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세핀 베이커 - 미드나잇 인 파리

 

  작년 개봉된 영화「미드나잇 인 파리」를 영화관에서 못 본 건 아쉬운 일이었다. 어젯밤 교육방송에서 심야영화로 방영해주는 걸 봤다. 우디 앨런 식 유머를 곱씹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다. 약혼자와 파리로 떠난 소설가 ‘길’이 1920년대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 큰 흐름이다.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콕토와 헤밍웨이, 피카소와 달리, 마네와 고갱 등등 파리 거리를 누볐던 당대의 많은 예술가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영화 자체에 빠지거나 잘 알려진 예술가들을 상기하는 것도 재밌지만, 잘 몰랐던 대중 예술가를 눈 여겨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주인공 ‘길’은 술집에서 혼혈 흑인 무희를 만난다. 조세핀 베이커이다. 흰 드레스에 깃털을 휘날리는 그녀는 고국인 미국이 버렸지만 파리 사교계에서 부활한 실존 인물이다. 불우한 환경과 뉴욕에서의 인종차별 경험은 파리로 진출한 그녀에게 단단한 무기가 되었다. 날렵한 몸매, 매혹적인 표정, 깃털 같은 경쾌함, 천진난만한 분위기 등으로 그녀는 단번에 블랙아메리카 열풍의 핵심이 되었다. 새로운 것, 특히 아프리카적인 것과 재즈 등에 환호했던 파리 상류층 기호에 그녀는 멋지게 화답했다.

 

 

  파리는 그녀에게 열광했다. 여성들은 베이커처럼 피부를 그을리고 머리카락을 풍성하게 틀어 올렸다. 뉴욕에서의 상처를 기억하는 그녀는 그 열풍을 만끽했다. 대신 파리에 대한 고마움을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갚았다. 전후에는 민권 운동과 고아를 위한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75년 그녀가 죽었을 때 장례식이 프랑스 전역에 중계될 정도였다. 파리와 조세핀 베이커는 궁합이 맞았던 셈이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우디 앨런이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모든 현재는 모든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그 답은 현재에 있다, 쯤도 될 것이다.  속살거리는 그 유머에다 내 식 깨알 같은 후기를 더하련다. 진정한 자긍심은 이국적이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너그러움에서 나온다고. 따라서 파리 사람들의 문화적 오만은 열린 시각에서 온 예술적 취향이니 용서할 만하다고.

 

 

 

 

 

 

 

 

 

 

 

 

 

 

 

 

 

  2. 정의보다 지혜 - 카톡방 지상 중계하기

 

  정의는 옳지만 인심이 묻힐 수 있고, 지혜는 그를 수 있어도 사람을 구한다. 가령 소셜 네트워크 대화방에서 있을 수 있는 소란을 중계해보자. 옷 장사 하는 A가 제 하루 일과를 이렇게 보고한다. 오늘 넘 힘들었어. 자꾸만 에누리하려는 손님들 때문에 밑지고 팔다 보니 남는 게 없어.

 

 

 

이때 A를 응원할 겸 평소 원칙에 충실한 B가 나선다. 올바른 상도덕을 위해 의류정찰제가 하루 빨리 정착되어야 함을 피력한다. 그때 C가 나타나 의류정찰제만이 능사는 아니며, 정가제를 한다고 상도덕이 지켜지는 건 아니라며 반박한다. 기분이 상한 B는 자신은 A에게 한 이야기인데 왜 C가 나서서 물을 흐리냐고 재반박을 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C는 단체방에서 하는 얘기는 누구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니 당사자가 아니라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흥분을 한다. 이때 평소 방관자였던 D가 나타나 B가 틀린 말 한 건 아니니 이해하라며 슬쩍 B편을 든다. 역시 방관자였던 E도 뒤질세라 제 의견도 맘대로 못 내놓을 것 같으면 단체대화방이 왜 필요하냐고 C를 두둔한다. B는 A를 위로하려는 제 진심이 왜곡되었다며 단체방을 탈퇴한다. 결국 분란이 생기는 대화방은 없느니만 못하다고 방을 개설한 F는 단체 계정을 폭파한다. 그 다음 끼리끼리 모여 대화방을 재개설한다. 그렇다고 평화가 오나? 천만에! 그 안에서 또 새로운 분란은 지속된다. 그렇게 삶은 정반합 계속된다.

 

 

  과장되게 소셜 네트워크의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 예를 들었지만 이는 대화법에 대한 여러 시사점을 제시해준다. 특히 정치인들을 둘러싼 알레고리로는 이보다 나은 예도 없다. 그들이 흘리는 말은 보기에 따라 언제나 옳거나 항상 그르다. 옳거나 그른 그 말에 국민들은 별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다면 대화의 방식이다. 위 예에서도 보듯이 내용만 보면 그들 역시 다 옳다. 하지만 형식면에서 보면 그들 모두 그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언제나 정의를 지혜로 실천할 수 있는 타협의 방식이다.

 

 

 

3. 안네와 그 엄마

 

  내 인생 최고의 책 중의 하나는 완전 판『안네의 일기』이다. 그토록 어린 소녀가 그만치 진솔하고 통찰 있는 내면의 목소리를 가지기란 쉽지 않다. 암스테르담 여행 중 예정에도 없던 안네의 은신처를 들르게 되었을 때 누구보다 가슴이 벅차올랐던 건 말할 필요가 없다.

 

 

  안네의 일기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묘사했다거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고발하는 내용이 주가 아니다. 선전문구만 보면 그런 것이 주된 내용인 걸로 착각하기 쉬운데 시쳇말로 닥치고 읽어 봐, 라고 말하고 싶다. 한마디로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일기이다. 그런데 그게 보통 사춘기 여자애의 감수성이 아니라 몇 단계 뛰어넘는, 말하자면 감당하기 힘든 개성을 보유한 소녀의 기록이라는 데 그 매력이 있다.

 

 

  제한된 공간에서 한정된 사람과 생활할 수밖에 없던 안네는 불화의 아이콘이다. 고집불통에다 예민하며, 자기 주관적이면서 적극적인 안네는 아버지를 제외한 은신처 사람들 대부분과 부딪힌다. 그런 딸을 가장 버거워한 이는 당연 안네의 엄마였다. 은신 생활을 한 첫날부터 안네와 엄마는 긴장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썩 관계가 좋은 건 아니었다.

 

 

  모녀의 기질은 완전히 달랐다. 엄마 에디트는 겉보기에 지루해 보이는 차분함과, 모성에서 비롯된 잔걱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딸 안네는 과도할 정도로 자기표현에 능한데다, 울음과 흥분으로 제 기분을 표출하는 성격이었다. 모성의 안달과 사춘기의 예민함은 자주 충돌했다. 안네는 ‘엄마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탓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면 대단한 자제력이 필요하다. 나는 엄마의 얼굴을 때릴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안네의 엄마도 이해되고, 사춘기 안네도 공감된다. 이러한 섬세하고도 진솔한 에피소드들이 안네의 일기에는 차고 넘친다. 위선이나 거짓 감정이 배제된 영특하고 발칙한 소녀의 기록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좋은 텍스트가 되는지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강조한다. 단, 안네가 실제 내 딸이라면 버거워서 사절이다!

 

 

   

4. 귀태(鬼胎)

 

  정치판은 말(言)들의 도미노 게임장이다. 말로 흥하고 말로 망한다. 사건이 터진다. 한쪽에서 물고 늘어진다. 별 다를 바 없는 한쪽 역시 자폭의 기회는 오고야 만다. 옳다구나 싶게 기회를 포착한 다른 쪽이 재반격한다. 싸움은 필수요, 동원되는 언어는 선택 사항이다. 그때의 언어는 무너질지라도 자극적일수록 좋다. 무너뜨림의 미적 쾌감이 궁극의 목표인 도미노 게임처럼 그들은 서로 무너뜨리고 무너지는 걸 즐긴다.

 

 

  귀태 논쟁으로 한바탕 소란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일본의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귀태’이며,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를 ‘귀태 후손’이라고 비하한 야당 대변인의 말이 발단이 되었다. 청와대와 여당의 격렬한 성토에 당사자와 민주당이 사과하는 선에서 진정 국면을 맞이했다. 귀태 발언에 여론이 호의적일 리가 없다. 정치와 무관하게 인간으로서 그 말 자체를 듣는 게 불쾌하고 불편하다.

 

 

  세상엔 몰라도 되는 말이 있는데 귀태야말로 그런 경우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 또는 불구의 태아 등의 의미로 그 말이 쓰인단다. 재일학자가 쓴『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에서 인용했다는 데 우리말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다. 사전을 찾아봤다. ‘두려워하고 걱정함’ 또는 ‘나쁜 마음’이라고 되어 있다. 불길한 태생을 걱정하는 데서 오는 극심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 활용할 수 있는 낱말이다. 한데 일본에서는 더 극단적인 예로 쓰이나 보다.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는 없다. 철들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 중의 하나가 인간존엄에 관한 것이다. 개별자 고유는 모두 소중하다. 지위고하를 떠나 어느 누구도 제 태생이나 자존에 대해 위협받거나 조롱받을 이유는 없다. 비자의적 의지의 으뜸 사례인 탄생은 그 자체로써 존귀하다. 천사표 인간이든 악의 상징이든 태생 자체는 누구에게나 축복이다. 삼자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말 필요 없다. 모든 태생은 귀태(鬼胎)가 아니라 귀태(貴態)이다.

 

 

 

 

 

  

5. 투명 프롬프터

 

  얼마 전, 박대통령의 방미 외교 때 인상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미의회 연설이었다. 영어로 진행된 연설은 호불호가 엇갈렸다. 차분하고 또박또박한 어조에 감동을 받았다는 이와, 국가원수가 모국어를 버리고 굳이 외국어 연설을 할 필요가 있냐는 이들로 나뉘었다. 둘 다 옳지만 나는 전자 편이었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 영어의 본무대에서 우리 대통령이 그 나라 말로 연설을 했다고 뭐 그리 자존심이 상할 것인가.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박대통령의 발음이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일반 국민으로선 그 정도면 성실한(?) 연설을 한다 싶었다. 발음 가지고 시비 거는 이들은 반기문 유엔 총장더러 같은 시비를 거는 것만큼 이나 무의미하다. 

