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심기

 

  ‘마음으로 느끼는 기분’을 심기(心氣)라고 한다. 상대의 심기를 너무 헤아려도 진상이요, 그 심기를 자극하거나 도발하면 밉상이다.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권력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제 입지를 높이려 욕망하는 자는 은근히 권력자의 심기를 자극하고 도발한다. 백성 입장에서는 둘 다 똑 같아 뵌다.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지난 달 박대통령이 영국 방문을 했을 때 런던의 모 극장에서 한국영화제 특별시사회가 있었단다. 애초의 영화제 개막작은 <설국열차>또는 <관상>이었다. 하지만 박대통령이 그 자리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숨바꼭질>로 바뀌었다나. 설국열차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를 빗댄 계급투쟁 이야기라서 안 되고, 관상은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 찬탈을 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안 된다는 식이다. 인사차 들러 예고편 2분을 보고 떠나는 VIP를 위한 배려치고는 너무 심한 자기검열이다.

 

 

  실제 대부분의 권력자는 나무라지 않고 핀잔하지도 않는다. 심기 불편할까봐 주변인들이 알아서 기는 게 문제다. 재외 국민에게 용기와 힘을 보태는, 의례적 행사 참석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대통령 입장에서는 그런 ‘지나친 헤아림’이 도리어 불편했을 수도 있다.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주변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화가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물론 반대로 죄 없는 가진 자에게 도발을 감행해 심기를 자극하는 주변인도 많다.

 

 

  세상일은 제 맘대로 되지 않는다. 남 뜻대로 될 때가 훨씬 많다. 객관적으로 나보다 남이 옳을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단, 가진 자나 권력자들이 그들 맘대로 할 의사가 전혀 없음에도 주변인들이 앞서서, 그들 말이 다 옳으니 그들 심기만을 살피겠다고 한다면 못 가진 자, 안 가진 자의 심기는 누가 보살피나? 언제나 타인은 옳을 수 있지만, 그것이 언제나 가진 자가 옳다는 뜻은 아니다. 심기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에게 있다. 도발해서도, 눈치 봐서도 안 되는 오묘한 심리가 인간의 ‘심기’ 안에 들어 있다는 걸 알겠다.

 

 

 

2. 과잉교정인간

 

  ‘과잉교정(overcorrection)’은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강제로 책임지게 하기 위해 특정 행동을 지나칠 정도로 반복하게 해 문제 행동을 수정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심리학 용어인데 문제 행동이 수정될 때까지 강제로 반복시키는 방법이란다. 잘못된 행동이 지나치게 일어날 때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이 말은 행동 주체나 교정 조력자 양측 다 ‘지나친’ 부분이 있을 때 쓰이는 것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음식을 흘릴 경우 단순히 흘린 음식을 치우는 것을 넘어 바닥 전체를 닦게 하거나, 물건을 집어던졌을 때 그것을 제대로 놓을 때까지 반복해서 제 자리에 정돈하게끔 하는 것도 과잉교정에 해당된다. 이것의 단점은 지나친 반복으로 반항심이나 적대감 등을 키울 수 있고, 강압적 훈련으로 인한 윤리적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흔히 ‘오버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잉교정 용어 자체의 뉘앙스에서 보듯이 뭐든 지나쳐서 좋을 건 없다.

 

 

  과잉교정이란 말에서 파생되어, 네티즌 사이에서 회자되는 용어가 ‘과잉교정인간’ 이다. 잘못된 언어사용을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사람을 일컬을 때 쓰이는데 표준어, 맞춤법, 띄어쓰기 등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이거나 이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한다. 잘못된 언어를 쓰는 게 좋을 리는 없지만 ‘과잉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콕콕 집어 교정하려는 태도도 그리 좋아 보이지 않음을 꼬집는 것이리라.

 

 

  말의 규범을 지키는 것은 말을 다루는 사람들의 기본자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조차 말의 노예가 되어 시시콜콜 그 잘못을 지적하려 든다면 피곤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을 가장 실감할 수 있는 영역이 언어 분야이다. 생활이 바뀌는 것만큼 언어는 빠르고 다양하게 변화한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언어의 사회성을 인정하는 융통성과 언어 규범을 지키려는 원칙,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것 자체가 ‘오버’인 게 우리 언어 활용의 현 주소인지도 모르겠다.

 

 

 

3.강박은 예술을 낳고

 

  프로이트가 진단에 의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여러 강박증을 지녔다. 해부도에 능한 다 빈치였건만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그릴 때, 남자 몸은 세밀하게 표현하지만 여자 몸은 단순화하거나 왜곡해서 그렸다. 다 빈치가 무엇인가에 억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프로이트는 분석했다. 다 빈치는 또한 어머니의 장례식 비용을 강박적이리만큼 세부적 회계 방식으로 기록했다. 얼핏 어머니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냉혈한 같아 보이지만, 괴로움을 표출하는 다 빈치의 다른 방식이라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조차 이성으로 포장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서자로 태어난 다 빈치는 계모에게 입양되는데, 생모와 함께 했던 기간 동안 모자 관계는 무척 돈독했다.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 빈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다른 여자와의 교제에 어려움이 있었을 거라고 프로이트는 추측한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불가해한 것도 이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잡을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며 모나리자 속에서 어머니의 미소를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나리자가 미완의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소유욕이 강한 어머니 밑에 자란 아들은 강박증을 가지기 쉽다. 그녀의 모든 것인 아들이 완벽하기를 어머니는 바란다.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아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빈치의 경우 그런 완벽에 대한 집착 때문에 그림을 왜곡하거나 미완으로 남긴 셈이다.

 

 

  프로이트의 눈에 비친 그는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다. 그의 의식은 모성과 분리되지 않은 어린아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강박적 집착이 다 빈치의 예술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감성과는 멀어 보이는 치밀한 계산과 과학의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내면을 예술혼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강박의 소산물일 수도 있다는 게 전적으로 이해가 된다. 누구나 크고 작은 강박 증세를 품고 있다. 예술가는 그것으로 꽃을 피우고, 평범한 이들은 그것이 꽃이 되는지조차 모른다.

 

 

 

4. 그림으로 공자 읽기

 

  조정육 선생의 ‘행복한 그림읽기’라는 블로그가 있다. 담백하면서도 분명한 논지의 글이 올라와 내 취향에 맞춤하다. 여러 카테고리 중에 그림으로 읽는 공자, 라는 코너가 있다. 공자의 활동 상황이 그려진 고전 그림을 제시하고 관련 고사 성어를 곁들여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시리즈물이다. 내 짧은 소견으로 다른 학자들이 시도하지 않는 영역을 개척하는 것 같아 신기하면서도 호기심이 인다. 관련 그림을 찾아내는 수고도 대단한데다, 그것으로 독자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그 중 오늘 읽은 ‘인번거노’부분은 무척 인상적이다. 공자가 정치할 때 장사치는 저울을 속이지 않았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을 정도로 지도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공자 덕에 강해지는 노나라에 위기를 느낀 이웃 제나라가 계책을 꾸민다. 미인계를 써 노나라 군주가 미혹에 빠지면 공자가 충언을 할 테고, 충언을 멀리하게 된 군주에게 환멸을 느낀 공자가 결국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제나라가 원하는 대로 노나라 군주는 환락에 빠졌고, 자로가 스승인 공자더러 떠날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때 공자는 ‘주군이 하늘에 제사 지낸 뒤 고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떠나겠다.(인번거노)’라고 답한다. 고기를 받지 못한 공자는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난다. ‘그깐 제사 지낸 고기 못 받아 삐쳐서 떠나는 놈’으로 떠날 구실을 만든 것이다.

