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제임스의 <실용주의>(아카넷, 2008) 등을 구입하러 교보에 나갔다가 덩달에 손에 든 책은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이다. 근간예정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출간됐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그의 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 2007)가 워낙에 조야한 수준의 번역을 선보인 터라 불만스러웠는데(내가 올려놓은 40자평이 상품 페이지에서 지워졌다) <감성의 분할>은 일견 깔끔해보인다. 영역된 그의 책들을 대부분 모아두었던 터라 개인적으로 반갑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해도 될 듯하다. 몇 차례 관련기사들을 옮겨놓은 적이 있는데, 랑시에르와 함께 아감벤의 책들이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들리는 바로는 국내 인문출판사들이 두 사람의 저작 판권을 앞다투어 사들였다. 지젝의 경우와는 달리 조잡하지 않은, 제대로 된 책들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이왕에 수입하는 철학이라면. 가장 최근의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8. 01. 28) "민주주의가 사회적 소수자 배척한다”

프랑스의 자크 랑시에르(68), 이탈리아의 조르조 아감벤(66). 올해 국내 철학계에 이 두 철학자의 바람이 예고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두 학자의 책이 잇따라 번역 출간되고 초청강연회가 열리는 등 집중 소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두 학자는 2000년대 들어 서구 사상계에서 자리를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랑시에르는 자크 데리다와 질 들뢰즈를 넘어,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넘어 ‘새로운 사유’를 구축해 가고 있는 학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세계 주요 학술 행사의 초청 1순위를 다투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들의 바람은 이미 일어난 상황. 원서로 두 철학자를 접한 사람들이 블로그를 통해 이들의 철학을 알려왔으며 “이 같은 학자들이 왜 여태껏 소개되지 않고 있는가”라며 번역서 출간을 기다리는 사람도 많다.》



랑시에르는 이달 초 저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인간사랑)가 번역 출간되면서 한국 독자들과 인연을 맺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평등’의 실체와 의미를 조명한 책이다. 이어 그의 대표작 ‘미학의 정치’가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도서출판 b)라는 제목으로 다음 주 출간된다. ‘정치의 가장자리에서’(길), ‘불화’(〃), ‘무지의 스승’(궁리) 등도 현재 번역 중이다. 랑시에르는 올해 말경 한국을 찾아 강연회를 열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감벤의 철학은 2월 초 국내에 본격 소개된다. 새물결 출판사는 대표작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5권 연작 출간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1권을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부제로 2월 초 발간할 예정이다. 또 다른 대표작 ‘열림: 인간과 동물’, ‘남겨진 시간’ 등도 번역 중이다.

 

랑시에르의 사상적 특징은 어떤 학문적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 그는 좌파 철학자 루이 알튀세의 제자였지만 1974년 ‘알튀세의 교훈’이라는 비판서를 통해 사상적 결별을 선언한 뒤 철학 사회학 역사학 미학을 넘나들며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를 번역한 오윤성 씨는 “선배 철학자들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때문에 ‘반목의 철학자’로 불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랑시에르는 ‘평등’이라는 개념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타자()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현대 사회에는 정치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애초에 차단된 이들이 있는데 민주주의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평등을 주장해 왔다”고 지적한다. 인도의 수드라(카스트제도의 최하위 계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들을 비롯해 일본의 최하층민인 부라쿠민() 등이 이에 해당한다. 랑시에르는 철학마저도 소외된 이들을 외면해 왔다고 비판한다.

Homo Sacer: Sovereign Power and Bare Life

아감벤도 배제되고 소외당한 이들을 주목한다. 대표작 ‘호모 사케르’의 제목은 ‘벌거벗은 생명’으로도 해석되며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에 아감벤은 ‘예외 상황’이라는 개념을 덧붙여 권력이 유발하는 소외 문제를 지적한다. 위기가 닥치면 정부를 비롯한 권력자는 ‘예외 상황’임을 들어 시민들의 권리를 축소한다는 것이다. 나치의 지배를 대표적인 사례로 들고 있다.

Remnants of Auschwitz: The Witness and the Archive

사회철학자인 이들은 학문적 사상적 특징 외에도 정치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랑시에르는 2007년 프랑스 대선 때 세골렌 루아얄 사회당 후보가 “랑시에르의 이론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들었다”고 말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감벤도 미국의 강연 요청이 잇따르고 있지만 지문 등 생체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미국의 입국 제도가 있는 한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금동근 기자)

08. 02. 06.

P.S. 참고로 랑시에르와 아감벤의 영역본 대부분은 알라딘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오늘에야 안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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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2-06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랑시에르의 새 번역본은 빨리 입수해서 살펴봐야겠군요.

로쟈 2008-02-06 22:23   좋아요 0 | URL
람혼님의 페이퍼가 좀 늘어나겠군요.^^

테렌티우스 2008-02-07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La haine de la democratie인데 haine가 haime으로 되어 있네요, 그것도 표지인데 좀 어이 없군요...

로쟈 2008-02-07 23:07   좋아요 0 | URL
일종의 징후이구요, 번역은 더 가관입니다...

