멋지다고 생각해"라는 여학생이 나오고, 이 여학생 때문에 학교를 봉쇄하기로 마음먹는 남학생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원작소설보다는 경쾌하다고 하는데, 그래도 기본 설정 자체는 유지되고 있을 터이다. 지난주 문화일보에 실린 영화평(이안젤라의 시네마토크)에 의하면,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시골학생들은 "한편으로는 학교 바리케이드 봉쇄를 실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록 페스티벌을 기획한다. 한편으로는 미군기지 담을 넘는 반미적 일탈사고를 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병사의 성교장면을 훔쳐보면서 영어와 미국문화에 빠져든다. 왜냐고? 이들이 세상에 이기는 방법으로 택한 전략이란 바로 즐겁게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즐겁게 사는 투쟁 전략 또는 청춘의 핑계'로 지양하고자 하는 것은 "전후 기성세대의 보수적 권위주의와 전공투로 상징되는 좌파학생운동의 급진주의"이다. 그들은 이 양 진영을 조롱한다. 모든 건 "눈 앞에 있는 여학생"을 위한 것, "바리케이드도 페스티발도 그 여학생에게 주목받기 위한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유희는 청춘의 특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청춘들이 모두 기성세대가 돼 버린 지금도 그럴까?



지난주 <필름2.0>의 <69>를 다룬 영화평에서 평론가 이상용은 (프랑스 68혁명을 모방한) 이 해프닝성 짝뚱에도 진실'은 있다고 쓴다(<몽상가들>에 의하면, 68혁명 또한 폼이자 제스처에 지나지 않지만). "68혁명에 대한 답변이라고 읽히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를 빌자면, 혁명이란 사회나 인간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욕망이어야 한다. 켄 일행은 그 누구보다 자신들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것이 비록 고다르의 영화를 핑계대어 여학생을 꼬시고, 레드 제플린의 음악을 빌어 자유를 흉내내는 것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충실히 배설한다. 켄은 입버릇처럼 즐거우면 모든 것이 괜찮다고 말한다. 정답은 여기에 있다.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담은 청춘의 기관차는 무언가를 재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가득 안고 부딪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지구 반대편에서 체험한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

재일교포 감독 이양일도 이 영화에서 "지금은 없어진 그 시대 젊은이들의 에너지를 회생시키고 싶었다"라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은 다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 68세대나 69세대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류, 혹은 기성세대가 된 지금 왜 세상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걸까? 혹은 왜 이것밖에는 달라지지 않은 걸까? 그건 '즐거움' 자체가 우리 삶의 물적 토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즐거움은 특정한 사회적 토대와 관계가 허용하는 상부구조이자 잉여이고 기분이다. <69>를 쓰는 작가는 그걸 써서 밥벌이를 하는 전업작가이다. 거기에서 즐거움만 읽어내는 건 순진한 태도이다. 다들 아는 것이지만, 69라는 건 특정한 성적 체위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대변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하지만, 69라는 체위만으로는 어떠한 재생산(reproduction)도 가능하지 않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아무런 물적 토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니, 그러한 기호가 68혁명의 진정한 기운이었다면(<몽상가들>에서도 그렇지만), 혁명이란 그저 폼(form)이며 폼(foam)이다.



 

 

 

마음껏 전시되는 육체들에도 불구하고 <몽상가들>은 내게 틴토 브라스의 영화들보다도 재미가 없었는데(물론 브라스는 주로 엉덩이를 전시한다), <69>는 그보다는 재미있을 걸로 보인다. 하지만, 재미 혹은 재미의 윤리(fun ethic)는 말 그대로 (자기충족적인) 재미를 위한 것이다.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한 것. 거기에 진정한 혁명이니 기운이니 하는 문구를 갖다 붙이는 건 보기에 불편하다. 혁명이 아무리 대단한 게 아닐지언정 거기엔 피흘림이 있고 피냄새가 섞여 있다(그런 점에서 아직 보지 않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영화는 최양일의 <피와 뼈>이다. '피와 뼈'에 비한다면 '69'는 애들 장난이다). 그게 마스터베이션과의 차이이다...

P.S. 최근에 나온 책 얘기를 하려고 했지만, 영화 얘기가 너무 길어졌다(굳이 책 얘기를 덧붙이자면, 베르톨루치에 관한 것으로 <베르톨루치, 중요한 장면들>(예건사, 1991)을 들어볼 수 있다. 절판된 책이어서 구하기가 쉽진 않지만). 글을 나누는 수밖에. 제목도 바꿔서 걸고. 아즈마 히로키 얘기도 덧붙이려고 했는데, 복사한 글을 들고 오지 않았다. 다음에 보완하기로 한다...

