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 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0,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점차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란다. (여전히 그런지 궁금하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 ‘안녕’ 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까지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 ‘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이다.

 

 

  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말로만!)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2.아직 멀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어제 뜬 태양이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솟고,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그대로 겨울 나목에 스친다. 마음가짐이야 조금 달라졌겠지만 새해라고 별달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으니 갑자기 일상이 변할 리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한 것 없는 새 하루가 지나간다. 그저 누군가 신년 메시지를 희망차게 전할 때 다른 누군가는 절망의 장탄식을 호소하는 것,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점진과 급속이란 완급의 페달을 조절하며 우리 삶은 그렇게 나아간다.

 

 

  가끔씩 잔잔한 파문 같은 뉴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단신 기사 하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생도를 퇴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도덕적 한계를 위반했다는 이유 등으로 임관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받은 피고가 일반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자 소를 제기했다. 위법 판결이 내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한데 학교 측 반응이 가관이다.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한 피고의 퇴학처분은 정당하다며 상고할 계획이란다.

 

 

  기사만 보자면 학생은 퇴학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다. 성폭행을 한 것도, 교내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주말 외박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퇴학당할 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주·금연·금혼 등 이른바 ‘3금 제도’ 위반자에게 내린 육사의 퇴교 조치를 인권침해로 규정해 개선 요구를 했다. 중요한 건 이것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규제하는 웃지 못 할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기본 인권까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온당한 것일까. 재판부의 말처럼 ‘국가가 내밀한 성생활 영역을 간섭하고 제재하는 건 개인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3.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기 때문에 예술이 위대하게 보이는 거다. 따라서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4. 수많은 밥

 

  내 행동과 말은 내가 한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궁궐을 지었지만 상대는 초가를 보고, 한 번 뱉은 말은 발 없이도 천리를 내달린다. 무지개란 진실은 하나로 뜰 뿐인데(가끔 쌍무지개가 뜨긴 하는구나!) 그걸 전하는 자나 해석하는 자는 각자 다르게 말한다.

 

 

  내 의도와 상대방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도는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꽃을 꽃이라고 말할 땐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은 우리 삶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빗대 말하는 그것의 최종 목표도 결국은 진실 그 하나이다. 하나인 진실을 두고 말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자 각자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그 둘 사이엔 완벽한 심상의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다. 말하는 자는 돌려 말하고 이해하려는 자는 의중이 담긴 그 수수께끼를 제 식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소통은 그만 너와 나의 게임이 되고 만다.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마지막 신에서 송강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다. 명대사 중의 명대사로 뽑히는 이 말을 두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한 수로 그 의미를 해석했다. 형사 역할인 송강호가 유력한 용의자 역할이었던 박해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한 말이란 게 당시 관객의 대체적 정서라고 했다. 지난 가을 영화 개봉 십 주년 행사 때 송강호가 그 대사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았다. 자신의 의도는 터널 속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 하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의미로 한 애드리브 였다고 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돼도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라는 덧붙임 말이 눈길을 끈다. 내가 한 언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다. 내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이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이다.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르니.

 

 

 

 

 

5. 찔레엔 가시

 

  찔레덩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보편적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게 핀 찔레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에 오줌소태나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이라면 빨간 찔레 열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식이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어른들이라면 그 효험을 상기하며 일찌감치 찔레뿌리라고 맞받아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찔레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찔레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꽃과 열매 뿌리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가시’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성가시고 위협적이라서 부러 피했다고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찔레의 화를 돋우는 일이다. 찔레 입장에선 가시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될 터이니. 질곡의 환경에서 제 한 몸 유지 보존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가시는 필요했다.

 

 

  쌍둥이 소녀가 엄마랑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찔레덩굴 앞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여긴 이상한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왜 그러냐고 엄마가 물었다. 흰 꽃을 둘러싼 가시가 성가시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대답을 놓치자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여긴 참 좋은 곳이라고. 엄마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묻자 동생이 답했다. 가시 사이에 흰 꽃이 피었지 않느냐고.

 

 

  긍정의 자세, 선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런 비유가 진부하거나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뭐든 한쪽 시선으로만 보면 교훈이나 길들이기 식이 되어 버린다. 좋은 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은 칼등에 우선한다. 칼날이 위험하다고 칼등으로 스케이트를 탈 순 없다. 마찬가지로 멧돼지 앞의 찔레는 제 가시가 꽃보다 우선한다. 따가운 가시가 성가시다고 찔레꽃으로 멧돼지를 막을 순 없다. 찔레의 속성은 꽃과 가시를 모두 포함한다. 찔레덩굴에서 흰 꽃만 보는 건 제대로 본 게 아니다. 숨은 가시의 의미까지 보듬어야 제대로 보는 거다. 약자에게 가시는 위협용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의 방식이다.

 

  왜 정치하는 사람들만 그걸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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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1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 잘 지냈나요? 화제 글 보고 들어왔어요.
필력은 여전하시네요.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 -에 동의합니다.

『풀베개』의 그 유명한 구절을 잘 읽었어요. 저는 나스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작가에게 반해 버렸죠.

새해엔 자주 뵙기를...

다크아이즈 2014-01-13 11:40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의 꾸준한 서재행보를 응원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꾸준하고 싶어요.
도려님도 좋지요. 독서클럽에서 읽은 기억이...
소세키의 매력을 느끼는 동지들이 많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에요.
그렇게 쓸 수만 있다면, 그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고 다니냐... 정말 촌철살인이었죠. 애드립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송강호는 종종 정말 염통이 쫄깃해지는 순간에 엉뚱한 애드립을 해서
효과를 100배 더 올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는 신하균 죽기기 전에 " 내가 너 미워하는 거 아닌 거 알지 ? " 하면서
죽이는데.. 아, 이건 진짜 송강호 아니면 생각할 수 업는 애드립 같더라고요..


+

소새키 읽으면서 정말 깜작 놀랐던 것은 구닥다리 옛날 분이니 구닥다리 소설이겠네, 라고 읽었다가 그 문장의 현대성에 깜작 놀라서 정자세르 하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세끼,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3 11:47   좋아요 0 | URL
송강호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서 전 놀랐어요.
제가 설경구 다음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배우가 송강호예요.ㅋ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답이 된다면 이병헌 같은 배우를 좋아해서랄까. 좋아하는 배우 성향이 다르다는 게 이유가 되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어쨌든 연기자 이병헌의 눈빛을 제가 무척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마치 개그계의 신동엽을 제가 유재석보다 천만 배는 좋아하는 것처럼요. ㅋ 사설이 길었네요.

맞다, 신하균의 저 말도 있네요. 저것도 송강호의 에드리브란 말이지요? 못 말리는 송강호 ㅋ 그나저나 송강호 없는 한국 영화계의 흥행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네요.

소세키는 현대적이다,에 절대공감이요. 소세키처럼만 쓸 수 있다면 지금도 통하지요. 언제나 글쓰기는 힘겹습니다. 즐건 작업이 되어냐 하는데...
곰발님은 새해엔 쭉 이대로만 가신다면 대박 터질 것입니다.^^*


2014-01-1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4-01-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강호는 애드립을 잘한다고 들었어요. 내가 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의도와는 달리 해석되고 과녁을 벗어날 때 당황스러워요. 그치만 과녁의 재질이나 각도를 내가 잘 못 이해한 경우일 수도 있겠거니 하지요. 오늘 점심 같이 하며 안녕들하십니까,와 가시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했는데 또 보네요. 바쁘신 중에도 다양한 단상들을 이렇게라도 정리하며 넘어가는 팜므님.♥♡ 저도 오늘 분발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어요.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에게서요.

다크아이즈 2014-01-13 11: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려니의 생활화... 그게 안 되면 스스로 힘들어지지요.
이건 나이가 들면서 훈련한 결과이지, 원래 성정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박선생님에 대한 최대의 찬사 -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 맞지요? ㅋ
 

 

 

 

  

 

  1. 예쁜 것과 추한 것은 하나

 

  연말이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다. 그 모든 자리가 내게 맞춤할 리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있고, 가야만 하는 곳도 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은 가고 싶은 곳과 가야만 하는 곳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내 마음 한 끝에 달렸다. 굳이 구별하자면 내 마음이 그 둘의 상태를 분리해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석가의 유명 제자 중에 아난다가 있었다. 아난이라고도 하는데 ‘환희, 기쁨’이라는 뜻을 지녔다. 외모가 빼어나고 설법이 깊은 그를 여자들이 좋아했다. 백정의 딸인 프라크리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아난이 탁발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인들의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프라크리티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자신은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아난은 부처의 가르침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아난의 출중한 외모와 자비심에 반한 그녀는 매일 탁발 나오는 아난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른 아난이 왜 날마다 자신을 기다리느냐고 프라크리티에게 물었다. 스님 눈이 무척 예뻐서 그렇다고 그녀가 답했다. 아난은 주저 없이 자신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파서 그녀에게 주었다.

 

 

  우리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본 것의 실체는 알고 보면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아니 시신경과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아난의 파헤쳐진 눈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가 추하고 더럽다고 멀리하는 똥의 실체 역시 똥 자체일 뿐이다. 어쩜 거름으로 거듭나 푸성귀 맛을 북돋아 주는 역할이 똥의 실체일 수도 있다. 사물과 대상은 불변의 성격으로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적당한 상표를 붙이는 건 ‘내 마음’이다. 있고 없고, 예쁘고 추하고의 경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아난다의 눈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

 

 

  무엇이든 맘먹기에 달렸다. 하나인 실체를 두고 어떤 맘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게 우리가 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맘먹기의 장이 ‘환희와 기쁨’으로 거듭나라고 연말연시 모임은 해마다 되풀이 되나 보다.

