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캄보디아에서의 1달러

 

 

캄보디아에서는 1달러의 힘이 세다. 앙코르와트의 도시인 씨엠립에서는 적어도 그렇다.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1달러의 위용은 유감없이 발휘된다. 비자와 입국을 담당하는 심사대를 통과하려면 1달러의 웃돈이 필요하다. 일렬로 앉아 있는 담당자들은 눈을 내리깐 채 조용히 ‘원딸라’를 외친다. 입국 수속 때 웃돈이 필수처럼 따라붙는 곳이 이곳 캄보디아란 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은 터라 요구하는 그들에게 1달러씩을 헌납해야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다. 입국을 하려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는다. 웃돈을 주지 않으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입국 지연을 시키기 때문에 팁 요구를 들어주는 게 좋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불합리한 관행조차 그 나라의 문화려니 하는 마음이 있어야 편한 여행이 된다.

 

 

캄보디아에서 1달러는 어디서건 유효하다. 호텔 매너 팁은 당연한 거고, 급할 때 도움을 주던 현지 보조 가이드에게도 1달러,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꼬마 악동에게도 1달러, 수상가옥촌 배 위에서 앵벌이하던 아기에게도 1달러. 그렇지, 전신 마사지하던 안마사에게는 고마운 나머지 5달러의 팁을 건네기도 했구나. 그러고 보니 입국 심사 때만 강제적 팁이지 나머지는 스스로 우러난 팁의 행렬이었다. 단 며칠간의 씨엠립 여정은 그렇게 1달러에서 시작해 1달러로 끝나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버릇 되는데다 자생력을 잃게 하니 팁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과연 그럴까. 자생력은 정치적 여건이 만든다.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을 다그칠 수는 없다. ‘기브미 초코렛’을 외치던 때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때도 초콜릿을 건네는 쪽이 옳았지, 자생력 운운하며 때 묻은 고사리 손을 외면한 쪽이 옳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구조적 가난과 부패 앞에서 백성은 언제나 무죄이다. 오직 정치에 그 죄를 물을 일이다. 애절하게 구걸하든 교묘하게 강탈하든 그들에게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단죄의 제일 대상은 백성을 방치하거나 그 상황을 즐기는 정치세력일 뿐이다. 잠시 본 캄보디아는 1달러의 힘에 갇혀 있는, 아직은 가난한 나라였다.

 

 

맨발의 순정한 눈빛들, 1달러가 목적이다.

 

 

 

사원 입구에서 큰 소리로 글 읽는 귀요미 아해들. 역시 1달러를 위해.

 

 

 

수상가옥촌의 원딸라 아기.

캄보디아 빈민 또는 베트남 보트 피플 출신으로 이루어진 톤레샵 호수의 가옥촌.

 

 

 

오빠는 노 젓고, 여동생은 원딸라 손짓하기.

 

 

 

수많은 사원 중 최종 목표점인 앙코르와트 원경.

 

 

 

 

 

 

 

 

 

 

 

 

 

 

 

 

 

 

 

 

2. 옵션 인생

 

알라딘 친구 아롬님이 새 차를 샀다. 와우, 그것도 발렌타인데이를 맞아 남편분을 위해 통 큰 선물을 했다나. 부러워라. 어디 흠 잡을 데 없는 아롬님. 비슷한 연비의 도요타나 혼다에 비해 조금 싸기도 하고 애국도 하고 싶어 산타페를 샀단다. 친구의 선택에 무조건 힘을 실어주었다. 국내에서보다 괜찮은 가격인데다 서비스에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십여 년 이상 그 차종을 몰았던 남편도 별 불만이 없더라는 말로 나는 아주 잘 샀다고 응원을 했다.

 

 

근데 아롬님 말이 의미심장하다. 차를 사긴 했는데 사기 당한 기분이란다. 알람 장착하고 방수 코팅하고 등등, 약간씩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차 값이 올라갔기 때문. 공감하는 바가 없지 않지만 현실이 그러므로 나는 이런 카톡 문자를 전송했다. “기본으로 시작해 옵션으로 끝나는 게 인생이다.” 라고. (이 말 써먹어도 되냐고 하는 아롬님께 맘껏 그래도 좋다고 했다. 나 역시 써먹을 거라 했다.ㅋ)

 

 

그렇다. 짧은 여행에서도 그런 걸 느낀다. 패키지여행의 최대 묘미는 싼 값으로 편한 여행을 할 수 있는 거다. 항공료도 싸고 숙박비도 할인이 된다. 자유 여행에 비해 움직임이 타이트하고 내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자유여행에서 느껴야 할 불안이나 압박에 비하면 참을 만하다. 언어가 자유롭지 못하고 여행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는 패키지여행만큼 편리한 것도 없다.

 

 

하지만 패기지 여행의 최대 약점은 바로 옵션이다. 관광지마다 상점을 순회하는 것이 애교 섞인 불만이라면, 관광 코스를 덤으로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뭉근한 압박이 된다. 이럴 경우 나는 심리적 · 신체적 위해가 걱정 되지 않는 한 무조건 옵션을 선택한다. 어차피 여행사에는 옵션 항목 전제하에 일정을 짠다. 그러니 옵션 사항보다 나은 일정을 감행할 자신이 없으면 그 일정을 따르는 게 속편하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옵션은 기본에 없는 쾌락이나 즐거움을 수반한다. 그렇다고 누구나 옵션을 택할 이유는 없다. 내 책무를 줄이고 싶을 때 기본을 속삭이고, 내 위안을 구하고 싶을 때 옵션을 외치는 게 삶이기 때문이다. 기본 없는 시작 없고 옵션 없는 마감 없는 게 생이더라. 중요한 건 기본이든 옵션이든 한 번 택했으면 그걸 즐기면 그만이라는 것.

 

 

앙코르와트에서의 소년 스님의 망중한. 저 눈빛을 담은 것만도 감사한 일.

 

 

 

수상가옥촌의 젊은 엄마 사공. 미소가 선하다. 주민들이 젊은데다 아이들이 많아서 의외였다.

 

 

 

이행나무, 라고 가이드가 말하던데 사원마다 높이 솟았다.

 

 

 

앙코르와트 측면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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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5-02-16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본으로 시작해 옵션으로 끝나는 게 인생이다˝
하하하~~~
유익한 여행을 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

다크아이즈 2015-02-16 15:08   좋아요 1 | URL
페크님 여행기도 기대할게요.
이번 여행은 한 마디로 짧은 여행 긴 여운이랄까요.

라로 2015-02-16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니도 전신마사지 받으셨어요!!!!!! 완전 부럽!!!ㅋ
몇 번 받으셨어요????ㅋㅎㅎ 세실은 두 번 받았다네요~~~부럽부럽
1달라~~~ㅠㅠ 예전 우리도 그랬죠!!ㅠㅠ 베트남도 그럴까요???? 아이들에게 구걸을 시키는 군요~~~ 마음 약하게,,,세실님 세부에서도 공항직원 비리에 대해 말했는데 거기도!!!!ㅠㅠ
저 앙코르와트 전경 언니가 찍으신 거에요???? 완전 예술!!!!!

다크아이즈 2015-02-16 15:17   좋아요 1 | URL
딴 건 몰라도 전신마사지 강추!!!
단체 여행이다 보니 전신마사지 추가로 받을 수가 없었는데, 것도 요령껏 미리 얘기하면 일정을 잡을 수도 있겠더군요.
발마사지만 하는 사람들은 다들 후회해요.
전신마사지는 남자에게 받아야 제격. 저는 가이드가 시킨대로 남자에게 받아서 본전(?) 뽑았는데, 제 일행은 여자가 편하다고 여자에게 받았는데 요령만 늘어서 시원하질 않았대요. 것도 미리 알고 가면 좋을 듯.


ㅋㅋ 저 사진은 잘 찍은 게 아니에요, 시아님.
요즘 사진 배우는 중인데 진짜 고수들 넘 매혹적이게 찍어요.
저건 그냥 원경, 구도도 평범, 날씨도 사진 찍기엔 안 좋아서 사진 질감도 흐릿... 아무튼 잘 찍게 돼서 자랑하는 날이 오길 바라요. 먼 훗날 얘기겠지만~~

[그장소] 2015-02-16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좋다.위험하게도 유적지나 오래된 사찰에 가면 내가 먼지로 사라질 것같아서
막 그리워요. 이 무슨 심리지 ?

다크아이즈 2015-02-16 15:15   좋아요 1 | URL
사람들이 너무 많아 먼지로 사라질 틈도 없어요.
그러니 먼지로 사라질 기대는 하시지 않는 게 좋아요. ㅋ
넘 조용하거나 숙연하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먼지로 사라지고 싶단 생각 저도 가끔씩 해요.

[그장소] 2015-02-16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절도 따로없는 곳이라 그럴까..퇴적같이 쌓인 먼지가 나인지. 세월이나인지...
발에 채일까 겁나서 ...ㅎㅎㅎ
그러니까 순간 고요해지면 무섭겠어요.

다크아이즈 2015-02-18 08:40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은근히 낭만적이시닷!
너무 조용한데 있으면 그런 생각 들지요. 먼지가 나인지, 내가 먼지인지, 시간이 먼지인지 나인지 등등의 상념에 휩싸이게 되는...

