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단상기>

 

 

 

 

 

 

 

 

 

 

 

 

 

 

 

 

 

 

 

1. 유럽에서의 공중화장실 - 사진은 창밖으로 본 베네치아

 

 

  2주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귀갓길 택시 안, 짐 꾸러미만으로도 먼 길 떠났다 온 것을 알아 본 기사분이 갑자기 흥분하신다. 외국여행은 할 게 못 된단다. 특히 유럽 여행이 그런데, 화장실 갈 때도 돈 내고, 호텔 나올 때도 팁 줘야 하고, 물마저 사먹어야 한다더라며 결론은 우리나라만큼 살기 좋은 데가 없단다.

 

 

  ‘우리나라 좋을 씨고’, ‘내 집이 최고지’에 대한 답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가끔 길 떠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유럽의 화장실 문화나 팁 예절, 공짜가 아닌 음용수에 대해 딱히 불만이 있는 쪽은 아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지 않는가. 다만 공중 화장실에 대한 의문은 가시질 않는다. 유료인 것은 그렇다 치고 그런 화장실조차 드물다는 게 문제이다. 우리식 화장실 문화에 길들여진 여행객으로서는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매장에 딸린 화장실 입구에는 칸막이 봉까지 설치해 놓았다. 무표정한 검표원이 동전 투입구 앞에 서서 물건 살 때 화장실 사용료만큼 할인해주는 쿠폰을 발행해 준다. 인건비도 안 나올 것 같은데 왜 저런 시스템을 고집할까 싶다. 그들 조상들의 위대한 축조물 앞에서 연신 감탄하다가도 미로 속 같은 무료 화장실을 찾아 헤맬 때나, 푼돈을 낚아채 가는 유료 화장실을 보면서, 그들 문화 스케일의 양극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더럽힌 자, 품위 있게 그 비용을 지불할 지어다. 그런 마인드라면 화장실 개수도 늘이고 그 품격이라도 높여야 하지 않는가. 화장실 관리 명목, 노숙자 접근 금지라는 이유 등으로 유료 화장실을 고집한다지만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화장실이 그리 깨끗한 것도 아닌데다, 공중화장실마저 노숙자를 거부한다면 그들은 어디서 볼일을 보나? 이참에 선진화된 우리 화장실 문화를 유럽에다 전수하면 어떨까. 아니면 우리도 관광대국이 되어 느긋하게 화장실 앞에서 돈 내놔라고, 무표정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게 나을까. 아서라, 생각만 해도 멋쩍고 볼썽사납구나.

 

 

 

 

 

  

  2. 제라늄이 있는 창

 

  들여다보지 못하고 바라만 보는 여행은 반쪽짜리 여행에 지나지 않는다. 잠깐이라도 그들 삶 안에서 부대껴봐야 여행의 참맛을 알 수 있다. 바람결에 제 흰 뒤태를 맘껏 까불던 은사시나뭇잎의 당당함, 그 아래 푸르거나 흙빛으로 휘돌던 냇물의 도저함, 늦봄의 아쉬움을 달래며 만개하던 아카시아의 친근함, 그 뒤에 묻어나는 삶의 실체를 호흡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드넓기만 한 평원은 고요를 지나 적막하기만 했고, 문 닫힌 대문 안 울타리는 상상으로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자연에서 경험하지 못한 간접 체험은 사람을 대하면서 조금 할 수 있었다. 곤돌라 내부가 더러워질까 예민해지던 뱃사공의 시선, 타성에 젖은 노랫가락으로 제 피곤을 연주하던 악사들의 낯빛, 휴지 하나 버리자는 데도 손사래 치던 점원의 이맛살. 작은 관찰만으로도 산다는 게 얼마나 힘겹고 피로한 것인지 알 것 같다.

