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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18)

언젠가 친구가 내게 그런 말을 했었다. 뭐라고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나는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가면서 쌓인 추억들로 인해 미래가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그 말을 들은 후 가끔 생각하게 되곤 한다. 내게 있어 인생이란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이 아니지만 나의 옛 기억들을 떠올리면 슬프고 힘들었던 일들보다 행복했던 추억들이 먼저 떠올라 나의 불행한 인생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으니 난 충분히 행복하다고.

사실 내게는 소중히 간직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만한 물건이 없다. 누렇게 변색되어가는, 이제는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옛책들이 있다고 하지만 정말 귀중한 고서적을 갖고 있는 이들에 비할바가 못되고. 로마의 어느 시골길을 달리다 잠시 쉬어가는 길에, 직접 흙으로 빚어 오카리나처럼 소리가 나는 투박하고 못생긴 손피리를 하나 사고 좋아했었지만 깨지지 않게 옷에 잘 넣어두었다가 옷과 함께 도둑맞아버려 사라졌고. 어린시절부터 나의 일상과 고민, 거창하게는 사상까지 정리하며 기록한 수십권의 일기장은 어느 한순간 내 마음의 변덕으로 인해 한줌의 재로 사라져버렸고.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늦깎이 유학생이 경험한 독일 이야기와 예술에 대한 애정이 녹아 있는 산문집이다. 유학생활 틈틈이 벼룩시장이나 앤티크 시장을 찾아다니며 고서, 그림, 램프, LP 음반, 습도계, 편지 개봉칼, 무쇠촛대, 타자기, 펜촉, 진공관 라디오 등 오래된 사물들을 모으며 저자는 오래된 사물들을 ‘초현실적인 예술의 오브제’ ‘삶 속의 예술작품’으로 규정하고 독일 유학담과 함께 미술, 디자인, 문학, 음악 이야기를 총 29편의 꼭지로 풀어놓고 있다.

가치의 기준을 객관적으로 따진다고 한다면 더더욱 내게는 소중하게 간직한 오래된 물건이 없다. 하지만 몇년 전 우연찮게 독일의 행사장에서 일행과 떨어져 혼자 두리번거리고 다니다 긴 기다림끝에 얻게 된 철십자가처럼 나만의 소중한 것은 많다. 소형대장간을 옮겨온 것처럼 풀무로 불을 일으키고 불에 달군 철십자가를 쇠망치로 두드려 무늬를 내 그걸 기념으로 내어주던 그들은 장시간의 고된 노동에도 힘든 표정없이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이들에게 독특한 체험을 하게 해 주었다. 종교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고 이 철십자가는 내 손으로 망치를 두드려 무늬를 넣은 나만의 십자가가 되었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또한 그것은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또 다른 나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독일 유학시절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짧은 여행을 다녀온 곳일뿐이지만 내게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았고 독일에서의 나의 추억도 한가득 퍼올릴 수 있었다. 내가 간 그곳에서는 팔월이 되면 들판에서 피어난 각종 들꽃을 모아 선물해주는데 한해동안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고 들었다. 우리의 옛 선조들이 야생초를 약초로 쓰던 그 지혜가 독일에도 똑같이 약초의 의미로 야생화를 선물해주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했고 아름다운 야생화 꽃묶음이 너무 아름답기도 해서 그걸 잘 말려 다이어리에 넣어두었다. 그걸 볼 때마다 그때 만났던 이들의 행복하고 즐거워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도 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한동안 잊고 지냈었는데 오랜만에 방구석, 장농위 여기저기에 박혀있던 내 창고박스를 열어보게 되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저마다의 사연과 추억을 담고 있는 사물들을 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이 저자의 오래된 사물을 통한 예술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과 더불어 내가 받은 또 하나의 선물이다.

"오래된 진공관 라디오 안에는 구들장이 놓여 있을 것만 같다. 라디오 스위치를 누르면 구들장이 데워지듯 따스한 소리가 나오고, 내 집에 놀러온 사람들도 따스한 소리에 반하여 그 앞을 떠날 줄 모른다. 세월의 부침에도 변하지 않고, 변해가는 것들 속에 여전히 따사로운 소리를 내는 라디오가 있다. 내 마음의 방에도 저런 라디오를 하나 들이고 싶다. 그리하여 한 오십년쯤 라디오처럼 한결같은 사랑의 소리를 내고 싶다. 오래된 사물에는 아직 우리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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