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수가 붉어졌네

 

 

  모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았다면『홍까오량 가족』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붉은 수수밭’의 강렬한 인상이 모옌의 원작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을 느꼈다. ‘홍까오량’은 ‘붉은 수수’를 뜻하는데, 이 책 1,2장「붉은수수」및「고량주」부분이 영화의 근간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감독 ‘장이모우’와 배우 ‘공리’를 위한 것이었다.

 

 

  관람객 입장에서 원작가인 모옌까지 주목하기는 쉽지 않다. 원작을 떠난 영화는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이기를 원하고, 개봉 당시는 모옌이 전 지구촌 작가도 아니었다. 웬만한 이슈가 되지 않고는 영화의 원작가를 기억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모옌은 행운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이란 쾌거 하나로 장이모우나 공리 못지않게 ‘붉은수수밭’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연작 중편들로 이루어진『홍까오량 가족』은 항일 무장 투쟁, 애달픈 민중들의 삶, 한 가족의 애증사 등이 일렁이며 붉어가는 수수밭 사이로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읽을수록 울림이 큰 것은 우리의 일제강점기 역사 또한 그 작품 속 궤도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서걱대는 수수잎에 손가락이 베일만큼, 익어가는 고량주에 온몸이 취할 만큼 아련하고 강렬한 이야기지만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은 조금 아쉬웠다.

 

 

  소설가를 이야기꾼과 문장꾼으로 나뉜다면 모옌은 전자에 속했다. 할 말이 넘치다 보니 구성이 산만해져버렸다. 중복되는 에피소드와 반복되는 묘사 때문에 피로함이 몰려왔다. 생생하고 사실적인 표현도 너무 잦으면 독자는 지루해진다.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작가이다 보니 곁가지치기를 덜한 것 같다.

 

 

  목마르다고 끊임없이 두레박질만 할 수는 없다. 효율적인 두레박질은 목을 충분히 축일 때까지 만이다. 선명한 이야기에 분명한 호흡을 기대한 독자라면 책 두께가 조금 더 얇아도 좋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홍까오량 가족』은 이야기와 구성을 동시에 바라는 걸 버린 뒤에야 더 잘 몰입하게 되는 작품이다.

 

 

 

2. 괜한 걱정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시간을 걱정하는데 허비한다. 건강 문제부터 시작해 밑도 끝도 없는 온갖 걱정을 달고 산다. 하지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오히려 걱정한다는 그 걱정 때문에 골치만 아플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 역시 걱정이 많다. 가족들이 좀 더 건강하기를 바라고, 자식들 미래가 평탄하기를 원하며,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기를 욕망한다. 얼마나 현실적 이기심으로 가득한 걱정인가.

 

 

  알고 보면 모든 걱정은 괜한 짓거리이다. 그 말 속엔 미래적 함의가 숨겨져 있다. 오지도 않은 일을 가불해서 생각하는 것이니 비생산적인데다 영혼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과거를 말할 때 우리는 걱정이란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과거는 ‘후회’는 할 수 있을지언정 ‘걱정’할 대상은 아니다. 걱정이란 오롯이 현재 이후의 다가오지 않은 시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지나지 않으니 얼마나 쓸모없는 짓인가.

 

 

  한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을 끌어안고 산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법륜 스님의 강의를 열심히 쫓아다니고, 혜민 스님의 어록을 쉴 새 없이 밑줄 그어도 걱정에서 해방되기는 어렵다. 담백하게 자신을 버리는 게 쉽지는 않다. 어느 누군들 자유를 얻기 위해 팽팽한 삶의 밧줄을 쉽게 놓아버릴 수 있을 것인가. 갖춘 종교인의 경지를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걱정이란 일상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하는 걱정은 타인에겐 사소하게 보일 때가 더 많다.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걱정은 부정을 전제하는 것이지 긍정을 사는 행위는 아니다. 우리가 걱정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걱정을 이만큼 하고 있다’ 는 자기 보상 심리 때문일 것이다. 소심한 자가 쓸데없이 걱정할 때 적극적인 사람은 보란 듯이 행동한다. 걱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을 꿈꾼다.

 

 

 

* 홍까오량 가족 - 번역조차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종결어미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 번역의 기본일 터인데.

                         이유없이, 설명없이 내레이터의 종결어미 방식이 왔다갔다 한다.

                         원작에서 그랬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 ~습니다, ~지요, ~했다 >등이 적절한 설명 없이 마구 혼재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 존칭 종결어미 다 버리고 그냥 <~했다>로 통일하는 게 가장 깔끔한 것 같다. 원작가의 의중이 있었다면 부연 설명이 필요했던 부분이다. 구성이 산만한데 번역까지 정돈이 안 되니 독자도 갈팡질팡. 별 것 아닌데, 문학과지성사는 까다로운 독자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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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22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과 지성사, 라면 꽤 괜찮은 출판사인데요...