 

 

  그들 목가적 원경의 평화와 위대한 축조물의 위용 앞에서 우리는 무던히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그 평화와 위용은 껍데기일 수도 있다. 견문의 대상을 그들 삶의 현장으로 치환한다면 어떨 것인가. 원경의 평화도 삶 안에서는 곤고함이 도드라질 것이고, 건축물의 위대함도 노동 현장이 되면 신산함으로 다가올 것이다. 원래 멀리서 보면 청맹과니 평화요, 가까이서 보면 천리안 전쟁터 같은 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니.

 

 

  그 신산하고 지리멸렬한 것들로부터 치유하기 위해 사람들은 작은 여유를 찾는다. 창가의 제라늄 화분이 그 좋은 예가 될까. 유럽의 창밖 베란다마다 붉은 제라늄이 지천이다. 춥지 않은 날씨 덕에 오래 꽃을 볼 수 있는데다, 잎에서 나오는 특유의 향은 해충 퇴치에도 도움이 된단다. 관상용 꽃으로는 그만이다. 제라늄의 잔영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건 거창한 게 아니라 소박한 데서 여유를 찾고자 하는 인간 심성의 공통점 때문이리라. 굳은 결의 또는 그대가 있어 행복이네 등의 꽃말을 지닌 제라늄이 핀 창가는 한동안 내 안에서 쉬 떠나지 못할 것이다.

 

 

 

 

3. 우산소나무와 사이프러스 - 타자를 안다는 것

 

  공자의 수많은 제자 중에 ‘번지’라는, 내가 보기에 무척 예쁜(?) 이름을 가진 이가 있었다. 우스갯소리를 붙이자면 그의 자는 자지(子遲)란다. 공자의 수레를 몰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학식이 높았던 이는 아니었으리라. 총명하고 똑똑한 제자는 아니어서 엉뚱한 질문, 예컨대 채소 가꾸는 법 따위를 물어 주변으로부터 비난을 듣곤 했다. 영민함과 재치와는 거리가 멀었겠지만 순박함과 성실함으로 공자를 보필한 제자였을 것이다.

 

 

  그의 관심 분야는 앎(知)과 어짊(仁)에 관한 것이었다. 번지가 그것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대답했다. ‘어짊이란 애인(愛人)이고, 앎이란 지인(知人)이다.’라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안연에게는 예를 회복하는 것이요, 중궁에게는 남에게 원치 않은 일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며, 사마우에게는 말을 조심하는 것이라 답할 만큼 그때그때 달랐다. 하지만 가만 보면 공자의 여러 답변은 결국 한 가지였다. 다름 아닌 ‘타자에 대한 이해’이다.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흔히 만나는 두 나무가 사이프러스와 우산소나무이다. 전자는 밑이 넓다가 위로 솟구칠수록 뾰족한 긴 삼각형 모양이고, 후자는 나무둥치가 뻗어가다 윗부분 잎맥에 이를수록 핵 분열하는 것처럼 둥글게 퍼지는 형태이다. 각각은 직선과 곡선, 첨탑과 돔, 뾰족함과 둥글함, 자제와 허용 등의 이미지를 풍긴다. 한데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두 나무가 연출하는 거리의 풍광이야말로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 나아가 그 다른 사람마저 밑둥치와 잎맥이 지닌 성질은 다를 수 있다. 다변적인 인간의 성정을 공자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제자마다 다른 답변을 줄 수 있었다. 사람 따라 달랐던 공자의 답에는 다음과 같은 숨은 가르침이 있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인간 보편성에 대한 균질하고도 다양한 이해로부터 출발한다는 것.

 

 

 

 

4. 함께라는 말  - 사진은 브뤼셀 그랑 광장의 커플

 

  잘잘한 해프닝이야말로 여행의 또 다른 묘미이다. 단체여행에서의 수위 높지 않은 실수담은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여행의 잔재미를 선사해준다. 겪는 당사자로서는 아찔하고 당황할 수도 있지만 지나고 나면 그마저 좋은 추억담이 되어준다.