 

 

 

 

 

 

 

 

 

 

 

 

 

 

 

 

 

 

 

   2. 꽃시 한 권

 

  언제 밥 한 번 먹자. 흔히 내뱉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우리는 그런 말로 제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다. 뇌에서 걸러 낼 틈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말의 대부분은 흰소리가 되고 만다. 그 속뜻은 ‘너와 밥 먹을 마음은 진심이지만 지금 당장이나 혹은 내일은 곤란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밥 먹을 그 ‘언제’가 언제인지를 재야 사회학자가 ‘언제’ 발표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겠나.

 

 

  밥 한 번 먹자는 그 말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분명 들어있다. 하지만 자기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험성 멘트인 것도 사실이다.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금세 잊어도 좋을 체면치례용 말로 활용되는 것이다.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가 애매하게 내뱉은 그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불쾌해하거나 맘 상하지도 않는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 ‘언제’의 약속일지라도 냉랭한 무관심보다는 한결 낫기 때문이다.

 

 

  ‘언제’ 꽃에 관한 모음시 한 권을 주시겠다는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그 말을 나는 흘려들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처럼 상투적 멘트로 이해했던 것이다. 우연히 시인을 만났을 때 한 권 남은 시집이라며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많이 감동했다. 시인으로선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한정본으로 손수 제작한 맑고 투명한 꽃시집을 오래 쓰다듬는다. 글자 하나, 레이아웃 하나 전문 편집자처럼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꽃에 관한 시를 모으셨을까, 바쁜 가운데 언제 이토록 정갈하게 갈무리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흐른 뒤 내 머리와 가슴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지는 꽃 같은 삶, 얼마나 얕은꾀와 무신경한 말들로 타인에게 내 겸양을 구걸했던가.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실은 내 체면과 안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보험성 멘트를 날렸던가. 공허한 그 말 대신 실천할 수 있는 말들의 꽃을 피우라고 이렇게 눈시울 적시는『꽃시』는 내게 왔도다!

 

  *꽃시는 개인 편집본이라 시중에 없다.  최근 두 달 새 사들인 시집으로 대신^^*

 

 

 

  

 

 

 

 

  

 

 

 

 

 

 

 

 

 

  3.같은 꽃을 보고서도

 

  그녀는 예뻤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그 소리를 안 들으면 허전하고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어느 날 낯선 옷가게에 들렀다. 웬일인지 주인은 그녀더러 예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늘 들어오던 말을 못 듣게 되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뭐가 잘못 됐지? 오늘 내 화장이 이상했나? 간만에 쓴 털모자가 안 어울리는 걸까?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자신이 왜 옷가게에 들어갔는지조차 잊은 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희한하고 한심한 경험이라며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해가 간다. 예쁜 사람들은 자신이 예쁜 줄을 안다. 해서 익숙해진 예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못 듣게 되면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나 싶어 그때부터 뒤죽박죽 엉망인 심사가 된다. 어찌 모든 이로부터 예쁘단 소리를 듣고 살겠는가. 말수가 적거나, 무심하거나, 혹은 미의 기준이 남다른 옷가게 주인을 만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잘못 없는 그들 앞에 저 혼자 흔들린 심리상태를 보상하라고 할 수는 없다.

 

 

  ‘예쁜 사람, 멋있는 사람’ 등, 인정에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번민한다. 요즘 인기 있는 법륜 스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도 대개 이런 문제들로 고민한다. 인정받지 못해 내면과 갈등하는 소시민에게 스님은 이런 요지로 답한다. ‘내 존재를 제대로 알면 칭찬에 우쭐댈 일도 없고 비난에 신경 쓸 일도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 상대의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걸 알면 내가 그 말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같은 꽃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말이 없는 꽃 보고도 서로 다른 표현을 하는데 각자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하는 말에 내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

 

 

  이런 명답을 새기다보면 예쁘단 말 듣지 않아도, 넌 왜 그 모양이냐고 눈총 받아도 의연해질 수 있다. 내 심지 곧고 굳은 게 상대 감정보다 우선이다.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것만큼 내면을 갉아먹는 것도 없다.

 

 

 

 

 

 

 

 

 

 

 

 

 

 

 

 

 

 

 

 

 

 4. 삶의 본질은 부조리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 아닌 것들의 뜻대로 되는 게 더 많다. 내 의지대로 될 수만 있다면 살맛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위험한 발상도 없다. 천하가 제 것인 줄 알고 휘두르던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저 높은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상사 잘잘한 것에서도 내 뜻보다 상황에 휘둘리는 사안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나라의 술이 묽으면 한단이 포위된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선왕이 제후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때 이웃한 노나라와 조나라는 술을 바치는 게 관례였다. 노나라 술은 매우 묽었고, 조나라 술은 무척 진했다. 조나라가 좋은 술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에게는 선물꾸러미 하나 주지 않자 초나라의 담당 관리는 앙심을 품었다. 노나라의 묽은 술을 조나라의 것이라고 바꿔서 선왕에게 바쳤다. 노여움이 폭발한 선왕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공격했다.

 

 

  노나라로서는 당황스럽고, 조나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초나라 선왕을 향해 외쳤다. 쑥대밭이 된 조나라 백성의 자존심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초나라 술 관리는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양심 상 상처 받은 한단 사람들을 물고 넘어질 수는 없었다. 방향을 바꿔 애초에 묽은 술을 제조한 노나라 잘못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구경꾼 놀이가 없어질까 심심하던 초나라 사람들은 술 관리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 현자가 나타났다. ‘세상일은 노나라나 조나라 뜻대로 되는 게 아니노라. 막강대국 초나라 뜻대로 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 세상일은 되는 대로 되는 것이노라.’  - 이 부분은 내 맘대로 각색했도다!!

 

 

  이 고사를 현대 철학용어로 빗대면 ‘부조리’ 쯤이 될 것이다. 길 가다 보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수도 있고,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을 수도 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의해 ‘들었다 놨다’ 요동질을 당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희망의 향연은 내 의지지만 상황의 심술은 신의 장난이다. 신이 즐기는 부조리라는 개그콘서트 덕에 인간은 그나마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5. 버드나무껍질 반지

 

『주석달린 월든』(현대문학, 2011)을 산 건 행운이다. (다 오렌님 덕분이다.) 별다른 해설 없는 숱한『월든』중의 한 권을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읽어야한다는 강박이 먼저 작용했던 그때는 그 깊이나 가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과 벗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한때 경이로웠던 기록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해결해야할 숙제처럼 대하느라 그 진가를 미처 몰라봤다.

 

 

소로처럼 외딴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자급자족할 맘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고 내면을 살찌우는 기록물이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가 ‘문학적 성과’로 출렁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촘촘한 일상을 풍부한 관찰력과 서정적인 감각으로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구체적이고 섬세해 목이 멘다.

 

 

  ‘집에 돌아오면 방문객이 들렀다 남긴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 다발의 꽃이나 상록수로 엮은 화관, 혹은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나뭇조각에 연필로 써놓은 이름이다. 좀처럼 숲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는 길에 숲의 작은 조각들을 취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반지를 만들어 내 탁자에 올려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189쪽)’

 

 

  청년 소로는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2 년여의 자급생활을 하면서 기록물을 남겼다. 숲으로 가, 온전히 제 뜻에 살며 삶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소중한 삶, 제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독자로서는 거창해 뵈는 그 소명의식보다 기록물이 주는 잔잔한 감동 덕에 소로가 위대해 보인다. 물질문명을 거부한 그는 유유자적의 ‘팔자 좋음’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했다. 그런 그가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굽은 잔가지’나 ‘짓눌린 잔디’, ‘한 움큼 뽑힌 풀’이나 ‘은은히 남은 시가 담배향’으로 짐작하는 서정적 붓대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시 보일 수밖에.

 

 

  삶과 사색을 실천하는 작가가 문학적 감수성까지 빛나기란 쉽지 않다. 구구절절 마음 끄는 문장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 누군들 오두막 지으러 제 마음의 숲으로 떠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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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2-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든도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 비슷한 면모가 있는데...팜므 님이 이런 취향이군요.

다크아이즈 2013-12-23 14:45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요? ㅋ
어쩌다 보니 비슷한 주제로 흘러갔어요.
노장사상은 아리까리하지만 주시하고 있어요^^*

세실 2013-12-2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난처럼 초연한 삶을 사는 지혜도 필요하겠어요.
나보다 예쁜 사람 많던데~~~~~ 예쁘다는 표현보다는 분위기 있다, 우아하다는 표현에 더 끌립니다. 요즘은^^

다크아이즈 2013-12-23 14:49   좋아요 0 | URL
아난처럼 해버리면 부처되어요.ㅋ
부처보단 사람이 더 사람답잖아요. 말 되네~~
세실님은 상큼, 긍정 마인드를 가진 분위기파!
귀요미 느낌도 강해요. 어딜 가나 사랑 받는 캐릭터지요.^^*

oren 2013-12-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의 여러 책들을 두루 읽어보니 그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살고자 했던 진정한 뜻은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사업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더군요. 물론 자신만의 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과 『월든』이라는 책을 쓰는 일이었지요. 책읽기, 자연과의 교제,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등도 물론 소로우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업이었고요.

저 역시 팜므 님처럼 『주석달린 월든』을 읽으면서 맨처음 『월든』을 읽었던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만큼 깊은 감동을 느꼈답니다. 팜므 님이 인용해 주신 부분도 정말 인상적이었고요. 저는 「콩밭」과 「난방」을 읽는 동안만 하더라도 제가 시골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무수한 옛 추억들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더랬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12-23 14:53   좋아요 0 | URL
그쵸? 단순히 자연이 목적이 아니라 책을 쓰는 일, 그래서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월든을 선택하고 오두막을 지었다는 사실 맞지요?
자연친화가 주목적이 아니라 목표지향적인 삶을 위해 자연을 선택한 사람이었지요.
어쨌거나 남들 안 한 거 시도하면서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으니 이래저래 대단한 사람은 맞아요. 2년 2개월의 월든 생활 뒤에도 계속 자연 생활을 고집했나요?