 

 

  그건 공자의 진심이 아니었다. 공자가 달리 공자이겠는가. 어차피 떠날 몸, 구차하게 군주가 싫어서 떠난다고 핑계대지 않고, 스스로 모든 짐을 졌다. 남은 군주를 위한 배려로 위악을 떤 셈이다. 너무나 공자다운 생각이다. 충언이 통할 때까지 계속 설득하면 좋겠지만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멈추고 떠나는 수밖에 없다. 떠나는 와중에도 주군을 위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선한 자를 위한 방패막이가 아닌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던가. 공자가 아니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5.굴원과 어부

 

  전국시대의 굴원은 초인의 노래인 초사(楚辭) 문학에 능했다. 어부사(漁父辭)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어부와 굴원이 나눈 대화체 이야기를 되새길 때마다 굴원보다는 어부의 말에 오래 눈길이 머문다. 아무래도 어부가 현실적인 인물이라서 그럴 것이다. 굴원만큼 강직한 사람은 문헌 속에서나 흔하지, 일반적으로는 작품 속 어부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청렴결백한 굴원은 정계에서 쫓겨났다. 굴원의 죄라면 완전무결함이 가장 큰 죄였다. 잘못하지 않음이 죄가 되는 건 잘못 많은 정계에서는 흔한 일이다. 이제 그의 할 일은 수척해진 몸으로 강호에서 시나 읊는 것이었다. 어부가 물었다. 큰 사람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냐고. 굴원이 답한다. 혼탁하고 취한 세상에 홀로 깨끗한 채 깨어 있다가 쫓겨나게 되었다고. 어부가 충고한다. 사물에 얽매이지 말고 세상 따라 변할 줄 알아야 한다고. 모두 탁한 물이면 진흙탕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하고, 모두 취했으면 싸구려 술을 마시면 되지 고매한 처신으로 추방을 자처할 일이 무엇이냐고. 굴원이 응한다. 머리를 감았다면 관을 털어 쓰고, 목욕을 했다면 반드시 옷을 털어 입어야 한다고.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건 가당치 않다고. 그럴 바엔 강물에 뛰어들어 고기밥이 되겠다고. 깨끗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순 없다고. 지친 어부가 웃으며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간다. 다음과 같이 노래하면서.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타협을 강조하는 어부의 삶과 대조적으로 굴원의 강직한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 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삶이란 강물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흘러주는 게 아니다. 어쩌면 어부가 부른 창랑가처럼 한 세상 둥글게 살아가는 게 범부(凡夫)의 일상이라는 것을 비틀어 보여주기 위해 굴원은 제 강직한 삶을 빗대어 이런 이야기를 남겼는지도 모른다. 범부 부처되기가 위대한 건 그렇게 된 분이 오직 부처 한 분이기 때문이리라.

 

 

 

6. 겸허해지기

 

  다시 수전 손택이다. 1961년 어느 봄날의 일기에서 그녀는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루에 스무 번씩 할 것.”이라고 고백한다. 시린 무릎에 전율이 일 정도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다.

 

  온통 나라가 시끄럽기만 하다. 한쪽에서는 NLL 포기 발언에 대해 물고 늘어지고 다른 쪽에서는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거품을 문다. 민생과는 별 관계가 없는 사안을 두고 지겹도록 몇 달째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 들어 보면 모두 옳다. 일을 벌이는 쪽에서는 그들의 입장이라는 것이 있고, 꼬투리 잡는 쪽에서는 그 입장이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단다.

 

 

  정치가 시끄럽고 관계가 뒤틀리는 건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실은 나도 그를 수 있고, 너도 옳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왠지 패배를 인정하는 꼴이니, 그게 두려워 괜히 목소리를 높이고 과격한 삿대질을 곁들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치졸한 속성을 파악했기에 젊은 수전 손택은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하루에 스무 번씩이나 가슴에 새겼으리라.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쁜 건 아니다. 인간관계에서 긍정의 효과를 발휘하는 썩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세뇌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귀히 여기는 사람이 타인도 귀하게 대접한다고 수많은 심리학 서적들이 가르쳐왔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서로를 귀히 여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한 일이고, 정치 현실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 정당의 목적이 ‘정권 획득’이다 보니 서로 배려하는 미덕 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서로 흠 잡는 게임을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좋은 사람이다, 라는 신념이 너무 확고하면 아집이 생기고 편견에 사로잡히게 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최소의 겸허 모드를 곁에 두었기에 손택은 그토록 진솔한 자기성찰에 가닿을 수 있었으리라. 진정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들일수록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라는 자세로 살아간다는 걸 알겠다.

 

 

  

 

 

 

 

 

 

 

 

 

 

 

 

 

7. 시크와 시니컬

 

  의외로 대중들이 잘못 알고 쓰는 외래어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크’(chic)라는 말이다. 나 역시 그 단어를 내 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뭔가 도도하고 무심해 타인의 의사에 휘둘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더러 ‘시크하다’고 표현해왔다. 우연히 인터넷 게시물을 보다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당황했다. 당장 사전을 검색해 봤다.

 

 

  시크하다 - ‘세련되고 멋있다’라고 되어있다. 도도하다, 차갑다, 등 소위 ‘쿨하다’는 의미는 그 어디에도 없다. 잘못 알고 쓴 경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크란 말은 패션용어로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다. 독일어로 세련되고 맵시 나는 경우를 일컬을 때 쉬크(schick)라고 한단다. 프랑스어(chic)를 거쳐 영어로 보편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선 시크란 신외래어로 쓰이는 모양새다. 화려한 원색이 아니라 흰색과 검정색 톤의, 차분하면서도 도회적 감각을 추구하는 패션을 두고 시크하다는 표현을 썼다. 세련되고 멋있다, 라는 패션 용어와 도도하고 차갑다는 성격 이미지는 묘하게 어울린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성격을 규정할 때도 시크하다는 표현을 하게 된 모양이다.

 

 

  시크란 말이 무심하고 도도하다는 의미로 쓰인 건, 비슷한 단어인 ‘시니컬’(cynical)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냉소적인 데가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이 말이 시크와 비슷한 발음인데다 어쩌면 시크의 어원이 시니컬이라고 착각해서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다.