주니다 2008-02-10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은 무사히 보내셨는지? 전 본가에 가서 잠깐 의무방어만 하고 후딱 내려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살던 집도 불편해서요 ㅎㅎㅎ 어제 시내 나간 길에 '감성의 분할'을 사들고 들어와서 조금 읽어봤는데, 매끄럽게 읽히는 번역은 아니더군요. 머리에서 쥐가 나면서 감성이 분열되는 느낌을..^^ 로쟈님께서 빨리 길 안내를 좀 해주셔야 할 듯 합니다...

로쟈 2008-02-10 14:40   좋아요 0 | URL
위험한 데 간 건 아니어서 '무사히' 보냈습니다. 밀린 일들이 암담하지만.^^; <감성의 분할>은 영어본을 학교에 둔 것 같아서 번역을 확인해보는 건 며칠 뒤로 미뤄질 거 같습니다. 저도 번역본을 몇 쪽 봤는데 머리에 싹 들어오진 않더군요...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를 지난주에 구입해서 며칠 동안 읽었다. 다른 일들에 매이지 않았다면 하루나 이틀 안에 통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속독이 가능한 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책들 가운데 비교적 쉬운 책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지만 번역의 가독성이 그만큼 좋기 때문이다. 몇몇 부주의한 오역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교정해가며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사실 이론서의 경우 이 정도 번역도 드물며 역자의 노고를 기억해둘 만하다. 

2001년에 나온 <전체주의가 어쨌다고?>는 국내에 번역된 지젝의 책들을 연도별로 펼쳐놓으면 중간쯤에 위치하는 책이다. 2000년대 이후의 저작들로 한정하자면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2004)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면서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인간사랑, 2003),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 <신체 없는 기관>(도서출판b, 2006), <죽은 신을 위하여>(길, 2007), <이라크>(도서출판b, 2004),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에 앞서는 책이다. '신간'이긴 하지만 진작에 소개되었어야 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그래서 든다. 영어본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가본다.

2006, How to Read Lacan, London: Granta Books (also New York: W.W. Norton & Company in 2007).

 

 

 

 

2004, Iraq: The Borrowed Kettle, London: Verso.

 

 

 

 

2003, The Puppet and the Dwarf,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03, Organs Without Bodies, London: Routledge.

 

 

 

 

2002, Revolution at the Gates: Žižek on Lenin, the 1917 Writings, London: Verso.


 

 

 

2002,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 London: Verso. 


 

 

 

2001, Opera's Second Death, London: Routledge.(*근간 예정으로 안다)

2001, On Belief, London: Routledge.

 

 

 

 

2001,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ś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 London: British Film Institute (BFI).

 

 

 


2001,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 London: Verso.

 

 

 

 

2000, The Fragile Absolute, London: Verso.

 

 

 

 

가장 읽기 쉬운 축에 속한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만만한 건 아니어서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의 경우에도 지젝에 대한 사전 숙지는 얼마간 필요하다. 라캉 정신분석의 용어들이 걸림돌이 될 수 있는데, 여차하면 그냥 넘어가도 좋겠다. 그럼에도 읽을 만한 대목들은 많이 있으니까. 여기서는 몇몇 오역과 역자와 의견을 달리하는 대목들만 나열해둔다(다섯 편의 에세이에 대한 '읽기'는 그 자체로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하며 여기서 다룰 수 없다). 지젝을 읽을 독자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약간'이다.  

먼저 고유명사와 관련된 대목들인데, 사실 이런 건 일반 독자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다. 그럼에도 나로선 '교정의지'를 억누르지 못한다. 13쪽에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재평가('아렌트 르네상스'란 말까지 쓰지 않는가!) 분위기에 대해서 지젝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고 언급하는 대목인데, 가령 1970년만 하더라도 학술 토론장에서 "당신의 논의 전개는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 것 아닌가요?"란 말이 나왔다면 당사자가 꽤나 곤경에 빠져 있다는 신호가 됐지만 이젠 달라졌다는 것(90년대 이후겠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아렌트가 의당 경의를 표해야 할 인물로 여겨진다. 기본적 성향으로 보건대 당연히 아렌트에게 반기를 들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는 학자들조차도 자기 이론의 근본적 신조들을 아렌트와 화해시켜 보려는 불가능한 작업에 빠져 있다."

그러한 학자들로 지젝이 거명하고 있는 사람이 크리스테바와 리처드 번스타인이다. "해서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정신분석학자가 정신분석 이론을 묵살해버린 아렌트를 평가할 때나, 리하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후계자들이 아도르노에 대한 아렌트의 극단적인 증오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처럼"이 인용문에는 삽입돼 있다. 

'정신분석가'인 크리스테바가 아렌트를 높이 평가하거나(크리스테바는 아렌트의 평전을 썼다) 프랑크푸르트학파 계열의 번스타인이 아도르노를 증오한 아렌트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게(번스타인은 <아렌트와 유태인 문제>란 책을 썼다) 지젝으로선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여기서 'Richard Bernstein'을 역자는 '리하르트 베른슈타인'으로 읽었는데, 독일 학자라면 그렇게 읽겠지만 번스타인은 미국 학자이다(이름으로 미루어 독일계이긴 할 테지만). 때문에 나는 '베른슈타인'이라고 읽어줄 이유가 없다고 본다. 더구나 국내에 '번스타인'이란 이름으로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이 소개돼 있기까지 하므로(후자는 절판된 게 유감이다. 좋은 책이다). 미국의 프래그머티즘과 하버마스, 가다머 등의 독일철학이 그의 주된 전공 분야다.   

