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만권당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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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다. 물론 이전에도 역사, 특히 근현대사의 책들을 읽다보면 답답해지고 울분이 터져나오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그냥 감내하면서 우리의 과거를 직시하기 위해 감정을 꾹꾹 누르며 책을 읽곤 했다. 그런데 우리 안의 식민 사관은 그에 더하여 내가 미처 인식하고 있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있어서 더욱 마음이 씁쓸했다. 아직도 친일청산을 하지 못하고 정치와 정계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으며 호의호식 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중국의 동북아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이 우리 사학계에서 거짓의 탈을 뒤집어 쓰고 국민의 세금으로, 그러니까 한마디로 국가적 차원에서의 지원을 받으며 그래도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일제시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경찰이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그대로 경찰로 복무를 하고 독재정원의 앞잡이가 되었고, 친일을 하며 재산을 모은 매국노들이 지금 현재까지 재산축적을 하며 호의호식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뿌리깊은 식민주의 의식이 지금까지도 전파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끔찍하게 들렸다.

한국전쟁과 북한의 빈곤은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이야기를 넘어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역시 하느님의 뜻이었으며,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한국의 경제 발전이 있을 수 있었다는 망발을 하는 사람들이 단지 그 개인의 차원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미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구나, 싶었는데 그런 미친 소리를 슬그머니 돌려 말하며 그것을 진리인것처럼 믿고 있다니 이 참담한 현실이 진짜인가 싶어진다.

 

어렸을때 즐겨읽었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흥미로웠었다. 우리의 시조인 단군신화와 웅녀이야기는 그 자체가 진실이라는 것을 떠나 하나의 은유로써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겨있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역사적인 의의에 대해서는 그저 역사학, 고고학자들의 몫이려니 생각했었는데 우리의 고대 기록까지 무시하고 왜곡하며 역사를 바꾸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의 행태를 접하니 정말 그들은 재한일본인이 맞구나 싶어진다.

임나일본군설과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는 얼핏 지나가는 이야기들로만 들었는데 우리 역사의 기록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유물로 인해 일본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이 모든 것들이 교묘하게 뒤집히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정말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한때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덕일님의 역사인식에 좀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흘려들은 기억이 있다. 기존의 역사에 대해 주관적으로 일반적인 상식을 뒤집듯 뒤집어 헤집는다는 것처럼 느껴졌었는데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알 것 같기도하다. 처음 책을 펼치면서 '전쟁중인 두 사관'이라는 소제목을 볼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일제식민시대의 잔재처럼 남아있는 식민사관의 청산에 대한 이야기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오히려 여전히 득세하고 활개를 치고 있는 식민사관과 그 추종자들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어서 답답하기만 하다.

식민사학자인 이병도와 그 계보를 잇는 식민사학자들의 학문권력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민족사학자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단순히 편협한 민족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보기 위한 것임을 절감해야하겠다.

책의 내용은 나의 짧은 설명으로 요약하기가 쉽지 않다. 책의 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아니라 내 감정만 쏟아넣은 것 같아 망설여지지만 여전히 사상의식적으로 식민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을 직시하고 하루빨리 식민사관을 몰아내고 식민사학자들이 활개를 치지 못하게 해야함은 지금 우리의 사명임을 인식해야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덧. 며칠 전 한겨레 신문에는 이 책에 실명이 언급된 김현구 교수가 자신의 학설을 왜곡하고 있다며 책의 판매중지가 없다면 고소까지 불사하겠다는 글이 실렸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여전히 공개토론을 제안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 심히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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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한꺼번에 다 읽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직 세 권은 래핑도 뜯지 않은 상태이고, 우리의 취향은 첫 장에서 어, 이건 뭐지? 하다가 지금은 글에 쏙 빠져들어가고 있다. 무..물론. 어머니 모시고 병원왔다갔다하느라 오늘은 엉뚱하게도 이덕일의 식민사관에 대한 글을 신 나게 몇쪽 읽고 멈춘 상태이긴 하지만.

엊그제 책을 담으러 방에 들어갔다가 책탑이 무참하게 무너진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정리는 커녕 겨우 책탑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무너질까봐 조그맣게 옆쪽으로 또 다른 책탑을 쌓아올리고 황급히 빠져나오고 말았다. 거기에다 나는 오늘도 천일야화 박스를 담아넣고, 무려 예약주문으로 사놓고는 읽지도 않은 책들을 마구 집어넣고 도망쳐나왔다. 그리고 오늘. 책주문을 해야하는데 못했다고 기웃거리고 있으니 아마 미쳐도 단단히 미쳐분거 아닐까..싶은 생각이 든다. 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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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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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적의 세기, 라는 뜻 안에는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 담겨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기적의 세기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SF와 지구 환경에 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러한 내용을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이라는 것에 더 중점을 둘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의 시간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소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면서 하루의 길이가 달라지는 '슬로잉' 현상이 나타나면서 지구에서의 시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수많은 것이 조금씩 엉켜가기 시작한다. 하루가 몇 분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스물네시간, 칠십시간... 밤 낮을 구분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밤낮의 구분없이 기존의 24시간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학교생활을 비롯한 모든 일과가 이루어지게 된다. 해가 내리쬐고 있는데도 커튼을 내리고 잠을 청해야 하고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데도 등교를 위해 길을 나서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에 반발해 리얼타임을 따르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 사람들은 점차 고립되어 간다.