걱정에 대한 글에 공감해요. 저만 해도 쓸데없는 걱정을 할 때가 있어요.
"제 삼자에게 설득시키지 못하는 걱정은 걱정으로서의 값어치가 없다."
- 이 말을 제게 하고 싶어요. ㅋㅋ

다크아이즈 2013-01-24 22:12   좋아요 0 | URL
페크님, 원작이 어떤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부연 설명없이 종결어미를 통일하지 않은 부분은 일차적으로 번역자께서 설명 좀 해줬음 좋겠어요. 거기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더 큰 문제지요.

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달고 사는 저인지라 채찍질하고 싶었어요^^*

마녀고양이 2013-01-22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타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걱정이 과연 걱정이 아닐지에 대해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 생각으로 인해, 나 자신을 더 괴롭히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도 들구요.
아마 타자도 동일한 고민을 가진다면, 그것이 자신의 고민이라면 고민할 거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나의 타당화는 내가 해야지, 타인이 해주어야만 한다면 너무 힘들어요...

음, 제가 횡설수설하는 거 같아요.... 실은
바탕 화면이 제 컴터에서는 진한 감빛으로 나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팜언니~ ^^

다크아이즈 2013-01-24 22:17   좋아요 0 | URL
달여우님 말씀 들으니 그렇네요. 열심히 그 쪽으로 연구하시다 보니 절로 깊은 생각이 따라오는 걸까요?^^*
<내가 걱정되니 걱정하는 것>이지, 남들이 <그 걱정은 걱정 아니다>라고 말한다고 그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그 말씀이지요? 이렇게 명쾌한 답을 얻다니? 그럼 걱정한다고 스스로 넘 쫄지 않아도 되지요? 감사합니다.홍홍~~
 

 

 

 

  몇 개월째 왼쪽 어깨가 아프다. 흔히 말하는 오십견이 온 건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데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 팔을 뒤로 젖히거나 위로 올리기가 힘들고, 밤에는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욱신거린다. 병원 가는 걸 싫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나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병원을 찾는다.

 

 

  석회석건염이란다. 어깨 힘줄 사이에 돌이 생기는 것인데 노화현상 중 하나란다. 뼈 사진을 보니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석회석이 쌓여있다. 어깨를 움직일 때마다 그 돌이 다른 조직을 긁어 대서 그렇게 아팠던 것이다. 빨리 왔으면 치료 기간을 줄일 수 있었을 거라고 담당의가 말한다.

 

 

  치료과정의 번거로움과 시간적, 물적인 부담에 앞서 부끄러웠다. 병원 가기가 귀찮거나 두려운 사람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 중의 하나가 자가진단이라는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별 거 아닐 거야’와 ‘큰병이면 어쩌지?’ 사이를 왔다갔다하다 끝내 별 것 아닐 것이라는 자기합리화를 꾀하고 만다. 그 시간에 병원 뛰어갈 것이지, 자가진단을 하고 처방전까지 스스로 써댄다. 그러는 사이 몸과 마음은 황폐해진다.

 

 

  합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모순투성이인 게 사람이란 동물이다. 제 삼자의 일일 때는 대개 객관적이고 옳은 답을 아주 쉽게 내놓는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처한 상황’으로 바뀔 때에는 모범적이고 지당하신 그 답안들은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다. 답안과는 상관없이 끝까지 미루고, 내 식으로 판단하다 일을 그르치고 만다.

 

 

  좋은 일은 예고 없이 와도 안 좋은 일은 예고 없는 게 드물다. 어느 날 갑자기 애인이 헤어지자고 하는 일은 없으며, 충분히 준비했는데 시험을 망치는 일은 없다. 인간에겐 직감이란 게 있어, 변심한 상대의 행동을 눈치 챌 수 있고, 덜한 공부로 생기는 심리적 불안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을 애써 무시하거나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일이 커진다. 모든 일은 예고할 때 빨리 대처하는 게 낫다. 미루어 판단하다 보면 너무 늦다.

 

 

 

 

 

 

 

 

 

 

 

 

 

 

*인간은 몸의 약이 듣지 않음을 알게 되면 마침내 마음의 약을 찾기 시작한다.

-파샤르트

*병도 긴 눈으로 보면 하나의 수양이다.

- 허준

*어리석은 일 중에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이익을 얻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질병은 천 개나 있지만 건강은 하나밖에 없다.

- L. 뵈르네

*질병은 몸의 고장이 아니라 마음의 고장이다.

- 에디 부인

*질병은 인생을 깨닫게 하는 훌륭한 교사다.

- W.NL. 영안

*인간은 몸의 약이 듣지 않음을 알게 되면 마침내 마음의 약을 찾기 시작한다.

-파샤르트

*인간은 타인의 사소한 피부병은 걱정해도, 자기의 중병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탈무드

*건강은 근로에서 오고 만족은 건강에서 온다.

- 스마일즈

*인간은 자신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건강한데도 불구하고 죽어간다고 생각하며, 또 죽어가면서도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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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18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그런 일이 있었군요. 걱정이 되네요.

