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이방인처럼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참여하지 않은 채 그냥 관찰만 할 수 있는 이방인처럼 말이죠. 아마 내가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자유를 온전히 받아들일 용기
지금껏 태어나서, 누군가를 증오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증오하는 데 에너지를쓰고 싶지 않았다. 정말 미운 사람이 있어도, 무시하고 피하는 쪽을 택하며 살았다. 그러니 미움이 증오로 바뀔 틈이 없었다. 그럴 새가 없었다. 그냥 미움은 미움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져갔다. 이게 내가 싫은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좋고 즐거운 일로만 인생을 채우기도 아까운데, 미움과 증오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미치도록 증오해주고 싶은 사람이 내 인생에 침입해 들어왔다. 피하고 싶었지만 피할 수 없었고, 도망가면 쫓아와 마음에 상처를 주고 갔다. 그냥 잊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미치도록 도망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내 삶의 모퉁이 뒤에 숨어 있다가 불쑥 나타나 심장에 칼 하나를 꽂아 넣었다. 도망가면 어느새 나타나 심장을 도려내고, 피하려 하면 쫓아와 마음을 난도질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을 향해 증오라는 감정을 갖게 되었다. 증오의 감정을 안고 지내다보니, 가만히 있어도 구멍난 항아리처럼 에너지가 줄줄 새어나갔다.
증오의 감정이 내 가슴 한켠을 차지한 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쑥불쑥 그 감정이 치밀어오를 때마다, '지금 여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틈만 나면 말했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라고. 그리고 나를 달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곤 했다. 떠나는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참고 지내기도 했다. 증오의 감정이 마음에서 요동을 치면,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여행을 했다. 벗어나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서 떠나기도 했다. 그렇게 떠났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그럭저럭 얼마간은 버틸만했다. 그렇게 증오의 감정을 눌러가며 살았다. 그게, 더러운 감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
내가 바란 것은 자유가 아니라, 그저 증오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자유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던 거다. 아니, 자유를 원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진짜 자유는 아니었다. 어쩌면 진정한 자유는 원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것이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자유를 준다고 해도, 온전히 받아들일 용기도 없을 거다. 말로 하는 자유, 부러움에 가득찬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자유를 선택한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워야 하는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자유를 선택하지 못하고 자유 쪽으로 움직여가지 못한다. 이건 용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우리는 대부분 것짓 자유, 마취약 같은 자유만 바랄 뿐 진짜 자유는 무서워하게 마련이다. 발리의 쿠데타에서, 스톡홀름 슬로센의 어느 카페에서 가짜 자유로 나를 위로하며 하루하루를 참아내며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나라는 나약한 존재다. (234-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