05. 03. 28

 지난주 <한겨레21>에 두 영화에 대한 소개 기사("청춘의 꽃, 68을 기억하는가")가 실린 걸 뒤늦게 읽었다. 내가 읽은 평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균형이 잡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이 기사를 먼저 읽었더라면 나는 굳이 두 영화에 대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 대목만 인용해 둔다:

"두 감독이 돌아보는 60년대는 같으면서 다르다. 두 영화는 60년대를 혁명의 시대이기에 앞서 축제의 계절이었다고 회고한다. <몽상가들>은 섹스를, <69>는 청춘을 내세운다. 인류의 마지막 청춘세대였던 68세대 출신인 베르톨루치 감독은 60년대를 돌아보며 분열한다. 베르톨루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영화는 60년대를 조롱한다. 베르톨루치는 “미래에 대해 깊은 우울감을 가지고 있을 요즘 젊은이들에게 나는 긍정적으로 희망으로 가득 찼던 그때를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몽상가들>은 매튜의 시선을 빌려 쌍둥이 남매의 일탈적 행동이 미숙아들의 자폐적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감독은 자신의 세대를 긍정하고 싶어하지만, 감독을 포위한 현실은 감독의 무의식에서 희망을 거세한 듯 보인다. 그의 시선은 자꾸 이상과 현실의 균형을 찾는 매슈에게 쏠린다."

<몽상가들>에 대한 유효하면서도 적절한 읽기이다(내가 말하고 싶었던바 또한 <몽상가들>이 60년대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조롱'혹은 비아냥이라는 것이다)...

 05.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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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학 관련서들이 계속 출간되고 있다. 영화 연구로서의 영화학이 학제화되면서 영화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과 지식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제도가 지식을 생산한다!). 그것은 이미 문학연구의 경우에도 벌어졌던 일이다. 영화이론의 많은 부분이 문학이론의 그것과 겹쳐지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럽다.

영화사보다는 영화이론쪽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영화학 서적을 드문드문 사두었지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나로선 이 분야의 책들을 개관할 만한 형편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도 간간이 출간되는 이 분야의 책들이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은 분명하기에 대충이라도 정리해둘 필요는 있어 보인다.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은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현암사)이다.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온 정평있는 '교과서'로서 영화학 관련서로서는 아마도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지 않나 싶다. 그런 후에 루돌프 아른하임(<예술로서의 영화>)나 앙드레 바쟁 정도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이 분야의 초심자로선 충분하다. 그런 초심자에게 적합한 책은 더들리 앤드류의 <현대영화이론The Major Film Theories>(한길사, 1988)이다. 76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영어권에서도 이론사를 정리하고 있는 거의 최초의 책이다. 우리말 번역도 전문 학술어들의 오역을 빼고는(가령 paradigm을 '어형변화'로 옮기는 식) 그런대로 읽을 만하다. 아쉬운 건 절판된 책이라는 점.

이어서 읽을 책은 <현대영화이론>의 속편에 해당하는 <영화이론의 개념들>(시각과언어, 1996)이다. 저자는 역시 더들리 앤드류. 그의 책들은 특별히 재미가 있다거나 영감을 준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간의 이론들을 요약해서 잘 정리해준다. 이를테면, 에너지(힘)나 감각을 길러주는 책이 아니라 정보를 전해주는 책이다.

 

 

 



그리고 읽을 만한 책은 얼마전에 나온 신간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시각과언어, 2003)이다. <영화기호학사전New Vocaburaries of Film Semiotics>이라고 예고돼 있던 책이 그렇듯 멋쩍은 제목으로 나온 것도 좀 불만스럽고, 번역도 유치한 대목이 많지만, 책 내용 자체는 유용하다. 기호학과 정신분석학, 그리고 리얼리즘(반영의 문제)를 큰 가닥으로 하여 현대 영화이론의 쟁점들을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로버트 스탬 외 2인인데, 스탬이란 이름은 기억해 둘 만하다. 브라질 영화 전문가인 스탬은 두툼한 영화이론입문서의 편집자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영화기호학 파트와 리얼리즘과 상호텍스트성 파트를 서술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신뢰할 만한 이론가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의 계기를 만들어준 책은 <자기반영의 영화와 문학>(한나래, 1998)이다. 이런 책은 정보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책에 속하는데, 번역도 좋은 편이다(역자 오세필의 다른 번역인 구로자와의 <감독의 길>도 추천할 만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상의 책들이 영화이론과 관련하여 큰 줄기를 이룰 수 있는 책들이다. 거기에 풍족함을 더하기 위해서 로도윅의 <현대영화이론의 궤적The Crisis of Political Modernism>(한나래, 1999)을 읽을 만하다. 손꼽히는 영화이론가의 한 사람인 로도윅은 아직 미번역된 <들뢰즈의 타임머신>의 저자이기도 하다(*2005년에 출간됐다). 번역이 유려하지는 않다.