세실 2015-02-18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패키지가 싫어요. 옵션은 거의 필수로 해야하고, 쇼핑도 의무고...
이번 세부여행때 옵션만 3십만원!
자유여행의 그리움이 새록새록 합니다.

앙코르와트 가보고 싶기는 하지만....망설이게 됩니다^^
입국통과때 1달러면 애교인걸요? ㅎ

다크아이즈 2015-02-18 08:39   좋아요 1 | URL
그럼에도불구하고 패키지가 편하긴 해요. 따지고 보면 돈도 덜 들어요.
언어가 되고 용기가 있으면 당근 자유 여행이 낫지요. 자유여행이 주는 신경 쓰임도 만만찮을 것 같아요. 셋이서 다녔는데 자유여행이라면 리더 역할 맡은 사람이 엄청 힘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ㅋ 아지매끼리 여행에는 패키지가 학씨리 부담이 덜한 면이 있어요.

입국 때 2달러 들었어요. 시작하는 지점에서 여직원에게 한 번 삥 뜯기고, 마지막 지점에서 남직원에게 또 뜯기고 ㅋ. 심하면 세 번 뜯기기도 하는데 그날은 모두 2달러씩 헌납.

라로 2015-02-18 10:47   좋아요 0 | URL
2~3달러면 애교로 뜯기지요, 뭐~~~~!! 여기선 식당을 가도 팁이 최소한 3달라는 내야 하니까. 혼자 가서. 정말 애교로 느껴지는 삥이네요~~~ㅋㅎㅎ

[그장소] 2015-02-18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지인중에 지금...여행중인 언니가 있는데..방콕쪽..ㅎㅎㅎ...먼지 날리는.사진.잔뜩 투척해주겠네요...

저 은근 아니고.대놓고.낭만찾는데~^^
아하하핫~ 나ㅡ잡아봐라~~~ 했다간 한대 맞겠죠!!??ㅋㅋㅋ 이틀 날을 새니 이제 정신이 살짝 ㅠㅠ

2015-04-11 0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웬만해선

 

동창모임을 앞두고 한 친구가 더 이상 모임에 합류하지 못할 것 같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분위기 메이커에다 주변인을 챙기는 넉넉함 덕에 모두 의지하던 친구였다. 멤버들이 전국에 퍼져 있어 겨우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한 상황인데 못나올 정도로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다.

 

 

친한 한두 명은 사정을 알 터이나 대부분은 상황을 잘 모르니 카톡 단체방에는 불이 났다. ‘희정이가 빠지면 나도 탈퇴다, 회장은 책임지고 희정이를 고대로 모셔 놔라, 희정이 없는 모임은 연탄 없는 난로다.’ 등 남자애들의 농 섞인 걱정 문자가 올라왔다. 카톡방에서 나가 버린 희정이가 그 문자들을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 중 한 문자에 눈길이 간다. “웬만해선 안 올 애가 아닌데.” 이 한마디 안에 희정이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음을 느꼈다. ‘웬만해선’이라는 매혹적인 한정어 때문이었다.

 

 

누군가로부터 ‘웬만해선’ 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만 살아도 잘 살고 있는 거다. ‘웬만해선 그럴 사람이 아냐, 웬만해선 그렇게 힘들어 할 애가 아니지, 웬만해선 지치지 않을 사람인데, 웬만해선 늘 남을 우선하던 사람이지.’ 등의 예문처럼 ‘웬만해선’이라는 말이 타자를 향할 때는 참으로 듣기 좋다.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의 최대 표현법 같기 때문이다.

 

 

반면에 ‘웬만해선’이라는 말이 스스로를 향할 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웬만해선 내가 이런 실수 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흥분하지 않는데, 웬만해선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는데.’ 등등의 사례처럼 ‘웬만해선’이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남발하면 신뢰가 반감된다. 자신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타자에게 바라는 변명으로 활용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웬만해선’ 이라는 말은 타자를 이해하거나 감싸주고 싶을 때 더 어울린다. 스스로를 향하는 ‘웬만해선’이라는 말은 아낄수록 좋다. 꼭 써야 한다면 변명이 아니라 자기반성용이라야 한다. 역시 실천이 어렵다. 그나저나 웬만해선, 이라는 다사로운 수식어를 받는 희정이에게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2. 물은 낮은 곳으로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의심해본 일 없는 그 물리적 진실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강어귀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사한 뒤부터 짬이 나면 강물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남달리 풍부한 서정적 심성 때문이 아니라 시시때때로 가늠하기 어려운 물결 방향 때문이었다.

 

 

상식으로야 바다가 보이는 쪽이 낮은 쪽이니 그곳으로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물길은 하루에도 심심찮게 그 방향을 바꾸곤 했다. 아침나절 분명 뭍에서 바다로 흐르던 물줄기가 오후가 되면 바다에서 뭍을 향해 바뀌어져 있곤 했다. 신기하면서도 의문스러웠다. 급기야 ‘모든 강은 바다로 모인다’는 불변의 진리를 이론으로만 성립하는 헛말이라고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강 하구에서는 물이 역류해 내륙 쪽으로 내몰리기도 한다는 제멋대로의 결론을 내려놓기까지 했다. 아침에 바다로 흐르던 물이 오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륙 깊숙한 곳으로 밀리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알았다. 물결 때문이었다. 지형 특성상 하구는 강폭이 넓은데다 강심의 높낮이가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물 흐름이 완만하니 바람 없는 날에는 호수처럼 강 물결이 잔잔하다. 하지만 강한 서풍이 불어오면 바다로 향하는 물결은 파도가 몰려오는 것처럼 드세게 일렁인다. 도도한 물줄기 본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동풍이 몰아치면 물결은 방향을 틀어 내륙을 향해 밀려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물결 표면의 방향이 바뀌는 것이다.

 

 

거꾸로 흐르는 강은 없다. 바람결 따라 표면의 물결이 거꾸로 반사될 뿐, 속 깊은 물은 변함없이 바다로 흐른다. 어떤 사안 앞에서 그것이 잘못되어 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제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겉 물결이 역류한다고 물길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본질의 물은 위에서 아래로 묵묵히 흐른다. 그 깊은 속은 결코 역류를 허락하지 않는다.

 

 

 

   

3. 치환의 기만

 

문화의 다양성은 시각의 차이에 기인한다. 한류 바람을 타고 ‘K-팝’ 못지않게 ‘K-드라마’도 해외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분석 하나. 우리 드라마는 서구 시각에서 볼 때에 불편함을 유발하고 의아함을 살 수도 있다는 것.

 

 

얼핏 떠오르는 몇 장면. 연적에게서 여주인공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여성의 손목을 낚아채는 남자, 테스토스테론 과다 분비를 검증 받기라도 하듯 여주인공을 벽에 밀어붙이는 남자, 마음을 열지 않는 여주인공의 내숭만큼 쌓인 제 울분을 자랑하듯 주먹으로 유리창을 내리찍는 남자, 등이 불편 유발 장면의 대표적 예이다. 한국 드라마 시청을 위한 안내 매뉴얼이라도 만들어야 할 만큼 서구적 시각에서 보면 이런 장면들은 이해가 되지 않고 불쾌한 모양이다.

 

 

문화는 길들여짐이다. 관습화된 암묵적 약속이 모여 문화가 된다. 적어도 국내에서는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남자가 여자의 손목을 낚아채거나, 벽에 밀어붙이는 행위 등은 ‘남성다운 멋’으로 치켜세워지거나 용인되는 분위기다. 드라마에 몰입하는 대부분의 시청자는 그 장면에서 폭력이나 성차별을 먼저 읽지는 않는다. 남자는 강하고 멋있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장면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 그것들이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거의 하지 못한다.

 

 

반면에 그들이 이런 장면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로 본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나는 강한 남자이고 내 여자 내 맘대로 보호(?)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라는 시각이 통용되는 사회를 이해 못하는 것이다. 무서운 건 그런 장면을 보면서 공감하고 박수치는 이는 다름 아닌 우리 여성 스스로라는 것. 관습적 수요가 있으니 맹목적 공급이 따르는 셈이랄까. 어떤 환경에서는 물리적 액션이 낭만적 정서로 봐지기도 하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폭력적 의아함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한 진실.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게 얼마나 주관적 기만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4. 투사와 감정이입

 

심리학 용어에 투사((projection)라는 게 있다. 타인에게 무의식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을 일상용어로 바꾼다면 ‘남 탓’ 쯤이 될 것이다. 투사에 대한 개념을 지금보다 덜 이해했을 때는 감정이입이란 말과 헷갈렸다. 타자의 상황을 빌려온다는 점에서는 투사나 감정이입이나 같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감정이입이 타자의 상황에 동조하고 수긍하고 몰입하는 내 감정이라면, 투사는 타자의 상황을 통해 잘못된 나를 빼버리거나 부정한 채 타자를 비난하는 내 심리를 말한다.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것인양 동화되는 것은 감정이입에 속한다. 어린이집에 보낸 아이가 열악한 보육 여건에 방치되었다거나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도했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그 아이 편에서 분노하고 동조한다. 겪지 않아야 될 상황에 처한 아이가 내 아이 같고 내 이웃 같기 때문에 저 깊은 곳에서 본능적인 흥분이 솟구친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상처 입은 아이나 엄마에게 절로 공감하게 된다. 감정이입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남의 슬픔이나 기쁨 앞에서 내 행위의 저속함을 방어하기 위해 남 탓으로 돌리는 것은 투사에 속한다. 어린이집 아이가 열악한 보육 환경에 방치되고 폭행을 당하는 것은 내 순간의 실수는 있을지 몰라도 내 잘못은 아니다, 라고 책임 전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근무 여건이 맞지 않는 사회 환경 탓이고, 보살피기엔 너무 손이 많이 가는 아이 탓이다, 라고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잘못을 돌린다. 인간이기에 이런 무의식적인 자기방어본능이 발동하게 된다. 투사의 전형적인 예이다.

