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그림을 잘 그려봤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림을 잘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한 것인지라 생각만큼 그림 실력이 좋아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우선 사물의 특징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안목을 키우기 위해 일러스트 따라그리기를 해보곤 했다. 그런 내게 딱 알맞은 [그림 그리기 사전]이 선물처럼 주어졌다.

 

간단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보는 순간 내가 알고 있는 불독과 페르시안 고양이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그림,이라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초보단계인 나는 그저 따라하기 수준인 것이지만 그래도 보이는 것을 정확히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세밀한 관찰을 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본다고 제대로 그려낼 수 있는 것일까?

따라쟁이로만 지내오다가 문득 뭔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더 대단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어린왕자도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그 말은 한 소녀의 감성을 표현해 낸 [아이사와 리쿠]를 읽다보면 조금 더 마음에 와 닿기도 한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 듯 ...  눈물을 흘릴 수 있다"

무심한 듯 내뱉고 있는 첫 대사와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아이사와 리쿠의 모습은 도무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알수가 없었다. 그리고 조금 더 읽어나가기 시작하면서 요즘말로 '중2병'이라고 하는, 그런 세상 부적응아 같은 아이사와의 이야기인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의 아이사와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래, 솔직히 나 역시 아주 냉소적으로 아이사와 리쿠의 이야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했었다. 뭐야, 얘는 정말 내 맘에 안드는 아이야.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강해보이지만 어쩌면 속으로는 너무 여린 친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바람을 피우는 아버지의 여자친구를 혼내주고 싶은 건 아이사와 자신보다 엄마의 마음이 그럴것이라고 생각해 행동으로 나서지만 그 마음은 아무도 몰라준 채 - 아니, 어쩌면 아이사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채 모든 것이 엉망으로 흘러가버리고 마는 느낌이었다.

 

무심한 듯 그려내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스케치와 무심코 내뱉는 듯 한 대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지나가고 있지만, 책을 계속 읽어나가면서 그 인물 묘사와 표현들이 너무도 세심하게 감정선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결국 냉소적인 내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아이사와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마치 수도꼭지를 틀 듯.. 눈물을 흘릴 수 있다"라는 첫마디는 이야기의 끝과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눈물의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카타르시스라는 건 바로 이런 것일꺼야...

 

어쩌면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그려내고 있는 듯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심한 감정선을 보여주는 것, 아니 나는 언제쯤 이런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해 보지만 솔직히 이런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뿐이다.

 

 

그래, 그러고보니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언제나 다윗의 영웅담에만 관심을 가졌었지. 그런 내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혁명가와 같은 시인"의 눈으로 골리앗을 보게 해 준 톰 골드의 '골리앗'이 있다.

 

달빛이 좋은 밤에 물을 마시러 강으로 내려갔다가 물속에 잠겨있는 조약돌을 꺼내어들고 살펴보는 거인 골리앗, 동료에게 줄까 했지만 필요없다는 말에 다시 한번 조약돌을 쳐다보고 물 속 원래 있던 곳으로 집어넣는 세심한 골리앗의 모습은 여섯암마와 한뼘이 더 큰 커다란 몸집을 가졌지만 마음은 순하디 순한 사람일뿐이다. 톰 골드가 그려낸 골리앗은 그런 사람이다.

골리앗을 읽고, 성경을 읽고, 다시 골리앗을 펼쳤다. 처음보다 더 마음이 아려온다. 골리앗이 죄인이라서가 아니라 다윗이 하느님에게 선택되었기에 그는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는가는 하느님만이 아실지도 모르겠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루살렘의 수많은 무죄한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한 이유를 인간인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선택받은 민족이라며 팔레스타인의 영토를 빼앗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선택된 신앙이라며 자신들이 세운 원리원칙을 내세우며 그에 맞지않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테러도 서슴지않는 것이 옳은 일인가. 테러리스트의 뿌리를 뽑는다며 테러와는 관계없이 이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고 죄인처럼 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가.

 

 

이쯤에서 나는 이 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을 향한 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만이 정말 가장 중요한 것일까? 그 말 속에는 어쩌면 우리가 정말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처음 이 책을 펼쳐들면서 왜 하필 살만 루시디에서부터 시작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했을 때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던 베를린 장벽의 철거라든가 중국의 천안문 사태같은 일이 있었던 해라는 의미만을 떠올렸었는데 그건 어쩌면 샤를리 에브도에 실린 무함마드 만평으로 인한 이슬람의 테러와 더 연결이 되는 의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으로 살해위협을 받으며 조지프 앤턴으로 살아야했던 살만 루시디의 삶과 만평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며 만평이 비판의 칼날을 세우고 풍자와 해학이 넘칠수록 적을 만들수도 있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한 눈을 결코 감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기는 하지만 보여지는 모습만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지.

그러니까 IS의 테러가 세상을 흉흉하게 만들어도 모든 이슬람이 폭력적이고 파괴적이라고 믿으면 안된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죄인처럼 수갑을 차고 경찰에 압송이 된다 하더라도 그가 천하의 몹쓸 죄인이라고만 치부해버리면 안된다는 것이지.

그러니까....

 

 

그래, 그러니까 나는 소박하게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소망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뿐이었다. 털복숭이 페르시안 고양이를 잘 표현하고 싶었고, 봄날의 이쁜 꽃그림, 활짝 웃음 짓는 아이들의 행복을 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시절 어린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을 본 순간 나도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라고 생각했던 이후로 여전히 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을뿐이지만 우리가 잘 보지 못하는 중요한 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심한 감정 표현과 세상에 보이지 않는 다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혁명가와 같은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그려내보고 싶은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것은 곧 이 세상의 모습을 직시하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생각과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내가 그림으로 표현해내는 세상은 그런 모습이 담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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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4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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