 

"슬로잉으로 인해 친구간의 우정이 흔들리거나 연인 사이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등 미묘한 감정의 행로에 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슬로잉 탓에 내 사춘기가 어땠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내 사춘기는 지극히 평범했고, 내가 느낀 고통은 누구나 경험하는 흔해빠진 것이었으리라. 우연이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어쩌면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 모두가 슬로잉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55)

그런 혼돈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와중에도 소녀 줄리아는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는데, '슬로잉'은 그녀에게 실생활의 변화뿐만 아니라 친구관계, 가족의 유대감도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슬로잉이 진행되고 있는 불안정한 시기에도 소녀의 첫사랑은 싹이 트고 무너져내려가기는 하지만 일상에서의 행복도 느끼게 된다.

슬로잉이 아니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슬픈 사건들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험난한 항해였다. 힘든 여정이 늘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132)

 

사실 조금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춘기 소녀의 풋사랑이 담겨있는 성장소설을 공상과학이라는 장르로 표현한 독특한 소재의 청소년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삶과 죽음, 인간의 본성과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관계들...그리고 지구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환경파괴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지구환경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많이 접해봤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슬로잉이라는 표현처럼 지구가 조금씩 현재의 환경을 무너뜨려가면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갈수록 더 끔찍한 미래를 예상하게 되는데, 그 변화가 일상 생활에서의 구체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기때문에 진지하게 현재의 삶과 미래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한때 익숙했던 것이 점점 낯설어졌다. 우리의 해가 정해진 시간에 뜨고 졌다는 사실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내가 한때 외로움도 수줍음도 덜 타는 행복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에 대해서는 언제나 신화가 덧입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조금만 비틀면 비정상으로 바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에는 새로운 생활이 김하게 생각되었지만, 얼마 안 있어 옛날 생활이 기묘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147)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나 온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다들 그렇게 기적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고, 간혹 기묘하게도 느껴지는 그 옛 시간들은 신화처럼 과장되고 슬그머니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실제처럼 믿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일년 삼백육십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하루의 생활이 지속되고, 한때 행복한 소녀였다는 기적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지금의 이 시간도 역시 기적의 시간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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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잭과 콩나무 애덤 기드비츠의 잔혹 판타지 동화 2
애덤 기드비츠 지음, 서애경 옮김 / 미래엔아이세움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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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새로 쓴 동화이야기라고 해도 잭과 콩나무는 내 관심을 벗어난 이야기다. 아니, 이야기였다. 단편동화가 왜 이렇게 두툼한가,라는 생각은 당연하게 이 책이 단편동화모음집이라는 생각을 하며 어머니 모시고 병원에 가는 동안 시끄럽고 번잡한 대기실에서 가볍게 읽기에 괜찮을듯하여 챙겨들고 나갔었다. 그런데 선입견을 무참히 깨버리고 이 책은 정말 흥미로움을 주고 있다. 아, 물론 아이와 함께 읽을 일이 없으니 이 책이 얼마나 어린 친구들까지 읽을 수 있을까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하며 책을 읽을 수 있는 나이라면 함께 읽어보고 그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무척 재미있는 독서활동이 될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위험한 잭과 콩나무는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수많은 동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나도 가끔 인용하며 쓰곤 했던 성경말씀으로 시작되는 글은 이 책에 대한 기대치를 또 다르게 해주고 있다.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라는 것은 그 뜻을 생각하며 쓸 수 있기는 하지만 또 누군가는 성경이 쓰여질 그 당시는 청동거울을 쓰고 있어서 지금의 거울처럼 뚜렷하지 않고 모든 사물을 어렴풋하게밖에 비출 수 없어 그런 말이 나온 것이라며 찬물을 확 끼얹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잠깐. 이건 우리의 상상력과 희망에 찬물을 끼얹어버리는 것일까, 아니면 사실을 보여주면서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일까.

위험한 잭과 콩나무는 바로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기나긴 모험 이야기이다.

 

개구리 왕자 이야기로 시작되는 듯한 이 이야기는 공주의 키스로 왕자로 변하여 둘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쪽 다리를 잃은 개구리가 공주를 무서워하며 이십여년을 지내게 되고 왕비가 된 공주의 딸인 공주 질을 만나게 된다. 질은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벌거벗은 채 행진을 하다가 부끄러움에 도망쳐나오게 된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휘둘리며 놀림을 당하기만 하는 잭은 암소 한마리와 작은 콩 한알을 바꿔버리게 되고, 그 후 잭은 질과 개구리와 함께 마법 거울을 찾아 떠난다.

온갖 동화 이야기속의 모험을 거쳐가면서 그들은 지혜와 용기를 쌓게 되고, 마법 거울의 비밀을 알게 되는데....

 

"이건 아주 지혜로운 생각이야.

하지만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변하기 위해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지혜를 얻기 위해서 넓고 거친 세상으로 나갈 때는 조심해야 해. 지혜는 얻기 힘들지. 일단 얻는다 해도 잃기 쉬워. 특히, 넓고 거친 세상으로 떠난 사람이 자기가 달아난 곳으로 돌아올 때에는."(377)

 

'위험한 잭과 콩나무'는 아이들과 함께,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이라도 충분히 동화속의 여러 이야기들을 거치며 모험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책이 될 것이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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