 

 

 

그리고 들뢰즈. 그의 2권짜리 <시네마> 중에서 제1권 운동-이미지만이 중복 번역돼 있다. 최근 것은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 조만간 2권이 마저 출간되기를 기대한다(*2005년에 출간됐다). 그리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한 가장 우수한 비평집인 <뇌는 스크린이다>(이소출판사, 2003). 그레고리 플랙스먼의 편집이고, 10여명이 필자들이 들뢰즈 영화론의 구석구석을 검토하고 있다. 들뢰즈나 영화이론에 관심있는 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책이다. 역자는 헤겔, 하버마스 전공에서 들뢰즈 영화론 전공으로 방향을 튼 박성수 교수. 아직은 더 나은 역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쉬운 것은 현대영화이론의 문턱에 해당하는 영화기호학자 크리스티앙 메츠(1931-1993)의 저작들이 아직 번역되고 있지 않은 점. 메츠를 기점으로 영화이론은 고전적 시기와 현대이론으로 분할될 수 있을 만큼 그는 중요한 이론가이다. 일반언어학으로 국가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영화'언어'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당연해 보이는데, 후기에 그는 정신분헉학과 영화쪽으로 관심을 확장한다. 주저인 <영화의 언어>와 <상상적 기표 - 정신분석학과 영화> 정도는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메츠의 구조주의적 영화분석에 대해서 간단하게 참고할 수 있는 책으로는 존 레흐트의 <문화연구를 위한 현대사상가 50>(현실문화연구, 1996)이 있다. 아주 유용한 현대사상가 사전 혹은 현대사상 매뉴얼인 이 책은 최근에 <한권으로 보는 현대사상 50인>(2003)으로 다시 나왔다. 편제는 약간 바뀌었지만 내용은 그대로인데, 물론 오역이나 오탈자 등도 그대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하지만.

예컨대, 메츠의 거대 통합체에 관한 해설에서 레흐트는 흔히 shot로 번역되는 불어의 쁠랑plan을 그냥 plan으로 옮겼는데 우리말 역자는 그걸 '계획'으로 옮겼다. 그래서 '자율적인 쇼트'가 '자율적인 계획'으로 탈바꿈했다('계획'이란 영화용어가 어디 있는가?). 그런 거 말고도 책에는 이런저럭 오역이나 부적절한 번역들이 눈에 띈다.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한다면, 책은 손때가 묻을 정도를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 세번쯤 읽으면 현대사상의 로드맵이 그려질 것이다...

 

 

 

 

덧붙임: 지난주에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이론>(동문선)이 번역돼 나왔다('발라슈'라고 읽는 게 맞다고 한다). 40년대 저작이니까 아주 태고적 저작이지만, 나름대로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론서이다. 벨라 발라즈에 대해서는 역시나 더들리 앤드류의 <현대영화이론>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03. 6. 11./ 06. 08. 18.

P.S. 몇 개의 이미지를 추가했지만, 지난 몇 년 사이 더 출간된 책들이 또 꽤 많다. 이 목록도 언젠가는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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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촌 주변에 최근 새로 비디오 가게 한곳이 문을 열었고, 다른 한곳은 문을 닫았다. 새로 생긴 곳은 '영화마을' 분점이고, 문을 닫은 곳은 위층의 책대여점이 인수해서 비디오대여까지 겸하고 있다. 두 곳의 공통점은 정작 비디오보다는 만화책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영화'마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만화'마을이었다!). 만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실망스러웠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새로 생긴 '영화마을'에서 미하일 하네케의 <피아니스트>를 발견한 일(웬만한 동네 비디오점에서는 잘 갖다놓지 않는 영화인데, 그래도 '영화마을'의 이름값을 한 것^^).



그래서 원래 빌리러 간 <밀애>와 <피아니스트>를 한꺼번에 들고 집에 돌아와 모처럼 영화감상 시간을 가졌다. 며칠전의 일이다. 두 영화는 모두 개봉관에서 볼 뻔했으나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서 놓친 영화들이다. 그리고 제법 성격도 비슷하다. <밀애>는 <오아시스>가 빠진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김윤진의 영화이고, <피아니스트>는 역시나 작년 칸느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이자벨 위페르의 영화이다. 김윤진이 처음 나온 <쉬리>가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나는 대목에 TV에 나오는 걸 대충 봤다) 특별히 주목하지 않았지만, <밀애>에서의 연기는 우리나라 여배우들 평균적인 연기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물론 이자벨 위페르는 자타가 공인하는, 그리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연기파 배우이다(그녀의 연기세계에 대해선 <씨네21> 383호 참조).

같은 이름의 이자벨 아자니도 현기증이 나는 배우이긴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위페르를 더 좋아한다. 그것은 55년생인 그녀의 출세작 <레이스 뜨는 여자>(1977)를 본 10년쯤 전부터의 일이다. 그 영화를 보고 얼마 안 있어 원작 소설인 파스칼 레네의 <레이스 뜨는 여자>가 출간되기도 해서 더 잘 기억한다(그땐 '**하는 여자'란 제목이 유행이었다). 필모그라피를 보니까 클로드 샤브롤과 많은 영화를 찍었는데, 나는 대표작 중의 하나인 <마담 보봐리>를 2,000원 주고 사서 소장하고 있으니까, 그녀의 대표작 3편은 본 셈이다(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에도 나온다고 하니까 봐야겠다). 그녀가 잠시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찍은 <베드룸 윈도우>까지 하면 4편을 본 셈인가? 어쩌면 더 봤을지도 모른다. 20대 초반의 위페르가(그녀의 도툼하고 발그레한 볼 때문에 나는 항상 사과라는 뜻의 불어 단어 뽐므pomme와 그녀를 연관짓곤 했다) 이젠 세 아이의 어머니로서 50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한 것은 그녀의 무표정한 표정연기이다. 아마도 그녀는 가장 탁월한 무표정의 연기자 중 한 사람이다.

