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동안, 정말 이런 생각을 하면 안된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서서히 내 마음에 떠오른 단어는 '낭만 킬러'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이라는 것은 내 개념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낭만 킬러'라는 말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일을 생업으로 삼을 작정은 아니었어. ... 그러다가 점점 그게 내 정체성이 되었는데 나는 그걸 깨닫지 못했어. 어떻게 알게
됐느냐면, 누군가 내 말을 듣는 사람을 만났는데, 두려움인지 존경인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보여준 반응이 놀랍더라고. 그 사람은 킬러에 대한
반응을 한 건데, 나는 어리둥절했지. 내가 킬러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157)
어쩌다보니, 그러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내가 킬러가 되었어, 라는 말을 하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 켈러는 킬러, 좀 더 격하게
들리는 표현으로는 '살인청부업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는 꽤나 섬세하고 자상한 면을 보여준다.
살인을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있으면서 그는 그런 생각을 한다. "마을을 떠나면서 휘틀록의 신분을 벗어버릴 켈러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지만
진자 데일 휘틀록에게 괴로움을 얹어줄 이유는 없었다. 진짜 데일 휘틀록은 따로 있는데다 켈러는 그 남자를 살인 용의자로 만들지 않고도 충분히
괴롭히고 있었으니 말이다"(55)
켈러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길을 떠나고, 모든 것을 완벽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며 한적한 시골마을에 가면 그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갖는
감성적인 사람이다. 비일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을 하는 살인청부업자의 일상은 잦은 출장을 다니는 직장인이 느끼는 삶의 고달픔과 그리 다르지도
않다.
살인을 하러 갔다가 잘못 전해받은 정보로 엉뚱한 사람을 죽여버리기도 하고, 서로의 살인 의뢰를 받았는데 과연 누구의 의뢰를 받아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엉뚱한 딜레마에 빠지기도 하고, 자살로 위장한 살인 의뢰가 그 당사자의 의뢰인 것을 무서운 예감으로 파고들기도 하고... 좀 더
이야기하면 켈러가 벌이는 하드보일드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나와버릴 것 같아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살인해드립니다 라는 제목에 걸맞게 비정한 킬러의 일상을 그려낸 끔찍한 하드보일드,일까 싶었는데 그 끔찍한 살인의 모습은 희미하게 감춰져
있다. 킬러인 켈러는 시간이 나면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나라없는 남자를 읽기도 하고, 킬러의 이야기가 그려진 이 책에서 새뮤얼 존슨의 말이
인용되기도 한다. 하드보일드한 추리소설인데도 죽은 이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표현해내기도 한다. "고민하며 서툴게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운명의
여신이 모든 것을 그의 무릎에 떨어뜨렸다.(384)라니... 킬러의 잔인함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살인의뢰를 받고 장소와 때를 물색하러 들어갔다가 엉뚱하게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해내는 킬러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켈러가 살인청부업자라는 것에만 신경이 쏠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켈러가 감상적인 인물이라고 해서
킬러가 낭만적일수도 있다거나 비정한 직업을 통해서도 삶의 고달픔과 애환이 있다는 생각따위의 흐름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 동전을 던져서 결정을 내리는 지혜에 대해 생각했다. 제멋대로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쩌면 그게 원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구름 위 어딘가에서도 턱수염을 기른 노인이 똑같은 방식으로 동전을 던진 후 어깨를 으쓱인 뒤, 열차 사고와 심장마비 들을 분해해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지도 몰랐다."(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