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태어나 납치되어 남태평양의 섬에서 전쟁 성노예가 되었다가 전쟁 후에도 고향에서 환대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은 한 위안부의 혼을 달래고자 오키나와 사람들은 위안부가 불렀던 노래에 등장하는 아리랑이라 이름 붙인 위령탑을 세웠다. 그녀와 같은 시기를 살았던 섬 주민은 조카(택시운전사)에게 자신의 기억을 들려주었고 또 조카는 처음 보는 관광객에게 휴대폰이 뜨겁게 달아오를 만큼 번역기를 돌리며 그 기억을 전달하려했다. 자신의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들이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집단 자결했고 또 다른주민들은 그 전에 미군의 총에 맞아 죽은 대대적인 학살과 부상에 살아 남은 생존자임에도 바다 너머 멀리서 온,
자신들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봉기의 외로운 죽음을 슬퍼했고 그녀의 혼을 달래고자 했다. 그들의 삶이 조선인 위안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 P113

어느 순간 책장을 덮듯이 간단하게 종료할수 없다. 그럼에도 읽는다. 문학 어디에도 내가 무슨 일을 하며, 누구와 더불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참으로 끈질기고 낯선 방식으로 들려주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크게 너의 이야기이거나 나의 이야기다.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려면 그 사람도 알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유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를 ‘그럴 수 있었겠구나‘로 전환시키며 공간에 따라 다른 설득력을 필요로 한다.
- P150

기록을 이야기하려 할 때 슬픈 기운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온다. 기록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운명이어서 쓸쓸한 것이 아니다. 기록이 자꾸 권력자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역사교과서는 초·중·고등학교 내내 왕조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조선 왕들의 삶의 흔적들을 기념하는 공간들은 현존하는 건물들을 없애고도 복원을 한다. 지배층의 기록은 이렇게 잘 보존되어 기념되어지는데 왜 노동의 역사와 문화는 다른 이름으로 변경되어 불리우거나 없어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심도직물 굴뚝 터 인근의 소창체험관에서도 강화직물 역사를 말하지만 그 직물 역사의 본질인 직물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역사는 이야기하지 않고 또 새롭게 리모델링해서 인기 있는 카페가 된 조양방직도 강화 직물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하면서도 그 일을한 노동자의 삶은 말하지 않는다. 기념되지 않는 노동은소외되거나 왜곡되거나 꾸며지거나 방치되다가 시간과의 싸움에서 소멸한다.


- P196

기억은 원래의 목적, 그러니깐 있었던 일을 그대로 간직하는 것과는 다른 더 중차대한 목적을 지닌다. 그렇지 않다면야 쓸데없이 어떤 기억들은 강화되고 어떤 기억들은 소멸되며 어떤 기억들은 아주 강렬하면서도 느리게 재방영될 리가 없다. 회한, 추억, 경외, 이해, 공감이 하나의 강을 이루며 어떤 곳은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어 오랫동안 햇살을 비추고 어떤 곳은 쏜살같이 달려 조금도 지체 없이 흘러가도록 마음이 우리의 모든 과거를이리저리 휘저어 속도를 조절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기위하여 나는 또 어떤 사람이며 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희망하게 만들고자.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랑을 가슴에 떠 안고 살아 갈 수는 없다. 그 사람을 떠나 보내기 위해, 그래야 또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이므로 우리는 기억을 왜곡하고 재구성하고 편집하며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낸다. 모두가떠나고 그 기억마저 사라지면 강물이 흘러가듯, 근심도잊힐 것이다. - P210

낯선 길을 걸으며 기록을 읽는다.

떠남은 장소에서 벗어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타성에 젖은 생각이나 익숙한 것들과 이별을 고하는 여행이다. 길을 떠나면 함께 떠난 이로부터 삶을 배우고낯선 곳에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어디로부터 걸어왔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발견이 또 나를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여행길에서의 기록 읽기는 목적이 없다. 현실에 곧바로 쓰임새가 있지는 않지만 이곳이 아닌 저곳을 궁금해하고, 사건의 이유와 결과를 추리하고 싶어하며, 끊임없이 다른 것을 상상하며 읽는다. 이 목적 없는 읽기가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며 삶에 만약을 허용한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삶에 공감하고 연대하며, 그가 살았던 현실과 다른 결말을 꿈꾼다. 동시에 현실에서 어쩌지 못하는 일들에 그때와는 다른 결말을 도모한다. 현실과 다른 결말이 얼마나 마땅하며 아름다운지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솟는다. 결국 떠나 머물든, 나를 얼마나 멀리 보낼 수 있는가의 문제다. 끊임없이 읽으며 문득 떠난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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