다시 <밀애>. 이 영화가 관심을 끈 건 <낮은 목소리>의 감독 변영주가 처음으로 만든 상업영화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에 기대를 걸었지만, 기대에는 못 미치는 듯하다. '격정 멜로'를 표방했지만, 그다지 격정적이지 않았고(오히려 좀 심심한 영화이다), 줄거리나 인물설정들이 상투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날 남편이 바람을 피운 걸 알게 돼 그동안 행복했던(이 얼마나 상투적인가!) 아내는 충격을 받고, 함께 바닷가 시골로 낙향하지만, (이유있는!) 두통에 시달리다가 그곳 병원(보건소인가?) 의사를 만나고, 그의 제안에 불륜이라는 게임에 탐닉해 가지만 결국 들통나서 버림받는데, 설상가상 교통사고로 애인은 죽어버리고 혼자 살아남게 된다는 얘기. 영화의 끝머리는 여주인공의 나래이션으로 처리돼 있다. "활력은 불행으로부터 시작된다" 운운. 그런데, 이 결말 장면의 여자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이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 '활력'이란 게 반어적으로 이해된다. 원작인 전경린의 소설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감상은 비슷할 거라고 생각된다. 결정적인 것, 영화에 '활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유머'가 없다는 것(개그는 있다. 가장 힘들게 대학에 간 축구선수가 이천수라는 개그.).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움직인 장면은 첫장면에서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여자가 힘이 쭉 빠져서 남편의 뺨도 제대로 때리지 못하는 장면이었다(이런 걸 리얼리티라고 한다!).  



<피아니스트>에 대해선 사실 많은 말을 해야 한다(짐 호버만보다 더 많은 말을 하기 위해서는). 나는 원작 소설인 옐리네크의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도 바로 구입을 했다. 참고로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무의식의 시학>(인간사랑)에는 옐리네크의 원작 분석에 한 장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호버만이 잘 지적한 바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한때 음악신동이었던 한 여인과 괴물처럼 통제적인 그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 피아니스트이자 대학교수인 에리카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에리카에게 정신병적 소인이 있다는 것이고, 영화는 그녀의 소인이 증상들로 발전해 가는 '무표정한' 모습을 쭉 따라간다. 이 영화의 홈피에는 라캉식 정신분석학으로 영화를 분석한 글도 떠 있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분석할 만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나는 사바나의 표범처럼 먹잇감을 안전한 나무 위에다 걸쳐놓는다). 내게 이런 식의 분석에의 욕망을 부추긴 최근의 영화로는 <머홀랜드 드라이브>와 <오아시스> 등이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런 영화들은 많지 않다!..  

 

03. 0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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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 여기저기서 정산하고 결산하느라 분주하다. 오늘자 한겨레(28면)엔 여성관객들이 뽑은 최고의 영화, 최악의 영화 순위가 소개돼 있는데, 예상할 수 있듯이 최악의 영화 1위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이다.

 

 

 


이번주 씨네21에 각 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영화 목록을 보면, <나쁜 남자>를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은 이들도 적지는 않다(25%정도). 김기덕에 대한 평단의 시각은 엇갈리지만, 나는 그를 신뢰하지 않는 쪽이어서(<나쁜 남자>엔 적의만 있지 리얼리티가 없다) <나쁜 남자>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그리고 2위는 <가문의 영광> 3위는 <취화선> 4위는 <중독>이다. <최화선>은 언제 시간나면 볼 예정이지만, 나머지 영화들에는 아직 관심이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다. 아마 임권택의 영화로는 <노는 계집 창>도 그해의 최악의 영화에 뽑혔던 듯하다(그리고 물론 그럴 만하다). 임권택식 휴머니즘은 대개 남성중심적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5,6위 영화들이다. 대다수 평론가들에 의해 올해의 영화로 지목된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과 이창동의 <오아시스>가 각각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묘사", "장애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라는 이유로 최악의 영화 리스트에 오른 것. 물론 이 목록은 일반 여성관객들(+여성문화예술인)의 평가를 근거로 작성된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 '대중주의'적 편견이 작용하고 있으리라. 그렇지만, 이 영화들이 여성관객들을 불편하게 한 최악의 영화들인지는 의심스럽다. 즉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요즘 영화를 많이 보지 못하게 됐지만, 올해 내가 본 한국영화들 가운데, 두 편은 가장 재미있는 영화들이었고, 가장 동의할 만한 영화들이었다.