페크pek0501 2013-12-2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생각들을 건드려 주는 유익한 님의 글을 읽고 가는 월요일 오후입니다. ^^

다크아이즈 2013-12-23 14:56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 글이 더 유익하지요.
문체나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페크언냐량 비슷한 주제를 말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살이가 비슷해서 그렇겠지요? ㅋ

프레이야 2013-12-2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욱 훑어읽고 공감만 누르고 가요. 헤헤 저 조금 마셨어요. 내일 찬찬히 읽을거에요. 팜므언니 굿나잇^^

다크아이즈 2013-12-25 16:54   좋아요 0 | URL
프레님, 오늘도 와인 한 잔 땡기는 날인데요~ 메리크리스마스니까요.
내리 나흘째(여행 다음날부터ㅠ) 장염에 시달리는 남푠 땜에 심란해요.
글도, 책도 손에 잘 안 잡혀요. 그나마 성경의 역사, 흥미 있게 읽고 있어요.
남은 시간 가열찬 메리크리스마요^^*


순오기 2014-01-0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이런 글쓰기로 알라딘 이웃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팜님!^^

다크아이즈 2014-01-09 21:38   좋아요 0 | URL
아, 오기 언니, 저 알라딘에 넘 소홀했어요.
새해엔 알라딘에 충성하자, 이 소박한 계획도 있답니다.
이틀 강행군에 몸살 나지 않으셨는지요?^^*

순오기 2014-01-10 18:14   좋아요 0 | URL
즐겁게 놀고 왔는데, 몸살이라뇨?
있던 몸살도 날아갈 판인데요!!^^
 

 

 

 

 

 

 

1.신춘문예 단상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출판 매체가 다양하지 않고, 신인 등용문이 넓지 않았던 한때 그것은 문학청년의 로망이었다. 요즘은 굳이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는 길은 널렸다. 성실한 열정으로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사가 먼저 알고 작가가 되도록 도와준다. 일제강점기 때처럼 신춘문예라는 등단 제도가 꼭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면 쓰는 데 관심이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춘문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한 분야에 몇 백 명이 응모하는데 달랑 한 명만 뽑는 신춘문예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게임과도 같다. 게다가 완전무결하게 공정한 게임도 아니니 부조리한 면도 있다. 최종심에 안착한 작품들이 모두 좋아도 한 편만 뽑아야 되니 심사자의 성향과 주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운 있는 자가 당선이란 왕관을 쓰게 된다. 출판 매체들이 내거는 신인상 쪽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출판사 쪽보다 나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신춘문예에 사람들이 몰린다. 왜일까?

 

 

  신춘문예 제도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새해 첫날, 제 이름 자가 박힌 작품이 버젓이 지면에 실릴 수 있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것도 메이저급 신문이라면!) 영광을 얻는다는 거다. 일회성일지라도 쓴 글에 대한 보상 치곤 쏠쏠하다. 두 번째로 문단에서 신예작가로 인정해준다지 않는가. 새해 첫날부터 새로운 작가 탄생을 신문사에서 홍보해주니 그 매혹을 떨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두둑한 상금이다. 짧은 소설 한 편에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고액의 고료를 준다.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이게 함정이다. 잔치는 금세 끝나고, 당선자는 머잖아 잊힐 이름이 되고 만다. 신춘문예 당선 자체는 작가의 길과 별 상관이 없다. 작품이 자기를 말해준다. 꾸준한 작품 생산력 없는 작가에게 신춘문예란 타이틀이 무슨 소용인가. 단발성 등단 절차가 아니라 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십이월이다. 그 진지함의 제일 순서는 ‘부지런히 쓰기’라는 건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2.목소리의 진실

 

  흔히 착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목소리와 상대가 받아들이는 내 목소리의 느낌이 같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공기 중에 퍼지는 내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몸주체가 각각 나와 상대로 다르니 목소리도 달리 들릴 수밖에 없다.

 

 

  비염 목소리를 달고 사는 나는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주로 오해를 산다. 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디 아프냐, 감기 걸렸냐, 자다 일어낫냐’고 상대는 조심스레 확인한다. 아프기는커녕 혼자 빈둥거리며 잘 노닐고 있다 받는 전화일 때 주로 상대는 그런 느낌을 받나 보다. 혼자 있다 보면 말에 노출될 기회가 없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 톤은 낮아지고 분위기도 가라앉게 된다. 여기다 오래 앓아온 비염으로 코 기능이 망가져 왜곡된 목소리로 상대에게 들리는 것이다. 감기 걸렸냐고 상대방이 되물을 때마다 ‘멀쩡한데 비염 목소리 때문에 그래요.’라고 변명하려니 스스로 한심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 고유 목소리의 진실은 어디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구나! 김중혁의 에세이『모든 게 노래』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짜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생각한 내 목소리는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공기라는 중재 과정과 상대 청각이란 거름망을 거쳐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와 상대방 모두 진실을 말하고 듣지만 그건 온전한 진실로 전달되지 못한다. 진실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전달되기 전, 공기 중을 통과하는 그 찰나에만 존재한다.

 

 

 

 

 

 

 

 

 

 

 

 

 

 

 

 

 

 

  3. 사람이 우선이다

 

  하반기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끝나간다. 독서 방법이니 논술의 개념이니 하며 회원들과 열 올려가며 공부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우리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희망’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어느새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자리엔 사람의 훈기로 가득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다사로운 분위기를 아무도 말하는 이는 없지만 서로 감지하게 된다.

 

 

  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아기 손잡고 오는 것도 모자라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분, 남들보다 먼저 와 원탁 대형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분,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챙기며 관심을 가져 주는 분, 유머와 생활의 지혜로 주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주는 분 등등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들을 우리는 만났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공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세부 목표 중의 하나는 ‘짧은 글로 힐링하기’였다. 각자 추천한 그림동화 한 편씩을 매주 돌아가면서 읽었다. 한정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보듬기엔 그림동화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동화를 낭독하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감탄사나 탄식의 한숨이 섞여 나오곤 했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낭독하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 올바른 자녀관을 갖는다는 것 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말썽을 부려도 내 아이, 기쁨을 선사해도 내 아이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 로 자식은 엄마에게 존재하고, 그런 자식에게 한결 같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상징적 존재로 엄마 또한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 늙은 엄마 앞에서 어른이 된 아들이 불러주는 자장가 앞에 서면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희망이며 사랑이 곧 삶의 의미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사람 모이는 궁극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넬슨 만델라

어제는 넬슨 만델라의 추모식이 있었다. 비 내리는 요하네스버그 월드컵경기장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일관한 한 생애 앞에 드리는 찬사와 존경의 물결이었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로하니 이란 대통령 등 내로라하는 각국 정상들도 참석했다. 한 인권지도자의 추모식 앞에서는 니 편 내 편의 경계가 필요치 않았다. 적대와 연대를 아우르는 평화의 기치, 그것은 넬슨 만델라가 추구한 궁극의 목표였다. 인권 전도사였던 그의 죽음 앞에서 겨우 화합과 우의의 그림을 연출할 수 있다니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지.

 

 

  만델라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우연히 한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했다.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수감되기를 몇 차례, 종신형을 선고 받아 삼십 년 가까운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90년 석방된 그는 인권지도자로 돌아왔다.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온건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종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도 진저리를 쳐야했다. 그 상황에서도 백인 정부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아야했다. 민주 선거를 관철시켰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9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결은 물론,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의 핵심적 리더가 되었다.

 

 

  추모식장에서 만델라의 오랜 비서를 지낸 이가 말했단다. “적대적 관계였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는 모습을 만델라도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의 전언은 곧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서로 손 잡는 것,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만델라를 떠나보내면서 깨친다.

 

 

 

 

 

 

  5. 안과 밖

 

  모든 사람에게 맞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가족끼리도 서로 맞추기 어렵지 않은가. 오렌님의 서재에서 이런 독서 메모장을 봤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하인에게는 보통사람이다.’ 옳다구나 싶다. 서양 속담인데 몽테뉴의 수상록이 원 출전이다. 오렌님이 안내하는 책이라면 무조건 믿고 사고파 장바구니에 담았다. (『주석 달린 월든』을 이야기하면서『수상록』을 언급하셨다. 전자도 물론 장바구니 행이다.)

 

 「후회에 대하여」부분에서 몽테뉴는 ‘가족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일갈했다. 프랑스 어로 말한 몽테뉴의 그 말이 영어 식으로 바뀌어 위의 속담으로 정착한 모양이다. 명쾌한 이 한 마디 말로도 고전은 공감의 온상지요, 서늘함의 확인처라는 걸 알겠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바깥에서는 제 주어진 역할을 무리 없이 감당한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면 조금 달라진다. 그건 긴장감의 차이일 것이다. 평판이 두려워, 체면이 깎일까봐, 좋은 인상을 얻기 위해 등등, 사람들은 집밖을 나서면 최소한의 페르소나(가면의 인격)를 연기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돌아간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와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면 너무 완벽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의 나는 야무지지 못하고 일을 잘 벌인다. 허탕도 잘 치고 허튼짓도 많이 한다. 주책 부리고 실수하는 것은 내 담당이요, 주워 담고 뒤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나 아닌 가족이다. 예를 들면 게르마늄 찜기는 당연히 직화 방식으로 불을 쏘이면 안 된다.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먹다 남은 갈비찜이 든 그 도자기 재질 찜기를 가스렌지 불 위에 곧바로 올리고 말았다.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용기는 퍽, 하고 파열음을 냈다. 도자기 파편과 내용물로 범벅이 된 주방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낼 힘마저 놓아버렸다.

