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자다 말다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가벼운 몸살 같기도 하고 피로의 누적 같기도 하다). 엊그제부터 샹탈 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론에 대해 몇 자 적고 밀린 일들을 해야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진도는 두어 페이지를 못 나가고 있다. 정신 좀 차리기 위해 '단순작업'을 해두기로 한다. 얼마전(사실 몇주 전)에 출간된 김석의 <에크리>(살림, 2007)에 대한 리뷰가 뒤늦게 올라왔는데(한국적 서평 관행에 미루어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어 <에크리>가 없는 상태라 여전히 '엇박자'라는 인상을 지울 수는 없지만 여하튼 '예습'한다는 기분으로 읽어볼 수는 있겠다. 리뷰(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7158.html)를 읽어가며 몇 가지 코멘트를 덧붙이도록 한다.

한겨레(07. 12. 15) '욕망의 이론가’ 라캉을 다시 읽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1901~1981)에 대한 관심은 국내에서 몇 번의 변곡점을 그렸다. 프랑스 구조주의 사상이 밀어닥치던 1990년대 중반 라캉의 이론은 루이 알튀세르나 미셸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과 함께 구조주의의 중심 이론 가운데 하나로 거의 빠지지 않고 거명됐다. 그러다 곧바로 탈구조주의 물결이 구조주의 위를 덮쳤다. 라캉은 이 물결에 밀려, 특히 질 들뢰즈의 철학에 밀려 지식장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러니까 기자가 그리고 있는 라캉의 수용사는 알튀세르. 푸코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겠다. 기억에 가장 '혁신적'이었던 책은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 1990)이었다. 저자의 <에크리>의 참고문헌 소개에는 '국내에 번역된 책들'만 제시되고 있는데 기존의 수용 성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면 과문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와 라캉, 푸코, 알튀세르에 대해 저자가 소화한 내용을 그래도 적시하고 있는 것이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며 '교양서'로 분류하기엔 다소 전문적이지만 참고문헌으로서의 가치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구조주의 일반에 대해서는 물론 프랑수아 도스의 <구조주의의 역사>(동문선, 전4권)가 필독서이다. 비록 술술 읽히는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내가 알기에 라캉에 관한 모든 책은 김형효 교수의 책에 뒤이어 출간됐다. 국내 필자가 쓴 또다른 책으로 이진경의 <철학의 외부>(그린비) 정도가 떠오르는데 '구조주의자 라캉'에 대한 소개와 비판에만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와 국내 '라캉학'을 종합한 <라캉의 재탄생>(창비, 2002), 그리고 박찬부 교수의  연구서들이 빼놓을 수 없는 '흔적'일 텐데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이런 책들 대신에 "라캉의 <에크리>를 읽고 연구할 때 참고가 될 만한 책들"로 불어권 연구서들만 나열해 놓고 있다. 국내 연구서들을 읽느니 차라리 불어 입문서를 읽는 게 낫다는 암시일까? 일반독자들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들뢰즈의 ‘생산으로서의 욕망’ 개념은 라캉의 ‘결여로서의 욕망’ 개념을 날려버렸고, 들뢰즈의 저작 <안티오이디푸스>는 라캉이 암묵적으로 지지하던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삼각형’(아버지-어머니-아들)을 폭파해버렸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 지젝이 자기 사상의 이론적 기둥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것이 라캉의 정신분석학이다. 지젝과 더불어 라캉은 부활했다.

 

 

 

 

"한동안 세상은 들뢰즈의 것이었다. 그러나 라캉의 이름은 슬로베니아학파를 이끄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등장과 함께 다시 귀환했다."라는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났다. 한동안 들뢰즈의 것이었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는지? 들뢰즈의 독자가 그토록 많은가? 지젝과 함께 라캉은 정말 '귀환'하고 '부활'했는가? 약간은 드라마틱한 과장이 느껴진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폭파해버렸다면 지젝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오이디푸스 또한 다시 귀환하고 부활하는가? 그런 질문들을 품게 된다. 물론 짤막한 리뷰 기사에서 해답을 얻을 수는 없지만.

라캉 전공자 김석(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씨가 쓴 <에크리-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은 이렇게 부활한 라캉을 그의 주요 저서 중심으로 친절하게 소개하는 안내서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이 분야의 이론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후 명실상부한 최고의 이론가다. 라캉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프로이트 사후 분화를 거듭하던 정신분석학계에 강력한 이론적 성채를 제공했다. 그러나 라캉이 단순히 프로이트로 돌아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라캉은 프로이트를 극복하고 혁신하려고 했다. 그는 ‘리비도’(성에너지)와 같은 프로이트의 생리학적·생물학적 개념과 완전히 단절해 무의식을 구조주의적으로 해명했다. 특히 프로이트가 거리를 두었던 철학이나 언어학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정신분석학에 새로운 성격을 부여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라캉의 대표 명제는 이런 사정을 보여준다.