 

 

  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더러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 사람 시크해.’라고 말해왔다. 한데 그 원뜻이 그 사람은 세련되고 멋있어, 라는 것이었다니 위로가 된다. 냉소적이면서 이기적인 도회풍 사람들이 멋있고 세련된 패션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니 아주 잘못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없다. 시크한 패션을 추구하는 사람이 순박한 성격을 지녔다면 어딘지 부자연스럽기도 하다. 약간은 시니컬한 사람이 적당히 시크한 패션을 보여준다면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니 시크한 자 시니컬해도 용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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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12-01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강박적으로 나는 좋은 놈이 아니다, 좋은 놈이 아니다, 좋은 놈이 아니다' 라고 하다보니 선생님께서 그러더군요. " 아니야, 넌 좋은 사람이란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단다. " 라고 말해서 요즘은 그냥 난 좋은 놈이다, 난 좋은 놈이다, 난 좋은 놈이다 라고 자기암시'를 하고 있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12-05 08:18   좋아요 0 | URL
ㅋㅋ 자고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어야(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심리학 책이 가르치잖아요. 근데 스스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근거없는 자기긍정이 불편할 때도 있더라고요. 진짜 괜찮은 사람은 그냥 가만 있기만 해도 아우라가.
어쨌든 결론은 전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아무한테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다는 것. 뭐 그 정도에요.
곰발님은 여전히 완전 알라딘 접수 중이시지요?

단발머리 2013-12-0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돌아오셔서 기뻐요~~
소개해주신 책들 다 좋은데, 좀 어려울듯 하기도 해요.^^
어부의 이야기 너무 좋은데요.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다크아이즈 2013-12-05 08:20   좋아요 0 | URL
단발님 반갑습니다.
솔직히 어려울 거야 없지요. 지겨운 부분은 있겠지요. 그건 패스하면 될 것이야요.
굴원의 어부사, 이거 우리 고등학교 때 배웠나, 아리까리하네요. ㅋ

프레이야 2013-12-01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페이퍼 반가워요.^^
어떤 것이든 과잉은 바람직하진 않은 것 같아요.
지나친 자기검열도 교정도 사랑도. ㅎㅎ
12월의 첫날이자 일요일, 즐거이 지내셨죠?
전 강변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일몰 직전의 해도 바라보고 그랬어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8:23   좋아요 0 | URL
과잉교정, 자기검열, 집착적인 사랑, 자기맹신...
이 모든 게 문제의 시발점. 인간 자체가 연구대상인 것만은 분명하옵니다. ㅋ
강변 공원이라면 부산을 벗어난 어디를 가신 게야, 그쵸?
좀 바지런해져서 알라딘에 자주 오기를 바랄 뿐이어요^^*
싸랑해여~~

너무좋아 2013-12-02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처음읽었는데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12-05 08:25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너무좋아님.

그나저나 너무좋아를 남발하시는 건 아니시지요? ㅋ

oren 2013-12-02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토록 음미할 게 많은 좋은 글들을 팜므님께서 한꺼번에 여럿 올려주시니, 오랫만에 알라딘에 등장하신 잘못(?)을 모조리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듯싶어요. 여러 꼭지의 글이라 한꺼번에 댓글을 달기도 어렵다 싶지만, 서로 잘났다고 떠드는 정치판과 공자님의 은퇴와 굴원의 시까지 연결지어 생각해 보니 어제 읽은 책 한 대목을 덧붙이고도 싶네요.
* * *
"왕이 말했다. 짐은 아무쪼록 우리 왕국의 국사를 잘 처리할 수 있는 신중하고 능력 있는 인물이 필요하오. 그러자 퇴임하는 대신이 말했다. 오, 폐하, 그렇게 슬기롭고 능력 있는 인물이라면 이와 같은 일에는 끼어들려 하질 않을 것입니다." 아아, 슬프게도 그 퇴임하는 대신이 거의 과녁 한가운데를 맞춘 것이라면!
- 헨리 데이빗 소로우,『소로우의 강』중에서

다크아이즈 2013-12-05 08:31   좋아요 0 | URL
아, 오렌님 이거 저한테 꼭 필요한 말이에요.
이거 다음 번 단상에서 써먹게 빌려 가겠사옵니다.
오렌님은 오랜만에 뵈어도 언제나 학구파.
근데 적재적소에 위로가 되는 이런 말들을 어찌 그리 빨리 구해서 전해주시는지요?
언제나 준비된 분 같사옵니다.^^*

페크pek0501 2013-12-0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팜님, 매우 오랜만이 아닌가요?
푹~ 쉬셨습니까? 무척 반갑군요. ^^
저야말로 요즘 쉬고 싶을 지경이에요. 일은 밀려 있고 속도는 나지 않고...
이 긴 글을 다 읽고 나서... 읽기도 긴데, 이 글을 언제 다 쓰셨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으면 되고, 그 물 흐리면 발 씻으면 되는 것을!”
이 글을 비롯, 님 덕분에 좋은 글을 많이 읽고 가요.
바쁘시더라도 자주 글을 볼 수 있기를... 바라도 되는 거죠?

다크아이즈 2013-12-05 08:33   좋아요 0 | URL
페크 언니는 잘 쓰고 계셨지요?
열 자매의 맘 좋은 왕언니처럼 알라딘을 생각하기에
제가 감당 안 되면 마구 방치하기도 해요. 하지만 충전되면 또 돌아오곤 해요.
이렇게 언냐가 힘이 되어 주잖아요. ㅋ
 

 

 

 

 

   알라딘 서재 두어 달을 방치했다. 그 어떤 이유도 없다. 게으름이 이유라면 이유이다. 체력과 지력과 시간이 다 모자라는 상태에서, 자기 만족 생계형 과제는 넘쳐났다. 당연히 과부하가 걸렸다. 지쳐 나가 떨어졌다. 알라딘 방치는 제일 순서였다. 그간에도 내 깜냥으로 뭔가 안 될 때 가장 먼저 손을 놓은 건 알라딘이었다. 방치와 방문을 오락가락해도 유일하게 용서되는 공간이 이곳이기에 이런 무례를 자주 저지른다. 

 

 

   알라딘 생각을 자주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잊은 건 아니다. 이곳에서 만난 소중한 벗들과는 여전하다. 그 증거가 이 두 책이다. <이모부의 서재>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손수 책을 사들고 와서 우리 그룹에게 건넨 친구 덕에 내 손에 왔다. 책 자체도 좋고, 이모부도 좋지만 나는 여전히 이 책을 보면 그 친구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임호부 작가님께도 작가를 생각하는 친구의 어여쁜 맘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재판, 삼판, 십 판 거듭 된다면 친구의 역할도 상당했을 거라 믿는다. 그 친구, 알라딘에 자주 들어오진 못하지만 항상 응원한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독서공감, 사랑을 읽다>는 우편으로 받았다. 역시 우리 오공주 그룹 중 한 분이 손수 사서 부쳐주었다. 다락방님도 좋아하고, 다락방님의 첫 책(?)인 이 책도 무척 좋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우아하고 깔끔한 이 친구를 먼저 떠올릴 것 같다. 다락방님 원대로 12쇄를 무난히 넘길 것 같은데, 역시 책 사준 친구의 열혈성원도 그 성과에 한몫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 이유경 작가님 파이팅, 책 친구도 파이팅! 조만간의 겨울 만남을 기약해. 님이 다음 순서로 책 내면 내가 다락방님께도 사서 부칠게.