 

 

  이럴 때 눈썰미 강한 몽테뉴의 사색을 빌리면 된다. ‘아내와 하인이 보기에도 눈에 띄는 허점 없이 사는 자는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사람들에게 추앙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인격의 가면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경구인지. 집안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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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12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에서 힘을 얻습니다. 둘째딸이 초등학생일때부터 둘이 말장난으로 재밌게 놀곤 하는데
고2가 된 그 애가 어느 날 그러더군요. "엄마 이제 수준을 높여. 나 다 컸단 말이야."
헐... ㅋㅋ 멍했어요. 이럴 땐 자식 크는 게 싫어요.
이젠 제가 자식 앞에서 '수준'을 검사 맡아야 하는 상태에 도래했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딸 아들 앞에서 언제나 점검 받고 검사 맞는 인생인걸요.
믿음을 못 주니 외식 때 화장실 가서 조금만 늦게 자리에 와도 식구들은 안절부절못합니다. 변기에 빠졌을까봐라네요, 나 원 참 ㅠㅠㅠ

oren 2013-12-1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에 집안 잔치에 오셨던 '아제' 한 분께 여쭤봤더랬어요. (그분의 둘째딸인) '○○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요. '갸는 아직도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여동생은 국문과를 졸업한지 벌써 10년도 더 지난 듯한데 말이지요. '가능성은 좀 있어 보이나요?' 하고 다시 여쭤봤더니, 그 아제가 지갑 속에서 무얼 꺼내시더군요. 느닷없이 불려나온 그 '신문 쪼가리'에는 뜻밖에도 해마다 신정연휴때면 방바닥에 배깔고 읽어보던 익숙한 모습의 '신춘문예 심사후기'가 담겨 있더군요. 그 내용인즉슨 한결같이 '뽑아줘도 충분한...' 또는 '탈락시키기 아까운...' 식의 말투여서 더 기가 막혔고, 그 아제의 '진한 아쉬움'이 심사평 하나하나에 콕콕 박혀있는 듯싶더군요. 당사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다가 결국 '운수'를 탓하는 쪽으로 서둘러 방향을 틀고 말았지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31   좋아요 0 | URL
일치감치? 방향 잘 틀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사평을 지갑에 넣어 다닐 정도면 최종심에는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셨나 봐요.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니 그 분도 미련을 못 버렸을 것 같아요.
젊은이들에게 전업작가를 꿈꾸라고 하기엔 우리 현실이 넘 암담해요.
그래도 그 분도 글쓰기 자체는 포기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천형이라잖아요ㅠ

마녀고양이 2013-12-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란 친정의 분위기는, 뭐랄까, 가족끼리도 체면을 차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것은 할아버지 댁도 마찬가지였지요, 거기서부터 내려왔나봐요. 저는 결혼하고나서 많이 자유로움을 느꼈는데, 그런데 집안 식구들끼리 방귀를 용납하게 된지가 얼마되지 않아요. 실은 남편과 딸은 마음대로 자유로왔는데, 저는 매우 어려웠던거지요. 요즘 우리 식구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맘대로 퍼지고 이러고 살아요. 페르소나를 벗을 공간이 있다는 것, 이거 행복 같아요.

언니, 거기는 오늘 눈이 오나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36   좋아요 0 | URL
마고님은 정돈된 분^^*
전 아부지한테도 할 말 안 할 말 다하고 자란 분위기라 집안에서는 체면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것 같아요. 그게 또 좋은 게 아니더라구요. 방귀 정도는 당근 신혼 때부터 텄구요.
마고님처럼 스스로 품위를 유지하는 게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요. 저처럼 너무 풀어져도 실수가 잦으니 안 좋아요.

그러면서도 페르소나를 벗을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절대 공감이요. ]
밖에서도 체면 치레하는데 안에서라면 룰루랄라해야지요.
답이 늦어뿌맀어요. 마고님...^^*

노이에자이트 2013-12-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예인 운동선수 작가의 공통점...신인 때 유망주였는데 그러다 끝나는 사람이 많다는 거죠.신춘문예 당선으로 끝나는 사람들도 많고요.데뷔작이 은퇴작이 되어버리면 참 허망하죠.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교사 공무원이 되길 바라나봐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38   좋아요 0 | URL
연예인, 운동선수, 신인작가들 - 비슷한 조건 맞지요?
연예인은 운이 좋아서 살아 남을 수 있지만
운동선수와 신인작가는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살아남는다는 차이랄까요?^^*

양철나무꾼 2013-12-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카.톡과 문자 메시지가 발달해서 덜 하지만,
아니다, 핸드폰과 거기에 뜨는 프로필 사진 때문에 덜한가보다, ㅋ~.
한때는 전화만 받으면 너 말고 어른 바꿔하는 통에 아주 괴로웠었습니다.

아직도 목소리를 트라우마로 달고 살지만,
그래도 가까운 지인들에게 때때로, 인사 차 듣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사실 일거라고
굳게 믿씁니다여, ㅋ~.

다크아이즈 2013-12-16 20:40   좋아요 0 | URL
양철님 목소리 톤이 맑으시구나.
저는 크고 저음 비음 뭐 이런 목소리에요.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 보면 부럽부럽 모드가 됩니다.
목소리도 타고난 게 반이니 꾀꼬리 목소리 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저랑 바꾸실래요, 양철님 목소리? ㅋ

단발머리 2013-12-1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집안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별로 없죠. 저도 일 벌이는 거는 완전 전문가인데, 요즘은 딸롱이가 제 몫을 해내서, 저는 치우기 담당이 되었어요.

저를 닮아 덜렁거리는 딸애에게 부드럽게 말해야겠지요.

"언제나 너를 사랑해"를 읽어주는 마음으로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42   좋아요 0 | URL
단발님 그쵸? 집에서까지 존경 받으면 그건 넘 심한 페르소나 쓴 거 맞지요?
자고로 일을 벌여야 수습하는 가족도 있는 거잖아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넘 짠해요. 돌려 읽기 하면서 다들 울컥했어요.
단발님 따님에겐 조금 어려울까요?
무척 쉽고 짧은데 내용이 깊어 이건 어른용 그림동화로 읽혀요^*
 

 

 

 

 

 

 1.무좀 단상

 

  한겨울이 코앞인데 무좀이 도졌다. 엄지와 검지발가락 사이가 찢어져 따끔거린다. 오래 전부터 각질이 벗겨지는 정도의 무좀증세가 있긴 했지만 온 여름내 멀쩡하던 발이었다. 맨발에다 샌들을 신던 여름에는 통풍이 잘 되어 무좀균이 숨어 있었는데, 간절기를 맞아 양말을 신는데다 신발마저 부츠로 바뀌니 그렇게 된 모양이었다. 제 역할을 잊고 있던 무좀균이 저 좋다고 활개를 친 것이다. 다행히 약을 발랐더니 금세 가라앉는다.

 

 

  며칠 무좀약을 바르면서 이런저런 단상이 스친다. 무좀균은 박멸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 삼아도 좋을 위안이라고. 우리네 소소한 일상은 무좀 앓는 발과 같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시련은 무좀 앓는 발에 비유할 수 없겠지만 웃고, 울고, 떠들고, 마시는 가운데 생겨난, 감당할 만한 모든 고충은 무좀균에 비유하고 싶다.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비의(秘義)는 가지고 산다. 아픔이나 상처의 옷을 입은 그것은 평소에는 비활성화 되어 있다가 어떤 계기가 있으면 표면으로 드러난다. 통풍에 문제가 없을 땐 잠잠하던 무좀균은 바람 쐬어 주지 않고 꼭꼭 싸매기만 할 때 스멀스멀 피어나 발가락 사이를 갉는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뭔가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마음에 무좀균이 생긴다. 그때 위로라는 약을 발라 상처를 달래는데, 금세 낫는다. 그렇다고 무좀균은 완전히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들었을 뿐인 이때의 무좀균은 발이 발로 단련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경고 장치로 기능하니 그대로 두는 것도 괜찮다.

 

 

  그 어떤 약점에도 노출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산다는 건 환희라는 날개옷을 걸칠 때보다 고통이라는 갑옷을 두를 때가 더 많다. 수고로운 갑옷의 시간을 무좀 앓는 발이라 쳐두자. 그 성가신 쓰라림이 가슴 한쪽을 찢어대기도 하겠지만 그건 모두 견뎌낼 만한 것들이다. 따라서 박멸할 필요도 없다. 혹시라도 완전히 없애버린 평범한 상처 그 자리에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나 번민이 들어찬다면 그보다 낭패스런 일도 없을 것이니.

 

 

 

 

 2.관계는 상호적이다

 

  인간관계의 호불호는 상대적이며 비논리적이다. 타인에게 괜찮은 사람이 내게 와선 비호감이 되는가 하면, 나와는 둘도 없는 사이지만 타인에겐 비호감이 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객관적이지도 않고 정답도 없다. 이것을 인정하면 관계의 피로감에서 어느 정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한데도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는 인간은 모든 관계에서 환희만을 맛보기를 바란다. 해서 어색한 관계를 만나면 그것이 자신의 잘못인양 자책하고 번민한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도 상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니 가만 내버려 두면 된다.

 

 

  첫인상에서 상대에 대한 호불호는 찰나에 결정된다. 시간을 십 분이나 한 시간 연장시킨다고 그 찰나의 마음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그 순간의 판단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감정을 유지하느냐 폐기하느냐는 상호보완적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로 근접성, 유사성, 친숙성, 상호성 등을 언급한다.

