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에 발표된 그의 세번째 소설 <토성의 고리>는 고대 왕국이 있던 영국 동남부 지방을 여행한 후 쓴 문화고고학적인 여행기 같은 작품으로 가슴을 죄어오는 진지한 비가의 어조로 문화와 문명, 자연과 인간의 역사를 종횡무진 넘나든다. 여행한 지역의 인물과 사건, 사물에 얽힌 과거와 지금의 현재를 차분하게 직시하면서 매혹적인 사유를 펼친다.

  

여행준비에 들떠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음은 들떠있지만 준비에 들떠있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가기전에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책상위에 겹쳐 쌓여있고, 여유를 두고 처리해도 되는 일들이 앞당겨지면서 관련 자료를 여기저기 빨리 받아내느라 전화질을 해대고 일 마감을 해버리고 있는 중이다. 그 마무리 해야 할 일들 중에는 여행을 가기 전에 끝내야 하는 책들이 있는데... 

이건 도무지 그렇게 술렁거리며 후다닥 읽고 넘어갈 책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려한다. 

그래도 읽고 있던 책이라 어쩔 수 없이 책읽는 속도를 내고자 점심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예전의 좀 더 비위가 약한 나였다면 속이 울렁거려서 정신이 없었겠지만 나는 꿋꿋이 밥을 먹으면서 책을 읽었다. 아니 어쩌면 갈수록 무덤덤해지는 세상의 일들에 대해 완전히 무뎌져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원열람실에서 발견한 제1차 세계대전 화보집의 사진들에서 촉발되어 70만명의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하게 살해된 야세노바크 수용소, 우스타샤 수용소에 대한 문서를 추척하고 기록한 과정을 담은 4장의 글과 사진에서 우리는 전쟁과 대학살의 흔적에 가시지 않는 섬뜩한 전율을 느낀다.: 

사진이 흑백이라 다행이다. 그리고 내용을 읽으면서 사진을 대강 넘겨버렸기에 다행이다. 하지만 그 어렴풋한 형상때문에 더 각인되듯 마음에 남아버리고 있는 것은 불행이다.
책을 읽기 전에 아무런 생각없이 소설,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도대체 나는 책소개의 무엇을 보고 그리 생각한것일까? 
토성의 고리,라는 책 제목때문에 뭔가 낭만적이면서 환상이 섞인, 그런 비현실만을 떠올렸던 것일까?
새 책의 냄새가 화학약품과 같은 향을 뿜어대고 있는 것 같고, 책의 내용은 이해할 듯 말 듯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책을 읽는 동안 너무 많은 생각들이 나고. 나는 단순히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 오히려 더 낫겠구나, 싶은 자멸을 하고 있고. 

5장. 콘래드와 케이스먼트 - 소년 테오도르 - 볼로그다에서의 망명생활 - 노보파스토프 - 아폴로 코르제니오프스키의 죽음과 매장 - 바다생활과 사랑생활 - 겨울 속의 귀향 - 어둠의 심연 - 워털루의 파노라마 - 케이스먼트, 노예경제, 그리고 아일랜드 문제 - 반역재판과 처형. 

무심코 책장을 넘길 수 없는 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목차만을 봤을 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함인지 알수없다. 이건 내 수준을 넘어서는거잖아! 라고 불평만 해댈 건 아니다. 그는 글을 어렵게 쓰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을 다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글의 흐름이 낯선것은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모르는 나의 무지의 탓이다. 
"총 10장으로 구성된『토성의 고리』는 제발트의 전작들처럼 사진이 삽입되어 있다. 작가 본인이 직접 모은 이 사진들은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제발트의 글에 사실성을 강조해준다. 하지만 작가가 풀어놓는 이야기가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부터 허구인지 면밀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제발트는 현실과 허구, 문학과 자전적인 글, 실제 사진과 허구의 사진, 실제 인물과 허구 인물들을 뒤섞어놓아 작품 전체에 존재론적인 불안을 부여하고 있으며 역사적 지식을 구성하는 지각의 틀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자 한다." 라는 설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가볍게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여행에 들뜬 마음으로 이 책을 집어든 것을 후회하고 있을뿐이다. "코르제니오프스키는 그의 고모에게 이렇게 쓴다. 이곳의 모든 것이 싫습니다. 사람들도, 사물들도 모두 싫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싫군요. 아프리카 업체들과 상아 상인들은 비열한 본능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기 온 것이 후회되는군요. 그것도 아주 비통하게."(146)  

나는 그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 후회될뿐이다. 아주 비통하지는 않지만, 여행전야의 들뜬 설레임이 사라졌을 때 다시 한번 진중하게 이 책을 꺼내 읽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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