*어리석은 일 중에 가장 어리석은 일은 이익을 얻기 위해 건강을 희생하는 것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가장 와 닿네요.
저도 예전에 비해 몸이 많이 안 좋아졌는데, 책을 많이 읽어서라고 봐요. 어깨와 목에 디스크 있고 안구건조증 있고 그래요. 그래서 한때 책을 끊어야 하나, 라는 생각마저 했답니다.
이젠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보는 편이에요. 무리하면 벌써 몸의 신호가 오거든요.
컴퓨터 사용도 많이 하면 신호가 와요. 어깨 아프고 눈이 피로해져요.

팜 님, 무리하지 마시고 몸을 많이 아끼세요. 빨리 완쾌되시길 빌겠습니다.
우리 건강히 오래 오래 이곳에서 만나며 살자고요.
그럴려면 지금부터 건강 관리에 힘써야 해요, 우리.^^

2013-01-20 0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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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3: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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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0 08: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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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8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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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0 08: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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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0 17: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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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0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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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1 19: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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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2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깨나 허리 쪽으로 아프다는 분들이 주변에 정말 많더라구요.
팜므님도 아무쪼록 빨리 나으시길 바랄께요~

다크아이즈 2013-01-24 22:24   좋아요 0 | URL
오렌님 말씀처럼 병원 가면 그런 분들 천지빼까리(!)지 뭡니까.
낫지도 않고, 고질병 될까 걱정이옵니다.
오렌님 어깨는 안녕하시겠지요?^^*
 

 

 

 

  1. 애도의 방식

 

 

  누군가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내가 아는 한 그미는 효녀였다. 오랜 병구완을 한 이도, 임종을 지킨 이도 그미였다. 나는 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아니었다. 어머니 곁에서 이미 숱하게 울었기 때문에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것.

 

 

  눈물과 애도는 크게 상관이 없다. 눈물을 많이 흘린다고 애도가 깊은 것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애도가 얕은 것도 아니다. 애도의 양상은 다양하기 그지없다. 애도란 그 대상과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심리적, 정서적 상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를 읽는다. 어머니에 대한 애도 단상집이다. 사진으로 어머니를 추억한『밝은 방』을 읽었을 때 이상으로 신선한 충격이다. 스물셋에 전쟁 과부가 되어 일흔넷에 죽은, 그의 모든 것이었을 어머니를 작가는 애도한다. 노트 네 조각 낸 메모지에다 마음 깊이 어머니에 대한 단상을 이어간다. 이 년에 걸친 그의 일기는 어머니에게 다가가고자하는 작가의 내밀한 어록이다.

 

 

  어머니에 관한 그 어떤 형태의 문학적 완성품을 생각하면서 메모를 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 글이 문학이 될까봐 경계하다가도 결국 문학이 될 거라는 모순을 예감하기도 한다. ‘내 말들이 문학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에 대한 자신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다름 아닌 문학이야말로 이런 진실들에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라고 적는다.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애도일기는 문학적 성과물로 재탄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한 가지 안심인 것은 애도일기가 그 어떤 다른 형태의 문학 작품으로 가공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그의 죽음이 앞당겨지지 않았더라면 그의 애도 일기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 작품이 되는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문학작품보다 때로는 날것의 육성이 더 가슴을 후벼 팔 때가 있다. 온전히 일기로만 살아남은 애도일기를 읽는 것은 독자로서는 행운이다.

 

 

 

 

 

 

 

 

 

             다다다            

<아들이 보는 만화영화 다다다, 이런 아들, 무려 고등 졸업반이다 ㅠ>

 

 2. 열정이 더 중요하단다, 아들아

 

 

  나 어릴 적,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시골에서는 피아노 교습소가 있는지도 몰랐다. 고작해야 어깨너머로 배운 풍금으로 기본 화음을 넣어 '꽃밭에서' 정도를 치는 정도였다.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도시로 나왔을 때는 한 반에 예닐곱 정도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 같았다. 역시 부러웠다. 하지만 한 번도 부모님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웃자란 눈치가 알아서 욕망을 제어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피아노를 배우지 못한 건 관심과 열정 부족 때문이었다. 간절히 바랐다면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다른 길도 있었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 경제력이 확보되었을 때라도 배우면 그만이었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그 환경을 부러워했는지도 모른다. 간절히, 열렬히 원하면 이루게 되어 있다. 그 가난하던 시절, 열성적인 남자 동창은 엄마를 졸라 피아노를 배웠고, 끝내 성악가가 되었다. 진실로 원한다면 환경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렇더라도 그 옛날처럼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하고 싶었던 걸 못했다는 소리를 자식에겐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방학 중인 아들녀석이 무에타이와 드럼, 영어와 일어를 배우고, 여행과 헬스도 하겠다고 했을 때 '무조건 오케이'라고 답했었다. 하지만 방학 전의 욕망은 다만 희망 사항이었을 뿐, 막상 아들은 그 어느 것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방구들 한 쪽을 차지하고 그 동안 못했던(?) 게임만 즐긴다. 그토록 원했던 건전한 활동(?)들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한다. 겨우 영어 공부한다고 제스처를 취하는데 마뜩잖기만 하다.