 

 

  물리적 거리가 가까우면 더 친해질 가능성이 높고, 취미나 관심사가 비슷해도 다가서기 쉽다. 원래 성격이 상냥하고 친밀한 사람이면 호감도가 높아 누구와도 쉽게 사귈 수 있다. 그래도 마지막 상호성이 사람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합당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대개의 관계는 교감 즉 서로 주고받음으로 형성되는데, 그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몸짓, 발짓, 눈빛으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상대가 더 잘 안다. 내가 느끼는 만큼 상대도 느낀다.

 

 

  한 번 형성된 나쁜 인상은 다른 좋은 단서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내게 거슬린 언행을 하면 내 눈과 마음은 객관성에서 멀어진다. 내 프레임 안에서 상대는 부정의 영역에 머물고, 상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번 잘못 엮인 감정은 재고의 여지마저 꺾어놓는다. 그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면 가만 두면 된다. 때론 인위적인 의지보다 자연스런 불편함이 훨씬 인간적일 때가 있다. 모든 이를 친구 삼겠다는 것만큼 어리석은 노력도 없을 테니.

 

 

 

  3.작은 몸짓 큰 관심

 

  모든 사연은 작은 우연에서 비롯된다. 거창한 성과나 큰 깨달음의 시초도 밀알 같은 소박함에서 출발한다. 삶 이래로 숱한 우연이 우리 곁을 스쳐갔다. 그것들 중 제 삶의 물줄기를 바꿀만한 순간의 경험과 환경의 영속성이 모여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지나치게 소심하고 주변머리 없는 아이가 있었다. 존재감 없는 그 아이는 수업 시간에 단 한 번도 자발적으로 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선생님 눈에 띄고도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었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놀았다. 마음 같지 않은 아이의 몸 신호는 언제나 ‘나도 저 아이들처럼 나를 말하고 싶어요.’ 라고 말하고 있었다.

 

 

  어느 한 해 다행히 아이는 어질고 인내심 많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은 눈에 띄게 자신감 없는 아이를 위해 부러 발표를 시키고, 틈만 나면 대화를 유도했다. 하지만 아이는 기질적, 환경적 제 한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한 사람의 성정이 쉽게 바뀔 리 없다는 걸 깨친 선생님은 방법을 달리했다. 의식적으로 뭔가 하도록 이끌기보다 그 아이의 작은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다.

 

 

  우연히 만들기 시간에 아이의 손재주를 발견한 선생님은 지나치듯이 한 마디 칭찬을 했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흥미를 느끼고 몰입하는 그 아이를 위해 무심함을 가장한 칭찬 세례를 이어나갔다. 우물쭈물하고, 민숭민숭하기만 한 아이에게 맞춤한 접근 방식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제게 손재주 하나는 있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아이는 훗날 전통옷 만드는 일로 일가를 이루었다.

 

 

  제 소심함에 겨워 떨었던 몸짓을 섬세한 눈으로 지켜봤던 선생님을 추억하는 그 아이가 말한다. 무심한 듯한 선생님의 적극적인 낯빛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여전히 말로는 자신을 드러내는 데는 재주가 없지만 여문 손끝으로 모든 걸 보여주는 그이가 강조한다. 모든 시작은 우연하고 작은 것에서 출발한다고. 제 작은 몸짓을 눈여겨 봐주는 세상 모든 이가 스승이라고.

 

 

 

 

 4.날갯짓

 

  누구에게나 날개는 있다. 하지만 그 날개의 쓰임새는 천양지차이다. 약한 날개를 가졌으나 그 깃털을 보듬어가며 약진의 발판으로 삼는 이가 있는가 하면, 기왕의 강한 날개를 가졌으면서도 그 기운을 뒷전으로 몰아내 퇴보의 빌미로 삼는 이도 있다. 흥미로우면서도 서글픈 건 날갯짓을 일관성 있게 한다는 게 쉬운 게 아니라는 거다. 강단 있게 제 의지를 실천하는 사람들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다. 신은 인간을 핑계거리 많은 피조물로 만들었다. 해 봐도 안 되고, 하기 싫어서도 안 하고, 할 여건이 안 되어서 못하고 등등 갖은 이유로 우리들이 시도하지 않은 날갯짓에 대해 변명을 할 기회를 부여해주었다.

 

 

  먼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얘기다. 맘먹은 대로 날갯짓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겸한다는 결심도 작심삼일이요, 매일 정해진 분량의 원고를 쓴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허방에 빠뜨리기 일쑤고, 독촉 받은 원고를 마감 시간에 맞추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이다. 해서 주변인들이 뚝심 있게 제 날개를 펼치는 것을 보면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다. 만날 그 정신만은 벤치마킹하는데 실천력이 부족하다. 역시 스스로 마련해 놓은 여러 핑계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그 핑계의 전부는 게으름일 뿐이다.

 

 

  뉴질랜드 은화에 보면 키위새가 등장한다. 키위새는 뉴질랜드의 나랏새이다. 부리가 길고 후각이 발달한 그 새는 날지를 못한다. 아주 오래전 먹을 것이 풍부했던 뉴질랜드 땅의 그 새는 천적이 없었다. 굳이 날아다니지 않아도 먹을 것 천지였다. 자연히 날개는 퇴화했다. 하지만 인간이 그 땅을 접수하면서 키위새에겐 재앙이 따랐다. 인간과 함께 들어간 고양이, 들쥐 등의 활약과 인간들의 포획에 의해 그 개체수가 멸종 위기 수준으로 줄었다. 그들에게 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그리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적 없는 삶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지만 그 평화로움이야말로 제 영혼을 갉아 먹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묵묵히, 또는 소란스럽게 제 삶의 에너지를 분출하며 사는 모든 이들을 제 삶의 긍정적 천적, 아니 스승이라 여긴다. 그들이 이끄는 일상의 방식에 내 영혼의 밥술을 얹어 조금이라도 자극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퇴화하는 날개 끝에 얻은 일상의 평화에 안주하는 거야 말로 가장 무서운 습관이다.

 

 

 

  

 5.채찍과 당근

 

  누구나 칭찬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이들이 칭찬만을 바라는 건 아니다. 거짓 칭찬은 안 한 만 못하다. 예를 들면 상급반 글 모임이 있다 치자. 쌓아온 글쓰기 연륜만큼이나 그들은 글을 보는 안목 또한 높다. 어떤 글이 매혹적인 것이며, 어떻게 써야 잘 쓰는 것인지도 잘 안다. 안다는 것과 쓰는 행위는 별개라는 것까지도 꿰 차고 있어,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도 잘 안다.

 

 

  해서 제 글에 대한 자부심도 있겠지만 그 글에 대한 타자의 충고를 최대한 겸허히 받아들일 줄도 안다. 왜냐하면 진심어린 도반들의 한마디야말로 제 글을 살찌우는 원동력이 된다는 걸 축적된 여러 활동을 통해 깨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료나 스승이 제 글을 칭찬해주면 기분 좋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쓴 소리를 한다고 특별히 서운해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약점을 본인이 잘 알고 있고, 그 약점을 넘어서려면 주변의 채찍이 꼭 필요하다는 걸 서로가 인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어느 일정 수준에 도달한 부류의 예이고, 입문자의 경우인데다 마음 문을 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얘기가 달라진다. 자신의 글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데, 옆에서 충고랍시고 누가 한 마디 한다면 그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그럴 수 있다. 글에 대한 객관적 눈이 뜨이기 전이기 때문에 그 어떤 좋은 충고도 고깝게 들린다. 그 상황에서는 채찍의 방식 보다는 그가 원하는 당근의 방식을 취한 채,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한다.

 

 

  단련된 고수는 벌점을 달게 받지만, 순수한 입문자는 가산점을 원한다. 고수가 당근을 겸연쩍게 여기기는 쉽지만, 입문자가 채찍을 감당하기는 버겁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은 고수보다는 하수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처한 상황에 따라 당근과 채찍은 달리해야 하고, 달콤한 채찍도 충분한 당근이란 뿌리가 있은 뒤의 일임을 알겠다.

 

 

 

 

 6. 경험의 타인

 

  위대한 철학자의 큰 사유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다.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한다. 한 사람의 디테일한 일 퍼센트가 그 사람의 숨겨진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돌렸다.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사유에 언제든지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나는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언제나 공감한다. 그의 사유를 한마디로 풀어 쓴다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감이 곧 나의 주체성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어릴 적 체험이 그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은 그는 이후 한 번도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 개인적 전쟁 체험은 그에게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존재론은 타자를 자기 안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전체성의 철학이었다. 개별성과 고유성은 무시하고 타자를 집단 속에 묶으려 하는 그 방식에 레비나스는 염오증을 느꼈다. 이런 통찰의 아픈 뿌리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다. 그것을 무시하고 내 영향권 아래 두고 맘대로 부리고자 할 때 국가주의, 전체주의 같은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긴다. 타자가 곧 나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이런 위험한 사고의 틀 안이라면 전쟁도 필연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전쟁 통에 가족을 잃은 레비나스의 경험이 동일자로 흡수되지 않는 절대적 타자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선명한 계기가 되었다.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이다.  나 이외의 것을 인정하고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확장시키는 의무, 그것을 레비나스는 어릴 적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윤리학으로 승화시켰다. 