 

 

  일찍 잠에서 깼다. 말로만 듣던 파리 시내 관광, 그 중 에펠탑과 센느강을 볼 수 있다는 설렘에 마음은 절로 달떴다. 외곽의 숙소를 떠나 버스는 시내로 달렸다. 한참 가고 있는데 전화를 받는 가이드의 얼굴빛이 심상찮다. 두 명의 일행을 숙소에 둔 채 신나게 달려왔던 것이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설마 자신들을 두고 떠났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직 초기 여정이라 여행객들끼리 통성명조차 없어서 서로를 챙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인원 체크는 당연히 가이드 몫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뿔싸, 두고 온 멤버는 전날 밤 내게 자신들의 곁잠자리를 내어준 그분들이란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가이드보다 내가 더 미안해졌다. 주변을 돌아볼 생각 없이 나만의 여행에만 몰두해있던 스스로에게 실망감이 일었다. 버스는 이미 삼십 분 이상을 달려왔다. 운전대를 되돌릴 상황이 아니었다. 할 수없이 그들은 택시를 타고 뒤따라 와야만 했다. 에펠탑 광장에서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다. 잠시의 이별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괜히 민망해졌다. 섬세한 마음자리까지 이르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기만 했다. 둘이였다 해도 낯선 이국의 택시 안에서 그들은 얼마나 불안에 떨며 노심초사했을 것인가. 함께 하는 여행은 서로 챙기고 다시없을 위안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임을 깨치게 해주는 해프닝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들이었어?’ 라고 안전지대에 당도했음의 여유를 귀여운 눈 흘김으로 대신하던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랬다. 누가 파리까지 와서 택시 일주까지 하는 호사를 누리겠어요? 어느 누구도 쉬 경험하지 못할 파리의 추억을 그대들은 간직한 걸요.

 

 

 

 

 

5.젊은 어깨동무 - 사진은 베드로 성당 근처 피로 푸는 커플 : 이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오, 삶이여. 삶 그것은 바깥에 있다는 것 / 활활 타는 불꽃 속의 나 / 나를 아는 자 아무도 없다’ 임종 때 남겼다는 릴케의 이 시구는 여행의 목적에도 맞춤하다. 왜 사람들은 저마다 떠나기를 꿈꾸는 것일까. 왜 누군가는 기어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마는 것일까. 삶이란 내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바깥 어딘가로 향하는 속성을 지닌다. 그 밖을 넘보는 욕망,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활활 타는 불꽃, 그 정념의 뿌리를 찾아 우리는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청춘인 여행객 셋. 둘은 쌍둥이 자매였고, 하나는 우연히 포항에서 같이 출발한 아가씨였다. 셋 다 직장 생활을 하는 커리어우먼이었는데 휴가를 내고 여행에 동참한 경우였다. 사회생활에서 터득한 지혜 덕이었을까. 어려보이는 외모와 달리 하나같이 성숙하고 사려 깊은 삼인방이었다. 흔히 기성세대들이 우려하는 젊은이 특유의 철없음도 없었고, 혼자만 잘났다는 이기심과 무관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엄마 미소가 절로 나온다.

 

 

  카드를 분실했다고 울먹거리다가도 위로의 말에 해맑게 웃던 모습, 약속 장소를 넘겨짚는 바람에 한참 숨바꼭질을 했을 때, 기다리던 우리는 그마저 소소한 재미로 생각했는데 어쩔 줄 몰라 하며 진심으로 미안해하던 모습, 귀찮을 법한데도 티내지 않고 환한 미소로 사진기 셔터를 눌러주던 밝은 심성 등 그들이 뿜은 매혹적인 아우라 덕에 여행은 한층 즐거웠다. 두고 온 걱정거리가 많은 주부들에게는 2주의 여행 기간이 적당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홀가분한 그들로선 못내 아쉽기만 하다고 했다.

