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우리나라에 대한 작품도 남겼다. 이 그림은 발로리스라는 프랑스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다. 발로리스는 프랑스 남동쪽 지중해 연안에있는 마을로, 도자기로 유명하다. 피카소는 1948년, 자신의 나이 예순일곱부터 이곳에서 머물기 시작하는데 지친 심신을 도자기를 구우며 달렸다고 한다. 발로리스에는 피카소 박물관이 있다. 옛 수도원이기도 했던박물관 안에는 반원형의 터널이 있고 이 터널에 그려진 <전쟁과 평화〉는한국의 6·25전쟁을 주제로 한다.
6·25전쟁이 한창일 때 그려진 이 그림은 터널의 양쪽으로 나뉘어 있으며 한쪽은 전쟁, 다른 한쪽은 평화를 담았다.
먼저 ‘전쟁‘(353쪽 위) 그림을 보면 괴수가 한 손에는 피 묻은 칼을, 다른손에는 벌레들이 붙어 있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이는 세균전에 대한 공포를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앞으로는 괴물들이 전쟁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를 막아선 인물이 있다. 그가 든 방패에는 평화의 메신저로 불리는 흰 비둘기가 그려져 있고, 들고 있는 창에는 저울이 매달려 있다. 저울은 곧 정의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곡식이 보이는데이는 풍요를 상징한다.
맞은편 벽에 있는 ‘평화‘(353쪽 아래) 그림을 보면 어린아이들과 사람들이 자유롭게 춤을 추고, 피리를 불거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고, 한 아이는 날개 달린 말을뒤에서 편안하게 끌고 가고 있는 등 동심이 살아나는 그림이다. 흥미로운건 하늘에 그려진 문양인데 이 그림을 6·25전쟁으로 해석하면 피카소가 태극무늬를 재해석한 문양으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전쟁과 평화>는 국경을 초월해 전쟁의 아픔을 딛고 이제는 평화로운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더 이상 이 땅에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피카소의 진심을 담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피카소가 태어난 후 20세기 전반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스페인 내전, 2차 세계대전, 6·25전쟁까지 목도한 피카소는 전쟁의잔혹함, 비인간성을 예술로서 고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을 다룬 또 다른 그림도 있다. <전쟁과 평화>보다 1년 먼저 그려진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인데 여기서는 ‘한국‘이라는 단어가제목에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한국에서의 학살>에서 그림 왼쪽을 보면 지금 벌거벗은 모습의 순박한 사람들이 무기 하나 들지 않고 아이를 안고 있거나 체념한 듯 서 있다.
반면, 이들의 반대편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로봇처럼 보이는 무시무시한 학살군이 총을 겨누고 있는 구도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왼쪽에 양민, 오른쪽에 학살자라는 같은 구도를 갖고 있다. 글을 읽을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것처럼 그림 역시 왼쪽에 희생자를 둠으로써 우리의 시선이 희생자에게 먼저 향하게 해 희생자 편에 더 공감할 수 있도록 싸인 구도라고볼 수 있다.
고야의 그림이 학살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피카소의 그림에서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느껴진다. <한국에서의 학살>의 희생자들은 여성과 아이들인 데다가 알몸 상태로 위험과 공포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림 속에는 만삭의 여성이 있는데 당시 임신 중이었던 피카소의 연인 프랑수아 질로Françoise Gilot를 소재로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말 피카소가 만삭인 자신의 연인의 모습을 이 그림에 담은 것이라면 그만큼 6·25전쟁에 깊이 감정 이입했다는 징표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의 공포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6·25전쟁 때 한반도에서 쏜 총탄의 양이 2차 세계대전 때 전 세계에서 봤던 총탄의 양과 비슷했고 6·25전쟁에서는 게르니카 학살 당시의 공습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한번 폭격할 때 900~1,000대 가까이 비행기를 띄웠을 정도로 전쟁이 심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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