 

 

  언제나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환경이라면 오히려 아무것도 안 하기 쉬운 게 사람이다. 간절함이 없는 시도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를 이루는 데는 환경이 아니라 의지가 중요하다. 내가 피아노를 끝내 배우지 못한 것은 부모 탓이 아니라, 내 바람이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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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5 09: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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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6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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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1-15 1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악가가 된 동창분의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공자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ㅎㅎ

(子曰 三軍 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삼군의 사령관인 장수를 빼았을 수는 있지만 필부의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만약에 어떤 뜻을 세우고 밀고 나가다가 이런저런 사정상 그 뜻을 접었다면, 그건 애초부터 '진정한 뜻'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겠지요.

다크아이즈 2013-01-16 09:47   좋아요 0 | URL
오렌님 절대공감이요. 사정상 뜻을 접으면 그건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니었음을 절감하는 요즘입니다. 진작에 공자님께서 저런 말을 했다는 게 약오르옵니다.^^*

2013-01-15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6 09: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땀한땀 바느질한 핸드메이드 명품 가방 (친구 작품)

    아들이 밤늦게까지 공부할 때 한석봉 어무이 심정으로 숨어서 안 자고 만들었다 함.

    두 달 걸려서 바느질 완성. 나 같으면 들여다 보다가 속 터져 바늘에 머리를 짓찧었을듯.  

    글쓰기도 어차피 미메시스라면 한땀한땀 지대로 하다보면 그 누구 것도 아닌 저 만의 명품

    가방을 갖게 되는 거겠지.

 

 

 

 

1.    쓰려면 읽어라 - 쓰기의 어려움

 

 

 

  책에 대한 호불호는 취향의 문제이다. 남들이 아무리 권해도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건 나와 맞지 않는 책이다. 억지로 그런 책을 읽겠다고 무리하다 보면 몸과 마음에 나쁜 신호가 온다. ‘그 책 나도 읽었지’라는, 괜한 허영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과감하게 읽기를 포기하는 게 낫다.

 

 

  자꾸 읽다 보면 어떤 책이 좋은지, 어떤 책이 내게 맞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 뿐 아니다. 자주 읽다 보면 어떻게 쓰면 잘 쓰는 것인지도 덤으로 알게 된다. 지피지기해야 백전백승하는 건 글쓰기에도 통용된다. 잘 된 남의 글을 열심히 읽다 보면 글 쓰는 방법은 절로 알게 된다. 물론 방법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건 별개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잘 쓰기 위해선 잘 읽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 너무 많은 답이 있어 답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건 ‘읽기’이다. 주변을 살펴보면 잘 쓰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읽기를 좋아하고 읽는 데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그들은 ‘글 쓰는 법’ 등에 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이미 책 속에서 그 답을 얻었기 때문에 물을 이유가 없다. 반면에 그런 질문을 자주하는 사람들은 책을 읽어야한다는 생각보다는 쓰는 데 더 관심이 많다. 쓰고 싶다는 다급한 열망이, 읽어야 쓸 수 있다는 차분한 여유를 가려버린다.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에 대한 답은 죽을 때까지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쓰는 게 먼저 일까, 읽는 게 먼저 일까에 대한 답은 명확하다. 잘 된 글 안에 잘 쓰는 법이 있다. 글 잘 쓰는 일은 물어서 될 게 아니라, 많이 읽고 깊게 생각해야 된다. 읽기 훈련이 잘 된 이들이 잘 쓸 수밖에 없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자. 잘 쓰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아무나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잘 쓰는 행위 자체는 인내심과의 싸움이다. 그나마 다른 예술에 비해 재능이 덜 따라줘도 극복할 수 있는 게 글쓰기다. 한데, 약간의 재능만 필요한데도 글쓰기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은 왜일까? 이것 또한 확실한 답이 있다. 약간의 재능만 필요한 대신 아주 많은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서이다. 약간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자책만 늘여가니 될 턱이 있나. 

 

 

  자문자답해본다. 글 잘 쓰고 싶은가? 깊이, 섬세하게 읽어라. 그런 뒤엔, 엉덩이 붙이고 군말 없이 쓰면 된다. 단, 글은 머리가 아니라 손으로 쓴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2. 오랜 강도 흐른다  - 올리브 키터리지 <강>편

 

 

 

  그 여자 까칠하다. 다른 사람에게 절대 잘못했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착하디착한 남편에게도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답례를 할 겨를도 없이 남편은 저 세상으로 떠났다. 대범하고, 빈정대는 이면에 여리고 따스한 여자는 그 성격대로, 상처 주고 상처 받기를 반복한다.

