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바넘 효과 - 질문지가 잘못 되었을까

 

 

 

  당신은 규율을 지키거나 제약이 따르는 상황을 불만스러워한다. 하지만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어느 정도의 규칙과 통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지나친 망설임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있다. 당신은 만족할 만한 증거가 없으면 타인의 의견을 잘 수용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의견을 불편해하는 타인이 있을까 봐 조심하는 편이다.

 

 

  당신은 내향적이며 과묵한 편이다. 하지만 공감을 확신하는 상대에겐 외향성이 발휘되고, 과감해진다. 한마디로 기회가 오면 충분히 사교적인 사람으로 변모한다. 당신은 가끔 비현실적일 때도 있다. 숨어 있던 진짜 아버지가 나타나 수억 짜리 건물을 증여한다거나, 현빈 같은 남자가 우주여행을 하자고 프러포즈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의 당신은 알뜰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편이다.

 

 

  독서 지도 프로그램을 짜면서 내 식으로 만든 ‘바넘 효과’ 실험 문항의 일부이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보편적 성향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고유 특성으로 여기는 것이 바넘Barnum 효과이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 타로점, 철학관 사주 등을 믿는 현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늘 첫 시간에 무작위의 수강생을 상대로 이것을 적용시켜보았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난 독서 지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제시한 스무 개 항목 전부가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고 한 사람이 있을 만큼 대체로 바넘효과가 증명되었다. 하지만 겨우 여덟 개 항목에 체크한 이도 있었는데, 순간 번쩍하고 깨알 같은 깨침이 지나갔다.

 

 

철학관의 훈수나 타로점을 믿지 않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에 시큰둥한 나 같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바넘 효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편견이나 선입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또 다른 편견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편타당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고 편견이나 선입견을 극복한 판단적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 바넘 효과의 진실 유무를 떠나 세상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혼이 몇이나 될까.

 

 

 

 

2. 칸막이 학구파는 되지 마

 

 

  입학 시즌이다. 신입생인 아들도 자신의 시간표를 메일로 보내왔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긴밀한 연락에 참고가 될까 하는 작은 배려이리라. 단출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표는 영어를 빼면 온통 수식과 기호만이 가득한 과목들뿐이다. 저 딱딱하고 재미없는 학문에 청춘의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안쓰러워진다. 하지만 그건 이과적 특성을 갖추지 못한 나의 편견일 뿐, 어쩌면 아들은 인문학 책 읽고 독후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보다 실험 및 계산 결과를 도출하는 그 과정에 더 흥미를 느낄지도 모른다.

 

 

  대학 생활이라는 게 공부가 전부는 아니다.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사고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간접 경험과 폭넓은 교양의 기초가 되는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맘에 아들에게 보내줄 책을 책장에서 고른다. 남편이 읽던 자기계발서에도 눈길이 간다. 아들에게 도움 될 책인가 싶어 훑어보는데, 흔한 말로 ‘살아 있네’ 하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망설일 필요 없이 보낼 책의 목록에 끼운다.

 

 

  아이비리그 기숙사 학생감 생활을 오래한 저자는 그곳에서 만난 학생 둘을 비교한 일화를 소개한다. 활발한 성격인 단짝 여학생들은 시험 기간만 되면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진다나. 한 명은 칸막이 도서관에 둥지를 튼 채 일체 기숙사 모임과는 발을 끊는다. 다른 한 명은 시험 기간이 아닐 때와 마찬가지로 스터디를 조직하고, 자료를 공유한다. 모여도 공부 반 잡담 반일만큼 천하태평이다.

 

 

  누가 성적이 좋고, 나아가 누가 옳은가를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스트레스 지수만큼은 활발한 사교파에 비해 칸막이 학구파가 더 심할 것이다. 공부 자체가 매번 즐거울 리는 없지만, 다크서클 드리운 채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면서까지 공부에 집착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공부하겠다고 유폐를 자처하는 부류보다는 사회적 소통을 공부만큼이나 중요시 하는 학생들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 보인다. 보내준 책을 읽는 아들도 이런 마음을 알아챘으면 좋겠다.

 

 

 

    3. 한국식 교육

 

 

  ‘데모크라시 프렙차터 스쿨’은 뉴욕 빈민가의 자립형 공립학교이다. 고등반 졸업생 45명 전원이 평균 7개의 대학에 합격한 기적을 이뤘다. 이 학교가 우리나라에서 유명세를 타는 건 한국식 교육을 모토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일이년 전부터 우리의 보도 채널들은 이 학교 소식을 전해왔는데, 젊은 교장 세스 앤드류의 공이다. 그는 이번 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 받아 참석했다나.

 

 

  저소득층에, 한 부모 자녀가 대다수인 이 학교는 2005년 설립한 이래 ‘열심히 공부하자, 대학에 가자,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교훈으로 한국식 교육을 실천해왔다. 앤드류의 교육 방침은 우리나라에서의 현장 경험이 계기가 되었다. 십여 년 전 원어민 교사로 우리나라에 왔을 때, 앤드류는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할렘 같은 지역의 공부 분위기 쇄신을 위해선 ‘한국식 오기와 열정’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공부만이 살 길이이다, 공부해서 남 주나’ 같은 현실적 가치와 사제지간의 돈독한 정 등 전통적 교육 가치가 합쳐져 한국식 교육 이념이 탄생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코리안 프로그램으로 프랩 스쿨은 최하위 학교에서 최우수 학교로 변모했다.

 

 

  이런 소식에 자부심이 일다가도 마음 한 쪽이 무거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세계제일의 교육 열풍을 자랑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리 장밋빛이 아니질 않던가. 왕따문제, 학교 폭력, 주입식 교육, 타율적 강제, 공부지상주의 등 숱한 문제들이 잠복해있다. 현명한 해결 방안 없이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지쳐가고, 학부모들 역시 제 교육 문제에 부담을 안고 있다. 우리 교육의 낭패한 이런 모습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은 없으니 다행인 것일까.