 

 

 

 

 7.알바트로스적 전환

 

  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다면 내 개인사엔 ‘알바트로스적 전환’이 있었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어리바리한 나에 비해 독서로 무장한 후배는 세상을 향한 시크하고 시니컬한 시선을 버리지 않았다. 그미는 랭보와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등을 좋아했는데, 치기로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 그런 시인들의 성향을 좇았다. 보들레르가 그랬던 것처럼 냉소적인 눈으로 사물을 대했으며, 세속적인 부르주아 근성을 혐오했다. 그미가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편안한 정신이었다. 그미는 고매하고 피로한 지적 노동자를 자처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 내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고, 선하고, 밝고, 맑고, 소박한 것이어야 온당했다. 추하고, 악하고, 어둡고, 흐리고, 화려한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들이었다. 이유 불문한 당위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게 후배의 사고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사유의 빈곤과 약점을 포착하고 세뇌하는 그미의 눈썰미가 불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대상을 선명하고 명쾌하게 보는 그미의 통찰력이 부러웠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온 우주를 꿰뚫는 듯한 그 모습을 나는 높이 샀고, 내 사유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너무 남다르게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이다.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던 그미는 그야말로 고독한 큰새였다. 거대 알바트로스도 선원에게 잡힌 신세면 고역을 면치 못한다. 성치 못한 몸으로 거대 날개를 질질 끌어야 하고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기도 한다. 고매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오죽하면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보들레르는 시인인 자신의 운명으로 치환했겠는가. 지상으로 내몰린 남다른 생각의 소유자들은 운명적 고난자들이지만 타고난 개척자이기도 하다. 우뚝한 새가 평범함의 지상에 유배당했을 때 겪을 가혹한 정신의 웃자람을 그미는 태연히 즐겼고, 나는 전율하며 그것을 부러워했다.

 

  보들레르 시를 다시 꺼내 읽는 밤, 자꾸만 옛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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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9 0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만 보니 저는 하루에 페이퍼 하나를 꼬박꼬박 올리지만
팜므 님은 페이퍼 7개 분량을 일주일에 한번 올리시는군요... ㅎㅎㅎ

그렇게혜윰 2013-12-09 10:57   좋아요 0 | URL
하루에 한 페이퍼도, 하루에 7 페이퍼도 다 대단하신 거예요!
전 기복이 있네요 ㅋㅋㅋ

다크아이즈 2013-12-11 10:15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ㅋ
자주 올 수 없으니 한꺼번에 물량공세ㅠ
곰발님처럼 부지런하고, 페이스 조절도 잘 하고 싶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18   좋아요 0 | URL
그렇게 혜윰님, 닉네임 바꾸셨나요?
제 즐찾에 있는 분인데, 이름이 바뀌신 것 같아 헛갈려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저도 알라딘 찾는 면에서는 기복의 여왕인 걸요. ^^*

마녀고양이 2013-12-0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언니, 책 무지하게 많이 읽으셨네요... 으아....
알라디너들은 왜 자꾸 저를 반성하고 분발하게 만들까요... 캬.

관계는 상호적이다....
친밀감을 형성하는 요인을 보면, 자주 보면 정든다, 나랑 비슷한 곳이 있을 것... 과 같은 게 있더군요. 어디서 들었는데, 영화배우 이영애씨는 너무 완벽하게 생겨서 도리어 영화 그림이 안 나왔다, 어울리는 남자 배우가 없었다 라는 말을 감독들이 했대요. 그럴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당근과 채찍...
저는 하수예요, 하수. 아직 당근이 엄청나게 필요해요!! 큭큭.
저는여, 제 나름대로 '평생 받을 당근 총량의 법칙'이란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요.
연구 결과는 절대 없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26   좋아요 0 | URL
마고님에 비하면 독서량은 아니지요. 잘 계시지요?
완벽한 미인이면 부담스럽지요. 그런 사람 만나면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걸 자주 목격하잖아요.

저도 하수인걸요.
제가 매일 자각하는 건, 참 세상엔 글 잘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거지요.
알라딘에도 그런 분들 많잖아요, 마고님 비롯... 긍정의 자극이 되고 있어요.
만날 하수인 스스로를 자책해요. 자책도 잦으면 주변인들이 피곤하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자중하는데도 불쑥불쑥 난, 왜이리 글이 안 되지?, 못 써, 소질 없어, 이러면서 한숨 짓는답니다.

여긴 눈발이 조금씩 날리네요. 마고님은 오늘도 열공 중, 또는 열 상담 중...
부디 겨울 잘 나시길^^*

oren 2013-12-09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계절의 기나긴 한때를 억지로 뭔가를 하며 보낼 필요는 없다'고 누가 말했지만, 그래도 무좀이 도져 몹시 가려우면 우선은 좀 시원하게 긁고 나서 무좀약을 찾을 수밖에 없지 싶어요.
* * *
결국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야 하며, 냇물은 우리가 걱정할 것 없이 또는 적어도 우리를 휩쓸어 가게 하지 말고, 다리 밑으로 흘려 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우리는 몸이 비틀어졌거나 못생긴 사람을 만나는 일이 있어도 충격을 받지 않으면서, 어째서 정신이 비뚠 사람에게는 화내지 않고 볼 수가 없단 말인가? 이런 악덕스런 거친 마음씨는 잘못 자체보다도 판단하는 자에 매여 있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항상 입에 담아 두자. "내가 무엇을 불건전하게 보는 것은 나 자신이 불건전한 까닭이 아닌가?" 자신에게 잘못은 없는가? 남의 잘못을 알려 준다는 것이 도리어 내가 비난받을 일이 아니던가? 정히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잘못을 힐책하는 것은 현명하고도 거룩한 훈계이다. 우리가 서로 맞대놓고 하는 책망뿐 아니라 모순된 일에 관해서 따져 보는 이치와 논법까지도 대개는 우리에게 되걸어 올 수 있으며, 우리는 칼로 자신을 찌른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옛 사람은 무게 있는 예를 상당히 남겨 주었다. 다음 어구를 생각한 사람은, 여기에 들어맞게 아주 묘한 말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나 자기의 방귀는 구수하다. (에라스무스)

우리 눈은 뒤의 것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루에 백 번은 이웃 사람들의 문제로 자신을 비웃으며, 우리 속에서 더 분명히 보이는 결함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며 미워한다.
- 몽테뉴

다크아이즈 2013-12-11 10:32   좋아요 0 | URL
오렌님은 어디서 이토록 적재적소에 좋은 말씀만 건져다 배달해주시는지요.
알라딘의 맑은 우물 같은 분^^*
무좀은 통풍과 직결된다는 걸 실감했어요.
수면 양말 신고 있으면 그 다음날 새끼 발가락 사이가 따끔따끔ㅠ
심한 거 아니니 평생 친구로 가려구요.

오렌님의 겨울도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프레이야 2013-12-1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님, 영월로 가는 차안에서 이 페이퍼를 읽으며 몇가지 생각이 들어요.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를 원어로 읽는 그녀를 저도 원생적으로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힙니다. 자신을 이리 채찍질하는 마음에 응원 날립니다. 건필하시구요!

다크아이즈 2013-12-11 10:37   좋아요 0 | URL
영월행이라, 얼마나 좋으실까
좋은 결과 안고 떠나는 그 여행 그림이 그려집니다.
알바트로스 단상 편에 나오는 그 후배 생각이 간절해요.
(일상에 안주한 절 보고 실망할 것 같아 미뤄두고 있다는 ㅠ)
어제도 사람들 만나면서 느낀 건데, 열심히 사는 사람들 앞에 장사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런 사람 30퍼센트만 닮아도 좋을 건데...

그나저나 전력을 다하는 그사람들은 태어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1. 불러주는 데 있더나?

 

곽경택 감독의「친구2」는 단순 조폭 영화로 읽히지 않는다. 삶에 관한 여러 은유적 메시시를 담고 있다. 전작이 주는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네티즌들의 평가는 접어두련다. 조오련이랑 바다거북이랑 수영 시합하면 누가 이길까. 삶이란 이런 비루한 질문의 연속이고, 그런 질문들에 괜찮은 답이 있을 리 없다는 걸 말해주는 영화이다. 폼 나게 살고 싶지만 결코 폼 나지 않는 삶의 비애를 조폭 군단의 형식을 빌려와 들려준다.

 

 

‘어른 남자가 내 편 들어준 게 그때가 처음입니더.’ 동수의 아들 성훈(김우빈)이 준석(유오성)에게 고백할 때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독한 격랑의 생채기만 쌓아온 사람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 내 편을 얻었다는 안도감만으로도 천국을 만난 기분이 된다. 사람은 많아도 내 편은 드물다는 것을 경험해왔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후회할 선택만 하고 사는 게, 그게 건달이라고 준석은 읊조린다. 어찌 건달만 그렇겠는가? 삶 자체가 후회라는 선택의 연속이다. 후회 없는 삶이란 후회하지 않기로 한 그 마음에서 오는 것이지, 삶 자체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다. 그때 그 시간에 열심히 할 걸, 그 때 그 말을 하지 말 걸 등등 후회로 점철된 시간이 우리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건달이 쪽팔리면 되겠나,고 준석은 말한다. 건달만 그러할까. 누구나 쪽팔리면 얼굴 들기 힘들다. 건달에게는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솔직한 멋이라도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럴 용기조차 없기 때문에 더욱 쪽팔림을 감수해야 한다. 저 대사를 뒤집으면 보통 사람들은 쪽팔림을 쉽게 팔면서 산다는 말과 같다.

 

 

모든 걸 잃은 뒤, 어디로 가겠냐는 부하의 말에 준석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한 마디를 던진다. ‘나를 불러주는 데가 있더나?’ 늙으면 아픈 재미로 산다는 페이소스 강한 준석의 말에 빗대자면, 변방으로 밀리면 외로운 재미로 산다. 그게 삶이다. 한때는 치열하게, 더러는 울컥하며, 끝내 외롭게 스러져 가는 것, 삶의 허무를 영화는 조폭이란 그림을 빌려와 극적으로 보여준다.

