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렁이가 몸을 풀고 새끼 열두 마리를 낳았다. 그 중에 넷이 죽어버렸다. 걱정스러워서 매일 같이 아기들의 수를 세고 있다. 좀 상한 고기나마 푹 고아서 어미에게 먹이고 밥통에 우유도 부어준다. 왜 죽어나갔는지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젖이 여덟 개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덟 마리만 남았을까? 나는 요즘 누렁이 친정엄마 노릇을 하고 있다.

지난 8월 9일 교구는 사제의 해를 마감하는 미사를 내가 살고 있는 마리아탈(Mariathal) 본당에서 봉헌하였다. 큰 주교좌성당을 두고 하필 시골에서 이런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는지 의아했다. 그런데 이곳은 남아프리카의 첫 흑인 신부가 일했던 곳이고, 그가 잠들어 묻힌 곳이다. 나는 이곳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사실 이런 의미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남아프리카에서 신학생을 처음으로 로마에 보낸 것은 마리안힐수도회의 창립자인 프란치스 판너 아빠스였다. 그 때가 1887년이었고, 이후 세 명의 소년들이 차례로 로마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남아프리카의 첫 방인사제는 ‘에드워드 뮬러 음강가’였다. 그는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고 돌아왔다. 그토록 지적으로 탁월했던 것이다. 하지만 조국으로 돌아온 그 이후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다. 백인 선교사들의 질투와 시기 때문에 그는 17년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야했다. 깜둥이 주제에 신부면 족하지 박사학위까지 따서 돌아온 점부터 무척 못 마땅했던 모양이다. 긴 유배를 마치고 돌아왔어도 그의 인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고달팠다. 나머지 세 명의 후배신부들의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창립자께서는 아프리카 소년들에게 무엇을 보았기에 그를 로마로 보냈을까? 그리고 로마로 떠나던 소년들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1991년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무척 절망스러웠다. 앞이 캄캄하고 하늘은 노랬다. 그 때 효선 수녀님이 찾아와 혹시 신부가 되고 싶냐고 물었다. 효선 수녀님은 왜 나를 꼽았을까?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어떤 마음으로 나를 아프리카로 보냈을까? 2006년 나는 위기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미래가 막막해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박청일 신부님은 편한 마음으로 본당에 와서 나를 도와달라며 이끌어주셨다. 신부님은 왜 나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돌아보면 신기한 일들, 아니 신비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남아공 첫 흑인사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에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나 우리는 시골의 한 구석에 묻혀 누구도 관심두지 않았던 무덤 앞에서 사제의 해를 마감하였다.

시기와 질투는 두려움의 자식들이다. 흑인 동료들의 열정과 학식이 두렵지 않았다면 백인 신부들의 시기와 질투도 없었을 것이다. 뮬러 음강가 신부를 17년씩이나 정신병원에 가둔 것은 유럽인들의 일그러진 두려움이었다. 갑자기 전종훈 신부님이 생각이 났다. 지도자들은 흔히 정의를 두려워하고 부담스럽게 여긴다. 그 대가를 마음 착한 사람들이 짊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 역사다. 교회는 ‘교사요 어머니’라고 했다. 그런데 왜 장상들은 벌주는 교사의 얼굴만 기억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상은 잊어버렸을까? 
 


김인준 신부/남아프리카 마리안힐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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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6 23: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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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7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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