 

 

  여자에게 남편의 죽음보다 더한 슬픔은 유일한 혈육인 아들의 무관심이다. 우울증 앓는 아들은 재혼한 아내와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담당의는 이 모든 상처는 엄마로부터 기인한다는 진단을 내린다. 여자의 악다구니, 매질, 냉소적 태도가 아들의 트라우마가 될 줄 그때는 아들도 엄마도 알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여자는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하버드대 출신의 남자는 잘난 척에다 오만한 것으로 마을엔 알려져 있다. 하지만 데이트를 거듭할수록 남자에게 끌린다. 단 한 번도 그 잘난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걸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다. 역시 겪어보지 않은 모든 것에는 판단 유보가 필요해, 라고 여자는 중얼거린다. 동성애자인 딸과 절연한 사연을 털어놓는 남자에게 여자는 깊이 공감한다. 여자 또한 삐걱대는 모자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않던가.

 

 

  여자의 유일한 희망은 죽을 때 숨이 금세 끊어지기를 바라는 일. 남편의 죽음과 희망 없는 아들과의 관계 앞에서 그녀가 바라는 건 그 뿐. 하지만 남자를 만날수록 생의 활기를 얻는 것은 어쩔 것인가. 의외로 보수적 정치 성향인 남자에게 실망하기도 하지만 아픈 남자가 여자를 기다릴 땐 최선을 다해 달려간다.

 

 

  정서적 심리적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노년의 남녀 눈빛은 적요하고 따스하다. 삶은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기에 맞잡은 두 손이 필요한 것. 여자는 아직은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다. 늙은 소도 쟁기질 할 수 있고, 오랜 강은 안으로 깊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여자 나이는 일흔 넷이고, 이름은 올리브 키터리지. 통찰 깊은 소설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동명 소설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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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3-01-12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승우의 저 책....
저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뒤로 쓰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승우는 놀라운 작가여요...

다크아이즈 2013-01-15 00:21   좋아요 0 | URL
완벽하게 쓴 작가더군요.
이진님 말처럼 놀라운 작가...
노회한 아줌마라서 그런지 이진님 만큼 쓰러질 정도는 ㅋ

프레이야 2013-01-1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ᆢ반가운 책 두 권. 구멍 숭숭 난 치즈 같은 삶을 부둥켜 안는 대목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어요. 굿모닝인가요, 팜님. 깊이 섬세하게 읽고 난 뒤 엉덩이 붙이고 앉아 머리가 아닌 손으로 쓰는 글. 이게 정답인데 전 요새 머리로만 쓰고 있어 큰일이에요. 아흑ᆢ

다크아이즈 2013-01-15 00:24   좋아요 0 | URL
프레님 아니라면 올리브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올리브는 살아있는 캐릭터예요.
엄마를 부탁해, 부류의 대척점에 있다고나 할까요.
감사할 뿐 프레님^^*

프레이야 2013-01-1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저 명품 가방이 친구분 솜씨라니 감탄신 연발이에요. 너무 멋져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방!

다크아이즈 2013-01-15 00:33   좋아요 0 | URL
바느질도 대단하지만 집안 건사하는 것도 대단한데다 착하기까지 한 지인...
세상엔 경이로운 사물과 사람이 참 많아요.
프레님도 알라딘에서 경이로운 분인걸요.^^*

마녀고양이 2013-01-13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한때 퀼트에 미쳐있었는데, 솜씨는 그다지...
요즘들어 다시 여러가지를 만들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한데
시간이 나지 않아서 아예 시작하지 않고 있어요. 더 급한게 있다 싶은거죠... ㅠㅠ.

생각해보면, 항상 더 급한게 있어서 밀리는 것들은
여행이나 퀼트가 아닐까 싶어요. 평생 밀리는거 아닐까요? 아휴, 쓰다보니 저 바보같아요.

팜언니, 즐거운 일요일 저녁되셔요.

다크아이즈 2013-01-15 00:29   좋아요 0 | URL
헉, 어느새 그 방면까지 접수를...
달여우님 바지런함에 경의를...
전 손재주는 젬병이지 뭡니까.
것도 타고나야 되는 것 같더라구요.

여행하면서 퀼트하다가 책 좀 보는 것. 생각만 해도 좋습니다^^*

라로 2013-01-13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있으려니 왜 여러군데가 따끔거릴까요???ㅎㅎ( ")
저도 달여우님처럼 퀼트로 가방도 여러개 만들고 한번은 엄마가 피아노 배우실 생각이 있다는
말씀을 하셔서 피아노가방까지 만들어 드렸는데 엄마가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 모습이 갑자기 눈에 선 하네요,,,처음 댓글을 달땐 이 얘기를 하려던게 아닌데,,,암튼
팜님 오늘도 좋은 글 감사드려요~~~.^^

다크아이즈 2013-01-15 00:31   좋아요 0 | URL
나비님이 얼마나 고운 심성인지 이 덧글만 봐도 알겠어요.
피아노 배우시는 엄말 위해 가방 만들어주시는 님이라니...
어머님 힘드시지만 나비님 덕에 거뜬히 몸과 마음 추스릴 거예요.