 

 

 

 

 

 

 

 

 

 

 

 

 

 

 

 

 

2.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과 남쪽의 소도시 통영은 다소 생뚱맞은 조합이다. 하지만 백석의 연애사가 통영과 관련 있기에 사람들은 백석과 통영을 함께 떠올린다.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사랑’ 덕에 우리는 통영에서의 백석 행장을 상상으로나마 그려 볼 수 있다.

 

 

통영 ‘천희’ 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처녀’를 천희라고도 불렀나 보다. 동료 기자의 소개로 백석은 통영 출신 이화여고 학생 ‘란(蘭)’(박경련)을 만난다. 시인이 24살 때였다. 란의 부모에게 청혼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란과 결혼한 사람은 바로 백석과 란을 연결해준 그 친구였다. 시인은 큰 상처를 얻었지만 그 덕에 우리는 바람결 같은 그의 통영 관련 연시를 낭송할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이란 시에서 란에 대한 애틋함과 자신을 배신한 친구에 대한 서운함을 언급한다.「흰 바람벽이 있어」에서는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나지막한 집에서 지아비와 어린 것 옆에 끼고 대굿국으로 저녁을 먹는다고 노래한다. 통영에 와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단 한사람을 생각하면서 시인은 외로이 대구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통영」이란 제목의 시 두 편을 연결하면 백석의 ‘란’에 대한 그리움의 모자이크가 완성된다.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리는 날,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 도시에서 미역오리 같이 마르고 굴 껍데기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한 처녀를 객줏집 마루방에서 만난다. 처녀는 ‘명정골 정당샘’ 근처에 산다고 들었다. 물 긷는 여인네들 가운데 혹시 ‘란’을 만날까 백석은 충렬사 돌계단에 앉아 바닷사공이 된 심정으로 길 건너 정당샘을 내려다본다. 그렇게 만나지 못한 사랑은 시가 되었다. 백석의 로맨스를 알고 통영에 가는 이라면 명정골 정당샘과 충렬사 계단을 무시로 지나치지 못한다. 먼 타향 사람 백석마저 붙잡아 놓는 힘 이것이 통영, 아니 사랑이 위대한 이유이다.

 

 

 

3. 언어는 사람을 규정한다

 

뜨는 드라마 중에 ‘응답하라 1994’가 있다. 시대상에 맞지 않는 일일드라마나 재벌과 신데렐라 이야기를 다루는 미니시리즈와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내용이라서 꼭 챙겨본다. 거기서도 우리식의 위계질서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씁쓸하면서도 공감을 하게 된다. 같은 나이인줄 알았던 대학 동기가 두 살이나 어리다는 걸 알게 되자 등장인물은 다짜고짜 누나 행세를 한다. ‘나이도 어린 게 누나 앞에서 까불고 있다’는 사회가 가르쳐준 고정관념을 내세워 우위를 점하고자한다. 상대남의 멱살을 잡고 수직 관계를 인정하라고 윽박지른다.

 

 

언어는 형식을 낳고, 형식은 내용을 규정한다. 소통 부재를 경험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모순된 언어 형식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말의 형식은 세밀한 등급까지도 규정한다. ‘하겠습니다, 할게요, 할게, 해줄게’ 등이 뜻하는 바와 같이 말꼬리 형식에 따라 타자와 나의 계급은 분명하게 규정된다.

 

 

대학입학 후에도 자기소개를 할 때 몇 학번인지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밝힌다. 새내기인지 재학생인지 단순히 궁금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내가 어떤 계급 구조를 형성할 것인지를 규정하는 탐색자료로서 그 학번놀이가 필요한 것이다. 따르고 거둔다는 명목으로 선후배의 선을 가르지만 실은 위계질서에 자연스레 편입하게 되는 것이다. 학교 사회에서부터 굳어진 이런 불문율은 사회에 나와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행여나 이런 질서에 저항이라도 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말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너 몇 년 생이야? 민증 까 봐.’, ‘새파란 것이, 니 에비랑 내가 친구다.’ 등등의 익숙한 언어폭력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숫자놀음으로 예시되는 이런 위계 체제가 진솔한 소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이지만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렇게 구축되어온 세계관이 불편할지언정 질서유지에는 더할 나위 없었기 때문이다. 소통 불편보다는 질서 유지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언어형식의 노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4. 수전 손택의 젊은 날

 

거의 매일 일기를 쓴 적이 있었다. 너무 어려(젊어) 격정이 삶의 전부를 차지하던 시절이었다. 칼날로 스스로를 베거나, 세상을 향한 분노나 원망이 주된 내용이었다. 청춘이 괴로워 그저 기록함으로써 심리적 해방을 맛보던 시절이었다. 돌아서 들쳐보는 일기장은 회한과 수치심으로 가득 찼다. 누가 볼까 부끄럽고, 스스로도 다시 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일기장은 모두 불쏘시개 신세를 면치 못했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을 일기로 읽는다. 일군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고 태울 때 누군가는 내밀한 일기장을 남겨 잊고 지냈던 과거나 사유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줄 필요가 있다. 손택의『다시 태어나다』는 총 3권으로 기획된 그녀의 일기 중 첫 번째 책인데, 사춘기 시절부터 청춘 부분을 다루고 있다.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사랑, 결혼 생활의 갈등과 환멸, 사물과 대상에 대한 거침없는 눈썰미 등의 보고서로 읽힌다.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는 그녀의 공적인 책들과 비교해 격정과 수치와 회한의 옷섶을 풀어놓은 그녀의 일기를 보면서 사람살이는 참으로 비슷하구나, 하는 위안을 받는다.

 

 

동성애자였던 그녀는 자신이 사랑한 두 여자에게서 느낀 자신만의 수치심과 모욕과 고통과 자괴를 지나치리만큼 진솔하고 가혹하게 고백한다. 개인적 정념을 넘어 그녀가 보통 사람과 달랐던 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자기 확신과 끊임없는 열정이었다. 육체적 욕망을 넘어 그녀에게는 지적 갈망이라는 거대 우물이 있었다. 스스로 판 그 우물에 문학과 음악과 영화와 비평이라는 샘물이 흐르도록 부단히도 노력했다. 그 모든 열망은 오로지 작가로 거듭나겠다는 꿈 하나로 연결되었다.

 

 

손택 자신의 청춘 보고서는 사적인 일기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번지고 무너지는 자아를 다잡아 어떻게 창의적으로 확대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준다. 누가 뭐래도 욕망은 다양하고 자아는 개별적이다. 육체적 욕망과 지적 욕구를 스스럼없이 발산해 나간 그녀의 젊은 내면이 그녀가 남긴 인문학적 저술의 예술혼이었음을 알겠다.

 

 

 

 

 

 

 

 

 

 

 

 

 

 

 

 

5.눈 맞추기

 

마음이 아픈 아이들은 잘 웃지 않을뿐더러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아이들이 눈 맞추기를 두려워한 것은 아니었다. 닿고 싶은 별과 오르고 싶은 나무와 맞대고 싶은 바람에 대해 그 아이들도 누군가와 눈 맞추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른들의 시선은 대체로 태생적으로 웃음이 많거나 담백한 명랑함을 지닌 아이들에게 먼저 가닿았다. 마음 깊이 앓아보지 않은 그들 그룹은 실은 누군가 애써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는 나무가 될 터였다.

 

 

잘 웃지 않는 아이들은 ‘평온한’ 그들이 부러웠다. 관심 받지 못한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상처가 되었다. 그럴수록 아이들의 눈빛에 고인 사연은 절절해졌다. 외면에 지친 아이들은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사랑 받지 못했고, 사랑 받지 못하며,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패감이 그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단순한 패배감이 아니라 고착에 가까운 자기포기처럼 보였다.

 

 

명랑한 아이들이 가벼운 랩 리듬처럼 슬리퍼를 끌며 지날 때 웃지 않는 아이들은 슬리퍼 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 곁을 지났다. 더욱이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왼쪽 목덜미의 사마귀마저 가리느라 한껏 움츠린 자세가 되는 것이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은 이 세계야말로 모순적인 질서에 의해 움직인다고 확신했다. 애초에 아이들에게 공정한 눈 맞추기를 할애하지 않은 어른들의 잘못이었다.

 

 

그 맘을 열어주는 데는 끊임없는 눈 맞추기 말고 아무 것도 없었다. 여백조차 없는, 마음의 얼음성을 쌓는 아이들과 눈길 맞추기란 쉽지 않았다. 눈치만 웃자란 그 아이들에게 가식과 형식은 금물이었다. 그들 마음에도 빨주노초파남보 풍선은 부풀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맘속의 풍선이 맘껏 날 수 있도록 누군가의 눈 맞추기는 계속될 것이다. 눈 맞추기는 상처를 아는 자가 상처 입는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위로일 터였다. 누군가의 상처를 안다고 말하기 전, 가만 다가가 그 아이와 눈을 맞추는 당신이라면 당신도 상처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6.착한 사람 콤플렉스

 

한 친구가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칭찬이 자신더러 ‘착하다’고 하는 것이라고. 학창 시절 과 야유회를 갈 때 그 친구는 이십인 분의 김밥을 자취방에서 홀로 쌌는가 하면, 오갈 데 없는 친구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었다. 쌀독은 자주 비었고, 좁은 방엔 친구들이 흘리고 간 머리카락들이 뒹굴곤 했다. 잦은 방문에도 쌀 한 줌 밑반찬 하나 챙겨오는 이 없었고, 머리카락 뭉치 한 번 치워주는 이 없었다.