 

 

  어느 나라 교육이든지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우리 교육의 긍정적 측면을 도입해 그들 현장에 접목한 만큼 성과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우리 식의 공부에 대한 열정과 자율과 창의성으로 대표되는 그들식 교육이 조화를 이뤄 한국식 교육의 참 결실이 세계만방으로 퍼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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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3-03-0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바넘효과. 흥미롭네요. 저도 은근히 혈액형별 사주, 철학관등에 관심있답니다. 뭬야? 카톨릭 신자가...ㅎㅎ
2. 고딩까지는 칸막이 학구파가 되었으면, 대학에 들어가면 공부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3. 세스 앤드류 교장의 기적이 대단한 성과를 가져왔군요. 고딩 야간 자율 학습만 아니라면, 1인 1악기, 1인 1운동을 의무로 한다면 훨씬 효과가 있을텐데요. 이 학교는 요것도 함께 했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크아이즈 2013-03-07 10:42   좋아요 0 | URL
1.세실님 관심 있는 게 정상일거예요. 전 언제나 제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걸요. ㅋ
2.울 아들 난데없이 연극 동아리 가입하겠다길래 울 부부 급 우울 중입니다. 학업과 관련 있는 동아리였으면 하는데 너무 생뚱 맞아 어찌해야 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넘 일 아니고 내 자식 일이면 객관적인 눈은 사라지고 맙니다.^^*
3.악기와 운동은 진짜 권장하고 싶어요.미쿡은 어련히 그런 학습 더불어 시키지 않겠어요.^^*


마녀고양이 2013-03-06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넘 효과... ㅋㅋ.
저는 웩슬러 지능검사라는 타당성과 신뢰성이 검증된 심리검사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인터넷에서 타당도와 신뢰도가 전혀 검증되지 않은 팔짱 끼기 검사로 우뇌 좌뇌 측정하는 것을 열심히 해보고, 결과가 맘에 들어서 그냥 믿기로 했답니다.... 아하하.

제가 이공계 출신인데,
제 친구들은 인문계의 두리뭉실함을 굉장히 힘들어한 기억이 있어요. 토론과 합의 이런거 아주 싫어하구요, 딱 떨어지는 답이 나오고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을 만들 수 있는 분야를 훨씬 편안해하더라구요. 기질이 다르면, 다른 세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제 친구들은 인문계에 종사하면서 말 많은(?) 사람들을 거의 혐오하는 수준이었거든요.... ㅋㅋㅋ. 여하튼 아드님은 좋으시겠어요, 균형을 맞추어줄 어머님이 계셔서. ^^

다크아이즈 2013-03-07 10:50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께서 왜 바넘 효과 ㅋㅋ 하셨는지 알 것 같아요. ㅋ
바넘 효과 설문지, 타당도와 신뢰도를 달여우님께 검증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공계 출신인데 상담 심리 공부하시니 더 어울릴 것 같아요. 적어도 두루뭉술 대충 넘어가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신뢰감이 드옵니다.
자식이란 건 부모 맘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1. 롤리타는 산문시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수록 좋은 소설일 때가 있다. 섣부른 작가의 입김이 책이란 유리창에 서리거나, 책갈피를 넘기는 독자의 손끝에 작가의 손길이 자꾸 부대낀다면 이는 독자를 배려한 소설은 못 된다.

 

 

  작가는 쓰고, 독자는 읽기만 하면 되는 소설. 의도하는 바 없기에 변명할 필요 없고, 바라는 바 없기에 훈수 둘 일 없는 소설. 쓰는 작가는 단지 그것을 끝낼 궁리를 하고, 읽는 독자는 묵묵히 마지막 장을 덮기만을 바라는 그런 소설. 질문하지 않았으므로 답할 필요 없고, 설사 질문 하더라도 판단유보로서 독자의 권리를 곱씹을 수 있는 소설. 이런 소설은 나를 매혹시킨다. 『롤리타』가 내겐 그랬다.

 

 

  롤리타는 소설을 빙자한 산문시이고, 험버트를 가장한 작가 나보코프의 심미적 고백록이다. 흠잡을 데 없는 산문적 글쓰기는 시종일관 균질한 농도로 독자를 사로잡는데, 소설은 메시지가 아니라 문장으로 승부한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작가로서 부도덕한 작가 의식에 대한 세간의 혐의를 의식했을까. 전통적 액자 기법으로 그 혐의를 피해가려 한 것은 독자로서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설계도가 필요 없을 만큼 첫 글이 다음 글을 몰고 가는 글 장단이 독자를 압도하는데 소심한 부채감, 이를테면 작품성에 대한 일말의 회의를 가질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작가 입장에서는 소설은 시작하면 끝내야 할 심리적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정신적 노동의 범주에 넣을 만한 그 작업을 통해 작가는 심연의 경계에서 폭발하는 무질서한 심상을 무한 발설하는 욕구에 휩싸인다. 그것이 단순한 욕구로 끝나지 않고 예술성을 확보하려면 독자보다 심리적·심미적 우위에 있어야 한다. 거기엔 독자를 가르치려는 위선도 자신을 과장하려는 위악도 필요 없다.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작가의식만 있으면 된다. 도덕과 교훈과 감동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입체적 인생의 질문지, 소설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롤리타는 썩 매혹적인 소설이다.

 

 

    

  

2. 공감과 동정

 

  공감과 동정은 우정이나 애정을 둘러싼 여러 환경에 등장하는 보편적 정서이다. 크게 보아 공감과 동정을 같은 범주에 놓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공감과 동정은 별개의 감정이다.

 

 

  심리학에서의 공감(empathy)은 객관성을 담보한 이해의 감정이다. 당사자의 감정을 함께 느끼고, 그 사람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이해하되, 나의 입장과 관점을 버리지 않는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동정(sympathy)은 주관적 심리 상태의 자기 반영이다. 나도 너와 다르지 않고, 같은 기분이라는 직접적 감정으로 상대에게 쉽게 동화되는 상태를 말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적절한 예가 될 지는 자신이 없다.) 직장 상사에게 서류철을 패대기 당하고 뺨까지 맞은 남자가 있다 치자. 공감하는 여자라면 남자의 서류철 정도를 챙기고, 남자가 자신의 억울한 얘기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남자의 하소연에 맞장구를 치되 객관성을 잃지 않고 가만히 들어준다. 반면 동정하는 여자라면 남자보다 자신이 더 흥분하고 감정이입 되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리거나 상사에게 덤빌지도 모른다. 난처하고도 억울한 남자의 입장이 곧 나의 감정이 되어 중심을 잃고 동화되어 버린다. 남자는 자신의 감정에 앞서 여자의 태도에 더 당황하게 된다.