 

 

  내가 감동한 것은 대통령의 당당한 태도 때문이었다. 영어로 연설을 해서가 아니라 영어로 연설을 하는데도 어쩜 저리 기품 있고 부드러운 시선을 유지할까 싶었다. 의례적이라 해도 미의원들이 기립박수를 보낼 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야 그 비밀을 알았다. 연설을 돕는 투명프롬프터가 연설대 양옆에 있었던 것이다. 밑바닥에 텍스트를 놓고 빛의 반사 원리를 이용하면 투명 프롬프터에 선명한 글씨가 뜬다. 연설자의 눈높이에 맞게 양쪽에 투명 프롬프터를 설치하면 청중들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좌중을 번갈아 보듯 시선을 돌리면 감쪽같이 프롬프터에 뜬 연설문을 읽을 수 있다.

 

 

  내가 몰랐을 뿐, 투명프롬프터는 연설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문명의 이기란다. 오바마 대통령도 안철수 의원도 이것을 활용한단다. 괜히 속은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곰곰 생각하니 이런 감정 또한 허세이다. 연설은 그 내용의 진정성에 있지 그걸 완벽하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니질 않나. 연설문을 단순 낭독하는 지도자보다 연설 자체를 멋지게 하는 지도자를 원하는 청중이 있는 한 투명프롬프터의 진일보는 계속될 것이다. 달 자체가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도 무시할 수 없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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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7-17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중심을 잃지 않으시군요. 팜므 언니 님 ! 여당뿐만 아니라 야당 의원들이 내뱉는 말을 보면 막말을 참 싸가지없게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 사람은 반대편이니 무조건 나쁘다는 태도는 좀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7-17 08:46   좋아요 0 | URL
곰발님 중심을 잃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중심 따윈 없어요.ㅠ
정치를 모르니 그 풍경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자연 내가 보는 것 안에서만 머물게 되는 거지요.
골수 우파 전원책의 말에 공감해요. 신념 없는(당파성) 없는 정치판은 개판이다, 뭐 이런 논조였는데 그래서 그는 '새누리당'이란 정체성 없는 당명이야말로 코미디라 하더군요.

확실한 신념도, 이데올로기도 갖지 못한 저 같은 사람은 그저 풍경에나 밑줄을 긋고 있는 거지요.ㅠ

Shining 2013-07-17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글은 정말 좋아요, 슈퍼울트라캡숑!(ㅎㅎㅎ) 저는 글의 톤이 균질하지 못하고 논지도 왔다갔다 하는 사람인데; 팜님의 글은 소재나 주제가 바뀌어도 일정한 속도랄까 흐름이랄까 어떤 단단함이 느껴져서 좋아요. 좋군요 정말 :)

다크아이즈 2013-08-06 22:47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제가 요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어요.
어떻게 하루하루 버티는지 헬렐레 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에 몇 십 년 만에 와보는 느낌...
분발하고 싶습니다.
샤이닝님은 여전하시지요?
답글 늦어진 걸 너른 아량으로 봐주시어요^^*

페크pek0501 2013-07-1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태 발언의 신문 기사를 보고 저도 깜짝 놀랐답니다.
막말 논란을 보니 좋은 인생의 비결은 혀를 주의하는 것이라는, 탈무드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투명프롬프터, 라는 이름을 배워 갑니다. 역시 우린 좋은 시대에 살고 있군요.

좋은 하루 되시길... ^()^

다크아이즈 2013-08-06 22:50   좋아요 0 | URL
프롬프터야 널리 쓰이는지 알았지만
투명프롬프터가 나와 대중의 눈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언냐 잘 계시지요?
언능 알라딘을 재접수해야 할 텐데 제가 웬체 갈팡질팡 인생이라ㅠ
알라딘에 자주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시어요^^*

세실 2013-07-17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스 진행할때도 투명프롬프터 사용하겠죠?
소셜 네트워크는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 말만 늘어놓으면서 공허한 메아리만 듣고 있는듯 합니다.
그저 만나서 차 마시는 그런 사랑이 필요한거죠, 우리에겐!
굿 나잇~~~

다크아이즈 2013-08-06 22:51   좋아요 0 | URL
뉴스야 뭐 투명 아니고 그냥 프롬프터 써도 되지 않을까요?
화면에 비치는 건 일부분이니...
공허한 메아리인 게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아닌 경우도 많아요.
세실님과 함께하는 오공주 커뮤니티는 안 그렇잖아요. 흐흐~~
 

 

 

1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독후 단상

 

  국정원판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되었다. (시사 인 303호 부록으로도 딸려 나왔네. 사진은 302호) 앉은 자리에서 들쳐볼 수 있으니 웬 횡잰가 싶다가도 솔직한 심정은 ‘이래도 되나’이다. 기밀사항인 정상회담록마저 온 국민이 열람할 수 있다면 자료가 공개될 것을 의식해 회담에서 깊은 대화들이 오갈 수 있을까 하는 기우가 이는 것이었다.

 

 

  중편소설 분량보다 많은 대화록은 주로 노대통령이 대화를 주도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화답을 하는 분위기이다. 방문객 입장인 노대통령은 많은 의제를 쏟아내기에 바빠 보였고, 김 위원장은 회담을 의례적 행사로 보거나, 아니면 나이 탓인지 피로감 깃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원본과 국정원이 공개한 이 전문이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입맛에 맞게 약간의 윤색이 가해졌다 치더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노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나 ‘굴욕적 외교’ 운운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다만 민족자주와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욕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의적 해석의 빌미가 되고, 악의적 왜곡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대화록에 담긴 노대통령의 모든 말이 옳거나 공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원수로서 정상회담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의 경계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접대용 발언이라 해도 개성에 이어 해주까지 경제 특구로 주려고 했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수위가 더 강도 높아 보였다. 북한에서야말로 이 회의록이 공개된다면 군부나 인민들은 굴욕적 회담이라고 성토하지 않을까 싶었다.

 

 

  민감한 안보사항을 경제 논리나 평화 무드의 해법으로 바라보려 한 것은 노대통령의 과잉의욕으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이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헤드라인으로 잡은 ‘NLL 바꿔야,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는 사실상 NLL 포기 발언 맥락으로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소동이 국정원의 정치개입 국정조사 전 물 타기 전략이 아니기를 바라며 궁금한 이들은 회의록 전문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른 답이 될 것이다.

 

 

 

 

2. 이오덕 일기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방식은 한마디로 ‘쉬운 말로 쓰자’였다. 권정생 선생과 더불어 그는 ‘국민학교만 나와도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강조했다. 그의『우리글 바로쓰기』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책이다. 쉽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아야 한다, 고 일깨우는 그 책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쉬운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문장에서조차 우리말을 고집해 문장이 어색해지는 선생의 방식을 제외하면 나는 여전히 선생의 글쓰기 방식을 존경하고 따르려 하고 있다.

 

 

  올해로 선생이 떠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그를 기리는 지인과 출판계의 뜻으로 『이오덕 일기』가 출간되었다. 다섯 권으로 추려진 이 책이 나오기까지 2년 8개월이 걸렸다. 앞 두 권은 교사로 살았던 24년 세월을, 뒤쪽 두 권은 사회활동을 하던 13년의 기록을 담았다. 마지막 권에는 충주 무너미 마을의 마지막 5년 생활이 실렸다.

 

 

  그 중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 장면이 인상 깊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권정생 선생은 아프다는 핑계로 시상식에 못 간다고 했다. 여비가 없을 것으로 짐작한 이오덕 선생은 당신이 갖고 있던 원고지와 돈을 두고 나온다. 두 분의 우정이 오래 지속된 계기가 된 만남이었다. 이오덕 선생의 발품은 가난한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전체 일기가 아닌 부분만 읽어도 선생이 뿌린 생각의 씨앗이 얼마나 영글고 올곧은지 알겠다. 어린이와 노동자와 농민 등 가장 낮은 이들과 호흡한 선생의 숨결이 오롯이 살아 있다. 교육과 글쓰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회 혁신으로까지 신념을 확대해간 선생의 노고가 일기 안에서 되살아난다.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 몸과 맘을 연 선생의 한살이가 이 일기집으로 인해 더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3. 내 방에 잠들 착한 사람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착한 사람을 재웠던 게 언제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밤에 나는 창문을 닫고 물을 끓이고 손으로 이부자리에 묻은 머리칼을 떼어냈을 것이다.’ 김도언의『불안의 황홀』중 어느 오월에 쓴 일기 전문(全文)이다.

 

 

  오래토록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런 기억을 떠올린지 오래 되었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왜 이런 단상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탄식이 지나갔다. 과외로 연명하던 청춘 시절, 낮잠 자고 음악 듣고 글쓰기를 해도 시간은 넘쳤다. 그렇게 남는 시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모여 놀았다. 착하지만 뜻대로 안 되었던 우리는 좁은 골방에 틀어 앉아 청춘을 둘러싼 제 환경을 성토했다.

 

 

  아부지 눈치를 보느라 자주 내 방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나는 곡예를 즐기듯 그 시간을 즐겼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호떡과 설탕 듬뿍 넣은 커피를 앞에 두고 에어 서플라이나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친구를 위해 간이침대 밑 먼지를 훔치고 창문을 여몄으며, 물을 끓이고 홑이불의 머리칼을 떼어냈다. 그렇게 음습한 수다의 환희로 청춘의 정점을 찍었다. 불안한 미래였기에 뭐든지 불온하게만 받아들였고, 부족한 현실이었기에 무조건 불편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불안도 결핍도 덜한 나날이 되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더 이상 친구를 위해 요령부득의 호떡을 굽느라 부산을 떨지도 않고, 설탕 듬뿍 넣은 촌스런 커피를 내놓지도 않는다. 문자 한 번이면 오리구이집이나 물회집에서 편리하게 만날 수 있다. 불안의 황홀 대신 편안의 불손이 유머로 먹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내 방에 잠든 착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는 만큼의 감칠맛 나는 입맛을 기억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오늘 하루쯤은 마음으로나마 오랜 친구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도 좋겠다. 어딘가 묵어있을 에어 서플라이의 '올 아웃 오브 러브', '당신이 사랑한 사람', '밤이 깊을수록' 등을 들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

 

 

 

 

 

 

 

 

 

 

 

 

 

 

 

4. 사모님이 사는 법

 

  어제 오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모 중견 기업이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지난 주말 방영된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와 무관하지 않다. 모 살인사건 주모자의 파렴치한 후일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주모자가 그 기업 회장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흥분한 네티즌들이 그 회사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관련 회사 제품의 불매운동까지 벌이는 모양이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나 역시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전해주는 여러 정황들에 그간 관심을 뒀었다. 이번 방송에서는 ‘사모님’인 가해자의 병원 특실 생활 고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부재에 대한 강력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관한 우리들의 자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돈 있고 배경 있으면 죄 없는 사람 죽여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우리 사회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형집행정지라는 합법적(?) 근거로 병원 특실에서 나머지 형기를 보낼 수도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방송은 나아가 사법 적용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고발한다. 한마디로 그들만의 세계란다. 같은 법이지만 그들의 법 집행은 돈과 권력에 좌지우지된다. 일반 서민들과 특수층을 대하는 그들의 법 해석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 검은 고리에 연결된 인물들은 한결 같이 사회지도층이다. 의사, 검사, 변호사, 경찰 등으로 이뤄진 그들에게 ‘가진 사모님’을 위한 ‘형집행정지’ 정도는 너무 쉬운 심부름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구린 돈이 빠질 리 없다. 의사는 수상쩍은 진단서를 발급하고, 검사는 당당하게 형의 정지를 허가하고, 변호사는 뻔뻔하게 형 집행 신청을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돈이다. 당연히 가해자에게 그 심부름 값은 껌값에 지나지 않는다.