 

 

   바쁜 일정 소화한 뒤 만난 모처럼의 여유. 항상 하는 얘기지만 체력, 지력, 시간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지치면 쓰러지고, 쓰러지면 한없이 게을러지고 손 놓아버리는 이 오래된 나쁜 습관을 경멸한다. 절대 바로잡기 힘든... 한결 같이 알라딘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성실성 면에서 신뢰한다. 그들은 이겼고, 나는 지고 있는 중이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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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01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05 08: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12-0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공주 님들도 각각 책을 내시는 날이 올 거라고 믿어요.
단독으로도 책 내고 오공주 님이 함께 책 한 권에 글을 싣는 것도 좋을 듯해요.
당연히 저는 사 봅니다. ㅋㅋ

다크아이즈 2013-12-05 08:38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가 먼저 내야 되는 거 아냐요?
언니 단상들 시쳇말로 쩔잖아요. 그것만 정리해도 책 세 권은 거뜬하지요.
물론 저도 사봅니다.^^*

oren 2013-12-0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은 참 묘한 곳이긴 해요. 여러모로 일상이 바쁘거나, 혹은 일상이 너무 재미있거나, 혹은 살아가는 나날이 너무 힘겨울 땐 '여기'를 돌볼 겨를조차 없을 때도 많은데, 그래도 가끔씩 잊을 만하면 생각이 나서 다시금 되돌아 오고픈, 그런 장소처럼 느껴질 때가 많더라구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8:4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못 와도 걱정해주는 이는 있어도 질책하는 이는 없으니 큰 언니 같다고나 할까요?
저 혼자 십자매의 왕언니 같은 곳이 알라딘 서재라 생각하고 살아요.

세실 2013-12-0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공감 저도 받았지요~~~ 우리 오공주 참 좋아요^^
전 뭘 드려야하나? 누군가 또 책을 내면 보내 드려야겠어요. 우리 오공주중 한명이면 좋겠다. 팜므님 아프지 마시고, 체력관리 잘 하시어요!

다크아이즈 2013-12-05 08:44   좋아요 0 | URL
세실님도 당근 받았지요.ㅋ
아프지는 않지요. 언제나 게으름이 문제일 뿐.
바쁜 일정 마무리하고 이제 휴식 중. 그래도 맘은 편치 않아요.
뭔진 몰라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저를 더 힘들게 하지요.
세실님의 상큼발랄 긍정 화사 이쁜 에너지 조큼 빌리겠사와요.^^*

 

 

 

 

 

 

1. 거꾸로 가는 시간

 

이 글로벌한 세상에 유독 우리 현실만 거꾸로 간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라도 이석기 사태를 둘러싼 정치권 및 언론의 여러 행태는 유행지난 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통진당 수뇌부의 ‘과대망상적’ 발언이나 국정원의 ‘내란 음모’ 카드나 일반국민에겐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구태의연한 두 과거가 그들만의 레퍼토리로 고군분투하는 동안 국민들은 귀 후비거나 코 파는(곰발님 식 표현ㅋ) 지겨움으로 그것을 구경할 뿐이다. 두 쪽 다 신선하지도 않고, 21세기 정서와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국정원이 통진당 수뇌부를 향해 내란예비음모죄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석기 의원 및 통진당 쪽은 예상대로 날조, 왜곡이라고 맞선다. 이석기 그룹의 이른바 ‘경기동부연합’의 몇몇 움직임이 내란음모에 해당된다는 것이 국정원의 입장이고, 처음엔 모임 자체를 부정하던 통진당 쪽은 단순한 당내 모임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기본 틀에다 변주만 가한 형태인 이런 공안 정국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레퍼토리이다.

 

 

이석기 의원은 내란음모와 어울리기 보다 마음이 병든 자에 가깝다. 이미 그들 그룹은 국회에 입성할 때나 대선 과정에서 희한한 행보를 거듭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동정의 대상이지 위협적 존재는 못 된다. 국정원이 확보했다는 내란예비음모 증거 자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들을 그 죄몫으로 엮기에는 어딘가 격이 맞지 않다. 그들의 정체가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주고, 국민을 호도할 만큼 위협적인가에 대한 생각도 회의적이다. 법조계나 언론의 분위기도 그들이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볼 정도로 명백한 목적과 계획성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쪽이다.

 

 

마음이 병든 자는 치료의 대상이지, 교화의 대상이 아니다. 비뚤어진 정치색이나 고착된 이데올로기는 가두어서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선 개입이란 악재를 벗어나기 위한 국정원의 전환용 카드인지, 진짜로 내란예비음모를 할 만큼 그들이 통 큰 그룹인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거꾸로 가는 시간 여행에 씁쓸해질 뿐이다.

 

 

 

 

2. 창의력이 필요해

 

하루 종일 단세포생물이 된 기분이다. 시쳇말로 뇌가 너무 청순해진 나머지 또릿또릿한 행보와는 거리가 먼 하루를 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만 그런 게 아니다. 실수투성이 일상을 꾸리는 건 내게 흔한 일이다.

 

 

우선 독서모임에서 활용한 CD를 기기 안에서 빼내지 못해 허둥거렸다. 몸집이 큰 전문 기기였다지만, 눈썰미만 좀 있다면 금세 CD 플레이어의 위치를 찾을 것인데 내 눈엔 그 데크가 그 데크 똑 같아 보인다. 기계치다 보니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는 자체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저녁에는 약속 장소를 찾느라 또 헤맸다. 자주 다니는 길인데도 주변 조명이 바뀌니 이 길이 아닌가 싶어 같은 곳을 몇 바퀴나 돌고 있는 거다. 당황하다 보니 선물로 준비한 책을 전하는 걸 깜박하고 만다.

 

 

여기서 그치면 좋으련만 그건 바람일 뿐이다. 집에 돌아 올 때는 식구들 간식을 사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기다리던 식구들 표정을 보고서야 아차 싶은 거다.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한두 가지에 몰두하게 되면 나머지는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운이 좋아 신경이 덜 쓰인 것들이 떠오르면 챙길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가 많다.

 

 

창의적이지 못한 일상이 아쉽기만 하다. 이참에 우스갯소리나 한 번 해야겠다. 곧 죽을 할머니, 내 생명을 구해준 오랜 친구, 꿈꾸던 이상형 여자(남자) 등이 급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고, 자동차로 지나던 나는 오직 한 사람만 태울 수 있다. 누구를 옆자리에 앉힐 것인가? 단순 세포형인 나는 망설임 없이 오랜 친구를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창의력 만점인 다음과 같은 매혹적인 답을 내는 이도 있다. 자동차 키를 친구에게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시게 한 뒤, 자신은 이상형 여자와 함께 버스를 탄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줄 것은 차치하고라도.

 

 

두려워서, 당황해서, 예민해서 등의 핑계가 붙은 습관성 어리바리함을 벗어나고 싶다. 빠릿빠릿한데다 창의적이기까지 한 전천후 멀티플 인간형으로 거듭나고 싶지만 내 현실은 멀기만 하다.