 

 

  수치심이나 열패감 또는 슬픔에 휩싸일 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정보다는 공감을 원한다. 동정은 나와 똑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공감은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감하느냐 동정하느냐는 ‘감정의 객관화’에 달려 있다. 오늘밤 술 취한 친구가 슬픔이나 분노로 횡설수설할지도 모른다. 동정하고 싶다면 친구보다 더 취한 목소리로 친구 편을 들면 된다. 당황한 친구는 퍼뜩 술이 깬 나머지 다시는 당신에게 하소연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반면, 공감하고 싶다면 친구 얘기에 그저 옳다고 맞장구 쳐주며 들어주면 된다.  비록 취했지만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걸 친구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공감하는 당신은 동정하는 당신보다 향기롭고 미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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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3-03-04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객관화에 따라 공감과 동정이 갈리군요.
이런 책도 읽으시는 팜므님, 배우게 되네요.
태그의 마지막 문장에 화르륵~ ^^

다크아이즈 2013-03-06 03:53   좋아요 0 | URL
프레님, 저도 잘 몰라요^^*
공감과 동정 부분 읽는데 확 땡기대요.
특히 동정이 사랑이라 착각한 사람들의 결혼 실패기를 보아온 터라
이런 글은 젊은 아그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림모노로그 2013-03-04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정의 객관화라, 대부분 자기의 슬픔을 보이기 싫어하는 이유가 동정이 싫어서겠죠.
동정이 아닌 공감을 하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들어주기만 하기, 요거이 참 어렵더라구요.
롤리타는 정말, 그런 소설 같아요 그냥 듣기만 하면되는
읽으면 공감되는 소설이요.
팜므님의 말씀을 듣고 롤리타를 읽으면
매우, 공감하게 될 것 같아요. 나보코프의 고백을 듣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인 소설이라는 데에 강한 추천을 날립니다 ㅎㅎㅎ

다크아이즈 2013-03-06 03:54   좋아요 0 | URL
감정 객관화 - 이 말도 제가 지어냈어요. ㅋ
감정이 객관화 될 수 있는진 모르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사물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잘 안 돼요. 그게 잘 되면 인간이 아니라 신일지도...^^*

Jeanne_Hebuterne 2013-03-04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롤리타, 발음할 때 마다 입천장을 에로틱하게 건드리는 혀끝.
역시 사람은 작명 센스가 있어야 합니다.

다크아이즈 2013-03-06 04:02   좋아요 0 | URL
네, 이 부분 번역은 권택영 번역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의역 되었다쳐도 경쾌하고 리듬감도 느껴지고... 근데 님처럼 '에로틱'하게 감각할 수 있는 그 감각이 전 또 부럽고.^^*
이 드라이한 감각을 일깨워줘 - 전혜린식 발광? ㅋ
 

 

 

 

 

 

 

 

 

 

 

 두 번역본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내 취향으로는 우선은 김진준의 손을 들겠다. 이제 겨우 시작이라 중간에 바뀔 수는 있겠다. 부분 번역 순서는 전자는 문학동네, 후자는 민음사.

 

 

 

 

 

 

 

 

9 <롤리타: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내가 받은 기묘한 원고의 제목과 부제이며, 이 글은 그 원고에 붙이는 머리말이다. 원고의 저자 ‘험버트 험버트’는 ~

7 <롤리타, 혹은 어느 백인 홀아비의 고백>, 이것은 필자가 받은 좀 이상한 원고에 붙은 두 개의 제목이었다. 필자의 이 글이 서문이 된 그 이상한 원고의 저자인 ‘험버트 험버트’는 ~

 

 

 

9 현재 컬럼비아 특별구 변호사협회 소속인 그는 내 사촌이자 절친한 벗으로, <롤리타> 출간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저명한 내 사촌에게 위임한다고 밝힌 의뢰인의 유언장 내용을 근거로 나에게 이 일을 맡겼다. 클라크가 나를 편집자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모종의 병증과 도착증을 다룬 졸저(<정신을 이해하는 일이 가능한가?>)로 최근에 폴링 상을 수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 클라크 씨는 현재 워싱턴 D.C.변호사 협회에 속해 있는데 험버트가 <롤리타>의 출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나의 저명한 사촌에게 위임한다는 유언장의 한 조항을 조건으로 원고를 받았다. 그의 결정은 아마 자신이 선정한 편집자가 방금 폴링 상을 탄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수상작은 <감각들이 의미를 만드는가?>라는 수수한 책이었는데 괴상한 정신 상태와 성도착을 논의한 것이다.

 

 

 

10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정표나 묘비처럼 그의 글 속에 끈질기게 살아남은 몇몇 세부사항(즉 인품과 동정심을 겸비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감춰주고 덮어줄 만한 인명과 지명)을 꼼꼼히 고쳤을 뿐, 나머지는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 놀라운 회고록을 그대로 선보인다.

8 그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 비석이나 이정표(취향상으로나 동정심으로 사람들이 감추려 했을 인명이나 지명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로 줄기차게 나타나는 몇몇 고집스런 내용들을 조심스레 억누르는 것 외에 이 굉장한 수기는 여기 그대로 선보인다.

 

 

 

17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15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머리글 부분을 빼면 실제 본문의 제일 첫 문장은 각 17쪽과 15쪽으로 인용된 바로 윗 부분이다. 이 첫 부분만은 뭔가 자꾸 할 말이 떠오른다. 앞 문장은 완벽한 문학동네의 승리, 뒤 문장은 민음사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원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라 지극히 주관적이긴 하다.) 문학동네 김진준의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설사 원문에서는 대구를 이루지 않았더라도 번역할 때는 섬세한 대구 구조까지 신경 쓴 것 같다. 짧은 문장에서도 문체 미학을 완성하려는 노고가 보인다.

 

 

  민음사 권택영의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시적인 문장이었을 첫 원문이 번역으로 바뀌면서 약간 풀어지고 삐걱대는 느낌이다.

