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영화 <300>을 보면서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못 배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짐작이 헛되진 않았다. 내가 좀 뒤늦게 알게 되었을 뿐이다. <300>에 대하여 그가 쓴 영화평이 '진정한 헐리우드 좌파(The True Hollywood Left)'이고 우리말로도 초역된 걸 알게 되어 원문과 함께 옮겨놓는다. 원문의 출처는 라캉닷컴 http://www.lacan.com/zizhollywood.htm 이고, 다음카페 비평고원의 스크랩방에서 옮겨온 번역문의 원출처는 진보넷의 한 블로그 http://blog.jinbo.net/chasm/?pid=44이다.
진정한 헐리우드 좌파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군대의 침공에 맞서 자신들을 희생한 300명 스파르타 군인의 무용담을 담은 영화 <300>(잭 스나이더 감독)은, 최근의 (미국과) 이라크-이란과의 관계를 반영하는 최악의 자국중심 군사주의 영화로 비난받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할까? 오히려 <300>은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방어되어야만 하는 영화이다.
두 가지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영화 스토리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영화는 강대국(페르시아)에게 침략 받는 가난한 약소국(그리스)의 이야기이다. 당시에 페르시아는 훨씬 더 발전한 국가였고, 더 발달된 무기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페르시아의 코끼리나 거인들 그리고 거대한 불화살들은, 오늘날의 하이테크 무기의 고대적 판본은 아닌가? 스파르타의 마지막 생존자들과 그들의 왕 레오니다스가 수천 개의 화살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은, 오늘날 안전한 거리만큼 떨어진 곳에서 첨단 무기를 조종하는 테크노-군인에 의해 폭격당하는 사람들과 겹쳐지지 않는가? 오늘날 미군들은 페르시아 만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군함 속에서 단지 미사일 발사 버튼만 누르고 있다.
게다가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를 설득할 때, 그가 사용하는 말들은 확실히 광기어린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것과는 다르다.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들였을 때 주어질 평화와 쾌락을 약속하면서, 레오니다스를 유혹한다. 레오니다스가 요구받는 것은 단지 무릎을 꿇고 페르시아의 위대함을 인정하라는 형식적 제스처일 뿐이다. 만약 스파르타인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그리스 전역에 지배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는 레이건 대통령이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에서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니카라과 정권은 미국에 대해 “어이, 삼촌!”이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또한 영화 속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다양한 삶의 양식이 공존하는 다문화주의의 이상향으로 보이지 않는가? 그 곳에서는 다양한 인종들과 레즈비언, 게이, 불구자 등등을 포함한 모두가 난교orgy에 참여하지 않는가? 오히려 희생정신과 규율로 무장한 스파르타인들이, 미국의 침공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을 방어하고자 하는 탈레반과 훨씬 유사해보이지 않는가? (혹은 미국의 침공에 맞서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란 혁명 수호대의 엘리트 집단과 유사해보이지 않는가?)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에 맞선 그리스 인들의 주된 무기는, 규율과 희생정신뿐이다.
알랭 바디우를 인용해보자. “우리는 민중적 규율이 필요하다. ···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는 오직 규율만 가지고 있다. 권력도, 돈도, 무기도 없는 가난한 이들이 가진 것은 규율, 즉 함께 행동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 이 규율은 이미 조직의 한 형태이다.” 쾌락주의적 방임론hedonist permissivity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오늘날, 좌파가 규율과 희생정신을 (재)평가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규율과 희생정신에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스파르타인들의 근본주의적 정체성조차 좀 더 모호하다. 영화 끝 무렵의 선동적 언어들은, 그리스인들의 과제를 “자유와 이성의 지배라는 밝은 미래를 위해 폭정과 신비주의에 대항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것은 마치 기초적인 계몽주의적 기획처럼 (심지어는 공산주의적 뉘앙스를 가진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또한 영화의 시작부에 레오니다스가 부패한 제사장들의 메시지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떠올려보자. 제사장들은 신이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의 출정을 금지했다고 말하지만, 나중에 밝혀지듯이 신비한 황홀경 상태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페르시아에 의해 매수된 상태였다. 마치 1959년에 달라이 라마에게 티벳을 떠나라고 말했던 티벳 제사장이, 나중에 CIA에 매수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듯이 말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군대식 규율(아이를 내다버리는 행위까지 포함하여)에 의해 지탱되는 명예와 자유, 이성 같은 개념들이 가지는 명백한 부조리성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 “부조리”는 단지 자유를 위한 댓가일 뿐이다. 영화에 나오듯이,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있는 힘겨운 투쟁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의 가혹한 군대식 규율은 아테네인들의 “자유민주주의”와 단순히 외적으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내적인 조건이자 기반을 이룬다. 이성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는 오직 가혹한 자기-규율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자유는, (딸기 케이크와 초코 케이크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의) 안전한 거리를 둔 채 행해지는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성과 겹쳐진다.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내기에 걸었을 때에만, 즉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실천할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조국이 외국의 지배하에 있는 상황에서 저항세력의 리더가 누군가에게 점령군에 대항해 싸우자고 제안할 때, “너는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네가 명예를 지키고자 한다면, 이것이 유일한 길이란 사실을 모르겠니?”라고 말하지 않을까?