 

 

인간은 감성의 동물인 동시에 자존감의 동물이다. 예술이나 일상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타자에게 동화되는 것도 인간이요, 용납할 수 없는 부정적인 행동이나 감정을 남에게 뒤집어씌워 죄의식을 덜고 싶어 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 심리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두 본능을 적절히 제어하는 과정이 곧 도덕적·보편적 가치 판단 훈련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5. 비굴한 사회

 

박노자 교수의 신작『비굴의 시대』가 배송되어 왔다. 예상했던 대로 그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암울하다. 하기야 사회학자의 분석이라는 도움을 빌리지 않아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이 얼마나 갑갑하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날마다의 경험으로 알게 된다.

 

 

우리 현실을 지배하는 가장 큰 흐름은 자본 이데올로기이다.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사회는 내남할 것 없이 그것에 경도되어 모든 가치 판단을 돈과 연관 짓는다. 국민 대부분은 중하급 월급쟁이이거나 영세한 자영업자들이다. 그들에겐 능동적 힘을 발휘할 기회도 패기도 없다. 나머지 십 퍼센트도 안 되는 자산 계급이 이 자본주의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착각하고 길들여진다. 노력하고 몰입하면 그 십 퍼센트, 아니 일 퍼센트의 그룹과 같아질 수도 있을 거라고. 어쩌면 그런 무모한 착각 덕에 자본주의의 페달을 밟는데 적극적 동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못 가진 자가 득을 취할 일은 거의 없다. 극소수인 가진 자를 위해 수많은 보통 사람 또는 그 이하의 구성원들이 그들을 떠받치는 구조, 이것이 천민자본주의의 실상이다.

 

 

국가와 자본은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데다 교묘하고 조직적이다. 가진 자나 권력자가 갑질을 해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지속되면 불의에 거부하거나 투쟁할 힘마저 잃어버린다. 자본이 만든 비겁의 굴레에 구성원은 머물고 자본은 그 시대를 백분 활용한다.

 

 

비굴한 시대상의 좋은 예시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처럼 정당한 분노는 그들의 것이지만 그 분노를 제대로 부려놓을 수가 없다. 불합리와 부조리의 난장 앞에서도 적극적 연대나 공감은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자본의 노예에서 자유롭지 못한 개별자가 당장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희망 잃은 시대를 진단하는 활자 앞에 밑줄 긋기조차 착잡하다.

 

 

 

 

6. 어두워지는 시간

 

변함없이 고만고만하기만 한 저녁, 어두워지는 시간의 깊이만큼 검은 공허감이 밀려온다. 습관처럼 한 편의 시를 읽고, 한 문장의 산문에 밑줄을 긋는다. 길 떠나 한뎃잠 설친 간밤의 피로가 여전하다. 그래도 문맥은 제대로 와 가슴에 꽂힌다. 누가 뭐래도 읽고 쓰는 일의 직속일 때가 가장 평화로운 자극이다. 최승자의 시 한 편을 묵독한 후 글벗이 건넨 김연수의『소설가의 일』을 펼쳤다. 앞장 색지에 빼곡하게 남긴 벗의 친필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님을 알게 된 것, 제 인생의 크나큰 행운입니다. 이 책을 읽으며 밑줄 팍팍 그었고, 도전도 얻었고 용기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끝내 희망에 겨워 울기도 했습니다. 아직 신파에 잘 빠지는 어설픈 초보라 과하게 감격했는지도 모르겠으나, 님께도 분명 의미 있는 책일 거라 여겨 삼가드립니다.” 친구가 되는 일의 숭고함, 한 권의 책이 주는 용기와 도전 정신, 그 책이 내게 전해져 같은 의미를 줄 것이라는 확신, 인용한 몇 구절 속에는 무릎 담요 같은 포근한 진심이 담겨 있다.

 

 

김연수 산문의 일부 요지는 이렇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에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쓰기에 왕도 없다. 매일 읽고 쓰면 된다. 쓰고 싶다고 타령할 그 시간에 그냥 쓰면 된다. 쓰는데 재능 같은 건 없고 재능은 잠겨 있지도 않다. 그것이 글쓰기의 비밀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 사람들이 정치를 하며 살고 있다 / 경제를 하며 살고 있다 / 사회를 하며 살고 있다 // 꿈인지 생시인지 / 나도 베란다에서 / 화분에 물을 주고 있다” 최승자의 「물 위에 씌어진 3」의 시편이 김연수의 산문 내용과 겹쳐진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간다. 뭉근한 열정의 김연수는 매일 소설을 쓰고, 꿈인지 생시인지 기로에 선 최승자는 시간 맞춰 화분에 물을 준다. 골방에 틀어 앉은 또 다른 누군가는 글밭에 씨를 뿌린다. 종이의 직속이 되어 글씨를 뿌린다. 쓰는 자에겐 그것이 정치요 경제이며 사회의 전부다.

 

 

 

   

7.  언브로큰

 

오랜만에 조조로  개봉영화 한 편을 봤다. 언브로큰. 일본 극우파들이 자국 내 상영을 결사반대한다는 바로 그 영화다. 감독을 맡은 안졸리나 졸리에 대해서도 입국 금지 서명 운동을 펼칠 정도라나. 호들갑을 떨며 그들이 흥분할 만큼 일본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영화일까 싶은 호기심에 개봉 첫날 일찌감치 달려가 보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의 주된 내용은 베를린 올림픽에 달리기 선수로 출전한 바 있는 한 미국 남자의 일본 제국주의 포로 생환기이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점잖은 수위의 묘사가 이어졌다. 원경험자의 증언을 충실히 반영하느라 그런지 스토리텔링에 과장이 없었다. 밋밋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처럼 조금 지루했다. 고춧가루와 젓갈이 잘 배합된 김장김치를 기대하고 독을 열었는데 심심한 동치미가 담긴 독을 만난 기분이랄까. 그 어디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전시 일본국의 잔혹한 포로 학대기는 없었다. 어느 집단에서도 있을 수 있는 고만고만한 포로수용소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인 포로를 산 채로 장작처럼 태웠다거나, 죽인 다음 인육을 먹었다거나 하는 극단적인 장면은 그림자조차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가 당하는 폭행과 수치심은 관객이 몸서리 칠 정도의 극한의 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 장면들에 저 난리를 칠까 싶을 정도로 순화된 장면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본 우익집단의 극단적인 보이콧 현상이 도리어 입소문이 되어 이 싱거운 영화의 롱런을 돕게 될지도 모르겠다.

 

 

반성을 하면서 몽니를 부리면 그나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반성은 간데없고, 원폭 피해자라는 결과적 아픔만을 내세워, 진짜 피해자의 근원적 고통을 외면하려 드는 그들의 합리화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만이 만행이 아니다. 인간 실존의 위엄을 짓밟았던 일본 제국주의의 실상도 그에 못지않았다. 가장 직접적인 피해 국민으로서 영화보다 더한 잔혹성을 연출했던 그들의 잘못이 반성으로 이어질 때까지, 그들의 실체를 온건하게나마 전하는 이 영화가 오래 버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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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23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3 1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1-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결방향, 관찰에서만 얻을 수 있는 배움. 인상 깊었습니다.
일본이 원폭피해자를 부각시키는 것이 투사라는 것, 이 글을 통해 바로 적용하게 되네요. 글의 부분들이 글전체를 설명해주고 포괄하는 정말 좋은 글이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5-01-24 10:16   좋아요 0 | URL
님 어떻게 이쁜 어감으로 불러야할지. 손수 한번 닉 불러주세요^^
강하구의 물결을 건네다 보는 것만으로도 심심하지 않답니다 님이라면 더 깊은 사유를 건지셨을 거예요^^

AgalmA 2015-01-24 10:29   좋아요 0 | URL
보이는대로 불러주시면 돼요^^ 아갈마...
바닷가에서 자주 살았어서 바닷물 위의 바람소리랑 물결소리 참 좋아했어요. 수영보다는 물 위에 가만히 떠있는 걸 더 좋아하기도 해요. 귓가의 바람소리와 그 둥실거리는 느낌, 다크아이즈님도 잘 아실 거예요 :)

라로 2015-01-24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을 바꾸시니 새로운 각오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올해는 다크아이즈님의 고품격 글을 자주 접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하옵나이다~~~!!!