 

  나보코프에게도 아쉬운 점을 느낀다. 기왕 신경 쓸 첫 문장인데 ‘롤리타, 내 몸의 불, 내 삶의 빛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이런 순서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도 해본다. 협의에서 광의의 대구, 점층적 기법 등을 제대로 활용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하기야 대가 쯤 되면 좁쌀 영감, 먼지할망구가 되지 않기 위해 잘잘한 데 신경을 덜 쓰기는 하겠다.) 하지만 문장에 치중하는 작가들(우리나라로 치면 김훈, 이승우, 김경욱, 천운영, 기타 여러 작가들)이라면 디테일한 면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그런 섬세한 부분에도 조용히 열광하고 숨어서 희열을 느끼는 독자도 많을 것이다. 정원 가꿀 때, 안정감과 통일감을 위해 장미 뒤의 수국, 배롱 뒤의 느티를 배열하지 그들을 마구 뒤섞지는 않는다. 그림에 구도가 있고, 음악에도 대위법이 있듯이 글에도 미시적, 거시적 구성을 신경 쓴다면 예술미를 좀 더 살릴 수 있을 것이다.(뭐, 문학이 예술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뒤로 하고.)

 

 

  이번엔 뒷문장. 역시 원문을 안 봐 정확히 가늠할 수 없지만 민음사의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알파벳과 한글 체계가 다른 이상, 역자가 윤문을 했더라도 용서할 만한, 독자를 배려한, 충분히 매혹적인 번역이다.

 시간만 허락한다면 원문과 함께 두 번역서를 옆에 두고 부분마다 내 취향에 맞는 쪽으로 골라가며 읽는 재미도 있을 텐데. 한없이 게을러 원 없이 뮝기적(!)댈 망정 언제나 시간은 그런 여유까지는 허락하지 않는다!

 

 

  정말로 하고 싶었던 얘기는 한 마디. 겨우 읽기 시작했지만 나보코프의 문장은 (내게) 넘사벽이다! 방금 아무 페이지나 펼쳐봤다. 가령 이런 문장들의 연속이다.

 

 

 

109(문학동네) 나는 그들이 출발 준비를 하면서 내는 잡다한 소음을 듣고 침대에서 나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포플러나무 밑에 서 있는 자동차가 벌써 부릉부릉 떨었다. 보도에 서 있는 루이즈는 마치 꼬마 여행자가 벌써 저 멀리 나지막한 아침해를 향해 달려가기라도 하는 듯이 한 손으로 눈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동작을 하기에는 시기상조였다. 헤이즈가 소리쳤다. “서둘러!” 그러자 차 안에 엉거주춤 올라탄 나의 롤리타가 막 문을 닫으려다가, 바야흐로 차창을 내리고(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루이즈와 포플러나무들에게 손을 흔들기 직전에 문득 운명의 흐름을 중단시켰다.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도로 집 안으로 달려들어왔다(헤이즈가 노발대발 소리쳤다). 뒤이어 나의 연인이 계단을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내 몸을 송두리째 삼켜버릴 기세로 부풀었다. 나는 허둥지둥 파자마 바지를 끌어올리면서 방문을 열어젖혔고, 그와 동시에 롤리타가 들이닥쳤다. 제일 아끼는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쿵쾅쿵쾅 헐떡거리며 달려와서 다짜고짜 내 품으로 뛰어들었고 그녀의 순결한 입술은 남자의 시꺼먼 턱 아래 난폭하게 짓눌려 순식간에 녹아들었다. 심장이 팔딱거리는 나의 연인! 다은 순간 나는 그녀가 -살아 숨 쉬는 그녀가, 농락당하지 않은 그녀가 -콩닥콩닥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를 들었다. 운명의 흐름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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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3-01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렇게 비교할 수 있게 문장을 올려주신 팜님, 매력적인 밤의 여인께 감사해요!
페이퍼 마지막 문단은 나도 덩달아 쿵쾅쿵쾅, 콩닥콩닥하게 만들었어요!
나는 연인 때문이 아니긴 하지만요.ㅋㅋ

다크아이즈 2013-03-02 10:44   좋아요 0 | URL
오기 언니, 이제 보니 무작위로 옮긴 아무쪽보다 더 짜릿한 문장들이 천지빼까리예요. 큰일났어요. 섬세한 묘사, 불편한 통찰, 시니컬한 풍자와 무심한 듯한 해학 - 미쵸요~~
안 잘 생겨도 좋으니 차인표 같은 사람이랑은 연애해도 나보코프와는 연애하기 싫어요. ㅋ. 이를 테면 다이아를 사주면서도 '넌 나에게 읽혔어.' 뭐 이런 여유를 부릴 사람... 나보코프는 애인일 때보다 소설가일 때 제격이네요.

프레이야 2013-03-02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이렇게 비교해서보니 확연히 다름이 느껴지네요. 전 민음사 것으로 예전에 읽었는데 문동 것으로 다시 읽고싶어져요. 영화도 보셨나요? 전 옛날 필름도 좋지만 제레미 아이언스가 나온 게 좀더 좋더라구요.ㅎㅎ 롤.리.타. 그나저나 두 권을 비교해서 동시에 읽으시다니 진짜루 대단하세요.

다크아이즈 2013-03-02 10:49   좋아요 0 | URL
(프레님께만 비밀글 ㅋ) 김진준 번역이 더 와닿아요. 번역에도 트렌드가 있을까요.좀 더 젊고, 좀 더 입체적이고, 덜 비문을 생산하고, 더 독자를 배려한다는 느낌...
근데 재미와 불편함과 냉정함 등이 골고루 섞여 있어 내 나름 분석하며 읽느라 진도가 안 나가요.하룻만엔 어림도 없네요. ㅠ

프레이야 2013-03-02 19:59   좋아요 1 | URL
ㅎㅎ 그니까요. 딱 봐도 문동 게 나아요.
문동 게 요즘 번역이 훨 좋더라구요.^^

드림모노로그 2013-03-0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팜므님의 롤리타 , 어떻게 이런 비교가 가능하신지 . ㅎㄸㄸ ~
전 문동의 롤리타를 잠깐 맛배기로만 읽어보았습니다 ㅎㅎ
넘사벽의 문장이라는 말씀에 빵 ~!! 터졌습니다 ㅎㅎ
영화로 보았을때 제레미 아이언스가 연기를 너무너무 잘했던 것 같아요
두 책을 비교하시다니 ~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ㅎㅎ
해피 주말 보내세요 ~

다크아이즈 2013-03-03 23:29   좋아요 0 | URL
드림님, 꼬박 하루가 걸렸어요. ㅠ
중간에 민음사는 포기하고 꼭 비교할 부분이 필요했을 때 찾가가면서 대조했네요. 두 번역가의 노고가 다 느껴졌지만 문학동네는 편집진까지 발벗고 나서서 한 문구, 한 문장에 최선을 다했다는 게 느껴지네요.
역자 후기를 읽으니 더 그런 느낌이 ^^*

꿈꾸는섬 2013-03-02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권을 동시에 읽다니, 전 생각도 못해봤어요.
팜님 서재는 바탕까지 밤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밤의 여인, 넘 멋져요.
읽고 싶은 책이 만날 늘어요.^^

다크아이즈 2013-03-03 23:31   좋아요 0 | URL
동시까지는 아니고, 어느 정도 취향이 결정되니 꼭 찾아 봐야 할 부분만 대조하게 되었어요.