어서 따뜻한 봄이 왔으면 싶어요.^^*

페크pek0501 2013-01-14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맘에 드는 글은 필사가 최고인 것 같아요. 신경숙 작가도 젊은 시절엔 잘 쓴, 작가들의 소설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고 해요. 한 자씩 베껴 쓰면서 소설 쓰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이죠.
그 다음의 방법으론 외울 정도가 되게 반복해서 읽는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엔 책에 밑줄 친 부분을 여러 번 읽게 되더라고요.
여기서 중요한 건 부지런하기, 인 듯...
아, 저도 '올해엔 부지런하기'라고 일기에 썼는데 잘 되려나 모르겠어요.
벌써 페이퍼를 올린 지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초고도 쓰지 못했으니... 꺄륵~~

페크pek0501 2013-01-14 14:44   좋아요 0 | URL
근데 요즘 팜 님이 열심히 쓰는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갑니다.
나도 분발해야징... 하면서...ㅋㅋ

다크아이즈 2013-01-15 00:35   좋아요 0 | URL
페크님 자문자답 넘흐 재밌습니다.
분발하려고 쓰는 글은 아니고, 그냥 어쩔 수 없이 끼적이는 잡문이옵니다.
페크님처럼 농익은 글 쓰려면 저 몸살앓이 지대 해야 되어요.

참 두 편 글 올리시게 해서 몸살나게 한 죄 크옵니다.
몸 좀 좋아지셨는지요? ^^*

Jeanne_Hebuterne 2013-01-14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궁금해졌어요, 팜므 느와르 님.
왜 읽고 써야 하는 것일까. 다른 이들은 무슨 생각으로 읽고 써야 한다고 생각할까.
(가방에 거의 쇼크를 받고 갑니다!!! 인간이 저런 걸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다크아이즈 2013-01-15 00:38   좋아요 0 | URL
에뷔테른님 제 안테나는 감성, 지성, 논리 지대인 님 글에게로 항상 향하고 있답니다. 아무 생각없이 써야 고통 없는 글이 되는데, 쉽지 않지요.
저도 가방에 쇼크 먹었어요. 인간의 손은 위대하더군요.^^*
 

 

1. 레비나스 입문기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 그 주체와 대상은 오직 ‘나’에 관한 것이었다. 서구의 전통적 존재론을 대표하는 이 명제는 모든 생각을 ‘나’란 인식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전제한다. 그 사유 안에서는 타자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나’란 존재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날 밤 샐 지경인데 언제 주변까지 시선을 둔단 말인가.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이런 생각에 몰두하느라 사유 영역을 타자로까지 넓히는 데는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아 귀환형 사고의 외곬성이 급기야는 전체주의로까지 퍼졌다고 철학자 레비나스는 말한다. 편협한 전체성을 낳는 자아와는 별개로, 타자는 운명적으로 무한자유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이다. 레비나스는 이를 ‘전체와 무한’이란 개념으로 정리했다. (타자를 무한성의 개념으로 본 건 하이데가도 마찬가지.) 타자는 결코 나의 카테고리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타자는 타자로서 무한을 향해 발산하는 속성이 있다. 나의 바깥에서 한없이 자유롭게 떠도는 그 타자를 나비나 잠자리 잡듯이 내 손아귀에 넣고 말겠다는 그 지점에서 세계관은 충돌한다.

 

 

  사소한 예를 들어보자. 지인의 집들이 선물로 포트메리온 찻잔 세트를 사들고 간다 치자. 그 집의 주방엔 알라딘 사은품으로 받은 머그컵이 종류별로 정돈되어 있다. 알라딘 램프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그 머그컵이 우아하거나 고급스러울 리는 없다. 하지만 실용적이고 깔끔해 집주인은 그 컵을 애용한다. 한데 같이 간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 온 이 찻잔으로 바꿔. 하기야 이 유명 브랜드 찻잔을 알기나 하겠어?”

  (포트메리온이 유명 브랜드라는 생각 자체를 집주인은 하지 않을 것인데!)

     

 

 

 

 

 

 

  이 경우 영국제 찻잔의 우위성에 점수를 주는 ‘나’의 전체성은 사은품 머그컵을 애용하는 ‘타자’의 개별적 무한성을 침범한 경우가 되겠다. 생활수준이 비슷하다면 브랜드 찻잔과 실용성 머그컵 사이는 취향의 차이 딱 그만큼이다. 한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파의 존재론적 전체성에 함몰된 우리는 무한 발산하는 타인의 취향이나 의중은 고려하지 않고 내 식의 방식을 전수하려한다. 내 식으로 문화 코드를 바꾸라고 타자에게 충고하기를 즐긴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엄연한 폭력이다.

 

 

  유폐된 우물 안 개구리식 세계관은 스스럼없고 무한한 에너자이저인 타자에 대해 관용적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가 타자에 대한 윤리성을 강조한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그에 의하면 윤리는 모든 것에 우선한다. 독립된 차원인 그의 에티카는 전체성에 대한 경고보다도 우선한다. 물론 여기서 윤리란 타자 앞에서 갖춰야 할 ‘나’의 도덕관을 말한다.

