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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 매듭은 풀어야제 끊어내는 것이 아니여 (댓글:5, 추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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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0-20 2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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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어렸을 때 우리 동네 왕할머니인 이 할머니가 얽힌 실타래를 풀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습니다. "어머님, 너무 얽혀서 이젠 더 못풀겄그만이라우. 그만 끊읍시다" 하고 며느리가 하소연을 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때마다 왕할머니는 이렇게 대꾸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매듭은 풀어야제 끊어내는 것이 아니여. 끊었다 다시 이은 실로는 바느질을 할 수가 없는 법인께"
얽힌 매듭을 단칼에 끊어낸 알렉산더 대왕의 용단을 기릴 때마다, 저는 하루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얽힌 매듭 풀기에 아낌없이 시간을 쏟던 왕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저에게는 왕할머니가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커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끊어진 실을 이어서는 옷을 지을 수도 이불 홑청을 꿰맬 수도 없습니다. 우리 공동체에도 이런 왕할머니 한 분 모시는 것이 제 가장 큰 소망입니다.
윤구병, 알렉산더 대왕보다 위대한 왕할머니 중에서/ 살아갈 날들을 위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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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소포상자를 풀때 가위가 아니라 송곳만을 사용하던 분을 알고 있습니다. 묶었던 끈을 풀어 재활용하겠다, 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모든 매듭은 풀어지게 마련이라며 시간과 공을 조금 들이더라도 매듭을 꼭 풀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쁜 세상에, 인스턴트처럼 일회성 관계가 늘어만 가는 세상에 깊은 생각하나를 건네줍니다. 편하게 싹둑싹둑 끊어버리면 귀찮고 힘들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쉽게 끊어버리는 가위질이 내 삶에 침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묶인 매듭은 반드시 풀어지게 마련이고, 내가 좀 더 시간과 공을 들이면 못쓰게 되는 끈이 아니라 끊이지 않는 하나의 끈이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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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5)
치잇~! 로드무비님의 글은 버릴게 없쟎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앞다퉈 로드무비님께 보낸 글들을 읽다보니 또다시 로드무비님의 글에 빠져들게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 글이 생각나지 뭡니까...
사실 말이지요... 저는 로드무비님이 '얼굴 뻘게졌다'고 하실 줄 몰랐거든요. ^^
그리고 이 책.. 아시죠? 로드무비님이 제게 주신 거쟎아요. 로드무비님이 주신 책도 읽고, 그에대해 페이퍼도 썼다가 저렇게 추천도 많이 받고요. 로드무비님이야 워낙에 추천을 많이 받으시니 5개정도는 흥~! 하시겠지만 저한테는 엄청난거라구요~ 치잇~!
- 컴이 꺼져버렸는데도 다시 켜서 글을 쓰는 이유는요, 이 리뷰를 올리고 싶어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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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너의 유유자적함에 왜 화가 나는지 (평점:, 댓글:15, 추천: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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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1-03 1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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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시에 일어나 책꽂이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올해의 첫 책, 무얼 읽을까? 새벽 미명에 일어나 앉아 정색을 하고 읽는 책이니만큼 신중하게 고르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허공에서 몇 번인가 헤매이던 나의 손은 결국 <파리의 스노우캣>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파리의 이 골목 저 골목 한가롭게 산보하는 스노우캣 뒤를 열 발짝쯤 떨어져서 어슬렁 딴전부리며 따라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가 다니는 곳은 커피향 낭자한 카페와 미술관, 예쁜 가게가 소소하게 등장하는 뒷골목이 다였다. 스노우캣이 먹다 흘리는 바게뜨 부스러기와 쇼콜라쇼(핫초콜릿) 찌꺼기는 내 입에 너무 달았다. 어디 한국 식당에 들어가 김치찌개라도 한 냄비 시켜 먹었다면 염치불구하고 숟가락 들고 달려들었을 텐데......
<파리의 스노우캣>에는 사람 냄새가 없었다. 그 어떤 자기 성찰도......도움을 많이 받은 친구인지 후배인지가 한 명 나왔지만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스노우캣은 참으로 가배얍게 무심하게 목도리를 친친 두르고 파리 뒷골목을 배회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 커피 한잔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건 아마 사람으로 태어나 꿈꿀 수 있는 최상의 여행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다가 무슨 상점 문짝에 붙은 공연(팻 메스니와 찰리 헤이든) 포스터를 보더니 덜컥 파리 체류를 두 달 연장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무 미련 없이 책장을 덮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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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도 로드무비님의 이 리뷰를 읽으며 뜨끔! 했거든요. 댓글에는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척 헤헤~ 하며 썼지만 괜히 마음이 좀 그랬어요. 여전히 저는 스노우캣처럼 유유자적 즐기는 여행을 꿈꾸고 있지만, 맛깔스런 여행은 그게 아니쟎아~! 라는 걸 다시 생각한답니다.
언니와 파리의 뒷골목을 헤매며 걸어가다가 우리식으로 치자면 호떡집의 호떡(^^ 케밥 비슷한거였는지.. 하두 오래전이라 기억은 안나지만 어쨋건 길거리 음식이었어요)이 먹음직스러워 하나 사들고 먹자고 했었지만 아무도 호응을 해주지 않아 먹지 못했던 그 정체불명의 군것질거리가 자꾸만 생각나는 이유도 아마 로드무비님의 페이퍼로 올릴까 리뷰로 올릴까 고민했던 이 리뷰때문이라 생각해요. ^^
그리고.. 우리가 묵을 집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길을 알려주고 한참을 걸어가다 되돌아와서는 바로 그 집 문앞까지 데려다 준 아저씨를 기억하게 한 것도 로드무비님의 이 리뷰랍니다.
우리를 재워준 집 주인아줌마가 나중에 얘기해 준 것은, 그 아저씨는 아마도 그 동네의 아랍계 주민일 것이고 프랑스 사람들의 인종차별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늦은 시간에 길거리를 헤매는 동양인 4명이 걱정되어서 같이 와 준것일꺼라더군요. 똘레랑스니, 프랑스인의 자부심이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그 안에는 역시 그들의 모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옛날의 느낌을 다시 떠올려줬지요.
사람냄새, 자기 성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물론 저는 여전히 스노우캣처럼 낭만적인 여행을 꿈꾸며 살고 있기는 하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