바탕은 제가 꾸민 게 아니고, 컴맹이라 귀찮아서 설정 안 했더니 알라딘에서 주는대로 출렁일 뿐이랍니다.ㅠ
개성 강한 이곳에서 이 또한 개성이려니 하고 방치(?!)합니다.^^*
 

 

 

   1. 헵번의 옆모습      

 

    

 

  <유섭 카쉬(Yousuf Karsh) -  오드리 헵번 > 

 

 

 

  요즘 젊은 연예인들의 얼굴은 똑 같다. 갸름한 달걀형 라인에 이마는 봉긋하고 콧날은 오뚝하며 눈은 앞트임을 곁들인 쌍꺼풀이 대세이다. 눈썰미 젬병인 나 같은 이는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아 갑갑하기만 하다. 아이돌의 노래나 춤을 보면서 활력을 얻고 싶은데, 누가 누구인지 구별이 안 되니 재미가 반감 될 수밖에.

 

 

  개인적으로 나는 달걀형 얼굴에 대한 환상이 있다. 이목구비가 아무리 뚜렷해도 턱 선이 곱지 않으면 내 기준의 미인 목록에서 탈락시키곤 했다. 이마 좁고, 광대뼈 나오고, 턱 선이 발달한, 전형적인 몽골리안 계통의 내 얼굴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리했는지도 모른다. 한데 무개성한 브이자 얼굴이 유령처럼 뒤덮는 세상을 보면서 조금 달라졌다.

 

 

  인물사진의 대가 유섭 카쉬(Yousuf Karsh)가 찍은 오드리 헵번의 옆모습을 오래 들여다 본 적이 있다. 흠잡을 수 없는 오드리 헵번이지만 예의 내 기준에 의하면 그녀가 미인일 리 없었다. 사각 턱에 가까운 얼굴형 때문이었다. 그녀가 현재 우리 연예계에 진출했다면 턱 선 교정은 피할 수 없는 강요가 되었을 것이다. 한데 들여다볼수록 무한 애정이 생긴다. 발랄한 듯 기품 서린 오드리 헵번의 숨은 ‘강단’이 그녀의 턱 선에서 보이는 것이다. 진주 품은 조가비처럼 어금니 꽉 깨문 외유내강이 그녀의 턱 선에서 읽히는 것이다.

 

 

  배우로 이룬 꿈을 유니세프 친선대사라는 사회적 가치로 환원한 그 행보가 각진 턱에서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명성을 개인적 목표보다는 사회적 이타심과 결합하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건전한 결정이 아무리 즉흥적이라도 해도 삶에 대한 깊은 사유가 전제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헵번식 사유의 출처를 나로서는 그녀의 강인한 턱 선에서 찾고 있었던 것. 그녀가 세상을 뜬 지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우아하고 결단력 있는 그녀의 옆모습은 누군가의 내면을 자극하는 강단 있는 매개물이 되어 줄 것이다.

 

 

                  <헵번의 다른 옆모습, 작가 몰라서 못 가져옴>

 

 

<마지막 크리스마스 때 오드리 헵번이 자녀들에게 읽어 준 시>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tm런 눈을 갖고 싶으면 사람들에게 좋은 점을 봐라

날씬한 몸매를 갖고 싶으면 너의 음식을 배고픈 사람과 나누어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갖고 싶으면 하루에 한 번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너의 머리를 쓰다듬게 하라

아름다운 자세를 갖고 싶으면 결코

네 자신이 혼자 걷고 있지 않음을 명심하며 걸어라

사람들은 상처로부터 복구되어야 하고

낡은 것으로부터 새로워져야 하고

병으로부터 회복되어야 하고

무지함으로부터 교화되어야 하며

고통으로부터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결코 누구도 버려서는 안 된다

기억하라 만약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다면

너의 팔 끝에 있는 손을 이용하면 된다

네가 더 나이가 들면 손이 두 개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한 손은 너 자신을 돕는 손이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는 손이다

 

                        -샘 레벤슨 (Sam Levenson) : Time Tested Beauty Tips

 

 

 

 

 

 

 

 

 

 

 

 

 

 

 

 

 

2. 코트의 진실

 

  델포이 아폴론신전 진실의 벽엔 탈레스 혹은 킬론이 말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가 새겨져 있다. 이 금언이 대중성을 확보한데는 자신의 철학 근간으로 이 말을 애용한 소크라테스의 공이 크다. 어쨌든 탈레스에 의하면 남에게 충고하는 일은 쉽고, 자신을 아는 것이야말로 가장 힘들다고 했다.

 

 

  프로이트 역시 자신을 아는 것이 어렵다고 보았다. 나보다 타인이 나를 잘 알고 있으며, 역으로 이웃보다 내가 이웃을 잘 아는 수가 있다고 했다. 대체로 인간은 나 자신보다 타인을 분석하는데 탁월한데 이는 반쪽짜리 분석일 뿐이라고 보았다. 나를 포함한 분석이어야 제대로 된 정신분석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모르는가는 프로이트 자신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여름휴가 때 한 청년을 알게 된 프로이트는 그와 친해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청년은 곧 산책 가자는 프로이트의 제안을 거절했고, 아내가 오기로 했으니 저녁마저 먼저 먹으라며 피했다. 다음날 부부의 저녁 식사에 초대되었을 때 프로이트는 들뜬 맘으로 청년의 식탁으로 갔다. 부부 자리 맞은편에 의자 하나가 마련되었는데, 그곳엔 두툼한 코트가 걸쳐 있었다.