 

 

 

 

돈으로 제 안위를 사고도 활개 치는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안전 불감증 못지않게 양심불감증도 우리 사회를 좀 먹는 불쾌의 정서이다. 언제까지 법보다 돈, 돈보다 권력인 사회를 인정하라고 자기체면을 걸 것인가. 그들 지도층들에게 바라는 서민적 정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적 덕목이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돈이 그보다 훨씬 좋은 이유되시겠다!

 

 

 

 

5. 백석 시인과 젊은 화가

 

  누군가를 몹시 좋아하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들다. 김영진이란 젊은 화가이자 저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쓴『백석 평전』은 우연이자 운명적으로 내게 왔다. 인터넷서점에서 알게 된 전국구 독서친구들이 있다. 일명 오공주파인 우리 다섯은 비정기적으로 만나 우의를 다진다. 그 중 책 나누기 이벤트도 있는데, 이번 모임에서 내 손에 온 책 중에 가장 눈에 띤 게 이 책이었다.

 

 

  일반적으로 평전이라면 객관성은 기본으로 깔린 채 저자 특유의 해설이 붙는데 이 책은 아무리 봐도 일방적 백석 헌사에 가깝다. 검증된 자료로 시인과 시를 분석을 한 게 아니라 주관적 감정적 판단으로 백석 시인을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도 저자의 노고와 진정성이 배어나와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책 제목처럼 평전이라 불리기는 뭣하고 백석에 관한 저자의 모든 관심 정도로 읽히면 무방하겠다.

 

 

  젊은 화가이자 저자인 김영진은 어릴 적부터 병약해 5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러던 그가 백석 시를 알게 되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그에게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근원을 아는 것이었다. 저자에게 그것은 다름 아닌 백석이었다. 당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한 시인의 시를 읽고 또 읽어 심장과 영혼에 새겼다.

 

 

  저자는 시인이 사용한 언어를 알게 되고, 시인의 삶을 유추하게 되고, 당시 시대 상황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시는 저자의 몸과 마음에 체화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어렵다. 사물이나 사람을 좋아하면 무작정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하거나 따지는 건 고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책은 백석평전이란 제목은 붙이기 곤란하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쓸쓸한 시인의 삶이 화가의 가슴에 들어가 한 편의 글이란 그림으로 완성된 것만으로도 저자는 뿌듯해 해도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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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7-0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만 민족자주와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욕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의적 해석의 빌미가 되고, 악의적 왜곡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 동감이에요. 독해력이 없는 것인지 없는 척하는 것인지, 정말 답답합니다.

권정생 선생의 책에서도 이오덕 선생과의 미담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오래 전 독서지도 공부하면서 이오덕 선생의 책과 글쓰기를 읽은 기억들이 새록새록. 쉬운 말과 글고 바르게 쓰기, 쉽지 않지도 않을 듯한데 늘 염두에 두어야겠어요. 게을러서 훈련이 부족해 ㅠ

김영진 화가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에 대한 이야기, 반가워요^^
그리고 음습한 골방에서 청춘을 피워댔던 우리들의 그 시간도요.^^

팜므언니, 오늘도 좋은 하루 행복한 하루!!! 되세요^^

팜므느와르 2013-07-07 13:50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쉽게 쓰기도 훈련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그래서 더 어렵고...
프레님은 지금도 잘 하고 계시니 계속 알라딘에 머물기만 하면 되옵니다.^^*

김영진 화가의 백석 평전은 프레님이 주신 걸로 기억해요.
그날 그 책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잖아요. 보물 건진 듯해서.
내용이 화가의 백석 개인에 대한 사변에 머물러 조금 안타까웠던 게 흠이긴 했어요.
그래도 이 책 보면 프레님 계속 떠올릴 거야요.^^*
오늘은 일요일, 책 읽고 글쓰고 군것질하기 좋은 오후 크~~~

곰곰생각하는발 2013-07-0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언니 님 ! ㅎㅎㅎㅎㅎ. 전 서상기나 애들이 하도 자신있게 말해서 노무현 특유의 스타일' 때문에 오해가 있을 수 있겠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딜 봐도 포기나 굴육이나 그런 것 자체가 없었다는 겁니다. 황당하더군요. 오히려 김정일은 회의'가 따분한 것 같았고, 노무현은 하나라도 건져서 뭐 좀 만들었으면 하는 늬앙스였습니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과연 이게 공개되어야 할 것들인가요 ? 정말 기가 차고 귀가 막히고 기가 서립니다. 이건 뭐.... 이 나라가 머 어떻게 된 것인가... 남들은 창세기 동안 한번 있을까 말까한 엽기를 1년에 한번씩 국가가 자행한 만행을 그대로 겪어야 하니..... 민주주의가 이런 식으로 망가질 줄은 사실 꿈에도 몰랐습니다.

팜므느와르 2013-07-07 13:5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곰발님께 당연히 언니로 불리면 좋지요.
잘은 모르지만 첫째 누님뻘은 될 것 같은데, 실은 나이를 잊고 글 친구를 청하는 바이옵니다.ㅋ
근데 불안한 것이 머잖아 곰발님은 문학계를 평정할 것이고, 그렇게 뒤안으로 밀려난 저 같은 사람은 지금 님과 많은 교류를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 같아요.
그러기 전에 부지런히 눈도장 찍겠습니다. 왜냐면 사람은 변하지 않지만 환경이 사람을 변하게 하거든요. 제발 배신 당해도 좋으니 곰발님의 글발이 먹히는 날이 오기를....

팜므느와르 2013-07-07 13:5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정상회담 관련은 딱 한 마디 하고 싶어요.

'문헌'부터 '상기'하는 습관을 갖자, 뭐 이 정도 ㅋ

2013-07-06 09: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팜므느와르 2013-07-07 14:0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속삭인님, 로긴이 제대로 안 되어 이렇게 답 달아요.ㅠ
알라딘에서 보배인 님 글을 읽는 재미는 웃음, 숙연, 공감, 진솔 그 자체이지요.
같은 책을 공유한다는 비밀 같은 기쁨은 마치 말없이 통하는 유쾌한 작당 쯤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기분 짱입니다.
님도 휴일 잘 보내시어요^^*

Jeanne_Hebuterne 2013-07-1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종 미국을 떠나 파리에서 영광을 누렸다던 이들의 흔적은 참 놀라워요.
천진난만함으로 파리를 사로잡았다던 조세핀 베이커의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를 궁금해지게 만드는 페이퍼!
유럽 사진 더 뿌려주세요! 히힛

덧-와, 전 더위에 놀고만 있었는데 팜므 느와르님, 정말 부지런하셔요!!!

다크아이즈 2013-08-06 22:57   좋아요 0 | URL
조세핀 베이커 식 삶도 확실히 매력 있지요?
내 살고 싶은 대로 못 사는 가장 일순위의 땅이 대한민국이 아닐까 싶어요.
(특히 여성에겐...)
왜 미쿡 살던 사람이 유럽 가면 날개를 달까요?
먼 곳에서 보기엔 거기나 거기나 다 자유분방해 보이는데...

부지런하기로야 에뷔테른 윈이지요. 저야 늘 갈팡질팡, 지멋대로...
 

 

 

 <유럽 여행 단상기>

 

 

 

 

 

 

 

 

 

 

 

 

 

 

 

 

 

 

 

1. 유럽에서의 공중화장실 - 사진은 창밖으로 본 베네치아

 

 

  2주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귀갓길 택시 안, 짐 꾸러미만으로도 먼 길 떠났다 온 것을 알아 본 기사분이 갑자기 흥분하신다. 외국여행은 할 게 못 된단다. 특히 유럽 여행이 그런데, 화장실 갈 때도 돈 내고, 호텔 나올 때도 팁 줘야 하고, 물마저 사먹어야 한다더라며 결론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데가 없단다.

 

 

  ‘우리나라 좋을 씨고’, ‘내 집이 최고지’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끔 길 떠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유럽의 화장실 문화나 팁 예절, 공짜가 아닌 음용수에 대해 딱히 불만이 있는 쪽은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 않는가. 다만 공중 화장실에 대한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유료인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런 화장실조차 드물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식 화장실 문화에 길들여진 여행객으로서는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매장에 딸린 화장실 입구에는 칸막이 봉까지 설치해 놓았다. 무표정한 검표원이 동전 투입구 앞에 서서 물건 살 때 화장실 사용료만큼 할인해주는 쿠폰을 발행해 준다.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은데 왜 저런 시스템을 고집할까 싶다. 그들 조상들의 위대한 축조물 앞에서 연신 감탄하다가도 미로 속 같은 무료 화장실을 찾아 헤맬 때나, 푼돈을 낚아채 가는 유료 화장실을 보면서, 그들 문화 스케일의 양극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더럽힌 자, 품위 있게 그 비용을 지불할 지어다. 그런 마인드라면 화장실 개수도 늘이고 그 품격이라도 높여야 하지 않는가. 화장실 관리 명목, 노숙자 접근 금지라는 이유 등으로 유료 화장실을 고집한다지만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화장실이 그리 깨끗한 것도 아닌데다, 공중화장실마저 노숙자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디서 볼일을 보나? 이참에 선진화된 우리 화장실 문화를 유럽에다 전수하면 어떨까. 아니면 우리도 관광대국이 되어 느긋하게 화장실 앞에서 돈 내놔라고,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나을까. 아서라, 생각만 해도 멋쩍고 볼썽사납구나.