다크아이즈 2015-01-24 10:05   좋아요 0 | URL
각오는 무슨ㅠ
각오라면 알라딘 안 오고도 거뜬히 살아 있을 것, 쯤이 될까요
다크아이즈는 알라딘 첫 닉이었어요 초심 찾기가 되나 그럼 ㅋ

hnine 2015-01-2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만해선`이란 말은 다른 사람에게 쓰일 때는 괜찮은데 자기 얘기하면서 쓰면 정말 격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며 읽어내려오노라니 바로 그 말씀을 하셨네요 ^^ 이심전심!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저는 기대를 너무 했던 탓인지 약간 실망했는데, 오히려 에세이를 읽으면 더 마음에 와닿을 것 같네요. 생각이 많은 작가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아요.
`언브로큰`은 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안젤리나 졸리가 감독을 했다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아쉬움도 되었어요. 그래도 이 영화가 더 많이 사람들에게 보여졌으면 좋겠네요.
다크아이즈님, (손번쩍) 여기서 질문이요. 이 글을 모두 하루에 쓰셨나요?

2015-01-24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5-01-2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ㅇㅏ갈마 부르려다가 어감이 좀 색다른 거예요 그래서 실수할까봐 소심해져 못 불렀지 뭐예요 반갑습니다^^
북풀이 익숙지 않아 아갈마님에 대한 덧글인데 이리 떨어져 나와버렸어요 ㅠ

AgalmA 2015-01-24 10:35   좋아요 0 | URL
네, 어감이 좀 웃기죠? ㅎ 뜻이나 생긴 게 예뻐서 쓰기 시작했어요. a가 사이좋게 처음 중간 끝 골고루 있잖아요. 저도 엄청 반갑습니다!

페크pek0501 2015-01-24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닉네임을 바꾸셨네요. 반갑습니다.

문화 다양성의 코드와 박노자의 책에 끌리네요.

다양한 주제로 풀어 내시는 그 힘에 저도 정기를 받아 으쌰 으쌰 하며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5-01-24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오, 반가운 페크언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초심으로 돌아가는 의미로 원래 닉으로 함 써봤어요~ 글에 대한 긍정의 고민하는 페크님께 절대 공감이요~~

세실 2015-01-3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 잣대로 모임 하나가 거슬려 그만두려고 하는데 제 불편해하는 마음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들에게도 전달되어 시원하다 할거 같은데 희정님은 행복하네요^^

어두워지는 시간 제목도 글도 특히 좋아요. 고만고만하기만 한 저녁!도 가끔은 감사하죠? 오늘도 무사히 지나갔구나하는... 내 주변까지^^
소설가의 일 저도 펼쳐야겠어요.
 

 

 

 

 

 

1. 남은 시간

 

혼자 집을 지킨다. 남편은 출장 가고, 딸내미는 근무하고, 아들은 놀러 갔다. 낮에는 몰랐는데 밤이 되니 몸이 으슬으슬하고 떠도는 공기에도 한기가 서려있다. 입에서 쓴 내가 나고 어깻죽지에 동통이 밀려온다. 몸살기니 쉽게 잠들 수 있으면 좋으련만 잡념만 뭉친다. 이럴 땐 식구들의 응원보다 나은 기 보충제는 없다. 괜히 가족 대화방에다 투정서린 문자를 남겨 본다. ‘이 밤 모두 나 빼놓고 잘 있제? 외롭다.’

 

 

‘내일 (집에) 간다.’ 애교나 과장을 모르는,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딸내미의 답문이 일착이다. 비교적 싹싹한 아들 답문도 나을 게 없다. ‘어머니, 파이팅.’ 선심 보너스처럼 달린 하트 이모티콘이 민망하다. ‘숙소 들어가는 중’ 남편의 답문마저 초간단하다. 그래도 마음 온도만큼은 문자에 비할 바 아니리라.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든 남편에게서 금세 전화가 온다. ‘외롭다’는 말의 의미를 직해할 수 있는 사이는 역시 부부밖에 없구나. 일상 그대로의 몇 마디를 나눌 뿐인데도 위안이 된다. 전화기를 끊자마자 덤으로 문자 하나를 보내온다.

 

 

모 회사가 제작한 가족사랑 홍보물이다. 클릭하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영상이 뜬다. 일 년, 이 년 아니면 몇 개월. 결과표를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무슨 내용인고 하니 남은 생애에서 우리가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는 것. 일하고 자고 사람 만나 사교하고 등의 시간을 빼고 나면 가족과 마주하는 시간은 너무 모자란단다. 친절히도 가족시간 계산기가 덧붙여져 있기에 적용해보았다. 남은 시간을 많이 할당 받고 싶어, 잠이나 기타 여가 시간을 내 패턴보다 조금 줄여서 입력했다. 그래도 겨우 7개월.

 

 

으슬으슬하던 몸에 열감이 확 돋을 정도로 정신이 퍼뜩 든다. 이해하겠거니, 하는 전제를 깔고 다른 것에 비해 늘 후순위로 미루기만 했던 가족의 일. 평균 수명으로 봐도 삼십 년을 더 살 수 있다는데 가족을 위한 남은 시간이 고작 7개월이라니. 숙연한 책임감으로 잠 못 든다한들 이 밤은 할 말이 없겠다.

 

 

 

 

 

2. 탄력적 사고

 

쌍둥이 중 누가 장자여야만 할까. 흥미 있는 포스팅을 발견했다.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쌍둥이 중 늦게 태어난 아이가 맏이가 된다는 것. 상상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단 일초라도 먼저 태어나면 형이 된다는 동양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이야기를 접하니 무척 신선하고 신기하다. 사람의 생각이란 다양한 것.

 

 

현대 유럽 사회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나도 우리만큼 위계질서를 잡아주는데 집착하지 않는다. 형 동생이라는 개념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낸다. 하지만 전통 왕가에서나 우리식으로 하자면 시골 종갓집 같은 데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단 그들이 생각하는 형·동생에 대한 정의는 보편 정서와 다르다. 먼저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 늦게 태어난 아이가 형이 된다. 먼저 수정된 아이가 자궁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느긋하게 나온다는 속설에서 그 이유를 찾기도 한다는데 그건 과학적 근거가 없으니 넘어 가더라도 나머지 한 이유에는 솔깃해진다. 약한 아이가 먼저 세상 구경을 할 수 있도록 안에서 강한 아이가 밀어내 준 뒤 천천히 나오게 된다나. 강한 자가 곧 형이라는 편견이 살짝 깔리기는 했지만 공감이 가기도 한다. 형이 꼭 동생에 비해 덩치가 크고 의리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힘 세다고 먼저 박차고 나가는 형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흐뭇한 이야기다.

 

 

쌍둥이 중 누가 맏이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 진실 차원에서 논할 이야기는 못 된다. 산아의 위치에 따라 운명적으로 먼저 나오고 나중 나오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가 형이고 동생이냐를 정하는 것은 사람들의 일일뿐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같은 조건에서 내가 먼저 빛을 봤으니 내가 형이라는 생각도 옳고, 내가 형이니 네가 먼저 빛을 보라고 떠밀어주는 생각도 옳다. 역지사지라는 말이 쌍둥이를 규정하는 순간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탄력적 사고를 하면 세상에 진실이 아닌 게 없게 된다. 사람 생각은 다 다르고 저마다 옳으니.

 

 

 

 

 

3. 글썰미 훈련

 

김연수의『소설가의 일』에 보면 핍진성(逼眞性)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소설가는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 구체적 방법은 작가에 의하면 ‘갈피 너머에 있는 훨씬 뒤쪽의 단어와 표현’을 찾는 행위이다. 두루뭉술하게 뭉뚱그려서 표현하는 것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책갈피 앞쪽에 해당된다. 개연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핍진성인데 이는 갈피 훨씬 뒤쪽에 해당된다. 전체적인 플롯을 통해 개연성이 확보 되면 묘사를 통해 글의 핍진성은 완성된다.

 

 

내 식의 예를 들자면 “나는 그 여자가 좋아.”라고 말하는 건 개연성에 머물러 있는 거지만 “코를 찡긋하며 웃던 그 모습에도 미칠 지경이었지.”라고 말한다면 핍진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핍진성을 구축하는 데는 더 많은 염력과 생각의 힘을 필요로 한다. 문학 용어에서 나온 핍진성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진실의 정도를 말한다. 있음직한 이야기로 독자를 납득시킬수록 소설로서의 힘을 갖는다. 플롯과 캐릭터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소설 요건이야말로 핍진성이라고 작가는 강조한다.

 

 

핍진성을 구체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훈련이다. 눈썰미가 없으면 좀 전에 만난 사람이 무슨 옷을 입고, 어떤 헤어스타일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람을 제 삼자에게 설득시킬 길이 없어 그냥 ‘내 앞에 앉았던 사람’이라고 어물쩍 말하게 되고 만다. 하지만 눈썰미를 훈련하는 경우라면 그가 진자주색 털조끼를 입은 데다, 짧은 단발이었다는 것을 금세 기억해낼 수 있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훈련하면 글썰미(?)도 생겨나고 나아가 핍진성 획득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눈에 띄는 진자주색 털조끼와 지나치게 짧은 단발을 한 사람을 묘사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성격이 특이한데다 단호한 면이 있음을 독자에게 알려줄 수 있게 된다. 구체적 정황을 담은 묘사 덕에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를 믿게 하는 원동력은 핍진성이고 그것을 얻으려면 끝없는 연습의 힘 외의 방법은 없다는 걸 김연수 작가의 귀띔을 통해 새삼 확인한다.