 

 

  분석의 대가인 프로이트의 결론은 이러했다. ‘나는 이제 당신이 필요 없고, 여긴 당신 자리가 없습니다.’ 프로이트의 이 사례는 ‘정당한 오해’에 대한 진실을 보여준다. 오해를 살 만한 행동에 그 어떤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해도 당한 쪽에서는 상대방의 속을 다 읽어낼 수 있다. 이 경우 진실을 밝히기라도 한다면 청년은 모욕을 느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는 이를 ‘내적 부정직함’이라고 불렀다.

 

 

  불편한 진실을 들춰내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프로이트. 하지만 타인에 앞서 나를 알려면 이 정도의 따끔거림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자신이 걸쳐 놓은 코트 때문에 상대를 아프게 하는 나는 상대가 눈치 채기 전, 가만 의자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코트 걷은 그 자리엔 상처 받은 프로이트의 엉덩이를 데울 방석을 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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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2-26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팜님팜님팜님, 오랜만이어요, 오랜만!
저 2학기 미술시간에 첫 과제가 소묘였는데, 바로 저 사진을 그렸어요.
유섭 카쉬의 사진이요. 얼마전 EBS에서인가요, 세기의 여인들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해주었는데 노년의 오드리 헵번이었어요. 그녀가 유니세프에서 활동한 것은 알았지만 그녀의 주름진 얼굴은 영상으로 처음보아 놀랐어요. 늙어서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요. 나이 들어서도 그렇게 예쁜 기품을 뿜어낼까요.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마음까지 그러니.

프로이트는 적잖이 당황했겠어요. 자신을 알다라... 오늘 두번째 단락은 꽤 어렵네요.
두고두고 생각해봐야 겠어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7:32   좋아요 0 | URL
이진님 새학기가 되어서 많이 바쁘지요?
새학기 새친구 잘 맞이하시고 공부와 글도 병행하려면 체력 보충도 하시고.(엄마 마음 ㅋ)
울 아들도 기숙사 들어갔어요. 엄마는 뒷전이고 새로운 룸메랑 인사 트느라 정신 없더군요. 그게 정상이니 웃으며(맘으론 울며) 돌아섰네요.
카쉬 사진은 자꾸 보게 되어요.

프로이트는 너무 빠지면 혼미해져요. 적당히 ㅋ


순오기 2013-02-2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이진님이 말하는 EBS프로그램 나도 봤어요.^^
오드리는 늙어서도 아름다웠는데, 오드리의 행보를 증언하던 로져 무어는 예전의 그와 거리가 멀게 느껴저 안습이었어요.ㅜ
나보다 이웃이 나를 정확하게 안다고 느껴질 때가 종종 있어요. 나를 아는 것은 영원히 미해결의 과제일 듯해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7:36   좋아요 0 | URL
늙어서 아름다운 헵번은 정말 맞는 말이에요.
순오기 언냐도 나이들수록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될거라 확신해요.
나보다 더 나를 많이 알 수도 있는 타인이란 걸 생각하면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지 뭡니까. 프로이트는 불편하지만 극복해야할...

마태우스 2013-02-26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망여인님 과거엔 정말 달걀형 얼굴에 대한 로망이 있었지요. 요즘은 어떤 게 대세인지 잘 모르겠네요. 암튼.. 헵번을 보니까 턱선은 눈에 안들어오고, 그저 속눈썹이 참 길구나 싶네요. 속눈썹 길면 미녀가 많죠...

다크아이즈 2013-03-01 17:39   좋아요 0 | URL
여전히 달걀형이 좋긴 해요. 하지만 마카다(!)그러니 어리둥절하고 시큰둥해지지 뭡니까.
전 얼굴형에 집착하다 보니까 늘 헵번의 턱선이 맘에 걸렸거든요.
근데 그 강단있어 보임이 헵번의 이타성을 완성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속눈썹이 저리도 알흠다우니 턱 선은 양보할게요. ㅋ

프레이야 2013-02-27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드리 헵번, 나이 들어가면서 더 아름다운 여인으로 저도 기억하고 있어요.
자녀에게 들려준 저 시도 다시 보니 정말 붙여두고 매일 읽어라도 봐야할 글이라 싶어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진실을 말하면 서로 다치게 되는 경우도
있는지라 오늘도 저는 불편한 진실을 묻어두고 그냥 가라앉혀야 할 것 같아요.
좋은하루~~ 팜므님^^

다크아이즈 2013-03-01 17:44   좋아요 0 | URL
저도 헵번이 낭독한 시를 새겨요.
근데 정작 가까운 식구들에게는 실천이 잘 안 된다는...
하기야 타인을 대하듯 식구를 대하면 그것도 이상하겠지요? ㅋ

프레님 말씀대로 불편한 진실은 성찰의 거울로 삼을 일이지 타인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그 말씀이지요? 맘에 새길게요.^^* 봄이 오고 있어요~~

드림모노로그 2013-02-27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드리헵번이 자녀들에게 들려 준 시 무척 좋아해요
사회적 이타심에 대한 사유를 오드리 헵번의 바로 옆선, 그 중에서도 턱선에서 ㅎㅎㅎ
매우 새롭습니다 ^^ 아름다움은 외모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ㅎㅎ
아름다움이란 몸과 마음에서 품어내는 강인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오드리 헵번을 보면서 생각해봅니다 ^^
사회적 이타심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너무 황홀한 조화인데요 ㅎㅎ
팜므,느와르처럼요 ㅎㅎㅎ
좋은 하루 되세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03-01 17:46   좋아요 0 | URL
역시 드림님 비롯 이 시 좋아하는 분들 많군요.
저도 맘에 새기지만 실천하긴 넘흐 어렵습니다.
제가 좀 엉뚱한데 한 번씩 그런 생각이 들지 뭐예요. ㅋ
이타심과 프로이트의 조합, 뜻하지 않게 낯설게 하기 기법이 되어버렸네요.
드림님도 봄 맞이 잘 하세요.^^*

세실 2013-02-2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제 얼굴이 왜 여기에? ㅎㅎ
참으로 닮고 싶은 여인이지요.
나이들수록 더 아름다운 헵번. 사각턱인거 지금 알았어요. ㅋ