루소에서 자코뱅에 이르는 근대의 평등주의적 급진파들이 스파르타를 동경하고, 프랑스 공화국을 새로운 스파르타로 상상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군사 규율이라는 스파르타의 정신 속에는 (노예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와 폭력 같은 스파르타 내 계급 지배를 가능케 했던 역사적 조건들을 제거해도 여전히 남아있는) 해방의 정수(core)가 존재한다.
하지만 아마도 더 중요한 것은, <300>의 형식적 측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몬트리올에 있는 한 창고에서 촬영되었고, 배경과 수많은 등장인물들은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의 인공적 성격이 “실제” 배우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종종 마치 만화 속 인물들이 그대로 현실에 나온 것처럼 보인다(이 영화는 프랭크 밀러의 만화 <300>이 원작이다). 게다가 배경의 (디지털) 인공성은 일종의 폐쇄공포증적 분위기를 창출한다. 마치 이야기는 끝없이 열려진 공간인 “실제(real)”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닫혀진 세계” 속에서, 일종의 닫혀진 공간의 부조(浮彫)화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미학적으로, 이는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비록 <스타워즈>나 <반지의 제왕>에서도 배경과 등장인물의 상당부분이 디지털로 만들어졌지만, 이 영화들이 주는 느낌은, 실제 배우와 디지털 배우 및 사물들(코끼리나 요다, Urkhs나 궁전 같은 것들)이 “실제의” 열려진 세계 속에 놓여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300>에서의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인공적 배경 속에 던져진 “실제” 인물들이었고, 이러한 조합은 인공적 세계와 실제 인물들 간의 사이보그적 결합이라는 훨씬 더 괴상한 “폐쇄적” 세계를 만들어냈다. 오직 <300>만이 “실제” 연기자들과 사물들과 디지털로 만들어진 배경을 조합하여 진정으로 새로운 자율적인 미학적 공간을 만들어내는데 근접했다.
다양한 예술 장르를 혼합하는 것(하나의 예술이 다른 예술을 참조하는 것까지 포함하여)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열려진 창을 통해 바깥을 보는 여성을 그린 많은 호퍼Hopper의 초상화들은 확실히 영화의 경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이 초상화들은 대응-샷counter-shot없는 샷을 보여준다). <300>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기법적으로 더 발달된 예술(디지털 영화)이 덜 발달된 예술(만화)을 참조했다는 데 있다(물론 이러한 시도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컨대 워렌 비티의 <딕 트레이시>보다 예술적으로 훨씬 더 흥미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시도를 한다).
이로 인해 생산되는 효과는 “진정한 현실true reality”이 자신의 순수함을 잃고, 닫혀진 인공적 세계의 일부분으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우리의 사회-이데올로기적 상황을 완벽히 형상화해낸 것이다. <300>이 시도한 두 예술 장르의 “합성synthesis”이 실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맞지만, 동일한 이유 때문에 틀렸다. 물론 이 “합성”은 실패하고 어수선한 속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우주 속에는 당연히 뿌리 깊은 적대와 모순이 가로지르고 있다. 그러나 진리의 지표는, 바로 이러한 적대인 것이다.
The True Hollywood Left
Zack Snyder's 300, the saga of the 300 Spartan soldiers who sacrificed themselves at Thermopilae in halting the invasion of Xerxes' Persian army, was attacked as the worst kind of patriotic militarism with clear allusions to the recent tensions with Iran and events in Iraq - are, however, things really so clear? The film should rather be thoroughly defended against these accusations.
There are two points to be made; the first concerns the story itself - it is the story a small and poor country (Greece) invaded by the army of a much larges state (Persia), at that point much more developed, and with a much more developed military technology - are the Persian elephants, giants and large fire arrows not the ancient version of high-tech arms? When the last surviving group of the Spartans and their king Leonidas are killed by the thousands of arrows, are they not in a way bombed to death by techno-soldiers operating sophisticated weapons from a safe distance, like today's US soldiers who push the rocket buttons from the warships safely away in the Persian Gulf? Furthermore, Xerxes's words when he attempts to convince Leonidas to accept the Persian domination, definitely do not sound as the words of a fanatic Muslim fundamentalist: he tries to seduce Leonidas into subjection by promising him peace and sensual pleasures if he rejoins the Persian global empire. All he asks from him is a formal gesture of kneeling down, of recognizing the Persian supremacy - if the Spartans do this, they will be given supreme authority over the entire Greece. Is this not the same as what President Reagan demanded from Nicaraguan Sandinista government? They should just say "Hey uncle!" to the US... And is Xerxes's court not depicted as a kind of multiculturalist different-lifestyles paradise? Everyone participates in orgies there, different races, lesbians and gays, cripples, etc.? Are, then, Spartans, with their discipline and spirit of sacrifice, not much closer to something like the Taliban defending Afghanistan against the US occupation (or, as a matter of fact, the elite unit of the Iranian Revolutionary Guard ready to sacrifice itself in the case of an American invasion? The Greeks main arm against this overwhelming military supremacy is discipline and the spirit of sacrifice - and, to quote Alain Badiou: "We need a popular discipline. I would even say /.../ that 'those who have nothing have only their discipline.' The poor, those with no financial or military means, those with no power - all they have is their discipline, their capacity to act together. This discipline is already a form of organization." In today's era of hedonist permissivity as the ruling ideology, the time is coming for the Left to (re)appropriate discipline and the spirit of sacrifice: there is nothing inherently "Fascist" about these values.
