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독후 단상
국정원판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되었다. (시사 인 303호 부록으로도 딸려 나왔네. 사진은 302호) 앉은 자리에서 들쳐볼 수 있으니 웬 횡잰가 싶다가도 솔직한 심정은 ‘이래도 되나’이다. 기밀사항인 정상회담록마저 온 국민이 열람할 수 있다면 자료가 공개될 것을 의식해 회담에서 깊은 대화들이 오갈 수 있을까 하는 기우가 이는 것이었다.
중편소설 분량보다 많은 대화록은 주로 노대통령이 대화를 주도하고 김정일 위원장이 화답을 하는 분위기이다. 방문객 입장인 노대통령은 많은 의제를 쏟아내기에 바빠 보였고, 김 위원장은 회담을 의례적 행사로 보거나, 아니면 나이 탓인지 피로감 깃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원본과 국정원이 공개한 이 전문이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입맛에 맞게 약간의 윤색이 가해졌다 치더라도 그들이 주장하는 노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이나 ‘굴욕적 외교’ 운운에는 동의하기 힘들었다. 다만 민족자주와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노대통령의 의욕과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이 자의적 해석의 빌미가 되고, 악의적 왜곡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대화록에 담긴 노대통령의 모든 말이 옳거나 공감 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국가원수로서 정상회담에서 할 수 있는 말들의 경계를 벗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접대용 발언이라 해도 개성에 이어 해주까지 경제 특구로 주려고 했다는,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수위가 더 강도 높아 보였다. 북한에서야말로 이 회의록이 공개된다면 군부나 인민들은 굴욕적 회담이라고 성토하지 않을까 싶었다.
민감한 안보사항을 경제 논리나 평화 무드의 해법으로 바라보려 한 것은 노대통령의 과잉의욕으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이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헤드라인으로 잡은 ‘NLL 바꿔야, 위원장님과 인식 같아’라는 사실상 NLL 포기 발언 맥락으로 이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소동이 국정원의 정치개입 국정조사 전 물 타기 전략이 아니기를 바라며 궁금한 이들은 회의록 전문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른 답이 될 것이다.
2. 이오덕 일기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방식은 한마디로 ‘쉬운 말로 쓰자’였다. 권정생 선생과 더불어 그는 ‘국민학교만 나와도 알아먹을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강조했다. 그의『우리글 바로쓰기』는 글쓰기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여전히 인기 있는 책이다. 쉽게 쓰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담아야 한다, 고 일깨우는 그 책의 감동을 나는 잊지 못한다. 하고 싶은 말을 쉬운 글로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번역문장에서조차 우리말을 고집해 문장이 어색해지는 선생의 방식을 제외하면 나는 여전히 선생의 글쓰기 방식을 존경하고 따르려 하고 있다.
올해로 선생이 떠난 지 십 년이 되었다. 그를 기리는 지인과 출판계의 뜻으로 『이오덕 일기』가 출간되었다. 다섯 권으로 추려진 이 책이 나오기까지 2년 8개월이 걸렸다. 앞 두 권은 교사로 살았던 24년 세월을, 뒤쪽 두 권은 사회활동을 하던 13년의 기록을 담았다. 마지막 권에는 충주 무너미 마을의 마지막 5년 생활이 실렸다.
그 중 권정생 선생과의 만남 장면이 인상 깊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가 당선된 권정생 선생은 아프다는 핑계로 시상식에 못 간다고 했다. 여비가 없을 것으로 짐작한 이오덕 선생은 당신이 갖고 있던 원고지와 돈을 두고 나온다. 두 분의 우정이 오래 지속된 계기가 된 만남이었다. 이오덕 선생의 발품은 가난한 권정생 선생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자신의 신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는 쉽지 않다. 전체 일기가 아닌 부분만 읽어도 선생이 뿌린 생각의 씨앗이 얼마나 영글고 올곧은지 알겠다. 어린이와 노동자와 농민 등 가장 낮은 이들과 호흡한 선생의 숨결이 오롯이 살아 있다. 교육과 글쓰기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회 혁신으로까지 신념을 확대해간 선생의 노고가 일기 안에서 되살아난다. 가난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제 몸과 맘을 연 선생의 한살이가 이 일기집으로 인해 더 관심을 받았으면 좋겠다.
3. 내 방에 잠들 착한 사람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착한 사람을 재웠던 게 언제인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 밤에 나는 창문을 닫고 물을 끓이고 손으로 이부자리에 묻은 머리칼을 떼어냈을 것이다.’ 김도언의『불안의 황홀』중 어느 오월에 쓴 일기 전문(全文)이다.
오래토록 호흡이 진정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런 기억을 떠올린지 오래 되었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왜 이런 단상을 길어 올리지 못했을까 하는 탄식이 지나갔다. 과외로 연명하던 청춘 시절, 낮잠 자고 음악 듣고 글쓰기를 해도 시간은 넘쳤다. 그렇게 남는 시간,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끼리 모여 놀았다. 착하지만 뜻대로 안 되었던 우리는 좁은 골방에 틀어 앉아 청춘을 둘러싼 제 환경을 성토했다.
