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오는 길,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바람도 세차서.. 빨리 집에 올 생각만 하고 있는데.
비에 쫄딱 젖은 여고생 세명이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순간, 나는 우습게도 '돈 달라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다.

"무슨 부탁이예요?"
"다른데는 다 뚫리는데, 여기서만 안돼요.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해서요.. 저희 대신 술 좀 사주시면 안되나요? 수학여행 왔는데요, 제발 부탁할께요. 딱 세병만요...."

* 딱 세병,에서 나는 정말 순진하게도 맥주 세병을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고1이라고 해서, 알콜은 두뇌발달에 그닥 안좋은 영향을 미치니까 왠만하면 마시지 말라고 말을 하면서 은근히 안된다는 뜻을 내보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이미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아버렸다.
딱 세병만 먹고 술 끊을꺼라고 말을 내뱉는 녀석들이었다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그냥 신호등을 건너 집으로 와버렸을텐데, 한 녀석이 그런다.
"정말요, 술 끊는다는 말은 못하고, 사주시는 것만 마시고 더 마시지는 않을꺼예요."
내가 한사람, 한사람에게 따로 부탁을 하면서 술을 많이 모아 마시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 한 말에 정직하게 대답한다.

그러면 세병말고 캔맥주 딱 세개만 마셔라. 그건 니들의 추억을 위해 내가 니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다, 라고 하는 순간 서로의 기준이 다르다는 걸 알아버렸다.
아아, 말투가 좀 저돌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다움을 버리지는 못한 그녀들은 내 말에 어이없는 수준을 넘어 경악하고 만 것이다.
"맥주 세병인 줄 아셨어요? 아이~ 맥주는 저희한테 콜라예요, 콜라~"

.........

.......................

결국 가까운 편의점을 지나쳐서 조금 걸어간 곳에 있는 편의점으로 아이들을 이끌었고, 걸어가는 길에 새로운 타협점을 제시하고 아이들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주는 정말 사줄수 없고, 대신 캔 맥주 큰거로 세 개.
아이들은 자유시간이 끝나가는데 성과없이 시간이 흘러가버릴까봐 서둘러 편의점으로 뛰어들어가 맥주를 꺼내들고 그나마로 만족하며 떠나갔다.

 

난 아이들에게 솔직한 내 마음을 이야기해줬다. 아이들이 아주 조금이라도 술을 마시는 것을 무척 싫어하고, 그렇기때문에 그런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을 이해못하고 아주 싫어했다고. 그런데 내가 지금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니 마음이 편치는 않다고.

그녀들의 추억 한켠에 오늘의 일은 어떻게 남아있게 될까?

** 독일에서는 그녀들의 나이엔 맥주,는 물론 샴페인도 보통의 음료처럼 그냥 마신다고 들었다. 독일애들과 우리는 분명 다르지만 맥주 한 캔 정도는 애교로 봐주고싶은 마음이 드는 걸 어쩌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안돼!'라는 것 보다, 정도껏 허용이 되는 수준에서 학교에 찌들은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여주고 싶은 마음을 딱히 뭐라 설명할수가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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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05-0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녀석들 또 다른 사람 붙잡고 살걸요... ㅎㅎㅎ 저도 좀 있으면 수련회 가는데 아직 1학년이니까 좀 낫겠죠? 머슴애들도 없고.... 지난번에 3학년 애들 데려가니까 여학생들 방에서도 소주가 발견되던데..... ^^

BRINY 2007-05-10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그 정도 되니까, 낯모르는 사람 붙들고 대신 알콜 사달라고 하겠죠?
남자애들은 박스로 사서 숙소 뒤 창문으로 올린다고 하더라구요.

chika 2007-05-11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당에서 하는 캠프에 가서도 애들이 술 마시는걸요....
너무 억압해도 안좋다는 생각에 한모금정도의 허용 후 기습을 해서 술을 빼앗아본적은 있는데... 어린 동생들도 술자리에 끼웠다고 호통을 쳤더니, 지들딴엔 언니랍시고 중학생 동생들에게는 술한모금도 안줬다고 자랑스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