But even this fundamentalist identity of the Spartans is more ambiguous. A programmatic statement towards the end of the film defines the Greeks' agenda as "against the reign of mystique and tyranny, towards the bright future," further specified as the rule of freedom and reason - sounds like an elementary Enlightenment program, even with a Communist twist! Recall also that, at the film's beginning, Leonidas outrightly rejects the message of the corrupt "oracles" according to whom, gods forbid the military expedition to stop the Persians - as we learn later, the "oracles" who were allegedly receiving the divine message in an ecstatic trance were effectively paid by the Persians, like the Tibetan "oracle" who, in 1959, delivered to the Dalai-lama the message to leave Tibet and who was - as we learned today - on the payroll of the CIA!
But what about the apparent absurdity of the idea of dignity, freedom and Reason, sustained by extreme military discipline, including of the practice of discarding the weak children? This "absurdity" is simply the price of freedom - freedom is not free, as they put it in the film. Freedom is not something given, it is regained through a hard struggle in which one should be ready to risk everything. The Spartan ruthless military discipline is not simply the external opposite of the Athenian "liberal democracy," it is its inherent condition, it lays the foundation for it: the free subject of Reason can only emerge through a ruthless self-discipline. True freedom is not a freedom of choice made from a safe distance, like choosing between a strawberry cake or a chocolate cake; true freedom overlaps with necessity, one makes a truly free choice when one's choice puts at stake one's very existence - one does it because one simply "cannot do it otherwise." When one's country is under a foreign occupation and one is called by a resistance leader to join the fight against the occupiers, the reason given is not "you are free to choose," but: "Can't you see that this is the only thing you can do if you want to retain your dignity?" No wonder that all early modern egalitarian radicals, from Rousseau to Jacobins, admired Sparta and imagined the republican France as a new Sparta: there is an emancipatory core in the Spartan spirit of military discipline which survives even when we subtract all historical paraphernalia of Spartan class rule, ruthless exploitation of and terror over their slaves, etc.
Even more important is, perhaps, the film's formal aspect: the entire film was shot in a warehouse in Montreal, with the entire background and many persons and objects digitally constructed. The artificial character of the background seems to infect "real" actors themselves, who often appear as characters from comics rendered alive (the film is based on Frank Miller's graphic novel 300). Furthermore, the artificial (digital) nature of the background creates a claustrophobic atmosphere, as if the story does not take place in "real" reality with its endless open horizons, but in a "closed world," a kind of relief-world of closed space. Aesthetically, we are here steps ahead of the Star Wars and Lord of the Rings series: although, in these series also, many background objects and persons are digitally created, the impression is nonetheless the one of (real and) digital actors and objects (elephants, Yoda, Urkhs, palaces, etc.) placed into a "real" open world; in 300, on the contrary, all main characters are "real" actors put into an artifical background, the combination which produces a much more uncanny "closed" world of a "cyborg" mixture of real people integrated into an artificial world. It is only with 300 that the combination of "real" actors and objects and digital environment came close to create a truly new autonomous aesthetic space.
The practice of mixing different arts, of including in an art the reference to another art, has a long tradition, especially with regard to cinema; say, many Hopper's portraits of a woman behind an open window, looking outside, are clearly mediated by the experience of cinema (they offer a shot without its counter-shot). What makes 300 notable is that, in it (not for the first time, of course, but in a way which is artistically much more interesting than, say, that of Warren Beatty's Dick Tracy), a technically more developed art (digitalized cinema) refers to a less developed one (comics). The effect produced is that of "true reality" losing its innocence, appearing as part of a closed artificial universe, which is a perfect figuration of our socio-ideological predicament. Those critics who claimed that the "synthesis" of the two arts in 300 is a failed one are thus wrong for the very reason of being right: of course the "synthesis" fails, of course the universe we see on the careen is traversed by a profound antagonism and inconsistency, but it is this very antagonism which is an indication of truth.
07. 08.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