 

 

 

 

저자는 '라캉의 욕망하는 주체'를 주제로 2005년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돼 있으니까 액면 그대로 '라캉 전공자'이다(이미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2002)을 옮긴 바 있다). 올해는 역시나 라캉으로 학위를 받은 김서영씨가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도서출판b, 2007)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어서 <에크리> 수용의 품새는 다 갖춰진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와 지젝의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7)도 최근에 모두 소개되었기에 라캉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붐'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에크리>도 <세미나>도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이러니컬하긴 하지만(듣자 하니 <에크리>의 경우 내년에는 번역본이 나올 듯하다). 한편 여전히 가장 쉬운 입문서는 다리안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이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해설 대상으로 삼은 것이 제목에 드러난 대로 라캉의 대표저작 <에크리>다. 1966년 출간된 <에크리>는 1936년 이래 30년 동안 라캉이 쓴 논문 28편을 엮은 책이다. 라캉 사상의 거의 전부가 이 책에 압축돼 있다. 라캉을 두고 ‘욕망의 이론가’라고 하는데, 그가 평생토록 해명하려 한 것이 이 욕망의 성격과 구조와 작동이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밑바닥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질서를 가리키며, 이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실행하는 존재가 주체다. 라캉은 주체가 대상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세계를 상상계·상징계·실재계로 나누었다. 1950년 이전 상상계를 설명하는 데 집중했던 라캉은 원숙기에 이르러 상징계를 분석하는 일을 중심 과제로 삼았고,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실재계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내적으로 연결된 개념이어서 일종의 세트를 이룬다. <에크리>의 논문들은 이 세트 개념들을 포괄해 설명하고 있다.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키워드로 하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세 단계를 거친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1966년에 나온 <에크리>는 이 중 상징계, 혹은 구조주의 시기의 라캉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지적된다. 70년대의 <세미나>에서 그는 자기 이론에 대한 새로운 제안과 교정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라캉'의 모습을 기대하기 어렵다('라캉 vs 라캉'이란 표현은 그래서 나온다). 나는 이게 라캉 이해의 가장 큰 난점이라고 생각한다. 라캉의 '이론적 전기;'에 대한 관심이 그런 의미에서 필요하다(수시로 사전도 참조해야 하고).  

상상계는 어린아이의 자아인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라캉은 ‘거울단계’라는 용어로 이 세계를 설명한다.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서 그 거울 이미지를 따라 ‘상상적으로’ 자아를 구성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성된) 자아는 주체의 진정한 본질이 아니며 오히려 주체를 속이는 기만적 환영이다.” 거울단계를 거친 어린아이는 다시 ‘오이디푸스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의 법, 아버지의 권위를 내면화한다. 그 과정을 거쳐 진입하는 곳이 상징계다. 상징계란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다. 이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언어를 통해서 관계 맺는 세계다. 아버지란 이 질서의 대표자이자, 주체가 동일시하는 ‘대타자’(큰타자)다. 그 아버지는 남근(팔루스)을 소유한 자로 간주되며, 남근이라는 특권적 기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주체의 욕망이다. 욕망이란 그러므로 남근이 없는 상태, 곧 결여를 가리킨다.

상징계에 대한 전형적인 설명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에서 '아버지'에 상응하는 것은 라캉에게서 '아버지의 이름'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건 정신분석의 '언어학적 전회'이다(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불운은 그가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 이전에 자신의 이론을 정립했다는 것. '언어학적 전회' 이후의 아버지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 상징적 아버지, 부권적 권위로서의 아버지이다. 곧 법이고, 질서이고 언어규칙이다. 때문에 '안티오이디푸스'가 정신병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한 법과 질서, 언어규칙의 바깥으로 외출/탈주하려는 것이 안티오이디푸스의 기본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의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 욕망은 상징계의 질서에 갇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여기서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 그 세계는 상징계가 균열을 일으키거나 구멍이 뚫릴 때 언뜻언뜻 드러날 뿐이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어서, ‘주체의 원초적 현실’이자 ‘균열 없는 충만한 세계’이며 “안과 밖의 구분도, 대상과 주체의 구분도 없는” 세계다. 실재계는 때로 환각으로 때로 광기로 드러나기도 하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가 닿을 수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 모순적 대상이야말로 욕망의 궁극적 귀착점이다. 라캉의 후예인 지젝은 실재계로 대표되는 이 후기 이론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고명섭 기자)

07. 12. 15.

P.S. 라캉에 대한 지젝의 주석의 많은 부분이 실재(계)에 할애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다."라고 정의되지만 그것이 '어떤 세계'라고 규정될 수는 없다. 실재는 그저 상징계의 표상/재현이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징계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잉여가 '실재'이다.

