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화수목 내리 야근이 이어졌다. 그런데 운 좋게 금요일에 서울에서 하는 모 컨퍼런스에 참석하게 되고, 미처 예매를 못했는데 2시간을 현장대기하다 취소표를 구매할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주어진 최고의 생일선물이었다.
박은옥씨가 무대에 올라 첫 노래를 시작할 때부터 나는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고 2시간 조금 넘는 공연 내내 울고 또 울었다. 공연이 끝난 뒤 '다시, 첫 차를 기다리며' CD를 사 정태춘씨의 사인을 받았다. 이름을 묻는 그에게 잠시 머뭇거리다 한 후배의 이름을 댔다. 작년부터 잠수중인 그녀의 연락처도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울어 퉁퉁 부은 얼굴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공연의 여운을 더 누리고 싶어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서울역까지 밤거리를 걸었다. 그 길에는 온갖 추억이 있었다. 강북삼성병원은 종로에서 집회를 하든, 시청에서 하든, 서울역에서 하든, 부상자를 실어나르기 참 좋은 위치의 병원이다. 서대문경찰서 앞을 지나갈 땐 담당형사의 얼굴도 얼핏 떠올랐지만 끝내 이름은 가물가물했다. 경찰청 앞에 드러누워 연와시위를 하자마자 닭장차에 개처럼 끌려갔던 기억, 운구행렬과 함께 염천교를 지나던 기억, 사복의 눈을 피해 가며 서울역 인파 사이로 스며들던 기억들 위로 정태춘씨의 노래가 흐르고 또 흘렀다.
얼마전 보았던 두 분의 인터뷰도 이것 저것 떠올랐다. 더 이상 내 속에서 노래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도 본 듯 했고, 대추리도,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문화제도 그냥 사적인 거였다고 하셨더랬다. 어찌 보면 쓸쓸한 그 말이 그런데 난 사무치게 좋았다. 운동의 정통성을 따지고 이념을 왈가왈부하기 좋아하는 운동꾼과 달리, 그는 자기가 걸어온 30년의 시간과 인연을 이어가는 것만으로도 운동가인 것이다.
바들바들 떠느라 제대로 걷지도 못했던 강경대 열사 노제로부터 19년, 나의 가장 사랑하는 동지 송현석과 처음 만난 박종철 열사 9주기 추모제로부터 14년, 어느 쪽을 갖다 대도 정태춘씨와 박은옥씨의 30년보다 한참 짧고 어딜 봐도 녹녹하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나이인 줄 알았던 스물아홉보다 지금이 더 외롭고 버겁다는 서른 아홉의 옆지기를 바라보며 내년의 아홉수를 미리 겪고 버둥대왔는데, 이제는 결심이 선다. 옆지기와 동지로 엮여온 14년에 앞으로 적어도 16년은 더 보태자 싶다. 섣불리 희망을 말할 순 없어도 30년을 꼬박 채운 뒤에야 절망을 겪어봤다 말하자.
좀 더 욕심을 내보면 30년을 채운 그 해 인생의 벗들을 초대하고 싶다. 난 한줌 보탬도 못 되었는데 내 뒷바라지 하느라 고역이었을 후배들, 지금은 농사짓는 00과 지금은 계약직인 00과 지금은 잠수중인 00과 지금은 어디서 뭐하는지도 모르는 00들을 남은 16년 동안 열심히 끌어안고 살고 싶다. 두 분의 앵콜송을 들으며 '고맙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쳐보고 싶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한 마디 대신 내 눈물이 진짜 인사였나 보다.
뱀꼬리)
두분의 30년에 헌정하는 전시회 사인 화집을 관객 한 명에게 선물로 주시겠다 했다. 블로그인지 까페인지에서 남편, 애들 떼놓고 가고 싶어하는 아줌마 얘기를 읽었다며, 그런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라 하셨다. 나를 포함해 4명쯤 손들었고, 이제 13개월 애를 가진 여자분이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받은 선물은 어쩌면 그 블로거가 나일지도 모른다는 달콤한 착각. 그래서 난 더 행복했다.