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의 목숨이 지닌 가치는 밭을 가는 말이나 늙은 당나귀정도에 불과하다는 생각, 이것이야말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수세기에 걸쳐 새로운 피를 주입해 가며 키워 낸 믿음이다. 나는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가족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흑인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우린 우리가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될 때까지 이러한 현실과 홀로 싸워야 한다는 걸, 우리가 죽어 땅에 묻히고 뼈가 썩어 문드러지고 묘비가 세상을 뚫고 무성하게 자라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세상은 우리의 아이들이,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여전히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곳이다. 그 세상은 여전히 흑인들이 올가미에 포획되고, 두 팔을 결박당하고,
굶주리고, 붉은 줄이 그어지고, 강간당하고, 노예가 되고, 살해당하고, 목이 졸린 채 ‘숨을 쉴 수 없어.‘ 라고 말하는 곳이다. 싸움을 이어 가는 내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숨을 쉴 수가 없다고.


나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위장면을 볼 때마다 놀라움에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후드 티를 바짝 조이고, 주먹을 하늘 높이 들고, 행진하고,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직접 ‘목격‘한 것에 대한 증인으로서 행동하고 있다는 사실을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도, 매일, 그들은 같은 일을 목격하고 있다.
그들은 불의를 목격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4백여 년이 넘는 이 빌어먹을 세월 동안 우리를 어떻게 가스라이팅해 왔는지 목격하고 있다.
목격하라, 내가 사는 미시시피주가 2013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하는 수정 헌법 13조를 비준했다는 사실을.
목격하라, 미시시피주가 2020년까지도 주 깃발에서 남부연합기의 로고를 삭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목격하라, 흑인과 원주민, 많은 유색인종들이 차가운 병원침대에 누워,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폐로 힘겹게 마지막 호흡을 내쉬는 모습을. 그들은 오랫동안 부족한 음식, 스트레스,
가난 등에 시달린 탓에 진단명조차 확실치 않은 기저 질환을 앓고 있었고 그래서 이미 생기를 잃은 상태였다는 것도, 그래서 혀끝으로 약간의 설탕을 음미하면서, 맛있는 음식 한 조각을 먹으면서, 그렇게 순간순간 달콤한 것들을 낚아채며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오 주여, 삶은 종종 쓰디쓰니까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맞서 싸우는 것 또한 목격하고, 우리가 발을 들썩이는 모습, 우리 심장이 예술과 음악, 일과 즐거움을 향해다시 한 번 격렬하게 요동치는 모습도 지켜본다. 우리의 싸움을 목격한 사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은 얼마나 인상적인가. 팬데믹이 한창인 가운데도 그들은 밖으로 나가 행진을 한다.
사람들의 물결이 거리 곳곳에 굽이치는 걸 보며 나는 흐느낀다. - P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