나의 동의의 근거는 리얼리즘에 있다(나는 영화에서의 리얼리즘을 지지한다. 순수한 환타지를 나는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다). 물론 시야를 넓히면, 마술적, 환상적 리얼리즘의 걸작들을 꼽을 수도 있지만, 한국영화에서 그런 계열의 걸작이 나올 가능성은 아직은 희박하다. 때문에 한국영화에는 제대론 된 영화('리얼리즘 영화'와 '쟝르 영화'가 주종이다)와 덜 떨어진 영화(여기에도 두 부류가 있다. '돈번 영화'와 '돈날린 영화')가 있을 뿐이다.

물론 홍상수의 영화는 지극히 모던적이며,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될 수 있지만, 내가 그의 영화에서 즐기는 것은 디테일(리얼리티)이다. <생활의 발견>과 <오아시스>는 리얼리티에 근거한 유머와 환타지로 올해의 '발견'에 값하는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에서의 여성 이미지는 내가 보기에 '현실'의, 아주 '현실적인' 이미지들이다. 그런 이유로 그 영화들이 최악이라면, 공권력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으로 아수라장이 된 시위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폭력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고, 여성들의 성적착취 현장을 담은 영화도 지나치게 '차별적'이란 이유로 최악의 영화가 될 만하다.

 

 

 

 

한편 최고의 영화로 꼽힌 두 작품은 변영주의 <밀애>와 유하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다. <밀애>는 보지못해서(보려고 했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았다) 뭐라 말할 수 없고, <미친짓>의 경우는 사회적 메시지를 예쁘게 포장한 얄팍한 상업영화이다. 물론 감독도, 관객도 그 영화가 상업영화란 걸 알며 6000원 어치의 감동을 팔고사는 거에 불과하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여성의 욕구를 솔직히 표현"했다는 이유로 이 영화가 여성영화라니?

<나쁜 남자>의 경우가 전형적인 남성 환타지이며, 그래서 최악의 영화라면, <미친짓>은 여성 환타지이기 때문에 여성영화란 말일까? 그 영화에서 여성의 솔직한 욕구란 건, (열정적인) 사랑과 (안정적인) 결혼을 한꺼번에 얻고 싶다는 욕구이다. 즉, 의사남편과 결혼하고 잘생긴 대학강사를 정부로 두며 '영리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 그것이 현실에서는 대개 대립하기 때문에, 영화속 현실은 관객의 환타지가 되며, 대리만족을 준다. 결혼 제도에 대한 비아냥이 대화의 양념으로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영화 속 엄정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의 관객들도 결혼 제도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여성적이고, 여성영화란 말일까? 여성들의 솔직한 욕구가 판단의 기준이라면, <죽어도 좋아>는 왜 빠졌을까?

나는 일반적으로 좋은 영화와 여성관객에게 좋은 영화가 구별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여성에게 혐오스러운 영화는 남성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어야 맞다. 물론 그 차이나 간극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을 테지만, 서로가 판단을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리고 좋은 영화는 그런 부분을 포착하고 확장시켜 가는 데 기여한다. 내가 보기에 <생활의 발견>이나 <오아시스>는 그런 영화들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미친짓>(<밀애>는 보지 못했으므로)보다 훨씬 많은 걸 보고 알게 한다. 나는 이런 생각이 나 자신의 '남성'으로서의 편견이 아니기를 바란다.

<오아시스>에 대한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비판이 잠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글을 모아 읽고, 재비판하고 싶었지만, 일상적인 일들에 치이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밀린 빨래를 한꺼번에 할 때처럼 몰아서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정성일은 내가 비교적 신뢰하는 평론가이지만(그는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보고 동시에 가장 많은 영화책을 읽는다, 내가 아는 한.) 간혹 그의 취향은 튀어 보인다. 그의 <오아시스> 비판은 공정하지가 못했는데(그래서 나를 설득하지 못했는데), 그 비판의 근거 중의 하나가 바로 "장애 여성이 성폭행하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비상식적 설정"이다(이런 이유로 한 장애 여성도 <오아시스>를 비판한 적이 있다).

간단히 핵심만 말하면, 영화에서 종두는 그런 식으로밖에는 자신의 감정이나 관심을 표출할 수 없는 인간이다. 종두가 '철이 들어서' <프리티 우먼>의 리처드 기어식으로 구애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여성적인 설정일까? 공주에게서 문제가 된 건, '폭력'이 아니라 '관심'이다. 그리고 둘이 가까워지는 건 '폭력'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관심'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설정에 리얼리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영화의 맨마지막 장면에서 종구가 나무에 올라가 공주를 위해서, 공주의 환타지(오아시스)를 방해하는 나뭇가지들을 베어내고, 공주가 한껏 라디오 음악의 볼륨을 높이는 대목은 압권이다(이미 알고 있는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가다가 나는 이 대목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즉, <오아시스>에서 인물의 대립축은 공주:종두가 아니라, 그들:우리이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더 폭력적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두가 아니라 공주와 종두의 주변 사람들, 즉 우리들이다. 성폭행의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사랑이라는 구도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보기엔 이 영화의 가해자들이다.