 

 

 

 

그리고 29쪽 등에서 <순수의 시대>의 작가 '이디스 워튼(Wharton)'을 '훠튼'이라고 읽어주고 있는데 이미 국내에 <순수의 시대>(오리진, 1993)을 필두로 하여 여러 작품들이 소개된 작가를 다르게 읽어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마틴 스콜세지가 영화화하기도 한 <순수의 시대>는 지젝이 다른 책들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어서 나도 뒤늦게 번역본을 구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후에 '피터 셰퍼'와 '허버트 드레퓌스', '존 브록만'의 표기에 관한 지적들을 적다가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안돼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걸 포함하여 몇몇 오역들(대표적으론 83, 148, 288, 306, 312쪽 등에 나온다)과 불만들(나는 'act'를 상용되고 있는 '행위' 대신에 굳이 '행동'으로 옮긴 것 등에 대해서 동감하지 않는다)은 중국에 다녀와서 다루도록 하겠다...

08.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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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1-29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지름신의 사도요, 모든 탐욕의 샘이시옵나이다.......;ㅅ;
1.로쟈님 글을 읽고 지젝거리기 시작했다.
2.지젝은 굉장히 열심히, 계속해서 글을 쓴다.
3.역자들(과 출판사들)은 굉장히 빠르게, 계속해서 번역/출간한다.
4.나는 굉장히 허겁지겁, 무리하게 쟁여놓는다.
5.읽으며 머리를 쥐어뜯........거나 혹은 책값을 마련하러 일터로 간다.
라는 순환입니다. (웃음)

로쟈 2008-01-30 00:22   좋아요 0 | URL
사실 지젝은 그 정도의 '보상'은 하지요. 엉터리 번역들만 아니라면...

bongsun 2008-01-3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저는 이 책의 편집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로쟈 님의 글은 항상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사실 저희 같은 편집자에게 로쟈 님은 감사와 두려움의 대상이죠.^^
이번 글도 너무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기도 하고요.^^;)
그런데 한 가지 밝혀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로쟈 님께서 지적하신 인명 표기에 관한 것인데요,
책의 '일러두기'에 밝혀놓았듯이
인명은 원칙적으로 브리태니커 사전의 표기를 따르는 것이 출판사 방침이어서,
역자 선생님도 그 방침을 따라주시도록 설득했습니다.
따라서 인명 표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편집자(인 저의) 책임입니다.

중국에 다녀오시는 모양이네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고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47   좋아요 0 | URL
'브리태니커'에 '베른슈타인'이나 '훠튼'으로 표기돼 있나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를 말씀하신다면 그 또한 음역인데요... 음, 어쨌거나 제 생각은 고유명사 표기의 '고유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발터 벤야민'과 '한나 아렌트'라고 굳어진 이름을 '원칙'을 이유로 '발터 베냐민'이나 '해나 아렌트'로 표기하는 건(한겨레 같은 경우가 그런데) 원칙의 남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성 표기에서도 '두음법칙'에는 위배되지민 '류'씨 성 같은 표기를 허용/인정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제가 편집자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bongsun 2008-02-04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국 잘 다녀오셨는지요.
(한국어판) 브리태니커 사전에 책에 언급되는 모든 인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경우 같은 철자의 다른 인물명 표기에서 따오거나,
다른 책이나 언론 등에서 쓰는 표기를 참조하거거나 했는데,
아무튼 문제점이 꽤 있는 것 같네요.
특히 베른슈타인은 명백히 제가 오해했거나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인명 표기에 나름대로 신경을 쓴다고는 했는데,
허술한 부분이 상당히 있군요.
지적과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문제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로쟈 님과 모든 독자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앞으로는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쟈 2008-02-04 14:06   좋아요 0 | URL
'번스타인'은 '번슈타인'이라고 옮긴 경우도 있습니다. 저로선 기간된 책의 경우 오류가 아니라면 고유명사들은 일치시켜주는 게 독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처음 번역되는 고유명사라면 상관없는 일이라고요.^^;

bongsun 2008-02-04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무튼 충고 감사드립니다.^^
(앗, '참조하거거나'(?) - 편집자의 자질이 의심된다는... ㅜㅜ)

로쟈 2008-02-04 15:13   좋아요 0 | URL
저도 덩달아 오타를 냈네요. '일이라고요'라니요.^^;
 

뒷북치는 이야기인데, 작년 12월에 창간된 한 비평저널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지젝과 가라타니 고진 등의 책을 내고 있는 도서출판b 에서 창간한 <악트>가 그것이고, 찾아보니 알라딘에도 뜨긴 뜬다. 필진의 다수는 나도 참여하고 있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멤버들이다. 표제는 'Art', 'Critique', 'Theory'의 앞글자를 딴 것이기도 하지만 지젝과 정신분석에서의 키워드이기도 하다(지젝에 관한 글이 많은 건 그래서 자연스럽다). '실험적인' 잡지이기에 대중성은 고려되고 있지 않지만 뭔가 '악트'한 비평세계가 개척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컬처뉴스(07. 12. 11) "기존에 없던 저널을 만들겠다"

예술과 비평, 이론을 망라하는 비평저널 『Act』(악트) 창간호가 출간됐다. 『Act』는 'Art', 'Critique', 'Theory'의 첫 글자를 딴 비평저널로, 현대예술, 문학비평, 번역, 리뷰 등 장르에 상관 없이 진취적이고 도전적이며, 실험적인 ‘젊은 글’들이 실려 있다.