아부지 눈치를 보느라 자주 내 방을 내놓지는 못했지만 나는 곡예를 즐기듯 그 시간을 즐겼다.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호떡과 설탕 듬뿍 넣은 커피를 앞에 두고 에어 서플라이나 뉴에이지 음악을 들으며 수다를 떨었다. 나와 별반 다르지 않는 친구를 위해 간이침대 밑 먼지를 훔치고 창문을 여몄으며, 물을 끓이고 홑이불의 머리칼을 떼어냈다. 그렇게 음습한 수다의 환희로 청춘의 정점을 찍었다. 불안한 미래였기에 뭐든지 불온하게만 받아들였고, 부족한 현실이었기에 무조건 불편하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세월은 흘렀다. 불안도 결핍도 덜한 나날이 되었다.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시간이 그렇게 만들었다. 더 이상 친구를 위해 요령부득의 호떡을 굽느라 부산을 떨지도 않고, 설탕 듬뿍 넣은 촌스런 커피를 내놓지도 않는다. 문자 한 번이면 오리구이집이나 물회집에서 편리하게 만날 수 있다. 불안의 황홀 대신 편안의 불손이 유머로 먹히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내 방에 잠든 착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잃는 만큼의 감칠맛 나는 입맛을 기억하는 시절이 된 것이다. 오늘 하루쯤은 마음으로나마 오랜 친구를 위한 잠자리를 마련해도 좋겠다. 어딘가 묵어있을 에어 서플라이의 '올 아웃 오브 러브', '당신이 사랑한 사람', '밤이 깊을수록' 등을 들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
4. 사모님이 사는 법
어제 오늘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모 중견 기업이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지난 주말 방영된 시사교양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와 무관하지 않다. 모 살인사건 주모자의 파렴치한 후일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주모자가 그 기업 회장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흥분한 네티즌들이 그 회사를 검색하기 시작했고, 관련 회사 제품의 불매운동까지 벌이는 모양이다.
오래된 사건이지만 너무나 충격적이라 나 역시 인터넷이나 방송으로 전해주는 여러 정황들에 그간 관심을 뒀었다. 이번 방송에서는 ‘사모님’인 가해자의 병원 특실 생활 고발을 통해 우리 사회의 노블리스 오블리주 부재에 대한 강력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에 관한 우리들의 자조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모양이다. 돈 있고 배경 있으면 죄 없는 사람 죽여도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우리 사회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도 형집행정지라는 합법적(?) 근거로 병원 특실에서 나머지 형기를 보낼 수도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방송은 나아가 사법 적용의 부조리에 대해서도 고발한다. 한마디로 그들만의 세계란다. 같은 법이지만 그들의 법 집행은 돈과 권력에 좌지우지된다. 일반 서민들과 특수층을 대하는 그들의 법 해석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그 검은 고리에 연결된 인물들은 한결 같이 사회지도층이다. 의사, 검사, 변호사, 경찰 등으로 이뤄진 그들에게 ‘가진 사모님’을 위한 ‘형집행정지’ 정도는 너무 쉬운 심부름이다. 물론 그 배경에는 구린 돈이 빠질 리 없다. 의사는 수상쩍은 진단서를 발급하고, 검사는 당당하게 형의 정지를 허가하고, 변호사는 뻔뻔하게 형 집행 신청을 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돈이다. 당연히 가해자에게 그 심부름 값은 껌값에 지나지 않는다.
돈으로 제 안위를 사고도 활개 치는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안전 불감증 못지않게 양심불감증도 우리 사회를 좀 먹는 불쾌의 정서이다. 언제까지 법보다 돈, 돈보다 권력인 사회를 인정하라고 자기체면을 걸 것인가. 그들 지도층들에게 바라는 서민적 정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실천적 덕목이다. 그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돈이 그보다 훨씬 좋은 이유되시겠다!
5. 백석 시인과 젊은 화가
누군가를 몹시 좋아하면 객관적인 눈을 가지기는 힘들다. 김영진이란 젊은 화가이자 저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쓴『백석 평전』은 우연이자 운명적으로 내게 왔다. 인터넷서점에서 알게 된 전국구 독서친구들이 있다. 일명 오공주파인 우리 다섯은 비정기적으로 만나 우의를 다진다. 그 중 책 나누기 이벤트도 있는데, 이번 모임에서 내 손에 온 책 중에 가장 눈에 띤 게 이 책이었다.
일반적으로 평전이라면 객관성은 기본으로 깔린 채 저자 특유의 해설이 붙는데 이 책은 아무리 봐도 일방적 백석 헌사에 가깝다. 검증된 자료로 시인과 시를 분석을 한 게 아니라 주관적 감정적 판단으로 백석 시인을 높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런데도 저자의 노고와 진정성이 배어나와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책 제목처럼 평전이라 불리기는 뭣하고 백석에 관한 저자의 모든 관심 정도로 읽히면 무방하겠다.
젊은 화가이자 저자인 김영진은 어릴 적부터 병약해 5학년 때 학교를 중퇴했다. 그러던 그가 백석 시를 알게 되고 그 감동을 그림으로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 건강이 악화될수록 그에게는 죽기 전에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의 내로라하는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근원을 아는 것이었다. 저자에게 그것은 다름 아닌 백석이었다. 당대 화가들에게 영감을 선사한 시인의 시를 읽고 또 읽어 심장과 영혼에 새겼다.
저자는 시인이 사용한 언어를 알게 되고, 시인의 삶을 유추하게 되고, 당시 시대 상황을 알게 되었다. 자연히 시는 저자의 몸과 마음에 체화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어렵다. 사물이나 사람을 좋아하면 무작정 좋아하게 되는 것이지 그것을 분석하거나 따지는 건 고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이 책은 백석평전이란 제목은 붙이기 곤란하다. 가난하고 외로웠으나 높고 쓸쓸한 시인의 삶이 화가의 가슴에 들어가 한 편의 글이란 그림으로 완성된 것만으로도 저자는 뿌듯해 해도 좋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