 

 

 

 

2. 자기계발서 단상

 

 

  자기계발서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필요에 의한 남편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덧대자면 그런 책에 편견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것들의 주된 내용은 대개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라거나 성공하려면 생각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옮겨라, 처럼 뻔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알지만 그야말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행동 강령들의 압박 앞에서 독자로서 자괴감과 게으름만 확인할 뿐이니까.

 

 

  한데 좀 더 현실감 있는 자기계발서 한 권을 만났다. 반값 판매 도서를 사면서 함께 주문했는데『마흔, 당신의 책을 써라』이다. 저자 김태광은 처음 들어본다. 첫 책을 낸 이래 몇 달에 한 권 꼴로 책을 냈단다. 마흔이 되기 전에 110권의 책을 써 기네스북에도 등재가 되었다나.

 

 

  수많은 그의 책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한 권의 책은 무척 고무적이다. 독자의 나태한 생활을 질타하고 정신무장을 독려한다. 시간이 나야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없는 시간을 내서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되어야 책을 내는 게 아니라, 책을 내야 작가가 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글에 미친 사람들의 특징은 글 관련 이외의 활동에는 자제심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다. 글쓰기, 강연, 글 가르치기, 독서 외에는 그 어떤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 나처럼 낮잠을 자거나 수다를 떨지도 않고, 술잔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자아실현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게으름과 핑계라나. 성공하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건 진리이다.

 

 

  일상이 평화롭기만 하거나 성공할 마음이 없는 사람, 성공했거나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 등은 자기계발서가 별로 필요치 않다. 춥고, 배고프고, 열망하는 자들만이 그런 책을 펼친다. 열망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자기계발서 한 권 쯤은 읽어도 좋을 계절이다. 비록 물질적 욕망일지라도 그 욕망을 실현한 사람들이 보내는 채찍과 동기부여가 힘을 주는 건 사실이니까.

 

 

  여기서 잠깐, 자기계발서 작가들엔 두 부류가 있다. 성공해서 책을 낸 부류와, 성공하기 위해서 책을 낸 부류. 김태광 작가는 후자이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아리송하긴 하다. 하지만 자기계발서의 현실적 목적은 물리적 성공이고, 궁극적 목적은 자아실현이니 독자로서 둘 다 옳다고 해두자. 진정성은 차치하고라도 두 그룹 다 치열하게 살고 있으니 그 자체로도 본받을 만하지 않은가. 자기계발서는 책 내용보다 그 저자의 정신력을 눈여겨볼 때 더욱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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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01-09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인사가 늦었어요, 추천 1빠는 접니다~ ^^
포토메리온 모르는 1인, 알라딘 머그컵이 좋아요!ㅋㅋ
자기계발서를 낸 분은 분명 성공한 인생이겠죠~
책을 낸다고 다 작가가 되는 건 아닌데, 작가와 저자의 구별을 안하는 거 같아 좀 불만이에요. 저는....^^

다크아이즈 2013-01-10 14:48   좋아요 0 | URL
예술성과 창작성의 유무에 따라 작가와 저자로 나누려는 순오기님 뜻 백 번 이해해요.ㅎㅎ 넌 이런 책 쓰니 저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라고 말하기에도 넘 야박한 듯. 본인들이 작가라고 하는데 굳이 독자가 저자라고 고쳐 말하는 것도 좀 그렇잖아요.
작간들 어떻고 저잔들 어떻겠어요? 저는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부러울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오기님도 제 부러움의 대상^^*

댈러웨이 2013-01-09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D.H. 로렌스의 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해설서보니까 여기서도 타자성 운운하면서 나오길래 일단은 휘리릭 덮었어요. 저는 이 타자, 혹은 타자성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어려워요, 팜므느와르님. 로렌스 소설 다 읽고 작품해설집 볼 때 공부좀 해야 겠어요. (아...저 지금 너무 창피한 소리 하고 있나요? --;)

자기계발서 하면 저는 론다번의 시크릿을...한때 열심히 믿었... --; 오래가지는 않지만, 그렇죠. 자기계발서가 고무적이긴 하죠. 그나저나 저도 알라딘 컵 하나 좀 있어봤으면... 팜므느와르님 알라딘 컵 디게 많네요. ㅠ.ㅠ

다크아이즈 2013-01-10 15:00   좋아요 0 | URL
댈러님 저 원래 철학책 안 좋아해요. 어려버서... 한데 우연히 이 개념을 풀어 쓴 강신주의 위의 책 한 부분을 보고 꽂혔지 뭡니까. 다른 철학 부분보다 이해하기 쉽고 공감이 막 가더라는...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넘 재밌는 거예요.
누군가 철학 개념을 <예시를 팍팍 들어서> 설명 좀 해주는 글 좀 써줬으면... 소피의 세계,도 뜬 구름인데다 두루뭉술하잖아요. 그런 책 많을 것 같은데 몰라서 헤매고 있습니다.

