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우리 신화"
내륙 땅에서 포용되지 못하고 절해고도 제주로 떠나왔던 금상. 그 형상에는 제주의 역사가 함축돼 있기도 하다. 바람타는 섬 제주. 그곳은 우리 역사에서 서글픈 유형의 땅이었다. 보살핌 대신 빼앗김에 더 익숙했던 곳. 남다른 물산이 많아 오히려 고통받던 곳. 그 뼈저린 역사는 수많은 저항의 영웅을 낳았으니 그들이 그 땅의 수호신으로 좌정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변방 민중의 삶의 역정과 맞닿아 있는 역사적 영웅의 신화, 그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인상 깊은 양이목사 이야기를 만나본다.
제주성 삼문 안에 살던 양씨 성 가진 장수가 조정의 명을 받아 제주 목사가 되니 사람들이 그를 양이목사라 했다. 그 시절, 제주에서는 일년에 한번씩 백마 백필을 한양에 진상했는데 어느 목사를 막론하고 예외가 없었다. 양이목사가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백마를 진상하더니 네 번째 백마 백필을 진상하려다가 딴 마음을 먹었다.
"여태까지 마부들이 진상을 갔다만 이번에는 내가 직접 갖다 바칠터이다"
스스로 말 백 필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가 한양에 이르러서는 장에 나가서 다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물품을 사서 배에 가득 싣고 돌아왔다.
조정에서 목을 빼고 백마 진상을 기다려도 끝내 오지를 않아 사람을 보내 조사를 해 보니 양이목사가 말을 팔아먹고 돌아간 터였다. 조정에서 불같이 화를 내어 금부도사와 자객을 보내 당장 양이목사의 목을 베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양이목사는 그 눈치를 벌써 채고 섬 안에서 제일 빠르다는 고동지 고사공의 배를 얻어타고 나와 금부도사의 배를 기다렸다. 이윽고 바다 한가운데서 낯선 배 한 척이 다가와 고사공의 배에 고물을 갖다 붙이니 금부도사의 배가 분명했다.
"어디로 가는 배인고?"
"제주 양이목사님이 유람가는 배요"
그러자 금부도사가 자객을 이끌고 양이목사 탄 배로 펄쩍 뛰어오르며 말했다.
"나라에 진상하는 백마를 가로챘으니 국법을 받으라!"
먼저 자객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드는데 양이목사가 한 손으로 받아치니 자객이 쥐고 있던 칼이 어느새 양이목사 손에 넘어와 있다. 양이 목사가 하늘에 번개 치듯 칼을 한번 휘두르자 자객의 머리가 간곳없고 몸뚱이만 나무토막처럼 바닷물로 떨어졌다. 다시 금부도사가 칼을 꺼내어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데 역시 양이목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칼을 떨어뜨린 채 무릎을 꿇고서 목숨을 비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양이목사가 천둥같은 소리로 호령을 했다.
"금부도사 들어라. 조정 대신들은 백성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어 잘 살리겠다고 하고 백성은 온 정성을 다해 임금을 모시며 가족처럼 살아보려 하는데, 백성 가운데 불쌍한 것이 제주 백성이라. 일년에 한번씩 백마 백필을 진상하라 하니 임금의 배가 얼마나 크기에 백마를 백 필이나 먹어치운단 말이냐. 임금이 먹는 백마 진상 나도 한번 먹어보려 했더니 불쌍한 제주 백성 생각에 짐승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더구나. 백마 백필을 육지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필요한 물품을 얻어 돌아와 제주 백성한테 준 사람이 바로 나다. 내 한목숨이야 무엇이 아까우랴. 돌아가거든 내가 한 말을 용상에 앉은 임금에게 똑똑히 여쭈어라!"
말끝에 금부도사에게 칼을 내어주니 금부도사가 억수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칼을 휘둘러 양이목사의 목을 뎅겅 잘랐다. 머리 떨어진 몸뚱이가 물결속으로 떨어지자 어느새 청룡 황룡 백룡이 되어 용왕국으로 스며들어갔다. 고사공이 양이목사 머리를 끌어안아 피를 닦고 가다듬어 금부도사 탄 배에 올려놓으니 몸뚱이가 떨어져나가고 머리만 남은 양이목사가 입을 열어 고사공에게 마지막 소원을 말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내 슬픈 역사를 풀어주면 내가 우리 자손들을 만만대대로 지켜주리라"
금부도사가 서울로 올라가 임금에게 양이목사 목을 바치고 모든 사연을 고하니 임금이 크게 깨닫고 제주에서 해마다 백마 백 필을 진상하는 과업을 면해 주었다. 양이목사는 고사공한테 약속한 대로 신이되어 제주로 돌아와 자손들을 길이길이 지켜주게 되었다.
박탈당하고 핍박받는 자들의 설움과 원통을 생생이 간직한, 격정의 파토스가 넘치는 신화다. 마치 이차돈의 죽음과 다시 만나는 것 같은 장면이다. 역사적 배경이나 줄거리만 놓고보면 전설에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다른 어떤 신화 이상으로 생생한 신성성을 지니고 있다. 남의 것일 수 없는 저항과 자존의 몸부림을 온몸으로 보여준 양이목사는 진정한 민중의 영웅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한테 자기를 맡기고 그를 통해 일어서도록 하는 성스러운 힘을 드러내고 있다. 보라, 임금을 향해 내뱉는 저 피끓는 외침을! 몸뚱이를 잃은 머리가 토해내는 피 흐르는 유언을! 터럭만 한 타협도 주저도 없는, 몸으로 외치는 그는 우리 신화에서 만날 수 있는 강렬한 남성성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