 

 

  바깥의 삶을 내 안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데는 젊음, 그것도 어깨동무한 젊음보다 나은 게 없다. 여행이란 꿈꿀수록 이루기 쉽고, 덜 심사숙고할수록 기회가 온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한시라도 젊었을 때 경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자. 내 안에 머문 나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이 되도록.

 

 

 

 

 6. 시청박(視聽搏)의 여행 - 사진은 암스테르담 담 광장

 

  몇 박 며칠, 어디를 갔다 왔어? 해외여행자에게 행하는 가장 의례적인 질문 중 하나이다. 그러면 대개 여행자는 이렇게 답한다. 13박으로 영국을 비롯한 9개국을 갔다 왔어, 라고. 꼬박 이틀은 비행기에서 보내고, 하루에 한 도시 겨우 점찍듯 돌아봤으면서도 여행자는 짐짓 자족에 찬 표정까지 지어보이는 것이다. 어차피 묻는 이나 답하는 이 모두 그 편이 가장 부담 없고 안전한 화젯거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고 답하기엔 여행사의 기획품인 패키지여행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것만 같다.

 

 

  <도덕경> 14장에 ‘시지불견(視之不見) 청지불문(廳之不聞) 박지부득(搏之不得)’이란 말이 나온다. 도(道)를 설명하는 명문이지만 ‘제대로 듣고 보고 겪는 것의 어려움’을 비유할 때 쓰이는 어구이기도 하다. 보아도 제대로 못 보는 것, 들어도 제대로 못 듣는 것, 겪어도 제대로 겪지 못하는 것은 도뿐만 아니라 여행에도 적용된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곳을 휘돌았을 때 그것은 ‘시청박’에 머문 것이지 ‘견문득’에 이른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비행기 타고 차타고, 창밖 풍광을 보다가 내려, 일견 비슷해 보이는 건축물과 거리를 눈에 담기 무섭게 빛의 속도로 사진 찍고 밥 먹고, 다음 장소로 옮겨 가는 것 이것이 여행의 일반적 과정이었다. 여행에서 가장 필요할지도 모를 자발적 의사와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았기에 뭔가를 깊이 새긴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패키지여행의 한계였다.

 

 

  하지만 합리적인(?) 비용만큼 합당한 결과를 얻는 것이니 그리 나쁠 것도 없다. 이국의 문 닫힌 여염집안의 티타임,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평원에서의 농사꾼의 망중한, 마을을 흐르던 푸르거나 흙빛 시냇물의 감촉 등을 전혀 맛보지 못했다. 위대한 건조물의 껍데기를 배경으로 열심히 인증샷을 눌렀을 뿐 그들 삶 자체를 들여다 볼 기회는 좀처럼 없었다. 하물며 그토록 날 좋은 이국의 밤하늘에 뜬 별 한 번 쳐다볼 여유마저 갖지 못했다.

 

 

  대충 듣고 겪는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고 듣고 겪지 않은 것과 같다. 주마간산식 여행은 견문득과는 한참 멀다. 하지만 시청박에 머문 여행 또한 여행이 아닌 것은 아니니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 위안을 삼아야겠다. 그렇다고 아주 소득이 없는 건 아니다. 국경을 넘는 기차 안에서 바라본 바람결에 제 뒤태를 까불던 은사시나뭇잎들의 반짝임, 그 밑을 흐르는 푸르거나 흙빛 냇물의 도저함, 늦봄의 아쉬움을 달래던 아카시아 물결의 친근함, 가없는 의연함의 향연인 푸른 지평선, 강언덕을 낀 목가적 풍경의 마을들, 그 안에서 묻어나올 신산한 삶의 냄새들을 상상하는 일, 잠시 몽상가의 센티멘털에 빠졌다가도 두고 온 식구들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일, 야윈 얼굴에 쾡한 눈동자를 한 지친 여행객이 되어 보는 일 등 조화와 부조화를 오가던 크고 작은 행보들은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감흥이었다.