올해의 영화 5편에 정성일은 <취화선>을 1위로 꼽고(그의 임권택 숭배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오아시스> 대신에 <나쁜 남자>를 집어넣었는데, 취향은 저마다 자유인 것이지만, 나는 그 선택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나쁜 선택이다...


2002.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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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inda 2009-08-24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나서 반갑습니다/저 모습이 로쟈님인가요?/많은 항목중에 영화를 깊이있게 보지는 못하지만 좋아해서 여기에 처음으로 꼬릿글을 달게 되었습니다/전행영화와 깡패영화가 제작된 영화의 절반을 넘을거라는 저의 통계입니다/모성본능이라면 생산된 자식의 죽음을 바라지 않을것이며 무서운 폭력과 여성을 무시하는 그런영화들이 널려 있는데.....글쓴지 7년이 지났으니 올 년말쯤에는 조금나쁜 영화보다 많이 나쁜 영화를 골랐다는 기사를 접하길 기대합니다.
 

..

1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알렉스가 안나에게 묻는다. 안나는 등을 돌린 채 세차게 머리를 젓는다. 레오(스) 카락스의 사랑의 3부작 중 두 번째 영화 <나쁜 피> 한 장면이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이 문답의 바로 이전 장면, 즉 문밖에서 담배를 물고 서성이던 알렉스가 라디오에서 데이비드 보위의 <모던 러브>가 나오자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걷다가 몇 개의 블록을 마치 미친 듯이 춤을 추며 질주하던 그는, 음악이 멈추자 그대로 정지하고 다시 안나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묻는다. "안나,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요?"

2
(한)순간에 완성되(면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이란 어떤 사랑일까? 그것은 반시간적 사랑이 아닐까? 순간이나 영원이란 것은 시간적인 계기이지만 동시에 반시간적 계기이다. 그것이 반시간적인 것은 시간의 고유한 운동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순간은 영원의 무한수축이고 영원은 순간의 무한팽창이지만 이 수축/팽창의 운동은 자연적 시간을 매개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때의 운동은 운동이 아니라 동형론적 형질전환이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이렇듯 반시간적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라는 개념적-정념적 테두리 안에서 다 파악될 수 없다. 즉 그것은 감성적 사랑을 초과한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라는 이 초감성적 사랑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이다. 그것을 정념의 형이상학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정념의 형이상학은 형이상학의 이념이 그러하듯이 현실이 아닌 오직 가상(이미지) 속에서만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3
감성적 사랑, 즉 미적 가상이 아닌 현실 속의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진화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만족할 만한(agreeable) 상태, 즉 행복을 위한 것이다. 행복이란 "정상적으로 생겨 먹은 생물체의 경우 ①자기보존의 본능과 ②종족보존의 본능, 이 두 가지의 충족을 의미한다. 본능 ①의 충족은 개인적인 생존을 뜻하므로 음식과 주거의 문제이다. ②의 충족은 종(족)의 유지와 번영을 뜻하므로 성적 욕구의 문제이다." 여기서 대개의 경우 자기보존의 본능(생존의 욕구)이 종족보존의 본능(생식의 욕구)보다 먼저 고려된다. 즉 생식의 욕구라는 생물학적 기제의 정신적(정서적) 대응(수반)으로서의 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다(사랑을 팔고 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렇다면, 초감성적 사랑이란 바로 이러한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사랑이겠다(사랑에 죽고 못사는 것은 이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은 (한)순간에 자신이 완성되기를 열망한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도망간다(혹은 죽고 만다). 하지만 사랑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다(귀신이 되어 되돌아온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나쁜 피, 우리의 생-본능을 관장하는 '나쁜 피' 때문이 아닐까?

4
애초에 사랑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육체를 가진 존재이어서이다. 즉 육체(나쁜 피)는 사랑의 가능조건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 육체는 사랑의 걸림돌이 되고 초감성적 사랑의 불가능조건이 된다. 이 육체는 우리를 정념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 놓고는 뭔가 이루어질 만하면 다시 잡아당기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어디론가 무한질주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곧 걸음을 되돌려야만 한다. 그래서 이 질주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지만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불가해성과 무력함 그리고 이것 자체에 대한 분노 등"을 나타낸다고 한 것은 옳은 지적이다. 다만 여기서 '나아갈 수 없는 삶'이란 걸 나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 바꿔 읽고 싶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감성적 사랑, 아름다운 사랑의 끝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숭고하다(죽음을 무릅쓰는 사랑!). 이 숭고한 사랑은 (감성적) 사랑의 이해관계(목적)에 구속받지 않으며 한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숭고한 사랑의 맹목적인 운동 앞에서 망연자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간혹 우리가 그러한 사랑에 걸려들기 때문에!). 알렉스의 물음에 대해 안나가 세차게 머리를 젓는 것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이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라 두려운 사랑이다. 그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의 생-본능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 <나쁜 피>의 한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 그런 두려움을 드리우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래서 그것은 두렵다(불쾌하다). 그렇지만, 그 두려움은 우리의 생-본능이라는 인간조건을 일시적으로나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에 우리를 (한)순간 개방한다(우리의 죽음이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우리를 일시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한다(머리가 잘린 통닭모양).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아니다, 그건 더 이상 사랑도 예술도 아닌 어떤 것이다. 하여간에 무엇인가가 그렇게 우리 앞에 있다.