창간호가 나오기까지는 인문학을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있는 ‘도서출판 b’, 현대철학 세미나팀 ‘난곡연구소’, 인터넷 비평 공간 ‘비평고원’, 실험성이 강한 예술가 발굴을 목표로 하고 있는 ‘갤러리 정미소’의 협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성민 난곡연구소 기획위원은 “기존에 읽어본 적 없는 비평저널을 만들고 싶었다”면서, “‘악트’는 예술과 이론, 비평이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를 지지해 주는 저널이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이성민 기획위원은 “이름 그대로 ‘악트’에는 세가지 주제가 장르에 상관없이 실릴 예정이지만 현실적으로 음악비평 등은 필자를 구하는 데에 한계가 있어 당분간은 문학과 미술, 영화 등이 주를 이룰 것”이라면서, “잠재적 필자 속에는 정치학이나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고 전했다.

창간호에는 조영일 문학평론가의 「황석영과 가리타니 고진’(입답 대 비평)」, 회사원이자 ‘비평고원’에서 활동중인 김도영의 「최소차이의 미장센을 위한 배경 설정하기」, 미국 남가주대 시네마틱아트 박사 과정에 재학중인 박제철의 「(예술-비평을 가지고)무엇을 할 것이나? : 욕망의 레닌주의적 재발명」 등이 실려있으며, 「아티스트와의 만남」에서는 미술작가 오용석과 김소연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조금은 어렵게 읽히기도 하는 박제철의 글은 맑스의 잉여가치 개념과 라캉의 잉여향유 개념, 지젝의 ‘최소차이’ 혹은 ‘시차’ 개념 등을 연동시킨 선언적 성격이 강한 글이다. 그는 이러한 몇 가지 이론을 돌파함으로써 이론-실천적 유효성을 해명하고 거기에 역사적 계기를 할당하는 시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잉여가치를 넘어서’라고 표현해볼 수 있을 실천적 테제를 제시한다.

김도영의 글은 리뷰하기 어렵기로 손꼽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죽은 신을 위하여』(김정아 역, 길, 2007)를 이야기하면서, 이 저작에서도 볼 수 있는 “변증법적 역설을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정교하게 다듬고 적재적소에 변주할 수 있는 탁월한” 지젝의 능력을 높이 평했다. 이 글과 더불어 최근 한 블로그에 실렸던 영화 <300>을 다룬 지젝의 글 「진정한 헐리우드의 좌파」도 함께 실려있다(*내가 정리해놓은 건 http://blog.aladin.co.kr/mramor/1475998 참조).

한편 창간호에서 유일하게 컬러도판이 실린 ‘아티스트와의 만남’에는 간단한 작가 소개 외에 어떠한 텍스트도 없이 소수적인 것에서부터 역겨운 것을 작품의 소재로 삼고 있는 오용석 작가와 현대성의 불안, 현대자본주의의 구조 등을 인터넷에 떠도는 이미지들로 구현하고 있는 김소연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다.

김소연 작가는 “보통 미술잡지에서는 내 작품 자체가 아닌 내 작품을 텍스트로 한 비평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작품을 접하는 이들의 시각이 좁아질 수 있는 데 반해 ‘악트’에서는 작품 자체가 그대로 실려있어 보는 사람 마음대로 읽힐 여지가 있어 좋다”고 전했다. 비평저널 『Act』는 앞으로 연 2회로 출간될 예정이며, 책은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태윤미기자)

08.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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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1-27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한국판 'Lacanian Ink'의 탄생 같은 느낌을 주는 잡지로군요. 얼마 전 무용평론가 김남수 선생의 글을 통해 알게 된 잡지인데, 로쟈님도 소개를 해주시니, 한 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로쟈 2008-01-27 21:03   좋아요 0 | URL
은근히 그런 걸 겨냥했을 수도 있지만 라캉주의에 편향된 잡지는 아니구요.^^

2008-01-27 14: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27 21:03   좋아요 0 | URL
이래저래 독자들을 겨냥한 책은 아니지요.^^;

비로그인 2008-01-2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고계신곳일지도 모르겠지만,
오늘 신촌 '글벗서점'이라는 책방에 갔더니, 다른 이들 손을 거친 러시아어 원서들이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더군요. 저야 노어에는 까막눈이라 어떤 책이 있는지 전혀 모르지만, 혹 필요하신 책이 있을까 해서 알려드립니다.
헌책방이고, 오전 11시 경 부터 자정까지 문을 엽니다. 홍대입구역 2번출구에서 내려 신촌역 방향으로 죽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으로 크게 책방이 보인답니다 :)
혹 들를 일 생기거든 필요한 책 발견하시길 바래요.

