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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지 않는 세계
김아직 지음 / 북다 / 2023년 10월
평점 :
"어쩌자고 또 밤인가."
첫 문장부터 심상찮은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책을 다 읽고난 후 다시 읽어보니, 중세의 암흑기를 과거의 역사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자고 또 밤,인가. 중세의 마녀사냥은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로만 넘길 수 있는 이야기인것인가, 묻고 있는 듯 하다.
소설의 배경은 안드로이드가 고도로 발달한 세계다. 창조주인 신의 피조물 인간의 유일성에 도전하는 안드로이드의 존재를 거부하는 근본주의자들과 그에 맞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는데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찰과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의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하고 있다.
은퇴한 사제 레미지오는 요양촌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노쇠한데다 치매 증상까지 있는 레미지오 신부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어느 밤에 병자성사를 청하는 자매의 전화를 받고 길을 나선다. 뭔가 미심쩍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성수를 뿌리며 병자성사를 주지만, 병자성사를 받은 루치아라는 자매는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에게 성사를 집행한 레미지오 신부는 성사가 무효임을 외치지만 이미 루치아는 '엑스 오페레 오페라토'를 외치며 성사가 유효함을 주장한다.
성사를 받고 천국으로 갈 수 있을것이라고 하던 루치아는 사라져버리고 안드로이드에게 성사를 집행하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한 레미지오 신부는 은퇴사제 요양촌 책임자인 유안석 몬시뇰에게 그 사실을 고백한다.
인간형 로봇의 제작을 반대하는 가톨릭 보수단체 '호르투스데이'의 핵심 인물인 유안석은 그가 후견하는 김제이를 통해 루치아를 추적하여 없애려하는데......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판단을 하며 인간화되어가고 인간은 불로불사에 가까워지려는 것처럼 소멸되어가는 육체를 기계로 연명하며 기계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주며 인간성의 본질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하고 있는 이 소설은 철학적인 문제제기가 전부인 어려운 소설은 아니다. 천국을 염원하는 안드로이드 루치아를 뒤쫓는 김제이의 형사물 같기도 하고, 또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어머니와 신학생인 동생을 위해 유안석 몬시뇰의 개인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김제이의 존재에 얽힌 미스테리함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이며 이야기는 흥미로움을 끌어내고 있다.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과 추격전이 적당히 어우러지며 마지막에 밝혀지는 이야기들이 처음의 시작과 연결이 되며 비로소 '녹슬지 않는 세계'의 의미에 대해 깨닫게 된다. 천국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고민에 빠져보게 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종교적인 의미부여나 해석은 일단 보류해보는 것으로 하고.
다만 잘 짜여진 구성과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 녹슬지 않는 세계를 읽고나니 김아직 작가의 또 다른 소설들이 너무 궁금할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