5
프로이트의 이분법을 사용하자면, 아름다움은 생-본능과 연관되어 있고 숭고(함)은 죽음-본능과 연관되어 있다. 생-본능은 사는 것, 잘사는 것, 보다 더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이성의 기능이란 것은 이러한 생-본능을 바람직하게 보좌하는 것이다(화이트헤드). 이에 대하여 죽음-본능은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생-본능에서 발원하지만 곧 그것을 초과하고 만다(그래서 이성-이념의 한계를 표시한다). 절대적으로 잘사는 것이란 결코 삶의 안쪽에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끊임없이 무에 유혹되고 죽음에 도취된다. 마치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처럼(에로티즘 또한 생식의 욕구에서 발원하지만 그것을 초과한다).

죽음이 우리에게 불가해하듯이 숭고한 사랑, 숭고한 예술은 우리에게 불가해하다. 이것들은 모두 절대적인 타자이다. 우리의 이성, 즉 개념적 사태 이해는 이들 안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의 뒤치다꺼리에나 바쁠 따름이다. 간혹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우리를 유혹하는가? 그럼 어쩔 텐가? 우리는 안나와 마찬가지로 세차게 머리를 내저으며 알렉스와 마찬가지로 이 또 다른 '나쁜 피'로부터 도망가는 수밖에. 그러다 발병이 나고 덜미를 붙잡히는 수밖에!

6
칸트가 주장하는 취미(아름다움) 판단의 무관심성(무사심성)은 숭고에 대해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 그것을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안나의 부정과 나란히 놓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대상에 대해 평정한 태도, 무관심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안락의자에 주저앉는 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겠지만, 숭고한 대상에 대해서, 가령 어떤 예술작품 속에 정립되어 있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할까? 어딘가 불편하지 않을까? 만약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이 적극적인 관심의 결과라면 숭고에 대한 무관심은 필사적인 관심이어야 하지 않을까? 다시 한 번 알렉스의 질주를 떠올려 보자. 우리의 생-본능은 숭고(죽음)로부터,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으로부터 필사적으로 도주(질주)할 때에만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는 것. 그런 필사적인 도주를 우리는 '무관심'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아름다움에 대한 무관심 만큼이나 숭고에 대한 무관심 또한 아이러니적이다. 너무 말이 없어서 '떠벌이'란 별명이 붙은 알렉스처럼.

7
"현대의 영화가 보여주는 이 모든 특징이 철학에 대해 갖는 관련성은 바로 사유의 무능력에 직면시키는 것이다. 새로운 영화의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사유의 무능력을 사유케 하고 무의 형상을 사유하게 하며 사유될 수 있는 전체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사유하게 한다. 영화의 이미지가 운동의 교란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세계를 일정하게 유보시키는 것이며 가시적인 세계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이로써 사유는 자신의 한계에 직면하여 자신의 한계를 사유하게 된다. 이것이 영화가 철학에 대해 갖는 의미이다."(들뢰즈) 이러한 주장은 비단 현대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리라.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철학이라는 개념적 사유에 대해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고 우리는 정당하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술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의 무능력을 절감하게 한다. 이것은 마치 데리다가 반 고호의 그림에서 구두끈이 반쯤 풀려/조여 있는 걸 두고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을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우리의 잘난 예술은 우리를 (껴)안아주지도 않으면서 공연히 놓아주지도 않는다. 우리는 담배나 (꼬나)물고 그것의 주변만을 서성거릴 뿐이다, 문밖에서. 그러다가 문득 자각한다, 우리 자신의 숭고함을!

8
자신의 사랑에 대해 중언부언하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이지만,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해 몇 마디만 더 하겠다. 사실, 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에 대한 물음, 즉 정념론적 과제는 나에게 있어서 칸트 이후에 제기된 인식론적 과제와 결코 다르게 읽히지 않는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 있어서는 특수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즉 이성은 자신이 거부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운명이다. 거부할 수 없음은 이성 자체의 본성에 의해서 이성에 부과되어 있기 때문이요, 대답할 수 없음은 그 문제가 인간 이성의 모든 능력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순수이성비판>)라고 말할 때, 이성에 의해 제기되지만 이성의 능력 바깥에 있는 물음들이란 바로 숭고한 물음들이며, 예술적인 물음들이다(가령 "우주는 유한한가, 무한한가?"라든가, "우주는 팽창하는데 왜 우리는 팽창하지 않는가?"라는 식의 물음들).