 

 

 

 

 

4. 허삼관매혈기 대 허삼관

 

하정우 감독 · 주연의 영화『허삼관』덕에 위화의『허삼관 매혈기』도 덩달아 관심을 끈다. 위화 작가만큼 독자의 신뢰를 얻는 작가도 드물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라는 다소 긴 에세이를 읽은 것을 계기로 단박에 위화의 팬이 되었다. 그의 글 느낌에 대해 유행하는 신조어로 표현한다면 ‘웃프다’ 정도가 될 것이다. 자연스런 웃음을 유발하는데 결코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슬픔의 격조가 서린 위엄이랄까.

 

 

『허삼관 매혈기』에도 그런 그의 문체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문학적 풍자에 관련된 모든 것을 이 한 권의 책에서 맛볼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소설이다. 해학, 촌철, 골계, 익살, 조롱, 패러디, 비장, 엄숙 등의 문체적 속살을 잘 드러내주는 이 소설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영화 『허삼관』도 일찌감치 보러 갔다. 거의 모든 영화가 원작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단순한 관람기가 맞는 이유는 명백하다. 일단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스크린에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시공간적 제약이 있다.

영화 허삼관, 의 경우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그 배경을 옮겨 설정하다 보니 중요한 대목인 문화혁명의 광풍 시절이 빠져 버렸다. 한국전쟁 직후라는 배경이 중국의 지난했던 한 시절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허삼관이 시종일관 매혈을 하게 되는 그 장면이 원작 소설만큼 절절하지도 실감나지도 않았다. 원작이 보장하는 확실한 재미 요소인 시대적 · 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서 이야기의 당위성을 잃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가족 신파 쪽으로만 방향을 틀수밖에 없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소설 허삼관 매혈기, 는 작가가 ‘평등’에 관한 알레고리를 숨겨 놓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허삼관의 행동과 말로 표출되는데, 허삼관이 굳게 믿는 평등은 쉽게 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이다. 못된 짓을 한 하소용이 불치병에 걸리는 것도 당연하고, 아내가 지은 한 번의 과오에 복수하는 길은 자신 역시 바람 한 번을 피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지극히 소박하고 단순한 방식의 평등이다. 하지만 그 평등마저도 우리는(못 가진 자는)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작가가 숨겨 놓은 평등이란 죽음 앞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성애라는 한 주제를 작가와 감독이 어떻게 달리 표현했는지 궁금한 이들은 두 작품을 비교 감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5. 방과 밥

 

가족을 이뤄 산다는 것은 방과 밥을 완성하는 일이다. 편히 쉴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 꾸밈없이 마주할 수 있는 가족을 위한 밥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 갖춘 노래이다. 하지만 순간순간 그걸 잊고 살 때가 많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의 심심함이야말로 최상의 버라이어티 쇼였음은 상실의 고통을 맞이한 후에야 알게 된다.

 

 

자책과 상실과 극복에 관한 토론 거리를 준비하느라 본「아들의 방」영화가 너무 먹먹하다. 이탈리아 항구 도시, 상담의인 지오반니 가족은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의 일상을 엮어간다. 휴일 아침 아들과 조깅을 하기로 했지만 응급 환자의 호출에 응하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한 새 스쿠버다이빙을 하러 갔던 아들은 익사하고 만다. 함께 있어주지 못한 죄책감에 지오반니는 주저앉는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천직이었던 지오반니도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아내와 딸의 상실감도 만만찮다.

 

 

아들의 죽음이 있기 전 그들의 식탁은 평화와 안식의 상징처였다. 무탈하게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들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알지 못했다. 식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버린, 무너져 내린 가족의 식사 장면 앞에서 심장이 조여 오는 통증을참아야 했다.

 

 

아들의 여자친구의 등장으로 그들에게도 치유의 기회가 생긴다. 안드레아의 죽음을 모르는 그녀는 안드레아가 찍은 그의 방 사진을 보여주며 그 방을 보고 싶어 한다. 아들의 방을 함께 둘러보면서 새삼 그 아이의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소중했던가를 알게 된다. 남은 가족에게도 심경의 변화가 온다. 그녀의 방문을 계기로 지오반니 가족은 진정으로 안드레아를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다. 동행인과 히치하이킹 중인 그녀를 배웅하다 보니 프랑스 국경까지 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안드레아를 놓아줄 수 있게 된다. 죄책도 비탄도 상실도 애도도 결국 자신이 극복해야 된다는 것 더불어 평범한 날의 한 끼 밥, 무탈한 날의 소박한 공간이 얼마나 최상의 행복 조건인지를 가슴으로 알게 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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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5-01-20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대하는 팜므님 글~~반가움에 글쓴이 만큼 정성들여 읽었어요!👍

다크아이즈 2015-01-20 17:59   좋아요 0 | URL
잘계시다니 저 또한 기쁘옵니다. 에너자이저 오기언냐~

2015-01-20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1 0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1-2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의 글을 읽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에 대해 남편에게 얘기해 주면서 나는 고작 언니보다 몇 시간 더 많을 거야~~그랬더니 `Not me`라네요~~~^^;;;
저도 순오기언니처럼 반가움 마음과 떨리는 마음으로 읽었어요!!! 역시 우리 팜므 언니!!!!!!! 이러면서~~~~~. 근데 이제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보이후드 boyhood `라는 영화 추천드려요. 며칠 전 남편이랑 봤는데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네요~~~. 언니가 보시고 단상 적어주시면 좋겠어요~~~^^;;;
알라딘에서 선물을 보내와서 오늘 잠깐 들어왔는데 앞으로 알라딘에서 또 선물 보내지는 않울테니 모든 시험 끝나고 알라딘서 뵈어요~~~~.

2015-01-20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1 0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1-21 02:47   좋아요 0 | URL
양반되기는 글렀는지 위의 댓글 쓰자마자 오네요~~.ㅜㅜ
 

 

 

 

 

 

  1.갑질도 배운다

 

‘갑질’도 배운다.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 약자에게만’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게 갑질의 특징이다. 저녁모임 자리가 있던 식당에서였다. 두 여종업원이 한 조가 되어 서빙을 했다. 한 명은 수학능력시험을 치른 아르바이트생이었고, 다른 한 명은 외국인 출신 베테랑이었다. 그런데 선배격인 외국인 종업원은 아르바이트생을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했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며 매서운 눈초리와 어눌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다. 숯불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다며 ‘저리 비켜. 뒤로 나와!’ 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모두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 자리에서는 뭐라 마땅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갑질도 배우는구나.’ 라는 생각이었다. 이국에서 온 그녀가 처음 일을 배울 때 혹 누군가로부터 저런 ‘갈굼’을 당하지 않았을까. 못된 시어머니 밑에서 배운 며느리는 못된 시어머니가 될 공산이 크다. ‘반면교사’ 하기보다 ‘모방하기’ 어법을 따르는 건 얼마나 익히기 쉬운 학습법인가. 자신이 당한 설움을 고대로 어리바리하고 순진한 아르바이트생에게 전가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달콤한 복수인가. ‘더 약자인 동료’를 괴롭혀 내 아픔을 위로받는 건 얼마나 적절한 보상인가.

 

 

‘어눌한 일솜씨’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저래도 되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옆 친구가 거들었다. “괜찮아, 일주일만 지나면 저 관계도 역전될 거야.” 그때 얼음덩이 하나가 어깨를 세게 치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일주일 뒤 자신의 운명을 그 이방인은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통 기한 촉박한 권력의 맛을 가장 실감나게 소진하기 위해 그미는 저토록 발악에 가까운 갑질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 순진한 아르바이트생 천사도 언젠가는 초강력 여전사임을 마다하지 않는 현재 자신의 입장을 능가하게 되리라는 원초적 두려움 같은 것, 그것이 그녀를 거친 언행으로 내몬 것은 아닌지. 애초에 불공정한 게임에 들어선 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는 갑질을 배우는 것 밖에 없었으리라는 이 당혹감.

 

 

 

 

 

 

2. 입술 헤르페스

 

또 입술이 부푼다. 전날부터 입술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무지근해지더니 어깨와 팔뚝으로 통증이 몰려왔다. 따뜻한 곳에 등을 대 지지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쓰러지듯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입술에 기포가 생기고 발갛게 흉이 나기 시작한다. 구순포진이 도진 것이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 자주 입 주변에 물집이 퍼지고 이내 헐곤 했다. 이 하찮고도 귀찮은 증상은 달갑지 않은 친구처럼 불쑥불쑥 찾아와 내 일상을 휘젓는다. 젊은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시험을 앞두고는 치통과 함께, 사랑을 앓으면서는 두통과 함께 슬며시 따라붙던 것이 이젠 만성증상이 되어 버렸다.

 

 

‘몸이 앓거나 맘이 고달프면’이라는 저 전제는 오랜 경험에 비춰볼 때 조금 수정해도 좋겠다. 내 경우 단순히 몸이 아픈 것만으로는 구순포진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맘까지 아파야 입술이 부풀어 오르게 된다. 맘에 사무침이 있거나 괴로움이 스미면 육체적 피곤으로 연결되고 몸은 그것을 감지해 나쁜 신호를 작동한다.