로쟈 2008-01-28 00:01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 전공 공부를 그만두는 분들이 처분하는 책들이 있지요.^^;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세계적 철학자 7명 릴레이 인터뷰에서 알랭 바디우 편을 옮겨놓는다(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012416). 그는 올 7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세계철학자 대회에 참석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바디우의 책들이 몇 권 번역돼 있지만 아직도 더 많은 책들이 소개를 기다리고 있다. 그동안 모아놓은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면 좋겠다.

중앙일보(08. 01. 16) “진리는 혁명적 … 기존 지식체계 깨며 생겨”

서양 철학사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하다.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속칭되는 각종 해체주의의 진원지다. 탈근대 해체주의 철학은 신·이성·본질(실체)을 중심으로 사유해온 서양 철학 2500년 역사를 뒤흔들었다. 그같은 해체는 급기야 철학의 존립 근거까지 위협했고, 철학의 역할과 목적을 다시 세우는 반성적 사고로 이어졌다. 푸코·데리다·들뢰즈 등 해체철학자들에 이어 새로운 거장으로 평가받는 알랭 바디우(Alain Badiou·71) 파리고등사범학교(ENS) 교수가 서 있는 자리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차이의 사상’과 상대주의를 배격하고 다시 고전적인 형태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려 한다. 진리가 하나 뿐이라고 강변하는 서양 전통의 ‘동일성 철학’으로 바디우가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

e-메일 대담=김상환 서울대 교수
바디우 역시 해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며 대신 ‘복수(複數)의 진리’를 세우는 새로운 사유의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 바디우는 외국인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해 직접 피켓을 들고 시위에 나서는,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탈근대적 ‘차이의 철학’과는 다른 관점에서 각종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철학을 그는 지향한다. 이는 프랑스 좌파 철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김상환 서울대 교수가 인터뷰 안하기로 ‘악명’높은 바디우 교수와 수차례에 걸쳐 이메일 대화를 나눴다.
 
김상환(이하 김)=한국 사회도 외국인이 급증하면서 다인종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주의가 강하게 지배했던 한국 사회에 새로운 윤리관을 수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한국의 많은 지식인들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차이의 철학’이나 ‘차이의 정치학’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끌어안는 새로운 윤리학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데 바디우 교수는 탈근대 철학자들을 소피스트라고 비판하고 있다.

알랭 바디우(이하 바디우)=일상적인 삶이나 정치적인 삶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남을 봄에 있어서 ‘차이’보다는 ‘같음’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가장 핵심적인 정치적 문제는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류 전체의 근본적인 일체성, 즉 모든 인간의 평등이라는 문제가 핵심적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문화적 권리를 지지한다. 문화적 차이들이 다양한 물결을 이루지만 그 안에는 인류의 근본적인 일체성이 함축돼 있다는 나의 신념 때문이다.

김=진리에 대한 당신의 접근은 독특하다. 하나의 진리가 아닌‘복수의 진리’를 이야기한다.



바디우=진리는 혁명적이고 기존의 지식체계를 교란하면서 일어난다. 나는 진리가 생겨나는 4가지 절차가 있다고 본다. 정치·과학·예술·사랑이 그것이다. 중요한 것은 네가지 절차가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철학은 이 점을 무시하고 진리를 과학이나 정치 혹은 예술과 같은 한가지 절차로 환원시켜 봉합했다. 가령 마르크스주의는 진리를 정치에, 영미 분석철학은 과학에, 하이데거의 추종자들은 예술에 봉합했다.

김=당신의 철학을 흔히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디우=사건은 미증유의 진리가 생산되는 절차다. 철학의 과제는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의 언어를 벗어나면서 출현한 진리에 개입해 사후적으로 명명하는 일이 철학의 과제다. 사건의 1차적 의미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건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김=한국은 대통령 선거가 막 끝나서 보다 성숙하고 선진화된 사회로 나아가길 희망하는 분위기가 짙다. 그런데 당신은 대의 민주주의나 정당 정치에 회의적인 발언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바디우=선거는 정치적인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떤 합의에 기초한 제도이다. 사회가 대충 어떠한 형태를 띠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경쟁 그룹들 사이의 의견일치가 없다면, 상대편이 권좌에 오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거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다면, 이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선거에 참여하는 어떠한 세력도 실질적으로는 과격하고 혁명적인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상환=선거가 어떤 합의 위에 서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바디우=자본주의라는 합의 위에 놓여있다는 의미다. 소위 민주주의적인 나라치고 자본주의가 지배하지 않는 나라, 시장경제가 군림하지 않는 나라, 대기업 CEO가 선거에서 뽑힌 정치인보다 더 큰 권력을 쥐지 않은 나라, 그런 나라를 본 적이 있는가. 선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있다. 인간 해방은 자본주의적인 경쟁체제에서는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김=그럼 인간 해방을 추구하는 길은 어디에 있나.