 

 

 

3. 잡스라는 아이콘

 

스마트폰이 일상화되기 전이었다. 한 IT 업계의 대표가 스마트폰의 장점에 대해 설파하는 인터뷰 소식을 자주 접했다. 자신은 몇 년 전부터 스마트폰을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휴대용 컴퓨터가 되는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다. 손에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 검색, 메일 송수신, 사진 촬영 및 편집, 심지어 쇼핑까지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이야기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 못지않게 스마트폰 홍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이 빠르게 세계로 확산된 데는 애플사의 ‘아이폰’ 역할이 컸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 배경에 스티븐 잡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도 지나치진 못한다. 안타깝게도 잡스는 이 세상에 없지만 명실공히 애플사는 세계 IT 업계의 왕좌가 되었다. 잡스 없이는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가 죽은 뒤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전기문을 읽었다. 괴팍하고 특이한 그의 성정 이면에 버림받은 어린 시절이 있었고, 추진력 뒤에는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양부모와 절친 사업 동료가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만 관심 있다면 잡스가 어떤 인물이었다는 것을 대개는 알고 있다. 잡스에 관한 영화가 나왔다고 했을 때 약간은 기대감에 들떴다. 전기문을 넘어선 뭔가 강한 한 방이 있을 거란 예감 때문이었다. 예감이 언제나 맞는 건 아니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를 영화로 옮겼을 때의 말할 수 없는 지겨움 같은 게 화면에 흘렀다.

 

 

스토리텔링이 얼마나 중요한 지 새삼 느낀 영화였다. 세상을 뒤집어버린 천재괴짜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도, 하다못해 혼잣말이라도 들어볼 수 없었다. 버려진 자식으로서의 상실감, 도덕과 불화하는 내면의 혼란, 선불교와 인도에 관심이 많던 히피족으로서의 젊은 잡스, 까다로운 채식성과 어울리지 않는 다혈질 등, 섬세하게 짚을 수 있다면 충분히 많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도 뽑아내지 못했다. 방황하는 잡스,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 잡스를 그리지 못한 영화는 실패작으로 보였다. 차라리 다큐멘터리로 꾸렸다면 이만한 실망감에서는 멀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전에 잡스에 관한 정보가 없거나 잡스 전기를 읽지 않은 사람들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만든 애플사에서도 쫓겨날 때 관객들은 왜 쫓겨 나는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게 구성했다. 그나마 봐줄만한 것은 잡스로 분한 애쉬튼 커처의 연기력이었다. 그것으로 커버하기엔 감독의 한계가 빤히 드러나는 영화였다.

 

 

잡스라는 아이콘은 너무 선명하고 그 콘텐츠 역시 참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인 것이나 영화에 와서는 그 캐릭터도 내용도 흐지부지 사라지는 연기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 별나거나 희한한 짓을 하면 흉보거나 손가락질하는 건 자유다.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 미친 천재들이 세상을 바꾸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이런 내용의 내레이션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영화였다.

 

 

 

4. 모든 것의 빌미

 

독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배우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의 치유 프로그램이 어느 한 쪽만 일방적인 혜택을 보는 경우는 없다. 공감대라는 공통분모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이끄는 쪽이나 따르는 쪽이나 서로 배우게 된다.

 

 

오늘도 예외가 아니다. 재소자들을 상대로 ‘마음상함’에 관한 주제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다. 상처의 근원지인 가족과의 마음 상함에 대해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 상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알래스카에 사는 생면부지의 아저씨와는 상처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는다. 의외로 많은 이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는다. 타인의 풍성한(?) 사례에 비해 비교적 다행한(!) 제 상처에 위안을 삼는 모습은 어디나 같다.

 

 

안에 있는 그들이나 밖에 있는 우리나 따귀 맞은 영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뜻하지 않게 우리는 유행가 가사의 총 맞은 것처럼 내 영혼에 흠집 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그때 언제나 눈물짓는 피해자는 나이고, 몹쓸 가해자는 상대방이다.(라고 생각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이라고, 자신의 잣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상대는 내 영혼을 교란시키고 내 심장을 후벼 판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욱하는 마음에 나도 상대의 뺨을 갈긴다. 순차적으로 쌍방의 영혼에 펑크를 내고 만다.

 

 

그 와중에 멋진 결론을 내 주는 한 분이 있다. 모든 상처의 빌미는 스스로에게 있단다. 오랜 수감 생활 동안 생각만 많아졌는데, 모든 것이 부질없고 ‘나’ 아닌 원인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단다. 옆 사람이 날 모욕하는 건 내 작은 교만의 턱짓 때문이다. 옆집 아줌마가 내 눈빛을 거절하는 건 오늘아침 그미 발자국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바쁘단 핑계로 엘리베이터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모든 것의 빌미가 된다는 걸 잊지 마라. 이 편한 통찰에 이르게 되면 마음 상함 때문에 타인을 단죄할 필요가 없다. 그분이 한 말을 받아 적는 이 순간이야말로 ‘힐링’이란 말이 가장 어울린다.

 

 

 

5. 눈물

 

눈물샘에서 만들어진 눈물은 환경적, 심리적 요인에 의해 밖으로 표출된다. 바람 또는 알레르기 현상에 노출되었을 때 생기는 환경적 요인의 눈물은 자기 의지와는 무관한 자연 현상 같은 것이라 이해 받기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심리적인 눈물은 그에 비해 복잡한 양상을 띤다.

 

 

최근 여성 아이돌 그룹이 토크쇼에 나와 차례로 눈물을 보인 것이 이슈가 되었다. 이것만은 피했으면 하는 의사를 밝혔는데도, 자신의 연애사를 들먹이며 사회자들이 약을 올리자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만다. 옆자리의 동료 아이돌도 뒤질세라 배턴을 이어받았다. 애교를 보여 달라는 주문에 난감해하자 한 사회자는 숫제 맡겨 놓은 돈 뺏어가듯이 윽박을 질렀다. 겁에 질린 아이돌 출연자는 넘치는 애교 대신 그 누구도 원치 않은 눈물을 보여주고 말았다.

 

 

프로라면 두 경우 모두 농담으로 맛깔스레 받아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아이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연히 시청자들의 질타를 받았다. 자연발생적인 환경적 요인의 눈물처럼 심리적 요인의 눈물도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대중들은 그렇게 이해심이 넓은 편이 못 된다. 하지만 나는 그들, 아직은 어린 그녀들을 이해하고 싶다. 사람의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거고, 그래야만 프로라고 생각하는 자체도 인간의 오묘한 심리를 덜 이해하는 데서 오는 단정적 언사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 마음이 정리 되지 않고 복잡 미묘한데다, 잦은 스케줄로 스트레스 지수마저 높은데, 멍석도 깔아 주지 않고 내키지 않은 것을 하라니 서러운 눈물만이 솟구칠 수도 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고 싶지만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적절히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이십대 때의 여성 감성이 가장 섬세하고 다치기 쉬운데 현 상태가 얼마나 힘겹고 난감할지는 당사자가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어린 여자의 눈물이 다 연민하고 동정할 일은 아니지만, 한때의 눈물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요청하는 어찌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주는 이도 필요하다. 누구나 청춘의 강을 건너왔고, 건널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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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09-1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석기 사태를 보면서 "나는 이 방면에는 플라톤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모를 때부터 플라톤주의자였다."라는 몽테뉴의 말이 떠오르더군요. 이런 '괴악한 사태'가 오래 전에도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을텐데 '아직도' 아주 가까이서 '현재진행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 뿐이지요.

* * *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

나는 이런 일에 참견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이런 가장 못된 사태를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행위를 사회 개혁의 수단으로 택하며, 아주 확실하게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가장 명백한 원칙을 가지고 자기 영혼의 구제를 찾고, 하느님이 자기에게 맡겨 주신 정부와 관리와 법률을 둘러엎고, 어머니(조국)의 사지를 찢어서 옛날의 적에게 갉아먹게 던져 주고, 동포애를 골육상쟁의 증오심으로 채우고, 마귀와 광귀들을 원군으로 청하면서, 하나님의 법의 거룩한 평화와 정의를 돕는 일이라고 생각할 만큼 이해력이 우둔한 수작을 본 자가 하나라도 있을까 자주 의심을 품어 본다.