 

 

“밀려오는 파도 말고 밀려나가는 파도가 힘이 세고 매듭 묶이는 일보다 매듭 풀리는 일이 더 유혹이라서, 모든 살아 있는 것들 때로 휘청거리곤 하는 것이다. 그만 저를 놓아버리고 싶을 때, 그러다 그대와 함께 무너지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잠복되어 있는 헤르페스 균을 도발하는 저 마음의 괴로움을『몰락의 에티카』에서 뽑은 이 말과 연결해본다. 담아야 하는데 멀리 밀려가고, 묶어야 하는데 쉽게 풀려버리는 게 사람 사는 일의 과정이다. 놓지도 못하고, 무너져 내리지도 못하는 그 틈새에 마음의 병이 서린다. 그게 ‘보통 사람의 보편적 정서’이다.

 

 

몸만 가벼이 아프면 한 사흘이면 족하지만 마음이 아프면 아무리 가벼운 증상이라도 몇 주는 헤매야 한다. 몸 가벼이 아픈 것은 아프지 않은 것과 같지만 마음 아픈 것에는 가벼움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누군가 부푼 입술로 나타나거든 저이는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이 피로한 것이구나, 보아도 무방하다. 천형처럼 ‘나았다 도졌다’를 반복하는 입술 헤르페스.

 

 

 

 

 

3. 배려도 지나치면

 

딸내미랑 집 근처 단골 미용실에 들렀다.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꾸려 나가는 곳인데, 아내의 일손을 돕기 위해 남편은 직장에서 야간일만 전담할 정도로 성실하다. 내가 염색을 하는 동안 딸내미는 신문을 뒤적이며 기다렸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텔레비전에서 CNN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영어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염색약 냄새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참을만했다. 원체 신뢰감을 주는 부부인데다, 오죽하면 손님 앞에서 저 방송을 틀었을까 싶었다. 남편분 직장에서 승진 시험을 앞두고 영어 듣기 공부를 하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손님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 방송은 딸내미가 파마를 마치는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신경이 쓰였지만 못내 모른척했다. 오죽하면 저럴까, 하는 심정이 웬만하면 이해하자,는 감정보다 훨씬 절실할 것임을 알기에.

 

 

드디어 미용실을 나서는 시간, 열심히 사는 부부의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넌지시 물어보았다. “승진 시험으로 영어를 치르나 봐요? 공부하려면 힘들겠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여사장님 눈이 동그래졌다. “따님이 그 방송 틀어놓은 거 아니에요?” 맙소사! 미용실에서 영어 방송을 들어야할 만큼 절박한 일이 딸내미에게 없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그런 무례를 범할 만큼 대범한 아이도 못되었다. 부부가 동시에 말을 이었다. “우린 따님이 영어 공부하려고 틀어 놓은 줄 알았어요.” 한다.

 

 

다시 필름을 돌려 보자면 이렇다. 테이블에 놓인 신문 밑에 리모컨이 있었고 그것이 딸내미 팔꿈치에 눌려 저도 모르게 CNN 방송으로 채널이 바뀐 모양이었다. 딸내미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미용실 부부는 딸내미가 영어 공부하려고 그랬나 보다 했던 것. 나는 나대로 미용실 남편분이 영어 공부를 하나 보다 하고 넘겨짚은 것이었다. 까딱하면 서로 오해할 뻔했다. 오늘의 결론? 배려도 지나치면 오해를 낳는다. 그러니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는 거다. 단, 그 순간도 배려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4.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 위안이 있다 / (···) / 고독이 아편처럼 달콤하다 해도 /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 / 꿈으로 깨끗이 씻긴 아침 / 그들의 이마를 바라보면 / 나는 왜 어떤 단어를 쓸지 고민하는 것일까 / 너라고 할지, 그라고 할지 /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이란 시의 부분이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에 꽂힌 후 폴란드 시인에 대해 더 검색하던 중 알게 된 시인이다. 쉼보르스카에 비해 덜 서정적이지만 더 절실하게 와닿는다.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인의 노고가 강풍에 흔들림 없는 나무둥치 같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자신의 희곡「닫힌 방」에서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석쇠도 필요 없을 만큼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라고 일갈했다. 갇힌 공간에서 서로 욕망에 뒤엉키고 비애감에 젖는 모습을 떠올린다면 충분히 가능한 발설이다. 인간을 이해하는 촉수가 적나라하리만큼 발달한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가 그런 시선을 유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타인이 지옥인 이유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관심 인자를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어린 아기조차도 누가 자신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품는지, 누가 자신에게 적대적인지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안다. 달리 말하면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를 어릴 때부터 무의식중에 학습하는 것과 같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내 삶의 욕망과 비애가 타자와 다르지 않음을 경험하는 그 절정의 순간에 타자를 지옥으로 인식하고 탄식하게 된다.

 

 

하지만 진실로 우리가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어 하는 말은 자가예프스키의 단언처럼 ‘타인들은 지옥이 아니다’라는 것. 타인을 만나 지옥일 때보다 타인을 만나 천국일 때가 일상에서는 훨씬 더 많다. 깨끗한 하루의 시작점, 누군가의 맑은 이마를 보며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건 부정의 언사보다 긍정의 언사이기 쉽다. ‘모든 그는 어떤 너의 배신자일 뿐’ 타인은 아름다움일 때가 훨씬 많다. 자가예프스키의 이런 긍정의 독백에 시선이 가는 아침이다.

 

 

 

 

 

5. 행복한 카뮈

 

사람과 사람 사이는 상호보완적이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좋은 제자는 스승이 만들고, 훌륭한 스승은 제자가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알베르 카뮈는 좋은 제자였고, 그의 스승인 루이 제르맹과 장 그르니에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루이 제르맹은 알제리 빈민가의 한 소년을 노벨 문학상 작가로 거듭나게 한 첫 번째 스승이었다. 궁핍한 살림을 꾸렸던 카뮈의 어머니는 초등과정을 마친 카뮈를 상급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당시 알제리 하층민 소년들은 노동자가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공부 열망으로 가득 찬 카뮈를 제르맹 선생은 포기하지 않았다. 카뮈의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입학시험을 치를 수 있게 성심껏 지도해주었으며,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했다. 선생은 소년 카뮈에게 글 쓰는 재능과 남다른 통찰력이 있다는 걸 진작 알아봤던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카뮈가 어머니 다음으로 제르맹 선생을 호명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장 그르니에 또한 카뮈에겐 잊을 수 없는 스승이다. 카뮈는 선생을 신뢰했고 선생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자신에게 기쁨이라고 편지를 썼다. 스승의 산문집『섬』에도 그 유명한 서문을 썼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이를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로 시작하는 카뮈의 서문은 그의 명성 덕에 스승의 산문집 자체보다 더 유명한 것이 되어버렸다. 진작 카뮈는 그 서문이 적힌 책을 받아 보지도 못한 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사고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온 이가 스승 장 그르니에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살다 보면 도처에 스승이 가득하다. 나를 이끌고 채찍질하는 모든 이는 루이 제르맹이요, 내게 충고하고 쓴 약을 주는 모든 이 또한 장 그르니에다. 내 곁에서 크고 작은 자극을 주는 모든 스승들을 하나하나 불러내고 싶은 밤이다. 카뮈의 행복에 견줘도 좋을 만큼, 제 곁 스승을 확신하는 당신이라면 이 깊은 밤 맘껏 행복해도 괜찮다.

 

 

 

 

 

6. 오리는 어디로 갔을까

 

J·D 샐린저의『호밀밭의 파수꾼』에는 주제와 관련된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앤톨리니 선생이 주인공 홀든 콜필드에게 성추행을 하는 장면, 절벽으로 떨어지려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는 콜필드의 마음이 드러나는 장면, 센트럴 파크 연못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유머 깃든 순정이 깃든 장면 등이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학교 선생의 성추행 장면은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묘사로 작동하고,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하는 콜필드의 대사 장면은 그 장면 자체를 작가가 책 제목으로 뽑았을 만큼 순수에 대한 동경을 의미한다.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센트럴 파크의 겨울 오리를 걱정하는 콜필드의 마음이다.

 

“센트럴 파크에 있는 연못을 지나가 본 적이 있으세요? 센트럴 파크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연못이요. 아주 작은 연못이 있어요. 오리들이 살고 있는 곳 말이에요. 오리들이 그곳에서 헤엄을 치고 있잖아요. 봄에 말이에요. 그럼 겨울이 되면 그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스쳐 지나는 인연에 지나지 않는 택시 기사 호이트 아저씨에게 콜필드가 한 말이다. 누구나 한번쯤 저런 엉뚱한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그런 의문은 동심이 풍부한 어릴 때나 그것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었을 때나 별 차이 없이 생겨난다. 살다보면 아주 익숙한 풍경인데 그 풍경이 느닷없이 낯설게 보이고 그 ‘낯섬’에 급기야 한 점 재기발랄한 의문이 생길 때가 온다.

