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을 치러야만 영원한 정의를 얻는다면, 그리고 그 정의의 대가로 살아 있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런 정의를 위해 싸우지는 않을 거야. 




어떤 물질이든 외부에서 가해지는 열에 의해 온도가올라갈 때 그 물질 고유의 임계점이 있다. 그 지점을 지나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 물이끓는 비등점이 있고 쇠가 녹는 용해점이 있듯이, 정신도똑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행복감 역시 절정에 이르면더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고통, 절망, 굴욕, 혐오,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그릇에 물을 부을 때 가득 차면 더는 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P234

세상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많이 다르지 ‘항상 성실하라, 정직하라!‘라고 배웠지만, 그런 세상이 단 한 번이라도 실현된 적이 있던가? 사람은 꼬리가 잘려 나가도 다시 자라는 도마뱀이 아니야.  - P288

"내 말을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나는 《로테파네 출신이 아니야. 나는 내전이 어떤 것인지,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어. 내눈이 먼다 해도 그 장면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거야. 당시에 적군과 백군이 세 번씩이나 번갈아 가며 그 마을을 장악했는데, 소비에트 군대가 마을을 탈환했을 때 우리를 소집해서 시체를 파묻으라고 하더군.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까맣게 숯덩이가 되어버린 아이들과 여자들, 말들의 시체를 내 손으로 묻었어.
뒤죽박죽 섞여 있는 시체들은 한마디로 지옥 같은 공포그 자체였어. 진동하던 악취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지. 그 후로 나는 소위 내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어. 내전을 치러야만 영원한 정의를 얻는다면, 그리고 그 정의의 대가로 살아 있는 인간을 죽여야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런 정의를 위해 싸우지는 않을 거야. 나는 이제 어떤 일에도 신경 쓰지 않아. 관심도 없어. 나는 볼셰비키에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아. 나는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냐. 나는 아무래도 좋아, 나 자신의 일에만 관심이 있어. 내가 봉사하고 싶은 단 하나의 정부는 바로 나 자신이야. 다음 세대가 행복해지든지 말든지, 공산주의 국가가 되든지 파시스트 국가가 되든지 아무 관심 없어. 내 관심은 오로지 지금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는 것뿐이야. - P292

어쩌면 실제로 제 마음속에 큰 분노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지만………. 저는 아무도 부럽지 않아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잘되어야 하고, 다른 사람은 저보다 못되어야 한다는 식의 질투심은 없습니다. 저는 남의 행복을 시샘하지않아요.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은 남이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면 자신은 왜 그렇게살지 못하는지, 자책하듯 스스로 묻곤 하죠.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저의 행복을 비교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단지, 왜 저는 행복하지 않은지를 생각할 뿐이죠." - P303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돈의 위력을 실감했다. 돈은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없을 때에는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따라서 돈은 ‘자유‘라는 거룩한 선물을 주기도 하지만,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단념해야 할 일이 생기면 분노가 솟구치게 한다. 이른 아침 어둠 속에 앉아 뿌옇게 밝아오는 창밖을 바라볼 때나, 황금빛으로 물든 커튼이 돈 많은 사람에게 안식과 자유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화가 치밀어올랐다. 부유한 남자들은 원하는 여자들과 함께 아름다운 커튼이 쳐진 방안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갈 곳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무거운 걸음으로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자연계에서는 오직 바다만이 내포하고 있는 잔인함과 같은 것이었다. 바다는 엄청난 양의 물을 가지고도 사람을 갈증으로 죽게 할 수 있다. 세상에는 아늑하게 햇빛이 들어오고 폭신한 침대가 있는 조용하고 안락한 방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수십만, 수백만 개의 방, 셀 수도 없이 많은 방, 아무도 사용하지않거나 비어 있는 방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는 그 방 한 칸이 없었다. 잠시 서로 기대거나 입을 맞출 공간이 없었다. 온종일 쏘다니며 느꼈던 미칠 것같은 갈증과 분노를 풀어줄,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으리라고 자신을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짓말을 시작했다.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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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6-16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르디난트의 이 말들...
너무 절절해서 잊히지 않아요!

chika 2023-06-17 08:33   좋아요 1 | URL
이야기가 궁금해서 서둘러 읽다가도 정말 잠시 숨고르고 천천히 읽을수밖에 없는 글이었어요. 오래전 작품이지만 지금 시대상을 보여주는것같은 느낌이. 역시 통찰력이 있는글은 다른거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