야심과 탐욕과 잔인성과 복수심은 그 자체로서 본연의 기세를 충분히 갖지 않았다. 그런 것을 정의와 신앙의 영광스런 자격으로 뜨겁게 해 주고 부채질해 주자. 도리에 어그러지고 흉악함이 합법적으로 되고, 관청의 허가를 얻어서 도덕의 망토를 입는 꼴보다 더 괴악한 사태를 상상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다. "미신보다 더 심한 기만은 없다. 그것은 신들을 구실 삼아 범죄를 은폐한다."(티투스 리비우스) 플라톤에 의하면 부정(不正)의 극단적인 종류는 부정의가 정의로 간주되는 일이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다크아이즈 2013-09-20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언제나 이렇게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고전 철학자들의 말을 옮겨 오시니, 그 독서력에 감복할 따름인뎌^^*
오렌님의 책 소개 덕분에 제 교양의 지평도 아주 조금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고 황송한 일입니다. 추석 잘 보내셨나요?
 

 

 

 

1. 플롯과 친구하기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인간관계의 원활한 소통과 한 대상의 전략적 홍보 수단 등에서도 스토리텔링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원래 스토리텔링은 문학적 성과, 특히 소설을 이루는 장치이자 재료로서 강조되는 부분이었다. 스토리텔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소설은 고전적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고수하거나 의도적으로 스토리텔링을 무시하는 작가가 있어왔지만 그건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한때 나는 글쓰기에서 플롯을 그리 중요시 여기지 않았더랬다. 글은 플롯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심리 묘사에 의해서만 글의 흥미나 질이 판가름 난다고 믿었다. 근거 없는 편협의 우물에 갇혀 있었다. 하기야 스토리텔링 자체도 부질없고 소용없다고 여겼다. 오직 쓰는 자의 손가락 의지에 글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믿고 싶어 했다. 등장인물의 외적 내적 묘사의 장악력만 있으면 플롯은 자연스레 따라온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플롯에 대한 신뢰감이 되살아난다. 단단한 플롯만이 독자를 만든다. 이야기의 뼈대나 구조, 즉 플롯은 단순한 이야기의 개념을 넘어선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그저 늘어놓는 것이 이야기라면, 플롯은 그것에 더해 당위인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의 힘이나 과정이 녹아 나야 제대로 된 플롯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간 너무 등장인물의 내적 또는 외적 패턴에 의해서만 글을 쓰려고 했다. 이제 자세를 좀 바꿔보고 싶다. 플롯의 대가라 해도 좋을, 작가 딘 쿤츠가 말했다. ‘플롯이 없는 소설처럼 이 세상에 우스운 것은 없다. 누가 뭐래도 플롯은 소설의 으뜸 조건이다.’ 태생적으로 광적 재능을 타고난 작가라면 플롯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 자체로 실험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니. 하지만 끊임없이 연마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구태의연하게 보일지라도 기본에 충실한 것도 나쁘지 않다. 초심으로 돌아가서 쓰라는 내면의 요청이 들린다.

 

 

 

2.잔소리

 

제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나는  엄마 노릇에서는 빵점이다. 그만큼의 보상으로 아들딸에게 자율성을 부여했다고 위안했는데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아들녀석이 말한다. ‘엄마, 잔소리가 뭔지 아세요? 엄마들이 하는 모든 말이 잔소리가 아니라, 같은 소리를 계속 하는 게 잔소리예요.’ 한마디로 ‘엄마는 잔소리꾼’이란 얘기다. 은근히 서운하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식으로 생각하는 법. 별 잔소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건 내 입장일 뿐, 아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내가 아들에게 하는 레퍼토리는 이런 거다. ‘첫째, 어학이 기본이다. 딴 건 몰라도 어학 공부는 게을리하지 마라. 이 글로벌한 세상에서 어학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둘째, 확실한 관심 분야를 개척하고,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으면 좋겠다. 현대의 중산층 개념이 뭔지 아나? 아파트 평수도, 외제차 유무도, 명품 가방 살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그건 경제적 측면에서 본 것이고, 요즘은 문화적 잣대로 중산층을 가늠한다. 그러니 정신적 중산층이 되고 싶으면 자기계발에 신경 써라.’

 

적고 보니 잔소리 맞다. 아들 기준에 의하면 엄마가 이런 말을 두 번 이상, 어쩌면 여러 번 했기 때문에 잔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그 걱정의 다양한 버전이 보통의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린다. 그 시절 나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은 없다. 그렇다고 잔소리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부모는 말하고 자식은 거부하는 것, 그것이 잔소리의 속성이다. 엄마는 한두 번밖에 말한 기억이 없는데 자식은 여러 번 들은 것 역시 잔소리의 특징이기도 하다.

 

가만 생각하면 훈육 또는 길잡이라는 형식의 모든 군소리는 부질없어 보인다. 물이 자정작용을 하면서 흐르듯 인간 성장에도 그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부모의 잔소리와 무관하게 아이들은 크면서 스스로 깨닫는다. 시기의 늦고 빠름에 차이가 있을 뿐, 본인의 인생행로에서 자정능력을 발휘한다. 부모 스스로도 그리해왔지만 그 시행착오의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싶은 욕심에 부모는 잔소리를 하게 된다. 부모의 모든 옳은 소리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부모자식 간이라는 걸 증명하는 천형의 매개물인 잔소리!

 

 

 

 

   

투 마더스 포스터 

 

 

 

 

3. 도리스 레싱 앤 투 마더스

 

상식과 기본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도전을 받으면 어떻게 될까? 전통적 사고와 도덕적 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굳건한 힘이 되기는 하는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한 알싸한 답을 주는 작가가 도리스 레싱이다.『다섯째 아이』에서의 강렬하고 통렬한 통점 때문에 기억에 남는 작가인데 이번에 개봉하는「투 마더스(두 엄마)」도 그녀의 작품이 원작이란다.

 

『다섯째 아이』에서의 그녀의 메시지를 내 식으로 환원하면 이렇다. 장미와 백합향이 향기롭다고 그것만을 삶의 가치로 고수할 수 있을 것인가. 시궁창 냄새나 쓰레기장 냄새도 나름의 존재이유가 있다. 평화로운 질서, 안온한 일상, 보장되는 미래 - 전통적 가치관과 건전한 윤리관에 충실한 젊은 부부는 이런 가정을 꿈꾼다. 하지만 다섯째 아이인 ‘벤’이 태어나면서 그들의 신화는 무참히 부서진다. 가는 몸에 부서질 것 같은 사지, 거대한 머리에 툭 튀어나온 눈. 괴물 같고 벌레 같은 외형에다 성격마저 괴팍한 벤은 중산층 삶에 대한 거리낄 것 없는 로망을 가졌던 부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몰아넣는다.

