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특별히 기억하고 있는 버스 기사 아저씨가 있다. 먼저 기억에 남는 것은 친구의 아버지.
내 친한 친구의 아버지는 시외버스를 운전하셨다. 가끔 친구집에 놀러가곤 했었지만 부모님의 직업에는 무관심했던 내가 그걸 알게 된 것은 친구 오빠의 결혼잔치때였다. 결혼식 전날 집에서 잔치를 하는 관습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다음날 결혼식을 위해 늦은 시간에는 방문하지 않는 것이 예의였기에 음식도 다 정리하고 일손을 거들던 나도 슬슬 집에 오려고 할즈음 친구 아버지 손님이 오셨다. 뒤늦은 상을 차리느라 치워버린 음식을 다시 꺼내고 약주까지 마련하고 한숨 돌리며 친구에게 눈치없이 '너무 늦게 오신거 아냐?'라고 해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친구는 아버지 직장 동료분이셔서 이해를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배차운행을 다 끝내고 오시느라 늦을 수 밖에 없었고 도저히 그냥 지나칠수는 없었기에 그 시간에나마 결례를 무릅쓰고 오신거라고.

그게 벌써 이십년쯤 전의 이야기이다. 지금도 버스기사님들의 고된 노동에 대한 댓가가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옛날엔 어찌했겠었는가. 지금 이 책을 읽으니 새삼 그때의 일이 떠오른다. 늦은 시간에 아들의 혼인을 축하해주러 오신 직장 동료를 유난히 반기시던 친구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버스 기사 아저씨의 이야기는 십여년쯤 전, 집에 오려고 막차를 탔을때 그 차를 운전하던 아저씨의 이야기이다. 정류장에 세워진 버스에 올라타며 차비를 내려하는데 기사 아저씨와 정답게 얘기를 하던 앞자리의 아가씨가 말을 멈추고 나를 멋쩍은 듯 쳐다보는것이었다. 말을 하느라 고개를 돌렸을 땐 몰랐는데 나를 쳐다보는 그 얼굴을 바라보니 친구의 언니였다. 기사분과 아는 사이인가? 라는 생각만 하며 언니에게 인사를 하고 뒤쪽의 좌석에 앉았다. 그런데 집까지 가는 길에 간혹 쳐다보면서야 깨닫게 된 것이었는데 친구 언니와 기사아저씨가 너무 다정스럽게 얘길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내가 탄 버스는 친구의 집과는 반대방향으로 가는데 언니가 계속 버스를 타고 있어서 서로 좋아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후 얼마 안되어 친구언니는 결혼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의 일을 떠올리곤 했다.
좋은 자가용을 타고 드라이브를 하거나 분위기 좋은 까페에서의 연애만이 최고는 아니라고. 그때 친구언니의 그 행복해보였던 미소와 기사 아저씨의 선량한 얼굴이 겹치면서 멋진 연애를 하던 친구언니를 떠올리면 괜히 나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더랬다.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행복해보이지만, 이 책을 읽은 내 마음 한켠에는 왠지모를 서글픔이 올라온다. 맘 편히 쉬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버스 기사의 연애는 이백원짜리 자판기 커피라도 뽑아들고 시내 가까운 공원이나 바닷가를 거니는 것조차 사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저자가 털어내고 있는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내가 겪었던 이야기들일까.. 감탄까지 하면서 읽었는데 책을 읽기 전과 달라진 것 하나는 그런거다. 내 입장에서만 이해하던 이야기들이 이제는 기사 아저씨가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로도 이해할 수 있게된 것.

작년에 버스 파업이 있었고, 시에서 엄청난 보조를 해 줬음에도 결국 버스회사는 문을 닫아버리고 학생들과 자가용을 굴리지 못하는, 힘없고 돈없는 이들만 이동에 어려움을 겪었었다. 나같은 경우엔 급하면 택시를 타버리면 되는 것이고 술렁술렁 걸으면 그만이지만 걸음도 힘들고 버스도 잘 다니지 않던 촌에 살던 어르신들은 집으로 가려면 한시간이나 버스를 기다려야 했던 때였다.
그때 월급을 받지 못했다고 차량 운전을 거부하고 파업을 하던 기사들을 많은 사람들이 비난했었는데 나는 그나마 시에서 보조받은 것을 사장이 가로채고 기사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아서 생활비조차 없는 기사들의 어려움을 얘기하곤 했다는 것이 이책을 읽으며 겨우 한줄기 위안이 되어주었다.

버스를 타지 않게 된지 거즘 1년이 되어간다. 걸어서 출퇴근을 했었는데, 이젠 날씨가 너무 더워 아침에도 걷기가 힘들다. 그래서 내일부터는 여름 한 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해볼까.. 생각중이다. 거즘 1년만에 버스를 탄다, 생각하니 괜히 설레인다. 지금의 나는 '거꾸로 가는 시내버스'를 읽었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은 운전하시는 분들을 이해하게 되었으니 버스를 타는 시간이 어떨지... 살짝, 아주 살짝 기대되기도 하고......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9-07-0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쓴 안건모입니다. 리뷰를 쓴 분들에게 뒤늦게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 책을 좋게 평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버스 기사들의 실태가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알았는데 특히 아이들하고 친했지요. 어떤 아이는 제 차를 기다리느라 한 시간씩도 기다린 아이도 있었습니다. 지금 그 아이들 가운데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 가끔 만나고 있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벌써 그 아이들이 27살이 됐지요. 정말 따뜻한 기억들입니다.
저는 지금은 월간 <작은책>이라는 진보 월간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노동운동에서 언론 운동, 문화운동으로 바꾼 셈이지요. 노동자들 소식을 전하는 책입니다. 사이트에도 들어 오셔서 어떤 책인지 구경하시고 작은책도 널리 퍼뜨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한달에 한번 글쓰기 모임도 하고 강연도 있고 <역사와산> 이라는 모임에서 다달이 산도 갑니다. 혹시 가까우면 참석하셔서 같이 활동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www.sbook.co.kr
02-323-5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