 

 

아주 작은 연못에 오리들이 복작댄다. 봄의 기지개를 시작으로 조금씩 발길질하던 오리는 한여름의 풍성해진 자맥질을 지나 소요 없는 겨울을 맞이한다. 겨울을 맞이한 오리는 더 이상 연못에 머물 이유가 없다. 헤엄칠 물이 다 얼었기 때문이다. 그 많던 오리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제비처럼 따뜻한 남쪽나라로 간 것일까, 스님처럼 동안거에 든 걸까. 아주 작은 연못의 겨울 오리떼는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숨은 오리떼를 찾아 나목의 숲을 헤매는 담담한 풍경, 그것이 겨울이란 계절의 존재이유이다.

 

 

 

 

 

 

 

7. 겨울강  

 

박남철 시인이 떠났다. 시적 성과로 ‘쩡쩡’ 울렸던 만큼 크고 작은 악행으로 ‘쩡쩡’ 울기도 했을 시인이 끝내 세상과 등졌다. 투병으로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시인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연민한다. 이제 편해졌으면 한다. 저자에 오르내리는 시인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여성 입장에서 분노하고 피해자 입장에 동조하던 그 마음조차 내려놓기로 한다. 모든 걸 떠나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온전히 너그러워진다는 건 살아남은 자로서 가장 하기 쉬운 애도법이다.

 

“겨울강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돌 하나를 던져 본다 /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 쩡, 쩡, 쩡, / 돌을 튕기며, 쩡, /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 쩡, 쩡, 쩡, 쩡, 쩡 / 강물은, 쩡, /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아, 쩡 / 봄이오면 녹아 흐를 것들아, 쩡, 쩡, / 아예 되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 쩡, 쩡, 쩡, 쩡, 쩡 / 겨울 강가에 나아가 /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 본다 /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서 제 / 바닥에 닿을 돌들을, / 쩡 쩡 쩡 쩡 쩡 쩡 쩡”

 

시인의 대표시「겨울강」을 필사한다. 누군가 말했다. ‘악행보다 더 나쁜 건 위선’이라고.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눈썹이 떨리고 옆구리가 결릴 만큼 뜨끔해진다. 숱한 위선의 행적 앞에서 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행을 저지르기는 어려워도 위선을 행하기는 얼마나 쉽던가. 밥 먹듯 위선을 떨면서도 떳떳한 척할 수 있는 건 그 거짓이 간접적인데다 비겁함은 어느 정도 포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문 악행을 하고도 떳떳할 수 없는 건 그 공격성이 직접적인데다 치명적인 상처를 안기기 때문이다.

 

겨울강이 제 아무리 쩡쩡 얼음장 조이는 소리를 내도 강은 강이고 물은 물이다. 얼음 위, 던져진 돌들은 마법이 풀리듯 봄 오면 기어이 바닥에 가 닿는다. 겨울강을 내려다본다. 아직 얼지 않은 저 물빛, 악행보다 위선을 경계한 시인의 눈물인양 따끔거리듯 반짝이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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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4-12-11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언니 글을 좋아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맘에 착착 감기네요!!!!!
몸과 마음이 다 힘드셨나봐요????ㅠㅠ 워낙 묵묵하게 버티는 분이라 더 안타까와요!!! 이제 좀 편안해지셨기를...... 언니~~~ 사랑해요!!!❤️❤️❤️❤️❤️

다크아이즈 2014-12-12 17:40   좋아요 0 | URL
이리 과도하게 하트를 주시면 몸둘 바를 모르잖아요. ㅋ
주신 사랑의 세제곱을 비비아롬모리께 되돌려드릴게요.
근데 닉이 언제 이걸로 바뀌었대요? ~~

기억의집 2014-12-11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어리숙한 학생이 계속 당하면 어쩌죠. 갑질도 성격이라... 못하는 사람은 못 하더라구요.
2. 전 심적으로 힘들어도 겉으로 아프진 않는데, 힘드시겠어요. 요즘 저의 남편이 대상포진인가 싶어 걱정인데, 다리 신경이 계속 아프다고 하더라구요. 대상포진의 초기 증상이 그렇다해서 걱정인데, 입술이라 밖에 다니실 때 신경쓰이시겠어요! 맘 편한 게 최곤데, 저도 지금 마음 한 켠에 짖눌리는 게 있어서.... 빨리 낫길 바랍니다.
3. 저 이 책 제목 읽고 완전 뿜었어요. 아니 어떻게 찾으셨어요. 이 책~
7. 박시인의 사생활이 갑자기 궁금해졌다는.. 검색해 봐야겠어요.

다크아이즈 2014-12-12 17:47   좋아요 0 | URL
1. 기억의 집님 오랜만이에요. 반갑습니다.
맞아요. 그럴 수도 있겠어요. 그 여학생 너무 착실했거든요. 갑질 못할 거 같아요.

2. 아주 오랜 뒤에 알게 되었어요. 단순히 육체가 피곤한 게 아니라 마음까지 불편해야 입술헤르페스가 온다는 걸요. 대상포진도 일종의 헤르페스라니 건강관리 잘하셔야겠어요. 짓눌리는 마음 없는 일상이 하룬들 있겠어요, 넘 마음에 두지 마시길요.

3. 진짜 제목 그렇네요.ㅋ 배려로 검색한 것 중 젤 이쁜 걸로다가 걸었어요.ㅋ

7. 검색까지 하셨구나. 오래 전 이야기랍니다.

기억의집 2014-12-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세상에나. 지금 검색해 봤는데, 이 양반이야말로 갑질멘탈이네요. 장례식장이 저의 집하고 가까운 곳에서 치룬 것으로 보아 저의 인근 동네에서 같이 살았던 양반인데, 참 그러네요. 쓰레기새끼인데, 시인이란 명칭도 달아주고..게다가 문지 실망스럽네요. 저런 소문 알았을텐데 버젓히 시집도 내 주고...

2014-12-13 14: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14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12-20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려도 지나치면`의 글... 공감해요. 저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거든요.
말을 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많죠. 침묵이 오해의 불씨가 되는 거죠.

어떤 일을 추론해 보고 상상해 보고 예측해 보다가 내린 결론은 이것.
알 수 없 었 다...
사실 말을 주고받아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일 때가 있기 하지만...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 해 잘 마무리하시길...

2015-01-01 02: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1-26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1. 도서정가제 유감

 

  당분간 나의 책 사는 주기는 느려질 것이다. 도서정가제 때문이다. 사두면 좋겠다 싶은 것은 정가제 시행 전 대폭 세일하는 기간에 마련해두었다. 하지만 느려진, 책 사는 주기를 평소대로 회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귀차니즘’과 친구인 나는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리는 것보다 집안에 편히 앉아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사는 쪽을 선호한다. 당분간 옛날만큼의 할인폭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 때문에 인터넷에서 책 사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책을 사는 게 여전히 ‘편리하고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가장 큰 명분은 ‘동네 책방 살리기’이다. 그간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높은 할인율과 무료 배송이라는 매력적인 마케팅으로 그나마 열악한 대한민국 독서 시장을 휩쓸다시피 했다. 동네 서점들은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아 나갈 수밖에 없었다. 계란과 바위의 싸움에서 당국이 계란 편을 들어주기로 한 모양이다. 하지만 계란이 타조알 된다고 바위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다.

 

 

  15퍼센트 이내로 도서 할인율을 제한한다지만, 편법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대형 인터넷 서점들은 간접할인이라는, 자신들이 쓸 수 있는 모든 패들을 동원할 것이다. 카드·통신사와의 제휴, 마일리지 지급율 인상 및 다양한 적립금 이벤트, 매혹적인 경품 잔치, 여전한 무료 배송 등을 내세워 기존의 고객을 유지·확보하게 될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간 만큼의 책값 이익은 영세 출판사나 동네 서점까지 가닿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동네 책방 살리기라는 명분은 무색해지고 만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속 깊은 뜻’을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책이라는 문화적 특수 공산품의 할인율을 당국이 설레발치며 규제한다는 게 어쩐지 맞지 않다는 생각뿐이다. 규제해서 약자나 소비자가 덕을 볼 수 있으면 좋은 시스템이지만, 규제해서 강자가 덕을 보거나 모두가 부담을 느끼는 시스템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직은 지켜볼 단계지만 도서정가제가 본래의 취지에 가닿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2. 엄마에 대하여

 

불안하면 확인하게 되고, 미덥지 못할수록 보채게 된다. 고구마를 구우면서 하마나 익었을까 젓가락으로 찔러대는 건 행여 그것이 탈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보러 가자는 약속을 몇 번이나 다짐 받는 건 상대에 대한 내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관심 가면 불안해지고, 마음 주면 보채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스스로 보채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한없이 평온하고 미더운 상태, 그건 에로스적 사랑의 본질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거짓 감정이다. 에로스의 속성에는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 과정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구속함으로써 내 불안을 자초한다. 지루하면서도 다이내믹한 감정 소모가 이어진다. 한 마디로 진실로 사랑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의 특질이다. 그 사랑의 불꽃은 종국엔 재만 남긴다. 그 재는 안타까이 오래 가는 성질의 것도 못 된다. 아무리 위대한 사랑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허용된 감정 안의 유한성의 사랑 그것이 에로스적 사랑이다.