다크아이즈 2013-03-01 17:48   좋아요 0 | URL
역시 센스쟁이 우리 세실님^^*
헵번보다 젊은데다 일단 헵번은 먼 길 떠났으니 세실님 윈!!!
전 얼굴형에 관심 많다 보니 헵번만 보면 그게 맘에 걸렸어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이제 늦게 그 턱 선의 매력이 보이지 않겠어요. ㅋ

꿈꾸는섬 2013-02-2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전 얼굴형만 달걀형이에요. 나머진 ㅜㅜ 오드리햅번의 아름다운 얼굴도 좋지만 시가 정말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3-03-01 17:50   좋아요 0 | URL
와, 꿈님 제가 바라던 이상형을 님에게서 찾다니...
실은 요 얼굴형 달걀형이면 얼마나 유리한데요.
부드러워보이고, 이목구비 조금 손해나도(?!) 얼굴형이 커버해준다니까요.
전 다시 태어나면 달걀이, 아니 달걀형 얼굴을 갖고 싶어요. ㅋ

2013-03-01 0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3-01 17: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왼손잡이 로망

 

  

 

 

 

 

 

 

 

 

 

 

 

 

 

 

  중학교 2학년 때 내 짝지는 왼손잡이였다. 상냥하고 눈치가 빨라 선생님들께 귀여움을 받았다. 그녀가 선생님들께 관심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기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왼손잡이에 대한 시선이 썩 호의적인 시절이 아니었다. 왼손잡이라도 글씨만은 오른손으로 썼다. 품위 있는 학문의 길에 흠집을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한 기성세대의 생각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짝지는 희소가치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짝지는 공책을 오른쪽으로 90도 각도로 돌려놓은 채 옛사람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글씨를 써내려갔다. 오른손잡이처럼 바르게 공책을 놓고 쓰면 왼손바닥에 연필 자국이 새까맣게 묻을 뿐만 아니라 노트에도 글씨 얼룩이 지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은 짝지 곁을 지나칠 때마다 지휘봉으로 꺾인 노트며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얌마, 오른손으로 바꿔 써!’ 한 마디씩 하는 선생님의 말씀은 시비나 훈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애정과 관심을 향한 것이었다. 짝지는 그 상황을 매번 즐겼고,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질투 어린 시선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았다. 공부는 나보다  못한 짝지가 그토록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는 건 오직 왼손잡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이었으니 나남할 것 없이 젊고 패기 넘치는 남자선생님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한데 남선생님들의 관심은 왼손으로 글씨 쓰는 짝지에게만 가 있었으니 질투와 부러움은 당연했다. 게다가 눈치 빠른 짝지는 오후에 좋아하는 선생님의 수업이 있으면 교복 블라우스를 빨아 입을 정도로 유난을 떨었다. 내가 보기엔 그 교복이 그 교복인데 짝지에게는 안 빤 교복과 빤 교복은 달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노골적으로 그 상황을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짝지가 좋아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다른 선생님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짝지와 무척 친했기 때문에 오직 짝지 같은 상황을 겪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이면 짝지 따라 노트를 비스듬히 놓은 채 왼손 글씨를 써보기까지 했다. 심하게 왼손에 어눌한 내 왼손 글 솜씨가 늘 리 없었다. 여전히 남선생님들의 관심은 짝지에게만 가 있었고, 내 왼손잡이 로망은 그렇게 한 계절 실습으로 끝나고 말았다.

 

 

  왼손잡이가 못 된 나는 아직도 그것에 대한 로망이 남아 있다. 해서 아들과 딸이 왼손잡이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알았을 때 은근히 서운하기까지 했다. 왼손잡이가 못 되어 선생님들께 관심 받지 못한 나를 아이들에게 투사하고 싶은 욕망이 은연 중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한때의 경험 한 자락이 평생 자기 인생관에 녹아날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아직도 나는 새로운 왼손잡이를 만나면 ‘글씨도 왼손으로 써요?’ 라고 묻는 버릇이 있다. 상대의 대답이 아니라고 하면 괜히 실망하게 된다. 왼손잡이는 나의 로망이었고, 여전한 로망이기도 하다.

 

 

  한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그녀가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건 왼손잡이어서 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겠다. 예쁘고 상냥한데다 영민했던 짝지는 사람 마음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염세적이고 냉소적인데다 소심하고 어리바리한 모범생이었던 나에 비해 예쁘고 상큼하고 털털하고 눈치가 빨랐던 짝지를 좋아하지 않았을 선생님이 어디 있었겠는가. 아직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을 어린 나이였기에 나는 짝지의 ‘관심 받음’이 단지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 밥 그릇 제가 챙기고, 제 사랑은 제가 얻는다. 짝지가 누린 사랑과 관심은 제가 가진 역량 때문이지 결코 왼손잡이어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제 역량을 발휘하면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되지 극히 일부분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각설하고 그래도 왼손잡이에 대한 내 긍정의 로망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맙긴 하다. 아직도 나는 왼손잡이를 만나면 그들이 글씨마저 왼손으로 쓸까, 궁금해진다. 내게 진정한 왼손잡이란 글씨까지 왼손으로 쓰는 자여야만 한다. 거기다가 상냥하고 영민하기까지 하다면 왼손잡이에 대한 나의 로망은 완성되는 것이다.

 

 

 

 

2. 인사

 

<파울 클레 - 인사>

 

 

  술을 잘 못 마시더라도 술잔을 들어야 할 경우는 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작은 행동 때문에 더 좋아진 적이 있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옆자리에 앉게 된 그분은 건배가 있을 때마다 내가 든 술잔 높이보다 낮은 높이로 자신의 술잔을 부딪는 것이었다.

 

 

  우리사회처럼 은연 중 위계질서가 몸에 밴 곳도 없는데 연배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그분이 내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음 한두 번은 재미로 그러나 싶었는데, 가만 보니 몸에 밴 자연스런 제스처였다. 조그만 데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나는 세 번째 잔부터는 무조건 그분보다 낮게 들었다. 그분이 눈치 채지 않게 속으론 끙끙댔다. 한 편의 코미디 같은 그 상황이 싫지는 않았다.