 

 

 

 

 

  

  2. 제라늄이 있는 창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여행은 반쪽짜리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그들 삶 안에서 부대껴봐야 여행의 참맛을 알 수 있다. 바람결에 제 흰 뒤태를 맘껏 까불던 은사시나뭇잎의 당당함, 그 아래 푸르거나 흙빛으로 휘돌던 냇물의 도저함, 늦봄의 아쉬움을 달래며 만개하던 아카시아의 친근함, 그 뒤에 묻어나는 삶의 실체를 호흡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드넓기만 한 평원은 고요를 지나 적막하기만 했고, 문 닫힌 대문 안 울타리는 상상으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연에서 경험하지 못한 간접 체험은 사람을 대하면서 조금 할 수 있었다. 곤돌라 내부가 더러워질까 예민해지던 뱃사공의 시선, 타성에 젖은 노랫가락으로 제 피곤을 연주하던 악사들의 낯빛, 휴지 하나 버리자는 데도 손사래 치던 점원의 이맛살. 작은 관찰만으로도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겹고 피로한 것인지 알 것 같다.

 

 

  그들 목가적 원경의 평화와 위대한 축조물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무던히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평화와 위용은 껍데기일 수도 있다. 견문의 대상을 그들 삶의 현장으로 치환한다면 어떨 것인가. 원경의 평화도 삶 안에서는 곤고함이 도드라질 것이고, 건축물의 위대함도 노동 현장이 되면 신산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원래 멀리서 보면 청맹과니 평화요, 가까이서 보면 천리안 전쟁터 같은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니.

 

 

  그 신산하고 지리멸렬한 것들로부터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작은 여유를 찾는다. 창가의 제라늄 화분이 그 좋은 예가 될까. 유럽의 창밖 베란다마다 붉은 제라늄이 지천이다. 춥지 않은 날씨 덕에 오래 꽃을 볼 수 있는데다, 잎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은 해충 퇴치에도 도움이 된단다. 관상용 꽃으로는 그만이다. 제라늄의 잔영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소박한 데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 심성의 공통점 때문이리라. 굳은 결의 또는 그대가 있어 행복이네 등의 꽃말을 지닌 제라늄이 핀 창가는 한동안 내 안에서 쉬 떠나지 못할 것이다.

 

 

 

 

3. 우산소나무와 사이프러스 - 타자를 안다는 것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 ‘번지’라는, 내가 보기에 무척 예쁜(?)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우스갯소리를 붙이자면 그의 자는 자지(子遲)란다.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학식이 높았던 이는 아니었으리라. 총명하고 똑똑한 제자는 아니어서 엉뚱한 질문, 예컨대 채소 가꾸는 법 따위를 물어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듣곤 했다. 영민함과 재치와는 거리가 멀었겠지만 순박함과 성실함으로 공자를 보필한 제자였을 것이다.

 

 

  그의 관심 분야는 앎(知)과 어짊(仁)에 관한 것이었다. 번지가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했다. ‘어짊이란 애인(愛人)이고, 앎이란 지인(知人)이다.’라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안연에게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요, 중궁에게는 남에게 원치 않은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 사마우에게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라 답할 만큼 그때그때 달랐다. 하지만 가만 보면 공자의 여러 답변은 결국 한 가지였다. 다름 아닌 ‘타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흔히 만나는 두 나무가 사이프러스와 우산소나무이다. 전자는 밑이 넓다가 위로 솟구칠수록 뾰족한 긴 삼각형 모양이고, 후자는 나무둥치가 뻗어가다 윗부분 잎맥에 이를수록 핵 분열하는 것처럼 둥글게 퍼지는 형태이다. 각각은 직선과 곡선, 첨탑과 돔, 뾰족함과 둥글함, 자제와 허용 등의 이미지를 풍긴다. 한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나무가 연출하는 거리의 풍광이야말로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아가 그 다른 사람마저 밑둥치와 잎맥이 지닌 성질은 다를 수 있다. 다변적인 인간의 성정을 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자마다 다른 답변을 줄 수 있었다. 사람 따라 달랐던 공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숨은 가르침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인간 보편성에 대한 균질하고도 다양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4. 함께라는 말  - 사진은 브뤼셀 그랑 광장의 커플

 

  잘잘한 해프닝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이다. 단체여행에서의 수위 높지 않은 실수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여행의 잔재미를 선사해준다. 겪는 당사자로서는 아찔하고 당황할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마저 좋은 추억담이 되어준다.

 

 

  일찍 잠에서 깼다. 말로만 듣던 파리 시내 관광, 그 중 에펠탑과 센느강을 볼 수 있다는 설렘에 마음은 절로 달떴다. 외곽의 숙소를 떠나 버스는 시내로 달렸다. 한참 가고 있는데 전화를 받는 가이드의 얼굴빛이 심상찮다. 두 명의 일행을 숙소에 둔 채 신나게 달려왔던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설마 자신들을 두고 떠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 초기 여정이라 여행객들끼리 통성명조차 없어서 서로를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인원 체크는 당연히 가이드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뿔싸, 두고 온 멤버는 전날 밤 내게 자신들의 곁잠자리를 내어준 그분들이란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가이드보다 내가 더 미안해졌다. 주변을 돌아볼 생각 없이 나만의 여행에만 몰두해있던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일었다. 버스는 이미 삼십 분 이상을 달려왔다. 운전대를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없이 그들은 택시를 타고 뒤따라 와야만 했다. 에펠탑 광장에서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잠시의 이별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괜히 민망해졌다. 섬세한 마음자리까지 이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했다. 둘이였다 해도 낯선 이국의 택시 안에서 그들은 얼마나 불안에 떨며 노심초사했을 것인가. 함께 하는 여행은 서로 챙기고 다시없을 위안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깨치게 해주는 해프닝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들이었어?’ 라고 안전지대에 당도했음의 여유를 귀여운 눈 흘김으로 대신하던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랬다. 누가 파리까지 와서 택시 일주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겠어요? 어느 누구도 쉬 경험하지 못할 파리의 추억을 그대들은 간직한 걸요.

 

 

 

 

 

5.젊은 어깨동무 - 사진은 베드로 성당 근처 피로 푸는 커플 : 이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오, 삶이여. 삶 그것은 바깥에 있다는 것 / 활활 타는 불꽃 속의 나 / 나를 아는 자 아무도 없다’ 임종 때 남겼다는 릴케의 이 시구는 여행의 목적에도 맞춤하다. 왜 사람들은 저마다 떠나기를 꿈꾸는 것일까. 왜 누군가는 기어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마는 것일까. 삶이란 내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바깥 어딘가로 향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 밖을 넘보는 욕망,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활활 타는 불꽃, 그 정념의 뿌리를 찾아 우리는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청춘인 여행객 셋. 둘은 쌍둥이 자매였고, 하나는 우연히 포항에서 같이 출발한 아가씨였다. 셋 다 직장 생활을 하는 커리어우먼이었는데 휴가를 내고 여행에 동참한 경우였다. 사회생활에서 터득한 지혜 덕이었을까.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하나같이 성숙하고 사려 깊은 삼인방이었다. 흔히 기성세대들이 우려하는 젊은이 특유의 철없음도 없었고, 혼자만 잘났다는 이기심과 무관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온다.

 

 

  카드를 분실했다고 울먹거리다가도 위로의 말에 해맑게 웃던 모습, 약속 장소를 넘겨짚는 바람에 한참 숨바꼭질을 했을 때, 기다리던 우리는 그마저 소소한 재미로 생각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진심으로 미안해하던 모습, 귀찮을 법한데도 티내지 않고 환한 미소로 사진기 셔터를 눌러주던 밝은 심성 등 그들이 뿜은 매혹적인 아우라 덕에 여행은 한층 즐거웠다. 두고 온 걱정거리가 많은 주부들에게는 2주의 여행 기간이 적당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그들로선 못내 아쉽기만 하다고 했다.

 

 

  바깥의 삶을 내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데는 젊음, 그것도 어깨동무한 젊음보다 나은 게 없다. 여행이란 꿈꿀수록 이루기 쉽고, 덜 심사숙고할수록 기회가 온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한시라도 젊었을 때 경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자. 내 안에 머문 나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이 되도록.

 

 

 

 

 6. 시청박(視聽搏)의 여행 - 사진은 암스테르담 담 광장

 

  몇 박 며칠, 어디를 갔다 왔어? 해외여행자에게 행하는 가장 의례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그러면 대개 여행자는 이렇게 답한다. 13박으로 영국을 비롯한 9개국을 갔다 왔어, 라고. 꼬박 이틀은 비행기에서 보내고, 하루에 한 도시 겨우 점찍듯 돌아봤으면서도 여행자는 짐짓 자족에 찬 표정까지 지어보이는 것이다. 어차피 묻는 이나 답하는 이 모두 그 편이 가장 부담 없고 안전한 화젯거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고 답하기엔 여행사의 기획품인 패키지여행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도덕경> 14장에 ‘시지불견(視之不見) 청지불문(廳之不聞) 박지부득(搏之不得)’이란 말이 나온다. 도(道)를 설명하는 명문이지만 ‘제대로 듣고 보고 겪는 것의 어려움’을 비유할 때 쓰이는 어구이기도 하다. 보아도 제대로 못 보는 것, 들어도 제대로 못 듣는 것, 겪어도 제대로 겪지 못하는 것은 도뿐만 아니라 여행에도 적용된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곳을 휘돌았을 때 그것은 ‘시청박’에 머문 것이지 ‘견문득’에 이른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비행기 타고 차타고, 창밖 풍광을 보다가 내려, 일견 비슷해 보이는 건축물과 거리를 눈에 담기 무섭게 빛의 속도로 사진 찍고 밥 먹고, 다음 장소로 옮겨 가는 것 이것이 여행의 일반적 과정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필요할지도 모를 자발적 의사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뭔가를 깊이 새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패키지여행의 한계였다.

 

 

  하지만 합리적인(?) 비용만큼 합당한 결과를 얻는 것이니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이국의 문 닫힌 여염집안의 티타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에서의 농사꾼의 망중한, 마을을 흐르던 푸르거나 흙빛 시냇물의 감촉 등을 전혀 맛보지 못했다. 위대한 건조물의 껍데기를 배경으로 열심히 인증샷을 눌렀을 뿐 그들 삶 자체를 들여다 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하물며 그토록 날 좋은 이국의 밤하늘에 뜬 별 한 번 쳐다볼 여유마저 갖지 못했다.