바디우=첫 번째 관문은 국가의 선거 형식 바깥에서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조직을 만드는 데 있다. 핵심 과제는 서로 다른 출신의 사람들을 묶는 일이다. 가령 지식인·청년·직장인 그리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사이에 어떤 행동 단위나 조직 단위를 구성해야 한다.



김= 사도 바울을 주제로 한 당신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데, 종교 갈등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다.

바디우=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갈등이 종교나 문명 간 충돌이라 보지 않는다. 내가 볼 때 신은 죽었고, 종교는 무력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중세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갈등은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서가 아니라, 미국과 서방을 중심으로 하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와 가난하고 헐벗은 인민 대중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충돌은 때로 종교적 성향의 집단들에 의해 조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전 세계에 걸쳐 자본주의에 의해 창조된 여러 가지의 거대한 불평등이 없다면, 이 집단들은 아무런 힘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김=당신의 철학에 따른 정치적 주체는 투사의 형태를 취해야 할 것 같은데, 종교적 근본주의자나 테러리스트와 어떻게 다른가.

바디우=테러리스트는 전혀 인간 해방의 보편적 비전을 수호하지 않는다. 테러리스트는 종교적 경전에 의해 확립된 폐쇄적인 정체성의 옹호자다. 과거의 열성적인 파시스트 신봉자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는 충실과 참여의 정치학은 이런 종류의 폐쇄성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김=요즘 한국 학계는 인문학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바디우=내가 볼 때, 인문과학에서 ‘과학’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은 마르크스 전통에서 정의하는 역사,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 소쉬르 이래의 언어학 등 세 가지 정도다. 그 밖의 것들은 보통 ‘고전 연구’라 불리는데, 예술에 관계하는 학술적인 형식에 해당한다. 고전 연구를 중심으로 한 인문학은 자본주의에 의해 위협 받고 있다.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대한 실천적 관계를 조직한다는 점에서 인문학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철학에서 예술은 과학·정치·사랑과 더불어 보편적 진리의 본질적 유형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인문학의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 근거도 거기에 있다. 대학이 자본주의의 요구만을 따라가선 안된다. 대학이 몰두하고 헌신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 자체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제약이나 구속이 있어서는 안된다.(정리=배영대 기자)

◆도움되는 책=탈근대 해체주의 관련한 번역서로는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민음사),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민음사),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민음사) 등이 있다. 해체주의 비판서로는 알랭 바디우의 『조건들』(새물결), 슬라보예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등이 출간됐다.



◆알랭 바디우=1937년생. 수학과 철학에서 모두 박사학위 취득. 프랑스 현대철학국제연구센터 소장. 문예 창작, 연극 연출로도 명성이 높은 전방위 작가. 마르크스 이론가 알튀세와 함께 활동하다 1968년 5월혁명 이후 결별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철학의 길을 모색했고, 88년 대표작 『존재와 사건』을 출간 했다.

◆김상환=1960년생. 연세대 철학과 졸업. 파리4대학 철학박사. 『해체론 시대의 철학』 등의 저서가 있 다.

07. 01. 17.

P.S. 바디우의 강의장면은 유튜브에도 많이 올라와 있다. 대개 유럽대학원에서의 강의를 담은 것들인데('민주주의, 정치 그리고 철학' 등이 주제다) 영어로 진행하고 있어서 들어볼 만하다(http://www.youtube.com/watch?v=J_cqyxA5b4A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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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8 0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1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가운 마음에 종이신문을 붙잡고 읽어 내려갔었는데, 아무래도 일간지 기사인데다가 이메일 인터뷰라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생각보다 '심심해서' 의외였습니다.^^

로쟈 2008-01-18 23:03   좋아요 0 | URL
일간지에 실리는 인터뷰야 그냥 맛보기죠...

겨울나기 2008-01-19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필라멘트 2008-01-1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바디우.. 반가운 분의 기사네요.^^ 제가 철학서적은 많이 못읽었지만, 그래도 바디우의 국역본들은 다 읽었다는.. ㅎㅎ(그래봤자 4권이지만) <존재와 사건>이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네요. <람혼>님을 여기서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저, 폴리니입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다 말다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벼운 몸살 같기도 하고 피로의 누적 같기도 하다). 엊그제부터 샹탈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대해 몇 자 적고 밀린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진도는 두어 페이지를 못 나가고 있다. 정신 좀 차리기 위해 '단순작업'을 해두기로 한다. 얼마전(사실 몇주 전)에 출간된 김석의 <에크리>(살림, 2007)에 대한 리뷰가 뒤늦게 올라왔는데(한국적 서평 관행에 미루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어 <에크리>가 없는 상태라 여전히 '엇박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여하튼 '예습'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볼 수는 있겠다.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7158.html)를 읽어가며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이도록 한다.