기자는 계속해서 지젝을 환기시키고 있지만 <에크리> 해설의 저자는 특이하게도 그에 대해서 전혀 참조하지 않는다(하지만 라캉을 이해하는 데 지젝을 경유하는 것이 가장 용이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애당초 이 책을 구입했을 때 '지젝 없이 라캉 읽기'라는 페이퍼를 적으려고까기 했을 정도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곳"이라고 기자는 적었는데, 기꺼이 비유하자면 실재계는 그냥 '여성의 음부' 같은 곳이다(지젝이 어디선가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다 믿을 듯하다). 가려진 뭔가가 있지만 막상 '가리개'를 제거하는 순간 그 뭔가는 상실된 것으로 체험된다.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라는 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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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6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어디선가 지젝이 그렇게 말했다는 '확신'까지 드는데요...^^
개인적으로 Bertrand Ogilvie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은, Peter Widmer의 <욕망의 전복>과 함께, 라캉 입문을 위한 좋은 안내서라고 생각합니다. Bruce Fink의 <에크리 읽기>는 아직 채 다 읽지 못했는데, 역시나 '읽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저 모든 책들은 언제나 제게 '가닿을 수 없는 실재'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6 17:39   좋아요 0 | URL
문제는 실재가 아니라 욕망이지요.^^

람혼 2007-12-17 02:27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

vinoveri 2007-1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울단계를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가는 과정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는 듯 한데요.. 라깡은 거울단계에 상상계뿐만 아니라 상징계가 개입하는 것으로 얘기하지 않나요?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보고 그게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오인)할 때, 그것에 대해 보증자의 역할을 하는 제3자 - 주로 어머니겠지요 - 의 확인 내지 인정의 개입을 통해서 말이지요.(람혼님이 소개해주신 <욕망의 전복>에도 이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거울단계를 통해서 아이가 상상계로부터 상징계로 옮겨가게 된다'라는 식의 생각은 라깡이 국내에 소개되던 초기에 잘못 소개된 통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거울단계 이전에는 상상계밖에 없고 그 이후에 아이가 상징계에 편입된다라는 식의 생각 말이지요. (그래서 사실은 상상'계', 상징'계'라는 번역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 상징적인 것만이 있는 '세계'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요.)
그렇게 본다면, 거울단계를 거쳐 다시 외디푸스단계로 넘어간다라는 설명도 제가 보기에는 별로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라깡이 이런 식의 단계론적 설정을 했을 것 같지는 않거든요.

로쟈 2007-12-16 17:45   좋아요 0 | URL
상상적 동일시와 상징적 동일시를 구별하면 문제가 해소될 듯한데요. 그리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는 순차적인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상계 이후에 상징계가 온다는 식이 아니라 서로 매듭을 이루며 공존하는 것이죠...

vinoveri 2007-12-18 01:31   좋아요 0 | URL
거울단계에서 아이에게 일어나는 동일시는 상상적 동일시가 아니냐는 말씀으로 이해되는데요..
물론 아이가 자신의 거울이미지를 보면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이지요. 하지만, 아이가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확신(오인)하게 되는 과정에서, 어머니로 대표되는 제3자의 보증이 개입하게 되지요.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보면서 '저게 나야?'라고 묻는 (듯한) 아이에 대해서, '그래, 그게 바로 너란다.'라고 대답하는 (듯한)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 뭐, 이런 상황이 이들 3자간에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이 제3자의 시선은 소위 '정형외과적 기능'을 하게 됩니다. 즉 파편화된 채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던 이미지들이 하나로 기워져서 단일한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지요. 제3자의 개입이 없다면 아이는 사회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데 큰 장애(소위 자폐)를 겪게 되며, 그런 점에서 거울단계에서 제3자의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드리고자 했던 것은 이 과정에서 하는 제3자의 역할이 상징적인 것의 개입에 해당한다는 것이지요. (물론, 어머니가 주로 하는 역할이지만, 이 때의 개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개입하는 것이구요.) 따라서 거울단계에서 일어나는 상상적 동일시에는 이미 상징적 동일시가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지요.
(거울단계에서 개입하는 제3자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라깡의 에끄리의 거울단계논문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후기 라깡의 세미나에서 강조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출전의 차이 때문에 혼란이 가중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체적인 논지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듯 합니다.)

이거, 로쟈님의 블로그에 처음 다는 댓글이 너무 딱딱하고 까칠한 게 아닌가 해서 많이 걱정이 되네요..--; 그저 지식인들의 허브 역할을 하고 있는 로쟈님의 블로그를 빛내려는 충정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7-12-17 15:52   좋아요 0 | URL
네, 좋은 의견이십니다. 사실 아시다시피 라캉에 대한 '해석'의 문제 같고, 제가 특별한 의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저는 전공자가 아니라 독자일 뿐이라서요). 몇몇 2차문헌에 근거하여 판단할 따름입니다. 보다 정밀하게 의견을 제시(발표?)해주시면 라캉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vinoveri 2007-12-18 01:32   좋아요 0 | URL
겸손의 말씀이십니다. 블로그를 드나들면서 많은 걸 배우고 있습니다. 저야말로 그저 독자일뿐일걸요... 앞으로도 계속 좋은 글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