 

 

자신이 좋아서 베푼 호의였지만 사람이기에 갈수록 서운한 맘이 들었다. 어느 날 그런 고민을 다른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 친구의 충고는 이랬다. “걔들, 친구 아니야. 당장 끊어. 니가 베푸는 친절이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면 그건 좋은 게 아니야.” 그 이후로도 친구는 소위 ‘빈대붙는’ 그 부류들을 완전히 끊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친구가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어찌 친구일 수 있겠는가. 친구사이일수록 예의와 양심에서 멀어져서는 곤란하다.

태생적 성정이 착한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착하다. 하지만 누가 자신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착하다는 말 속에는 ‘너는 착하니 어지간히 만만하게 대해도 괜찮지?’라는 숨은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를 원한다. 내가 원하는 나가 아니라 남이 원하는 나를 적절하게 연기하며 살아간다. 저마다 페르소나라는 예의의 가면을 쓰고 행동한다. 천성이 착한 사람은 자신이 그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착한 사람은 진짜 나와 가짜 나의 경계가 덜하다. 하지만 대중에게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그 진짜와 나 사이의 싸움으로 내면의 기를 탕진한다. 착한 사람은 상처 받기 쉽고 착하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에너지 낭비에 휘둘린다. 둘 다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이다. 하지만 ‘세상이 원하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7. 시청률의 노예

 

한 방송작가를 두고 일부 시청자들이 퇴출 운동을 벌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 공주’ 의 임성한 작가가 50회 분의 연장 방송을 요구한 것이 발단이란다. 시청률이 좋다는 것을 볼모로 작가는 방송사를 상대로 슈퍼 갑 행세를 하고, 방송사는 광고 완판을 보장해주는 작가의 눈치만 본다.

 

 

문제는 개막장 드라마를 쓰더라도 시청률만 높으면 그만이라는 방송가의 생각들이다. 시청률에 집착한 작가는 작가정신이나 작품성은 물론 시청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도 생각지 않는다. 관심 끌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에피소드라도 적극 활용한다. 주요 등장인물들을 느닷없이 중도하차 시키는가 하면, 개연성 없는 죽음으로 이끌어 시청자들을 황당하게 만든다. 기이한 장면들과 대사들도 빈번하게 동원한다. 유체 이탈에다 귀신 출몰은 예사이고, 기괴한 시집살이 장면은 애교를 넘어 실소를 부른다. 이해할 수 없는 총체적 현상들이 드라마를 지배한다. 그래도 시청률은 높다. 아니, 그래서 시청률이 높다.

 

 

대중의 심리는 묘하다. 정돈된 드라마보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에 정신줄을 놓게 된다. 작가와 방송사는 그것을 십분 활용하고 시청자는 불편한 내용인 걸 알면서도 단순한 호기심에 같이 놀아난다.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 시청률 높은 작가는 광고 완판을 부르고, 콧대 높아진 작가는 집필부터 캐스팅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큰 수익을 가져다주는 작가 앞에서 방송사는 윤리고 양심이고 따질 겨를이 없다.

 

 

품위를 버린 그들이 쌍으로 돈의 노예가 될 때 시청자가 나서면 되겠지만 그 또한 쉽지 않다. 막장 드라마 따위는 안 보면 그만이라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이’라는 변명만큼 시청자의 심리를 대변하는 말도 없다. 비상식적이고 말 안 되는 일은 도처에서 일어난다. 욕하고 분노하면서도 거기에 동조하는 게 일반대중의 역할이다. 시청률을 무기로 슈퍼갑이 된 작가는 대중을 우롱하고, 방송사는 직무유기로써 그 책임을 회피한다. 대중은 욕하면서 그 시청률을 높여준다. 이것이 삶의 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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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2-05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에서도 선 후배 위계질서가 있지만 선후배끼리도 친구가 되자고 합의하면 서로 말을 편하게 하던데 우리나라는 그런 점에서 과도하게 융통성이 없죠.서열을 나타내는 호칭은 많은데 소위 평등호칭은 없어요.그래서 호칭 가지고 머리끄댕이와 주먹다짐이 많죠.

다크아이즈 2013-12-05 19:21   좋아요 0 | URL
생각 외로 호칭, 나이, 선후배 등등 위계질서가 가져다 주는 폐단이 많사옵니다.
가만 둘러 보면 모든 문제의 근원은 거기에 있어요. 이걸 가장 역겨워 하는 그룹이 김상봉 교수 측들 - 도덕교육의 파시즘, 이 책은 읽을 때마다 공감 또 공감해요.

오늘 국회도 보니 가관이던데요. 재선 주제에 삼선 보고 대드냐고 난리고, 니 나이 몇 인데 깝치냐고 따지고... 에휴~

곰곰생각하는발 2013-12-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팜므 님이 게을러터져서 그렇지 이런 모음 형식은 최고입니다. 잠을 좀 줄여가면서 일주일에 한 편이라도 페이퍼를 좀 올려주십시요. 모두 다 호강하게 말입니다. 흠흠..


아동치료 하니... 옛날에 읽은 딥스'라는 책 생각나네요. 누나가 아마 학과 공부 땜에 산 책이었는데 고거 되게 잼있더라고요...

다크아이즈 2013-12-05 19:23   좋아요 0 | URL
푸핫핫~~!!!
맞아요, 게을러 터져서 - 저 좀 어찌 안 될까요? 안 게을러 터지고 싶사와요.
잠을 팔아 체력을 보충하려니 이런 사단이 ㅠ
그러보 보니 곰발님이 더 위대하게 보이옵니다^^* 크~

딥스는 초등 고학년 필독서라 논술 수업할 때 활용하지요. 정작 애들 읽기엔 두껍고 중복되어 별로 안 좋아해요. 어른이 읽고 반성하기 좋은 책이지요.

양철나무꾼 2013-12-05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닿고 싶은 별과 오르고 싶은 나무와 맞대고 싶은 바람에 대해 그 아이들도 누군가와 눈 맞추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른들의 시선은 대체로 태생적으로 웃음이 많거나 담백한 명랑함을 지닌 아이들에게 먼저 가닿았다. 마음 깊이 앓아보지 않은 그들 그룹은 실은 누군가 애써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는 나무가 될 터였다.

너무 이쁜 문장인데, 너무 아픈 문장이기도 하네요.
잘 지내시죠?

다크아이즈 2013-12-05 19:20   좋아요 0 | URL
아, 양철님 제 맘을 알아주시는 것 같아 눈물 나려 해요. 저 문장 - 현장에서 얻은 저만의 경험이에요. 어른이고 애들이고 상처가 바탕이 된 이들은 눈 맞추기를 잘 못해요. 눈 맞춰 주지 않아도 잘 크고 잘 사는 아이 어른들은 굳이 눈 맞출 필요 없어도 되는데 눈을 잘 맞추고, 정작 눈 맞춰야 할 아이 어른들은 일단 피하고 봐요. 어릴 때부터 한두 개씩 경험한 상처가 누적되어 '저이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야. 나 보다 매혹적인 동료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거야.' 이런 단정으로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지요. 그건 분위기와 눈빛으로 감지해요.

어린아이든, 중고생이든, 어른이든 눈 피하는 사람은 거의 상대(학교 선생이든, 자기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든)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전 의식적으로 그들에게 눈길을 더 줘요. 하찮은 걸로 상처 받을 필요가 없으니까요. 그들이 눈길을 피하는 이유는 아주 단순한 것들에서 시작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뚱뚱하니까 싫어할거야. 이쁜 사람들만 사람들이 좋아할거야. 내 손가락이 굽은 걸 상대는 싫어할 거야.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눈 마주치기를 거부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건 그들 잘못이 아니에요. 이미 숱하게 자잘한 경험치가 쌓여 그들 마음 문을 닫게 한 거거든요. 나는 니 편이다, 하고 진심으로 다가가기의 과정이 뭔가를 가르친다는 것 자체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성인이나 애들에게나 그 느낌은 꼭 같아요. 사람이 상처이면서 사람이 곧 위안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양철님도 여전하시지요? 바쁜 중에 독서 게을리 하지 않는...
오늘 밤도 평안하시길^^*

세실 2013-12-05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는 특히 온전한 내편이 드물어요. 다들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일 잘하는 사람보다 로비스트가 승승장구해요.ㅠ
통영 가고 싶어라. 참 아기자기하면서 아름다운 곳이죠
내년도 다이어리에 십이월부터 일기 쓰고 있어요^^

다크아이즈 2013-12-06 16:57   좋아요 0 | URL
저야 직장 생활을 안 해봐서 깊은 내막은 모르지만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요. 뭐.
피 섞인 관계 말고는 완전히 믿으면 안 된다, 이런 신조가 직장 생활, 사회 생활에 적용되나 봐요. ㅋ
강좌생으로 만난 초중고생, 어른들 중에 유독 눈 맞추기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의 상처를 알 것 같아 더 맘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해요. 편애의 영역에서 늘 벗어나 있었던 그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어요. 뚱뚱하다고 선생님이 자신을 구박했다는 초등생의 고백이 짠하더라구요. 그 이후 그 어떤 선생님도 믿지 않게 되었대요. 외모로 판단하지 않기, 그걸 실천하려고 해요. ^^*

노이에자이트 2013-12-06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른들도 청소년에게 존대말하자고 권고해요.팜므 느와르 님도 동참해주세용~

다크아이즈 2013-12-06 17:01   좋아요 0 | URL
노이님 당연하지요. 독서지도사 과정 수업 중에 누군가 물었어요. 초등생을 상대로 수업할 때 말 놓으면 되지요, 하고... 저 깜짝 놀라서 그건 아니라고 답해줬어요. 정답인지는 모르지만 초등학생들 앞이라고 말 놓으면서 수업한다는 발상 자체가 저는 무척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학생들 앞에서 존대어로 상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분위기가 훨씬 좋아요. 아이들도 존중 받는다 생각할 것이구요.^^*

2013-12-06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