 

 

  도덕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로, 듣자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로,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미(微)로 정의하고 있다. 이희미夷希微)는 도가 그러하듯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분명한 실체가 아니다. 실체 없고 닿을 수 없는 한 지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바람을 맞기 위해 길 떠나보는 일, 견문득을 거쳐 이희미를 이해하는 과정 그것이 여행을 하는 궁극의 이유가 아닌지 모르겠다. 실체 없는 도에 이르듯 자아 없는 자아에 이르는 끝없는 과정 그것을 여행이라 부르겠다.

 

 

 

 

 

 

 

 

 

 7. 힌트는 짐 - 사진은 브뤼셀 그랑 광장 비주얼 넘치는 커플

 

  이십 대 초반 동아리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한 적이 있다. 험한 산을 며칠에 걸쳐 종주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다. 합리적인 등반 채비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뜬 나머지 이것저것 꾸러미만 늘렸다. 이틀째였던가. 급경사인 등산로 앞에서 나를 비롯한 여학생 몇은 그만 울음보가 터졌다. 체력은 바닥인데 무거운 배낭마저 어깨를 짓누르니 설움이 북받쳤던 것이다. 하지만 강단 있는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눈썹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배웅 나왔다가 엉겁결에 뾰족 구두 차림으로 합류한 후배조차 의연한 모습이었다.

 

 

  너그러운 남학생들의 도움으로 겨우 종주를 마칠 수 있었지만 그 일은 내게 꽤 충격이었다. 주량도 모른 채 마신 한 잔 소주에 취해 다음날에야 깨어났던 사건처럼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괴와 민폐를 불렀던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정글의 법칙’ 같은 다큐에서 힘든 상황일수록 의연하게 대처하는 여성 출연자를 보면 마구 존경심이 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나 자신을 알자’는 말을 자주 새기게 되었다.

 

 

  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베테랑일수록 꾸러미가 간소하다는 여행전문가의 충고는 내 경우 옳았다. 그 옛날 지리산 종주에서 겪었던 낭패감을 떠올리며 (짐을) 줄이고 또 줄이라는 그 말을 무조건 신봉했다. 최대한 가벼운 짐을 꾸렸다. 얼마나 줄였는지 공간이 남아돌아 가방을 움직이면 덜컥이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그러면 가벼운 짐 싸기만 옳은가. 그럴 리가! 때에 따라 무거운 짐은 생명까지 구할 수 있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성가셔하면서도 근시와 돋보기용 두 개의 무거운 안경을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저격수는 대통령의 가슴팍을 겨냥했다. 하지만 총알이 주머니 속 강철 안경집에 굴절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짐이 무겁다고 느끼는 자는 덜고, 그 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라면 챙겨서 떠나면 된다. 인생은 어차피 전세 아니면 월세, 선택의 연속이니까.

 

 

 

 

8.문화의 방식 - 세느 강변의 청춘 :달리는 배 안이라 흔들렸지만 알리고 싶었지, 저 젊음

 

  누구나 제 눈으로 타자와 풍경을 읽는다. 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여행의 감흥이 다른 이유이다. 유럽 여행 중 가장 큰 정서적 충격은 센느 강변의 젊음들이었다. 유람선에서 바라본 강변 풍경은 인산인해이다. 평일 저녁인데도 둔덕이나 보도마다 몰려나온 청춘들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인구 밀집형 도시가 아닌 파리에서 이토록 많은 청소년들이 강변으로 쏟아져 나와 이야기꽃을 피우다니. 서머타임 기간이라 해가 늦게 져 시간이 많은 그들이라 해도, 우리식 문화에 길들여진 나에겐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일단 우리 청소년들은 평일 저녁, 강변에 떼로 몰려나올 수 있는 환경이 못 된다. 대학입시에 밤 시간을 저당 잡힌 지 오래다. 설사 자유가 주어져도 그들은 강변에서의 수다 삼매경은 택하지 않는다. 피시방이나 노래방 등 폐쇄적인 공간을 선호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집에서 러닝맨이나 개그콘서트 등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할 것이다. 통째의 젊음이 강변을 점령해 저들만의 소통으로 낭만을 즐기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최첨단 인터넷 환경이 아니라서 그럴까. 스마트폰만 죽어라 들여다보는 청소년들도 거의 없다.