 

행복의 기별로 가득했던 집안은 불행의 기운이 점령하고 만다. 파괴와 증오, 공포와 침울의 대상이 된 벤을 버려야 할 것인가. 가족의 평화와 안위를 위해, 그들이 꿈꿨던 이상향이란 그림을 위해 또 다른 가족인 벤을 포기할 것인가. 해결 난망의 숙제이지만 도리스 레싱의 전언은 분명하다. 벤이란 상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믿고 있는 가치나 기준이란 게 얼마나 헛된 것이며 무너지기 쉬운가를 보여준다.

 

관계 또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바늘 끝 같은 감각으로 감지해낸 도리스 레싱의 철학이「투 마더스」에 와서는 어떻게 변주되는지 궁금하다.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적 시각의 영화라 한계가 있을 수도 있다. 더구나 쌍방 친구 아들들과의 로맨스라니 막장 드라마로 빠질까 우려도 된다. 하지만『다섯째 아이』에서의 도리스 레싱을 기억하는 감독이라면 뭔가 선명한 메시지를 던져주기 위해 애쓰지 않았을까. 작가의 기가 전해질지 기대 중이다.

 

 

 

4. 군더더기 없는 삶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스티븐 킹은 강조했다. 군더더기 없는 글의 매혹에 대해서. 고교 시절 그는 한 신문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늙은 편집자는 그가 제출한 원고의 대부분을 지워서 돌려주었다. 남은 것은 오직 킹이 처음에 하고자 한 내용 뿐이었다. 늙은 편집자는 어린 그에게 충고했다. 어떤 이야기를 쓸 때는 스스로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고 써라. 원고를 고칠 때에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은 모두 없애라. 그렇게 하면 핵심만 남을 것이다.

 

같은 맥락의 얘기를 사진 기초를 배울 때도 들었다. 한 수강생이 제출한 사진을 선생님은 화면에 띄웠다. 호수 풍경이었다. 드넓은 호수 가운데 오리 한 마리가 노닐고 언덕 주변으로는 화사한 붓꽃이 만개했다. 남은 오리 떼는 물풀에 가려 보일 듯 말듯 했고 그것을 정원 삼아 전원주택이 원경으로 잡힌 사진이었다. 선생님은 말했다. 그 풍경 중 호수에 떠 있는 오리를 제외하곤 다 버리는 게 낫다고. 사람들은 핵심을 원하지 군더더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고.

 

무엇을 듣고 싶은가 또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 대한 중심점은 하나이다. 이것저것 말하고 이리저리 보여주고 싶은 건 당사자 입장일 뿐이다. 어떻게든지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보여주고 싶은 풍경도 많은 게 내 입장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렇지 않다. 다 알아 들을 마음도 없고, 다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지도 않는다. 타자화된 우리가 듣고 싶고 보고 싶은 건 언제나 단순한 핵심 그것이다.

 

글에서 군더더기를 버리는 것이나 사진에서 불필요한 풍경을 버리는 것만큼 삶에서 던적스러움을 버리는 건 어렵다. 단순한 핵심에 이르는 일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자기 훈련을 필요로 한다. 복잡하고 거창하고 요란한 것은 내 안에 깃든 욕망의 실체일 뿐, 타자에게 비치는 그것은 피로와 지루함의 허상일 뿐이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한 것 그 중심에 닿으려 하는 건, 그만큼 우리 삶이 복잡하고 까다롭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5. 사랑하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순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상대의 목소리나 문자를 기다린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어쩌다 상대가 건네는 한 마디 말에 심장이 오그라든다면 당신은 사랑하고 있다. 아니 사랑에 빠져있다.

 

사랑에도 구별이 있다. 덜 사랑하는 자와 더 사랑하는 자. 사랑에 덜 사랑과 더 사랑이 어디 있냐고? 천만에! 사랑만큼 저울추가 확실히 기울어지는 것도 없다.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당사자들에게 똑 같이 할당되는 것이라면 애초에 사람들은 사랑 때문에 입술이 부풀고, 이별 때문에 치통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대상을 객관적·보편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덜 사랑하는 쪽이고, 대상에 주관적·감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면 사랑에 빠진 쪽이다. 덜 사랑하는 쪽은 그 순도가 탁하기 때문에 덜 다치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게 버겁지 않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쪽은 순도 백퍼센트이기 때문에 더 다치고 버겁기만 하다.

 

사랑의 단상에 관한 롤랑 바르트의 전언을 보자.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한다. 다른 일 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 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배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철새이고 사라지는 자이다. 반면 사랑하는 자의 천직은 외곬이자 처분을 기다리는 자이다. 설거지하기 성가셔 싱크대 한쪽에 미뤄둔 프라이팬처럼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세이다. 언제나 부재중이거나 안개처럼 존재하는 그 덜 사랑하는 존재가 사랑인줄 알고 창을 연 채 반쯤은 얼이 빠진 채 기다리는 것이다. 결코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하지만 어쩌랴.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갈망하고 집착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인 것을. 찔러대고, 나약했던 그 순간을 겪기 전까지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환상으로 남을 몹쓸 그 사랑!

 

 

 

6.레미콘 차를 보며

 

달리는 레미콘 차 몸뚱이는 쉴 새 없이 돌아간다. 그 안에는 이미 섞인 콘크리트가 들어 있다. 모래, 자갈, 시멘트, 물 등 적절히 배합된 그들은 몸 섞어 서로를 보듬어야 한다. 목표점에 도달할 때까지 제 몸을 굴리지 않으면 내용물이 제대로 섞이지도 않을뿐더러 심하면 굳어버릴 수도 있다. 안착하여 타설될 때까지 돌고 돌아야 한다.

 

레미콘 차 뒤꽁무니가 잘 돌아간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건설 현장 비리에 관한 텔레비전 고발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관리가 잘 되는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는 입구에 담당자가 나서서 레미콘을 점검한다. 불량 레미콘이 들어 있는 차를 발견할 경우 그 자리에서 되돌려 보낸다. 반면 허술한 공사 현장에서는 퇴짜 맞은 그 레미콘 차를 형식적인 점검만 거친 채 그대로 투입시키고 있었다. 완공되었을 때 두 아파트에 대한 안전도는 극과 극이 될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본질은 관계이다. 일단 잘 반죽해야 한다. 어긋나고 흐트러진 배합률로 제 인생의 내용물을 반죽한다면 아무리 잘 돌려도 몹쓸 것이 되고 만다. 잘 굳은 축조물을 얻으려면 두 가지 다 충족해야 한다. 배합이 맞아야 하고 잘 섞을 줄 알아야 한다. 정치 구도, 문화 방식, 소통 의지 등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 바탕에는 관계망이란 사회적 운명이 부여된다. 그 사회적 약속을 잘 배합하고 잘 융합할 때 굳건한 구조물을 얻을 수 있다.

 

삶의 핵심은 인간 대 인간에게 있다. 일찍이 그것을 알아 낸 인류는 철학이라는 인간에 대한 위대한 학문을 고안해내기에 이르렀다.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 일생을 만든다. 내 삶을 어떻게 반죽하고 돌릴 것인가에 따라 완공된 건축물이 달라진다. 불량 반죽은 아무리 돌려도 불량일 뿐이다. 운 좋아 그 레미콘으로 층층이 타설한다 한들 부실 건축물이 되고 만다. 반죽은 굳기 마련이다. 문제는 잘 굳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단한 구조물로 남을 것인가, 부실한 건축물로 부서질 것인가는 기초인 반죽과 돌리기에 달려있다.