 

 

하지만 진짜 사랑은 시공간에서 자유롭다. 오직 사랑이란 본질 자체에만 기댄다. 따라서 그 사랑은 무심하다. 모든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 그 꼭대기에 무심함에 있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이기에 불안도 집착도 없다. 범접 불가한 그 사랑의 대상 1호는 내게 ‘엄마’이다. 애증이란 검증을 거칠 필요조차 없는 사람, 집착과 연민에서 자유로운 완전무결한 대상. 그러기에 이토록 무심하고도 뻔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덜 사랑할수록 영원히 사랑한다고 속삭인다. 진짜 사랑하면 그 말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그 사랑을 확인하고 집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하면 한없이 무심해질 수 있다. 그 사랑이 곧 내 마음인지 스스로도 잊을 만큼 항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도 않은, 늙은 엄마에 대한 이 직무 유기 사유서를 엄마는 이해할 것이다. 근데 무심한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면 이런 반성문조차 필요 없는 거 아닌가.

 

 

 

 

3.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퍼즐 맞추기식 소설은 집중도를 요한다. 아귀 착착 맞는 게임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그 어떤 친절도 베풀지 않는다. 처음부터 집중해서 읽어라, 는 작가의 한마디 충고만 있어도 독자는 바짝 긴장해서 읽을 텐데. 실은 그러한 충고를 충실히 따른다 해도 그 게임의 승자는 작가가 될 수밖에 없다. 칼자루를 쥔 자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짜놓은 작가의 그물망에 독자는 걸려들게 되어 있다. 독자는 작가의 펜 끝을 따라갈 뿐이다. 하지만 그 게임에 말려든 들었다고 독자로서 억울할 것인가. 오히려 감사할 일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에 걸려들어야 제대로 읽은 게 되니까.

 

 

퍼즐 맞추기식 소설의 약점은 독자로 하여금 자칫 그것이 ‘의미없다’ 라는 평을 낳기 쉽다는 거다. 하지만 곱씹으며 꼼꼼하게 읽는다면 분명한 보상을 준다는 매력 또한 숨길 수 없다. 보상의 형태는 ‘충격’과 ‘여운’이다. 진부하고 평범한 두 낱말이지만 이보다 더한 작가에 대한 찬사가 어디 있겠나.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다시 읽는다. 볼 때마다 새롭게 눈길 가는 곳이 나온다. 오늘은 등장인물 사라 부분을 퍼즐 맞추기 해본다. 딸 베로니카의 남자친구 자격으로 놀러온 토미에게 그녀는 추파를 던졌을까. 작가는 직접적인 답 대신 묘사와 대사로그 정황을 중계해준다.

 

 

베이컨 요리를 만들려고 허둥대는 가운데 노른자 하나를 터뜨리면서도 토니를 관찰하는 장면, 서랍장에 몸을 기대며 베로니카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라고 뜬금없이 하는 말,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토니에게 다른 화제로 말머리를 돌리는 일, 바란 적 없는 토니에게 계란을 하나 더 얹어주는 행위, 달궈진 프라이팬을 젖은 싱크대에 던져 넣고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김이 피어오르자 파괴적인 웃음을 터뜨리는 것, 둘만의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토니를 향해 미소 짓는 일, 손을 높이 들어 흔드는 게 아니라 허리께에서 수평이 되게 들어 작별 인사를 함으로써 토니로 하여금 좀 더 이야기를 나눴으면 하는 아쉬움을 유발하는 것. 급기야 “어머니 멋지시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베로니카에게 하게 되는 토니.

 

 

작가는 이 모든 디테일한 정황들을 소설적 장치로서 활용한다. 묘사와 대사로 이루어진 이런 것들은 주인공들의 심리를 대변해주는 단서가 되고, 주제로 나아가는 밑돌이 된다. 처음 읽을 때는 그것들이 잘 안 보인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음미하면서 눈과 마음이 동화되다 보면 작가의 의중까지 파악된다. 하지만 소설을 누가 두세 번 되뇌며 읽기를 즐긴단 말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읽어야만 그 의미가 제대로 맞물린다는 작가의 인터뷰에 호의적인 독자라면 이 퍼즐게임 같은 철학 소설에 한껏 빠지게 될 것이다.

 

 

 

 

4.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관계 망에서 언어만큼 자신의 위치를 잘 말해주는 것도 없다. 맘만 먹으면 우리는 십 분 이내에 관찰 대상자의 현재 계급 지도(地圖)상의 위치를 알 수 있다. 대상자들끼리 쓰는 언어 속에 모든 계급적 정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을 목표를 삼는 게 민주주의라지만 현실적 시스템은 그것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문자 생활이 발전되고 세련될수록, 인류는 계급의식을 의식적 · 무의식적으로 고착해나갔다. 인간 운명의 공통적 질서는 미개하고 야성적인 사고를 개조하는 일이었다. 문자가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는 믿음이 일차원적인 사유보다 더 높은 의식적인 사고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의식을 낳았고, 자연스레 계급의식으로 진화(?)하게 되었다.

 

 

‘착하다’라는 말을 예로 들자. 그것은 어른이 아이에게 쓰는 말은 되지만, 아이가 어른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티나가 ‘우리 시어머니 참 착해요.’라고 목젖 꺾인 하이톤 콧소리로 말할 때 우리는 별 뜻 없이 크게 웃어젖힐 수 있다. 그 웃음은 착하다, 는 말의 사회적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이방인에 대한 아량을 담고 있다. 그것은 착하다, 는 말의 계급적 한계를 무의식중에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해준다.

 

 

반면에 선하다는 말은 어른, 아이 구별하지 않고 쓸 수 있지만 대개 전자에 더 많이 쓰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낱말의 영어 뜻은 같다. 하지만 우리말에서 그 둘의 쓰임새는 사전적 풀이부터 묘하게 다르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를 때 착한 것이 되고, 거기에 도덕적 판단 기준이 더해지면 선한 것이 된다. 단순히 어른(권력)의 질서나 요구를 잘 따르면 착한 것이 되고, 거기다 도덕적 판단이란 막을 거르면 선한 것이 된다. 따라서 계급 언어의 산물인 착한 것에 너무 기울어지지 않아도 좋다. 요구하면 따르고 부탁하면 들어주는 일방적 착함 대신, 부당하면 거부하고 곤란하면 거절하는 판단의 선함도 나쁘지 않다.

(* 이 페이퍼는 <곰곰생각하는 발님>의 최근 페이퍼를 읽다가 공감하는 바가 있어 작성한 거임.)

 

 

 

 

5. 본성을 거스르는 노력

 

좋은 소식은 실바람처럼 잔잔하게 오지만, 나쁜 소식은 강풍처럼 휘몰아쳐 온다. 몇 백 명이 동시에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낮지만 몇 백 명이 동시에 수장될 확률은 높다.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솟아나는 기적은 일어나기 힘들지만, 몇 개의 빌딩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리는 현상은 심심찮게 목도한다. 나쁜 소식 뒤에는 꼭 인재(人災)라는 말이 따라 붙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연결된다.

 

 

인간은 어질고 의롭게 태어났을까. 성선설의 근간을 이루는 인의(仁義)가, 말하기 좋은 당위의 사유 영역에만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 인간 깊숙한 곳에는 욕망이나 본능 같은 실체적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나치기 때문이다. 인의는 타고난 자연적인 본성이 되기에는 너무 이상적이다. 그런 착실한 성정이 선천적으로 내장되어 있다면 왜 인간은 욕망에 허덕이고 본능에 몸부림 칠 것인가. 배고프면 밥 찾고, 추우면 껴입고 싶고, 힘들면 눕고 싶고, 예쁘면 갖고 싶은 게 인간의 욕구이다. 자연스런 이런 현상은 인의라는 고상한 명분 앞에서 결코 주눅 들거나 꺾이지 않는다. 성악설이 성선설에 비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효도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은 선천적 범주가 아니라 인위 즉 교육이나 훈련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이성적 이상의 사유에 속하는 것이고, 순자의 성악설은 현상적 현실의 결과를 말해준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면 큰 고민 없이 성선설보다는 성악설 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래야 어제오늘 벌어지는 여러 ‘나쁜 뉴스’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제게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쾌락을 주는 것을 따르게 되어 있다. 그 본성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성악설의 요지이다. 그 인위의 힘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 세상은 나쁜 소식들로 넘쳐난다. 본성이 선하다는 허상의 믿음 대신 본성을 개조하려는 인위적인 노력이 훨씬 현명하다. 스스로를 연마하는 현실적 자세의 중요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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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23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정가제 시행전에 책을 사두긴 했지만, 조만간 구입할듯요.
동네 책방이 과연 살아날까 의문입니다. 어쨌든 인터넷 서점은 15%는 디씨해주니까요.
차라리 도서관에서 책 구입할때 지역업체에서 최대 15%만 할인하는 법을 만드는것이 현명하겠지요. 정가제 시행전에는 경쟁으로 인해 35%에 납품했거든요.

다크아이즈 2014-11-23 07:57   좋아요 0 | URL
그런 방법이 있네요.
정가제 시행전 지역 업체들 울며겨자먹기였겠어요. 할인폭이 넘 커서...
지역 업체도 살리고 동네 책방도 살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지 도서 정가제만 덜렁 시작한다고 해결이 될까요?

일요일, 뭐해요? 나들이 가시는 거죠?
보림이도 한가해졌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