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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여행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 들녘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역시 너무 큰 기대를 가져버리면 만족보다는 실망이 먼저 찾아오는가보다. 선홍색같이 붉은 죄를 암시하는 듯한 표지에서부터 무척 큰 기대감을 가져버린데다가 '만일 라스꼴리니꼬프가 21세기에 나타난다면...'이라는 말에 내 생각은 이미 야간 여행을 잊어버리고 죄와벌로만 쏠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엄청난 책이겠지만 내게는 자꾸만 뭔가를 비교하는 듯 안정적이지 못한 느낌으로 다가와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 자, 이제 라스꼴리니꼬프는 잊고 마크 크라머에게 집중을 해 보자.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쉽게 끝났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나는 나를 통제할 수 없었다.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지만 난 완전히 정상이고 건강하다.
.....
기회가 좋았다.
나는 모든 상황을 지배했지만 나 자신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상황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상황의 희생자다.
암흑만이 존재할 것이다.
다른 것들은 무의미하다." (270-271)
이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단순한 충동적인 살인사건도 아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무기력한 삶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자의 끔찍한 죄악이 그려질뿐이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러한 마크 크라머의 존재가 너무도, 너무도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섬뜩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과연 그가 살인을 어떻게 저지를까를 궁금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도 끔찍하다. 더구나 나는 그를 지켜보면서 과연 그의 가면이 언제 벗겨질 것인가,의 순간을 흥미롭게 즐기려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버렸다. 그 순간의 그 끔찍함을 또 누가 알수있겠는가......
그래, 어쩔 수 없이 다시 라스꼴리니꼬프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는 조금씩 나를 얽어매었고 그에 대한 방어를 할 시간적 여유를 줬다. 하지만 마크 크라머는 느릿느릿 딴청을 부리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내게 비수를 들이대고 있다. 정말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야간 여행은 깜깜한 암흑속에 나를 내팽개치고 있다. 어둠속에서 느껴지는 꼬물거림이 빛이 아니라 선홍색의 붉은 피, 우리의 죄악이라고 속삭여버리고 있다. 나는 야간 여행이 두려워졌다.
마크의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인가?
정녕 암흑은 내일까지 기다려도 괜찮은 것인가?
"세상에는 인간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있어요. 당신도 그건 풀 수 없어요. 당신의 냉소적인 말은 어떤 설명도 안돼요. 저기 좀 보세요."
그녀가 보랏빛 하늘을 가리켰다.
"저 뒤에 뭐가 있는지 당신은 아세요? 그 뒤에는 또 뭐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없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무것도 없다는 건 도대체 어떤 거죠?..."(68-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