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세기
캐런 톰슨 워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평점 :
품절


'기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기적의 세기, 라는 뜻 안에는 우리의 미래와 희망이 담겨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까?

 

기적의 세기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 이야기로 읽을 수 있는 SF와 지구 환경에 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러한 내용을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이라는 것에 더 중점을 둘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 크지만.

어느 날 갑자기 지구의 시간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소녀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면서 하루의 길이가 달라지는 '슬로잉' 현상이 나타나면서 지구에서의 시간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수많은 것이 조금씩 엉켜가기 시작한다. 하루가 몇 분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스물네시간, 칠십시간... 밤 낮을 구분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불가능해보인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밤낮의 구분없이 기존의 24시간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그에 따라 학교생활을 비롯한 모든 일과가 이루어지게 된다. 해가 내리쬐고 있는데도 커튼을 내리고 잠을 청해야 하고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데도 등교를 위해 길을 나서야 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그에 반발해 리얼타임을 따르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하고 그 사람들은 점차 고립되어 간다.

 

"슬로잉으로 인해 친구간의 우정이 흔들리거나 연인 사이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등 미묘한 감정의 행로에 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슬로잉 탓에 내 사춘기가 어땠다는 식으로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내 사춘기는 지극히 평범했고, 내가 느낀 고통은 누구나 경험하는 흔해빠진 것이었으리라. 우연이란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경우는 흔하다. 어쩌면 나와 내 가족에게 일어난 일 모두가 슬로잉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럴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는다."(55)

그런 혼돈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와중에도 소녀 줄리아는 학교생활을 이어나가는데, '슬로잉'은 그녀에게 실생활의 변화뿐만 아니라 친구관계, 가족의 유대감도 조금씩 허물어져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슬로잉이 진행되고 있는 불안정한 시기에도 소녀의 첫사랑은 싹이 트고 무너져내려가기는 하지만 일상에서의 행복도 느끼게 된다.

슬로잉이 아니었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슬픈 사건들도 있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현재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어린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은 그 자체가 험난한 항해였다. 힘든 여정이 늘 그렇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132)

 

사실 조금은 가볍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사춘기 소녀의 풋사랑이 담겨있는 성장소설을 공상과학이라는 장르로 표현한 독특한 소재의 청소년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 삶과 죽음, 인간의 본성과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인간관계들...그리고 지구환경의 오염으로 인한 환경파괴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완전히 무너져버린 지구환경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많이 접해봤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슬로잉이라는 표현처럼 지구가 조금씩 현재의 환경을 무너뜨려가면서 인간의 삶을 변화시키고 갈수록 더 끔찍한 미래를 예상하게 되는데, 그 변화가 일상 생활에서의 구체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기때문에 진지하게 현재의 삶과 미래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된다.

 

"한때 익숙했던 것이 점점 낯설어졌다. 우리의 해가 정해진 시간에 뜨고 졌다는 사실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내가 한때 외로움도 수줍음도 덜 타는 행복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지나간 시절에 대해서는 언제나 신화가 덧입혀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조금만 비틀면 비정상으로 바뀐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에는 새로운 생활이 김하게 생각되었지만, 얼마 안 있어 옛날 생활이 기묘하게 느껴졌다는 것이다."(147)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나 온 과거를 돌이켜 본다면 다들 그렇게 기적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고, 간혹 기묘하게도 느껴지는 그 옛 시간들은 신화처럼 과장되고 슬그머니 왜곡된 기억을 갖게 된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실제처럼 믿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일년 삼백육십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하루의 생활이 지속되고, 한때 행복한 소녀였다는 기적의 시간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는 지금의 이 시간도 역시 기적의 시간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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