 

 

  세대는 다르지만 문화적 관습은 대를 잇는다. 수다 문화, 고상하게 말해 토론 문화가 발달되다 보니 대를 이어 그게 당연히 학습된 걸까. 흔히 프랑스를 수학과 철학의 나라라고 한다. 대입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에서도 수학과 철학에 가산점을 줄 정도이다. 답 자체보다 답에 이르는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이다 보니 모여서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런 모양이다. 주입식 사고와 오지선다형 학습에 익숙한 우리의 청소년 상황이 떠올라 괜히 심란해지는 것이었다.

 

 

  고통 없고 방황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밤물결을 일렁이는 바람 앞에 제 청춘을 부려놓을 여유가 있는 것과 그 바람의 존재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는 청춘은 다르지 않을까. 문화적 관습으로만 그들의 낭만성을 치부하기엔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보너스 - 스페인에서 온 총각과 나 : 총각이 안 돌아본 건 컨셉이지

             절대 내가 못생겨서가 아님! (절규 버전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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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7-0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긴 글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읽었어요. 어느 부분엔 밑줄을 긋고 싶었답니다.
문장이 좋군요. 내용을 감상하다가 문장력을 감상하다가 그러면서 읽었어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 놓을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꽤 유익한 여행이었을 듯해요.

질문) 사람들의 사진을 찍을 때 그들의 허락을 받으셨나요?
그래야 될 것 같아서요. ^^

다크아이즈 2013-07-05 09:07   좋아요 0 | URL
길어 보여도 단상이라 금세 읽힐 거라 생각했어요.
밑줄은 페크 언냐 글에 그을 게 많지요. 언냐도 그걸 더 잘 아실 텐데 ㅋ

사진은 당근 허락 받지 않은 파파라치 짓이에요.
찍는다는 걸 알면서도 별 개의치 않았어요. 멀리서 한 짓이니.
글고 될 수 있음 뒷모습 찍었지요. 여행 컨셉이 유럽 연인의 뒷모습이었으니^^*

프레이야 2013-07-0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이 뚫어져라 한 자 한 자 마음을 느끼며 읽어내려갔어요.
끄덕끄덕 공감하고 동감하고 웃고 즐기며 ^^
근데 마지막 사진 코멘트에서 그만 빵~~~ ㅎㅎㅎ
스페인 청년이랑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간 게 어디에요?!!! ^~*
추억의 한 장 한 장, 두고두고 행복하실 듯해요.
패키지 여행의 한계는 있었겠지만 언니도 말씀하셨듯 뭐든 내가 지불한 만큼의 소득이
있는 법이니 그만큼도 좋지요^^

다크아이즈 2013-07-05 09:18   좋아요 0 | URL
공감할 게 한둘만 있어도 만족이요.
프레님이 갔다 오심 엄청 섬세하게 쓸 수 있을 거예요.
기대할게요.

스페인 총각 넘 수줍어하드라구요.
그게 더 귀여웠어요.
지불한만큼의 대가, 꼭 그 만큼의 여행이라고 생각해요.^^*

2013-07-04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05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7-04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 참 좋군요. 인문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앎이란 단어와 어짊'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형태가 비슷하네요....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앎 = 어짊'... 묘하게 닮았어요.
명강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맞습니다. 약장사나 사기꾼들이 마이크를 잡으면 목소리를 높이지요. 믿숩니까 ? 한마디로 대통령이 된 사람도 그렇고 말이죠..