한겨레(07. 12. 15) '욕망의 이론가’ 라캉을 다시 읽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 몇 번의 변곡점을 그렸다.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이 밀어닥치던 1990년대 중반 라캉의 이론은 루이 알튀세르나 미셸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과 함께 구조주의의 중심 이론 가운데 하나로 거의 빠지지 않고 거명됐다. 그러다 곧바로 탈구조주의 물결이 구조주의 위를 덮쳤다. 라캉은 이 물결에 밀려, 특히 질 들뢰즈의 철학에 밀려 지식장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니까 기자가 그리고 있는 라캉의 수용사는 알튀세르. 푸코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겠다. 기억에 가장 '혁신적'이었던 책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이었다. 저자의 <에크리>의 참고문헌 소개에는 '국내에 번역된 책들'만 제시되고 있는데 기존의 수용 성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과문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푸코, 알튀세르에 대해 저자가 소화한 내용을 그래도 적시하고 있는 것이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며 '교양서'로 분류하기엔 다소 전문적이지만 참고문헌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구조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 전4권)가 필독서이다. 비록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알기에 라캉에 관한 모든 책은 김형효 교수의 책에 뒤이어 출간됐다. 국내 필자가 쓴 또다른 책으로 이진경의 <철학의 외부>(그린비) 정도가 떠오르는데 '구조주의자 라캉'에 대한 소개와 비판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와 국내 '라캉학'을 종합한 <라캉의 재탄생>(창비, 2002), 그리고 박찬부 교수의  연구서들이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일 텐데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이런 책들 대신에 "라캉의 <에크리>를 읽고 연구할 때 참고가 될 만한 책들"로 불어권 연구서들만 나열해 놓고 있다. 국내 연구서들을 읽느니 차라리 불어 입문서를 읽는 게 낫다는 암시일까? 일반독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들뢰즈의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 개념을 날려버렸고, 들뢰즈의 저작 <안티오이디푸스>는 라캉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버지-어머니-아들)을 폭파해버렸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 지젝이 자기 사상의 이론적 기둥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지젝과 더불어 라캉은 부활했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났다. 한동안 들뢰즈의 것이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지? 들뢰즈의 독자가 그토록 많은가? 지젝과 함께 라캉은 정말 '귀환'하고 '부활'했는가? 약간은 드라마틱한 과장이 느껴진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폭파해버렸다면 지젝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오이디푸스 또한 다시 귀환하고 부활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품게 된다. 물론 짤막한 리뷰 기사에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라캉 전공자 김석(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씨가 쓴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은 이렇게 부활한 라캉을 그의 주요 저서 중심으로 친절하게 소개하는 안내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 분야의 이론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명실상부한 최고의 이론가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프로이트 사후 분화를 거듭하던 정신분석학계에 강력한 이론적 성채를 제공했다.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프로이트로 돌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극복하고 혁신하려고 했다. 그는 ‘리비도’(성에너지)와 같은 프로이트의 생리학적·생물학적 개념과 완전히 단절해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해명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거리를 두었던 철학이나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정신분석학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라캉의 대표 명제는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를 주제로 200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돼 있으니까 액면 그대로 '라캉 전공자'이다(이미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2002)을 옮긴 바 있다). 올해는 역시나 라캉으로 학위를 받은 김서영씨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도서출판b, 200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어서 <에크리> 수용의 품새는 다 갖춰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와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도 최근에 모두 소개되었기에 라캉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에크리>도 <세미나>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듣자 하니 <에크리>의 경우 내년에는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한편 여전히 가장 쉬운 입문서는 다리안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해설 대상으로 삼은 것이 제목에 드러난 대로 라캉의 대표저작 <에크리>다. 1966년 출간된 <에크리>는 1936년 이래 30년 동안 라캉이 쓴 논문 28편을 엮은 책이다. 라캉 사상의 거의 전부가 이 책에 압축돼 있다. 라캉을 두고 ‘욕망의 이론가’라고 하는데, 그가 평생토록 해명하려 한 것이 이 욕망의 성격과 구조와 작동이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밑바닥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질서를 가리키며, 이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다. 라캉은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나누었다. 1950년 이전 상상계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던 라캉은 원숙기에 이르러 상징계를 분석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삼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실재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개념이어서 일종의 세트를 이룬다. <에크리>의 논문들은 이 세트 개념들을 포괄해 설명하고 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키워드로 하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세 단계를 거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1966년에 나온 <에크리>는 이 중 상징계, 혹은 구조주의 시기의 라캉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지적된다. 70년대의 <세미나>에서 그는 자기 이론에 대한 새로운 제안과 교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라캉'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라캉 vs 라캉'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온다). 나는 이게 라캉 이해의 가장 큰 난점이라고 생각한다. 라캉의 '이론적 전기;'에 대한 관심이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다(수시로 사전도 참조해야 하고).  

상상계는 어린아이의 자아인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라캉은 ‘거울단계’라는 용어로 이 세계를 설명한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그 거울 이미지를 따라 ‘상상적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 환영이다.” 거울단계를 거친 어린아이는 다시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그 과정을 거쳐 진입하는 곳이 상징계다. 상징계란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 관계 맺는 세계다. 아버지란 이 질서의 대표자이자, 주체가 동일시하는 ‘대타자’(큰타자)다. 그 아버지는 남근(팔루스)을 소유한 자로 간주되며, 남근이라는 특권적 기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주체의 욕망이다. 욕망이란 그러므로 남근이 없는 상태, 곧 결여를 가리킨다.