 

 

  대충 듣고 겪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고 듣고 겪지 않은 것과 같다. 주마간산식 여행은 견문득과는 한참 멀다. 하지만 시청박에 머문 여행 또한 여행이 아닌 것은 아니니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 위안을 삼아야겠다. 그렇다고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국경을 넘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바람결에 제 뒤태를 까불던 은사시나뭇잎들의 반짝임, 그 밑을 흐르는 푸르거나 흙빛 냇물의 도저함, 늦봄의 아쉬움을 달래던 아카시아 물결의 친근함, 가없는 의연함의 향연인 푸른 지평선, 강언덕을 낀 목가적 풍경의 마을들, 그 안에서 묻어나올 신산한 삶의 냄새들을 상상하는 일, 잠시 몽상가의 센티멘털에 빠졌다가도 두고 온 식구들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일, 야윈 얼굴에 쾡한 눈동자를 한 지친 여행객이 되어 보는 일 등 조화와 부조화를 오가던 크고 작은 행보들은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흥이었다.

 

 

  도덕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로, 듣자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로 정의하고 있다. 이희미夷希微)는 도가 그러하듯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실체가 아니다. 실체 없고 닿을 수 없는 한 지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바람을 맞기 위해 길 떠나보는 일, 견문득을 거쳐 이희미를 이해하는 과정 그것이 여행을 하는 궁극의 이유가 아닌지 모르겠다. 실체 없는 도에 이르듯 자아 없는 자아에 이르는 끝없는 과정 그것을 여행이라 부르겠다.

 

 

 

 

 

 

 

 

 

 7. 힌트는 짐 - 사진은 브뤼셀 그랑 광장 비주얼 넘치는 커플

 

  이십 대 초반 동아리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험한 산을 며칠에 걸쳐 종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인 등반 채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뜬 나머지 이것저것 꾸러미만 늘렸다. 이틀째였던가. 급경사인 등산로 앞에서 나를 비롯한 여학생 몇은 그만 울음보가 터졌다. 체력은 바닥인데 무거운 배낭마저 어깨를 짓누르니 설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배웅 나왔다가 엉겁결에 뾰족 구두 차림으로 합류한 후배조차 의연한 모습이었다.

 

 

  너그러운 남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주량도 모른 채 마신 한 잔 소주에 취해 다음날에야 깨어났던 사건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괴와 민폐를 불렀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정글의 법칙’ 같은 다큐에서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마구 존경심이 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 자신을 알자’는 말을 자주 새기게 되었다.

 

 

  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테랑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하다는 여행전문가의 충고는 내 경우 옳았다. 그 옛날 지리산 종주에서 겪었던 낭패감을 떠올리며 (짐을) 줄이고 또 줄이라는 그 말을 무조건 신봉했다. 최대한 가벼운 짐을 꾸렸다. 얼마나 줄였는지 공간이 남아돌아 가방을 움직이면 덜컥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면 가벼운 짐 싸기만 옳은가. 그럴 리가! 때에 따라 무거운 짐은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가셔하면서도 근시와 돋보기용 두 개의 무거운 안경을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저격수는 대통령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하지만 총알이 주머니 속 강철 안경집에 굴절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짐이 무겁다고 느끼는 자는 덜고, 그 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챙겨서 떠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전세 아니면 월세, 선택의 연속이니까.

 

 

 

 

8.문화의 방식 - 세느 강변의 청춘 :달리는 배 안이라 흔들렸지만 알리고 싶었지, 저 젊음

 

  누구나 제 눈으로 타자와 풍경을 읽는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여행의 감흥이 다른 이유이다. 유럽 여행 중 가장 큰 정서적 충격은 센느 강변의 젊음들이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강변 풍경은 인산인해이다. 평일 저녁인데도 둔덕이나 보도마다 몰려나온 청춘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인구 밀집형 도시가 아닌 파리에서 이토록 많은 청소년들이 강변으로 쏟아져 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다니. 서머타임 기간이라 해가 늦게 져 시간이 많은 그들이라 해도, 우리식 문화에 길들여진 나에겐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 청소년들은 평일 저녁, 강변에 떼로 몰려나올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대학입시에 밤 시간을 저당 잡힌 지 오래다. 설사 자유가 주어져도 그들은 강변에서의 수다 삼매경은 택하지 않는다. 피시방이나 노래방 등 폐쇄적인 공간을 선호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러닝맨이나 개그콘서트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것이다. 통째의 젊음이 강변을 점령해 저들만의 소통으로 낭만을 즐기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최첨단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서 그럴까. 스마트폰만 죽어라 들여다보는 청소년들도 거의 없다.

 

 

  세대는 다르지만 문화적 관습은 대를 잇는다. 수다 문화, 고상하게 말해 토론 문화가 발달되다 보니 대를 이어 그게 당연히 학습된 걸까. 흔히 프랑스를 수학과 철학의 나라라고 한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도 수학과 철학에 가산점을 줄 정도이다. 답 자체보다 답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이다 보니 모여서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런 모양이다. 주입식 사고와 오지선다형 학습에 익숙한 우리의 청소년 상황이 떠올라 괜히 심란해지는 것이었다.

 

 

  고통 없고 방황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밤물결을 일렁이는 바람 앞에 제 청춘을 부려놓을 여유가 있는 것과 그 바람의 존재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청춘은 다르지 않을까. 문화적 관습으로만 그들의 낭만성을 치부하기엔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보너스 - 스페인에서 온 총각과 나 : 총각이 안 돌아본 건 컨셉이지

             절대 내가 못생겨서가 아님! (절규 버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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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7-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긴 글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었어요. 어느 부분엔 밑줄을 긋고 싶었답니다.
문장이 좋군요. 내용을 감상하다가 문장력을 감상하다가 그러면서 읽었어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 유익한 여행이었을 듯해요.

질문) 사람들의 사진을 찍을 때 그들의 허락을 받으셨나요?
그래야 될 것 같아서요. ^^

다크아이즈 2013-07-05 09:07   좋아요 0 | URL
길어 보여도 단상이라 금세 읽힐 거라 생각했어요.
밑줄은 페크 언냐 글에 그을 게 많지요. 언냐도 그걸 더 잘 아실 텐데 ㅋ

사진은 당근 허락 받지 않은 파파라치 짓이에요.
찍는다는 걸 알면서도 별 개의치 않았어요. 멀리서 한 짓이니.
글고 될 수 있음 뒷모습 찍었지요. 여행 컨셉이 유럽 연인의 뒷모습이었으니^^*

프레이야 2013-07-0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뚫어져라 한 자 한 자 마음을 느끼며 읽어내려갔어요.
끄덕끄덕 공감하고 동감하고 웃고 즐기며 ^^
근데 마지막 사진 코멘트에서 그만 빵~~~ ㅎㅎㅎ
스페인 청년이랑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간 게 어디에요?!!! ^~*
추억의 한 장 한 장, 두고두고 행복하실 듯해요.
패키지 여행의 한계는 있었겠지만 언니도 말씀하셨듯 뭐든 내가 지불한 만큼의 소득이
있는 법이니 그만큼도 좋지요^^

다크아이즈 2013-07-05 09:18   좋아요 0 | URL
공감할 게 한둘만 있어도 만족이요.
프레님이 갔다 오심 엄청 섬세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기대할게요.

스페인 총각 넘 수줍어하드라구요.
그게 더 귀여웠어요.
지불한만큼의 대가, 꼭 그 만큼의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2013-07-04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5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7-0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 참 좋군요. 인문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앎이란 단어와 어짊'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형태가 비슷하네요....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앎 = 어짊'... 묘하게 닮았어요.
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맞습니다. 약장사나 사기꾼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목소리를 높이지요. 믿숩니까 ? 한마디로 대통령이 된 사람도 그렇고 말이죠..

다크아이즈 2013-07-05 09:21   좋아요 0 | URL
곰발님 많이 아는 것과 어짊은 거리가 멀지만
안다는 것과 어짊은 진짜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어짊을 향해 나아가는 게 진정한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안다는 건 한참 멀었고, 힘들다는 생각...

라로 2013-07-0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도 유럽 갔을 때 화장실 좀 치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만 급한 상황이 있었어서 잘 넘어갔더랬어요,,,,그 옛날 일이 언니 글 읽고 다시 떠오르네요,,,ㅋㅋㅋㅋ

2.이 글을 보면 언니가 참 멋진 분이라는 것이 더 잘 느껴져요,,,왜인지 설명은 만나서,,,ㅋ

3.번지, 자지,,,아 웃겨~~~~~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는 언니의 표현도 좋아요,,,그 유연성 때문에 여전히 공자가 추앙 받는 것 아닐까요???

4.그런 일이 있으셨군요,,,단체 여행인데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네요,,,언니가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 언니는 참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천성이신 것 같아요~~~. 언니의 양반댁 규수 같은 몸가짐이 다시 떠올라요~~~~.^^

5."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한시라도 젊었을 때 경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자. 내 안에 머문 나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이 되도록." 이 글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특히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저에게 주시는 충고 같아요~~~.^^

6.이 글은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주역 게사 강의]와도 많이 겹치네요,,,언니는 아는 게 참 많으셔,,,가만 보면!!!

7.어제 본 영화가 [화이트 하우스 다운]이라는 영화였는데 거기서 대통령인 제임스 소이어는 아내가 취임식 때 선물로 준 링컨의 시계를 늘 안주머니에 넣고 다녀요,,그런데 악당이 쏜 총에 맞았는데 그 시계에 총알이 박혀서 살아나게 되는데 거기서 소이어는 이렇게 말해요,,"링컨이 나 대신 두번째로 총을 맞았다."고요. 어쩌면 이 영화 그 아이디어를 루즈벨트 대통령의 일화에서 가져왔나봐요~~~.

8. 마지막 사진 멋져요!!! 일부러 흔들리게 찍은 것 같아요~~~.ㅎㅎㅎㅎ
저는 한국이 참 좋지만 언니가 지적하신 문제가 제가 떠나는 이유 중 하나에요,,우리 아이들은 바람앞에서도 여유를 갖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요,,,

9. 스페인청년과는 컨셉이셨던 거에요!!!!ㅎㅎㅎㅎ 언니표 유머 귀여워요~~~~.ㅋ

언니의 격조있는 글은 어떤 주제이건 참 멋져요!!!!^^

다크아이즈 2013-07-0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아님 댓글달기 클릭이 안 되어요. 몇 번 시도해도ㅠ
아마 시아님의 정성 깃든 의견이 넘쳐서 갸들이 소화를 못하나 봐요. ㅋ
저 감동 먹었잖아요. 글 읽기는 쉬워도 이렇게 오래 시간을 투자해 용기를 주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나마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고 계시는 중일텐데...