 

데리다식으로 말해서 반쯤 풀려 있고 반쯤 조여 있는 이 물음들을 이성의 잉여효과, 혹은 과민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까? 미친 듯한 질주가 어찌 과민반응이 아닐 수 있을까? 진화사적으로 볼 때도 형이상학적 물음들이 우리의 자기보존 본능이나 종족보존 본능에 유리하게 작용할 만한 근거는 찾을 수 없다(형이상학적 사유에 필요한 기회비용을 다른 데 투자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 의미에서도 인식의 형이상학이나 정념의 형이상학 모두 본래의 프로그램을 초과하고 있다. 그것들은 프로그램의 돌연변이이며 아나그램이다.



9
뒤샹의 경우.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뉴욕에서 리처드 무트(R. Mutt)라는 가명으로 레디메이드 작품 <샘>(변기)을 전시회에 출품하나 거절당한다. 이 미술사의 한 스캔들은 단순한 스캔들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그가 예술작품의 개념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오브제를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이 경우에는 화장실에서 미술관으로) 옮겨놓았을 때 그것이 예술작품이 된다는 걸 발견(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암시하는 바는 예술작품의 근원이 더 이상 예술작품이나 예술가 자신의 창조성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일부 작품의 경우에, 그것을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것은 자리옮김이라는 일종의 새로운 명명행위이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중의 하나인 <자전거 바퀴>(1913)은 자전거 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이 바퀴와 의자는 모두 주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전혀 예술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오브제가 동시적으로 제시됨으로써 거기에 어떤 미감적 효과(뒤샹 효과)가 유발되는 것이다(그래서 자신이 예술작품임을 주장하게 되는 것). 이 새로운 예술, 혹은 '미적 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 병치(명명)이고, 자리의 이동이다. 이점은 <샘>의 경우에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전시회에 예술작품으로 놓인, 그리고 '샘'이라고 새롭게 명명된 이 변기에서 우리는 이미 도구 존재로서의 도구다움을 경험할 수 없다. 이 변기의 "둘레에는 그것이 귀속될 만한 거라곤 아무 것도 없이, 다만 무규정적인 공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기는 안전하고 편리한 배뇨를 위한 기구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을 자신 가운데로 모아놓고 있다. 이를테면 변기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 있지 않음(탈은폐)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 이 변기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준다? 이런 식의 하이데거적인 사유는 그림이 아닌 실제 오브제의 경우에도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을까? 이미지로서의 고호의 구두 그림이 실제의 구두에로 관심을 정향시킨다면, 실제로서의 이 뒤샹의 변기는 오히려 완강하게 자신의 도구로서의 흔적을 지우며 이미지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이 변기는 도구적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신뢰성을 철저히 부인하고 망각한 이후에야 예술작품으로서, '샘'으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예술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고, 무엇일 것인가?

10
과학사에서 1997년이 의미있는 해로 기록된다면 그건 단연 복제양 돌리 사건 때문이다. 유전자 복제(내지는 치료)라는 것은 생물체의 고유한 유전자 염기배열을 기술적으로 조작할 수 있음에 근거한다. 유전자 염기배열이란 A, C, T, G 네 개의 문자로 표시되는 DNA 염기의 조합('책')이다. 이제까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이 타고난 유전자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거기에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가할 수 있게 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전자 조작은 일종의 아나그램(철자변환)이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재료(레디메이드)의 배열을 바꾸는 것이고, 자리를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이면서 예술이다.

아나그램으로서의 예술의 시대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기술과 예술의 비분리를 다시금 경험하게 될 것인지(이에 대한 사유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미래에, 이성의 도움없이도 자기복제를 통한 종족보존이 가능해질 경우(그것이 허용될 경우), (숭고한)사랑은 무엇일 것인지? 레디메이드 이후에 (숭고한)예술은 무엇일 것인지? 그런 물음들 앞에서 사랑과 예술은 자신들의 유사한 운명을 놓고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11
모든 이야기를 정리해서 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모든 단락은 보완을 강요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가볍게 말하는 것이다."(카뮈)라는 권고를 제법 따르려고 했지만, 결과에 대해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칸트와 하이데거와 데리다를 좋아하는 만큼 더 읽게 되면, 조금은 무겁게 말할 수 있을는지(여전히 사랑하면서)? 끝으로, 이 몇 가지 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준 카락스/알렉스에게 고마움을 전해야겠다. 알렉스 오스카(Alex Oscar)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의 아나그램이다. 예술은 분신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진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젊은 카락스/알렉스는 내게 말했다. 다른 건 중요하지 않다.

12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구애를 한다는 것이며, 이 구애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계속될 것이다."

97. 12. 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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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3-24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서재질은 수혜자로서의 것입니다. 비를 가둔채 흐린 하늘 아래서 갈증을 느끼면서 나를 완전히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오래 전 '오아시스'에 대한 의견은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네요. 종두는 쉽게 이해 받기 힘든 극소수자의 입장입니다. 이 페이퍼는 내가 빠진 무력감을 위로하기도 합니다.

boinda 2009-08-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지만 인내하면서 정독했습니다/이 글을 건너 진도를 나가고 싶은데.../여기 오는날 마다 한 단락씩 읽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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