로렌스 소설에서 타자성이 어떻게 언급되는지 궁금해지는 걸요.
다 읽고 말씀해 주시어요.^^*

oren 2013-01-09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의 글 가운데 자기계발서에 관한 대목을 읽다가, 문득 제가 군대에 근무할 때 끄적거렸던 독서노트를 우연히 펼쳤더니, 이런 말이 쓰여져 있네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겠죠.
* * *
오늘의 금언(1984.9.20,수)
수고가 많지 않은 자에게 인생은 혜택을 베풀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로마>

다크아이즈 2013-01-10 14:57   좋아요 0 | URL
오렌님 말씀이 딱 맞지요. 세상에 공짜 없고, 혜택은 수고 뒤에 따르는 법이지요. 해서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체력과 의지력이 안 따라 준다는... 오렌님 보면서 힘을 얻습니다. 용기 얻으러 마실 자주 나갈게요^^*

프레이야 2013-01-1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매일 커피 마시는 찻잔ㅋ
근데 전 왜 알컵이 오질않죠. ㅜㅜ
타자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 별로에요.  우리모두 하나되자느니ᆢ그런것도요. ㅎㅎ
팜님, 굿모닝이에요^^ 울적한시간도 흘러가겠지요. 훌쩍~ 말에요.

다크아이즈 2013-01-10 16:03   좋아요 0 | URL
아휴, 프레님 저와는 비교가 안 되지요. 저는 책 사서 따라오는 거고, 프레님은 그야말로 알라딘에서 선물로 주는 거잖아요. 오늘 내일, 이쁜 컵 배달되지 않을까요?ㅋ

글쵸? 타자는 무한하고 개별적이며 전방위적인데 고정된 '나'가 그걸 관장하겠다고 나서니 문제가 되는 거지요. 우주적 타자를 상대해야 하니 모든 '나'들이 얼마나 힘겹겠어요. 이것이 인생인 것을...ㅠ
프레님, 며칠 꿀꿀했던 기분 오늘 좀 나아졌어요. 님 위로도 컸다는^^*

마녀고양이 2013-01-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닭과 달걀 중 저도 아리송하네요. ^^

포트메리온 찻잔이 참 예쁘네요, 굉장히 우아해요... 탐나는걸요.
그리고 포트메리온과 알라딘 컵에 관련하여 '침범'을 언급하신 부분, 무한 공감합니다. 우리는 서로 이런 저런 침범을 많이 하는데 얼마나 참아줄 수 있고 허용할 수 있는지가 결국 관건 같아요. 어떤 이는 허용치가 높고 어떤 이는 허용치가 낮고, 하지만 침범을 당하면, 뭐랄까, 공격당하는 것 같아서 자동적으로 방어를 시작하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충고란게 그다지 효과가 없나봐요, 특히 저같은 독립적이고 자기 주장 강한 사람은 말이죠... ^^

추신. 알럽 컵은 제작년이 제일 별루였고, 작년이 젤 이쁜거 같아요....
벌써 세개 탔는데, 하나 더 기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다크아이즈 2013-01-10 15:22   좋아요 0 | URL
우아한 포트메리온보다 실용적인 알라딘 컵이 좋은 게 문제라는...
우리집은 온통 알라딘컵 마니아.
저것 말고도 딸내미, 아들내미 기숙사에도 각 한 개씩 분양했다는 전설이^^*
이와사키 치히로의 <눈 오는 날의 생일>- 산타 모자에 빨간 장갑 낀 꼬마, 버전은 언제적 컵인지요? 전 그거 넘 이쁜데 올해는 밋밋하네요. 그래도 빨간색은 하나 더 갖고 싶다는...

침범 당하면 공격성 방어 기제가 작동하는 건 맞아요. 오늘 누가 알랭 드 보통 책 별로라고, 그런 책 권하느냐고 저에게 완곡하게 말했을 뿐인데도 전 그걸 침범 당했다 생각하고 심리적으로 벌써 공격적 자세가 되지 뭡니까ㅠ.

달여우님 짧지만, 전문적인 통찰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몰라요. 에브리데이 감사지요^^*

다크아이즈 2013-01-1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실수 갈쳐주신 익명 분 무척 감사드립니다.
방금 고쳤습니다.ㅎㅎ 복 받으실거예요. 덧글은 삭제했으니 양해 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어요.

페크pek0501 2013-01-10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과 커피 잔과 자기계발서의 조합이라...
저도 이런 글 써 보고 싶어요.

팜 님처럼 새벽에도 글을 쓰는 그런 정신이 저에게 필요한 듯해요. ㅋ

다크아이즈 2013-01-10 18:23   좋아요 0 | URL
페크님,설마 낯설게하기 기법 뭐 이런 걸 염두에 뒀을 린 없고,
그냥 눈에 띄길래 조합한 죄밖에 없어요.ㅋ
페크님은 지금도 충분히 유니크한 방식을 고수하고 계신걸요.^^*

새벽에 쓰는 건 어쩔 수 없을 때예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