화이트 하우스 다운 그 영화의 에피소드는 확실히 루즈벨트 일화를 차용한 듯. 아님 루즈벨트도 신화 만든다고 주변에서 그런 에피소드를 조작했을 수도 ㅋ

여행은 재면 못 떠나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계획을 덜 할수록 빨리 떠날 수 있는 게 여행이에요.
계획해서 좋은 건 이 세상에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뭐든지 저질러서 얻으면 다행, 밑져야 본 전인 거죠, 뭐.
단, 배우자 고를 때는 계획은 아니더라도 무조건 저지르면 안 되지롱~~
뭔 개소리여~~ 휘리릭 시아님^^*
 

 

 

  

   따뜻한 바닥잠

 

 

  길 떠나면 뜻 하지 않은 사건 하나쯤은 생겨줘야 제격이다. 여행담은 평범하지 않을수록 오래 기억되고, 그 기억의 갈래들은 깨어지는 삶의 리듬에 윤활유가 되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고, 심하게 로망에 젖었던 파리에 대한 첫인상은 실망감이었다. 대책 없이 자유로운 도시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도로에 흩어진 각종 비닐봉지, 휴지, 꽁초 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깨끗하고 단정했던 런던 거리와 자꾸만 비교되는 것이었다. 겨우 한 번 스친 눈썰미로 이른 실망에 닿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내게 파리의 첫인상은 기대 이하였다.

 

  그에 대한 파리의 보복이었을까. 도시 외곽 호텔에 짐을 풀었다. 잠시 밖에 나오면서 카드키를 방안에 둔 채 문을 닫아 버렸다. 자정 즈음이라 호텔직원들은 퇴근했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꼼짝없이 한뎃잠을 자야 할 신세였다. 우리 일행을 운전해주던 버스기사 아저씨 두 분도 나처럼 카드키를 방안에 두고 나왔단다.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을 때, 누군가 자기들 방에서 같이 자자고 했다. 아무리 여유 공간이 있다 해도 쉽지 않은 선의였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잠시나마 타인의 호의를 기대하며 내 입장을 변명하던, 민폐를 자초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던 한 순간이 떠올라 복합적으로 울컥해지는 것이었다.

 

 

  그날 밤, 가이드가 동분서주하며 구해준 여유이불을 바닥에 깔고 잠을 청했다. 내 방이 아니고, 침대 위도 아니었지만 어느 때보다 달콤하고 따뜻한 잠자리였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가이드 역시 곁방 잠을 잤단다. 운전기사 두 분께 잠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가이드 방에서 잤다는 것이었다. 내 문제로도 피곤했을 텐데 잠자리까지 편치 않았던 가이드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순간의 실수로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기도 한다. 그 민폐를 보듬어 안는 것 또한 개인의 몫인데 쉬운 일은 아니다. 잠자리 내어준, 모녀처럼 다정하던 직장 동료사이라던 두 분께 지면이나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이번 여행의 컨셉은 유럽의 커플들 뒤태를 몰카짓하는 것이었습니다.

       핸드폰 사진이라 건질 게 별로 없습니다. ㅠ

 

1. 밀라노 엠마누엘2세 갤러리아에서 바라본 두오모 성당

 

 

 

2. 피렌체 베키오다리 근경

 

 

3. 파리 몽마르뜨 사크레쾨르 성당 

 

 

4. 로마 콜로세움 광장 앞 어린 연인 - 비둘기 심정이 곧 나였다!

 

 

5. 로마 스페인 광장 계단 - 아직은 물병 만큼의 거리가 있는 커플

 

 

6. 로마 마차 경기장 건너 - 중년만큼의 저 여유

 

 

7. 런던 하이드파크의 남남 커플 

 

8.런던 버킹검 궁전앞  

 

9. 하이델베르크 아지매 커플 

 

10.하이델베르크 네카 강 - 때론 개와의 커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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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6-25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잠자리였군요. 여행지에서는 꼭 뜻밖의 일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나는 측면도 있구요. 저도 앙코르와트 갔을 때 한밤에 호텔에서부터 약간의 차질이 일어나 두어시간을 헤매었어요. 방 바꾸고 어쩌고 그러는 바람에 ㅎㅎ 같이 갔던 부부와 아들들의 넉넉한 배려로 고마웠었지요.

유럽의 사랑스러운 커플들~~~ 그것도 뒷모습!! 멋져요. 폰이라도 사진 모두 잘나왔네요. 비둘기가 팜므님 심정이라니 ㅎㅎㅎ 빵 터져요. 또또 후기 차츰 기다리고 있을래요. ^^

앗참, 환상이라고 하시니 급생각난 단어! 제가 유럽 가고 싶다니까 울딸이 엄마는 유렵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하는 거에요. 과연 그럴까요? 전 깨끗한 거리 그런 걸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닌데... 하도 많이 들었잖아요.ㅎㅎ 근데 요즘 제 체력 같으면 어딜 못 다닐 정도에요. 왜 이렇지ㅠㅠ 정신없이 뻗어선 이제 일어났네요. 뭔가 체력부터 길러야 될 것 같아요. ㅎㅎ

팜므느와르 2013-06-26 11:2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두 시간 씩이나 헤매다니, 연약한 프레님껜 무리였겠어요.
유럽 아들은 서비스 정신이 우리만 못해요. 아쉬운 게 없어서겠지요?

커플들 참 부럽더군요. 우리 청춘들도 비주얼은 좀 딸려도 갸들처럼 뭐 자유로워도
용서하겠어요. 내 아들, 내 딸만 아니면 된다 심뽀~~ㅋ

파리가 좀 더럽다는 정보를 저는 갖고 있지 않아서 이런 심정적 낭패를ㅋ
더럽혀줘야 청소부도 할 거리 있을 거 아냐, 갸들 논리는 그런 것 아닐까요.

꺅, 덧글 저장하려는데 로긴을 안 했네요. 이런 뒤지럴스런^^*





Jeanne_Hebuterne 2013-06-2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지에서는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며칠을 보내기도 하고, 혼자 또 며칠을 보내기도 했어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편도 티켓이 있다는 것과 당장 숙소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 제 삼의 눈을 통해 너무나도 많이 들여다본 거리가 익숙한데 돌아가면 다시 다른 익숙함이 자리 잡을 거란 사실. 팜므 느와르님도, 그러셨을까요? 팜므 느와르님이 풀어주실 도시의 인상도 궁금합니다.(어쩐지 이 다음, 언젠가 다른 페이퍼로 풀어 주실듯한 느낌!)


기억이 가물거려 많은 것을 잊었는데 아직도 어느 거리의 빨래 냄새, 또각거리던 발걸음 소리, 외국어 방송은 선명합니다. 프라하의 지하철 냄새, 런던의 꾸물꾸물하던 하늘, 함부르크의 내 기분같이 변덕스런 날씨. 거기다 팜므 느와르님은 커플 사진을 추가하셨군요! 양해를 구하고 찍으면 이런 사진이 안 나오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나 역시 누군가의 배경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시는 팜므 느와르 님의 솜씨를 비추어 주신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6-26 11:31   좋아요 0 | URL
진작에, 몇 번이나 유럽 여행을 했을 에뷔님.
님처럼 제가 좀 섬세한 감각을 지녔더라면 아주 멋드러진 여행기를 썼을 거예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마이 건조하고, 눈썰미는 없는데다, 어리바리해서 제대로 뭘 보고 느낀다는 게 불가능했어요.

테른님의 감각을 훔쳐 오고 싶다는 생각을 여행 내도록 했지 뭡니까.

제 흔적이 님의 시간 여행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어요.^^*

다락방 2013-06-25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여행가서 근사한 사진을 찍어 오셨네요.
물병 만큼의 거리가 있는 커플, 남자의 등이 근사해요. 운동한 남자 같아요. (이런것만 보다니..orz)
풍경들이 하나같이 근사한데, 혹 외국의 누군가가 서울에 와서 저렇게 사진을 찍는다면 그 누군가도 이곳의 풍경을 근사하다고 생각하려나, 하고 궁금해지네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34   좋아요 0 | URL
핸드폰 사진이라 근사할 것까지야 ㅋ
실은 작년에 사진 강좌 3개월 들었는데 뭐가 뭔지 하나도 못 알아 들었어요.
지금은 카메라 조작법도 몰라요.

사진을 알고 사진을 찍어야 스트레스 안 받을 것 같아요.

마자요. 물병 남자 등짝이 후덜덜하다고 저도 잠깐 생각했어요.
당근 우리 풍경도 근사하다고 갸들이 생각하리라 믿사옵니다.
단 비주얼 면에서는 자신할 수 없다는 ㅋ

blanca 2013-06-25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너무 좋아요. 특히 1,2번은 작품 같아요. 무척 당황하셨겠어요. 그래도 격하게 부러워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36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일번 사진이 제 개인적으로 젤로 다 맘에 들어요.
왜냐면 그날 비가 적당하게 와 주어서 저 사진을 멀리서 찍을 수 있었거든요.
모두 갤러리아에 대피해 있는데, 유독 저 커플이 빗 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비주얼이 끝내주더군요. 비록 뒤태이긴 했지만.ㅋ

블랑카님도 아그 좀 더 키우시면 또 떠나실 수 있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6-25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가 파리에서 음악 공부 하던 놈인데 일주일에 한번은 꼬박꼬박 편지를 써서 보내던 놈이 있었는데 항상 하는 얘기가 파리 거리는 더럽다, 였습니다. ㅎㅎ 더럽긴 더러운가 봅니다..ㅎㅎㅎㅎㅎㅎ 이노 잘 살고 있나 모르겠네ㅛ...

다크아이즈 2013-06-26 11:39   좋아요 0 | URL
더러벘어요 ㅋ 파리...
곰발님도 친구 찾아 이 기회에 빠리 한 번 가보시어요.
음악하던 친구 분 기관지 다 망쳤을지도 몰라요. 시내 더러버서...
파리가 엄청 작은 도시였다는. 런던에 비해 마이 작아 보였어요.
작지만 위대한 일등 관광지 이미지...