상징계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상응하는 것은 라캉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건 정신분석의 '언어학적 전회'이다(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불운은 그가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 이전에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 '언어학적 전회' 이후의 아버지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상징적 아버지, 부권적 권위로서의 아버지이다. 곧 법이고, 질서이고 언어규칙이다. 때문에 '안티오이디푸스'가 정신병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법과 질서, 언어규칙의 바깥으로 외출/탈주하려는 것이 안티오이디푸스의 기본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갇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여기서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그 세계는 상징계가 균열을 일으키거나 구멍이 뚫릴 때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서,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자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세계다. 실재계는 때로 환각으로 때로 광기로 드러나기도 하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 모순적 대상이야말로 욕망의 궁극적 귀착점이다. 라캉의 후예인 지젝은 실재계로 대표되는 이 후기 이론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고명섭 기자)

07. 12. 15.

P.S. 라캉에 대한 지젝의 주석의 많은 부분이 실재(계)에 할애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라고 정의되지만 그것이 '어떤 세계'라고 규정될 수는 없다. 실재는 그저 상징계의 표상/재현이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징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잉여가 '실재'이다.

기자는 계속해서 지젝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에 대해서 전혀 참조하지 않는다(하지만 라캉을 이해하는 데 지젝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애당초 이 책을 구입했을 때 '지젝 없이 라캉 읽기'라는 페이퍼를 적으려고까기 했을 정도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라고 기자는 적었는데, 기꺼이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그냥 '여성의 음부' 같은 곳이다(지젝이 어디선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다 믿을 듯하다). 가려진 뭔가가 있지만 막상 '가리개'를 제거하는 순간 그 뭔가는 상실된 것으로 체험된다.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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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디선가 지젝이 그렇게 말했다는 '확신'까지 드는데요...^^
개인적으로 Bertrand Ogilvie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은, Peter Widmer의 <욕망의 전복>과 함께, 라캉 입문을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생각합니다. Bruce Fink의 <에크리 읽기>는 아직 채 다 읽지 못했는데, 역시나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 모든 책들은 언제나 제게 '가닿을 수 없는 실재'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6 17:39   좋아요 0 | URL
문제는 실재가 아니라 욕망이지요.^^

람혼 2007-12-17 02:27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

vinoveri 2007-1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단계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가는 과정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듯 한데요.. 라깡은 거울단계에 상상계뿐만 아니라 상징계가 개입하는 것으로 얘기하지 않나요?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오인)할 때, 그것에 대해 보증자의 역할을 하는 제3자 - 주로 어머니겠지요 - 의 확인 내지 인정의 개입을 통해서 말이지요.(람혼님이 소개해주신 <욕망의 전복>에도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울단계를 통해서 아이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옮겨가게 된다'라는 식의 생각은 라깡이 국내에 소개되던 초기에 잘못 소개된 통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거울단계 이전에는 상상계밖에 없고 그 이후에 아이가 상징계에 편입된다라는 식의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상상'계', 상징'계'라는 번역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 상징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요.)
그렇게 본다면, 거울단계를 거쳐 다시 외디푸스단계로 넘어간다라는 설명도 제가 보기에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라깡이 이런 식의 단계론적 설정을 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로쟈 2007-12-16 17:45   좋아요 0 | URL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구별하면 문제가 해소될 듯한데요. 그리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는 순차적인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상계 이후에 상징계가 온다는 식이 아니라 서로 매듭을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죠...

vinoveri 2007-12-18 01:31   좋아요 0 | URL
거울단계에서 아이에게 일어나는 동일시는 상상적 동일시가 아니냐는 말씀으로 이해되는데요..
물론 아이가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이지요. 하지만,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확신(오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로 대표되는 제3자의 보증이 개입하게 되지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면서 '저게 나야?'라고 묻는 (듯한) 아이에 대해서, '그래, 그게 바로 너란다.'라고 대답하는 (듯한)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 뭐, 이런 상황이 이들 3자간에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이 제3자의 시선은 소위 '정형외과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파편화된 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던 이미지들이 하나로 기워져서 단일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지요. 제3자의 개입이 없다면 아이는 사회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데 큰 장애(소위 자폐)를 겪게 되며, 그런 점에서 거울단계에서 제3자의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드리고자 했던 것은 이 과정에서 하는 제3자의 역할이 상징적인 것의 개입에 해당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어머니가 주로 하는 역할이지만, 이 때의 개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이구요.) 따라서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미 상징적 동일시가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거울단계에서 개입하는 제3자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라깡의 에끄리의 거울단계논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기 라깡의 세미나에서 강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전의 차이 때문에 혼란이 가중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논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이거, 로쟈님의 블로그에 처음 다는 댓글이 너무 딱딱하고 까칠한 게 아닌가 해서 많이 걱정이 되네요..--; 그저 지식인들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로쟈님의 블로그를 빛내려는 충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7-12-17 15:52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의견이십니다. 사실 아시다시피 라캉에 대한 '해석'의 문제 같고, 제가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독자일 뿐이라서요). 몇몇 2차문헌에 근거하여 판단할 따름입니다. 보다 정밀하게 의견을 제시(발표?)해주시면 라캉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vinoveri 2007-12-18 01:32   좋아요 0 | URL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블로그를 드나들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그저 독자일뿐일걸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