 

 

 

7. 예의라는 폭력

 

제 눈의 들보보다 남의 눈의 티가 크게 보인다. 그게 인간이다. 그리하여 ‘잘 아니까 똑바로 말해주는 거야.’ ‘뒤끝은 없으니 서운해하지마.’라며 상대에게 거침없이 말한다. 맞는 말처럼 들리는 저런 어법이야말로 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이다. 사람은 상처의 동물이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약점을 알고 있다. 그것을 고려치 않은 채, 제 눈의 들보 든 지도 모르고 충고랍시고 권력자들은 남의 약점을 캐는데 일가견이 있다.

 

선인들이 타인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기를 조심하라고 가르친 건 제 안에 더한 그 왈가왈부가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리라. 말하지 않는 약자는 타인의 약점을 몰라서가 아니다. 말할 필요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예의 상 알 뿐이다. 자중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선인들은 가르쳐왔다.

 

하지만 예의 또는 예절이라는 게 동양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약자가 강자에게 취하는 복종의 기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공자가 말했다. ‘다른 이를 존중하면 모욕당할 일이 없다’고. 애초에 그 말은 지위상하와 관계없이 태어난 말일 게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연예계에서 선배에게 깍듯이 인사하지 않는 것은 큰일날일이지만 먼저 상대를 발견하고도 선배가 후배에게 곁눈질조차 주지 않는다고 해서 예의에 어긋난다고 흥분하는 사람은 없다. 구석구석 살피면 예절은 언제나 약자 또는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권력 가진 자가 예의 부족 구설에 오른 예는 단연코 들어본 적이 없다.

 

예절은 마음의 진정성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한다. 갑의 위치라 해서 진정성과 형식을 표현하지 말란 법은 없다. 옛말에 ‘인사에 선후 없다’라고 했다. 예절에도 선후가 있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의 예절은 언제나 강자 앞에서 표하는 약자의 리액션에 머물고 만다. 그러다 보니 잘 안다는 이유로, 뒤끝 없다는 핑계로 갑은 을에게 폭력적 언사를 일삼는다. 예절에서 인간 동격 개념을 적용하기엔 무리인 세상을 우리는 여전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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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3-09-1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느와르님, 안녕하세요^^

<소설쓰기의 모든 것>은 도서관에서 1권만 빌려서 읽다가 다 못 읽고 반납했었거든요. 님 글 읽고 보니, 전체를 꼼꼼히 읽어보고 싶어요.

현대의 중산층 개념 너무 좋은데요. 저도 엄마잖아요.
요즘에 딸롱이가 바이올린을 거부해서요, 조금만 더 배웠음하는데, 팜므느와르님 애기 해줘야겠어요. 다른 것보다 정신적인것, 문화적인 것에 중점을 두자 하면서요.

좋은 글 잘~~읽고 갑니다. 날씨가 선선하다 못해 서늘하네요. 또 놀러올께요~

다크아이즈 2013-09-16 07:00   좋아요 0 | URL
전 이 책 유익하게 잘 보고 있어요.
선전지 딸려 온 것 보고 당장 샀잖아요.
미국 환경에 맞는 거라 우리 상황에 다 적용할 순 없지만 읽어 볼 필요는 있었어요.

중산층도 못 되지만 그런 정신적 마인드는 중요할 것 같아 강조하는데
아이들에겐 잘 안 먹혀 들어요. 머리 굵으면 지들 생각이란 게 있잖아요.
단발머리님 추석 잘 보내시고, 스트레스는 알라딘에서 같이 풀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12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포스트 참 좋습니다. 팜므 님 글은 확실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딘 쿤츠가 플롯이 팔 할'이다, 라고 했다면 스티븐 킹은 정반대로 말한 기억이 나네요. 아마... 유혹하는 글쓰기인가 아니면 죽음의 무도인가에서 플롯은 개나 줘 ! 그냥 플롯에 골몰하지 말고 그냥 써 !!! 이런말을 했거든요...ㅎㅎㅎㅎㅎㅎㅎㅎ.

사랑의 단상 띠지'에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 라는 문장 제가 정말 좋아했던 문장입니다. 사랑의 단상은 늘 꺼내서 보는 책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한편의 서사시 같아요. 가장 위대한 서사시입니다.

레미콘에 대한 비유 정말 좋습니다. 저도 이거 좀 써먹어도 되나요 ? 써먹게 해주세요..

다크아이즈 2013-09-16 07:04   좋아요 0 | URL
그간 제가 그랬다니까요. 플롯은 개나 줘, 이런 마인드였죠.
근데 재능이 없으니 개 줄 플롯도 없더라구요.ㅠ 해서 초심으로 돌아가볼까 싶어서 방향을 바꿔 보려구요.

레미콘 비유 제발 좀 써먹어주세요. 곰발님이라면 멋진 사유가 깃든 살아있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요? 가끔씩 들어오는 알라딘, 곰발님 글맛에 취하는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다. 신통방통하게만 보이는 곰발님, 아흐 다롱디리~~

노이에자이트 2013-09-1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의보다는 위계질서를 더 중시하는 이들이 많죠.아랫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골치 아픕니다.

'예의라는 폭력'에서 "저런 어법이야말로 불편부당한 말투 중의 하나..." 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인지요? 문장의 의미가 통하지 않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09-16 07:07   좋아요 0 | URL
노이자님 고맙습니다.
제가 빨리 발견하고 고쳤어야 했는데, 게으름을 핑계로 이제 님의 귀한 덧글을 접수했다는 사실.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방치한 죄 크옵니다.
첫 댓글이신 것 같은데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래서 알라딘이 좋습니다.
많은 것 배우러 노이자님 서재에 놀러 가겠습니다.^^*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일단 바쁘다는 핑계로 책 목록만 올린다.

  선정 되든 안 되는 나로선 꼭 읽어야 할 소설들이다.

 

  1. 제7일

위화의 문체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에세이집 한 권만으로도 충분히 신뢰가 간다. 허삼관매혈기 소설보다 낫고, 사람의 목소리~에세이 보다 낮아도 만족할 위화. 선정 안 되어도 사서 볼 거다.

 

 

 

 

 

 

 

 

 

 

 

 

 

 

  2. 그들에게 랜디합을 

   손보미는 요즘 시쳇말로 핫한 트렌드다.

   데뷔작인 담요, 이후 행보를 주목했는데 드뎌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기성인 내 눈에 새로운 감성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며, 김애란, 김숨을 능가하기를 응원하는 맘으로 역시 선정 안 되어도 사 볼 거다.

 

 

 

 

 

 

 

 

 

 

 

  3. 제이컵을 위하여

요건 스토리텔링을 마스터하기 위한 구색용 선정 작품이다. 얼만큼 만족을 가져다줄지 모르지만 일단 건질 게 있으리란 긍정의 기대감으로 가볍게 읽어내려 갈 생각이다. 순수문학에도 환타지나 추리에서 중요시하는 스토리텔링이 적절하게 가미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텐데 어찌 너무 경계가 뚜렷한 것 같아 갑갑할 때도 있다. 무조건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역시 선정 안 되어도 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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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2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2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