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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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적은 분명해졌다. 잡지에서 에어 서플라이의 브로마이드를 뜯어낸 것은 일종의 복수였다. 짜릿했다. 아무리 사소하고 보잘것없더라도 복수란 그토록 황홀한 것. 하지만 복수의 황홀경에서 깨어나자마자 비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시궁창에 처박힌 것 같았다. 복수의 날카로운 칼에는 칼집이 없다. 복수의 칼을 거둔 자존심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복수가 ‘찌질’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뒷일도 걱정이었다.

79이곳의 가을은 정말 근사해. 천국이 따로 없디. 아침에 현관문을 나서면 밤새 새로 태어난 세상을 마주하는 기분이야. 간밤에 하느님이 새로 세상을 빚은 것처럼. --고요하게 단단해지는 사슴의 뿔 속에서, 샘물처럼 차가워지는 공기 속에서. 만약 내가 당장 죽는다면 묘비에 이렇게 적도록 할 거야. 일흔 두 번의 가을을 즐겼다.

80‘샘물처럼 차가워지는 공기’라는 대목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느낌이라면 손영희도 잘 알았다. 에어 서플라이의 노래가 귓가에 울려 퍼질 때의 느낌.

80우물이 아니라 우물 너머의 세상을 보고 있는 듯했어. 헨리는 물에서 불을 보고 삶에서 죽음을 보는 아이였던 거야.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내가 그랬으니까.
86엄마, 물이 타올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피 웅덩이 위로 헨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손영희가 본 마지막 세상은 32년 전 개마고원의 한 호숫가에서 전사한 벽안의 병사였다. 수잔 여사, 죽을 때까지 아드님을 기억할게요. 손영희는 약속을 지켰다.

89새끼 순경의 허풍은 디테일이 꽝이었다. 구라의 품격을 결정하는 것은 디테일. 구라에 혼을 불어넣는 것도 깨알 같은 디테일. --디테일의 마술에 빠삭한 손테일, 아닌 손백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궁지면의 타고난 이야기꾼,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의 재담가, 못 말리는 빅마우스, 가십에 빠삭한 소식통이었다.
112사랑은 연락 끊긴 가족의 불행을 알리는 전보처럼 찾아왔다. 죽음, 비쩍 마른 우체부, 그리고 간결한 문장. 사랑에 관한 손미자의 낭만적 환상을 규정하는 삼위일체였다.

123꼭 명랑해야 할까 싶을 때면 각오를 다지기 위해 일기를 썼다. 명랑하지 않은 기분과 사연은 자진 삭제하고 명랑한 기분, 명랑한 얘기만 적었다. 명랑한 검열 덕에 문장이 짧아졌다. 동물농장 정독 요, 쥐덫 구입 시급, 비누 절약 철저, 일기가 아니라 전보 같았다.
124둘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가능해서 안전했다. 버림받을 염려가 없었다.
125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안전하기는 해도 피부처럼 얇고 취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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