라로 2013-06-25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에 들어오게 될 줄 알았는데 지금 왔어요!!!
대전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서요~~~ㅋ
유럽가서 커플들에 눈도장을 찍으셨군요!!! 멋져요~~~. 다 작품 같아요!!!>.<
언니가 예전에 프랑스로 가셨어야 했는데,,,,이런 감성을 숨겨놓고 계셨으니~~~.
암튼 저도 파리의 거리가 지저분 한 것에 놀란 일인인데 얼마전 BBC 방송을 듣는데
파리지엔느들이 관광객을 위해서 길을 청소하진 않겠지만 좀 더 친절하게 관광객을 대할거라고 하던데
혹 그런 혜택 받지 못하셨는지???불어만 사용하지 않고 영어도 사용해 줄거라고 결의를 했다고 하던데 아직???
유럽은 역시 안 추울때 가야 하는 것 같아요,,,저는 추울 때 갔으니까 가야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네요!!!
어쨌거나 빨리 후기 시리즈로 올려주세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47   좋아요 0 | URL
울 시아님은 답글 다시는 것도 미안할 정도.
넘흐 바쁘시리라 생각해요. 힘 내요, 힘

형편이 좋았더라면 그 시절 데가 유학 갔을까요.
친구 중에 유학 간 애들 두 셋 되는데 갸들 소식도 궁금하긴 하네요.

마자요, 거리는 더럽히라고 있는 거고 청소부는 치우라고 있는 마인드처럼 보였어요. 갸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으니 영어로 친절을 베풀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영어보다는 불어로 지껄이는 게 파리에서는 듣기에 좋더군요. ㅋ

이건 뭐 후기가 아니라 횡설수설 단상이 될 것이에요. ㅠ


여행

순오기 2013-06-26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드키를 두고 외출하면 저런 낭패가 따르는군요,
그래도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훈훈한 마음씀씀이에 감동먹은 행복한 여행이네요.

유럽의 커플들~ 카톡으로 봤던 사진을 알라딘에서도 만나니 반갑네요.
유럽여행은 꿈꾸지만 실현은 보장할 수 없으니 팜므님 후기에 열광하는 거 보이죠?^^
연인들의 뒷모습~ 미셀 투르니에 <뒷모습> 부럽지 않은데요, 전시회 해도 되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6-26 11:49   좋아요 0 | URL
카드키에 대한 개념을 상실한 일인이었지요.
저 많이 띠리하지요?

순오기 언냐도 할 수 있어요. 결심하면 안 되고, 여행은 그냥 떠나야 되더라구요.
우리 2년 뒤 미쿡은 예정 대로 ㅋ
글고 뒷모습은 당근 투르니에 뒷모습 보고 벤치마킹한 걸요. ^^*

세실 2013-06-26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 힘든 일 겪으셨네요. 이런..... 당시엔 힘드셨겠지만 벌써 소중한 추억으로 미소 가득 담으셨을듯! 카드키는 늘 핸드백에 소지 ㅋㅋ
이 사진 보는데 문득 달콤한 키스 하고 싶어라~~~~~
아 부럽다^^

다크아이즈 2013-06-26 11:51   좋아요 0 | URL
당시에도 그리 힘들진 않았어요. 세실님
속으로 좋은 단상 하나 건졌구나, 이런 쾌재를 불렀다는
다만 당황한 건 사실이었어요.

나두 백주대낮에 광장에서 비주얼 좋은 놈으로다가 키스나 한 번 해봤으면ㅋ

페크pek0501 2013-06-27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여행을 그리고 멋진 사진을 담아 오신 일을 축하드립니다.
역시 사진은 좋은 볼거리예요. 눈을 즐겁게 해 줘요. ^^

다크아이즈 2013-07-04 10:04   좋아요 0 | URL
페크언니 잘 계시지요?
제 삶이 어영부영, 흐지부지, 되는대로이다 보니 서재질도 두서가 없답니다.
잘 들어오지 못하니(? 아니 안 하니) 안부 여쭈기도 민망하네요.
어쨌든 서재 구경갈게요.^^*
 

 

 

 

 

 

 

1. 민주화라는 말

 

  “저희는 개성을 존중하는 팀이거든요. 민주화시키지 않아요.”

  아이돌 그룹의 모 멤버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뱉은 한 마디 말 때문에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단다. 의심할 바 없이 기성세대인 나는 논리적 오류로 이어진 저 말 뜻도 모르겠고, 왜 사람들이 흥분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개성을 존중하는데 민주화시키지 않는다.’는 말장난을 해석하느라 골머리만 아팠다.

 

 

  추이를 관망한 이제야 무슨 말인지 감을 잡겠다. 민주화라는 말이 특정 집단에겐 그 본래적 의미를 벗어나 부정적이고 치졸한 의미로 쓰인단다. ‘민주적으로 되어 가는 것. 또는 그렇게 되게 하는 것’이란 숭고하고 긍정의 의미인 ‘민주화’라는 말이 극우 성향을 지향하는 한 사이트에서는 그 반대의 뜻으로 사용되는 모양이다. 상대를 비하하거나 시비걸때 ‘민주화’라는 말을 쓴단다. 조롱의 의미로 ‘저 녀석 민주화 당했네’, ‘이 자식 민주화시켜야 겠어’ 라고 하거나, 네티즌 글을 ‘비추천’할 때도 ‘민주화’란 말로 대신한단다.

 

 

  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화 운동은 조롱거리로 전락시키고, 인권 유린마저 유희로 생각하는 집단들의 사이트가 활발히 운영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상 자체가 민주화된 사회를 증명하고도 남는데, 왜 그들은 비겁하게 ‘민주화’라는 말을 그토록 폄훼할까. 온갖 불합리와 각종 비리와 말할 수 없는 비열함의 세계를 엮어가는 기성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은 너무 쉽게 생을 환멸이나 유희의 장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화이건만 왜곡된 그것은 이제 내 편이 아니거나 내 뜻과 다른 것일 때 비하하는 말로 전락하게 생겼다. 민주화를 외치는 사람들의 실체는 전혀 민주화되지 않고,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몸짓은 전혀 정의롭지 않은 현실이 그들을 저토록 극단적인 생각의 장으로 내몰게 한 건 아닐까. 숭고한 민주주의의 의미를 제대로 전파하지 못한 기성의 한계에 대한 반발이 이런 현상을 불러온 것은 아닌지 곱씹을수록 머리만 무거워진다.

 

 

 

2. 색깔 있는 사람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 언변에 능한 이는 자공이었다. 공자와 자공의 대화에서 자주 회자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좋은 사람’에 관한 것이다. 자공이 묻는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떠하냐고. 공자가 대답한다. 좋은 사람 아니라고.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떠한지 여쭤본다. 공자는 다시 답한다. 역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마을의 좋은 사람이 좋아하고, 마을의 좋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만 못하다고.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자연스레 인간관계에 많은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나아가 가능하다면 모든 이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청소년 시기에 왕따 때문에 극단적 행위를 하거나, 사회에 나가 조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건 그만큼 관계망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얽히고설킨 현실에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긴 어렵다.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이라면 그는 정치꾼이거나 기회주의자에 가깝다. 겉으로만 좋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만의 색깔이냐 향기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걸 애써 숨기려 하는 그들은 애매모호한 중립의 도덕성을 내세워 ‘나는 이쪽입니다’ 대신 ‘나는 기회주의자입니다’라는 비겁의 실리를 택한다.

 

 

  나만의 견해가 있다는 건 뭐든 좋다는 식의 꼼수부리는 것보다는 진솔하다. 비록 당파성을 나타내는 약점이 있더라도, 좋은 걸 좋다하고 나쁜 걸 나쁘다 말하는 건 공자가 바라던 바였다. 가장 나쁜 예는 좋은 것은 좋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나쁜 것은 나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나쁜 사람에게 욕 좀 먹으면 어떠랴. 좋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고, 나쁜 사람으로부터 나쁘다는 소리를 듣는 건 명예스런 일이다. 세상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절대다수이다. 악덕한 사람들이 내는 나쁜 소리 정도는 거부할 수 있어야 공자가 말한 좋은 사람 대열에 낄 수 있는 것 아닌가.

 

 

 

3. 장그래의 선물

 

  5월은 감사의 달, 마음을 주고받느라 바쁘다. 특히, 젊은이가 중년이상에게 할 선물 때문에 고민한다면 만화책『미생』을 추천할 만하다고 한 선배가 말한다. 당신 아들이 실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연작인 그 책을 한두 권 선물하면 주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 부담을 갖지 않으면서도 만족하게 된단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로 나뉘게 되겠지만, 대개 받은 쪽은 나머지 시리즈 권을 사거나 검색해서 읽게 된단다. 공감이 절로 된다. 좋은 만화는 좋은 사색을 낳고 나아가 좋은 사람까지 낳을 터이니.

 

 

  한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미생은 어린나이부터 프로 바둑기사를 꿈꿨지만 실패하고 평범한 인턴사원이 된 ‘장그래’의 직장 생활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바둑에 빗댄 에피소드이지만 고수가 등장해 직장인의 처세에 대해 훈계하거나 세상을 향해 단순 일갈하는 내용은 아니다. 좋은 어른의 가치, 개별자의 존귀함, 나아가 공감의 소중함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완전한 삶을 향해 ‘아직 덜 살아있는’ 나를 깨쳐가는 ‘미생’에 왜 사람들은 열광할까. 캐릭터에 대한 독자의 이해가 가장 큰 이유라고 작가 윤태호는 말한다. 누군가의 싸움 현장이 창밖으로 보이면 호기심에 구경할 순 있다. 나와 무관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싸움의 대상이 내가 아끼는 사람인데다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다면? 본능적으로 사건 현장으로 뛰쳐나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품게 되는 불안과 공포가 곧 만화의 캐릭터가 되는데 독자들이 장면마다 스며드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네’라고 독자가 느끼는 건 플롯 때문이 아니라 캐릭터 때문이다.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면 주변이 보이고 만물 안에 든 내 모습도 보인다. 작가는 신출내기 직장인 장그래를 통해 그 의미를 부여한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데 배움이 있고 훈계하지 않는데 깨달음이 있고, 각 인물의 미세한 인과관계까지 독자와 호흡하려는 그 캐릭터 때문에 사람들은『미생』을 지지한다. 곧 영화도 개봉한다니 설렘만으로도 족하다.