다크아이즈 2013-07-05 09:21   좋아요 0 | URL
곰발님 많이 아는 것과 어짊은 거리가 멀지만
안다는 것과 어짊은 진짜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어짊을 향해 나아가는 게 진정한 아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안다는 건 한참 멀었고, 힘들다는 생각...

라로 2013-07-0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저도 유럽 갔을 때 화장실 좀 치사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다행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만 급한 상황이 있었어서 잘 넘어갔더랬어요,,,,그 옛날 일이 언니 글 읽고 다시 떠오르네요,,,ㅋㅋㅋㅋ

2.이 글을 보면 언니가 참 멋진 분이라는 것이 더 잘 느껴져요,,,왜인지 설명은 만나서,,,ㅋ

3.번지, 자지,,,아 웃겨~~~~~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공자의 인에 대한 가르침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는 언니의 표현도 좋아요,,,그 유연성 때문에 여전히 공자가 추앙 받는 것 아닐까요???

4.그런 일이 있으셨군요,,,단체 여행인데 그만하길 정말 다행이네요,,,언니가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될 듯 한데 언니는 참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천성이신 것 같아요~~~. 언니의 양반댁 규수 같은 몸가짐이 다시 떠올라요~~~~.^^

5."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한시라도 젊었을 때 경계로 상징되는 모든 것을 경험하자. 내 안에 머문 나를 밖에서 볼 수 있는 여행이 되도록." 이 글 참 멋지다고 생각했어요,,,특히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자!! 저에게 주시는 충고 같아요~~~.^^

6.이 글은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주역 게사 강의]와도 많이 겹치네요,,,언니는 아는 게 참 많으셔,,,가만 보면!!!

7.어제 본 영화가 [화이트 하우스 다운]이라는 영화였는데 거기서 대통령인 제임스 소이어는 아내가 취임식 때 선물로 준 링컨의 시계를 늘 안주머니에 넣고 다녀요,,그런데 악당이 쏜 총에 맞았는데 그 시계에 총알이 박혀서 살아나게 되는데 거기서 소이어는 이렇게 말해요,,"링컨이 나 대신 두번째로 총을 맞았다."고요. 어쩌면 이 영화 그 아이디어를 루즈벨트 대통령의 일화에서 가져왔나봐요~~~.

8. 마지막 사진 멋져요!!! 일부러 흔들리게 찍은 것 같아요~~~.ㅎㅎㅎㅎ
저는 한국이 참 좋지만 언니가 지적하신 문제가 제가 떠나는 이유 중 하나에요,,우리 아이들은 바람앞에서도 여유를 갖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요,,,

9. 스페인청년과는 컨셉이셨던 거에요!!!!ㅎㅎㅎㅎ 언니표 유머 귀여워요~~~~.ㅋ

언니의 격조있는 글은 어떤 주제이건 참 멋져요!!!!^^

다크아이즈 2013-07-05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아님 댓글달기 클릭이 안 되어요. 몇 번 시도해도ㅠ
아마 시아님의 정성 깃든 의견이 넘쳐서 갸들이 소화를 못하나 봐요. ㅋ
저 감동 먹었잖아요. 글 읽기는 쉬워도 이렇게 오래 시간을 투자해 용기를 주는 건 쉽지 않잖아요.
그나마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 쓰고 계시는 중일텐데...

화이트 하우스 다운 그 영화의 에피소드는 확실히 루즈벨트 일화를 차용한 듯. 아님 루즈벨트도 신화 만든다고 주변에서 그런 에피소드를 조작했을 수도 ㅋ

여행은 재면 못 떠나는 건 경험으로 알고 있어요.
계획을 덜 할수록 빨리 떠날 수 있는 게 여행이에요.
계획해서 좋은 건 이 세상에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냥 뭐든지 저질러서 얻으면 다행, 밑져야 본 전인 거죠, 뭐.
단, 배우자 고를 때는 계획은 아니더라도 무조건 저지르면 안 되지롱~~
뭔 개소리여~~ 휘리릭 시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