 

 

  스위스 화가 파울 클레의 동판화 중에「인사」라는 작품이 있다. 키가 크고 군살이라곤 없는 두 남자가 서로 낮게 인사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허리를 있는 힘껏 앞으로 꺾어 바닥과 친구가 될 정도다. 하지만 얼굴은 서로의 옆모습을 향해 치켜들고 있다. 서로 계급이 낮다고 생각해, 한껏 고개를 숙이긴 하는데 상대를 의식하고 눈치를 보느라 차마 얼굴까지는 숙이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까지 낮아진 게 아니라 몸만 낮아지는 인사의 겉치레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관계란 상대적이다. 상대 쪽에서 ‘적의 없음, 배려할 것임. 군림할 의향 없음, 낮아질 것임, 친구가 되고 싶음’ 이런 신호를 보내오면 내 쪽에서도 당연히 더한 우호와 존경으로 상대를 대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지나치면 클레의 그림처럼 형식적인 것이 되지만 맘이 원하는 대로의 배려는 무척 자연스럽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눈높이는 상대와 맞추고 술잔은 낮게 들어보자. 단, 고개를 지나치게 숙일 필요는 없다. 비굴을 감춘 게 들키거나, 과장된 마음이 드러나면 명징하던 술잔소리도, 맞춤한 눈높이도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니. 술잔 낮게 들고, 눈높이를 상대에 맞추러 오는 세상의 모든 친구들과 건배를!

 

 

 

 

3. 용서의 시효

 

 

 

 

 

 

 

 

 

 

 

 

 

 

 

 

 

                                                                               

 

                                                           누구나 실수한다. 실수나 상처가 당사자들에게 큰 아픔이긴 해도 그 자체가 문제 되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 후가 더 중요하다. 사람이란 게 간사해서 받은 상처는 잦고 깊고, 준 상처는 드물고 얕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용서는 쉽게 받고 싶고, 용서 하기는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준 상처 중 가장 잊히지 않는 건 건 얌전한 모범생을 순간의 판단 잘못으로 자전거 도둑으로 몬 경우였다. 그 아이와 부모의 눈빛이 나를 용서하지 않았기에 그건 아직 미완의 사죄로 남아 있다. 그들의 분노와 응어리가 현재진행형이라면 당연히 내 사죄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용서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지만 그 역시 내가 판단할 것은 못 된다.

 

 

  영화「밀양」에서는 신이 용서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를 또 한 번 수렁으로 빠뜨리고,「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공소시효가 면죄했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피해자와 관계자를 농락한다. 출옥한 범인이 ‘봐라, 법과 대중이 날 이렇게 용서하는데, 당사자인 너희들만 용서 못하고 있잖아.’ 라는 뻔뻔함으로 용서의 칼자루마저 자신이 가지려 한다.

 

 

  용서의 시효는 가해자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용서의 아버지는 시간이다. 정말로 타인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하면 피해자가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주는 게 양심 있는 자의 태도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잘못을 해놓고도 용서의 시효마저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경우도 있다. 자숙 기간이나 용서의 시효는 한 사흘쯤이면 충분한 것일까. 용서의 기간이 단축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조차 몰라 반문하기까지 한다.

 

 

  법적용서는 공소시효가 정하고, 하늘나라에서는 신이 용서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엔 시간이 용서한다. 그 시간을 정하는 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피해자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스스로를 성찰할 일이다.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다른 피해자인척 하는 건 상처 입은 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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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2-24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왼손잡이는 흔하지 않아서 보면 정말 신기해요. 글씨까지 왼손으로 쓴다면 더 신기하구요.
상대를 배려해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사람들이 가끔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정말 불편해서 관계의 개선이 어렵더라구요.
용서의 시효는 시간이 맞는 것 같아요. 상처가 아물고, 이해가 될 시간이 흘러야, 용서도 가능해지는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3-02-24 15:21   좋아요 1 | URL
꿈꾸는섬님 맞지요? 전 아직도 왼손잡이 로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내심 아이들이 왼손잡이로 태어나길 기대했다니깐요. ㅋ
왼손으로 글씨쓰던 이쁜 내 친구 생각이 나네요.
맞아요. 배려하면 군림하려는 자는 과감하게 끊어야 하고, 용서의 시효는 시간이란 것 동의해줘서 감사해요. 봄이 오고 있습니다. ^^*

프레이야 2013-02-25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저는 이 아침에 용서,라는 말을 곱씹어봐요.
영화 '밀양'의 소회는 저도 몇 년 전 영화리뷰로 길게 쓴 적이 있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도 비슷한 테마구요. 용서, 과연 누구의 몫일까요.
시간이 해결해줄까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결정적으로 풀릴 수 있는
진심이 느껴져야 해결되는데 그게 또 쉽지 않으니.
사회적인 문제로 확장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구요.
어려운 문제네요. 개인적 문제로는 용서라는 말을 담는 것 자체가 안 맞는 것
같아요. 상대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는 문제이니.
며칠 바빴네요. 팜언니, 오늘도 행복하게요~~~

다크아이즈 2013-02-25 20:37   좋아요 0 | URL
프레님은 언제나 제가 생각치 못한 부분을 일깨워주시네요.
맞아요. 어쩜 시간 보다 더 필요한 게 진심이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지나다보면 제 상황의 껄끄러움이 희석되고, 인간의 진심이란 게
원래 성선설에 가깝다면 자연스레 교감되는 게 아닐까, 하는 그런 희망의 시간을 말하고 싶었어요. 그 진심을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개별자끼리는 용서라는 것보다 상호 이해가 더 맞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면 되지요? ^^*

순오기 2013-02-26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주에서 말씀하신 왼손잡이의 로망이 멋진 글이 되었네요.
용서에 대한 것도 그렇고요.
건배할 때 아무 생각없이 잔을 들었는데 그렇게 배려하는 분도 있군요.
세상을 사는 일은 항상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걸 깨달으며 감사를... ^^

다크아이즈 2013-02-26 17:21   좋아요 0 | URL
순오기 언냐님, 멋진 글까진 아니고 정리하고픔 맘은 있었어요.
용서는 시간과 마음의 문제이니 역시 차분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네요.

세상엔 무척 본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 타인은 언제나 내 스승이란 진리... 벅차거나 벅차오르거나 ^^* 크~

inhye6173 2013-03-07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왼손으로 글쓰고 밥먹고 다하는데..! 로망이시라니깐 뭔가 뿌듯해요 잘읽고가요!

종이달 2021-10-2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