 

 

 

4. 뒷모습 넘어 마음

 

  뒷모습이 때론 앞모습보다 많은 걸 보여준다. 그걸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뒷모습보다는 앞모습만 신경 쓴다. 예뻐진다면 친구랑 똑같은 얼굴이어도 좋으니 제 개성을 팔아 미모 지상주의에 편승하고, 돈이 된다면 잘난 인간들 앞에서 비굴해도 좋으니 제 품위를 죽여 물질 만능주의 곁자리를 예약한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도서관에서「위대한 개츠비」독서및 영화 토론수업을 했다. 가치관이나 자기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는 청소년 초입 시기라 접근하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 원작 번역 소설도 그들에겐 버거울 수 있는데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신작 영화는 나이 제한에 걸려 개봉관에서 볼 수도 없었다. 책은 축약본을 읽어도 좋다고 타협하고, 영화는 디브이디를 활용하기로 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라 그런지 기존 영화도 두 편이나 있었다. 그 중 원작에 충실한 로버트 마코비츠 감독 것을 택했다.

 

 

  책과 영화를 접한 학생들의 반응은 대체로 개츠비가 답답해죽겠단다. 반어법이라면 몰라도 제목대로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인정하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단다. 은밀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그토록 빠른 부를 축적한 면에서는 다른 부도덕한 등장인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단다. 사랑받을 가치조차 없는 한 여자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다만 돈으로라도 여자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 개츠비는 뒷모습까지 순수한 사랑을 한 사람이란다.

 

 

  상처나 파멸과 친구하는 건 누군가의 뒷모습이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먼저 본 앞모습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제 지고지순함으로 사랑하는 이의 약점마저 끌어안은 개츠비야말로 갑갑하지만 위대한 남자였다. 그는 제 뒷모습의 아름다움을 넘어 심성마저 다사로운 사람이었다. 전상보다 후상, 후상보다는 심상이라 했다. 개츠비가 전상과 후상을 넘어 여운을 남기는 건 그 마음결 때문이다. 보이는 앞, 안 보이는 뒤보다 더 중요한 건 속 깊은 성정이라는 걸 개츠비는 씁쓸한 죽음으로 증명한 셈이다.

 

 

 

5. 관심의 크기는 언제나 다르다

 

  덜 가진데다 피해의식마저 있는 악동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대처할까? 객관적 영향력이 큰 대상을 물고 넘어지면 된다. 제 이름을 드날리고 싶은 신진학자가 흠 있는 학계의 대가를 공략 대상으로 삼거나, 나 혼자 덤터기를 쓰기 싫어 약점 있는 거물급을 물귀신 작전으로 끌어들이는 행위 등이 그것이다.

 

 

  북한의 김정은은 하루라도 관심을 끌지 못하면 배알이 꼴리는 스타일이다. 핵 카드와 로켓포 발사로 세계의 정세가 자신에게 멀어지지 않도록 관리하며, 위협적이고 폭력적인 언사로 주변국을 긴장으로 몰아넣는 몽니부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을 조장하는 이슈를 담보로 그의 인민을 통제하고 길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강대국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는 것이야말로 곧 그의 치욕을 의미한다.

 

 

  이번 한미동맹 60주년 정상회담에서도 김정은은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부각될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보도에 의하면 그 시간 미국은 한반도의 긴장 상태보다는 시리아 사태에 더 집중한 걸로 되어 있다. 실무책임자 존 케리 국무장관은 시리아 사태를 논의한다는 핑계로 러시아로 날아가 버렸다. 이스라엘에 저항해야 한다는 아랍권의 대동단결이 그들에겐 더 큰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기자회견에서도 온전히 한반도 문제에 그 질문이 할당된 게 아니라 시리아 사태와 미군 내부의 성폭행 문제도 언급될 정도였다. 우리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다.

 

 

  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미 관계는 신뢰의 공감대를 형성했으며,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 국제협력 등 21세기형 글로벌동맹으로 발전했다고 청와대는 자체 평가한다. 이런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한쪽만의 일방적 메아리이기 때문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무심하고 그것이 상처인지조차 모르는 한쪽이 자화자찬하는 사이, 관심을 빼앗긴 김정은은 소위 열을 받았나 보다. 사흘 연속 동해로 미사일을 쏘아대며 제 몽니를 뉴스 한 줄로라도 장식하고 싶어 하니 말이다. 이래저래 관심은 약자가 강자에게 바라는 생존 본능이다.

 

 

 

 

6. 인생은 갑을 관계

 

  ‘갑을’ 관계가 화젯거리이다. 몇몇 우월적 입장을 앞세운 자들의 막말이나 횡포가 상식을 넘어서자 억압되었던 갑을 문화에 대한 불만 표출이 집단적으로 온라인을 타고 번지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부담스러운지 공공기관과 백화점 등에서 갑을 관계 표기 방식을 바꾸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본질과는 먼 대처 방식이라 별로 달갑지 않다.

 

 

  갑을이란 용어는 처음엔 단순한 익명의 표기법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가와 나’이면 어떻고 ‘A와 B’이면 어떻고 ‘사과와 오렌지’면 어떻고 심지어 ‘나와 너’이면 어떻단 말인가. 임의로 출발했을 그 용어가 우리 사회 밑바탕을 관장하는 계급의식으로 점차 왜곡·변질된 것에 씁쓸할 뿐이다.

 

 

  각각 우월적 지위와 아쉬운 입장으로 대변되는 갑을 관계는 따지고 보면 기업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매순간 의식하지 않을 뿐, 우리 인간 삶 자체는 갑을 관계의 총화이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힌 여러 관계망에다 유교적 관습 및 상부하달식 기업문화 등에 길들여진 상태에서 단 한시라도 자유인이 된다는 건 어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위치가 ‘을’이라고 생각한단다. 당연한 반응이다. 조금이라도 우월적 입장이 되었을 경우 우리는 그것을 별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에 별 감흥이 없다. 하지만 아쉬운 입장이 되어 서운하고 갑갑한 일을 당하다 보면 피해의식이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약자에 쉽게 공감하는 이유는 부당함은 언제나 약자의 것인데다, 그 부당함의 배에 언젠가는 나도 탈 수 있다는 보험 심리 때문이다.

 

 

  ‘갑을’이라는 용어를 버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널리 퍼져 굳어진 계급의식이나 상하문화의 틀을 벗어나는 일이다. 갑을관계는 윽박지르면 따르는 사이가 아니라 상생하고 윈윈하는 관계여야 한다. 사회구조상 완벽하게 동급이 될 수 없다면 더 약자에게 배려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이라도 있어야 한다. 진정성과 효율성이 담긴 인격 수양은 사람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기업에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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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5-2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팜므 님은 꼼꼼한 리뷰군요. 전 아직 개츠비 안 읽었는데 내용은 대충 알고있습니다. 왜 고전이라는 게 대충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요즘 애들이 보면 답답할 거예요. 개츠비 순애보가 말이죠.
" 이 바보야,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사랑한다고 고백해 !!!!! " 이런 마음.. ㅎㅎㅎㅎㅎ

다크아이즈 2013-05-28 16:18   좋아요 0 | URL

솔까말 단품 페이퍼지 꼼꼼하진 않죠. ㅠ
제가 좀 헐랭합니다.
고전의 정의 - 안 읽었으면서 내용을 알고, 그래서 읽은 것 같은 책
이 아닐까요.
곰발님껜 위대한 개츠비 왠지 안 어울려요. 독서력 딸리는 저도 얼마나 슴슴하게
읽혔는데요. ^^*

감은빛 2013-05-28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민주화가 어떻게 그런 뜻으로 쓰일 수 있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518 사진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모독하고,
전두환을 칭송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화가 났습니다.
처음엔 그저 어린 나이에 유행에 휩쓸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게,
생각없이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행동에 화가 나더라구요.

갑을이란 말이 유행이더라구요.
강준만 선생께서는 언제 준비해두셨다가 글을 쓰셨는지.
정말 놀랄만한 타이밍에 책을 내셨어요!

다크아이즈 2013-05-28 16:22   좋아요 0 | URL
감은빛님 반갑습니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해서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 하루 종일 당황스럽더군요.
변질된 그 말의 의도를 야무지게 활용한다는 그 사실에 더 충격 먹었습니다.
어린 갸들 책임이 아니라 기성인 우리 책임이란 게 문제지요.
아직 모든 게 너무 멉니다. ㅠ

2013-05-28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5-28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3-05-29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랍군요. 말장난도 어느정도라야죠. 기성세대 책임이 크다는 말씀 공감합니다. ㅠ 드디어 내일 ㅎㅎ 송정바다 발 담글 준비도 해오셔요.

다크아이즈 2013-05-29 23:18   좋아요 0 | URL
발은 내륙에서 온 분들께 양보하고, 전 과감히 몸을 담글게요. 우화홧~~
프레님 콧소리 불어 발음 상상하면서 잠을 청하겠어요.
샹송이면 더 좋고^^*

순오기 2013-05-30 0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공연히 분주하다고 서재 마실도 못하니 댓글도 안 남겼네요.
그래도 내일 반갑게 만나요, 우리~ 송정바다에서!^^

다크아이즈 2013-05-29 23:20   좋아요 0 | URL
조용히 미친듯이 분주하게?!, 뭐 저도 그랬어요.
알라딘 마실 나오기도 힘들던데요. 저야 게으름도 한몫했지만.
아, 언니의 기가 필요해요. 기대할게요, 조심해서 내려오시어요.^^*

페크pek0501 2013-05-29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문에서 민주화가 다른 뜻으로 쓰인다는 걸 읽고 놀랐어요. 어찌 그런 일이...

그저께 위대한 개츠비, 영화 봤어요. 책으로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영화가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생각했어요.

그런데 팜 님, 아주 오랜만에 글을 올리신거죠? 쉬셨나요, 바쁘셨나요? ^^

다크아이즈 2013-05-29 23:26   좋아요 0 | URL
페크언냐, 영화가 훨씬 생생하다는 말, 맞아요.
싱겁고 밋밋한 책을 바즈 루어만 식 보여주기로 잘 치환했던데요.
그래서 책보다 이번 영화가 더 재미났어요. 그래도 책도 좋죠, 물론...

바쁘기도 하고, 한 번 들어오지 않으면 아예 푹 쉬어 버린답니다.ㅠ
늘 부침이 있긴 했지요.
저 없는 새, 페크언냐가 이곳 잘 지키고 있었지요?

순오기 2013-06-25 0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의 새글, 유럽 여행기와 사진 기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